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총람(산문)/남원고사

(경판)남원고사 - II. 첫 만남 (3/4)

New-Mountain(새뫼) 2020. 6. 22.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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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천정연분 우리 둘이 백년해로 하여 보자

 

춘향이 하릴없어 따라온다. 치마꼬리 뒤 가닥을 얼싸안아 휘어다가 가슴 한복판에 떡 붙이고 옥 같은 걸음걸이와 꽃 같은 몸으로 천천히 걸어갈 제, 돌 많은 험한 산길과 한 가닥 깊은 비낀 길로 찾아가니 한단에서의 수릉의 걸음으로, 월나라 사람들 사이에서의 서시의 걸음으로, 흰 모래밭에 금자라 걸음으로, 양지 마당에 씨암탉의 걸음으로, 대명전 대들보에 명마기의 걸음으로, 광풍에 나비 놀 듯, 물속에 잉어 놀 듯 가만가만 사뿐싸뿐 걸어와서 광한루에 다다르니, 방자 놈 여쭈오되,

“춘향이 현신 아뢰오.”

하니, 이때 이도령이 눈꼴이 다 틀리고 정신이 정처 없이 헤매어 떠돌다가 두 다리를 잔득 꼬고, 사리와 체면이 무궁하여 기다리는 마음이 큰 가뭄 칠 년에 비 바라듯, 한수대전에서 화살 바라듯, 심신이 날아오르더니 이 소리를 듣고 별생각이 없는 사이에 하는 말이,

“방자야, 하정이란 말이 될 말이며, 현신이란 말이 도리에 어긋나는구나. 어서 바삐 오르소서 여쭈어라.”

춘향이 하릴없이 당 위에 올라 절하여 뵙는 거동, 서왕모가 요지연에 주목왕께 뵈옵는 듯, 서미인이 오왕 궁중에 범소백께 뵈옵는 듯, 얼굴 모습과 행동거지가 기묘하고 부끄러워하는 옥 같은 태도가 뛰어난지라.

봄 산의 누에나방처럼 아름다운 초승달은 나직하고, 가을 물의 눈동자로 변해가며 나직이 나아가 아리땁게 절하니, 이도령이 매우 바쁜 중에 일어 맞아 답례 후, 자리를 정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무릉도화 일천 점이 다투어 붉었는 듯, 요지의 다람화 일만 가지 활짝 피어난 듯, 금화분 모란이 담백하게 피어나 봄철을 자랑하는 듯, 연못에 흰 연꽃 한 송이 가랑비에 반기는 듯, 아름다운 달빛이 갓 생겨날 제 잔 구름이 자취가 없고, 연꽃이 반쯤 피었는데, 상서로운 안개는 짙어 가는구나.

멀리 있는 나무의 푸른 연기는 묵은 안개에 그 빛깔이 매우 푸르고, 은하수같이 맑은 눈빛은 눈썹 아래가 맑았어라. 바람은 따뜻한데 눈은 차가운데, 버들은 시기하고 매화는 교태스럽고, 사람을 홀리는 듯 온갖 아름다운 태도는 천 가지로 교태롭고 요염하도다. 먼 포구가 상쾌하고 깨끗하고 봄 산에는 들매화로다. 일천 자태와 일만 고움이 짐짓 만고에 짝없는 나라에서 제일가는 미인이라.

이도령이 한 번 보매 정신이 황홀하고 심신이 녹는 듯하여 하는 말이,

“남 홀리게 생겼다. 남의 뼈 빼게 생겼구나. 남의 간장 녹이게 생겼다. 수려하고 찬란하여 내 눈을 어리우고 천연 자약하여 내 간장이 스는구나. 꽃다운 얼굴과 고운 자태는 향기로워 나의 정신 다 빼놓고, 버드나무 같은 기질이 섬세하여 비단옷을 못 이기는구나. 그래 성명은 뉘라 하며, 나이는 얼마나 하뇨?”

춘향이 팔 자 눈썹 찡그리고 붉은 입술과 흰 이를 잠깐 열어 나직이 여쭈오되,

“소녀의 성은 김이요, 이름은 춘향이요, 나이는 이팔 열여섯이로소이다.”

이도령 이른 말이,

“신통하다. 네 나이 열여덟이라 하니, 나의 사사 십육 열여섯과 꼭 같이 동갑이로구나.”

또 묻되,

“태어난 달과 태어난 시간은 어느 때니?”

춘향이 대답하되,

“하사월 초팔일 축시로소이다.”

“어허, 공교하다. 눈 무섭다, 방자야. 네가 아까 수군수군하더니 내 나와 생일을 다 일러바쳤나 보구나. 그렇지 않으면 이럴 일이 있느냐?

대체로 신통 기이하다. 다 맞아 오다가 똑 시만 틀렸으니, 나 태어날 제 불수산을 급히 다려 거꾸로 먹였다면 사주 동갑될 뻔하다. 어찌 반갑지 아니며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 어와, 네 인물 네 태도는 세상에 둘이 없음이라. 절묘하고 어여쁘다. 매화 월미에 두루미도 같고, 줄에 앉은 초록제비도 같구나.

무한한 너의 인물 상나라 임금이라도 한 번 보면 달기가 무색할 것이요, 하나라 걸왕이 너를 보면 말희도 흙이로다. 항왕이 너를 보면 우미인도 못생긴 얼굴이요, 여포가 너를 보면 초선이도 또한 돌이로다. 당명황이 너를 보면 양귀비도 한데 되고, 진후주가 너를 보면 장려화가 용납하랴. 일월이 빛나지 않고 온갖 꽃이 색을 잃었도다.

연분 있어 이러한지 인연 있어 이러한지, 너 살아야 나도 살고 나 살아야 네 살리라. 예부터 왕과공도 미인에 반하면 나라를 기울게 하고, 현자라도 몸이 빠져든다 일렀으니, 나 같은 나이 어린 무리야 일러 무엇할까? 우리 둘이 인연 맺어 백년해로 하려 하니 잡말 말고 날 섬겨라. 신통 맹랑하고 뚫고 샐 데 없는 연분이라. 하늘이 마련하고 귀신이 지시하온 하늘이 맺은 배필이라.

나도 서울 있을 때에 삼월에 봄바람 불어 꽃이 피고 버들이 새로 돋은 때와 구월에 노란 국화 피고 단풍이 들 때, 꽃 피는 아침과 달 밝은 저녁 빈 날 없이 술집과 기생집에 일을 삼아 술동이 가득한 향긋한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하고 미인과 여자에 빠져들어 맑은 노래와 교묘한 춤으로 희롱할 제,

무한 호강하였으니 연지분으로 색을 내고, 교태를 머금은 고운 모양 하나둘이 아니로되, 천만뜻밖에 너를 보니 여자 중 군자이며 꽃 중에 제일이라. 탁문군의 거문고에 월하노인의 아름다움 인연 맺어 두고 백년 기약 우리 둘이 정하리라.”

춘향이 이 말 듣고 은근한 눈빛을 잠깐 들어 이도령 살펴보니, 이 또한 만고의 영웅호걸이라. 넓은 미간과 큰 입, 활달하게 큰 도량, 언어로 수작하는 거동 한나라 후손의 기상이요, 당 현종의 풍채라. 이름이 한 나라에 널리 퍼져 재상 되어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이요, 풍채가 좋고 의기가 당당하여, 이적선의 후예이라. 두자미가 취해서 양주를 지날 때 여인들이 수레에 귤을 던졌다는 그의 풍채를 웃을 것이요, 적벽강 위에서 위나라 군대가 낙담하게 하던 주랑의 위엄과 풍채를 뛰어 넘을지라.

춘향이 내심에 탄복하고 우러러 공경하고 부러워함을 마지아니하나, 말과 얼굴빛에 나타내지 아니하고 앉았던 자리에서 물러나며 답하기를,

“소첩이 비록 창가의 천한 기생이요, 시골뜨기의 무딘 소견이나, 마음인즉 북극 천문에 턱을 걸어 결단코 남의 첩이 되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고, 담장의 꽃에 나비가 찾듯 기생을 찾는 한량을 원하지 않으오니, 말씀 간절하오시나 분부 시행하지 못하겠소.”

이도령 이른 말이,

“중매를 놓아 혼사를 의논하는데 예법을 갖춰 혼인을 치루고 수레 백 량으로 맞이하지는 못하나마, 사돈 관계를 맺고 납빙에 백년해로는 정령 하리니, 이도 또한 하늘이 정한 연분이라. 겸손히 사양하여 예의를 시작하렴이냐? 잡말 말고 허락하라.”

춘향이 또 여쭈오되,

“소첩의 뜻을 함부로 꺾어 마음대로 인연을 못 맺사오리이다. 첩의 원하는 바는 요임금 때의 소부 허유 같은 사람이나, 월나라 범소백 같은 사람이나, 그렇지 아니면 한광무제 때 엄자릉 같은 이나, 당나라 이광필 같은 이나, 진나라 사안석 같은 이나, 삼국시대 주공근 같은 이나, 송나라 문천상 같은 이나, 이런 사람 아니오면 대원수 도장 비껴차고 금단에 높이 앉아 천만 군대와 병마를 지휘 간에 넣어두고 앉았다가 일어나고 나아가고 물러서옵시는 대장 낭군을 맞는 소원이오니, 만일 그렇지 아니하오면 백골이 먼지가 되어도 빈방에서 홀로 지내리이다.”

이도령 이른 말이,

“너는 어떤 집 계집아이기에 장부의 간장을 다 녹이나니, 네 뜻이 그러하면 나 같은 사람은 허락받지도 못할쏘냐? 그런 사람 의외로다. 우리 둘이 즐겁게 총각과 처녀로 놀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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