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며 배우며/시 더읽기

황지우의 "바퀴벌레는 바퀴가 없다"

New-Mountain(새뫼) 2016. 10. 20.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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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는 바퀴가 없다/황지우

 

 

"짐승 같은 놈!" (이것은 아내가 한 말)

"바퀴벌레도 즘생이야, 여보." (이것은 내가 한 말)

그러나 바퀴벌레는 근엄한 검정색 예복, 아니 정복을 입었다.

무슨 일을 감행하는 집단들처럼

틈틈에 잠복해 있다가

때가 되면 기어나와, "맞어",

기어온다.

"짜식들, 기어나오긴 왜 기어나와?"

기어나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서

그리고 한번 무너진 그 길을 따라

자꾸 자꾸 기어 나온다.

식생활(食生活)에서 성생활(性生活)에 이르기까지

나의 사생활(私生活) 전역에 투입되어,

"여보, 바퀴벌레 때문에 못 살겠어요.

우리 이살 가든가 이민을 가든가 해야지."

비닐 장판을 열면 겨우내 새끼들을 수두룩수두룩 까 놓고

이것들은 생명체일까, 병원균일까?

개체일까, 집단일까?

도무지. "이놈들에게도 영혼이 있을까?"

수채 구멍 속에서, 구정물 찌꺼기통에서

벽으로, 찬장 그릇 속으로, 안방으로, 책장 사이로, 이불 밑으로.

어쩌면 우리가 잠든 새 콧구멍 속으로, 머리칼 속으로, 꿈꾸는 송과선(松果腺)에까지

공룡 크기만큼 확대되어 엄습해 오는

이 야간 침입자들.

어느새 우리와 공생공사(共生共死)하자는 듯,

어느새 묵인된 이 범법자들.

오줌 누러 불을 켜면, 화다닥, 동작 그만!

들킨 바퀴벌레는 젖은 세멘트 벽에 붙어서,

그놈은 그놈대로 비상을 걸고, 부지런히 더듬이를 돌려대며

나의 접근을 관찰, 경계태세에 들어간다.

그놈은 지금 그놈의 사선(死線)에 엎드려 있다.

그 사선은 나의 사선이다. "이번이 기회야.

놓쳐선 안 돼." 여차하면 이놈은 눈 깜짝할 사이에

틈 속으로 매복해 버린다.

"죽여요.. 죽여 !" : 아내도 마루 끝에서 소리친다.

긴장 : "이놈, 우리 현세(現世)의 사생활을 분탕칠하는

이 더러운 놈, 네놈의 그 더러운 , 그 지상에서의 몸을

죽여 주마. 깨끗한 몸으로 교환하여 다시 태어나거라."

중얼거리는 내 마음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어하는

이놈을 갖다가, 슬리퍼로, 그냥,

 

!

 

(쳤다)

(나는 죽였다)

 

뱃때기가 터져나와, 새하얀 피 같은 이물질을,

내장(內臟)인지, 지놈이 처먹은 밥인지, 를 내놓고

그의 더듬이를 여러 번 흔들며, 그의 다족을 흔들며(, 발버둥치며), 그러나 무성(無聲)으로

죽어 간다.

죽여 놓고도 아내와 나는 끔찍해 한다.

그리고 즐겁다.

바퀴벌레는 바퀴가 없다 :

수레를 끌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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