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영전(英英傳)
- 상사동기(想思洞記)
홍치연간(弘治年間, 1488~1500)에 성균관 진사인 김생(金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잊었으나, 용모가 준수하고 아름다웠으며 인품이 월등하게 뛰어났다. 그는 글을 잘 지었을 뿐만 아니라 농담에도 능통했으니, 참으로 세상의 기이한 남자라 할만 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를 풍류랑(風流郞)이라 일컬었다. 약관의 나이에 진사 제일과에 급제하여 이름이 서울에 널리 알려졌으며, 높은 벼슬아치와 지체 좋은 가문에서 재산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그에게 사랑스런 딸을 시집보내려고 하였다.
하루는 반궁(泮宮)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 위에서 멀리 바라보니, 주막의 파란 깃발이 푸른 버드나무와 붉은 살구나무 사이에서 은은히 비치었다. 김생은 봄날의 흥취에 젖어서 목이 마를 정도로 술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흰모시 적삼을 전당잡히고 진주 빛이 나는 홍주(紅酒)를 사서 꽃무늬가 그려진 자기(磁器) 술잔에 따라 마셨다. 술에 취해서 술집 누각 위에 누워 있는데, 꽃향기가 옷에 스미고 대나무 이슬이 얼굴을 적셨다.
잠시 후에 석양이 산마루에 가로 걸치고 새들이 숲 속으로 날아들자, 하인이 집으로 돌아가자고 재촉하였다. 김생은 일어나 말을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길에 오르니, 백사장이 원근에 펼쳐져 있고 가느다란 버드나무 가지가 냇가에 드리워져 너울거렸다. 노닐던 사람들도 점차 집으로 돌아가 길거리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김생은 흥에 겨워 낮게 시를 읊조려 마침내 절구 한 수를 지었다.
東陌看花柳 동쪽 두렁에 꽃과 버드나무 보이는데,
紫騮驕不行 자류마는 교만스레 가려하지 않네.
何處玉人在 아름다운 임은 어느 곳에 있는가?
桃花無恨情 복사꽃 흐드러지니 임 그리는 마음 끝이 없네.
김생이 읊기를 마치고 취한 눈을 반쯤 들어 올리는 순간 한 미인이 눈에 띄었다. 나이는 겨우 열여섯 살 정도 되었는데, 사뿐사뿐 걷는 고운 발걸음에 길가의 먼지마저 일지 않았다. 허리와 팔다리는 가냘프고 어여뻤으며, 몸매가 매우 아름다웠다.
그 미인은 가다가 멈추는가 하면, 동쪽으로 향하다가 서쪽으로 걷기도 하고, 기와조각을 주워 꾀꼬리를 희롱하는가 했더니,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우두커니 서서 석양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옥비녀를 풀어 윤이 나는 검은 머릿결을 가볍게 흔들자, 푸른 소매는 봄바람에 나부끼고 붉은 치마는 맑은 냇가에 어리어 반짝였다.
김생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마음이 크게 흔들리어 스스로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말채찍을 재촉해 달려가 곁눈으로 흘끗흘끗 바라보니, 고운 치아와 아름다운 얼굴이 참으로 국색(國色)이었다. 김생은 말을 빙빙 돌려 그 주위를 맴돌면서 때로는 앞서기도 하고 때로는 뒤를 좇으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를 주시하였다. 그는 끝까지 그녀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자도 김생이 감정을 억제치 못함을 알아채고, 부끄러운 나머지 눈썹을 내리깐 채 감히 바라보지를 못했다. 여자가 점점 멀리 나아가자, 김생도 계속 그 뒤를 좇아갔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까지 따라가 보니, 그녀는 마침내 상사동(相思洞) 길가에 있는 몇 칸짜리 작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김생은 어쩔 줄 몰라 그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우두커니 섰는데, 마음이 쓸쓸하고 처량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날은 이미 저물어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원통한 마음으로 되돌아 왔으나, 멍하니 정신을 잃고 술에 취하거나 바보가 된 듯하였다. 깊은 밤이 되어 머리를 베개에 얹었으나 잠자리는 불편하기만 했다. 밥상머리에 앉아도 먹을 생각이 나지 않았으며, 먹더라도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지를 않았다. 그러다 보니 몸은 고목(古木)처럼 초췌해지고, 안색은 다 타버린 재처럼 참담해졌다.
십여 일이 지난 어느 날, 평소 김생을 따르던 막동이란 자가 찾아왔다.
“도련님처럼 호방하신 분이 이렇게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계시니, 무슨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으신지요?”
김생은 막동의 말을 들으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가슴 깊은 곳에 있는 말을 털어놓았다. 막동은 이야기를 들으며 빙긋이 웃다가 김생의 말이 끝나자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라면 근심하실 필요 없습니다.”
“남의 일이라고 너마저 그런 소릴 하느냐?”
“하하, 제게 좋은 계교가 있으니 쓸데없이 애를 태우지 마옵소서.”
“저, 정말이냐? 그래, 내가 그럼 무엇부터 하면 되겠느냐? 네가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하겠다. 어서 말해 다오!”
김생이 성급하게 채근하자 막동은 웃음부터 흘렸다.
하지만 너무나 진지한 김생의 눈을 보고 정색을 하더니 계책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우선 도련님께선 좋은 술과 안주를 마련하셔서 그 집에 찾아가십시오. 그리고 멀리 떠나는 벗을 전송하는 사람처럼 그 집주인에게 방 한 칸을 빌리셔야 합니다. 그런 다음 술자리를 만드셔서…….”
막동의 얘기를 들으면서 어두웠던 김생의 얼굴은 점점 밝아졌다.
“그래! 좋은 생각이다! 어째 나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까?”
김생은 막동의 계책을 칭찬하며 하인들에게 서둘러 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김생은 여인이 들어갔던 집을 찾아가 방 한 칸을 빌었다. 그리고 미리 약속한 대로 막동에게 손님을 청해 오라 하였다. 막동은 한참 동안 어디를 다녀오는 것처럼 한 후에 나타났다.
“그래, 지금 온다더냐?”
“도련님, 손님께선 오늘 많이 취하셔서 내일 오겠다고 하더이다.”
김생은 서운한 투로 말했다.
“서운하구나. 그 사람이 가기(佳期)를 그르쳐 좋은 술을 버리게 생겼으니, 이 집 주인을 불러서라도 한잔 마시는 것이 낫겠다.”
주인을 부르니 칠십 정도 된 할머니가 나왔다.
“할머니께서는 편히 앉으소서. 손님을 전송하러 나왔다가 허탕을 쳤지만 좋은 술이 아까우니 주인과 한잔하고 싶어 불렀소이다.”
김생은 막동에게 술과 안주를 들이라 하고 그 노파에게 술을 권했다. 이날 김생 과 노파는 취하도록 마셨고, 마치 친한 벗처럼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이 날 김생은 여인 이야기는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이튿날 김생은 좋은 술과 안주를 가지고 또 그 집으로 갔다. 그 날도 역시 막동이 왔다 갔다 하였고, 손님 대신 노파와 함께 술을 마셨다. 그 다음날도 김생이 똑같은 준비를 하고 노파를 청하자 막동의 예상대로 노파는 과연 의심이 든 모양이었다.
“이 부근 어느 집도 손님을 전송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인데 도련님께선 어찌하여 하필 누추한 저희 집을 골라 사흘씩이나 은혜를 베푸시는지요?”
“손님이 오지 않아 이렇게 된 것뿐 무슨 다른 뜻이 있겠소? 또 할머니와 더불어 술을 나누는 것은 손님과 주인 사이에 당연한 것이 아니오.”
김생은 그렇게 노파를 안심시켰다. 그 날도 두 사람은 술이 떨어질 때까지 마셨다. 김생은 빨간 보자기를 풀어 비단 적삼 하나를 내놓았다.
“매일 할머니를 괴롭히고도 갚을 것이 없어 걱정했는데 이것이라도 제 정성으로 아시고 받아 주시오.”
노파는 김생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면서도 그 속마음을 알 수 없어 근심이 되었다. 노파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바로 일어나서 절을 하였다.
“제가 과부 되어 살아온 지 오래지만 이웃 사람조차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련님께서 이렇게 마음을 써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혹 도련님께서 소망이 있으시다면 비록 죽는 일이라도 말씀하소서.”
그제서야 김생은 얼굴에 슬픈 빛을 띠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찌 사실대로 말하지 않겠소? 제가 어느 날 집으로 가는 길에 한 낭자를 보았습니다. 나이 어린 협기(俠氣)로 뒤를 좇아왔더니 그 낭자가 들어 간 곳이 바로 이 곳이었소. 그런데 그 낭자를 본 뒤부터 마음이 취한 듯 모든 일에 흥미를 잃고 그 낭자만 생각하니, 애끊는 괴로움이 벌써 여러 날이라오.”
노파는 김생이 여인을 본 날짜와 여인의 복장을 물었다. 노파는 짚이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도련님께선 제 죽은 언니의 딸을 보신 것 같습니다. 그 애의 이름은 영영(英英)이라 하는데 정말 탐스러운 아이지요. 하지만…….”
“하지만 뭐란 말이요?”
김생은 노파가 무슨 말을 할지 걱정되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노파는 김생 보다 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도련님은 그 애를 만나는 것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그건 무슨 말이요?”
“그 애는 회산군(檜山君)의 시녀입니다. 궁중에서 나고 자라 문 밖을 나서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전에 내가 본 날은 어인 나들이었소?”
“그 때는 마침 그 애 부모의 제삿날이라 제가 회산군 부인께 청하고 겨우 데려왔었지요.”
“…….”
“영영은 자태가 곱고 음률이나 글에도 능통해 진사(회산군)께서 첩을 삼으려 하신답니다. 다만 그 부인의 투기가 두려워 뜻대로 못 할 뿐이랍니다.”
김생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였다.
“결국 하늘이 나를 죽게 하는구나!”
노파는 김생의 병이 깊은 것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노파는 그렇게 김생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요? 그, 그것이 무엇이오? 빨리 말해 보시오.”
“단오가 한 달이 남았으니 그 때 다시 작은 제사상을 벌이고 부인에게 영아를 보내 주십사고 청하면 그리 될 수도 있습니다.”
김생은 그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할머니 말대로 된다면 인간의 오월 오월은 곧 천상의 칠석이오.”
김생과 노파는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영영을 불러낼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노파와 약속한 날이 되었다. 김생은 날이 밝기도 전에 그 집으로 달려갔다.
“일이 어떻게 되가오?”
노파는 아침도 먹기 전에 달려온 그가 우스웠는지 미소를 머금었다.
“부인께 간절하게 부탁하였더니 처음에는 거절하셨습니다. 진사께서 영아의 출입을 엄히 금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 제가 다시 간곡히 부탁하였더니 진사께서 출타하실 일이 있으니 그 때라면 가능할 것이라 했습니다. 영아가 오긴 오겠지만 진사님 출타 시간을 알 수 없어 언제 올지는 모릅니다.”
김생은 노파의 말에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여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했다. 그는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밖을 내다보며 영영을 기다렸다.
그런데 해가 거의 오시(午時)가 다 되어도 나타나는 그림자가 없었다. 김생은 안절부절못하다가 일어서서 부채를 휘둘러 기둥을 치면서 그 노파를 불렀다.
“바라보고 있으니 눈이 아프고, 근심하니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소. 행인들이 가까워졌다가 곧 다른 데로 가니, 그 때마다 내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소.”
“지성이면 감천이라니, 도련님은 좀 안정하시지요.”
두 사람이 이런 말을 주고받는데 먼 데서 신을 끄는 소리가 들려 왔다. 김생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 발소리는 점점 노파의 집 쪽으로 오는 것이었다. 김생이 창으로 달려가 바라보니 과연 오는 사람 은 꿈에도 그리던 영영 낭자였다.
김생은 기뻐 손뼉을 치는데 마치 어머니를 본 아이처럼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영은 문 앞 버드나무에 붉은 말이 매어 있는 것을 보고 안을 살피며 머뭇거리면서 들어오지 않았다. 노파는 영영을 불렀다.
“빨리 들어오너라. 여기 도련님은 우리 집에서 손님을 전송하러 오신 분이니 걱정할 것 없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늦었느냐? 네가 못 오는 줄 알고 네 부 모 제사를 그냥 지냈구나. 어서 들어오기나 하려무나.”
영영이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노파는 술상을 차렸다. 그리고 김생과 더불어 잔을 들고 서로 권하였다. 몇 잔 술이 오갔을 즈음 김생은 미소 지으며 영영에게 말했다.
“낭자도 이리 가까이 앉으시오. 내가 잔을 채우겠소.”
그러나 영영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들지 않았다.
“네가 깊은 궁중에서 자라 세정(世情)을 알지 못한다지만 술 권하는 예의조차 모르느냐?”
노파가 그렇게 말한 뒤에야 영영은 잔을 받아 들었다. 김생이 영영에게 술을 부어 주었고, 그녀는 주저하다가 술잔을 잠깐 입술에 대기만 했다. 잠시 후 그 노파는 술에 많이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더니 영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많이 취한 것 같구나. 좀 쉬어야겠으니 네가 잠시 도련님을 모시고 있거라.”
노파가 자리를 피해 주어 김생과 영영만 남았다.
“삼월에 홍화문 앞길에서 서로 본 적이 있는데 낭자는 그 때를 기억하겠소?”
“말은 기억하오나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사람이 말만 못하오?”
“말은 보았으나 사람은 보지 못했나이다.”
“낭자는 나를 놀리는구려. 비록 얼굴이 파리하고 몸이 말라서 그 때와 다르긴 하지만 설마 날 모르겠소? 하기야 낭자는 내가 누구 때문에 이리 된 것인지 알 까닭이 있겠소?”
김생은 안타까운 눈으로 영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영영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분명 김생을 아는 것 같았다.
“하기야 낭자는 내가 아닌데 어찌 이 마음을 알겠소?”
“도련님은 제가 아닌데 어찌 저의 마음을 아시리오?”
두 사람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영영은 다시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한 번 멀리서 바라보고 그리워한 지가 이미 달이 지났는데 이제야 만나 보게 되다니, 참으로 세상이 원망스럽소. 낭자 때문에 죽을 뻔했던 내 목숨은 오늘을 기다려 겨우 살아남았소.”
김생의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그러나 영영은 김생의 말이 끝날 무렵 일어서야 했다.
“진사님께서 돌아오시면 먼저 저를 찾으십니다. 그만 가야 합니다.”
김생은 영영의 말에 금방 시무룩해졌다.
“도대체 어찌하면 좋겠소? 벌써 작별할 때는 다가왔고 다시 만나기는 어려우니…….”
영영이 다시 눈을 들어 김생을 쳐다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안타까운 한숨이 흘러 나왔다.
“이 달 보름밤에 진사님은 밖에서 다른 왕자님들과 달을 감상하신다 합니다. 그 날 궁의 무너진 담 쪽으로 오십시오. 도련님께서 오신다면 무너진 담 옆의 작은 문을 열어 놓겠습니다. 그 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작은 방이 있사오니 도련님께선 거기에 계십시오.”
김생은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영영과 작별하였다. 김생은 노파의 집에서 나와 멀어져 가는 영영을 보고 저도 모르게 시 한 수를 읊었다.
宮門深處鎖嬋娟 깊고 깊은 저 궁 안에 고운 님 갇혀 있네
一別音容兩杳然 손을 놓아 작별 후로 서로 소식 아득하여라
此日難忘情態度 이 날도 잊지 못해 예쁜 얼굴 알뜰한 사랑
前身應結好因緣 하루 속히 서로 만나 좋은 인연 맺었으면
心勞往事愁如雨 지난 일을 생각하니 수심은 비가 되고
若待佳期日似年 가기(佳期)를 고대하니 하루 해가 한 해 같네
正欲尋芳三五夜 십오야 달 밝은 밤 고운 님 찾고지고
登樓看月幾時圓 다락 올라 달을 보며 그 옛날을 다시 찾네
김생이 약속한 날짜가 되어 가니, 과연 궁궐 담이 무너져 이가 빠진 것처럼 문이 되어 있었다. 좁고도 깊은 담구멍을 따라 들어가자, 이내 조그만 문이 나타났다. 시험 삼아 밀어보니 과연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 동쪽으로 내려가자 영영의 말대로 과연 별실이 나타났다. 김생은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말했다.
“난향이 나를 속이지는 않았구나.”
이어서 김생은 별실로 들어가 영영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밝은 달이 막 솟아오르고, 서늘한 바람이 갑자기 불어왔다. 그러자 계단 위의 뭇 꽃들은 그윽한 향기를 뿜어내고, 뜰 앞의 푸른 대나무는 맑고 시원한 소리를 내었다.
갑자기 문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안쪽에서 어떤 사람이 나왔다. 김생은 영영인지 아닌지 궁금해서 숨을 죽이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듣고 있는데,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옷 향기가 엄습해 왔다. 김생이 눈을 뜨고 바라보니 곧 난향이었다. 김생은 어둠 속에서 나와 영영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대의 사랑 김모(金某)가 이미 여기에 와 있소.”
영영이 말했다.
“낭군은 참으로 믿음직스러운 선비입니다.”
영영이 즉시 김생의 손을 이끌어 가까이 앉히고 안부를 묻자, 김생이 대답했다.
“만 번 죽을 고생을 견디고 넘어가는 숨을 겨우 보존하고 있을 뿐이오.”
영영이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리 되었습니까?“
김생이 말했다.
“땅은 가까운데 사람은 멀기 때문이오.”
이렇듯이 두 사람은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몰랐다. 김생이 밝은 달을 쳐다보고는 놀라서 말했다.
“내가 처음 올 때는 이 달이 동쪽 하늘에 있었는데, 지금은 하늘 한 가운데 떠 있소. 밤이 절반쯤 지나가 버렸으니, 이 시간에 동침을 할 수 없다면 장차 어느 때를 기다리란 말이오?”
김생이 즉시 영영의 옷깃을 붙들고 벗기려 하자, 영영이 말리면서 말했다.
“낭군은 어찌 저를 뽕나무밭에서 노는 여자처럼 대하십니까? 별도로 침실이 한 곳 있으니 그 곳에서 좋은 밤을 편안히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김생은 머리를 흔들면서 거절하여 말했다.
“나는 이미 법을 어기고 또 죽음을 탐하여 어렵사리 이곳에 왔소. 한 번 오는 것도 이렇듯 힘들었는데, 어떻게 또 기다릴 수 있겠소? 무릇 일을 처리할 때는 삼가 만전(萬全)을 기해야 하오. 만약 당돌하게 멋대로 행동한다면, 우리 일만 누설될까 두렵소.”
영영이 말했다.
“일 누설되고 안 되고는 오로지 나에게 달려 있으니, 낭군께서는 공연히 애태우지 마십시오.”
그리고 나서 김생의 손을 이끌어 감싸 안고 들어가자, 김생도 어쩔 수 없이 따라 들어갔다. 김생은 두려움에 떨면서 몸을 구부리고 살금살금 걸어가는데, 문안으로 들어갈 때는 깊은 연못을 굽어보는 듯 두려웠으며, 땅을 밟을 때는 엷은 빙판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걸었다. 매번 한 발을 옮길 때마다 아홉 번이나 넘어지고, 땀이 발뒤꿈치까지 흘러내려도 오히려 깨닫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영영을 따라 굽은 계단을 오르고 회랑을 빙빙 돌아서 안으로 들어갔는데, 두세 번 문을 지나서야 커다란 안채에 도달하였다.
궁인들은 모두 잠이 깊이 들어 뜰과 방은 고요했다. 오로지 깁을 바른 창에서 맑은 등불이 가물거리는 것이 보였는데, 그곳이 부인의 침소임을 알 수 있었다. 영영은 김생을 어떤 방으로 들이밀며 말했다.
“낭군은 여기에 조금만 앉아 계십시오.”
그런 다음 영영은 즉시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오래도록 나오지 않았다. 김생은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여 자리에 앉거나 눕는 등 안절부절 하였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매우 이상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윽고 어떤 사람이 중문으로 달려 들어와 아뢰는 소리가 들리었다.
“나리께서 들어오십니다.”
그 소리와 함께 등불이 뜰 가득히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시녀와 하인들이 이리저리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면서 대군을 받들어 모시고 들어왔다. 대군은 취해서 뜰 가운데 눕고서도 오히려 깨닫지 못하였으며, 코고는 소리도 점차 깊어갔다. 이때 영영이 부인의 명을 받들고 와서 아뢰었다.
“차가운 땅바닥에 오래 누워 계시면 풍상이 들까 두려우니, 어서 왕자님을 일으켜 안으로 모시랍신다.”
잠시 후 사람 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불빛도 꺼졌다. 이윽고 영영이 오른손으로는 옥등(玉燈)을 잡고, 왼손으로는 은병(銀甁)을 붙들고 나와 김생이 숨어 있는 방문을 열었다. 김생은 벽에 붙어서 두 발을 포개고 서 있으면서, 속으로 이제는 죽었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영영이 웃으면서 김생에게 말했다.
“낭군께서는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제가 위로하고자 따뜻한 술을 가지고 왔습니다.”
마침내 영영이 금으로 된 연꽃 모양의 술잔에다 술을 따라 김생에게 권하니, 김생이 받아 마셨다. 영영이 또 한 잔을 권하자, 김생이 사양하며 말했다.
“마음이 정(情)에 있지, 술에 있지 않소.”
김생은 즉시 술을 치우게 하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다른 물건은 없고, 오직 붉은 책상 위에는 두초당(杜草堂)의 시집 한 권이 흰 구슬로 글을 새긴 낭간에 눌려 있었으며, 탁상 위에는 줄이 짧은 거문고가 하나 가로놓여 있을 뿐이었다. 김생은 즉시 두 구를 지어서 먼저 불렀다.
琴書瀟鮮淨無塵 거문고와 책은 맑고 깨끗하여 티끌 하나 없으니,
正稱空房玉一人 바로 쓸쓸한 방에 앉은 아름다운 여인을 일컫는 것이리.
영영이 이어서 읊었다.
今夕不知何夕也 오늘밤은 어떠한 밤인가?
錦衾瑤席對佳賓 비단 이불 구슬 자리에 고운 님과 마주 앉았네.
이윽고 김생과 운영은 서로 이끌고 함께 잠자리에 들어가 비로소 마음껏 사랑을 나누었다. 밤이 다 끝나갈 즈음에 새벽닭이 꼬끼오 울며 날 밝기를 재촉하고, 멀리서 파루를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왔다. 김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가지를 챙겨 입고 탄식하며 다급히 말했다.
“좋은 밤은 괴로울 정도로 짧고 사랑하는 두 마음은 끝이 없는데, 장차 어떻게 이별을 하리오? 궁궐 문을 한 번 나가면 다시 만나기 어려울 터이니, 이 마음을 어떻게 하리오?“
영영은 이 말을 듣고 울음을 삼키며 흐느끼더니, 고운 손으로 눈물을 흩뿌리면서 말했다.
“홍안박명(紅顔薄命)은 옛날부터 있었으니, 비단 미천한 저에게만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살아서 이렇듯 이별하니, 죽어서도 이렇듯이 원통할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은 꽃이 시들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과 같으니, 굳이 날씨가 추워지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낭군은 철석같은 마음을 가진 남아인데, 어찌 소소하게 아녀자를 염려하다가 성정(性情)을 해쳐서야 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낭군께서는 이별한 뒤에는 제 얼굴을 가슴속에 두어 심려치 마시고, 천금같이 귀중한 몸을 잘 보존하십시오. 또 학업을 계속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운로에 올라 평생의 소원을 이루시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옵니다!“
이어서 영영은 토끼털로 만든 붓을 뽑고 용꼬리를 새긴 벼루를 연 다음, 난봉전(鸞鳳牋)을 펼쳐 놓고 칠언율시(七言律詩)를 한 수 지어 이별에 부치었다.
幾日相思此日逢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워하다가 오늘 만났던고?
綺窓綉幕接手容 깁 바른 창 수놓은 휘장 안에서 손잡고 마주하였네.
燈前未盡論心事 등불 앞에선 마음을 다 털어놓지 못하고,
枕上施驚動曉鍾 베갯머리에선 새벽 종소리에 놀라 일어났네.
天漢不禁烏鵲散 은하수는 오작이 흩어지는 것을 막지 못하니,
巫山那復雲雨濃 언제 다시 무산의 비구름 짙어질 것인가?
遙知一別無消息 한 번 이별한 뒤 아득히 소식은 알 길 없고,
回首宮門鎖幾重 겹겹이 잠긴 궁궐 문을 되돌아보기만 하네.
김생은 영영의 시를 보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으며,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즉시 붓을 적셔 화답(和答)하였다.
燈盡紗窓落月斜 등불 꺼진 사창(紗窓)에 달이 이우니,
乖離牛女隔天河 견우와 직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이별하네.
良宵一刻千金直 좋은 밤의 일각 천금만큼 귀하니,
別淚雙行百恨和 두 줄기 이별 눈물에 온갖 한이 사무쳤네.
自是佳期容易阻 이제 아름다운 기약 용이치 않으리니,
由來好事許多魔 참으로 호사에 다마로구나.
他年縱使還相見 먼 훗날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無限恩情奈老何 한없는 은정(恩情)에 늙은들 어떠하리.
영영은 김생의 시를 펼쳐 놓고 보려고 하였으나 눈물이 글자를 적셔 다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김생의 시를 거두어 품속에 넣고 묵묵히 말을 못한 채 손을 잡고 서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때 새벽 등불은 희미해지면서 동창이 밝아오려 하였다. 이에 영영은 김생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와 무너진 담장 밖에서 전송하였다. 두 사람이 서로 흐느끼되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니, 죽어서 이별하는 것보다 더 비참하였다.
이윽고 김생은 집으로 돌아왔으나, 넋을 잃어 물건을 보아도 보이지 않고 소리를 들어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의 어떤 일도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한 통의 편지를 써서 간절한 마음을 전달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상사동의 노파도 이미 세상을 떠나서 다시 편지를 부칠 길마저 없는지라, 김생은 희망을 잃고 헛되이 몽상(夢想)에 젖어 있기만 했다.
그러나 세월은 천연히 흘러가고 광음은 돌연히 바뀌어 온갖 근심 속에서도 삼 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마음이 일에 따라 변하듯 영영에 대한 그리움도 점차 줄어들었다. 김생은 다시 학업을 일삼아 경전(經典)과 서적(書籍)에 침잠하고 힘써 문장을 닦았다.
홰나무 꽃이 누렇게 물드는 시기가 되어 김생은 과거 시험장에서 나라 안의 모든 선비들과 함께 자거를 다투었다. 그는 시험을 치를 때마다 거듭 합격하여 마침내 뭇 사람들 가운데서 장원으로 뽑히었다. 이로 인해 김생의 이름은 널리 빛나 당대(當代)에는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삼일 동안의 유가에서 김생은 머리에 계수나무 꽃을 꽂고 손에는 상아(象牙)로 된 홀을 잡았다. 앞에서는 두 개의 일산이 인도하고 뒤에서는 동자들이 옹위(擁衛)하였으며, 좌우에서는 비단옷을 입은 광대들이 재주를 부리고 악공들은 온갖 소리를 함께 연주하니, 길거리를 가득 메운 구경꾼들이 김생을 마치 천상의 신선인 양 바라보았다.
김생은 얼큰하게 술에 취한지라, 의기(意氣)가 호탕해져 채찍을 잡고 말 위에 걸터앉아 수많은 집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갑자기 길가의 한 집이 눈에 띄었는데 높고 긴 담장이 백 걸음 정도 빙빙 둘러 있었으며, 푸른 기와와 붉은 난간이 사면에서 빛났다. 섬돌과 뜰은 온갖 꽃과 초목들로 향기로운 숲을 이루고, 희롱하는 나비와 미친 벌들이 그 사이를 어지러이 날아 다녔다.
김생이 누구의 집이냐고 물으니, 곧 회산군(檜山君) 댁이라고 하였다. 김생은 문득 옛날 일이 생각나 마음속으로 은근히 기뻐하며, 짐짓 취한 듯 말에서 떨어져 땅에 눕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궁인(宮人)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몰려나오자, 구경꾼들이 저자처럼 모여들었다.
이때 회산군은 죽은 지 이미 3년이나 되었으며, 궁인들은 이제 막 상복(喪服)을 벗은 상태였다. 그 동안 부인은 마음 붙일 곳 없이 홀로 적적하게 살아온 터라, 광대들의 재주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시녀들에게 김생을 부축해서 서쪽 가옥으로 모시고, 죽부인을 베개 삼아 비단 무늬 자리에 누이게 하였다. 김생은 여전히 눈이 어질어질 하여 깨닫지 못한 듯이 누워 있었다.
이윽고 광대와 악공들이 뜰 가운데 나열하여 일제히 음악을 연주하면서 온갖 놀이를 다 펼쳐 보였다. 궁중 시녀들은 고운 얼굴에 분을 바르고 구름처럼 아름다운 머릿결을 드리우고 있었는데, 주렴을 걷고 보는 자가 수십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영영이라고 하는 시녀는 그 가운데 없었다. 김생은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였으나 그녀의 생사를 알 수가 없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 낭자가 나오다가 김생을 보고는 다시 들어가서 눈물을 훔치고, 안팎을 들락거리며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이는 바로 영영이 김생을 보고서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차마 남이 알아 챌까봐 두려워한 것이었다.
이러한 영영을 바라보고 있는 김생의 마음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날은 이미 어두워지려고 하였다. 김생은 이곳에 더 이상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나 주위를 돌아보고는 놀라서 말했다.
“이곳이 어디입니까?“
궁중의 늙은 노비인 장획(藏獲)이라는 자가 달려와 아뢰었다.
“회산군 댁입니다.”
김생은 더욱 놀라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이곳에 왔습니까?“
장획이 사실대로 대답하자, 김생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려고 하였다. 이때 부인이 술로 인한 김생의 갈증을 염려하여 영영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서로 가까이 하게 되었으나, 말 한 마디도 못하고 단지 눈길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영영은 차를 다 올리고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면서 품속에서 편지 한 통을 떨어뜨렸다. 이에 김생은 얼른 편지를 주워서 소매 속에 숨기고 나왔다.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와 뜯어보니, 그 글에 일렀다.
박명한 첩 영영은 재배하고 낭군께 사룁니다. 저는 살아서 낭군을 따를 수 없고, 또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잔해만이 남은 숨을 헐떡이며 아직까지 살아 있습니다. 어찌 제가 성의가 업어서 낭군을 그리워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늘은 얼마나 아득하고, 땅은 얼마나 막막하던지! 복숭아와 자두나무에 부는 봄바람은 첩을 깊은 궁중에 가두고, 오동에 내리는 밤비는 저를 빈방에 묶어 놓았습니다. 오래도록 거문고를 타지 않으니 거문고 갑(匣)에는 거미줄이 생기고, 화장 거울을 공연히 간직하고 있으니 경대(鏡臺)에는 먼지만 가득합니다. 지는 해와 저녁 하늘은 저의 한을 돋우는데, 새벽 별과 이지러진 달인들 제 마음을 염려하겠습니까? 누각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면 구름이 제 눈을 가리고, 창가에 기대어 생각에 잠기면 수심이 제 꿈을 깨웠습니다. 아아, 낭군이여! 어찌 슬프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또 불행하게 그 사이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시어 편지를 부치고자 하여도 전달할 길이 없었습니다. 헛되이 낭군의 얼굴 그릴 때마다 가슴과 창자는 끊어지는 듯 했습니다. 설령 이 몸이 다시 한 번 더 낭군을 뵙는다 해도 꽃다운 얼굴은 이미 시들어 버렸는데, 낭군께서 어찌 저에게 깊은 사랑을 베풀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낭군 역시 저를 생각하고 있었는지요? 하늘과 땅이 다 없어진다 해도 저의 한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아아, 어찌하리오! 그저 죽는 길밖에 없는 듯합니다. 종이를 마주하니 처연한 마음에 이를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편지 끝에 다시 칠언절구(七言絶句) 5수가 씌어 있었다.
好因緣反是惡緣 좋은 인연이 도리어 나쁜 인연이 되었으나,
不怨郞君只怨天 낭군은 원망스럽지 않고 하늘만 원망스럽네.
若使舊情猶未絶 만약 옛 정이 아직 끊이지 아니하였다면,
他年尋我向黃泉 먼 훗날 황천(黃泉)으로 날 찾아오소서.
一日平分十二時 하루는 균등(均等)하게 열두 때로 나뉘었으니,
無時無日不相思 어느 날 어느 때인들 님 그리지 않았으리.
相思何日期相見 언제나 그대를 만날 수 있을까 시름타가,
深恨人間有別離 깊은 한 맺힌 채 이 세상을 이별하네.
柳憔花悴若爲情 사랑하는 마음은 버드나무와 꽃처럼 시들어,
鏡裡猶憂白髮生 거울 보면 근심으로 백발만 자란다네.
自是佳人無好事 이제 고운 님에게 좋은 일 없으리니,
墻頭晨鵲爲誰鳴 담장머리의 새벽닭은 누굴 위해 울거나?
別來忍掃席中塵 이별한 뒤 마지못해 방석의 먼지 털려는데,
愛有郞君坐臥痕 낭군이 앉은 자취 애틋하기도 하구나.
寂寞深宮消息斷 깊고 적막한 궁궐에 소식은 끊어지고,
落花春雨掩重門 봄비에 지는 꽃은 겹겹으로 닫힌 궁문(宮門)을 가리네.
欲寄音書寄得難 편지를 보내려 해도 부치기 어려워,
幾回呵筆綠窓間 푸른 창가에서 몇 번이나 언 붓을 녹였던고.
空敎別後相思淚 쓸쓸히 이별한 뒤 님 그리워 흘린 눈물,
點滴花牋一班班 꽃무늬 종이에 방울방울 떨어져 아롱지네.
김생은 다 읽은 뒤에도 오랫동안 편지를 만지작거리며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였으며, 영영을 그리는 마음은 예전보다 두 배나 더 간절하였다. 그러나 청조가 오지 않으니 소식을 전하기 어렵고, 흰기러기는 오래도록 끊기어 편지를 전할 길도 없었다. 끊어진 거문고 줄은 다시 맬 수가 없고 깨어진 거울은 다시 합칠 수가 없으니, 가슴을 조리며 근심을 하고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 못 이룬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김생은 마침내 몸이 비쩍 마르고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나니 김생은 죽은 몸이나 다름없었다. 마침 김생의 친구 중에 이정자(李正字)라고 하는 이가 문병을 왔다. 정자는 김생이 갑자기 병이 난 것 을 이상해 했다. 병들고 지친 김생은 그의 손을 잡고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정자는 모든 이야기를 듣고 놀라며 말했다.
“자네의 병은 곧 나을 걸세. 회산군 부인은 내겐 고모가 되는 분이라네. 그 분 은 의리가 있고 인정이 많으시네. 또 부인이 소천(所天)을 잃은 후로부터, 가산과 보화를 아끼지 아니하고 희사(喜捨)와 보시(布施)를 잘 하시니, 내 자네를 위하여 애써 보겠네.”
김생은 뜻밖의 말을 듣고 너무 기뻐서 병든 몸인데도 일어나 정자의 손이 으스러져라 꽉잡을 정도였다. 김생은 신신 부탁하며 정자에게 절까지 하였다. 정자는 그 날로 부인 앞에 나아가 말했다.
“얼마 전에 장원 급제한 사람이 문 앞을 지나다가, 말에서 떨어져 정신을 차리 지 못한 것을 고모님이 시비에게 명하여 사랑으로 데려간 일이 있사옵니까?”
“있지.”
“그리고 영영에게 명하여 차를 올리게 한 일이 있사옵니까?”
“있네.”
“그 사람은 바로 저의 친구로 김모라 하는 이옵니다. 그는 재기(才氣)가 범인 (凡人)을 지나고 풍도(豊道)가 속되지 않아, 장차 크게 될 인물이옵니다. 불행하게도 상사의 병이 들어 문을 닫고 누워서 신음하고 있은 지 벌써 두어 달이 되었다 하더이다. 제가 아침저녁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문병하는데, 피부가 파리해 지고 목숨이 아침저녁으로 불안하니, 매우 안타까이 여겨 병이 든 이유를 물어 본 즉 영영으로 인함이라 하옵니다. 영영을 김생에게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부인은 듣고 나서,
“내 어찌 영영을 아껴 사람이 죽도록 하겠느냐?”
하였다. 부인은 곧바로 영영을 김생의 집으로 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꿈에도 그 리던 두 사람이 서로 만나게 되니 그 기쁨이야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김생은 기운을 차려 다시 깨어나고, 수일 후에는 일어나게 되었다. 이로부터 김생은 공명(功名)을 사양하고, 영영과 더불어 평생을 해로하였다.
弘治中, 有成均進士 金生者, 忘其名. 爲人容貌粹美, 風度絶倫. 善屬文, 能笑語, 眞世間奇男子也. 鄕里以風流郎稱之. 年甫弱冠, 登進士弟一科, 名動京華. 公卿大家願嫁愛女, 不倫財寶也.
一日, 自泮宮還其第, 馬上遙見靑帘隱映於綠柳紅杏之間, 生不勝春興之惱, 思醉如渴. 遂典白紵單衫, 沽得眞珠紅酒, 酌以花磁盞而飮之, 醉臥酒樓之上, 花香襲衣, 竹露酒面.
俄而, 夕陽橫嶺, 飛鳥栖林, 僕夫促歸. 生起而上馬, 揮鞭登道, 則白沙平鋪乎遠近細柳垂裊乎川源. 遊人盡散, 行路漸稀. 生感興微吟, 遂成一絶 曰:
東陌看花柳,
紫騮驕不行.
何處玉人在?
桃花無恨情.
吟竟, 半擡醉眼, 則有一美人, 年纔二八. 蓮步輕移, 陌塵不起, 腰肢嫋嫋, 態度婷婷, 或行或止. 或東或西, 或拾瓦礫, 打起鶯兒, 或攀柳條, 佇立斜陽; 或抽玉簪, 輕搖綠鬢, 翠袂飄拂乎春風, 紅裳照耀乎晴川.
生望之, 神魂飄蕩, 不能自抑. 促鞭馳詣, 聣而視之, 雅齒韶顔, 眞國色也. 生盤馬踟躕, 或先或後, 留神注目, 終莫能捨去也. 女知生不能無意, 含羞抵眉, 不敢仰視. 女行漸遠, 生亦相隨. 趁其所終到, 則相思洞路旁蝸室數間, 乃其所止也.
生盤桓佇立, 不堪惆悵, 然日已夕矣. 知其無可奈何, 怏怏然而去, 茫茫然而自失, 如醉如癡. 中夜撫枕, 寢不安席, 臨飱忘飯, 食不下咽. 形容憔悴似古木; 顔色慘惔如死灰. 黯黯懷愁, 黙黙不言, 雖家人父母, 莫曉其所以然也.
纔過十餘日, 有蒼頭莫同者乘間進謁, 垂淚而問曰: “郎君平日言笑豪縱, 卓犖不羈, 今乃戚戚, 如有隱憂, 是何憔悴悶怨如是耶? 無乃有所思而然耶? 生悽然感悟, 乃以實告莫同, 莫同心思良久曰: “僕爲郎君請獻麽勤之計, 郎君無用自煎. "生曰: "然則將奈何? "曰: "郎君急辦美酒嘉肴, 須使極侈, 直之所到家, 若將餞客之爲者然. 借一間說盤筵, 呼奴請賓, 奴亦承命而往, 食頃而返曰: “至矣至矣!" 郎君又命之, 再請之, 奴亦承命而往, 日暮而返曰: “今日餞之者衆, 故醉甚不得來, 明日則定行矣." 於是呼主人出, 命之座, 以其酒肴醉飮之, 不視顔色而退. 明日, 亦如之; 又明日, 又往焉, 亦如之. 則一則懷惠, 二則感恩, 三則必疑之; 懷惠則思報, 感恩則思死, 疑則必請其所以. 於是開襟吐疑, 則庶可圖矣."
生深然之, 欣然而笑曰: “吾事諧矣.” 卽具酒肴, 直詣其家, 說餞送. 奴往復邀客, 一如蒼頭之言. 奴亦返, 命再三, 一如所約. 生佯罵曰: “咄咄其人, 誤佳期如是, 夫雖獲來春釀, 不可虛還. 於此爲主人一籌, 亦非惡事也.”
乃呼主人出, 則七十老嫗來見矣. 生慰之曰: “嫗且安坐. 適以餞客, 來舍于此, 而嫗善延納, 多謝厚意.” 卽呼莫同, 命進酒肴, 與嫗相酬작, 若平生之舊, 不出一言而退.
生自料前所見小娥, 不知實是嫗家女否? 悒悒懷悶, 如不能自存, 然冀其深感, 而待其自疑, 然後發告私情. 明日, 乃往不懈. 如是者再三, 嫗果自疑, 斂容避席曰: “老身窃有所請焉, 路邊人家織織如魚鱗절此, 開樽送行何處不可? 獨尋區區之陋居如是乎? 且郎君京華巨族, 士林宗匠老身窮巷이婦, 草屋微生, 前有貴賤之嫌後無平生之舊, 而猥蒙厚意以至此極, 老身何以得? 此實不識其然也.”
生笑曰: “吾因餞客而別無他意也. 且不與嫗戛然者, 賓主之禮當然也.” 酒闌, 生輒解紫裶, 合歡單衫, 投之於嫗而與之曰: “每煩嫗家, 無以爲報, 以此爲信, 以備他日不忘之資也, 幸嫗勿却.” 嫗感之深, 又疑之甚, 卽起而再拜曰: “郎君之賜至此, 則老身之感滋甚意, 者或有所以然而然耶? 丁寧老身寡居多年, 凡在隣里者恒無顧藉, 況於郎君乎? 就令郎君有所望於老身, 雖死不辭也.” 生笑而不答; 嫗之請强, 然後莞爾而答曰: “此洞名云何?” 曰: “相思洞也.” 曰: “吾爲洞名, 所祟耳.” 嫗微啞曰: “郎君無乃邊嫗之任望於老身乎? 但此洞無雲華之窈窕其於魏郞之風流乎?”
生知其所思嬋娟, 必不在此也. 生
生愀然失色曰: “僕旣爲嫗所厚, 安得不以實告? 某於某月某日從某處來, 路上邊見少娘子, 年甫若干. 衣翠羅衫紅綺裳, 着白綾襪紫的鞋. 以眞珠鈿攀索頭. 以雪色瑤環約纖指, 由弘化門前路, 逶迤而去. 僕以年少俠氣, 不禁春情之駘蕩, 尾而隨之, 趁其所到則嫗家是也. 自此, 心醉如泥, 萬事茫然, 惟其小娘是念. 明眸晧齒, 寤寐見之, 心推腸斷, 非一朝一夕, 嫗見我顔色之枯槁, 爲如何哉? 如是則煩嫗家餞客, 不得不已.”
嫗聞之, 深憐其意, 然未知生之所念爲何人也. 沈吟半餉, 釋然頓悟曰: “此乃亡兄之少女, 名英英, 字蘭香者也. 若然則誠難矣!誠難矣!” 生曰: “何故?” 嫗曰: “是乃檜山君宅侍女也. 生於宮中, 長於宮中, 不蹈門前之路久矣. 姿色之美, 旣爲郎君所觀, 必不强爲郎君. 道雅心柔, 無異於士族家處子, 加以審音律, 能解文, 故進賜愛之憐之, 將以爲綵衣; 而夫人不能免妬忌之俗, 甚於河東之吼, 是以未果耳. 囊日, 英兒之來此不憚者, 以其時當寒食節, 祀其亡父母靈於此, 故請暇於夫人而來耳. 然適値進賜之出遊, 以致此行, 不然郎君何由得接面目乎? 意爲郎君更圖一會, 誠難矣!難矣!”
生仰天太息曰: “已吾當死矣. 嫗”
甚悶之, 憮然爲問曰: “無已則有一焉. 端午佳節只隔一月, 其時則老身當爲亡兄復說小奠, 以此告于夫人前, 請阿英兒半日之暇, 則尙可庶幾其萬一也. 郎君且歸待期會, 可也.”
生喜曰: “果如嫗言, 人間之五月五日, 乃天上之七月七日也.” 生與嫗相別, 各道萬福而退. 生歸家, 喁喁然視日之斜, 汲汲然望夜之至, 度一日如三秋, 待佳期如不及. 頻寄翰墨以宣其噎湮, 乃作憶秦娥闋曰:
春寂寂,
一庭梨花,
風雨夕.
風雨夕,
相思不見,
音耗兩隔.
却悔當年遇傾國,
我心安得頑如石?
空相憶,
對花腸斷,
臨風淚滴.
及期而往, 嫗出而迎之甚喜. 生問無恙. 外不暇出一言, 祇曰: “事勢若何?” 曰: “昨日進夫人前請之甚懇, 夫人爲言: [進賜平日禁英兒出入甚嚴, 故我不敢從汝所願, 若明日爲卿宰所出遊而作令節, 則吾何惜一英兒暫時之閒也? ]夫人之諾則丁寧矣, 但未知進賜之出遊乎否也?”
生將信將疑, 且喜且懼心寞能定, 而悄然憑几, 開戶而待之. 日將倚午, 了無形影, 胸煩腸熱, 凝坐成癡, 有若霜後蠅然也. 生翻然起立, 揮扇擊柱, 呼嫗而告之曰: “望眼欲穿, 愁腸欲斷. 多少行人近而却, 非吾望絶矣?”
嫗慰之曰: “至誠感天, 郎且少安.” 有頃窓外有曳履聲, 自遠而近. 生驚顧視之, 乃英少娘也. 生拍手曰: “豈非天也?” 嫗亦喜之, 如赤子之見慈母也. 英見門前綠柳紫騮長嘶; 庭畔淸陰僕從羅列, 怪而踟躕不敢遽入. 嫗詭阿英曰: “汝其速入無疑, 汝不識此郞君乎? 郎君乃吾亡夫之親族也, 適來陋舍, 將欲餞客, 且汝來何暮耶? 吾恐汝終不來, 故已祭汝父母耳, 汝可入于內, 速取杯盤來, 將以奉郎君一酌.” 英如其言奉盤而至, 嫗與生擧盃相屬. 酒半酣生謂英曰: “娘亦就坐, 吾巡及至矣.” 英含羞低顔不敢正對. 嫗曰: “汝生長深宮, 不知世情之乃爾, 汝能識字, 不知酬酢之有禮乎?” 英乃受, 猶未快如也. 澀把香扈乍接朱唇而已. 少焉, 嫗佯醉倦坐, 欠伸思睡, 顧英而言曰: “吾爲酒力所困, 氣甚不穩, 且欲少安, 汝暫侍坐.” 卽起入內, 倒榻醉睡, 鼻息如雷. 於是生謂英曰: “頃者, 自夫子廟來, 相見于弘化門前路, 三月初吉, 實惟其時, 汝能記憶否?” 英答曰: “記馬, 不記人也.” 生曰: “人不如馬耶?” 英曰: “見馬, 不見人也.” 生曰: “汝豈徒不記人乎哉? 顔色之憔悴, 形容之枯槁, 不與囊時相似者, 豈無所以然也? 汝非我, 安知我之心乎?” 英笑曰: “子非妾, 安知妾之心乎?” 生移席狎坐, 以實告之曰: “咨爾蘭香!汝豈無情人哉? 自從相逢不相話以來, 相思不相見今幾日月? 咨爾蘭香!汝寧不悲乎哉? 徯我娘, 娘來其蘇矣.”
英英微啞不答, 生欲留英于此, 乃以繼夜要以同枕, 英不可曰: “吾進賜主, 朝以出遊, 暮以當還. 出遊, 故妾得來于此; 還則呼妾而解衣, 不可以婉婉之弱質, 陷於萬死之地也. 是以只卜其晝, 未卜其夜.” 生知其不可久留於此, 乃以微意挑之曰: “苟如若言, 則當奈此心何? 日已云暮, 分手以迫, 後會不易, 良晤難再, 汝其憐之, 無吝乎半餉之歡.” 遂欲狎之, 英斂袵正色曰: “余豈木石人哉? 不知郎君心內事? 乎但進賜不以妾爲菲薄, 日夜使令於前, 信而任之, 使不出中門之外. 今之來此, 已犯嚴令耳, 若又恣行不法, 醜聲彰聞, 死有餘罪, 縱欲從命, 其可得乎?”
生拊髀而歎曰: “予豈生乎? 其爲泉下人哉!” 遂執其素手, 捫其素乳, 接其玉脚, 唯心所欲, 無所不爲, 至於講歡則不可也. 生鼓情竭誠, 百端誘之曰: “鳥飛急, 兎走疾, 歲月如流. 紅已歇, 芳已衰, 蝴蝶莫念. 其在人也, 何以異乎? 顔凋紅於轉頭, 髮生白於彈指. 朝雲暮雨, 陽臺神女, 本無定蹤; 碧海靑天, 月中姮娥, 應悔偸藥. 鳥生微而比翼, 木性頑而連理, 矧性欲之所鍾, 豈人物之異致? 春風蝴蝶之夢, 特惱空房; 夜月杜鵑之啼, 偏驚孤枕, 豈可使杜牧之尋春芳晩? 魏寓言: 見姮娥遲, 虛負靑春之年, 空遺黃壤之恨. 西陵綠樹, 寂寞千載之荒丘; 長信門扃, 蕭條幾夜之秋雨.] 嗟吾心之可惜, 而恨娘子之無情, 生而何哉? 死而止耳!”
英終不肯從曰: “郎君固有意於賤妾, 可於他日相尋.” 生不可曰: “一別音容, 宮門幾重, 欲寄音信, 無由可達, 其可更望喜眼之雙晴乎?” 英曰: “此豈知我者? 是月望日夜, 進賜與王子諸君約爲翫月之會, 必是入夜而退. 且宮之墻垣適爲風雨所壞, 進賜緩於宮家, 故時未理. 之郎君可於此日, 乘昏黑而來到, 從壞垣而深入, 則中有短牆之門, 當啓而待之. 由門而入, 循墻而下, 東階十步許有別寢數間, 郎君潛身于此, 待妾出迎, 則何難乎佳期哉?” 生頗然之, 牢定約束, 分결而歸. 一時登道, 漸成南北, 立馬回首, 黯然消魂而已. 生自此懸憶尤甚. 乃作四韻一首以自悼, 曰:
宮門深處鎖嬋娟,
一別音容兩杳然.
此日難忘情態度,
前身應結好因緣.
心勞往事愁如雨,
若待佳期日似年.
正欲尋芳三五夜,
登樓看月幾時圓?
及期而往, 則果有壞垣, 牙缺成門. 由之而入, 度密穿深, 乃得小門, 推而試之, 而果不鎖也. 入而東下, 果得別寢, 心私自賀曰: “蘭香不欺俄矣.” 乃投其中以待英出, 于時, 白月初高, 凉風乍起, 階上群花, 暗香浮動, 庭前綠竹, 疎韻蕭洒. 忽聞開戶之聲自內而出, 生將信將疑屛息潛聽, 蛩音漸近, 依香來襲, 開眼視之, 則乃蘭香也, 生出而撫背曰: 情人金某已在斯矣. 英曰: 郎君大是信士. 卽携手狎坐, 問生之安否, 生答曰: 忍得萬死, 僅保殘천耳. 英曰: 何故其然耶? 生曰: 地邇人遐之故也. 相與打話, 不覺夜深. 生仰見明月而驚之曰: 我初來時, 此月在東; 今已中天, 夜將過半, 不可以此時同枕, 將何俟焉? 卽把英之衣襟而解之, 英止之曰: “郎君何以待妾如桑中之遊女乎? 別有寢房一所, 可於其中隱度良夜.” 生掉頭而謝曰: “我旣冒法, 且昧死崎嶇到此, 一之已甚, 其可再乎? 凡爲處事貴得萬全, 若又咨行唐突, 第恐事泄.” 英曰: “事之泄不泄惟我在, 郎君無用自煎.”
乃携手擁入, 生不得已隨之. 跼蹐惶恐, 入門如臨深淵, 蹈地如履薄冰; 每移一足動輒九跲, 汗出至踵猶不能自覺也. 無何, 繞曲체, 循回廊, 入門者再, 三然後進于大內. 宮人睡熟, 庭戶寂然, 惟見紗窓淸燈明滅, 可知夫人寢所也. 英引生納之一房, 曰: “郎且少安.” 卽入于內, 久而不出. 生無任無聊, 或坐或立, 私怪殊甚. 旣而有人趨入中門報曰: “進賜且入矣.”
滿庭炬燭照曜煒煌, 侍女婢僕奔走左右擁衛而入; 進賜醉臥庭中尙不覺, 悟鼾睡之, 聲漸. 熟英承夫人之命來報曰: “久臥冷地, 恐爲風傷.” 挽起王子, 扶而入內. 人聲漸息, 火光亦滅. 英右手持玉燈, 左手携銀甁, 出而開戶; 則生塗壁累足而立, 自以爲將死而已. 英笑謂生曰: “郎君無乃有驚懼之心乎? 妾欲慰之, 故持溫酒而來.” 遂以金荷葉盞酌而勸生, 生飮之. 英又勸一杯, 生辭曰: “在情, 不在酒也.” 乃命撤去.
生見房中無他物, 只有朱紅書案置杜草堂詩一卷, 以白玉書瑱鎭之琅玕桌上橫一短琴, 卽口號二句先唱曰:
琴書瀟鮮淨無塵,
正稱空房玉一人.
英英繼吟曰:
今夕不知何夕也?
錦衾瑤席對佳賓.
旣而相携昵枕, 纔盡繾綣之意. 夜已將闌, 晨鷄喔喔然催曉, 遠鍾隱隱乎罷漏. 生起而攝衣, 欷歔數聲曰: “良宵苦短, 兩情無窮, 其如將別何? 一出宮門, 後會難期, 其如此心何?” 英聞之, 呑聲飮泣, 玉手揮淚曰: “紅顔薄命, 自古有之, 非獨微妾. 生如此而別, 死如此而怨, 其生其死, 如花殘葉, 落將不待歲月寒矣. 郎君以男兒鐵石之心, 何可屑屑然爲兒女之戀傷性情乎? 伏願郎君此別之後, 無置妾面目於懷抱間, 以傷思慮; 善保千金之軀, 不廢學業, 擢高第, 登雲路, 以盡平生之願, 幸甚幸甚!” 乃抽兎毫筆, 開龍尾硯, 展鸞鳳牋, 遂寫七言律詩吟付爲別, 曰:
幾日相思此日逢,
綺窓綉幕接手容.
燈前未盡論心事,
枕上施驚動曉鍾.
天漢不禁烏鵲散,
巫山那復雲雨濃?
遙知一別無消息,
回首宮門鎖幾重.
生覽之, 悲不自勝, 不覺淚下, 卽濡筆而和之曰:
燈盡紗窓落月斜,
乖離牛女隔天河.
良宵一刻千金値,
別淚雙行百恨和.
自是佳期容易阻,
由來好事許多磨.
他年卽使還相見,
無限恩情奈老何?
英英展而欲覽, 淚滴濕字, 不能盡看. 收而藏之懷中, 脉脉不語, 握手相看而已. 干時, 曙燈唵翳, 東窗欲明. 英乃携手而出, 送于壞牆之外. 兩人相與鳴咽, 不能成泣, 慘於死別. 生旣還家, 喪神失心, 視不見物, 聽不聞聲, 筌蹄世故, 無一事掛念; 欲爲一書以致懇懇之意, 而相思洞老嫗旣已殞世, 無便可奇, 徒費悵 , 望虛勞夢想而已.
歲月荏苒, 光陰倏忽, 百憂叢裡, 三秋已過, 情隨事變, 念懷稍弛, 復事舊業, 沈潛乎經籍, 發奮乎文章, 以待槐黃之期, 與國士鬪觜距於試場. 再進再捷, 擢于人爲壯元, 光耀一世, 人莫比肩.
三日遊街, 頭戴桂花, 手執牙笏, 前導雙盖, 後擁天童, 衣錦唱夫左右呈技, 執樂工人衆聲並奏, 觀者滿街, 望若天上郞也. 生半醉半醒, 意氣浩蕩, 着鞭跨馬, 一目千家. 忽見道傍, 高墉遠牆, 逶迤乎百步, 碧屋朱欄, 照曜乎四面; 千花百卉, 芬茀乎階庭; 戱蝶狂蜂, 喧咽乎林園. 生問之則乃檜山君宅也. 生忽念舊事, 心中暗喜, 佯醉墮馬, 臥而不起. 宮人出門聚立, 觀者如市. 時檜山君殞世已閱三期, 素服初闕. 夫人索寞單居無以爲懷, 欲觀俳優伎倆, 令侍女扶入西軒, 臥以錦文席, 枕以竹夫人.
生昏昏暝目若不覺悟. 於是唱夫工人羅列中庭, 衆樂齊作, 百戱俱張. 宮中侍女, 紅顔粉面, 綠鬢雲鬟, 捲簾而觀者, 可數十許人, 而所謂英英者, 不在其中. 生心自怪之, 莫知其生死. 諦而觀之, 有一少娘出而望生, 入而拭淚, 乍出乍入不能自止. 盖是英英, 不忍見生, 不禁淚流, 畏爲人所覺也.
生望心悽, 然而日將夕矣, 知其不可久留于此, 欠身而起, 顧而驚曰: “此何所也?” 宮中老奴莊獲, 趨而進曰: “檜山君宅也.” 生益驚曰: “我何爲來此耶?” 莊獲乃以實對, 生卽欲起出; 夫人念生酒蕩, 命英英奉茶而進, 兩人相近, 不得出一言, 徒爲目成而已.
英奉茶旣竟, 將起入內, 則華牋一封落自懷中; 生拾而藏之袖中而出, 上馬還家, 析而觀之, 其書曰: “薄命妾英英再拜白金郎足下, 妾生不相從, 又不能死, 殘骸餘喘, 至今尙存, 豈妾微誠, 念君不至? 天何茫茫!地何漠漠!桃李春風, 閉妾深宮, 梧桐夜雨, 鎖妾空房. 久廢絲桐, 蛛網生匣; 空藏粧鏡, 塵土滿奩. 斜陽暮天, 能添妾恨; 曉星殘月, 誰念妾心? 登樓望遠, 雲蔽妾眼; 倚窓思睡, 愁斷妾夢. 吁嗟郎君!寧不悲哉? 妾又不幸, 老嫗殞世, 欲寄音書, 無由可達, 徒想面目, 每斷心腸. 假令此身, 更獲一見, 芳容頓改, 厚意何施? 不識郎君, 亦念妾否? 天荒地老, 妾恨無窮, 嗟哉奈何!死而已矣. 臨緘悽然, 不知所云.” 書末, 復有七言絶句五首曰:
好因緣反是惡緣,
不怨郎君只怨天.
若使舊情猶未絶,
他年尋我向黃泉.
一日平分十二時,
無日無時不相思.
相思何日期相見,
深恨人間有別離.
柳憔花悴若爲情,
鏡裡猶憂白髮生.
自是佳人無好事,
牆頭晨鵲爲誰鳴?
別來忍掃席中塵,
愛有郎君坐臥痕.
寂寞深宮消息斷,
落花春雨掩重門.
欲寄音書寄得難,
幾回呀筆綠窓間.
空敎別後相思淚,
點滴花牋一班班.
生覽之, 沈吟愛玩, 不忍釋手, 致念英英倍於囊時. 然靑鳥不來, 消息難傳, 白雁久絶, 音信莫寄. 斷絃不能復續, 破鏡難得重圓. 憂心悄悄, 輾轉何益? 形枯體鑠, 臥而成疾, 幾過數月. 適有同年李正字者來問生疾, 生携手陣情, 告以疾祟, 正字驚慰: “曰君疾愈矣!夫檜山君夫人於我爲姑, 義切情親, 可以達其所懷, 且夫人自失所天以來, 信幽明報應之說, 不愛家産珍玕, 人爲好捨施, 可以爲君更圖之矣.” 生喜曰: “不意今日復見茅山道士.” 乃申申然定約束, 再拜而送之. 卽日正字往于夫人前, 告之曰: “某月某日, 有及第壯元者, 醉過門前, 墮馬不省人事, 姑氏命扶入西軒, 有諸?” 曰: “有之.” 曰: “姑氏命英英奉茶慰渴, 有諸?” 曰: “有之” . 曰: “是乃姪之友, 壯元金某也. 爲人才器過人, 調度脫俗, 將大有爲之人也. 不幸嬰疾, 閉戶臥吟已數月. 姪朝夕往來問疾, 則肥膚憔悴, 氣息奄奄, 命在朝夕. 姪甚憐之, 問疾所由, 則英英爲祟也, 不識可以活諸?” 夫人感激曰: “吾何惜一英英? 使汝伴人, 寃結以至於死亡耶?” 卽命英英同歸金生家. 二人相見, 其喜可掬. 生憊氣頓蘇, 數日乃起. 自此永謝功名, 竟不娶妻, 與英英相終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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