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며 배우며/시 더읽기

세한도 백인 백색(세한도 시모음)

New-Mountain(새뫼) 2018. 4. 9.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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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 최두석

 

고드름 기둥

층층이 얼어붙은

층암절벽에

소나무 한 그루

눈을 이고 서서

희망과 절망의 수십 년 세월

안간힘으로 뻗어간

뿌리의 용틀임과

뿌리의 엉키는 자리에 터잡은

어린 진달래의

녹두만한 꽃눈을

바람 타고 날으는

기러기 소리 들으며

시리게 바라보네.

 

 

세한도 속으로

- 전인식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누군가 만들어 놓은 책속의 길 따라 쫓는

나에게도 봄은 올까, 노래할 수 있을까

 

환호 지르며

세상 한가운데 알몸으로 뛰쳐나갈

유레카의 순간을 위해 오늘 나는

사철 내내 눈발 펄펄 날리는 세한도속으로

저벅 저벅 큰 걸음으로 걸어들어야겠다

 

솔가지 부러뜨리는 바람 가슴 안으로 받으며

사각의 흰 세상 밖 어디론가

간절히 손 뻗는 곳으로 흐르는 더운 피 한 점

갈라터지는 몸속에 숨길 수 있다면

봄 햇살 그리워 흘러내리는 눈물들 주렁주렁

허연 소금덩어리 고드름으로 얼어붙는

눈 못 뜨는 형벌로 서 있어도 괜찮아라

 

세상 가득한 눈밭 다 녹을 때까지

겨울을 인내하다 껑껑 얼어붙은 내 몸

핏빛 붉은 진달래 꽃잎으로 눈을 뜰 때

비로소 살아 한번 가질 기쁨으로

눈부실 것을

 

나는 오늘

사철 내내 눈발 펄펄 날리는 세한도속으로

 

저벅 저벅 큰 걸음으로 걸어들어야겠다

 

 

세한도

- 도종환

 

소한이 가까워지자 눈이 내리고 날이 추워져

그대 말대로 소나무 잣나무의 푸르름은 더욱 빛난다

나도 그대처럼 꺾인 나무보다 꼿꼿한

어린 나무에 더 유정한 마음을 품어

가지를 매만지며 눈을 털어낸다

이미 많은 새들이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난 지 오래인데

잔가지로 성글게 엮은 집에서 내려오는 텃새들은

눈 속에서 어떻게 찬 밤을 지샜을까

떠나지 못한 새들의 울음소리에 개어

어깨를 털고 서 있는 버즘나무 백양나무

열매를 많이 달고 서 있는 까닭에

허리에 무수리 돌을 맞은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소나무 잣나무에 가려 똑같이 푸른 빛을 잃지 않았어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는 측백나무

폭설에 덮인 한겨울을 견디는 모든 것들은

견디며 깨어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겹게 아름답다

발 아래 밟히며 부서지는 눈과 얼음처럼

그동안 우리가 쌓은 것들이 무너지고 부서지는 소리

대륙을 건너와 눈을 몰아다 뿌리는

냉혹한 비음의 바람소리

언제쯤 그칠 것인지 아직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기나긴 유배에서 퓰려나 돌아가던 길

그대 오만한 손으로 떼어냈던

편액의 글씨를 끄덕이며 다시 걸었듯

나도 이 버림받은 세월이 끝나게 되면

내 손으로 떼어냈던 것들을 다시 걸리라

한 계단 내려서서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그대 이름을 불러보리라

이 싸늘한 세월 천지를 덮은 눈 속에서

녹다가 얼어붙어 빙판이 되어버린 숲길에서

 

 

세한도 가는 길

- 유안진

 

서리 덮인 기러기 죽지로

그믐밤을 떠돌던 방황도

오십령(五十嶺)고개부터는

추사체로 뻗친 길이다

천명(天命)이 일러주는 세한행 그 길이다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을

닳고 터진 앞발로

뜨겁게 녹여 가라신다

매웁고도 어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

 

자욱자욱 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세한도

- 고재종

 

날로 기우듬해가는 마을회관 옆,

청솔 한 그루 꼿꼿이 서 있다.

 

한때는 앰프방송 하나로

집집의 새앙쥐까지 깨우던 회관 옆,

그 둥치의 터지고 갈라진 아픔으로

푸른 눈 더욱 못 감는다.

 

그 회관 들창 거덜내는 댑바람 때마다

청솔은 또 한바탕 노엽게 운다.

거기 술만 취하면 앰프를 켜고

박달재를 울고 넘는 이장과 함께.

 

생산도 새마을도 다 끊긴 궁벽, 그러나

저기 난장 난 비닐하우스를 일으키다

그 청솔 바라다보는 몇몇들 보아라.

 

그때마다, 삭바람마저 빗질하여

서러움조차 잘 걸러내어

푸른 숨결을 풀어내는 청솔 보아라

 

나는 희망의 노예는 아니거니와

까막까치 얼어죽는 이 아침에도

저 동녘에선 꼭두서니빛 타오른다

 

 

세한도 벼루 읽기

-이근배

 

1

바람이 세다

산방산(山房山) 너머로 바다가

몸을 틀며 기어오르고 있다

볕살이 잦아지는 들녘에

유채 물감으로 번지는

해묵은 슬픔

어둠보다 깊은 고요를 깔고

노인은 북천을 향해 눈을 감는다

가시울타리의 세월이

저만치서 쓰러진다

바다가 불을 켠다.

 

2

노인이 눈을 뜬다

낙뢰(落雷)처럼 타 버린 빈 몸

한 자루의 붓이 되어

송백의 푸른 뜻을 세운다

이 갈필(渴筆)의 울음을

큰선비의 높은 꾸짖음을

산인들 어찌 가릴 수 있으랴

신의 손길이 와 닿은 듯

나무들이 일어서고

대정(大靜) 앞바다의 물살로도

다 받아낼 수 없는

귀를 밝히는 소리가

빛으로 끓어넘친다.

노인의 눈빛이

새잎으로 돋는다.



세한도

- 송수권

 

먹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가지 끝 위로 치솟으며 몸놀림하는 까치 한 쌍

이 여백에서 폭발하는 울음…….

먹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고목나무 가지 끝 위에 까치집 하나

더 먼 저승의 하늘에서 폭발하는 울음…….

한 폭의 그림이

질화로같이 따숩다.

 

 

유배지에서 보내는 김정희의 편지 - 이천리 대해 밧게 잇난 마암

- 정일근

  

세한도를 그리는 밤 오늘따라 대정바다는 참으로 고요합니다 부인. 지난 달 초사흘 가복을 통해 보내주신 서책과 편지를 이 달 하순 늦게야 반가이 받아 읽으며, 이순의 나이에도 천 리 뭍길과 천 리 물길 큰 바다를 건너온 그리운 묵향내음에 그만 울컥 눈물이 솟아올라 한참이나 바다에 나가 망망한 제주바다 끝을 바라보며, 그 끝너머 지붕과 흰 옷 입은 사람들과 낯익은 길들이 하마 뵐까 돋움발을 하며 오래오래 서있었습니다. 대저 그리움이란, 불시에 찾아와 대정마을 마른 풀 한 포기, 버려져 잠든 돌멩이 하나 남김없이 흔들어 깨워 윙윙윙 울리다가 바다로 달아나는 붙잡을 수도 없는 무형의 저 겨울바람만 같아, 문득문득 지난 날들이 찾아올 때면 참으려 참으려 해도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들을 이제는 오랜 버릇인 양 어찌할 수 없습니다. 부인 오늘 저녁도 더운 물에 찬밥을 말아 먹고 내 배소 앞 늙은 소나무에 기대어 서서 날 저물고 샌다한들 내 이름 부르며 찾아올 이 없는 위리안치, 이보다 이천 리 밖 더욱 쓰리고 아픈 마음으로 외로울 그대를 생각하였습니다. 일찍이 정치와 당을 멀리하고 시와 글씨에 열중하였더라면 뜬구름 같은 한세상 은은한 묵향과 힘찬 시문으로 경영하며, 이렇게 늙어 서로 쓸쓸하고 등 시린 이 나이에 작은 초가 한 칸으로도 넉넉할 것을, 마주대는 한 뼘 등덜미로도 치운 겨우살이 또한 지극히 따뜻할 것을, 이 밤늦도록 홀로 먹을 갈아 세한도를 그리며 언뜻언뜻 덮쳐오는 살아서는 다시 만나지 못할 죽음의 아득한 예감들을 애써 떨치며, 뒤돌아보노라면 내 배소 뒤대밭 사이로 쏴쏴 몰려가는 겨울바람 소리보다 더욱 허허로운 지난 세월들을 하얀 여백으로 비워봅니다. 우리가 다시 만나 사랑하며 살아갈 날들 또한 하얀 여백으로 묵묵히 남겨둡니다

 

 

세한도

- 신현정

 

눈 펄펄 날리는 오늘은 내 나귀를 구해

그걸 타고 그 집에 들르리라

그 집 가게 되면

일필휘지一筆揮之, 뻗치고 휘어지고 창창히 뻗은 소나무 아래

지붕 낮게 해서 엎드린 그 집 주위를

한 열 번은 더 돌게 되리라

우선 당호堂戶에 들기 전 헛기침을 해보고

그리고는 내 타고 간 나귀를 살그머니 소나무 기둥에

비끌어 매놓고는

그리고는 냅다 눈발 속으로 줄행랑을 치리라 하는 것이다.

 

 

세한도

- 곽재구

 

수돗물도 숨차 못 오르는 고지대의 전세방을

칠년씩이나 명아주풀 몇 포기와 함께 흔들려온

풀내 나는 아내의 이야기를 나는 또 쓰고 싶다

방안까지 고드름이 쩌렁대는 경신년 혹한

가게의 덧눈에도 북풍에도 송이눈이 쌓이는데

고향에서 부쳐온 칡뿌리를 옹기다로에 끓이며

아내는 또 이 겨울의 남은 슬픔을

뜨개질하고 있을 것이다

은색으로 죽어 있는 서울의 모든 슬픔들을 위하여

예식조차 못 올린 반도의 많은 그리움을 위하여

밤늦게 등을 켜고

한 마리의 들사슴이나

고사리의 새순이라도 새길 것이다

 

 

세한도

- 박현수


1

어제는

나보다 더 보폭이 넓은 영혼을

따라다니다 꿈을 깼다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그 거리를

나는 눈물로 따라갔지만

어느새 홀로 빈 들에 서고 말았다

어혈(瘀血)의 생각이 저리도

맑게 틔어오던 새벽에

헝크러진 삶을 쓸어올리며

첫닭처럼 잠을 깼다

 

누군 핏속에서

푸르른 혈죽(血竹)을 피웠다는데

나는

내 핏속에서 무엇을 피워낼 수 있을까

 

 

2

바람이 분다

가난할수록 더 흔들리는 집들

어디로 흐르는 강이길래

뼛속을 타며

삼백 예순의 마디마디를 이렇듯 저미는가

내게 어디

학적(鶴笛)으로 쓸 반듯한

뼈 하나라도 있던가

끝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래더미 같은 나는

스무해 얕은 물가에서

빛 좋은 웃음 한 줌 건져내지 못하고

그 어디

빈 하늘만 서성대고 다니다

어느새

고적한 세한도의 구도 위에 서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이란

시누대처럼

야위어가는 것

 

 

세한도

- 오세영


그대가 기다리는 건

청맹과니,

그대가 기다리는 건

박수 무당,

빈 사립 문밖엔 눈 내리는데,

발바닥이여, 발바닥이여, 발바닥이여,

 

그대가 그리는 건

길 잃은 두견,

물감으로 눈 그리면

날개를 치고

世寒圖 노송 가지 별빛에 떤다.

눈구녕이여, 눈구녕이여, 눈구녕이여,

 

깊은 밤 새록새록 녹는 삼경에

차 달여 마른 입술 적시는 것은

애증의 등잔불 심지 낮추어

외로움 지키려는 심사이어니,

 

그대가 부는 건

깨진 옥피리

달빛 아래 불면

기침이 나고

갈대숲 서걱이는 찬바람소리,

콕구멍이여, 콧구멍이여, 콧구멍이여.



세한도

- 정호승

  

영등포역 어느 뒷골목에서 봤다고 하고

청량리역 어느 무료급식소에서 봤다고 하는

아버지를 찾아 한겨울 내내

서울을 떠돌다가

동부시립병원 행려병동으로 실려가

하루에도 몇 명씩 죽어나가는 행려병자들을 보고 돌아와

늙은 소나무 한그루 청정히 눈을 맞고 서 있는

아버지의 텅 빈 방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다

바람은 차고 달은 춥다

솔가지에 내린 눈은 더이상 아무 데도 내릴 데가 없다

젊은 날 모내기를 끝내고 찍은

아버지의 빛바랜 사진 옆에 걸려 있는

세한도 속으로

새 한마리 날아와 앉아 춥

 

 

세한도

- 김학산

 

 

허옇게 불타오르는 망각의 소금밭

짙푸른 하늘 창고에서 쏟아지는

고생대의 투명한 뼈 가루들

삶이 필시 꿈이라면

펄펄 끓는 피를 풍화하자

저 환장할 수묵화 한 장

우리 모두 봉두난발의 꿈을 깨기 전

지나 온 길들은 모두 지워

우둔한 짐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리니

너무 일찍 생을 알아버린 사내여

네 족적 어딘가에 푸른 오아시스 있거든

오늘 밤 사과 속살 같은 여인을 품어

태양빛 애를 낳으라



세한도의 꿈

- 유응교

 

찬 물결

바다 건너

혈육의 정을 떼어놓고

유배된 육신은

세월의 흐름 속에

시들고 외로워도

그 영혼의 꿈은

시들 줄 모른 채 담백하다.

 

세상이 모두

버리고 돌아서도

권력과 영화를 멀리하고

귀한 책을 보내준 제자의

의리는 푸르게 살아있고

세파에 찢기고 휘어진

노송의 꿈은

까슬까슬하고 꼿꼿하다.

 

눈마저도 없는 겨울

새 한 마리

찾아오지 않는 빈들에

홀로 누옥에

잠 못 들어 뒤척여도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윽하고

동트는 새벽을 향한

붓끝의 꿈은

그지없이 차고 영롱하다.



세한도

- 권경업


완당께서는 출타중이십니다

보내준 서책,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 가득하여

곡간의 곡식처럼 쌓아두었으니

빈한(貧寒)한 삶이지만

춥지 않다라는 말씀 계셨습니다

 

작은 산장 옆 가지성긴 적송(赤松) 대신

잎 진 굴참나무 아래

겨울 손님을 맞는 취밭목 산사람 민병태

 

 

세한도 1

- 강현국

  

너를 사랑한 한때의 소낙비

너를 사랑한 한때의 정거장

너를 사랑한 한때의 비린내

너를 사랑한 한때의 수평선으로부터

 

너를 사랑한 한때의 수평선

너를 사랑한 한때의 비린내

너를 사랑한 한때의 정거장

너를 사랑한 한때의 소낙비까지

 

소낙비는 오래 참았던 눈물 같고 절제 절명의 한풀이

같고 비 내리는 정거장엔 늘 이별 슬픈 내 사랑의 판잣

집이 있고 비린내로부터 식욕을 잃고 비린내로부터 목마른

새벽이 오고 수평선은 아득하므로 체념은 치욕보다 아득하고

그러나 소낙비는 멎기 위해 쏟아지고 그러나

정거장엔 우산장수 곁에 신기료장수 부부가 있고 그러나

비린내로부터 광활한 대지의 입덧은 시작되고 그러나 수평선은

아득한 당신의 뒷모습 같고 멀리 가는 향기 같고

 

-소외와 결핍을 노래하는 감미로운 절망의 언어들-

 

 

그대에게 김정희 묵화 세한도

- 백우선

 

그대는 이토록 여전하신가

온갖 풍파 맞받으며,

썩고 모지라진, 멀고 외딴 노송 곁

그대는 뿌리로 머무시는가

 

 

세한도

- 조정권

 

나의 집은 앓아누운 집

잎과 가지가 좋은 나무

하늘을 보며 생각

하는 방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큰 방

나의 집은 주인이 눈구경 나가고

바람만 한가로이 마당을 쓸고 있다.

 

 

歲寒圖 199862,

- 강인한

 

비 오는 날

우산을 어깨에 걸치고 더러는 우산도 없이

굽은 등허리에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일렬횡대로 쪼그려앉아

밥을 먹는다

용산역 앞 광장

담벼락을 앞에 하고 주기도문을 마친 다음

다같이 슬픔으로 따뜻한 국물을 떠서

무료 제공의 한 끼 식사로

하루를 사는 사람들

집을 나온 우리 나라의 아버지들

빗속에 나란히 앉아서

추운 겨울 하늘 오선지에 앉은 참새들처럼

우산을 어깨에 걸치고 더러는 우산도 없이

오전 열한 시에 땅바닥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

 

 

세한도

- 김선태

 

비틀비틀 따라온 길이 하나 가파르게 집에 닿는다

외모진 바다 기슭, 집은 그렇게 엎드려 있다

바다에는 무거운 침묵의 섬들 여럿 떠 있고

날마다 황혼은 외론 마음을 불태우며 떨어진다

 

솔가지 꺽어 아궁이 불 지필 때 나는 저녁연기

저 혼자 눈물겹다, 꺼질 듯한 등불을 내건 집

방바닥처럼 차디차다, 이불 한 장에 덮은 마음

거기 공복의 쓰린 희망 하나 단정하게 누워 있다

 

유리창 너머로 밤이 페인트처럼 흘러내린다

돌연 어제와 오늘의 풍경을 지우는 어둠은 고맙다

불을 끄고 마음도 끄니 세상이 한없이 넉넉하다

밤새 파도가 물어뜯는지 바다 기슭이 온통 아프다

 

지극하구나, 상처를 사납게 읽고 가는 저 바람소리

여기까지 와서야 나는 세상을 다시 본다

어둠 한 장 위에 엎어져 시를 지우고 시를 쓴다

유리창에 성에꽃 만발하다



()세한도

- 고영섭

 

大井(대정)향교 대성전 앞마당엔 소나무 한 그루가 겨울을 지키고 서 있었다 굽히되 꺾이지 않는 탄력이 붙은 늘푸른 나무들, 마당 너머 섬돌 아래선 진사과 생원과 학동들의 기숙사 동재 서재가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었다 수신 독행 박학 진심방에서는 孔夫子(공부자)의 후손들이 웅얼웅얼 몸을 닦았고 마루 아래서는 삽살개 한 마리가 또 그 소리를 웅얼웅얼 받아넘기고 있었다 구비구비 메아리를 넘겨받은 단산 능선 위에서는 유배온 完堂(완당) 김정희가 가파도와 마라도 사이를 오락가락 넘나드는 정치판 철새들을 매운 회초리로 내려치며 세한도 한 폭을 그리고 있었다.

 

 

세한도 1997~1999 IMF 상황

- 이승복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물었다

구겨진 발자국이 고인 빗물 담아

중얼거린다. 빈 약속을 가슴에 안고

망망대해로 나왔다고 항해의 길

파도의 등줄기가 뼈대를 들어낼지라도

나침판은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두렵지 않았다. 평상시 안개에 뒤덮여

앞뒤 구분 못하고 항해일지는 뒹굴고

있었다.

갑자기 등댓불이 나가고 우왕

좌왕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되어 밧줄로

찬찬 묶어둘 수밖엔

밧줄은 아직 실하다

조타수 잡은 손이 급히 회전을 시킨다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겨주랴

건져 올릴 별 무더기를 소라와 고동의

큰 귀에 담아 전설의 소리들을

전할 수 있을까. 어둠의 바다는

머리풀어 검은 숲을 만드는데

두껍아두껍아 헌집 줄께 새집다오

아이들 합창이 귀를 때린다

얼얼하다

 

 

유리 끼운 세한도(歲寒圖)

- 황지우

  

연말 연시, 휴가 떠난 아파트

우면산 겨울 나뭇가지 밑을

까치가 U를 그리며 날아다닌다

베란다가 한 4백호(?) 새한도 한 점,

유리 끼워 표구해준다

잠시 후 깃털이 떨어지는 액자 안

저 추운 집에 녹차 한 잔 넣어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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