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시; 23년 이후

이제 나는

New-Mountain(새뫼) 2023. 4. 6.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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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아내가 더 이상 시를 쓰지 말라 한다.

그 나이에 나올 수 있는 말이란

궁상맞거나 구질구질하거나 그거나 저거나

살고 살다가 남은 찌끄러기뿐.

거기에 특별한 게 남았겠느냐고.

그걸 굳이 글로 남겨 뭣하겠느냐고.

 

그런 말이 서운한데, 서운하기는 한데

그닥 틀린 말이 아니기에 쉽게 수긍한다.

달리 할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쓰기 싫었는데 억지로 써야 한다거나

쓸 게 없었는데 짜내어 써야 한다거나

하였는데, 외려 고마운 말이 아니겠나.

 

그래 말자, 그래 말자, 그래 말자.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먼 추억들이나

남기고 싶은 감상의 파편들이나

그런 것들을 단어로 치환하고 글로 엮어

또다시 삶의 자취로 남겨둔들

거치적거리고 불편할 뿐이겠다.

 

그런데 오십하고도 육십에 가까운데

그저 덮어버리기에는 뭔가 아쉬운지라

따져보면 빛나는 세월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흠결 나는 시간도 아니었기에

빛과 흠결은 시간의 연역이 되고

살아온 게 빛과 흠결의 귀납이 되어

예까지 이른 게 아니더냐.

 

흠결이 없었기에 빛이 없었을 것이고

빛이 없었으니 흠결이 없었을 것이며

아니 빛이 없는 만큼 흠결이 있었던지

그것도 아니라면 흠결이 없는 것이 빛이었던지

그러한 것들이 꼬리를 물어가며

예까지 긴 세월을 지탱한 것이 아니더냐.

 

그러니 그저 말자, 그저 말자, 그저 말자.

하기에는, 이제 나에게는 아쉬운지라.

그저 덮어버리자니 아쉬운지라.

시간에 덮였다가, 세월에 덮였다가

게서 삭아가다가 제 스스로

연민하는 안타까움만이 남을 것 같기에

 

아내가 더 이상 시를 쓰지 말라는데,

이 나이에 나올 수 있는 말이란

궁상맞거나 구질구질하거나 그거나 저거나

살고 살다가 남은 찌끄러기

그래, 시를 쓰지 않으면 될 것이라.

그걸 시가 아닌 시로 쓰면 될 것이라.

 

(2023.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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