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론(政論)
허균(許筠)
예부터 제왕(帝王)이 나라를 다스림에 혼자서 정치하지는 않았다. 반드시 보상(輔相)-1하는 신하가 그를 도와주었다. 보상해 주는 사람으로 적합한 사람만 얻으면 천하 국가의 일을 적의하게 다스릴 수 있었다. 이런 것으로 매우 뚜렷이 나타난 것으로는,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이 임금이 되었을 때에는 반드시 고요(皐陶)ㆍ직(稷)ㆍ익(益)ㆍ이윤(伊尹) 등의 보좌가 있었다. 그런 다음에 옹희(雍熙)-2의 다스림을 이룰 수 있었으니, 하물며 근래의 세상에서야 말해 무엇 하랴.
自古帝王之爲政也。非獨自爲政也。必以輔相之臣以助之。輔相者得其人。則天下國家之事。可得而理也。此甚較著者。堯舜禹湯之爲君。必有皐,稷,益,尹之佐。然後可致雍煕之治。
후세의 임금은 비록 잘 다스리기를 원하던 사람은 있었지만 항상 보좌해 줄 적당한 사람이 없음을 걱정하였다. 신하된 사람으로도 비록 옛사람과 같은 포부를 지니고는 더러 어진 임금을 만나지 못함을 걱정하고 더러는 그가 끝까지 쓰이지 못함을 염려하였다. 그러고 보면 정치가 예전과 같지 못하고 다스림이 날이 갈수록 저속해짐은 괴상하게 여길 것도 없으니, 어찌 백성들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況輓近世耶後世之君。雖有願治者。而恒患輔佐之無其人。爲臣者。雖抱負如古人。而或患不遇。或患其用不終。無怪乎政之不古而治日益卑。豈非生民之不幸耶。
우리나라가 비록 궁벽한 곳의 작은 나라이지만 임금과 신하들이 있고 백성과 사직(社稷)도 있다. 위정자(爲政者)가 참으로 삼대(三代)를 본받는다면 그 시절의 옹희(雍熙)의 덕화(德化)에 도달할 수 있으리니,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
我國雖僻小。有君臣焉有民社焉。爲政者信法三代。則其致雍煕之化也。奚難哉。
영조(英廟)-3가 (黃喜)와 허조(許稠)를 임용했던 것을 본다면 알 수 있다. 저 황희와 허조는 유자(儒者)가 아니었고 재능 있는 신하도 아니었다. 오직 묵직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임금이 잘못하는 일에까지 그냥 따르기만 하지는 않는 정도의 사람이었다. 세종 당시만 하더라도 국가의 윤곽이 완성되지 못하여 국사(國事)를 대부분 개혁할 수도 있었는데, 두 신하는 왕도(王道)로써 힘쓰지 않고 다만 너그럽게 진정(鎭定)시키는 것만을 최고로 여겼었다. 이래서야 어떻게 임금의 정사를 도와 익(益)ㆍ직(稷)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겠는가?
嘗觀英廟之任黃,許。可知也已。彼黃,許者。非儒者也。非才臣也。特以木訥剛毅。不面從君違者也。當英廟時。締構未完。國事多可更革。而二臣者。不勉以王道。徒以雅鎭爲高。是豈能贊襄吁兪。如益,稷者否乎。
그러나 나라가 신뢰받고 지금까지 유지되었던 것은 모두 세종(世宗)의 힘이었으며, 두 신하가 보좌의 역할을 했었노라고 말해진다. 만약 고요ㆍ익ㆍ직 같은 분들이 보좌하여 정치를 하였다면 그 공렬(功烈)이 왜 이 정도로 낮으랴.
然國賴以維持。至于今者。皆英廟力而稱二臣爲張佐也。使如皐陶,益,稷者輔而爲政。則其功烈豈如是卑哉。
아! 선왕(先王)-4의 정치는 밝았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에 보좌했던 신하들이야 많기도 했지만 애호하며 서로 믿었던 사람은 이이(李珥)였으며, 전권(專權)을 맡기고 일하도록 책임 준 사람은 류성룡(柳成龍)이었다. 두 분 신하는 역시 유자(儒者)이자 재능 있는 신하였다고 말할 만하였다. 그들에게 임무를 맡기고 일의 성취를 독책하던 뜻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끝내 그들의 포부를 펴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재능이 미치지 못함이 아니었고 방해하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噫。先王之政。可謂明矣。當時輔佐之臣。不爲不多。其眷而相信者。李珥也。其任專而責以事者。柳成龍也。二臣者。亦可謂儒者而材臣也。其委任責成之意。非不至矣。而卒莫之展者。非其才不逮也。物有以害之也。
류성룡은 어지럽기 짝이 없던 임진왜란 때를 당해서 그의 정력과 지혜를 다했으나, 더러는 건져냈고 더러는 막혔던 게 그 당시 형편의 편리함과 편리하지 못함이 있어서였다. 그가 이순신(李舜臣)을 등용한 한 건(件)은 바로 나라를 중흥시킨 큰 기틀이었다. 그런데 류성룡을 공격하던 사람들이 이순신까지도 싸잡아 죄주었으니, 그 해가 나라에 미침이 그 이상 더 심할 수 없었다.
成龍當恇攘日。其竭精悉智。而或濟或閼者。時勢之有便否也。其用李舜臣一着。乃中興大機。而攻成龍者。幷罪舜臣。其害于國。亦不勝繁也。
이이가 곤욕을 당했던 것으로는, 의론하던 사람들이, 공안(貢案)-5을 고치려 했음은 불편했다느니, 여러 군(郡)에 액외병(額外兵)-6을 둠은 부당하다느니, 곡식을 바치고 관작을 제수(除授)받음은 마땅치 못하다느니, 서얼(庶孼)에게 벼슬길을 열어주자 함도 옳지 못하다느니, 성(城)과 보(堡)를 다시 쌓자는 것도 합당치 못하다느니 했던 때문이었다. 병란(兵亂)을 치른 뒤에 왜적을 막고 백성을 편하게 하려고 부지런히 강구하던 방책으로는 위의 다섯 가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珥之困也。議者以爲更貢案不便也。列邑置額外兵不當也。輸粟授爵不宜也。通庶孼不可也。更尋城堡不合也。逮兵後。朝廷孜孜講磨。求所以抗賊便民者。不出此五者。
왜 그랬을까? 대체로 이이가 앞날을 내다본 것은 수십 년 전에 이미 명확하였다. 몇 가지의 시행은 평상시에는 구차스러운 일임을 알았지만 환난을 생각하고 예방하는 데에는 경장(更張)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때문에 뭇 사람들의 꺼려함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말했었다.
何也。蓋珥之先見。已燭於數十年之前。雖知數者之施。在平日爲苟簡。而思患預防。不得不更張故也。犯衆忌而敢言之。
그러나 속된 선비들은 좁은 소견에 이끌려서 소란하게 된다느니, 타당하지 않다 하여 요란하게 차질을 내었으니 당연히 그의 지위도 허용되지 못했고 나라도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논의하는 자들은 온 힘을 다하여 이이를 배척하면서 앞의 다섯 가지 일을 받들어 시행하는데 오히려 힘을 다하려 않으니 이거야말로 매우 가소로운 짓이다.
俗士攣於拘見。以爲擾以爲不妥。紛然惎齕。宜其身之不容。而國之不可爲也。然今之論者。力斥珥無遺力。而奉行此五者猶不及焉。是大可笑也。
선왕(先王)이 온갖 정력으로 다스림을 도모하던 시절에, 두 분 신하가 조용하게 그들이 쌓아 둔 포부를 펼 수 있어서, 위에서는 따르고 아래에서는 받들어 딴 논의들이 없었더라면 비록 희운(熙運)-7으로 회복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역시 외적의 침략은 막아낼 수 있었으리라.
先王勵精圖理之日。二臣者從容得展其蘊。而上從下奉無異議。則雖不必其回煕運。而亦可捍外侮矣。
그런데 지껄여대는 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쪼아대며, 기필코 가로막아 배척하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설사 황희나 허조가 그러한 처지에 놓였더라면, 반드시 두 성씨(姓氏)-8을 섬겼다고 지목받아서 하루인들 의정부(議政府)에 편안히 있을 수 없도록 하였을 것이니, 어떻게 세종 때처럼 옹용(雍容)-9하고 아진(雅鎭)-10한 일을 하였으랴.
嘵嘵者蠭起啄之。必遏斥乃已。倘使喜稠當之。則必指爲事二姓者而俾不得一日安於廊廟。安得雍容雅鎭如英廟日也。
후세에 훌륭한 다스림이 없었던 것은 모두 이런 데에서 연유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밝음으로써 아랫사람을 살피고, 믿음으로써 신하에게 맡긴다.”
두 가지면 다할 수 있다고 하겠는데, 그 결과야 굳은 의지와 결단에서만 나올 뿐이다.
後世之無善治者。率坐于是也。然則如之何而可。
曰明以察其下。信以任其臣。
斯二者足以盡之。而其終執與斷而已矣。
1) 대신을 거느리며 임금을 도와 나라를 다스림.
2) 천하가 태평하게 다스려짐.
3) 세종 대왕
4) 선조(宣祖)
5) 공물(貢物)의 품목과 수량을 기록하던 문부(文簿).
6) 가외군사
7) 태평성대의 운세
8) 고려와 조선
9) 마음이 화락하고 조용함.
10) 바르고 규범에 맞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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