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록(辛未錄)
신미록 권지단
대청(大淸) 가경(嘉慶) 황제 즉위 십육 년은 즉 아조(我朝) 성상(聖上) 십이 년이라. 이때 평안도 청북(淸北)이 누년(累年) 겸세(歉歲)를 만나 사민(四民)이 생업(生業)을 이루지 못하는지라. 황여(黃輿) 우민(愚民)이 성명(聖明)하신 덕택을 알지 못하고 외람히 천위(天威)를 거스르니 어찌 차악(嗟愕)하지 않으리오.
이때 용강(龍岡) 홍경래(洪景來)와 가산(嘉山) 이희저(李禧著)와 곽산(郭山) 우군칙(禹君則)이 서로 모의할새, 가산 다복(多福)동(洞)은 수목(樹木)이 무성하고 동학(洞壑)이 깊고 넓어 가히 천만 인을 용납(容納)할 바이라. 날마다 재물로 집에 모으기를 일삼고 재역(在逆)한 말로 소일(消日)하더니, 일일은 이희저가 우군칙에게 이르기를,
“우리 대사(大事)를 모계(謀計)한 지 오래더니, 이제 청북이 재년(災年)을 당하여 인심들이 대변(大變)하니, 이때를 타 선생은 묘계를 생각하라.”
우군칙 이르기를,
“이제 백성이 기갈(飢渴)을 견디지 못하여 망명하는 자가 많으니, 심복지인(心腹之人)을 가리어 말을 전파(傳播)하되, 은점(銀店)을 배설(排設)하여 역가(役價)를 후히 준다 하고, 전파한 후에 일변 기계(奇計)를 가지고 먼저 박천(博川) 진두(津頭)에 나아가 일을 도모함이 어떠하뇨?”
이희저가 대희(大喜)하여 즉시 말 잘하는 사람을 가리어 가산 박천 지경(地境)에 보내었더니, 수일(數日)이 못되어 누백여(累百餘) 명 사람이 이르러 본즉, 은점은 아니요, 난(亂)을 짓는 줄 알되,
이미 무뢰지배(無賴之輩)요, 적괴(敵魁) 등이 만단(萬端)으로 개유(開諭)하고 일변으로 병기(兵器)를 나눠 주며 군복을 마련할새, 머리에 호피(虎皮)로 마래기 모양 같이 만들어 홍선전(紅縇氈)으로 위를 두르고, 청화포(靑化布)로 각각 등거리 한 벌씩 하여 입히니 그 모양이 호병(胡兵) 같더라.
이날 우군칙 등이 술을 준비하고 우양(牛羊)을 잡아 군사를 호궤(犒饋)하고, 우군칙이 스스로 모사(謀士)가 되어 호(呼)하기를, 우선생이라 하며, 홍경래로 대원수(大元帥)를 삼고, 곽산 김사용(金士用)으로 부원수(副元帥)를 삼고, 진사 김창시(金昌始)로 모사(謀士)를 삼고, 홍총각(洪總角)으로 좌선봉(左先鋒)이요, 지천 이제초(李濟初)는 후군장(後軍將)이 되어 각각 조발(調發)하는지라.
우군칙은 윤건(綸巾)을 쓰고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백우선(白羽扇)을 들었으며, 홍경래는 백금 투구에 홍금(紅錦)갑(甲)을 입으며 장창(長槍)을 들고 수기(帥旗)에 썼으되,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 사명(泗溟)이라.’ 하고, 제장(諸將)을 지휘(指揮)할새,
김사용 이제초로 일지병(一枝兵)을 거느려 곽산, 박천, 철산(鐵山), 선천(宣川) 네 고을을 치라 하고, 홍경래는 제장을 거느려 일지병을 몰아 밤에 가산을 취할새, 이때는 신미년(辛未年) 납월(臘月) 염간(念間)이라.
먼저 가산 좌수(座首) 윤원섭(尹元燮)에게 통하여 내응(內應)을 삼고, 이 날 밤 삼경(三更)에 효성령(曉星嶺) 뒷길로 군사를 몰아 가산에 이르니 월색(月色)이 희미하고 경점(更點)이 깊었는지라.
홍경래 등이 동헌에 이르러 대호(大呼)하기를,
“군수(郡守)는 빨리 항복하여 의병(義兵)을 영접(迎接)하라. 불연즉(不然則) 네 머리를 베리라.”
군수가 깊은 잠에 놀라 급히 창을 여니 화광(火光)이 충천(衝天)한 가운데, 홍갑(紅甲) 입은 대장이 창을 들고 수백 군을 거느려 둘렀는데, 사면에서 항복하라 하는 소리가 천지진동하니, 군수가 내심에 헤오되,
‘차라리 몸이 죽어 위로 나라를 갚고, 아래로 신절(臣節)을 완전히 하리라.’
하고 인하여 적장을 꾸짖기를,
“어떠한 도적이기에 이리 항거(抗拒)하느뇨?”
적장 이르기를,
“우리 등이 천리(天理)를 좇아 병(兵)을 일으켰으니, 잔명(殘命)을 아끼거든 빨리 항복하라.”
군수가 대노(大怒)하여 대질(大叱)하기를,
“국운이 불행하여 너희 등이 창궐(猖獗)하니, 어찌 도적에게 무릎을 꿇어 살기를 도모하리오. 너희는 다만 죽일 따름이라.”
홍경래, 대노하여 창을 들고 달려 인신(印信)과 병부(兵簿)를 앗고자 하니, 군수가 좌수(左手)에 병부를 들고, 우수(右手)에 인신을 가져 꾸짖기 마지아니하되, 홍경래 창을 들어 하수(下手)하니 군수가 또 힘껏 꾸짖으니, 군수가 머리를 베이니 군수의 아들이 책실(冊室)에 있다가 들리는 소리에 놀라 나올 즈음에, 적장이 또한 칼로 머리를 베이니, 또 신체(身體)가 당상(堂上)에 거꾸러져 유혈(流血)이 낭자(狼藉)한 지라.
이때 군수의 아이 잠이 깊었다가 요란한 소리에 놀라 급히 나오니, 도적이 또한 창으로 찌르거늘, 당하(堂下)에 거꾸러져 중히 상(傷)하였으나 다행히 죽기는 면한지라. 이제 본군(本郡)에 한 관비(官婢) 있으니 이름은 운랑이라.
가무(歌舞)와 자색(姿色)이 출중(出衆)한 고로 군수가 도임(到任) 후에 시측(侍側)에 두어 주야 떠나지 아니 하더니, 이 날 밤에 동헌(東軒)의 있다가 적병(敵兵)을 당하매, 창검을 피하여 몸을 감추었다가 도적이 물러감을 보고, 창황(?怳)이 동헌에 나아가니, 촛불이 희미한 중에 머리 없는 신체(身體) 방중(房中)에 있거늘, 운랑이 이 신체를 붙들고 애통하니, 비풍(悲風)이 소슬(蕭瑟)하고 월색이 몽롱(朦朧)한지라.
울기를 그치고 입었던 치마를 벗어 그 신체를 거둔 후에 눈물을 머금고 슬픔을 강잉(强仍)하더니, 문득 후면에서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거늘, 운랑이 급히 나아가 보니 책방(冊房)이 도적의 창을 맞아 유혈이 낭자하고, 기식(氣息)이 엄엄(奄奄)하여 요동(搖動)치 못하는지라.
더욱 놀라 그 상한 곳을 어루만지며 이르기를,
“첩(妾)은 곧 운랑이로소이다. 정신을 차리소서.”
책방이 겨우 정신을 차려 동헌 소식을 물으니, 운랑이 눈물을 흘리며 그 참악(慘愕)한 말을 고하니, 책방이 일성(一聲) 통곡에 혼절(昏絶)하니 운랑이 급히 붙들어 업고, 제 집에 돌아가 지성(至誠) 구호(救護)하니 이러므로 명을 보전하니라.
이 날 홍경래 등이 가산 군수를 베인 후에, 본군(本郡) 김대량으로 유진장(留陣將)을 삼고, 좌수 윤원섭으로 군수를 삼아 인신 병부를 주어 수호(守護)하라 하고, 이튿날 미명(未明)에 행군하려 하다가 군사를 쉼이 옳다 하고, 창곡(倉穀)을 내어 군사를 호궤(犒饋)한 후의 행군하여, 박천 진두(津頭)에 이르니 정히 삼경(三更)이라.
그곳에 유진(留陣)하고 홍경래, 군사로 하여금 여염(閭閻)에 나아가 양미(糧米)를 구하여 군사를 먹이니, 진두 백성이 적당(敵黨)의 겁측(劫)을 만나 명을 도모하여 사산분주(四散奔走)하며, 혹 적당에 붙이는 자(者)도 있는지라.
적당이 진두에서 밤을 지내고, 이튿날 평명(平明)에 군사를 몰아 박천을 향하니라.
이때 박천 향장(鄕長) 등이 기산 적변(賊變)을 듣고 군수에게 보(報)하니, 군수가 분부하기를,
“난(亂)이 있다 하니, 남란(南亂)이냐, 북란(北亂)이냐? 재년(災年) 당하여 불과 밥을 구하는 도적이라. 태평 시절의 인심을 소동(騷動)하게 하는 자는 마땅히 참(斬)하리라.”
하고 신청(信聽)하지 아니 하더니, 십구일 오시(午時) 후에 향장 등이 한 장 공문(公文)을 드리거늘, 군수가 즉시 개탁(開坼)하니, 본군(本郡) 책고도감(冊庫都監) 김경각으로 별군관(別軍官) 차정(差定)한 체문(帖文)이니, 그 끝에 대원수라 쓰고 수결(手決)을 두었거늘, 군수가 대경(大驚)하여 그제야 병란(兵亂)인 줄 알고 묻기를,
“흉서(凶書)를 어떤 놈이 가져 왔는고?”
좌위(座位) 답하기를,
“가산 발군(撥軍)이 가져 왔나이다.”
하거늘, 군수가 발군을 하옥(下獄)하고 일변(一邊) 절도영(節度營)에 보(報)하며, 일변 군기(軍旗)를 점검(點檢)하고 백성을 영취(榮翠)하니, 백성이 다 명(命)을 도망하여 없는지라. 군수가 어쩔 수 없어 관속(官屬)과 더불어 내행(內行)을 거느려 영천사(靈泉寺)에 나아가 안정(安定)하고, 절도영(節度營)으로 행하여 오니라.
각설, 홍경래 일지병(一枝兵)을 몰아 박천을 엄습하니, 이때 납월(臘月) 이십일이라. 새벽달이 지지 아니하고, 또한 날이 미명(未明)이라. 홍경래 공청(公廳)에 좌기(坐起)하고 본군 장교(將校)를 호령하여 부르니, 신임 장교 한일환이 청령(聽令)하고 청하(廳下)의 부복(俯伏)하니 홍경래 분부하기를,
“네 원(原) 있는 곳을 찾아 가라. 만일 위령(違令)하면 참(斬)하리라.”
하고, 역마(驛馬) 한 필을 주거늘, 한일환이 영(令)을 거역하지 못하여 말을 달려 영천사로 갈새, 적진(敵陣) 선기장(先騎將)이 한일환과 더불어 영천사의 이르니, 절벽 사이에 수간(數間) 암자가 있는데, 두어 낱 중은 재식(齋食)을 준비하고, 비자(婢子) 수삼 인은 창 밖에 있어 창황(?怳)하거늘, 선기장이 엄문(嚴問)하니, 이곳은 박천 내행(內行)이 은신한 곳이라.
선기장이 한일환과 더불어 내행을 잡아 가고자 하니, 군수의 별방(別房)이 대부인(大夫人)인 체 하고 도적을 향하여 무수히 공갈(恐喝)하며 자결(自決)하고자 하니, 선기장이 인하여 잡아다가 홍경래를 주니, 홍경래 분부하여,
“아직 보수(保授)하라.”
하니라.
이날 박천 군수가 영천사를 떠나 밤을 타 풍설(風雪)을 무릅쓰고 간도(間道)를 따라 절도영을 향하더니, 문득 한 사람이 급히 따르며 이르되,
“대부인(大夫人)이 적당에게 잡혔다.”
하거늘 군수가 정신이 아득하여 혼절하였더니, 도적이 따라와 군수를 결박하여 돌아 홍경래에게 바치니, 홍경래 이르기를,
“본관(本官)은 급히 항복하여 잔명(殘命)을 보전하라.”
하니 군수가 대소(大笑)하며 이르기를,
“내 어찌 살기를 도모하여 개 같은 놈에게 항복하리오. 네 빨리 나를 죽여 충절을 잃지 말게 하라.”
하고 꾸짖기를 마지아니하니, 홍경래 대소(大笑)하여 무사(武士)를 명하여 참하라 하니, 모사 우군칙이 간(諫)하기를,
“이 사람이 충절이 높으니 죽이지 말고 개유(開諭)하여 항복 받음이 옳은가 하나이다.”
홍경래 옳이 여겨 좌우로 하여금 결박한 것을 끄른 후에 개유하며 이르기를,
“그대는 나를 도아 부귀를 함께 함이 어떠하뇨?”
군수가 이르기를,
“너는 다만 죽일 따름이라.”
하고 종시(終是) 굴(屈)하지 아니하니, 홍경래 어쩔 수 없어 관속(官屬)의 집에 보수(保授)하니라.
이날 홍경래 김경각으로 전대(前隊)를 삼고, 한일환으로 유진장을 삼은 후에 창고를 열어 백성을 진휼하고, 한일환을 상사(償賜)를 후히 하니, 한일환이 열읍(列邑)에 횡행(橫行)하며 그 상급(賞給)함을 자랑하더라.
이날 군수가 관속 일정(日程)의 집에 나와 창황 중의 정신을 차려 인신 병부를 생각하니, 적당에게 핍박할 때에 탈수(奪授)한 바 되니, 그 분함을 이기지 못하더라. 이 곳 통인 이기영이 군수를 모셨다가 밤을 타, 도적의 형세(形勢)를 기록하여 병영(兵營)에 밀통(密通)하니라
이튿날 홍경래 군사를 몰아 진두(津頭)에 나아가 유진(留陣)하고, 장졸을 호궤한 후에 우군칙에게 계교를 물으니, 우군칙 이르기를,
“부원수 김사용이 뒤를 엄습(掩襲)하여 후병(候兵)이 나올 길을 막을 것이니,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 병영을 치면 어떠하뇨?”
홍경래 옳이 여겨 군사를 몰아 안주(安州)로 향할새, 송림(松林)에 이르러 날이 저무니, 송림에 와 밤을 지낼새 우군칙이 송림 백성을 불러 분부하기를,
“너희 등은 각각 홰 하나씩 가지고 송림 네 곳에 나아가 불을 켜라.”
하니, 홍경래 묻기를,
“이는 무슨 계교(計巧)이니까?”
우군칙 이르기를,
“이는 관군으로 하여금 우리 군병 다소(多少)를 헤아리지 못하게 함이로소이다.”
홍경래 그 신기함을 못내 탄복하더라.
이때 절도사(節度使)가 동헌(東軒)에 앉았더니 문득 한 군사가 봉서(封書)를 드리거늘, 개탁(開坼)하니 박천 통인 이기영의 밀서(密書)라.
그 글에 하였으되,
“이름 없는 도적이 가산으로부터 일어나, 가산 군수를 베이며 박천 군수를 사로잡고 당(黨)을 거느려 병영을 향하나이다.”
하였거늘, 절도사가 대경(大驚)하여 성문을 굳게 지키고, 일변 나라에 장문((狀聞)하고 감영(監營)에 보(報)한 후에, 병부(兵符)를 주어 후영장(後營將) 윤욱렬과 우영장(右營將) 오치수에게 보내어 각각 군마(軍馬)를 거느려 나오되, 만일 지완(遲緩)하면 군법(軍法)을 베풀리라 하더라.
차시 함종(咸從) 부사(府使)와 순천(順川) 군수가 병부(兵符)를 본 후에 대경하여 각각 병마(兵馬)를 조발(調發)하여 병영을 향하니라.
절도사가 백상루((百祥樓)에 좌정(坐定)하고, 정조군(停朝軍)과 친병(親兵)을 연습하며 성문을 굳게 닫았거늘, 즉시 영전(令箭)을 통하니 이윽고 문을 열어 군마를 영접하니, 양장(兩將)이 군례(軍禮)로 뵈온 후에 도적의 형세를 묻자오니 절도사가 이르기를,
“도적이 가산 군수 부자를 베고 박천 군수를 사로잡아 사생(死生)이 조모(朝暮)의 있다.”
하고,
“청북(淸北) 제읍(諸邑)과 각 진보(鎭堡)는 기간(其間)에 발마(撥馬)가 끊이어 길을 통하지 못하는 고로, 변보(變報)를 듣지 못하매 각처 소식을 알지 못하는지라. 이제 도적이 송림에 둔취(屯聚)하였으매 그 다소를 알지 못하되, 밤이면 불을 밝히니 불 켜는 수를 보건대 그 수를 어찌 못 헤아리리오.”
하며 양장을 재촉하여 수이 도적을 파하라 하니, 양장이 군사를 몰아 청천강(淸川江)의 이르러 양장이 급히 강을 건너 십 리를 나아가니 한 뫼가 있는지라. 그 뫼를 등지고 들을 임(臨)하여 결진(結陣)하니 적진(敵陣) 더불어 삼백 보(步)는 격(隔)하였더라.
이때 곽산 군수가 적장 김사용에게 엄살(掩殺)함을 당하여 인부(印符)를 도적에게 잃은 후, 명(命)을 도망하여 간도(間道)를 따라 절도영에 나아가 적병을 자세히 고하니, 절도사가 더욱 대경하여 성명 보전함을 치하하니, 군수가 이르기를,
“원컨대 일지병을 빌리시면 한 번 나아가 도적의 머리를 베어 휘하(麾下)에 드리리이다.”
절도사가 청필(聽畢)에 즉시 이초군(二招軍)을 주며 이르기를,
“그대는 힘을 다하여 도적을 파하라.”
하니, 군수가 인하여 군병을 몰아 바로 함종진(咸從陣)에 나아가 선봉이 되었더라.
이때 홍경래, 송림의 유진(留陣)한 지 누일(累日)이 되었으되, 안주성(安州城)을 파하지 못하매 우군칙과 더불어 성 칠 일을 의논하더니, 문득 탐마(探馬)가 보하되,
“청천강 서편 뫼 아래 무수한 관병(官兵)이 진을 쳤나이다.”
홍경래 의갑(衣甲)을 정제(整齊)하고 군중에 전령하여 접전할 일을 준비하더라.
이때 함종 부사가 도적과 더불어 대진하매 분기충천(憤氣衝天)하여 의갑(衣甲)을 갖춘 후에 접전(接戰)할 뜻을 각 진(陣)에 방포일성(放砲一聲)으로 내고, 납함(吶喊)하고 출전(出戰)을 재촉하니, 각 영장(營將)들이 풍설(風雪)을 무릅쓰고 나는 듯이 나아가니,
적진 중에서 일성(一聲) 포향(砲響)에 진문(陣門)을 크게 열고 적병이 일시의 내달아 일자진(一字陣)을 이루고, 함종진을 시살(廝殺)하니 함성이 천지진동하는지라.
절도사가 백상루에 높이 앉아 양진(兩陣) 싸움을 보더니, 적세(敵勢) 정히 승(勝)하거늘, 즉시 우후(虞候) 이해승으로 일천 정병(精兵)을 거느려 빨리 나가 접응(接應)하라 하니, 우후가 장령(將令)을 받아 북문을 따라 청천강을 건너 송림의 이르러 삼장(三將)이 합력(合力)하여 적군을 짓치니, 홍경래 등이 저당(抵當)하지 못하여 우군칙과 더불어 군을 돌리어 북을 향하여 도망할새, 홍경래 피란하는 백성을 몰아 군총(群叢)에 넣으며 패잔군(敗殘軍)을 수습하니 겨우 이백여 인이라.
즉시 진두에 이르러 놀란 마음을 진정하고, 홍경래 마상(馬上)에서 불러 이르기를,
“우선생아, 뒤에는 추병(追兵)이 급하고, 앞에는 갈 길이 없으니 어디로 향하리오.”
우군칙이 황망 중에 답하기를,
“정주(定州)성이 가장 좋을까 하나이다.”
홍경래 이르기를,
“이 계교가 가장 묘하거니와, 만일 성문을 굳게 닫고 준비함이 있으면 어찌 하리오.”
우군칙 이르기를,
“장군은 염려치 마소서. 내 이제 정주 목사(牧使)에게 격서(檄書)를 전하고, 버금 좌수(座首) 김이대와 이침 등에게 밀통(密通)하여 내응(內應)을 삼을 것이니, 정주성 얻기는 여반장(如反掌)이라.”
홍경래 대희(大喜)하여 진두(陣頭)가 강을 거느려 가산으로 들어가, 군병을 호궤하고 읍중(邑中) 백성을 모아 이르되,
“추병이 급히 따르며 이르는 곳마다 백성을 살해하니, 너희 이곳에 있다가는 해(害)를 면하지 못하리니, 우리를 따라 정주성으로 들어가면 잔명을 보전하리라.”
하니, 기중(其中) 의혹(疑惑) 있는 백성이 이 말을 듣고 따르는 자가 많은지라.
이 날 홍경래 군사를 재촉하여 효성령을 넘어 납천(納川)에 이르니, 백성이 피란하고 집이 다 비었거늘, 홍경래 분부하여 군사를 밥을 지어 먹인 후의 인총(人叢)을 살펴보니, 가산과 박천 백성 따르는 자가 남녀노소 합하여 수백여 인이라.
건장한 유(類)를 빼어 군중(軍中)에 충수(充數)하고 밤을 지낼새,
홍경래, 우군칙에게 이르기를,
“뒤에 추병이 급하니 만일 이 곳에 있다가는 사로잡힌 바가 될까 하나이다.”
우군칙 이르기를,
“원수는 어찌 용병(用兵)을 모르시나이까? 관병(官兵)이 비록 급히 따르나 효성령 외에 이르러 아등(我等)의 복병을 의심하여 감히 따르지 못하리니, 그 사이 이 곳에서 군병을 잠깐 쉬우고 명일 행군함이 좋을까 하나이다.”
홍경래 대희(大喜)하여 이르기를,
“비록 송림에 패함이 있으나 승패는 병가(兵家)의 떳떳한 일이라. 이제 선생의 높은 계교는 귀신도 측량치 못할지라. 그러나 부원수의 대군이 북(北)을 엄살(掩殺)하니 그 형세 당할 자가 없을지라. 내 이제 정주성에 웅거(雄據)하고 구원병(救援兵)을 기다려 다시 싸움을 도모(圖謀)하려 하노라.”
각설, 정주 목사 이자주, 병란(丙亂) 있다 함을 듣고 즉시 군사를 부르되, 백성은 피란하고 향장(鄕長) 일부 등은 남아 있는지라. 목사가 어찌할 수 없어 성을 버리고 안주로 향하니라.
이때 김사용 이제차 등이 병(兵)을 몰아 곽산을 쳐 앗고, 태천(泰川)을 엄습하니, 태천 현감 유정양이 적세 위급함을 보고, 인신 병부를 몸에 지니고 철옹성(鐵甕城)을 향하니라.
이때 김사용이 의기양양(意氣揚揚)하여 군을 몰아 바로 철산을 쳐 부사 이창금을 향복 받고 인부(印簿)를 앗은 후에 또 선천을 칠새, 먼저 격서(檄書)를 보내고 독진(獨鎭) 중군(中軍) 유문제에게 밀통하여 내응을 삼은 후에 군사를 재촉하여 나아가니, 선천 부사 김익순이 적세를 두려워해 진작 항복하니, 김사용이 인신 병부를 앗고 이튿날 김사용이 이제차를 불러 이르기를,
“그대는 일지병을 거느려 먼저 서림성(西林城)을 쳐 유진장(留陣將)을 항복 받고, 아장(亞將)으로 성을 지킨 후 용골 산성(龍骨山城)을 쳐 앗고, 인하여 용천( (龍川)을 엄습하라.”
하니, 이제차가 청령(聽令)하고 군을 거느려 서림으로 향하니라.
이때 용천 부사 전수예 적병이 가까움을 듣고 취군(聚軍)하고자 하니, 백성은 다 피란하고 관속은 다 도망하였거늘, 부사가 탄식함을 마지아니하고 인하여 크게 웨기를,
“뉘 능히 나를 따를 소냐?”
문득 한 장교가 좇기를 원하거늘, 부사가 인부를 몸에 장(藏)한 후의 필마로 바로 백마산성(白馬山城)으로 행하니라.
이날 이제차가 서림과 용골 산성을 쳐 앗고, 바로 용천부(龍川府)에 이르니 부사는 간 곳이 없고 일읍(一邑)이 다 비었거늘, 이제차가 즉시 용천관(龍川官)에 유진(留陣)하니라.
이때 의주에 두 영웅이 있으니, 하나는 김견신이요 하나는 허항이라. 도적이 강성함을 듣고 각각 군사를 일우니, 김견신은 의병 백여 명을 모으고, 허항은 의병 이백여 명을 거느려 행할새, 이 두 사람은 용력(勇力)이 출중(出衆)하고 충의(忠義)를 겸한지라. 서로 이르되,
“이때를 당하여 갈충보국(竭忠報國)하여 흉적(凶賊)을 소멸하고, 이름을 천추(千秋)에 유전(留傳)함이 우리 족(足)한 바이라.”
하고 김견신은 장창을 들고 오총마(烏驄馬)를 타고, 허항은 장검을 들고 백총마(白驄馬)를 탔으니 위엄이 맹호(猛虎) 같더라. 군마를 몰아 바로 서림 성하(城下)에 이르니 도적이 성을 웅거(雄據)하였는지라. 이 날 밤에 김허 양장(兩將)이 적진 형세를 살핀 후에, 즉시 군을 몰아 성을 넘어 일시에 시살(廝殺)하니, 함성이 대진하는지라. 적병이 불의에 시살을 만나니 성을 버리고 각각 명(命)을 도망하는지라.
김허 양장이 군사를 하나도 상(傷)하지 아니하고, 서림을 회복한 후에 김허 양장이 군을 재촉하여 철산을 향하니, 철산에 웅거한 도적이 이 소문을 듣고 다 흩어졌다하거늘, 허항은 철산으로부터 동림(東林)으로 나아가고, 김견신은 동령(東嶺)으로부터 동림으로 나아가 합병(合兵)하여, 송림에 든 도적을 크게 엄살하니, 의병이 이르는 곳에 적병의 머리 추풍낙엽(秋風落葉)일러라.
이때 홍경래 납천을 떠나 군을 몰아 정주 성하에 이르니, 좌수 김이대 기치(旗幟)를 거느려, 오륜교(五倫橋) 변(邊)에 나와 영접하는지라. 홍경래 정주성에 들어가 창곡(倉穀)을 내어 백성을 진휼(賑恤)하고 우양을 잡아 병(兵)을 호궤(犒饋)하고, 이튿날 제장(諸將)을 불러 각각 소임을 맡길새,
우군칙으로 북장(北墻)을 지키고, 김지간으로 서문(西門)을 지키고, 백동호로 군량감(軍糧監)을 삼고, 김이대로 정주 목사를 삼고, 이침으로 북문을 지키고, 양수우로 아장(亞將)을 삼고, 홍총각으로 선봉장(先鋒將)을 삼아, 장정군(長征軍) 오백을 주어 날마다 조련(調練)하고, 홍경래 스스로 중군(中軍) 대장이 되니라.
우군칙이 홍경래에게 이르기를,
“성중(城中)의 군량이 유여(有餘)하고 군사와 백성이 사오천 인이니, 성을 굳게 지키어 부원수가 회군(回軍)하기를 기다려 대사를 도모하사이다.”
하더라.
이때 관찰사(觀察使)가 절도사의 병부를 보고, 나날이 장문(狀聞)하니, 먼저 순중군(巡中軍) 이경회로 하여금 정병 일 천과 전마(戰馬) 사십 필을 주어 도적을 치라 하다.
순중군이 즉시 청령하고 나와 최종석과 옥재혁 등을 불러 좌우익(左右翼)을 삼고 즉시 행군할새, 기치 검극(劍戟)이 일광(日光)을 가리었더라. 행군한 지 여러 날 만에 안주 성하에 이르니 절도사가 즉시 청입(請入)하니, 순중군이 들어가 먼저 적변(賊變)을 물으니, 병사가 이르기를,
“송림의 웅거한 도적이 함종군에게 패함을 입어 도망하매, 각 진이 합력하여 짓쳐 들어가니, 그대는 급히 나아가 접응하라.”
순중군이 영을 듣고 행군하니, 우설(雨雪)이 분분하여 군마(軍馬)가 찬 것을 견디지 못하는지라. 정주 지경(地境)에 이르려 유진하고 군을 쉬오니라.
이때 함종 부사(府使) 와 안주 우후(虞候)와 순천 군수와 곽산 군수가 군을 재촉하여 송림에 불 지르고, 또 진두를 불 노하 도적의 소혈(巢穴)을 소탕하고, 급히 행군하여 진두강을 건널새, 풍설(風雪)이 난만하고 강수(江水) 반빙(半氷)한지라
군을 몰아 찬 물을 무릅쓰고 가더니, 제군(諸軍)이 추위를 견디지 못하여 얼어 죽는 자가 많은지라. 서령관에 이르되 군병을 쉬오고, 정주성의 이르니 도적이 이미 성을 웅거하고 성문을 굳이 닫았더라. 정주성 동문 밖 십 리 쯤 신안원이란 둔덕에 뫼를 등지며 강을 임하여 채책(寨柵)을 세운 후, 군사를 안둔(安屯)하고 도적의 형세를 살피더라.
이때 숙천(肅川) 부사 이유수와 곽산 군수 이영은이 초군(哨軍)을 거느려 정주 성하에 결진하니, 이때는 임신(壬申)년 정월 초오일이라. 순중진(巡中陣) 이경회 안주진과 더불어 결진하고, 적 파할 일을 상의하더라.
각설 홍경래 부원수의 회군을 기다리더니, 문득 보하되, 관군이 동문 밖 십 리 쯤에 결진했다 하거늘, 홍경래 대경하여, 군중에 전령(傳令)하되,
“일절(一切) 요동(搖動)치 말라 하고 군사로 하여금 각각 홰를 들어 정상(頂上)에 나아가 밤이 새도록 불을 밝히라.”
하다.
이때 안주 대상(臺上)에서 성 칠 묘책을 정하고, 곽산 군수는 서문을 엄습하고 안주 우후와 함종 부사는 각각 군을 몰아 남으로 나아가 짓칠새, 군사로 하여금 각각 섶 한 뭇씩 가지고 성문의 나아가 불을 놓으라 하고, 소무장(少武將) 제경욱을 명하여 총수군(銃手軍) 백 명과 병영군(兵營軍) 이백 명을 거느려 선봉이 되어 동문을 엄습하라 하고, 순중군과 숙천 부사와 순천 군수는 총군(銃軍) 사백 명과 전영군(前營軍) 육백 명과 우영군(右營軍) 사백 명을 거느려 후군이 되어, 동문으로 나아갈 새, 밤에 와 운제(雲梯)를 많이 놓아 성 넘기를 도모하더라.
수문장(守門將)이 최종석과 더불어 역사(力士) 십여 인을 거느려 동문에 이르러 도끼를 들어 깨치더니, 문득 성상(城上)으로부터 시석(矢石)이 비 오듯 하거늘, 제경욱이 몸을 날려 시석을 피할 즈음에, 성상에서 한 도적이 부르기를,
“만일 갑옷을 벗고 말을 버리고 가면 쏘지 아니 하리라.”
하니 제경욱이 어쩔 수 없어 갑옷을 벗으며 말을 버리고 최종석과 함께 나아오더니, 성상으로부터 난전(亂箭)이 비 오듯 하니, 최종석이 여러 번 살을 띠고 말을 달려 본진으로 오니, 순중군과 순천 군수, 숙천 부사가 군을 몰아 동문으로 나아가더니 선봉(先鋒)이 제경욱의 패함을 듣고 급히 군을 돌리어 물러나오니, 군사가 상한 자가 사십여 명이라.
도적이 동문을 열고 나와서 버리고 간 갑옷과 전마(戰馬) 기계(器械)를 거두고 미처 물러가지 못한 군사 세 명을 사로잡아 성중에 들어가니, 각 영장(營將)이 분기를 참지 못하더니, 문득 한 군사가 성중으로부터 나와 정히 주저하거늘, 순중군이 그 군사를 잡아 오니 그 군사가 몸에 한 글이 있거늘, 올려 보니 하였으되, 뒤로 간 도적이 선천 의주 대성(大城) 제읍(諸邑)을 엄습하라는 사연이라.
각 영장이 다 놀라 이튿날 평명(平明)의 각각 행군할새, 곽산 군수 이영운은 일천 군을 거느려 곽산으로 나아가고, 안주 영장(營將)과 함종 부사는 이천 군을 거느려 용천으로 향하여 가니라. 이영운이 군을 몰아 곽산에 이르러 도적의 머리 수십을 베고 군을 돌리어 용천으로 향하니라.
이때 순중군이 우영장으로 하여금 인영병(隣營兵)과 순영(巡營) 총수군 사십 명을 조발하여, 함종 박천 양진(兩陣)을 접응(接應)케 하니라. 이때 함종 부사가 군을 재촉하여 용천에 이르니 도적 천여 명이 관(官)에 웅거(雄據)하여 있는지라. 곽산 군수와 더불어 정창(挺槍) 출마(出馬)하여 크게 웨기를,
“내 마땅히 도적을 베어 국가의 환을 덜고자 하나니, 제장은 힘을 다하여 뒤를 따르라.”
하니 문득 두 장주가 출반주(出班奏)하며 이르기를,
“소장 등이 비록 재주가 없사오나 한 번 나아가 도적의 머리를 베어 휘하(麾下)에 드리리다.”
모두 보니 하나는 순안(順安) 김계묵이요, 하나는 은산(殷山) 김이해라. 부사가 대희하여 즉시 양장(兩將)으로 좌우 선봉을 삼아 접전할새, 양장이 응성(應城) 출마하여 적장 이제초와 더불어 싸워, 십여 합에 김계묵이 한 창으로 이제초를 찌르니, 이제초가 크게 고함하고 창을 잡아당기니, 김계묵이 당하지 못하여 말에서 떨어져 정히 위급하더니, 김이해가 급히 내달아 창을 들어 이제초를 찌르니, 이제초가 말에서 떨어지거늘, 군사를 호령하여 이제초를 결박한 후에 적당(賊黨)을 효유(曉諭)하니 적군이 일시에 항복하는지라.
즉시 이제초를 잡아 함종진에 드리니 부사가 대희하여 양장을 중상(重賞)하고, 무사를 명하여 이제초를 원문(轅門) 밖에 내어 베이고, 또 선천 독진(獨鎭) 중군(中軍) 유문제를 잡아 베인 후에, 우양을 잡아 군사를 호궤(犒饋)하니 즐기는 소리가 진동하더라.
이때 나라에서 평안 감사의 장계(狀啓)를 보시고, 묘당(廟堂)의 하교(下敎)하사 순무중군(巡撫中軍)을 정하여 총수 오백과 마병(馬兵) 삼백을 주어, 즉시 내려가 도적을 평정하라 하시니, 중군이 하직 숙배(肅拜)하고 행군한 지 팔일 만에 정주성에 득달(得達)하니 안주 대진(大陣)이 신안원에 결진하였더라.
각 영장이 순무중군을 맞아 획책(劃策)을 함께 하니 진법(陣法)이 정제(整齊)하고 호령이 엄숙하여 전일과 다르더라.
이때에 상이 훈련도감(訓鍊都監) 이운식으로 박천 군수를 제수(除授)하시고, 급마(給馬) 하송(下送)하시니, 이운식이 하직 숙배하고 즉일(卽日) 발행하니라.
상이 또한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위무사(慰撫使)를 제수하사, 백성을 위무(慰撫)하라 하시니 위무사가 즉일 발행(發行)하니라. 박천 신관(新官)이 평양의 이르러 관찰사께 현알(見謁)하니, 관찰사가 삼화군(三和軍) 백 명을 주어 정주로 나아가라 하니, 군수가 대동문(大同門)에 나아가 군사를 점고(點考)하고 행군할새, 풍설(風雪)이 분분(紛紛)하니 군마가 찬 것을 견디지 못하더라.
이때 곽산 함종 양진이 순무중영(巡撫中營)에 밀통하되,
‘용천 곽산 양읍에 둔취(屯聚)한 도적이 적지 아니 하니 구완을 청하나이다.’
하였거늘 순무중군이 순중군(巡中軍)으로 하여금 나가 구원하라 하니, 순중군이 발군(發軍)하고자 할 즈음에 도적에 패한 연유를 듣고 출전 영을 거두니라.
이때 함종 부사가 용천에 웅거한 도적을 소탕하고, 곽산 전군수(前郡守)로 용천을 지키고 순천 군수와 더불어 회군할새, 먼저 이제초의 머리를 베어 절도영(節度營)에 올리고 행군하여 대진을 향하니라.
이때 순무중군과 정주 목사와 소무장 제경욱이 남문으로 나아가 시살(弑殺)하고, 순천 군수는 건장군(健壯軍)을 거느려 운제를 가져 복문으로 나아가 짓치고, 박천 군수는 삼화군을 모아 소서문(小西門)을 짓칠새, 이때 우설(雨雪)이 분분(紛紛)하고 안개 자욱하여 원근이 희미하니, 성첩 사이에서 시석이 비 오듯 하는지라.
박천 군수가 풍우 같이 몰아 성 밖 백여 보 돌격하여 앞으로 나아가고자 할 즈음에, 소무장 제경욱이 남문으로 나아가 도적과 더불어 싸울새, 좌충우돌(左衝右突)하니 뉘 감히 당하리오. 그러나 도적은 성상에 있고, 제경욱은 성하에 있으매 아래 있는 자가 어찌 위에 있는 자를 당하리오.
제경욱이 도적을 향하여 크게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 감히 성자(城子)를 침범하여 생민(生民)을 요란하게 하니 너희 등을 바삐 베어 군민의 한을 풀리니 빨리 나와 항복하라.”
하며 꾸짖기를 마지아니하더니, 문득 흐르는 총이 제경욱의 미간을 맞추니, 제경욱이 말에서 떨어지거늘, 제장이 일시의 내달아 제경욱을 구하여 본진에 돌아와 구호하되, 마침내 명이 진(盡)하는지라. 각 영(營) 장졸이 설워 않는 이 없더라.
이날 순무영(巡撫營) 장사군관(壯士軍官) 오위장(五衛將) 김계댁이 동문에 나아가 시석을 무릅쓰고 성을 치다가 또한 도적의 총을 맞아 죽으니, 이 두 사람의 충성은 산하(山河)를 기울일러라. 순무중군이 이 뜻으로 장문하니, 상이 그 충성을 아름다이 여기사 각각 삼대 추증(追贈)하사 그 공을 표하니라.
이때 선천 부사 김익순이 적괴 김창시의 머리를 베어 대진에 바치니 순무중군이 김익순을 잡아드려 도적에게 항복한 절차를 물으니, 김익순이 답하기를,
“도적의 핍박함을 입어 거짓 항복하였나이다.”
순무중군이 크게 꾸짖기를,
“네 세록지신(世祿之臣)으로 죽기를 아껴 도적에게 항복하여 살기를 어찌 도모하리오.”
즉시 김익순을 압령(押領)하여 경사(京師)로 보내니라.
각설 순중군 이경회가 박천 군수와 더불어 진을 옮길새, 정주 남문 밖에 남제교 다리를 건너 남산 작은 언덕에 진을 치고 성중을 바라보니, 낮이면 도적의 종적이 없고, 밤이면 성상에서 불을 밝혀 총을 놓아 형세를 돕는지라.
순중군이 차관(差官) 안정신과 더불어 수백 군을 거느려 남문을 칠새, 박천 군수는 후응(後應)이 되고 정주 목사는 동문을 치고, 순무중군은 제장을 거느려 소서문을 치고, 숙천 부사는 가산 군수와 더불어 북성을 칠새, 묘시(卯時)로부터 사시(巳時)에 이르러 파하지 못하니, 징을 쳐 군을 거두니라.
이때 함종 부사가 순천 군수와 더불어 용천을 떠나 정주의 이르러 함종 부사는 서문 밖에 진을 치고, 순천 군수는 소서문에 진을 치니라. 의병장 김견신과 허항이 군을 몰아 대진에 이르러 순무중군께 현알하니, 중군이 양장의 충의를 칭찬하고 의병을 호궤한 후에 양장으로 함종 부사의 후응을 삼아 서문에 진치게 하니 양장이 군사를 거느려 결진(結陣)하니라.
함종 부사는 서문 밖 수 리 쯤에 뫼를 등지고 진을 쳤으니, 그 수가 일천육백이요, 순천 부사는 소서문 밖의 언덕을 의지하여 진을 쳤으니, 그 수가 팔백이요, 가산 정주 양진은 각각 수백을 거느려 순무영 좌우익이 되고, 숙천 부사는 평지의 진을 쳤으니 그 수가 오백이라. 각각 결진하니 대외 정제하고 군중이 엄숙하더라.
정주 남문 밖에 주필각(駐蹕閣)이란 비각(碑閣)이 있으니, 선조 대왕이 용만(龍灣,의주)으로 파천(播遷)하실 때에 주필(駐蹕)하시매 그 사적을 기록한 비각이라. 그 뒤에 송목(松木)을 많이 심었더니, 이때를 당하여 도적이 자주 나와 비각에 들며 촉송목(矗松木)에 매복하였다가, 외로이 왕래하는 군사를 침노하니 순중군이 통한이 여겨 즉시 군사를 하여금 그 송목을 다 베어 놓으니, 그 후는 도적의 출입이 분명하더라.
이때는 임신(壬申) 이월 초삼일이라. 오시(午時)로부터 신시(辛時)의 이르러 풍설이 난만하거늘, 각 진에서 성을 칠새 수레와 운제를 많이 준비하고 순무중군과 정주 목사와 순천 부사와 순중군 여남으로 나아가 치고, 함종 부사는 소서문을 치고 삭주 부사는 의병장 김견신으과 더불어 북문을 치고, 마병(馬兵)으로 동문의 매복하고, 박천 군수는 최종석과 더불어 운제를 가지고 성 동남 간(間)에 선봉이 되니라.
이 날 각 진이 성 치기를 기약하고 대채(大寨)에서 수레 다섯을 준비하니, 높기를 성을 지나게 하고 그 위에 방패와 철갑을 많이 대었으며, 좌우로 난간을 만들었더라. 이 날 군병이 수레 두 채를 몰아 남문으로 나아가다가 바퀴 다 상하여 나아가지 못할 즈음에 성상으로부터 시석이 비 오듯 하니, 군사가 능히 대적하지 못하고, 또 우설(雨雪)이 끊이지 아니 하니 군사가 싸우지 못하여 종일 성을 치되, 성공치 못하고 각 진이 징을 울리어 종일 성을 치되, 성공치 못하고, 각 진이 징을 쳐 군을 거두니라.
이날 성을 깨치려 하고 대완구(大碗口)를 남문 밖에 묻었더니, 이튿날 미명에 도적 수백이 와 대완구를 취하려 하거늘, 순무중군이 총수군을 조발(調發)하여 풍우같이 나아가 도적을 시살하니, 도적이 급히 성중으로 들어가더니, 이윽고 도적이 다시 나와 불러 이르되,
“금일은 마땅히 힘을 다하여 싸워 사생을 결하리라.”
하거늘, 중군이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총수군을 명하여 급히 따르라 하며 짓치니 적병이 미처 총을 놓지 못하고 도망하여 남문으로 들어가니 도로 군을 거두니라.
이날 밤 삼경에 검은 안개 자욱하여 지척을 분변(分辨)치 못하는지라. 좌익장 최종석이 중군께 고하기를,
“이제 날이 어둡고 또한 안개 자욱하니 비록 도적이 나오나, 어디로부터 오는 줄을 알리오? 의심컨대 도적의 겁측이 있을까 하오니, 미리 방비함이 옳을까 하나이다.”
중군이 그 말을 옳이 여겨 군중에 전령하여 약속을 정할새, 초군(哨軍) 삼십 명과 총수군 이십 명을 빼어 비각에 매복하니라. 이 날 삼경에 도적 백여 명이 남문으로 나와 복병(伏兵)을 엄살하니, 복병이 도적의 겁측을 만나 일시의 흩어지니, 이때 도망하던 당보군(塘報軍)이 급히 돌아와 도적에 패한 수말(首末)을 중군께 고하니, 중군이 대경하여 즉시 총수군을 조발하여 구할새, 도적은 이미 성에 들고 복병은 다 도망하였거늘 총수군이 어쩔 수 없어 본진으로 오니라
이날 복병이 겨우 도망하여 본진에 돌아오니, 중군이 그 수를 점고하니 죽은 자가 하나요, 상한 자가 셋이요, 도망한 자가 셋이러라. 이때 순영(巡營)으로부터 장졸(將卒)이 달포 숙식(宿食)이 불안함을 염려하여 장곽(長藿)을 많이 보내어 군병을 호궤하니 즐기는 소리가 진동하더라.
이때 의병장 김견신이 북장대(北將臺)에 나아가 군사로 하여금 화전(火箭)을 쏘아 북장대를 불지르고 성을 넘고자 하더니, 문득 성상으로부터 시석이 비 오듯 하니 마침내 성을 넘지 못하니라.
이때 이월 초순이라 뫼에 쌓인 눈과 찬 기운이 살을 에이는 듯하니, 군사가 얼어 죽을까 염려하여 군을 몰아 남산에 이르러 진을 정할새, 문득 뫼 위에 한 사당(社堂)이 있으니 즉시 군사로 하여금 자세히 알아 오라 하니, 군사가 보(報)하되,
“이 사당은 옛날 임장군의 화상(畫像)이라.”
하거늘, 중군이 이 말을 듣고 박천 군수와 더불어 기도를 성(盛)하고 택일(擇日)하여 제(祭)를 할새, 마병장(馬兵將) 정백령은 초헌관(初獻官)이요, 좌익장(左翼將) 최종석은 아헌관(亞獻官)이요, 우익장(右翼將) 옥재혁은 종헌관(終獻官)이요, 태천 의병장(義兵將) 이시복으로 집사(執事)를 정하여 치제(致祭)하니라.
이때 나라에서 위무사(慰撫使)로 평안 감사(監司)를 인정(認定)하시니, 감사가 백성을 무휼(撫恤)하고 군병을 진무(鎭撫)하니 원근(遠近)이 그 덕화(德化)를 칭송하더라. 이때 정주 성남(城南) 십 리 쯤에 장군대(將軍臺)가 있으니 예로부터 승전한 곳이라. 순무영에서 제장(諸將)으로 치제할새, 초헌관의 순중군이요, 아헌관의 정주 목사요, 종헌관의 숙천 부사라.
이때는 임신(壬申) 이월 십구일이라. 도적이 그윽이 남문으로 나오되, 검은 옷 입고 병기를 가져 비각에 매복하고, 또 철갑(鐵甲) 입은 도적은 백마를 타고 백의 입은 군사를 거느려 후응이 되어 나오고, 총수군으로 하여금 남문 밖 다리 위로부터 용초까지 이르러 어지러이 총을 놓으며, 또 일지군은 소서문으로 나와 순천진을 향하여 총을 놓으며 크게 엄살하니, 순천진이 정히 위급하였더라.
순중군과 함종 부사가 풍우같이 몰아 나와 순천진을 구원하여 도적과 더불어 싸울새, 날이 석양에 이르렀으되, 도적이 물러가지 아니하니 순중군이 더욱 대노하여 군을 몰아 짓치니 적병이 대패(大敗)하여 성중에 들거늘, 각 영장(營將)이 승세(勝勢)하여 군을 몰아 성하에 이르니, 성상으로부터 시석이 비 오듯 하니 성을 파하지 못하고 군을 돌리어 각각 본진으로 돌아 오니라.
이때는 임신 이월 이십삼일이라. 도적 수백 명이 남문으로 나와 앞을 막아 어지러이 쏘며 또 비각 뒤에서 일지군이 나오거늘, 순중군이 즉시 총수군을 조발하여 급히 엄살하니 도적이 패하여 성에 들고 나오지 아니 하더라.
이때 순무중영에서 수레가 상하여 성을 파하지 못하니 각 영장이 염려하더니, 경사(京師)에서 대완구와 수레를 보내었거늘, 순무중군이 각 영에 전령하여 이십오일에 성 치기를 기약할새, 순중군과 박천 군수로 하여금 수레 한 차를 몰아 남문으로 나아가라 하고, 숙천 부사로 하여금 수레 한 차를 몰아 성 동북간으로 나아가라 하고, 함종 부사로 수레 한 차를 몰아 소서문으로 나아가고, 순천 군수와 의병장 김견진은 수레 한 차를 몰아 북장대로 나아가고, 의병장 허항으로 수레 한 차를 몰아 북문을 취하게 하고, 삭주 부사로 하여금 운제와 방패를 가지고 동문으로 나아가고 마병(馬兵) 일 초(哨)로 동문 밖 십 리 쯤에 매복하라 하고 분발하니, 제장이 청령(聽令)하고 각각 신지(信地)로 가니라.
이때 홍경래 우군칙과 더불어 상의(相議)하기를,
“관병(官兵)이 수레와 운제를 준비하여 성 파하기를 급히 한다 하오니, 선생은 무슨 계교로 막고자 하나이까?”
우군칙 이르기를,
“원수는 염려치 마소서. 내 스스로 방비하리라.”
하고 군사를 매 일 명에 섶 한 단씩과 염초(鹽硝) 화약(火藥)을 주어, 성 사면의 나아가 둔취(屯聚)하되, 기(旗)를 누이고 북을 그쳐 은신하였다가, 관병이 수레를 몰아 성하에 이르거든 일시(一時)의 납함(吶喊)하고 시초(柴草)와 화약을 쌓아 수레 위에 던진 후에 화전으로 불을 놓으라 하고, 또 아장(亞將) 사인(四人)으로 보군(步軍) 오십 명씩 주어 각각 성문에 나가 엄습하라 하니, 제장이 청령하고 각각 신지(信地)로 가니라.
각설 각 영장(營將)이 성하에 이르러 운제를 놓고 성을 넘고자 하더니, 성상으로부터 화전을 놓아 운제를 불사르며 적군이 사면으로 나와 엄살하니, 불에 상한 군사가 마필(馬匹) 기계를 다 버리고 사면으로 분산하니, 순무중군이 퇴군하여 본지(本地)에 돌아와 패잔군을 수습하니, 불에 상한 자가 백여 명이라.
각 진이 자주 패하매 다시 싸울 마음이 없더라. 이때 조정에서 순무중군이 자주 패함을 듣고 순무중군을 지정(指定)하시고, 영변(寧邊) 부사로 절도사를 제수하시고, 정주 목사로 지정하여 도적을 파하라 하시니라.
이때는 임신 삼월 초순이라. 순중영 사수군(射手軍)이 성중으로부터 도망하는 군사를 잡아 드리니, 중군이 적정(敵情)을 엄문(嚴問)하니, 그 군사가 고하기를,
“소인은 정주 남면 백성으로 도적의 핍박을 입어 군사에 충수(充數)하여 남문을 지키었더니, 작일(昨日) 싸움에 도망하옵다가 복병의 잡혔사오니, 명을 기다리나이다.”
중군이 우문(又問)하기를,
“성중에 군사와 군량(軍糧)이 얼마나 하며, 적괴(敵魁) 등이 무슨 계교를 하더냐?”
군사가 이르기를,
“홍경래는 도원수가 되어 서장대(西將臺)에 있고, 우군칙은 선생이 되어 북장대에 있고, 홍총각은 선봉이 되었으며, 지천 이장군(이제초)은 군사를 빼어 성 밖으로 나와 싸우고자 한즉 홍경래 무슨 일을 의심하여 베고, 또 윤장군(윤원섭)은 제 아들이 성을 넘어 가 그 아비를 데리고 나오고자 하다가 사기(事機) 누설(漏泄)하여 베었으며, 또 군사 한 초(哨)로 장수 하나씩 주어 영군(領軍)하게 하고, 만일 한 초의 하나라도 도망하면 다 죽이게 하오며, 홍총각은 장정군 삼백육십여 명을 빼어 날마다 단련하며 이르되, ‘수 삼일 간의 어느 진을 겁측하리라.’ 하오며 군량은 군사 한 명에 벼 한 되와 보리 닷 되와 팥 한 되씩 주오매, 군량이 겨우 십일을 당할 듯 하오며, 성내(城內)의 인민(人民) 수는 남녀노소 합하여 사천여 명이 될 듯 하더이다.”
중군이 초사(招辭)를 받은 후에 아직 진중에 가두라 하다. 이때 순무중군이 망야(罔夜)하여 정주에 이르러 성지(城地)를 살피고자 하여 기사(騎士)와 총수군을 거느려 남문 밖 오 리 쯤에 이르러 남제교를 건널 즈음에, 문득 성문이 열리며 일대 군마가 내달아 대진을 엄습하며 대완구를 연(連)하여 두 차를 놓으니 그 소리가 벽력(霹靂) 같고, 철환(鐵丸)이 진전(陣前) 십 보 쯤에 떨어지는지라. 순무중군이 대경하여 즉시 회군(回軍)하니라.
이때는 임신 삼월 구일이라. 박천 군수가 군병을 점고하고 밤이 깊으매 점고를 파하니라. 이 날 적당(賊黨)이 성상(城上)에 불을 난만히 켜고 일시 납함하며 동문으로 나와 급히 엄살하니 박천 군수가 순중군을 보고 이르기를,
“도적이 남을 치고 북으로 나올 계교이니, 이제 도적이 동을 엄살하니 이는 반드시 서쪽으로 나와 어느 진을 엄습할 계교인지 의심이 없지 못 할지라.”
하더니, 서문 밖 오 리쯤에 화광이 충천하며 함성이 대진하니, 박천 군수가 즉시 군사로 탐지한 즉, 함종진이 도적에게 패하였다 하거늘, 군수가 순중군과 더불어 회군하여 중림(中林)에 이르러 함종 부사를 만나 진에 돌아와 그 패한 수말을 물으니, 함종 부사가 놀란 마음을 진정하고 이르기를,
“작야(昨夜) 삼경에 도적이 본진 뒤로 나와 군사의 의막(依幕)을 향하여 화약을 던져 불을 놓고, 또 도적 백여 명이 전면을 시살하니, 군사가 손을 놀리지 못하고 사면으로 도망하매, 단신(單身)이 할 길 없어 말과 창을 잃고 명을 보전하다.”
하거늘 박천 군수가 이르기를,
“이제 군사가 사면으로 흩어졌으니 즉시 나아가 취군(聚軍)하며, 패한 일을 대진(大陣)에 누설하지 맒이 옳다.”
하고, 전하여 보내니라.
함종 부사가 진전의 나가 보니 죽은 자가 칠십이 명이요, 상한 자가 백여 명이라. 분개함을 마지 아니 하고 패군을 수습하여 진을 옮겨 뫼 위에 영책(營柵)을 세우니라.
이때 의병장 허항이 순중영에 보하되,
“이제 적세를 탐지한 후에 성을 파함이 옳을까 하나이다.”
중군이 영리한 관군으로 탐지하라 하더니, 혹(或)이 이르되,
“이정 이림은 본디 성내 사람이라. 도적의 겁측을 만나 서문 북문의 수문장이 되었다.”
하거늘 중군이 즉시 글을 써 군사로 하여금 이정 이림 등에게 보내니라. 이때 이정 이림이 양문(兩門)을 지키더니 문득 한 군사가 봉서(封書)를 드리거늘 개탁(開坼)하니, 하였으되,
“너도 아조(我朝) 백성이라. 간적(奸賊)의 핍박을 입어 문을 지키었으나 너의 본 뜻 아니라. 그러나 성을 파하던 날에 허다한 인명(人命)이 말 아래 놀란 넋이 될 것이니, 일찍 내응이 되어 도적을 멸한 후에 너희 부모 처자를 안보(安保)하고, 또한 공을 표(表)하리라.”
하였거늘, 양인(兩人)이 견필(見畢)에 일변 놀라고 일변 기뻐, 즉시 답서(答書)를 써 주니, 군사가 순중군께 드리거늘 개탁하니, 하였으되,
“불의에 도적의 겁측을 만나 적류(賊類)에 충수(充數)하오나, 어찌 살고자 마음이 있으리오. 이렇듯 가르치심을 듣사오니, 이때를 당하여 내응이 되어 명(命)을 봉행(奉行)할지니, 후일 서로 상고(相考)할 문서를 만들어 보내소서.”
하였거늘, 순중군이 제장과 더불어 상의한 후에 문서를 지으되,
“성 파하던 날에 여등(汝等)의 가속을 살리며 양인의 공을 중히 쓰리라.”
하여 보내니라.
이정 등이 회서(回書)를 기다리더니 군사가 일봉서를 드리니 양인이 개탁 후에 대희하여 다시 회답하되,
“내응은 한두 사람이 못 할지라. 서북 장졸과 더불어 도모한 후, 등불로 군호(軍號)를 삼되, 남으로부터 켜거든 일시에 성을 넘게 하소서.”
하였거늘, 각 진이 보기를 다하매 약속을 정하니라. 허항이 이정의 내응을 살피더니 초경 녘에 등불이 성상(城上)에 쌍으로 켜거늘, 내응이 분명한 줄 알고 즉시 함종진으로 후응을 삼고 군사를 몰아 성의 이르러 운제를 놓아 성을 넘고자 하더니, 문득 성상으로부터 시석(矢石)이 비오듯 하니 나아가지 못하고 군을 돌리니라.
그 후에 자세히 안 즉 이정 등이 서북 장졸 팔십 명을 거느리고 내응이 되어 일을 행하고자 할 때, 사기(事機) 누설하여 적장의 베임을 입었다 하거늘, 각 영장이 일을 이루지 못함을 한하더라.
이때 정주 남면 한주세도 적의 웅거함을 보고 분기 대발하여 성문에 나아가 대호하기를,
“나는 남면 사는 한주세러니, 여등에게 효유(曉諭)할 말이 있으니 문을 열라.”
하니, 문(門) 군사가 급히 홍경래에게 보하니, 한주세는 본디 충의(忠義) 지사(志士)라. 홍경래 이 말을 듣고 영전(令箭)을 보내어 문을 열어 들이니, 한주세 홍경래를 보고 대질(大叱)하기를,
“무도한 도적아. 국은이 망극함을 모르고 외람히 천의(天意)를 거스르니, 네 머리를 베어 팔도(八道)에 회시(回示)하리니, 네 마음이 부끄럽거든 네 스스로 머리를 베어 멸족지화(滅族之禍)를 면하라.”
홍경래 이르기를,
“너를 마땅히 벨 것이로되, 동학지의(同學之義) 있는 고로 차마 베지 아니하니 나를 따라 부귀를 함께 함이 어떠하뇨?”
한주세 더욱 분노하여 이르기를,
“임금의 신자(臣子)가 되어 어찌 개 같은 도적과 좌석(坐席)인들 함께 하리오.”
홍경래 대노하여, 원문(轅門) 밖에 내여 베이니 어찌 가련치 않으리오. 자고로 충신(忠臣) 열자(烈者) 절의(節義) 죽었거니와, 한주세의 충절은 고인(古人)에 지지 않는지라. 이러므로 이 말이 나라에 미치니 상이 그 충절을 아름다이 여기사 증직(贈職)하시고, 또 제경욱을 증직하시고 각각 그 자손을 중(重)히 쓰게 하시니라.
이때 도적이 군을 몰아 북문으로 나오며, 검은 옷 입은 군사는 앞을 당하고 백의(白衣)한 군사는 뒤를 응하니 그 수가 천여 명이라. 이때 의병장 허항의 군사가 군량을 운전(運轉)하려 하여 포구(浦口)에 나아가 미처 돌아오지 못하였더니, 도적이 그 진이 비었음을 보고 목책(木柵)을 짓치고 허항의 진을 엄습할새, 시초에 화약을 뿌려 진중에 던지니, 함종진이 그 형세 위급함을 보고 군을 몰아 구응(救應)할 즈음에 도적이 또 함종진 후면에 불을 놓으니 군사가 미처 피하지 못하니라.
이 날 순중영에서 허항의 진이 위태함을 보고 급히 총수군 두 초와 사수(射手)군 한 초를 보내어 구하라 하고, 또한 군사로 하여금 명고(鳴鼓)하고 남문에 이르러 일시의 엄살하며 순무영으로부터 마병과 총수군을 보내어 구응할새, 도적이 서문에서 나와 방패를 가지고 함종 순천 양진을 향하여 총을 놓으니, 순중군이 급히 나아가 구할새, 중영 제장이 도적의 머리 벤 것이 넷이요, 총수장 한익주가 또한 도적의 머리를 베어 돌아오니 적병이 대패하여 성중으로 들어 가니라.
이날 싸움에 허항이 적은 군사로서 도적과 싸우다가 마침내 도적의 창을 맞아 죽으니 장졸이 그 충절을 못내 슬퍼하더라. 순무중군이 허항의 전망(戰亡)함을 나라에 장문하니, 상이 그 충절을 아름다이 여기사 통제사(統制使)를 추증(追贈)하시고, 정렬(正烈)을 세워 그 공을 표하시니라.
이때 순중군 이경회 남산에 둔병(屯兵)하여 후면이 극히 험하매, 도적의 해를 받을까 두려워 사면에 목책을 세우고 후면에 토성(土城)을 쌓으라 하고, 역사(役事)를 시작할새, 중군이 친히 성 쌓는 곳에 나아가 군병을 위로하니, 군사가 죽을 힘을 다하여 삼일이 못하여 성을 이루니, 높이 일 장(丈)이 넘고 성 위에 돌을 많이 모아 도적이 오면 방비하라 하더라.
순중군이 순무중영에 밀통하되,
“포구에 군량선이 많이 닿았으나 도적의 겁탈(劫奪)함이 위태하오니 군사를 보내어 지키게 하소서.”
하였거늘, 순무중군이 듣고 가장 기뻐하사 군사를 포구에 보내어 군량을 운전케 하니라. 이때 새벽안개 자욱하여 지척을 분변치 못하니, 순무중군이 즉시 군중의 전령하되,
“금일은 안개 몽롱(朦朧)하니, 복병이 도적이 어디로 들어 어느 진을 겁측할 줄을 알지 못할지라. 각 진은 미리 준비하라.”
하고 장중(帳中)에 앉아 날 새기를 기다리더니, 문득 동편으로부터 화광이 충천하며 살벌(殺伐)하는 소리가 나거늘, 순중군이 대경하여 박천 군수로 더불어 군마를 조발하여 풍우같이 나아가니라.
이날 적장 홍경래 군을 거느려 남문으로 나와 주필각에 매복한 후의 총을 놓아 왕래하는 길을 막고, 또 도적 백여 명이 대진 당보막(塘報幕)을 불 지르니 군사가 불에 상하며 창 맞아 죽은 자가 십여 인이라.
이때 순중군은 선봉이 되고 박천 군수는 후응이 되어 군을 재촉하여 대진을 구할새, 비각 앞에 이르니 도적이 갈 길을 막는지라. 총수군을 조발하여 도적을 시살할 즈음의 함종 순천 양진이 또한 이르러 사장(四將)이 합력하여 적병을 파한 후의, 일변 순무영을 구원하고 급히 도적이 돌아갈 길을 막고 급히 짓치니, 주검이 들의 가득하고 피 흘러 성천(成川)하였더라.
이날 대진이 도적의 겁탈함을 입어 도리어 승전하고, 본진에 돌아와 우양을 잡아 군사를 호궤한 후에 다시 성 칠 일을 의논하더라.
삭주 의병으로 하여금 동문 밖에 나아가 성을 싸고 굴함을 파되, 성을 향하여 파 들어가니, 도적이 그 기미를 알고 행여 성을 쌓은 후에 성을 넘어 칠까 의심하여 성 안에 성을 쌓아 높기 성과 같더라.
이때는 임신(壬申) 사월이라. 굴함을 파 성 밑에 다다라 그 속의 화약을 쌓고 화승(火繩)을 박아 불을 놓았더니 십구일 오시(午時)에 우레 같은 소리가 나며 성이 무너지거늘 각 진 군사가 일시에 들어가니, 살벌(殺伐)하는 소리가 천지진동하더라.
각설 김견신 안정신 옥재혁 등이 선봉이 되어, 좌충우돌하니 도적의 머리 추풍낙엽(秋風落葉) 같더라. 이때 홍경래 형세 위급하여 도망하고자 하더니 옥재혁이 갈 길을 막고 한 창으로 홍경래를 찌르니 홍경래 말에서 떨어지거늘, 옥재혁이 그 머리를 베어 들고 순무영에 바치니 순무중군이 대희하여 머리를 함에 담아 경사(京師)로 보내니라.
이때 임형록이 적장 홍총각이 서문으로 달아남을 보고 급히 따라 꾸짖기를,
“너는 닫지 말고 급히 항복하라.”
하니, 홍총각이 황겁하여 애걸하며 이르기를,
“살려 주시면 항복하리이다.”
임형록 이르기를,
“네 창을 놓고 항복하여 죽기를 면하라.”
홍총각이 창을 버리고 항복하거늘, 임형록이 군사를 호령하여 결박하여 본진으로 돌아오니라. 이때 의주(義州) 의병장 최신엽과 강계(江界) 송지염과 김예묵 등이 북문으로 짓쳐 들어가 적병을 풀 베이듯 하니, 주검이 뫼 같고 피 흘러 내가 되었더라.
각 영장이 적장 홍총각, 김이대 우군칙 등을 함거의 실어 경사로 보내고, 그 남은 사로잡은 도적은 십오 세 이상은 다 죽이니, 그 수가 천여 명이라. 순무중군이 성을 파한 연유(緣由)를 나라에 장문(狀聞)하고, 각 영 장졸이 모여 우양을 잡아 각각 호궤하여 본진으로 보내고, 회군하여 경사로 돌아오니 만성(滿城) 인민이 기뻐 아니하는 이 없더라.
순무영에서 적괴 등을 문복(問卜)한 후에 처참(處斬)하니라. 상이 공신을 차례로 봉작(封爵)하시고, 장졸을 하례(賀禮)하고 전망(戰亡) 장졸은 그 가속을 상사(償賜)하고, 팔도에 반포하사 죄인을 사(赦)하시니 이러므로 사방이 태평하더라.
임신록 종 辛酉 二月日 紅樹洞 新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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