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풀어 읽기-총람/열녀춘향수절가

(완판)열녀춘향수절가 - V. 재회 (1/5)

New-Mountain(새뫼) 2020. 7. 3.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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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재회

 

가. 아무 날 남원읍에 순행하여 대령하라

 

이때 한양성 도련님은 밤낮으로 ≪시경≫과 ≪서경≫, 여러 학자들이 지은 여러 가지 저서를 깊이 읽고 공부하였으니, 글로는 이백이요, 글씨는 왕희지라.

국가에 경사 있어 태평과를 보이실 새 서책을 품에 품고 과거 보는 마당 안에 들어가 좌우를 둘러 보니 수많은 백성과 허다한 선비들이 일시에 임금께 절을 한다. 궁중에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 깨끗하여 속되지 않으니 앵무새가 춤을 춘다. 대제학이 골라내어 임금이 내린 과거시험 글 제목을 보이니, 도승지 모셔내어 홍장 위에 걸어 놓으니 글 제에 하였으되,

“춘당대의 봄빛은 예나 지금이나 같도다.”

뚜렷이 걸었거늘 이도령 글 제를 살펴보니 익히 보던 바이라. 시지를 펼쳐 놓고, 글제를 어떻게 풀어낼까 생각하여 용을 새긴 벼루에 먹을 갈아 족제비 털로 만든 붓을 가운데쯤에 덤뻑 풀어 왕희지 필법으로 조맹부의 글씨체를 본받아 글씨를 단숨에 써 내려가 제일 먼저 글을 바치니, 상시관이 이 글을 보니 글자마다 비점이요, 구절마다 관주로다. 용이 움직이는 양 날아오르는 듯하고, 모래펄에 기러기가 내려앉는 듯하다. 오늘날의 큰 재목이로다.

금방에 이름을 불러 임금께서 석 잔 술을 내려 권하신 후 장원 급제 글을 걸어 두었구나.

선임 급제자들에게 신고하고 나올 적에 머리에는 어사화요, 몸에는 앵삼이라. 허리에는 학대로다. 사흘 동안 유가한 후에 산소에 제사를 지내고, 전하께 절을 올리니, 전하께옵서 친히 불러 보신 후에,

“경의 재주 조정에 으뜸이라.”

하시고 도승지 들라 하시고, 전라도 어사를 직접 내리시니 평생의 소원이라. 어사또의 수놓은 옷, 마패, 유척을 내주시니 전하께 하직하고 본댁으로 나갈 때, 철관 쓴 풍채는 깊은 산의 사나운 호랑이 같은지라.

부모님께 하직하고 전라도로 행할 새 남대문 밖 썩 나서서 서리, 중방, 역졸 등을 거느리고, 청파역 말 잡아타고 칠패, 팔패, 배다리 얼른 넘어 밥전거리 지나 동작리를 얼핏 건너 남태령을 넘어 과천읍에서 점심 먹고, 사근내, 미륵당이, 수원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대황교, 떡전거리, 진개울, 중미, 진위읍에 점심 먹고, 칠원, 소사, 애고다리, 성환역에 하룻밤을 보내고,

상류천, 하류천, 새로 생긴 주막, 천안읍에서 점심 먹고, 천안삼거리, 도리치, 김제역 말 갈아 타고, 신구덕평을 얼른 지나 원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팔풍정, 화란, 광정, 모란, 공주, 금강을 건너 금영에서 점심 먹고, 높은 한길 소개문, 어미널티, 경천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노성, 풋개, 사다리, 은진, 간치당이, 황화정, 장애미고개, 여산읍에 하룻밤을 머물고,

이튿날 서리 중방 불러 분부하되

“전라도 첫 고을 여산이라. 더할 수 없이 주요한 나랏일을 분명하게 거행하지 않으면 죽기를 면치 못하리라.”

가을날 서릿발같이 호령하며, 서리 불러 분부하되,

“너는 좌도로 들어 진산, 금산, 무주, 용담, 진안, 장수, 운봉, 구례로 이 여덟 고을을 두루 다니다가 아무 날 남원읍으로 대령하고, 중방, 역졸 너희들은 우도로 용안, 함열, 임피, 옥구, 김제, 만경, 고부, 부안, 흥덕, 고창, 장성, 영광, 무장, 무안, 함평으로 두루 다녀 아무 날 남원읍으로 준비하여 기다리고, 종사관 불러 익산, 금구, 태인, 정읍, 순창, 옥과, 광주, 나주, 평창, 담양, 동복, 화순, 강진, 영암, 장흥, 보성, 흥양, 낙안, 순천, 곡성으로 두루 다녀 아무 날 남원읍으로 준비하여 기다리라.”

분부하여 각기 나누어 출발시킨 후에, 어사또 길 가는 차림을 차리는데 모양 보소.

뭇 사람을 속이려고 모자 없는 헌 찢어진 갓에 벌이줄 총총 매어 질 낮은 무명끈으로 갓끈 달아 쓰고, 당만 남은 헌 망건에 갖풀관자 노끈당줄 달아 쓰고 어리숙하게 헌 도복에 무명실 띠를 가슴 가운데에 둘러매고, 살만 남은 헌 부채에 솔방울 선추 달아 햇빛을 가리고 내려올 제, 통새암 지나 삼례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주엽쟁이, 가리내, 신금정 구경하고 숲정이, 공북루 서문을 얼른 지나 남문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서호와 강남이 여기로다.

기린봉에 솟는 달이며 한벽당 주변의 맑은 안개, 남고사의 늦은 종소리, 건지산 위로 돋는 보름달, 다가산 활터의 활 쏘는 과녁, 덕진지에서 연밥 따기, 비비정 위로 날아가는 기러기, 위봉산의 폭포.

완산의 이름난 여덟 경치를 다 구경하고 차차로 정체를 감추고 남모르게 내려올 제, 각읍 수령들이 어사 났단 말을 듣고 백성들의 사정을 가다듬고 이미 한 일을 염려할 제 하인인들 편하리오.

이방, 호장 혼을 잃고 관청에서 들고난 돈을 계산하는 형방, 서기 얼른 하면 도망하려고 신발 준비하고, 수많은 각 구실아치들이 넋을 잃어 분주할 제, 이때 어사또는 임실 국화들 근처를 당도하니 이때 마침 농사철이라. 농부들이 <농부가> 하며 이러할 제 야단이었다.

 

“어여로 상사디야.

넓고 넓은 이 세상 태평한 때에

도덕 높은 우리 성군

태평한 시대에 아이들의 노래 듣던

요임금 훌륭한 덕이라.

어여로 상사디야.

순임금 높고도 훌륭한 덕으로

내리신 성스러운 그릇과

역산에 밭을 갈고

어여로 상사디야.

신농씨 내신 따비

오랜 세월에 전해 내려오니

어이 아니 높으시던가.

어여로 상사디야.

하나라의 어진 우임금

구 년 홍수 다스리고

어여라 상사디야.

어여라 상사디야.

은왕 성탕 어진 임금

큰 가뭄 친 년 당하였네.

어여라 상사디야.

이 농사를 지어내어

우리 성군께 세금 바친 뒤에

남은 곡식 장만하여

위로는 부모를 모시기를 아니하며

아래로는 처자를 먹여 살리지 아니할까.

어여라 상사디야.

온갖 풀을 심어

네 계절을 짐작하니

믿음직한 게 백초로다

어여라 상사디야.

벼슬에 나아가 이름 날리는 좋은 호강

이 농사짓기를 당할쏘냐.

어여라 상사디야.

남북 논밭을 개간하여

잔뜩 먹고 배 두드려 보세

얼럴럴 상사디야.”

 

한참 이리할 제 어사또 지팡이 짚고 이만하고 서서 농부가를 구경하다가

“거기는 큰 풍년이로고.”

또 한편을 바라보니 이상한 일이 있다. 중년이 넘은 노인들이 끼리끼리 모여 서서 나무 그루터기 많은 험한 밭을 일구는데 갈멍덕 숙여 쓰고 쇠스랑 손에 들고 <백발가>를 부르는데

 

“등장 가자, 등장 가자.

하느님 전에 등장 갈 양이면

무슨 말을 하실는지.

늙은이는 죽지 말고

젊은 사람 늙지 말게.

하느님 전에 등장 가세.

원수로다, 원수로다.

백발이 원수로다.

오는 백발 막으려고

오른손에 도끼 들고

왼손에 가시 들고

오는 백발 두드리며

가는 젊은 얼굴 끌어당겨

푸른 실로 단단히 묶어

단단히 졸라매되

가는 젊은 얼굴 절로 가고

백발은 때때로 돌아와

귀밑에 살 잡히고

검은 머리 백발 되니

아침에는 푸른 실이더니 저녁에는 흰 눈이라.

무정한 게 세월이라.

젊은 때 즐거움이 깊은들

때때로 달라 가니

이 아니 세월인가.

비싼 좋은 말을 잡아타고

서울 큰길 달리고저.

오랜 세월 변함없는 강산의 좋은 경치

다시 한번 보고지고.

이 세상 제일의 미인을 곁에 두고

온갖 교태 지어 놀고 지고.

꽃핀 아침과 달밝은 저녁 네 계절의 경치

눈 어둡고 귀가 먹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어

하릴없는 일이로세.

슬프다, 우리 벗님

어디로 가겠는고.

구월에 단풍잎 지듯이

선뜻선뜻 떨어지고

새벽하늘 별 지듯이

삼삼오오 쓰러지니

가는 길이 어디멘고.

어여로 가래질이야.

아마도 우리 인생

한바탕 봄날 꿈인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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