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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李鈺)의 "이언(俚諺)"의 '이언인(俚諺引)'

New-Mountain(새뫼) 2018. 2. 13.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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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언(俚諺) ; 시골말로 시를 짓다 >

-  이언인(俚諺引) ; 시골말로 시를 짓는 까닭은

이옥(李鈺, 1760~1812)

신영산 옮김

 

 

 

- 첫 번째 비난(一難)

 

어떤 사람이 내게 물었다.

“그대의 이언(俚諺)은 무엇하러 지은 것인가? 그대는 어째서 국풍(國風)이나 악부(樂府), 사곡(詞曲) 같은 작품을 짓지 않고서 꼭 이 이언을 지어야만 했는가?”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것은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따로 주관하는 자가 있어서 그렇게 시킨 것이니, 내가 어찌 국풍, 악부, 사곡 같은 시를 짓고 나의 이언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국풍이 국풍된 까닭을 알고, 악부가 악부된 까닭을 알며, 사곡이 국풍이나 악부가 되지 않고 사곡 된 까닭을 알면 내가 이언을 지은 까닭 또한 알 것이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저 국풍, 악부, 사곡과 그대의 이언이라는 것들이 모두 그 작자의 지은 바가 아니란 말인가?”

 

내가 대답했다.

“작가가 어찌 감히 그것들을 짓겠는가? 작자로 하여금 그렇게 짓도록 만든 까닭이 그것들을 지은 것이다. 이는 누구인가? 천지만물이 바로 그것이다. 천지만물에는 천지만물의 성질이 있고, 천지만물의 형상이 있으며, 천지만물의 빛깔이 있고, 천지만물의 소리가 있다.

이를 묶어서 살펴보면 천지만물은 하나의 천지만물이지만, 나누어서 말하자면 천지만물은 각기 서로 다른 천지만물들이다. 바람 부는 숲의 낙화가 비 오듯이 어지러이 흩날려 쌓이되, 그것을 분별하여 살펴보면 붉은 꽃잎은 붉고 흰 꽃잎은 희다.

하늘나라의 음악이 장엄하게 어울려 울리되, 자세히 들어보면 현악기는 현악기의 소리를 내고, 대나무 악기는 대나무 악기의 소리를 내서, 만물이 제각각의 빛깔과 제각각의 소리를 가지고 있다.

한 벌의 온전한 시는 자연으로부터 산출되는 것으로, 팔괘(八卦)를 그리고 서계(書契)를 만들기도 전에 이미 갖추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국풍, 악부, 사곡을 지은 사람이 감히 스스로 한 일이라 자임(自任)하지 못하고, 또한 감히 서로 도습(蹈襲)하여 본뜨지 못하는 까닭이다.

천지만물과 작자 사이의 관계는 꿈을 통하여 실상을 드러내고 키[箕]를 빌어서 정(情)을 통달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천지만물이 어떤 사람을 빌어서 시가 되어 나오려 할 때에는 물 흐르듯이 귀와 눈을 따라 들어가 단전(丹田) 위에 머무르다가 줄줄이 잇달아 입과 손끝으로 따라 나오는 것이니, 이는 그 사람의 의지적 행위가 아니다.

예컨대 이는 석가모니가 우연히 공작새의 입을 통해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공작의 꽁무니로 다시 나온 것과 같다. 나는 모르겠거니와, 이는 석가모니의 석가모니인가 공작새의 석가모니인가? 이런 까닭으로 그것을 지은 사람은 천지만물의 통역관이며, 또한 천지만물의 화가일 따름이다.

역관이 남의 말을 통역할 때 나하추(納哈出)의 말을 통역하면 북번(北蕃)의 말이 되고, 마테오리치(利瑪竇)의 말을 통역하면 서양의 말이 되는 것이니, 그 소리가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감히 바꾸고 고칠 수는 없는 것이다. 화공(畵工)이 사람의 형상을 그림에 있어서, 맹상군(孟嘗君)을 그린다면 아담하게 작은 모습을 그릴 터이고, 거무패(巨無覇)를 그린다면 곧 훤칠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그리게 된다. 그 모습이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해서 감히 바꾸는 바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시를 짓는 이치가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대체로 논하건대, 만물이란 만 가지 물건이니 하나로 묶을 수 없다. 하나의 하늘이라 해도 서로 같은 하늘이 하루도 없으며, 하나의 땅이라 해도 한 곳도 서로 닮은 땅이 없다. 이는 마치 천만 사람이 각기 저마다 천만 가지 이름을 가졌고, 일년 삼백일에 또 각기 삼백 가지 서로 다른 일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역대로 하(夏)․은(殷)․주(周)․한(漢)․진(晉)․송(宋)․제(齊)․양(梁)․진(陳)․수(隋)․당(唐)․송(宋)․원(元)을 내려왔지만, 한 시대는 또 다른 한 시대와 같지 않아서 각기 저마다 한 시대의 시가 있었다.

열국(列國)을 보아도 주(周)․소(召)․패(邶)․용(鄘)․위(衛)․정(鄭)․제(齊)․위(魏)․당(唐)․진(秦)․진(陳)이 있었으되, 한 나라는 또 다른 한 나라와 같지 않아서 각기 저마다 한 나라의 시가 있었다. 삼십 년이면 세상이 변하고 백 리를 가면 풍속이 같지 않다. 어찌하여 대청 건륭(乾隆) 연간(年間)에 태어나 조선 한양성에 살면서 짧은 목을 길게 늘이고 가는 눈을 크게 부릅떠서 망령되이 국풍, 악부, 사곡 짓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가?

나는 이미 이와 같음을 보았거니와, 이러하다면 나는 진실로 내 자의에 따라 짓는 바가 있을 수 없다. 오직 저 유구한 천지만물은 건륭 연간이라 해서 혹 하루라도 있지 않을 때가 없으며, 오직 저 다채로운 모습의 천지만물은 한양성 아래에서도 혹 한 곳이나마 따르지 않는 곳이 없다.

또한 나의 귀, 눈, 입, 손도 내가 용렬할지언정 혹 한 부분이라도 옛사람에 비해서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것이 또한 내가 작품을 짓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또한 내가 다만 이언을 짓고 감히 ‘도요(桃夭)’, ‘갈담(葛覃)’ 같은 국풍류 작품을 짓지 못하며, ‘주로(朱鷺)’와 ‘사비옹(思悲翁)’ 같은 악부시를 또한 짓지 못하고, 아울러 ‘촉영요홍’(燭影搖紅)과 ‘접련화’(蝶戀花)‘ 같은 사곡을 또한 감히 짓지 못하게 된 까닭이다. 이것이 어찌 내 마음대로 하는 일인가? 이것이 어찌 내 마음대로 하는 일이란 말인가?

다만 부끄러운 것은 천지만물이 나를 통해 포착되고 그려지는 것이 옛사람에게서 그러했던 경지에 크게 미치지 못했으니, 이는 곧 내 잘못이다. 이에 이언(俚諺)의 여러 가락을 감히 국풍이나 악부 또는 사곡이라 하지 못하고, 이미 ‘이(俚)’라 하고 또 ‘언(諺)’이라 하여 천지만물에게 사죄하게 된 것이다.

나비가 날아서 학령(鶴翎)을 지나치다가 그 쓸쓸하고 야윈 모습을 보고 묻기를 ‘그대는 어째서 매화의 흰색이나 모란의 붉은색 혹은 복숭아와 오얏의 분홍색이 되지 못하고 하필이면 이런 황색이 되었는가?’ 하니, 학령이 말했다. ‘이것이 어찌 내 마음대로 한 것인가? 상황[時]이 곧 그렇게 만든 것이다. 내가 상황에 대해서 어찌하겠는가?’ 그대 또한 어찌 나에게 나비가 되려는가?”

 

- 두 번째 비난(二難)

 

어떤 이가 말했다.

“그대는 천지만물이 그대에게 드나들어서 그대의 이언(俚諺)이 되었다고 하는데, 어째서 그대의 천지만물이 오직 한 두 가지에 그치는 것인가? 어째서 그대의 이언은 다만 붉은 연지나 치마 혹은 비녀와 같은 여성들의 일에만 미치고 있는가? 예(禮)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고 옛사람이 말했거늘, 그런데도 이렇듯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벌떡 일어나 얼굴을 고치고 무릎 꿇고 앉아 사죄하며 말했다.

“선생께서 가르치신 뜻이 훌륭하십니다. 제자가 잘못했으니, 서둘러 불사르십시오. 하지만 제자가 가만히 선생님에게 청할 것이 있으니, 선생께서 마침내 가르쳐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감히 묻사오니, 시전(詩傳)이란 어떤 것입니까?”,

 

“경전(經典)이다.”

“누가 지었습니까?”

“당시의 시인(詩人)이다.”

“누가 모은 것입니까?”

“공자이다.”

“누가 주를 달았습니까?”

“집주(集註)는 주자(朱子)가 하였고 전주(箋註)는 한나라의 유학자들이 하였다.”

“그 대강의 뜻은 무엇입니까”

“생각에 사특함이 없음이다.(思無邪)”

“그 효용은 무엇입니까?”

“백성을 교화하여 선(善)을 이룸이다.(敎民成善)”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은 무엇입니까?”

“국풍이다.”

“말하는 바는 대체로 무엇입니까?”

“거의가 여자들의 일이다.”

“모두 몇 편이나 됩니까?”

“주남 11편과 소남 14편이다.”

“그 가운데 여자들의 일을 말하지 않는 것은 몇 편입니까?”

“‘토저(兎苴)’와 ‘감당(甘棠)’ 등 모두 5편뿐이다.”

“그렇습니까? 이상합니다. 천지만물이 다만 분 바르고 치마 입고 비녀 꽂는 여성들에게만 있는 것은 옛날부터 그랬던 것입니까? 어째서 옛날의 시인들은 예(禮)가 아니면 보거나 듣거나 말하지 말라는 것을 꺼리지 않아서 그랬겠습니까?”

 

나그네여, 그대는 그 까닭을 들어 보겠는가? 여기에는 이런 까닭이 있다.

무릇 천지만물을 관찰함에는 사람을 보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며, 사람을 보는 데에는 정(情)보다 묘(妙)한 것이 없고, 정을 보는 데는 남녀의 정을 보는 것보다 진실된 것이 없다. 이 세상이 있으매 이 몸이 있고, 이 몸이 있으매 이 일이 있고, 이 일이 있으매 곧 이 정이 있는 것이다.

그런 때문에 이를 보면 그 마음의 사악함과 올바름을 알 수 있고, 사람의 어짊과 그렇지 못함을 알 수 있으며, 그 일의 득과 실을 알 수 있고, 그 풍속의 사치스러움과 검소함을 알 수 있고, 그 풍토의 후함과 척박함을 알 수 있으며, 그 집안의 흥함과 쇠함을 알 수 있고, 그 나라의 평화로움과 어지러움을 알 수 있고, 그 시대의 타락함과 융성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대개 사람이 정(情)이란 혹 기쁘지 않으면서 거짓으로 기쁜 체 하거나, 성나지 않았으면서 성난 체 하고, 슬프지 않으면서 슬픈 체 하기도 한다. 즐겁거나, 슬프거나,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때로는 거짓으로 꾸며 즐겁고, 슬프고, 미워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정의 참모습을 알아보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오직 남녀 간의 일은 인생의 본래적인 것이며, 하늘의 도리와 자연의 이치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혼례 때 푸른 술잔에 붉은 화촉으로 혼인하여 서로 인사하고 맞절하는 것도 또한 진실된 정이요, 향기로운 규방에서 상자에 수를 놓는 것이나 이리 마냥 싸우고 다투며 성내는 것도 또한 진실된 정이다.

비단 주렴과 옥난간에 기대어 눈물 흘리며 자나 깨나 사모하는 것 또한 진실된 정이요, 황금에 웃고 옥구슬에 노래하는 것 또한 진실된 정이다. 원앙금침의 아름다운 무늬에 기대어 있는 것도 진실된 정이며, 서리 내린 다듬잇돌과 빗속의 등잔을 벗하여 한을 품고 원망을 가슴에 묻는 것 또한 진실된 정이며, 달 밝은 밤 꽃떨기 아래서 옥패를 주고 향을 훔치는 것 또한 진실된 정이다.

오직 이 한 종류의 참된 정이야말로 어느 한 구석도 진실되지 아니한 곳이 없다. 가령 단정하고 정일(貞一)하여 다행히 그 정도(正道)를 얻은 것이 있다면 이 또한 참된 정이요, 방자하고 편벽되며 나태 오만하여 불행히도 그 올바름을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이 또한 참된 정이다.

오직 그것들이 참된 것이기 때문에 정도를 얻었을 때는 본받을 만하고, 그 정도를 잃었을 때에는 또한 경계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참된 것이라야 본받을 수 있고, 참된 것이라야 경계가 된다. 그러므로 그 마음, 그 사람, 그 풍속, 그 풍토, 그 집안, 그 국가, 그 시대의 정을 또한 이로부터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니, 천지만물에 대한 관찰도 이 남녀에서 살피는 것보다 더 진실된 것이 없다.

이것이 시경 국풍의 ‘주남’과 ‘소남’ 25편 가운데 남녀의 일을 노래한 20편이 있게 된 까닭이요, 또한 ‘위풍’ 39편 가운데 남녀의 일이 37편이 있게 된 까닭이며, ‘정풍’ 21편 가운데 남녀의 일이 16씩이나 많게 된 까닭이다.

이것이 또한 당시의 시인들이 예가 아님에도 듣고 보고 말하기를 꺼리지 않았던 까닭이며, 또한 위대하고 지극한 성인인 공부자(孔夫子)가 이것들을 취한 까닭이며, 모씨(毛氏), 정현(鄭玄), 주자(朱子) 등 훌륭한 유학자들이 전주하고 집주한 까닭이며, 또한 그대가 말하는 바 ‘사무사(思無邪)’하고 ‘교민성선(敎民成善)’한다는 것이다.

그대여 어찌 모르는가? 저 예가 아닌 것을 듣는 것이 장차 예가 아닌 것을 듣지 않으려는 것임을, 예가 아닌 것을 보는 것이 장차 예가 아닌 것을 보지 않으려는 것임을, 예가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이 장차 예가 아닌 것을 말하지 않으려는 것임을. 하물며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반드시 모두 다 예에 어긋난 것이 아님에랴.

이런 까닭으로 나는 말한다. 시의 정풍(正風)과 음풍(淫風)은 시가 아니라 곧 춘추(春秋)라고. 세상에서 음사(淫史)라고 일컫는 ‘금병매(金甁梅)’나 ‘육포단(肉蒲團)’ 같은 부류도 또한 모두 음사가 아니다. 그 작자의 근본 생각을 되짚어 보면 이 작품들을 정풍, 음풍이라 일컬어도 불가할 것이 없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에는 이런 이치가 있다. 여자는 치우친 성품을 지녔다. 그 환희, 우수(憂愁), 원망, 학랑(謔浪)이 진실로 모두 정(情) 그대로 흘러나와 마치 혀끝에 바늘을 감추고 눈썹 사이에서 도끼가 노는 것과 같음이 있으니, 사람 중에 시의 경지에 부합하는 것으로는 여자보다 더 묘한 것이 없다.

부인(婦人)네들은 더욱 그러하여서, 그 태도와 언어, 복식, 거처가 또한 모두가 끝가는 데까지 가게 되어, 마치 잠속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고 취한 뒤에 복사꽃을 감상하는 것과 같은 데가 있다. 그러하니 사람 중에서 시의 재료를 지닌 것으로는 부인네들보다 풍부한 것이 없다.

아아, 비록 그 묘하고 풍부한 것이라 해도 그것을 다루는 이가 마치 봉황지(鳳凰池)에 고상한 음악에만 도취된 사람이라면 어느 겨를에 여기에 미칠 수 있겠는가? 또한 푸른 산에 오래도록 들어앉아 원숭이와 학(鶴)을 벗삼기만 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족히 이에 미칠 수 있겠는가?

이학(理學)에 몰두하고 바람과 달만을 읊조리는 사람이라면 어찌 자질구레하게 여기에 미칠 수 있겠는가? 술독에 빠진 채 화류(花柳)에 취하여 노래하는 사람이라면 또한 어찌 여기에 미칠 수 있겠는가?

지금의 세상은 이런 것도 아니며, 저런 것도 아니다. 그 시대를 보면 연화태평(煙花太平) 속에 즐겁고 번잡한 좋은 세계요, 그 땅을 보면 화려한 장안에 시끌벅적한 큰 도회지이며, 그 사람을 보면 붓과 먹을 벗하여 여러 해 동안 흥건히 고인 물처럼 답답하게 보내는 한가로운 생애이다.

낮에 나가 거리를 돌아다니면 마주치는 것이 남자 아니면 여자요, 밤에 돌아와 책상을 대하면 곧 펼쳐 보는 것이 오직 책 몇 권일 뿐이다. 그 마음이 근질근질하여 마치 수천 수백 마리의 이(蝨)들이 내 몸의 간(肝)에서 달리고 있는 것만 같다. 나는 또한 위와 장(腸)을 기울여 이 이들을 쏟아내 놓고야 말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왕 시를 짓는다면 천지만물 중에서 그 묘하고도 풍부하며 정이 진실한 것을 버리고 내가 다시 어디에 손을 댄단 말인가? 그대는 들었는가, 못 들었는가? 생각건대 국풍의 시인들은 그 시편들을 지을 때 재주와 식견이 나보다 만만배나 뛰어났겠지만, 그것을 지은 뜻은 대체로 내 생각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 세 번째 비난(非難)

 

어떤 사람이,

“이언 가운데 옷이나 음식, 그릇 등으로 사용된 것은 무릇 이름이 있는 것이건 이름이 없는 것이건 본래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으니 허망할 따름이다. 뜻을 전달함에 향명과 부합하는 문자를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기만하는 것이며, 시골에만 갇혀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는 그러하다. 그런 즉 내가 이러한 조목을 범한 것은 오래되었다. 내가 나의 방에 있어서는 ‘악양루’나 ‘취옹정’이라 하지 않고서, 내가 지은 내 방의 이름으로 내 방을 부른다. 나는 15세에 관을 쓰고 바로서 ‘명’과 ‘자’를 두었는데, 나는 고인의 이름으로 나를 명하지 않았고, 고인의 자로 나의 자를 하지 않았다. 내 이름이 내 이름이고, 나의 자가 내 자이니 곧 이 조목을 범했으니 그 역시 오래 되었음이라. 어찌 다만 나뿐이겠는가? 그대도 역시 그러하니, 그대는 어째서 황제의 성인 ‘희(姬)’씨나 진(晋)의 왕인 사(謝)씨, 당(唐)의 최(崔)씨나 노(盧)씨를 그대의 성으로 삼지 않고 어찌 감히 그대의 성을 갖는 것인가?”

 

그러자, 그 사람이 크게 비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사물의 이름을 말했는데, 그대는 도리어 사람을 윽박지르는 것인가?”

 

내가 말했다.

“사물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라면 사물의 이름을 말하는 것은 매우 많다. 눈 앞에 있는 물건의 이름을 청하여 말하는 것이라면, 저 풀로 짜서 깔도록 한 것은 옛날 사람이나 중국 사람은 곧 ‘석(席)’이라 할 것이고, 나와 그대는 곧 ‘돗자리[兜單]’이라 할 것이며, 저 나무를 시렁으로 하여 기름 잔을 받쳐 놓은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은 곧 ‘등경(燈檠)’이라 말하지만, 나와 더불어 그대는 곧 ‘광명[光明]’이라 말한다.

저 털을 묶어서 뾰족하게 한 것을 저들은 곧 ‘필(筆)’이라 하지만 나는 곧 ‘붓[白者]’이라 말하고, 저 닥나무를 찧어 희게 한 것을 저들은 곧 ‘지(紙)’라고 하지만, 나는 곧 ‘종이[照意]’라고 한다. 저들은 저들이 이름 지은 것으로 하고, 나는 내가 이름 지은 것으로 이름 하는 것이니, 나는 저들이 이름 지은 바가 과연 그 이름이 되는 것인지 내가 이름 지은 바가 과연 그 이름이 되는 것인지 아직 모르겠다.

그들이 말하는 ‘석’, ‘등경’이라는 것은 이미 반고씨(盤古氏)가 즉위하여 초기에 임금께서 이름을 달리 주신 것이 아니니, 또한 본래의 이름이 아닌 것이다. 내가 ‘붓’이나 ‘종이’라고 말하는 것도 또한 저 나무와 털이 생길 때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이름이 아니니, 곧 역시 그 이름이 아님이다. 그 이름 아닌 것이 됨은 곧 마찬가지인 셈이니, 저들은 마땅히 저들이 이름 한 바의 것을 이름 하고 나는 마땅히 내가 이름 한 바의 것을 이름 함이니, 내 어찌 하필이면 내가 이름 지은 것을 버리고서 저들이 이름 지은 것을 따르겠는가?

옛날에 한 태수가 있었는데, 태수는 관리에게 저자에서 제수품을 사오라고 시켰다. 관리가 장부를 살피며 다 샀는데, 다만 하나 ‘법유(法油)’라는 것이 있었는데 어떤 물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에 기름을 파는 이에게 시험 삼아 물었더니 기름 파는 이가 말하기를 “나는 다만 ‘참기름[眞油]’과 ‘등유(燈油)’만을 팔 따름입니다. 라고 하면서 얼른 ‘법유’란 이름의 것은 없습니다.”고 하였다.

관리는 어쩔 수 없이 구하지 못하고 돌아왔으니, 필경 법유가 등유 됨을 몰랐던 것이다. 이는 태수의 잘못이지 관리나 기름상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또 서울에 사는 어떤 사람이 친한 시골 친구를 초대하며 말하기를

“바야흐로 지금 서울의 온갖 곳에 ‘청포靑泡’라는 것이 널려 있으니, 서울에 오면 그것으로 친구에게 실컷 대접 하겠네.”

하여 친구는 그것을 기이한 떡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튿날이 지나서 서울 친구를 찾아 갔더니, 그 집 주인이 많은 ‘녹두부(綠豆腐)’를 차리고는 대접하였다. ‘녹두부’는 세상의 이른바 ‘묵[黙]’이라는 것이었다. 시골 친구는 돌아와 성을 내며 아내에게 말하기를,

“오늘 모가가 나를 속였다. ‘청포’라는 것을 나는 비록 어떻게 생긴 떡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는 이미 내가 가는 것을 허락한 까닭에 갔는데, 내가 다다르자 다만 묵만을 대접하면서 ‘청포’는 차리지 않았다.” 며 오랫동안 오히려 화만 내며 끝까지 청포가 묵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하니, 곧 이는 서울 사람의 잘못이지 시골 친구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시인들 가운데 기름을 사지 않고 청포를 먹지 않는 사람이 그 몇 사람이 되는가? 시냇가에 푸른 깃이 매우 상서로운 새가 있어 그 이름을 ‘철작(鐵雀)’이라고 하니, 이내 말하기를 “긴 대나무 우거진 촌가에 비취 새가 우는구나.”라고 하면 곧 월나라의 공물인데 어찌 조선국의 촌가가 되겠는가?

골짜기 안에는 새가 있어 밤이 되면 반드시 슬프게 우는데 그 이름 하여 말하기를 ‘접동(接同)’이라 하니, 이내 말하기를 “이 땅의 두견새[鵑] 소리 차마 들을 수 없구나.”라 하니, 곧 파촉(巴蜀)의 혼백이 어찌 조선국의 땅이 되겠는가? 비슷해도 모두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나라 사람들이 복식과 기명에 있어서 무릇 몇 가지 물건이라도 그 부르는 바의 명칭으로 이름하니,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도 오히려 깨닫는다.

그러나 그 나머지는 붓을 잡고 종이를 마주하여 몇 자와 몇 건을 기록하고자 하면 곧 이미 좌우를 둘러보면서 곁에 있는 사람에게 물으니 어떤 사물의 마땅한 어떤 이름을 모르는 것이니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안타깝도다!

내가 그 뜻을 알 수 있으니 저들이 향명이라고 여기는 것은 시골에서의 이름 이니,내가 다만 입으로 부를 수는 있지만 붓으로 쓸 수는 없음을 갖추어 말함이니, 나는 이직도 알 수 없다. 신라가 나라를 세우고 부름에 있어서, 어째서 ‘경(京)’이라고 하지 않고서 ‘서나벌[徐那伐]’이라고 했는지?

왕의 이름을 부름에 있어서도 어째서 ‘치문(齒文)’이라 하지 않고서 ‘니사금[尼師今]’이라 하였는가? 또 그 성을 칭함에 있어서도 어째서 ‘포(匏)’라고 말하지 않고 ‘박[朴]’이라고 했단 말인가? 어찌 김부식은 그것을 잃어버리고서 쓸 줄은 몰랐었단 말인가!

또한 한나라 때의 군가나 비속하다는『금병매』가 그 가사와 곡조를 평이하고 순조롭게 하며, 그 말을 아름답게 하여 어찌 후세의 다른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쉽게 깨우칠 수 있게끔 함이 아니겠는가? 어찌 매와 마가 속임을 좋아하겠으며, 봉주에 시골의 폐쇄성이 있어서 그러하겠는가? 안타깝도다!

그 사물들을 명명하게 한 까닭으로 모두 ‘석’이니 ‘등’이니 ‘필’이니 ‘지’니 하며 필히 마땅한 그 사물인지라, 곧 나 또한 마땅히 포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남을 쫓아서 마치 이기는 데만 힘쓰는 사람처럼 오로지 향명만을 강요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푸른 깃을 가리켜 ‘비취[翠]’라고 한다거나, 처량한 울음소리를 듣고서 ‘두견새[鵑]’라고 한다면 이는 곧 나의 손이 둔해지고 내 혀가 말을 더듬게 된 상황일지라도, 언문으로 된 시를 지을 것이며, 반드시 법유와 청포를 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어찌하겠는가? 향명을 만들지 못함을 가히 한탄하는 바이다.

창제주황이 이미 나를 위하여 별도로 글을 만들어 준 것도 아니요, 단군선인과 기자왕 또한 일찍이 글로써 말을 가르치지 아니하였으니, 곧 마음에 들지 않는 우리말에도 혹 문자는 있으되 아직 이름이 없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이름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니, 곧 내 어찌 외람되게 이를 만들지 않겠는가? 이는 내가 반드시 우리말로 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나는 이미 촌스러운데 내 어찌 기만하겠는가? 또한 내가 이미 교활하여 그대도 이미 나를 교활하다고 말하였으니 곧 내가 청컨대, 교활함을 피하지 말고서 크게 한번 말씀해 보시오. 언제나 『강희자전(康熙字傳)』을 보면, ‘륵(玏)’ 자를 싣고서, “조선 종실의 이름이다”고 말한다.

또 ‘답(畓)’ 자가 있는데, “고려인들이 물로 메운 밭을 지칭하는 것이다” 고 말하고 있다. 더욱이,『장주악부(長洲樂府)』에서는 거의가 우리나라의 속어를 칭하고 있는데, 그대가 어찌 알겠는가?

훗날, 중원 땅에 내가 이름 지은 사물의 명칭에 대한 기록을 두루 채집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가 집주하기를 “이는 조선의 동금자(絧錦子)가 말한 것이다”고 할 것이다.

우습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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