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총람(산문)/남원고사

(경판)남원고사 - XI. 어사 이몽룡 (4/4)

New-Mountain(새뫼) 2020. 6. 28.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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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옛정을 생각하여 만나기를 바라나이다

 

하직하고 한 곳을 다다르니 길가에 주막 짓고 한 영감이 앉아서 막걸리 팔며 청올치 꼬며 반이나마 부르니, 하였으되,

“반나마 늙었으니 다시 젊든 못하여도

이후나 늙지 말고 매양 이만이나 하였고저.

백발이 제 짐작하여 더디 늙게.”

어사가 주머니 떨어 돈 한 푼 내어 쥐고,

“술 한 잔 내라리까.”

영감이 어사의 꼴을 보고

“돈 먼저 내시오.”

쥐었던 돈 내어주고 한 푼어치 졸라 받아 먹고 입 씻고 하는 말이,

“영감도 한 잔 먹으라니까.”

영감이 대답하되,

“아스시오, 그만두오. 지나가는 행인에게 무슨 돈이 넉넉하여 나를 술 먹이려시오.”

어사가 대답하되,

“내가 무슨 돈이 있어 남을 술 먹일까. 영감 술이니 출출한데 한 잔이나 먹으란 말이지.”

영감이 골을 내어 하는 말이,

“내가 술을 먹든지 말든지 이녁 어떤 사람이기에 먹어라 말아라 참견하노.”

어사가 이른 말이,

“그야 정 먹기 싫거든 그만둘 것이지, 남과 싸우려 말라니까. 그러나 그 말은 다 실없는 말이거니와, 서울서 들으니 남원 기생 춘향이가 창기 중 정절이 있어 기특하다 하더니, 이곳의 와 들으니 서방질이 동관의 삼월이요, 본관 수청들어 밤낮으로 음탕하고 난잡하게 논다고 하니, 그것이 옳거나 맞음이 분명한지?”

이 영감의 성품은 헌릉의 장작이라. 이 말 듣고 펄쩍 뛰어 일어서서 상투 끝까지 골을 내어 두 눈을 부릅뜨고 두 팔을 뽐내면서 넋이 올라 하는 말이,

“뉘라서 이런 말을 하옵던가? 백옥 같은 춘향이를 이런 더러운 말로 모함하는 놈을 만나면 그놈의 다리를 무김치 썰듯 무뚝무뚝둑 자를 것을. 원통하고 절통하외다. 이녁도 다시 그런 말을 하면 누더기를 평생 못 벗어 보고 비렁뱅이로 늙어 죽을 것이니, 그런 죄를 지어 화가 자손에게 미칠 소리는 다시 옮기지도 마옵소.”

어사가 대답하되,

“영감은 악담 말고 이야기나 자세히 하라니까. 춘향의 얼굴이 일월 같은지 행실이 백옥 같은지 알 수가 있나. 영감은 따라다니며 보왔습나?”

골낸 영감 하는 말이,

“예전 사또 자제 이도령인지 하는 아이 녀석이 춘향이를 첩을 삼아 백년기약 맹세하고 올라갈 제, 뒷날 약속을 금석같이 하였더니, 한 번 떠난 후 삼 년에 소식이 끊어지고, 신관 사또 호색하여 춘향의 이름을 듣고 성화같이 불러들여 수청으로 작정하니, 춘향의 얼음과 옥 같은 절개로 죽음을 각오하고 하고 듣지를 아니하니, 신관 사또 골을 내어 죽을 만큼 큰 매를 친 연후에 칼을 차고, 족쇄 채워 옥에 가둔지 올해조차 삼 년이라.

때때로 올려 엄하게 다르면서 죄를 자백하라 분부하되, 그런 고초 겪으면서 유리 같은 맑은 마음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니, 자고로 창녀의 절개가 이렇단 말 들었습나? 이런 열녀 첩을 지방에다 버려두고, 삼 년이 되도록 편지 일 장 아니하고 소식조차 끊어지니, 그 아이 녀석이 신사년 팔월 통에 죽었으면 모르거니와, 살아 있고는 이런 맵고 독하고 모질고 단단한 무정 맹랑한 제 할미를 붙을 아이 녀석이 어디에 있겠습나?

이제는 하릴없이 옥중에서 죽게 되어 우리 아들 복실이가 돈 닷 냥 삯을 받고 급하게 달려 편지하려 하고, 그 편지가 여기 있으니 거짓말인가 편지를 보옵소.”

어사가 이 말 듣고 생각하되,

“욕먹어도 할 말 없다. 대저 살기는 그저 살았는가? 그 도령에게 욕일랑은 과히 마오. 나와 전혀 남 아닌 사이라니까.”

하고 편지 받아 보니, 겉봉에,

‘삼청동 이승지 댁 도련님 시하인 개탁이라, 남원 춘향은 상서라.’

하였거늘, 떼어보니 하였으되,

 

이별 후 세월이 벌써 삼 년에 편지가 끊어지니, 약수삼천리에 청조가 끊어지며 북해 만 리 기러기가 없음이라. 저 하늘은 넓고 아득하니 바라보는 눈이 하늘에 이어졌고, 구름 낀 산이 막혀 끊어지니 심장과 신장이 찢어짐이라. 배꽃이 두견이 울고 오동에 밤비 올 제, 적막히 혼자 앉아 그리워하는 마음이 땅이 꺼지고 하늘에 벼락이 친들 이 한을 말하기 어렵도다.

무심한 나비의 꿈의 천 리에 오락가락 정을 스스로 억누르지 못하겠고, 슬픔을 스스로를 이겨내지 못함이라. 한숨과 눈물로 꽃 피는 아침과 달 밝은 저녁을 보내더니, 근심 중 생각 밖에 신관의 수청 분부가 서리와 눈 같은 절개를 능멸하니, 천둥과 벼락이 몸 위에 내려오며 조각난 몸이 부서지고, 심장이 사라지는지라.

이렇듯 괴로움을 지내나, 가물거리는 얼마 남지 아니한 쇠잔한 목숨을 지금까지 부지함은, 처음 보는 얼굴로 한 번 만나 평생 설운 회포를 다한 후에나 그 즉시 쓰러져 세상을 이별하고저, 사라져가는 정신을 수습하여 혈서를 아뢰오니, 바라건데 행여나 감동하사 아름답게 죽기 전에 한 번 보와 깨진 거울이 다시 합쳐질까.

아직 보지 못한 낭군에 이 한 목숨이 다하게 되면, 천고의 원혼이 되어 망망한 구름 밖에서 슬피 울며, 한양까지 올라가서 낭군의 자취를 따르리니, 낭군은 옛 인정과 도리를 생각하사 한 번 만나기를 서서 기다리나이다.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는 넓은 바다를 기울이나 한 번에 다 쓸 수 없고, 가슴에 슬픔을 머금어 혼백이 아뜩하도록 날아가고, 붓을 잡아 글을 이루매 눈물이 앞을 가리오는지라. 말을 이루지 못하매 대강을 기록하나이다.

모년 모월 모일에 남원 춘향은 상서하노라.

 

하였더라,

어사가 보기를 마치매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슬퍼 급하게 인사하고 하는 말이,

“그 도령은 나의 사촌 동생이니 이 편지를 착실히 전하여 줄 것이니 염려 말고. 서울 가야 보지 못할 것이니 헛걸음 말고 수일 후 제게 가서 착실히 전하였다 하라니까.”

영감이 천만 당부하되,

“나중 말 아니 되게 잘 전하여 주옵소.”

어사가 대답하고 돌아서니 심신이 황홀하다. 죽은 줄로 알았더니 산 편지를 보았구나. 제 형상이 오죽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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