고전총람(산문)/남원고사

(경판)남원고사 - III. 춘향그리기 (2/3)

New-Mountain(새뫼) 2020. 6. 22.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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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춘향이를 보고지고, 잠깐 만나 보고지고

 

겨우 굴어 돌아오니 달빛이 정원에 서려 있고, 등불은 창에 빛나도다. 정신이 산란하고 문 듣고 보는 일이 황홀하여 진정할 길 전혀 없다.

“애고, 이것이 웬일인고? 미친놈이 되겠구나. 내 눈에 춘향의 넋이 올라 어른 뵈는 것이 모두다 춘향이라. 육방 아전 춘향 같고, 방자 통인 춘향 같고, 관노, 사령 춘향 같고, 군노 급창 춘향 같고, 남원부사 춘향 같고, 대부인도 춘향 같고, 날짐승도 춘향 같고, 길짐승도 춘향 같고, 모두 미루어 뵈는 것이 다 춘향이라.”

저녁상을 물려 놓고 하는 말이,

“목이 메어 못 먹겠다.”

방자 불러 묻는 말이,

“네, 이 밥을 아느냐?”

방자 놈 여쭈오되,

“아옵내다.”

“안다 하니, 어찌하나니?”

“쌀로 지은 것이 밥이올시다.”

“어허 어리석은 놈, 밥이면 다 밥이냐? 밥을 지으되, 질지도 되지도 아니하고, 고슬고슬한 중에도 속에 뼈가 없어, 축축하여도 겉물 되지 아니하여야 그야말로 잘 지은 밥이지, 이 밥은 곧 모래밥이로구나. 이 상 물리어라. 먹어도 달지 않고 잠들어도 편안하지 않기가 쉬우리라. 글이나 읽어보자.”

≪천자문≫, ≪유합≫, ≪동몽선습≫, ≪사략≫, ≪통감≫, ≪소학≫, ≪대학≫, ≪예기≫, ≪춘추≫, ≪시전≫, ≪서전≫, ≪맹자≫, ≪논어≫, ≪마사≫, ≪삼략≫ 내어 놓고 산유자 책상에 옥촛대에 불 밝히고 차례로 읽을 적에,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루 황, 집 우, 집 주, 집 가리켜 뵈든 양이 눈에 보이는 듯, 귀에 들리는 듯, 천지 간 만물 중에 오직 사람만이 가장 귀한 중에 더욱 귀하다. 천황씨는 목덕으로 왕이 되었고, 시간은 태양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제가 못 와도 내 가리라.

이십삼 년이라. 처음으로 진대부 위사, 조명, 한건을 제후로 삼았으니, 잘못된 뒤에 아무리 뉘우쳐도 어찌할 수가 없음이라. 원형이정은 자연의 순환법칙으로 하늘이 갖추고 있는 네 가지 덕이요, 인의예지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늘로부터 타고난 벼리이라. 강보부터 못 본 것이 한이로다. 맹자가 양혜왕을 뵈실 때, 왕이 말씀하기를, 천리를 멀리 여기지 않고 오셨으니 천 리로다, 천 리로다. 임 가신 데 천 리로다.

꾸우꾸우 물수리새 모래섬에 정답듯이, 아리따운 아가씨는 군자의 좋은 짝이로다. 이는 우리들을 이름이라. 아무래도 못 읽겠다. 도무지 헛보이고 춘향이만 뵈는구나. 책장마다 춘향이요, 글자마다 춘향이라. 한 자가 두 자 되고, 한 줄이 두 줄이요 자자 줄줄이 다 춘향이라. 이 아니 맹랑한가? 온 책의 글자들이 바로 뵈지 아니하네.

≪천자≫는 감자요, ≪동몽선습≫은 사습이요, ≪사략≫은 화약이요, ≪통감≫은 곶감이요, ≪소학≫은 북학이요, ≪대학≫은 당학이요, ≪맹자≫는 비자요, ≪논어≫는 망둥어로다. ≪시전≫은 딴전이요, ≪유합≫은 찬합이요, ≪강목≫은 깻묵이요, ≪춘추≫는 후추로다.

하늘 천자 큰 대 되고, 따 지자 못 지 되고, 달 월자 눈 목이요, 손 수자 양 양이라. 일천 천자 방패 간이요, 윗 상자 흙 토로다. 옷 의자 밤 야자요, 한 일자 두 이 되고, 또 차자 그 기자라. 집 주는 범 인이요, 할 위자 말 마로다. 근 근자 되 승 되고, 돛 해자 집 가로다. 밭 전자 납 신이요, 두 양자 비 우 되고, 묘할 묘자 이 자 보소. 춘향일시 분명하다.”

책상을 밀쳐놓고, 벽 위의 보검 빼어 들고 사면을 휘두르면서 이매마냥 소리치니,

“춘향이만 보고지고,

잠깐 만나 보고지고, 지금 만나 보고지고,

어둑한 빈 방안에 불 켠듯이 보고지고,

천리타향 옛 친구같이 얼른 만나 보고지고,

구년 홍수에 햇빛같이 훤칠하게 보고지고,

칠년 큰 가뭄에 빗발같이 시원하게 보고지고,

동창에 비치는 달빛같이 반갑게 보고지고,

서산에 노을같이 똑 떨어져 보고지고,

자나깨나 잊지 못해 보고지고,

알뜰히도 보고지고, 살뜰히도 보고지고,

맹랑히도 보고지고, 끔찍이도 보고지고,

조금 만나 보고지고, 잠깐 얻어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소리를 한껏 질러 놓으니 그 소리 동헌까지 들렸구나.

이때 사또 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고 괴이 여겨 통인 불러 분부하되,

“책방에서 글소리는 아니 나고 무엇을 보고지고 하는고? 자세히 알아 오라.”

통인이 급히 가서 묻자오되,

“거 무슨 소리를 그다지 질러 싸오?”

이도령이 겁을 내어 별안간에 생딴전하되,

“삼문 밖에서 술주정 하는 소리 듣고 나에게 물으니 내가 매우 만만하냐?”

통인이 여쭈오되,

“사또께서 도련님 목소리를 친히 듣고 알아 오라 하옵시네다.”

한 번만 더 잡아뗐으면 될 것이로되, 그놈의 속임에 넘겨 하는 말이,

“그래서 똑 들어 계시단 말이냐?”

하며 먹은 값이 있어 속으로 얼른 꾸며 하는 말이,

“소년으로 금방할 때라. 머지않아 과거 되면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쌍개 띄워 보고지고. 내 소원이 이렇기로 보고지고 하였다고 여쭈어라.”

통인이 들어가 그대로 아뢰오니, 사또 곧이 듣고 책방 조낭청에게 하는 말이,

“지난번에 선산을 이장하올 때에 홍천 박 생원이 풍양 고을 산소를 보고,

‘덮어 놓고 내 말대로 여기 쓰라.’

하며,

‘문필봉이 뚜렷이 안산이 되고, 공명봉이 병풍 두른 듯하여 주산이 되었으니, 자손의 문장은 염려 없고 공명이 그치지 아니하리라.’

하고 잡고 권하기에 그 말대로 그 산소에 뫼셨더니, 이제야 산음인 줄 황연히 깨닫겠네. 그 아이가 기특한 줄이 한갓 남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잠 잘 줄 잊고 한사코 글만 하려 하니 아무래도 문장은 염려없어.”

하며 못내 사랑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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