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총람(산문)/남원고사

(경판)남원고사 - XII. 옥중 고초 (1/3)

New-Mountain(새뫼) 2020. 6. 28.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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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I. 옥중 고초

 

가. 내 딸이 너로 하여 옥중에서 죽는구나

 

허둥지둥 바삐 걸어 또 한 곳을 다다르니, 풍헌 약장, 면임들이 답인과 수결 발기를 들고 백성들에게 물품을 거둬들이는구나. 이달 이십칠일이 이 고을 원님 생일이라. 크고 작은 가리지 않고 나누어 돈과 쌀을 거둬들이니, 백성들의 원한이 하늘을 찌르니 집집이 울음이다.

길가에서의 상제가 하나 울고 가며 하는 말이,

“이런 관장 보았는가? 살인죄의 죄명을 적어 관청에 내었더니, 원님이 판결을 내리되, ‘얼마 되지 않는 백성 중에 하나 죽고도 어렵거든, 또 하나를 사형에 처하면 두 백성을 잃는구나. 바삐 몰아 내치어라.’ 하니 이런 일처리를 보았는가?”

이런 말도 얻어듣고 또 한 곳 다다르니 나무꾼 하나 <시절가> 하되,

“불쌍하고 가련하다. 이인들 아니 불쌍한가.

크나큰 옥방 안에 꽃이 시들고, 향이 사라지네. 한번 가서 무소식하니 애끓는 듯.”

어사가 듣고 감동한 눈물을 머금고 두루 돌아, 남원 경계에 들어서서 천천히 걸음하여 박석재를 올라서서 좌우 산천 둘러보니, 반갑도다, 반갑도다, 산도 예 보던 산이요, 물도 옛 보던 물이라. 위성의 아침비로 내리는 맑은 물은 나 마시던 푸른 물결이요, 진경의 푸른 나무들이 서 있는 넓은 뜰은 임 다니던 길이로다. 객사의 파란 버들 싱그러운 데 나귀 매던 버들이요, 푸른 버들 두 사이는 흰 베로 장막을 쳤던 데라. 동문 밖에 선원사는 한밤중에 종소리가 반갑도다.

광한루야 잘 있더냐. 오작교야, 무사하더냐. 좌편은 교룡산성, 우편은 영주고개. 춘향 옛집 찾아갈 제, 반갑고도 새로워라. 산천 경치 예와 같고, 푸르게 우거진 나무와 향기로운 풀은 예와 같고, 눈앞의 풍경들은 반갑도다, 반갑도다. 임의 얼굴 반갑도다. 푸른 바다에는 돛단배요, 해지는 푸른 산에는 돌길로 돌아가는 스님이라. 날았다 솟았다 바로 떨어진 물줄기 삼천 척이니 폭포수 내려가듯, 넓디넓은 논에는 백로가 날아오르고 눈 깜짝할 사이에 내려가듯, 마음이 경황이 없어 바쁘게 춘향의 문 앞에 다다르니, 옛 모습이 전혀 없다.

행랑채 이그러지고 안채는 쓰러지고, 회칠했던 앞뒤 담도 간간이 무너지고, 창 앞에 누운 개는 기운 없이 줄다가 옛 손님을 몰라보고 컹컹 짓고 내닫는다. 황폐한 섬돌에 푸른 풀은 옛 자취가 희미하고, 창밖의 옛 경치는 푸른 대와 푸른 솔뿐이로다. 대문짝도 간데없고 중문간도 무너지고, 앞뒤 벽은 자빠지고 서까래는 속바지 벗고, 방안에는 하늘 뵈고 마당에는 꼴을 베고, 아궁이 토끼 자고 부뚜막에 다람쥐 기고, 물항아리에 땅벌의 집, 밥솥에는 개미집, 뒤 연못도 다 메이고 석가산도 흩어지고, 홍도 벽도 부러지고 화초분도 깨어지고, 큰 개는 비루먹고 작은 개는 벌레가 파 먹고, 벽 가득한 글과 그림은 으스러지고 그런 세간 다 없으니, 주인 없는 집이 비슷비슷하여 예전 모양이 전혀 없어, 눈을 들어보니 근심스럽고 온 마음이 슬프도다. 불쌍하고 처량하다.

한숨 지며 하는 말이,

“저의 집이 이러하니, 제 일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도다.”

한숨을 지으며 탄식하고 하고 두루 구경하다가, 황혼이 질 때를 기다려서 대문간에 들어서서,

“춘향 어미 게 있는가?”

춘향 어미 거동 보소. 노랑머리 비껴 꽂고 몽당치마 둘러치고 옥바라지 다니다가, 질탕관에 죽을 쑤니, 죽탕관에 불사를 제 젖은 나무에 불을 붙여 눈물 흘려 성화한다. 한숨도 훌훌 내리 쉬며 가슴도 쿵쿵 두드리고, 머리도 박박 긁으면서 부지깽이도 들어 던지며,

“날 잡아갈 귀신은 어디에로 갔누? 물에 빠져 죽으려 하련마는 저를 두고 어찌하리. 자는 듯이 죽고 지고. 이 말 저 말 할 것 없이 할 것 없이 이가 놈이 내 원수이라.”

한창 이리 원망할 제, 부르는 소리 알아듣고 팔짝 뛰어 내달으며,

“거 누구 와 계시오?”

어사가 대답하되,

“내로세.”

“내라 하니, 동편쪽 굴뚝의 아들인가. 비렁뱅이도 눈이 있지. 집 몰골 보아하니 무엇을 주리라고 어두운 데 들어 왔노? 옥에 갇힌 딸 먹이자고 죽 끓이옵네. 다른 데나 가서 보소.”

“이 사람, 내로세.”

“오호, 김풍헌님 와 계시오. 돈 한 돈 꾸어온 것 수이 얻어 가오리다. 너무 그리 재촉 마오. 내 설운 말 들어보오. 금산서 온 옥섬이는 신관 사또 수청들어 밤낮으로 음탕하고 난잡하게 즐기면서 남원 읍내 크고 작은 일을 제게 먼저 청탁하면 무엇이나 틀림없이 영락없고, 원님이 몹시 반해 저의 아범 행수군관, 제 오라비 서쪽 창고지기, 읍내 논이 열섬지기, 군청 뒤 밭 보름갈이, 집안 살림살이 모두 치면 오륙천금 되었으니, 춘향의 짓을 보오. 요런 것을 마다하고 날까지 못살게 굽네.”

“이 사람, 내로세.”

“오호 재 너머 이풍헌 자제인가?”

“아니로세. 자세히 보소. 나를 몰라보나?”

“옳아, 이제야 알겠네. 자네가 봉화재 사는 어린돌인가? 이 사람아 지난번에 죽값 칠 푼 진 것 주고 가소. 요사이 어려워 못 견디겠네.”

어사 민망하여 대답하되,

“그다지 눈이 어두운가? 정신이 없나? 내가 전 책방 도련님일세.”

춘향 어미 콧방귀 뀌고 하는 말이,

“이놈의 자식이 어디에서 났누? 고집 센 장사꾼의 자식놈이로다. 늙은 것이 곧이듣고 불러들여 재우거든 밤 든 후에 짭짭한 것 도적하여 가려는가? 하루를 온전하게 지내다가 같잖은 자식 다 보겠다.”

등을 밀어 내치거늘, 어사가 어이없어 웃고 하는 말이,

“이 사람 망령일세. 나의 사정 들어보소. 운수가 불행하여 과거도 못하고, 벼슬길도 끊어져서 집안 재산 탕진하고 정처 없이 떠돌며 빌어먹으며 다니더니, 우연히 여기 와서 소문을 잠깐 들으니, 자네 딸이 나로 하여 엄한 형벌을 무겁게 받고 옥에 들어 죽게 된다 하니 저 볼 낯이 없건마는, 옛 정리를 생각하고 차마 그저 가지 못하여 한 번 보려 찾아왔네. 이미 내가 여기 왔으니, 제나 잠깐 보고 가세.”

춘향 어미 이 말 듣고 깜짝 놀라, 뱁새눈을 요리 씻고 조리 씻고, 역력히 쳐다보니 샐 데 없는 네로구나. 두 손뼉을 마주치며 강동강동 뛰놀면서,

“애고, 이것이 웬일인고. 이 노릇 보게. 매우 잘 되었다. 옷을 백 군데나 누덕누덕 기운들 분수가 있지요. 푸른 바다 뽕밭 되고, 뽕밭이 푸른 바다 된다 한들, 저다지 변하였나. 잘 되었네. 큰 가뭄 칠 년에 비 바라듯, 구 년 홍수에 해 바라듯, 하늘같이 바라고 북두같이 믿었더니 이를 어찌하잔 말인고. 애고 애고, 설운지고.”

허옇게 센 머리카락 펴 버리고 옷자락을 드립다 잡고 가슴을 탁 치받치며 온몸을 쥐어뜯고 악을 쓰며 하는 말이,

“날 죽여주오. 내가 살아나서 무엇할까. 옥 같은 나의 딸이 너로 하여 옥중에서 죽게 되니, 모녀가 주야장천 믿고 바라던 일, 이제는 하릴없네. 이를 장차 어찌할꼬?”

어사가 기가 막혀 도리어 달래는 말이,

“너무 과도히 굴지 마소. 사람의 일은 모르나니, 너무 괄시 마소. 음지에도 볕 들 적이 있나니.”

늙은 것이 낌새는 한몫 보는지라. 눈치채고 더듬어 풀쳐 하는 말이,

“여보 서방님, 내 말 듣소. 내가 모두 홧덩이요, 하는 것이 열병이라. 늙은 것이 말이 망령이니 조금도 노여워 마오. 저리되기도 팔자로세. 저를 옥에 넣은 후에 집안의 살림살이 모두 팔아 옥바라지하는 중에, 이 집인들 내 집이라고, 환자에 개인 빚이 태산이라. 견디다가 못하여 집을 팔아 수습한 후 집도 없는 거지라. 어찌 아니 설울쏜가?”

이렇듯이 수작하며 짧은 밤을 길게 샐 제, 상단이 어사 보고 목이 메여 말을 못하며 식은밥을 데워 놓고,

“서방님 시장한데 어서 요기나 하옵시오. 아기씨 말씀이야 한입으로 어찌 다 하오리까?”

어사가 기특히 여겨 요기하고, 분한 마음과 슬픈 뜻이 가슴에 천 마리 잔나비 뛰노라 이리저리 뒤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겨우 밤을 새울 새, 오경 북이 울리거늘, 춘향 어미 불러 데리고 상단이 등불 들려 앞세우고 옥중으로 향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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