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록론(厚祿論)
허균(許筠)
예기(禮記)에,
“충신(忠信)으로 대접(待接)하고 녹(祿)을 후(厚)하게 해줌은 선비를 권장하려는 까닭이다.”
하였으니, 그 말이야말로 의미심장하다. 남의 윗사람이 된 자가 그 아랫사람에게 녹을 후하게 내려주지 않는다면, 선비된 사람들이 어떻게 권장되어서 청렴한 정신을 길러서 이익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나가는 짓이 없게 하랴.
記曰。
忠信重祿。所以勸士也。
旨哉言乎。爲人上者不爲祿厚賜其下。則爲士者奚所勸而養其廉。無冒恥于利態耶。
이 때문에 옛날 군자(君子)로 나라에 벼슬하던 사람은 녹이 풍족하여 욕구를 채웠으니, 봉급은 아내와 자식을 돌보기에 충분하였다. 그래서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지 않고, 뇌물 받는 행위 없이도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양육하는 물품이 저절로 넉넉하였다. 여유만만하게 한가하고 편안한 틈을 내어 그가 쌓아 둔 포부를 펼 수 있어, 공 없이 녹만 먹는다는 나무람을 면하도록 하였고, 염치가 분명히 세워져 풍교(風敎)-1를 돈독하게 하였다. 옛날의 훌륭했던 시대에는 대개 이러한 제도를 시행하였다.
是故古之君子仕於王國者。祿足而供其求。俸入足以芘妻孥。不與民爭利。不行苞苴。而事育之具自裕。得以優遊間佚。展布其所蘊。俾免伐檀之刺。而廉勵恥立。風敎以之敦。古之盛世。蓋用此也。
비록 그렇더라도 군자라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고 제 몸만 이롭게 하는 자들이 너무도 많다. 임금이 나를 후하게 대해 주시니 내가 임금에게 보답하는 바는 어떻게 해야 마땅할까? 그런데, 부추[薤] 뽑으라는 훈계의 말은 들리지 않고 황금이나 쌓아 둔다는 나무람만 여러 차례 치솟았다. 자기의 말[馬] 채찍 꾸미기는 그만두지 않으면서 보궤(簠簋)-2는 꾸밈이 없으니, 선비들의 자신을 대우함이 낮고 옅기만 하다.
雖然。君子者不必多。而利己者滔滔焉。上之所以待我者厚矣。我之所以報上者宜如何。而拔薤之訓未聞。匱金之誚屢騰。鞭鞾不已。簠簋無飾。士之所自待者吁亦淺矣。
주역(周易)에,
“기름을 본다[觀頤]는 것은 자신이 남 기르는 것을 봄이요,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한다[自求口實]는 것은 자신의 길러짐을 봄이다.”
하였는데, 따뜻하고 배부르기만 생각하고, 불쑥 일어나 곡식 창고와 재물 부대에 종사하며,
“너의 명지(明智)를 버려두고 나의 욕심어린 모양을 본다.”
하는 것은 군자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다.
易曰
觀頤。觀其自養也。自求口實觀其自養也。
以溫飽爲志。蹶蹶然從事於庾粟囊帛。
舍爾靈龜。觀我朶頤。
非所望於君子也。
옛날의 제도를 상고할 수 없으나 원사(原思)가 읍재(邑宰)가 되었을 때에 공자(孔子)는 곡식 9백을 주었고, 맹자(孟子)가 제(齊)나라 경(卿)이 되자 녹(祿)은 역시 10만이었다. 제(齊)와 노(魯)는 제후의 나라였지만 녹을 후하게 주고 염치를 기르게 했던 것이 이와 같았다면, 삼대(三代) 때의 녹이 많았음을 알 만하다.
古制不可攷已。原思爲宰。孔子與之粟九百。孟子爲齊卿。祿亦十萬。齊魯以侯國而其厚祿養廉者如是。則三代之盛。可知也。
한(韓)나라의 녹봉도 역시 후했었고, 하급 관리들을 가장 우대하였으니 역시 잘한 일이었다. 송(宋)나라도 양현(養賢)-3에 더욱 유의하여 봉급을 모두에게 충실하게 주었고, 금전(金錢)도 역시 충실히 부여하였다. 하급 관리를 우대해서 청렴한 정신이 세워졌고, 외관(外官)을 우대하자 외관을 경시하는 걱정이 없어지고, 치사(致仕)-4한 늙은이를 우대하니, 어진 이를 대우하고 기구(耆舊)-5를 돈수(敦壽)하는 뜻이 독실(篤實)하였다.
漢祿亦重。而最優小吏。亦頗得之。宋則尤留意於養賢。俸皆實給。而錢亦實賦。優小吏而廉節立矣。優外官而輕外之患除矣。優致仕故老而待賢敦舊之意篤矣。
역대의 연혁(沿革)이 같지는 않으나 녹을 후하게 주어서 선비들을 권장했음은 같았다.
歷代沿革不同。而均之爲重祿而勸士也。
지금 우리나라에는, 관리들의 녹은 줄이면서 그들의 청렴만을 독책하고 있으니 천하에 이러한 이치는 없다. 신라 때 1품 벼슬의 녹은 1년에 3백이었고, 왕씨(王氏)-6는 그 절반이었는데, 대체로 동경(東京)-7보다도 관직을 많이 설치해서였다. 조선에 와서는 관직이 세 곱으로 늘어나 녹을 깎지 않을 수가 없었다. 3분의 2를 깎으니 봉급은 모자라기만 했다. 대부(大夫)나 선비마다 섬기고 양육함에 곤궁하여 청렴할 겨를이 없음도 당연하다.
今我則節其祿而責其廉。天下無是理矣。新羅之祿。一品則一年四百。王氏半之。蓋以官濫於東京也。至我朝。濫者三倍。而祿不得不削。削三之二。而俸則缺焉。大夫士困於事育。宜其不暇廉也。
임진란 뒤에는 달마다 주던 요(料)를 다시 녹(祿)을 받도록 설계함에 이르러서는 또 예전의 절반으로 줄였고, 그 말[斗]의 수량도 줄이니 받는 사람은 열흘도 지탱할 수 없었다. 그들이 받드는 제사(祭祀)의 규모와, 생존한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이를 장송할 비품들은 평상시보다 줄인 것이 없고 의복과 말[馬]를 꾸미고 음식은 사치스러워 절제하지 못하여 공덕 높던 祖宗(조종)-8때보다 열 배나 된다.
亂後以月料之。及復設祿。則又減舊之半。而剋其斗數。受者不能支旬朔。其奉享之規。養生送死之具。視平時無損。而華衣怒馬腆食侈而不節。十倍於祖宗。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연약한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고, 마지못하여 뇌물까지 받는다. 이래서 사유(四維)-9가 펴지지 못하고, 풍교(風敎)는 날로 야박해지건만, 사대부(士大夫)들은 태평하게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백성들은 윗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뇌물을 바쳐서 관직을 얻고 죄를 가볍게 하는 자들이 연달아 서있는데, 이건 모두 선비를 권장하는 제도를 시행할 수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 그런 것 또한 가슴 아픈 일이다.
日不獲已。與小民爭利。又不得已受其饋賄。而四維不張。風敎日偸。士夫恬不知愧。民不畏其上。賂而得爵緩罪者比踵。此皆不能行勸士之道而然也。其亦傷矣。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제할 수 있을까?
헛되이 들어가는 관비(官費)를 줄이고 윗사람이 공손하고 검소한 태도로써 통솔한다면 되리라고 여겨진다.
然則何以救之。曰省宂官費。而上率以恭儉。則斯可也已
1) 교육이나 정치의 힘으로 풍습을 잘 교화함.
2) 제향(祭享) 때에, 기장과 피를 담는 그릇.
3) 뛰어난 인재를 키움.
4)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
5) 늙은이
6) 고려
7) 경주로 신라를 가리킴.
8) 임금
9) 나라를 다스리는 데 지켜야 할 네 가지 원칙. 곧 예(禮)ㆍ의(義)ㆍ염(廉)ㆍ치(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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