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총람(산문)/남원고사

(경판)남원고사 - XII. 옥중 고초 (2/3)

New-Mountain(새뫼) 2020. 6. 28.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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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죽는 꿈을 꾸었으니 이를 어찌하잔 말가

 

차설, 이때 춘향이는 옥중에 홀로 앉아 한밤중에 못 든 잠을 새벽녘에 겨우 들어 잠들지도 깨지도 않은 채로 꿈을 꾸니, 평상시에 보던 몸거울이 한복판이 깨어지고, 뒷동산의 앵두꽃이 백설같이 떨어지고, 자던 방 문설주 위에 허수아비 달려 뵈고, 태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말라 뵈니, 꿈을 깨어나서 하는 말이,

“이 꿈 아니 수상한가. 남가의 헛된 꿈인가, 화서몽, 구운몽, 남양초당 춘수몽, 이 꿈 저 꿈 무슨 꿈인고? 임 반기려 길몽인가? 나 죽으려 흉몽인가? 하루아침에 낭군 이별 후에 소식조차 끊어지니 급히 달려간 서간도 돌아오는 소식이 없고, 삼 년이 되어 가되, 편지 일 장 아니하나? 봄은 믿음 있어 오는 때에 돌아오되, 임은 어이 믿음 없어 돌아올 줄 모르는고? 이 꿈 아마 수상하다. 임이 죽으려나, 내가 죽으려나. 이 몸은 죽을지라도 임을랑은 죽지 말고 내 설욕을 하여 주소. 혼백이라도 임을 아니 잊으리라.”

칼머리를 베고 누워 가만히 생각하되,

“날 사랑하던 도련님이 경성에 다다른 후, 날 그리워 병이 들었나? 소인의 모함을 입어 먼 곳에 귀양을 갔는가? 날 찾아오다가 뜻밖에 참혹하게 죽었는가? 나보다 나은 임을 얻어 두고 사랑 겨워 못 오시나? 정숙한 여인을 정부인으로 얻어 아들딸 낳고 금실 좋게 즐기시나? 남북 쪽의 이웃 마을 기생집에 놀러 다니는 협객이 되었는가?

이런 연고 다 없으면 일정 한 번 오련마는, 오시지는 못하여도 일자 서신 부쳤으면 나의 소식 알련마는, 내 몸 죽을 꿈을 꾸니 이를 어찌하잔 말인가? 젊어 급제하여 남북의 병마사가 되었는가? 북경에 사신 가 계신가? 나를 아주 잊었는가? 이러할 리 만무하다.”

이렇듯이 혼자 푸념을 눈물 섞어 한숨질 제, 다른 마을 허봉사가 도붓길에 돌아간다. 점치라고 문 외치며 가는 소리, 서울 판수와는 판이하다. 소리를 폭 쥐어 지르는 듯이,

“점을 치소. 점을 치소.”

거드럭거리며 잘난척하다 묽은 똥을 디디고 미끄러져 안성장터의 풋송아지처럼 뒤처지며 철퍼덕거려 일어날 제, 두 손으로 똥을 짚어 왕십리 어미 풋나물 주무르듯 온통 주무르고 일어서서 뿌릴 적에, 옥 모퉁이 돌부리에 자끈하고 부딪치니, 말이 못된 네로구나. 똥 묻은 줄 전혀 잊고 입에 넣어 손을 불 제, 구린내가 코를 찌르니,

“어푸, 구려. 어느 녀석이 똥을 누었는고? 세 번 썩은 똥내로다.”

눈먼 것만 한탄하고 옥문 앞을 지날 적에, 온 옷을 걷어 안고 눈을 희번덕이고, 콧살을 찡그리고 막대를 휘저으며 휘파람 불 제 더듬어 오거늘, 춘향이 김형방 불러,

“저 판수 좀 청하여 주오.”

김형방이 판수를 불러주니, 저 계집아이 거동 보소. 판수 소리 반겨 듣고,

“허판수님 여보시오. 이리 와서 쉬어 가오.”

허판수 이른 말이,

“그 누가 부르는고? 말소리가 심히 익다.”

“애고, 나는 읍내 춘향이오. 그사이 댁에게 연고나 없고. 사망이나 많이 있소?”

허판수의 거동 보소. 한 번 길게 뻐기고 하는 말이,

“이 아이, 너 볼 낯이 전혀 없다. 원수의 생애로다. 요사이 어른의 심한 독감, 아이들 돌림병 쫓기도 하고, 푸닥거리, 방수보기, 중병에 산경 읽기, 집 이사에 안택경, 소경들의 모임에 참여하기, 동료들끼리 골패 노름, 다니다가 뼈가 갑자기 곯아 네 말 들은 지 오래건마는, 한 번도 와서 정답게 묻지 못하고 이렇듯 만나니 할 말이 전혀 없다. 그래서 요사이 몹시 맞았다 하니 상처나 만져보자.”

얼굴부터 내리 만져 젖가슴에 이르러는 매우 지체하는구나.

“애고, 게는 관계치 않소.”

대답하고, 차차 내려가다가 만지지 말아야 할 중요한 곳까지 다다라는,

“어뿔사, 몹시 쳤구나. 바로 정강이를 패었네. 제 아비 쳐 죽인 원수이던가?”

하며, 삼사미를 만지려고 몸을 굼실하는구나. 손을 빼어 바지춤을 풀어내고 꿇어앉아 오고감을 하려 하니, 춘향의 성품에 뺨을 개 뺨치듯 하여 보내려마는 겨우 참고,

“여보시오, 판수님. 내 말 듣소. 옛일을 곰곰 생각하니 설움이 샘솟듯 하오. 허판수님 소싯적과 우리 어르신네 소싯적에 앞뒤 집에 이웃하여 친하기가 형제와 같이 좋았고, 농담하며 술친구로 되어 다니실 제, 돈이 너 푼만 생겨도 판수님 우리 집에 와서 어르신네를 불러내어,

‘우리 오늘 공짜 술 얻어 먹세.’

어르신네 대답하고, 나를 안고 나가시면 허판수님 나를 보고 머리를 살살 쓰다듬고,

‘내 딸, 춘향아. 어디 보자.’

술집의 안고 가서 안주 주고 달래던 일 엊그제인 듯 하오마는, 오늘날 생각하니 어르신네를 다시 뵈온 듯하오. 옛말에 일렀으되 오랜 친구의 자식은 곧 내 자식이라 하였으니, 나는 우리 어르신네로 아오. 아무 허물 없으니 두루 만져주오. 시원하기 측량 없소.”

판수 놈이 춘향의 말 듣고, 맥이 풀려 한편 모으로 슬며시 떨어지며 열없이 하는 말이,

“고 녀석, 내 아이. 정신 좋다. 과연 그러한 법 있느니라. 그러하나 김패두가 치더냐, 이패두가 치더냐? 똑바로 일러라. 너 매질하던 놈, 내 설치하여 주마. 형방 패두놈들이 오일 오일 날 받으러 내 집 오니, 이후에 날 받으러 오거들랑 죽을 날짜를 받아 주어 생급살을 맞추리라. 사람 놈이 매질을 한들 그다지 몹시 하였으랴? 아무튼 신수점이나 쳐 보아라.”

하더라.

기사년(1869) 구월 이십오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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