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계후전(申繼後傳)
화설(話說), 정종조(正宗朝) 때에 한성(漢城) 북촌(北村)에 한 재상(宰相)이 있으니, 성(姓)은 신(申)이요, 명은 업이라. 대대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충효와 명망이 일국에 진동하매, 상이 특히 여기사 벼슬을 돋우어 우승상을 배(拜)하시니, 승상이 천은(天恩)을 축수(祝手)하고 충성을 다하여 국정(國政)을 돕더니, 국운이 불행하고 가운(家運)이 쇠진(衰盡)함인지 우연 득병하여 백약이 무효하매, 승상이 일어나지 못할 줄 짐작하고 부인에 손을 잡고 체읍(涕泣)하며 이르기를,
“내 나이 오십이라. 일찍 죽었다 하지 못하려니와, 다만 염려되는 바는 아자(兒子) 계후의 나이 어리고 다른 속(續)이 없음을 한하노니, 부인은 계후를 극진히 가르쳐 선조(先朝)의 향화(香火)를 끝이지 말게 하며, 노복(奴僕)을 데리고 치가(治家) 범절을 극진히 하옵소서.”
하며, 인하여 명(命)이 진(盡)하니, 부인과 계후 방성대곡(放聲大哭)하다가 기절하니, 보는 사람이 뉘 아니 서러워하리오. 좌우 극력(極力)으로 구호하매 부인과 계후 어찌할 수 없어 정신을 차리고, 노복을 거느려 승상의 신체를 선산(先山)에 안장(安葬)하고 조석(朝夕) 향화를 극진히 받들며, 부인이 주야로 탄식하다가 기운이 진하여 병석에 누우매, 일어나지 못할 줄 알고 눈물을 흘리며 계후에 손을 잡고 체읍하며 이르기를,
“우리 전답(田畓)이 수천 석 지기요, 노복이 백여 명이라. 내 명도 기박(奇薄)하여 세상에 머물지 못하리니, 너는 나 죽는다 서러워 말고 천금(千金) 같은 몸을 보전하여 우리 후사를 이으면, 죽어 황천객(黃泉客)이 될지라도 눈을 감으려니와, 그러나 포악한 노복 등이 어린 상전을 섬기기를 바라지 못할지라. 너는 이 문적(文蹟)을 간수하였다가 후일(後日)에 빙자(憑藉)하라.”
하고 주거늘, 계후 울며 받아보니 족보(族譜)와 종 문서라. 잘 간수하고 주야로 모친 병석을 떠나지 아니하며 약을 맛보아 구완하되, 마침내 효험이 없고 부인이 세상을 이별하니, 계후 망극하여 천지를 부르며 애통하니 목석(木石)이라도 서러워할러라.
노복 등이 구호하여, 부인을 선산에 안장하매 계후 연하여 기절하며 주소(晝宵)로 통곡하니, 보는 사람이 어찌 비창(悲愴)치 아니 하리오.
계후 비록 어리나 효성이 지극하여 몸이 여막(廬幕)을 떠나지 아니하고 세월을 보내더니, 이때에 노복 중 흠탐, 흠탈은 계후의 수노(首奴)라. 흠탐이 반심(叛心)을 먹고 저의 족속(族屬)을 모아 가만히 의논하기를,
“세상에 사람은 일반이라. 어찌 대대로 남의 집 노복만 되리오. 이때를 당하여 탈신(脫身)을 하면 부귀가 겸전(兼全)하리니, 어린 상전(上典)을 자취 없이 죽이고 재산을 탈취(奪取)하여, 전답을 많이 사고 가기를(家基) 전한 후에 편안히 삶이 어떠하뇨?”
하니, 제족(諸族)이 대희(大喜)하여 일구여출(一口如出)로 좋다 하니, 흠탐이 그 날부터 상전 모르게 전답을 방매(放賣)하여, 해도중(海島中)에다가 전답을 많이 사고 말하기를,
“서울에서 낙향(落鄕)하는 재상(宰相)이라”
하며, 이날 밤 삼경(三更)에 상전(上典) 계후를 죽이려 하고, 화약 염초(鹽硝)를 많이 구하여 그 집 네 귀에 묻고, 계후에 잠들기를 기다려 밖으로 문을 걸고 불을 지르려 하더라.
이때, 계후 여막에 있어 이런 줄은 모르고 애통하다가 잠깐 잠을 들었더니, 비몽사몽(非夢似夢) 간에 모(母) 부인이 급히 부르기를,
“네 명이 시각(時刻)에 달렸으니 급히 집을 떠나 목숨을 보전하라.”
하거늘, 반겨 모친을 부르다가 놀라 깨어나니 침상일몽(寢牀一夢)이라. 모친 말씀이 귀에 쟁쟁하여 급히 노복을 찾되 한 놈도 없는지라. 문을 열려 한즉 밖으로 잠갔으매 대경하여, 벽장(壁欌)으로 올라가 창을 뚫고 나와 담을 넘어 두어 걸음에, 벌써 화광이 충천(衝天)하여 집이 모두 타는지라.
장안이 요란하며 백성들이 말하기를,
“이는 천화(天火)라.”
하며, 수다(數多)한 재물과 여러 노복의 죽은 말은 없고, 다만 ‘신승상(申丞相)의 구대(九代) 독자(獨子)가 불쌍하다.’ 하더라.
이적에 신계후 내심(內心)에 헤아리되,
‘구토(舊土)에서 머물진대 필연 노복에 해를 받을 것이요, 천행으로 내 몸이 출세되면 후일에 원수를 갚을 것이니, 차라리 종적을 감추고 세상을 다니며 이놈들 거취를 탐지하리라.’
하고, 부모를 생각하매 눈물이 절로 흘러 옷깃을 적시니, 앙천(仰天) 통곡(痛哭)에 인하여 장안을 떠나 삼남(三南)으로 향하니라.
이때는 추구월(秋九月)이라. 날은 점점 추워 가는데, 가산(家産)을 탕진(蕩盡)하고 갈 곳 없이 나섰으니, 어찌 눈물이 흐르지 아니 하리오.
이러구러 동절(冬節)을 당하매 의복이 남루(襤褸)하니 팔자 한탄 절로 난다.
‘이내 팔자가 기박하여 조상(早喪) 부모하기도 서러운 중에, 집조차 없어지고 갈 바를 알지 못하니 짐승만도 못하도다.’
하며, 촌촌(村村) 걸식(乞食)하여 한 곳에 다다라 서당에서 밤을 지내더니, 학동(學童)들이 거주성명(居住姓名)을 묻거늘, 거주는 대답지 아니하고 성명만 통하며, 혹 서당을 찾아 글도 배우고, 촌가(村家) 찾아 걸식도 하니 목숨은 보전하나, 옛일을 생각하니 마음에 잊을 때가 없더라.
세월이 여류하여 계후의 나이 십팔 세라. 비록 의복은 남루하나 풍채가 늠름하고 얼굴이 비범하니, 뉘가 기특타 아니 하리오.
일일은 전라도(全羅道) 해안에 당도하니, 한 사람이 이르되,
“네 기상(氣像)을 보니 과연 기남자(奇男子)라. 이 앞 고금도(古今島)를 찾아가면, 서울에서 낙향 재상의 여러 댁이 와서 요부(饒富)히 살며, 인심이 거룩하고 또한 문필(文筆)을 좋아하니, 너는 그곳으로 갈진댄 필연 후대(厚待)하리라.”
하거늘, 계후 듣고 생각하되,
‘낙향한 재상인(宰相人)이라.’
하고, 이튿날 고금도로 들어가니, 과연 인가(人家) 즐비하여 가위(可謂) 사부(士夫)댁이라. 마음에 대희하여 객실(客室)을 찾아 들어가니, 한 노인이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유관(儒冠)을 쓰고 서안(書案)을 의지하여 책을 보다가 계후를 보고 일어나 앉거늘, 계후 나아가 공손히 절하니, 노인이 묻기를,
“네 거주성명을 뉘라 하느냐?”
하니, 계후 여쭈되,
“소생(小生)의 거주는 황해도(黃海道) 평산(平山)이옵고, 성명은 신계후라 하나이다.”
노인 이르기를,
“부모는 다 생존하셨느냐?”
묻거늘, 여쭈되,
“소생이 부모 살아 계시면 어찌 걸식을 하오리까?”
“그러하면 부모는 어려서 돌아 가셨느냐?”
“소생의 부친은 열한 살에 기세(棄世)하옵고, 모친은 열세 살에 기세하신 후로 점점 가산이 탕진하매, 바랄 곳이 없사와 사해(四海)로 표류하옵나이다.”
노인 이르기를,
“네 기상을 보니 양반의 후예인 듯하니 공부나 하였느냐?”
계후 답하기를,
“소생이 부모 없는 아이로 어찌 수학(修學)을 하였으리까 만은, 어려서 수년간 수학은 하였으나 아는 것은 없나이다.”
노인 이르기를,
“네 용모를 보매 내 짐작하는 바이라. 너는 기이(岐貳)하지 말라.”
하고, 글제를 내어 놓고 글을 지으라 하니, 계후 어찔할 수 없어 붓을 들고 별로 생각 없이 삼수(三首)를 지어 드리니, 노인이 대경(大驚) 대희(大喜)하여 글을 읊으며 자기 자손을 불러 이르기를,
“너희도 이 같이 글을 지으라.”
하며 이르기를,
“네 글을 보니 반드시 후일에 귀히 되리라.”
하고, 칭찬하기를 마지 아니 하니, 계후 일어나 재배(再拜)하며 이르기를,
“대인(大人)이 소생을 과도히 사랑하시니 황공 감사하도소이다.”
노인 이르기를,
“글을 보고 어찌 사랑치 아니 하리오.”
하며, 인(因)하여 노비(奴婢)를 불러 석반(夕飯)을 재촉하여 드리거늘, 계후 포식(飽食)하고 상을 물이며 이르기를,
“일시(一時) 과객을 이같이 관대(寬待)하시니 태산 같은 은혜를 어찌 다 갚사오리까?”
하니, 노인이 웃으며 이르기를,
“한 때 요기(療飢)를 어찌 은혜라 하리오. 그러나 그대가 거취 없다 하니, 내 집에 있어서 내 자식들과 함께 공부함이 어떠하뇨?”
계후, 사례(謝禮)하며 이르기를,
“일시 빈객(賓客)이 포식도 과도망(過度望)하온데, 활인지덕(活人之德)을 끼치시니 어찌 바라오리까?”
노인 이르기를,
“그대는 재조를 다하여 나에 자손에게 글을 가르치라.”
하더라. 이날부터 초당(草堂)을 수리하고 계후와 더불어 자식들을 힘써 권학(勸學)을 시킬새, 계후의 총명 재질로 모든 아이를 가르치며 시서(詩書)를 능통하는지라, 노인이 대희하여 조석지공(朝夕之功)을 각별히 하더라.
이때 노인은 계후의 수노 흠탐이라. 계후 그런 줄 알지 못하매 후환(後患)이 장차 미칠러라. 일일은 노인이 부인에게 이르기를,
“우리 말년에 여아(女兒)를 두었다가 혼처(婚處)를 정하지 못하였더니, 마침 초당에서 공부하는 신계후는 문벌(門閥)도 있는 듯하고, 문필과 인물이 상당한지라. 여아와 정혼(定婚)함이 어떠하뇨?”
부인이 답하기를,
“혼인은 인륜대사(人倫大事)라. 가부(佳夫)가 하실 바이지, 첩(妾)이 어찌 아오리까?”
하니, 노인이 대희하여 즉시 계후를 청하여 이르기를,
“노부(老夫)가 그대에게 부탁할 말이 있으니 뜻이 어떠하뇨?”
계후 이르기를,
“오늘까지 목숨을 보전함이 도시(都是) 귀댁의 은혜라. 무슨 말씀인지는 알 수 없사오나, 어찌 수화(水火)인들 피하오리까?”
하니, 노인 이르기를,
“노부 말년에 한 여아를 두었으니 당년(當年) 이십육 세라. 용모(容貌)와 재덕(才德)은 없으나, 남의 며느리 되기는 부끄럽지 않을 듯하기에, 그대에게 평생을 부탁하고자 하노니, 노부의 말을 저버리지 말라.”
하니, 계후 흠신(欠身)하며 답하기를,
“천한 걸객에게 이 같이 말씀하시니 황공하오나, 이 뜻은 봉행(奉行)치 못할까 하나이다.”
하니, 노인이 듣지 아니하고 즉시 택일(擇日) 성혼(成婚)하니, 신랑의 늠름한 풍채와 신부에 요요(姚姚)한 태도는 짐짓 일쌍(一雙) 거울이요, 천정배필(天定配匹)이라. 종족(宗族) 제인(諸人)과 일리(一里) 관광지인(觀光之人)이 뉘 아니 칭찬하리오. 이후로 계후 낮이면 초당에서 공부하고, 밤이면 낭자와 더불어 즐기더니, 금실지락(琴瑟之樂)이 점점 깊어가매, 모친이 주시던 문적(文蹟)을 낭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이 문적은 우리 집의 중대한 문적이라. 낭자는 잘 간수하여 두라.”
하니, 낭자가 받아서 잘 간수하였더니, 일일은 낭자 심사 울적하여 문득 낭군이 주던 문적을 조용히 보니, 거주는 한성 북촌이요, 부친은 신업이요 벼슬은 초사(初仕)로 대교(待敎)요, 정인(正人) 대간(臺諫)에 이조판서(吏曹判書)요, 삼십사 세에 병조판서(兵曹判書)요, 호환(浩瀚) 당상(堂上)으로 우승상(右丞相)이라 하였고, 또 문적 하나를 보니 수노에는 흠탐, 흠탈이라 하였거늘, 낭자 보고 괴이 여겨 부친에게 문적을 드려 이르기를,
“이 문적은 낭군이 주신 바라. 오늘 조용히 보오니 부친과 삼촌의 함자(銜字)가 있사옵기로 괴이하여 올리오니 감(鑑)하옵소서.”
하거늘, 흠탐이 보고 간담(肝膽)이 서늘하고 정신이 비월(飛越)하여, 가만히 족속을 다 청(請)하여 의논하기를,
“이 놈이 죽은 줄로 알았더니, 살아나서 지금 내 문하(門下)에 들어와 사위 될 줄을 어찌 뜻하였으리오. 이는 양호유환(養虎遺患)이라. 이는 신명이 도우사 우리의 문적을 없이 함이라. 이놈을 오늘밤 죽여 후환을 없애리라.”
의논하고, 소저에게 가만히 이르기를,
“일이 이같이 되어 종중(宗中)에서 결의(決議)하였으니, 너는 이 말을 내지 말라.”
당부하니, 낭자 이 말을 듣고 망극하여 종일토록 울더라. 이적에 계후 낭자 방에 들어가니, 낭자 손을 잡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다가 이르기를,
“부친이 낭군의 문적을 보시고 종적이 탄로되매 오늘밤에 죽여 물에 넣으려 하오니, 이를 장차 어찌 하오리까?”
하며, 무수히 느끼거늘, 계후 이 말을 들으매 정신이 아득하여 아무리 할 줄을 모르는지라. 낭자 체읍(涕泣)하며 이르기를,
“옛글에 하였으되,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하였으니, 어찌 삼종지의(三從之義)을 좇지 아니하오리까? 나는 죽사와도 낭군을 구하리이다.”
하고, 급히 여복(女服) 한 벌을 내어 계후를 입히며 이르기를,
“후원(後園)으로 뒤를 보러 가는 체하고 나가면, 하인들이 첩인가 의심하여 금(禁)하지 아니 하오리니, 급히 도망하옵다가 물가에 가서는 울면서 사공을 불러, ‘배를 바삐 건네라.’ 하옵소서. 사공 등이 필시 첩에 아비 영(令)을 듣고야 배를 건너리니, 말씀 하옵기를, ‘나는 김상공의 며느리로서 친정 부모상(父母喪)을 만나 급히 가는 길이니, 바삐 배를 건너라.’ 하옵소서.”
하며, 눈물을 뿌려 작별하니, 계후 도망하여 그 말대로 배를 건너 천행(天幸)으로 살아났으나, 이때 낭자 홀로 생각하되,
‘내 낭군을 위하여 죽어 종적을 감추리로다. 아무리 상놈에 자식이나 부부의 정을 어찌 저버리리오. 황천에 가서 다시 만나 보리라.’
하고, 남복(男服)을 입고 자리에 누었더니, 밤이 깊은 후에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 상투를 잡고 칼로 목을 잘라서 가죽부대에 넣어서 물에 띄우고, 낭자를 찾으니 간 곳이 없는지라. 흠탐이 이르기를,
“여아 행실(行實)을 닦고 고서(古書)를 읽었으매, 필시 쫓아가 함께 죽었을 것이니, 찾을 것이 없다.”
하더라.
각설, 신계후 배를 건너 천신만고로 동방(東方)이 밝도록 도망하다가 목이 갈(渴)하여 물을 찾으니, 대로변에 우물이 있고 우물가에 양류(楊柳)가 무성하였거늘, 물을 먹고 큰 나무 아래에 누어 잠이 들었더라.
이곳은 전라도 나주동(羅州洞) 명류촌이라. 촌중(村中)에 한 양반이 있으되, 성은 권(權)이요 이름은 형이라. 일찍 급제하여 기린찰방(麒麟察訪)을 지내고 돌아와 있더니, 상처(喪妻)한 후 처를 취하니 성은 고씨(高氏)라. 마음이 불량하여 전실(前室) 최씨(崔氏)의 소생(所生) 경애를 박대하니, 경애 눈물로 세월을 보내더라.
이때 권찰방(權察訪)이 한 몽사(夢事)를 얻으니, 동리(洞里) 앞 우물가에 오색(五色) 채운(彩雲)이 일어나며 황룡(黃龍)이 오르거늘, 놀라 깨어나니, 평생의 대몽(大夢)이라. 찰방이 기이히 여겨 청려장(靑藜杖)을 집고 나서니 날이 밝았는지라. 대로변(大路邊)에 나와 우물가를 살펴보니 어떠한 미인이 발상(發喪)을 하고 누어 잠이 깊이 들었거늘, 찰방이 잠깨기를 기다려 앉았더니, 날이 오시(午時)는 하여 잠을 깨거늘, 찰방이 서서히 묻기를,
“부인은 뉘 댁 자부(子婦)로서 발상하고 이곳에 와서 계시니까?”
하니, 계후 눈을 들어보니 한 노인이 묻거늘, 이러나 재배하고 이르기를,
“소생은 남자요 여자가 아니로소이다.”
찰방이 이르기를,
“그러하면 어디 있으며, 무슨 일로 여복을 입고 어디로 향하느뇨?”
계후 이르기를,
“소생은 서울 북촌에 사시던 신승상에 아들 계후로서, 정처 없이 다니다가 대화(大禍)를 만나 변복(變服)하고 도망하는 길이로다.”
찰방이 계후에 손을 잡고 낙루(落淚)하며 이르기를,
“이는 반드시 천우신조(天佑神助)함이로다. 내 당초(當初)에 선(先)대감이 이조판서로 계실 제, 대감의 은덕으로 기린찰방을 하였으나, 그 은혜를 만분지일(萬分之一)이나 갚을까 하였더니, 대감은 기세하시고 부인이 살림을 주장(主掌)하시며, 그대는 미성(未成)하여 상봉치 못하고 다만 장성하기를 바라더니, 천변(天變) 화재(火災)로 죽었다 하기로 이때까지 잊지를 못하였더니, 그대를 이곳에서 뜻밖에 맛나 보니 기쁘기가 측량없도다. 무슨 일로 여복을 하였으며, 발상은 무슨 일이뇨?”
하니, 계후 답하기를,
“당초에 화재 당하기도 노복 등에 간계(奸計)이요. 그 놈들이 재산을 도적하여 가지고 고금도에 들어가서 경재상(京宰相)이라 하고 부요(富饒)하게 지내는 중에, 소생이 걸식하고 다니옵다가 알지 못하옵고, 그곳에 가서 수노(首奴) 흠탐의 여식에게 취처(娶妻)하였더니, 사실이 발각되어 죽게 되매 낭자의 계교로 목숨을 도망하여 살아났나이다.”
하고 낱낱이 고하니, 찰방이 대경(大驚) 차탄(嗟歎) 이르기를,
“이는 선세(先世)에 음덕(蔭德)으로 명을 보전하여 살아났으니, 도시 천수(天壽)라. 설마 어떠하리오. 나를 좇아오면 차차 원수도 갚으려니와, 아직 내 집에서 유(留)함이 어떠하뇨?”
하거늘, 계후 황공함을 말하니, 찰방이 계후를 데리고 와서 사랑하며 용모와 문필을 보고 칭찬하며 이르기를,
“그대를 잠시 보매, 선세에 덕을 족히 잊지 못하리로다. 아직 내 집에서 공부나 힘써 하다가, 천행으로 용문(龍門)에 오르면 평생에 소원을 다 풀 터이니, 어찌 행치 아니 하리오.”
하며 위로하더라.
세월이 여류(如流)하여 일 년을 지내매, 일일은 찰방이 계후에게 이르기를,
“내 본실 최씨의 몸에 한 여아를 두었으되, 용모와 재질이 아름답지 못하여 남의 며느리 되기는 부끄러우나, 그러나 그대와 혼인하여 황천에 돌아가신 선대감의 은혜를 만분지일이나 갚으려 하노니, 그대는 사양치 말라.”
하거늘, 계후 공경(恭敬)하며 답하기를,
“대인에 은혜를 생각하오매, 귀댁 문하에 머물기도 과망(過望)하옵거늘, 이처럼 천금 소저로 인연을 맺으려 하옵시니, 은혜를 어찌 만분지일이나 갚사오리까?”
하고 허혼(許婚)하니, 찰방이 대희하여 즉시 길일을 택하여 신랑을 맞을 새, 일가제족이 다 칭찬하나, 후실(後室) 고씨는 계후의 인물 풍채 비범함을 알고, 후일에 가산(家産) 집물(什物)을 앗으면 자기 자식 있는 것이 설움을 당할까 하여, 마음에 불합(不合)하여, 장차 모함할 뜻을 두고, 제 노복 금낭을 불러 이르기를,
“너는 나에 심복(心腹)이라. 나의 은밀한 말을 들을 손가?”
금낭이 주(奏)하기를,
“소복이 죽사온들 부인에 분부를 어찌 아니 듣사오리까?”
고씨 가만히 이르되,
“이제 신랑을 보니 일후(日後)에 반드시 내 가산을 제 마음대로 할 것이니, 내 아들 둘은 개밥에 도토리가 될지라. 이제 너는 신랑을 죽여 없애면 천금을 상사(償賜)하고 또 네 몸을 속신(贖身)하여 줄 터이니, 행례(行禮)하는 날 밤에 칼을 가지고 등대(等待)하였다가 신랑이 잠이 들거던 죽이라. 나는 말 내기를, ‘경애 소저의 간부(姦夫)가 죽였다.’ 하면 너는 허물이 없고, 일정(日程) 찰방께서 음행(淫行)한 줄로 아시고, 경애 소저를 마저 죽일 것이니, 그 아니 좋을 손가?”
금낭이 대희하며 이르기를,
“부인의 명령대로 거행하오리다.”
하고, 약속을 정하고 물러 가니라.
이 날, 신랑 신부가 예를 마치고 침실에 들어가 등촉(燈燭)을 밝히고 눈을 들어 한 번 바라보니, 중추(仲秋) 망월(望月) 밝은 달이 흑운(黑雲)에 솟아난 듯 요요정정(夭夭貞靜)한 태도는 세상에 짝이 없더라. 등촉을 물리고 침금(寢衾)을 함께 할 제, 전일에 고금도에서 지내던 화란을 생각하고 심신이 불안하여 잠을 이르지 못하더니, 문득 창밖에서 사람에 자취 소리가 들이거늘 괴이하여 문틈으로 가만히 내다보니, 어떠한 놈이 큰 칼을 손에다가 들고 서서 혼잣말로,
“신랑이 잠이 깊이 들었을까?”
하며, 주저하고 섰거늘, 계후 대경하여 급히 일어나 의복을 입고 후원 문으로 도망하니라. 이 때, 금낭이 신랑에 잠들기를 고대하여 방에 들어가 살펴보니, 신랑은 없고 신부만 자는지라. 헐 수 없어 신랑에 도망한 사연을 고씨에게 고하니, 고씨 대노하여 찰방에게 고하기를,
“우리 집이 장차 망할지라. 양반에 집 가문에 어찌 이런 변괴(變怪)가 있사오리까?”
한즉, 찰방이 대경하며 이르기를,
“무슨 일이 있기에 그러하느뇨?”
고씨 답하기를,
“경애 소저가 행실이 부정하여 외인(外人)을 통간(通姦)하다가, 첫날밤에 간부 놈이 신랑을 죽이려 한즉 신랑이 도망하고 없으니, 세상에 이런 변괴 어디 있으리오.”
하니, 찰방이 노기(怒氣)가 등등하여 이르기를,
“이 어찌된 말이뇨?”
하니, 고씨 답하기를,
“행실을 잘 가진 경애 소저에게 물어 보시지, 내가 알 수 있느냐?”
하며, 혼자말로,
“딸을 매우 잘 두었지. 우리 집에는 이때껏 이런 일은 없어. 산천이 변하면 변하였지 양반에 집에 이런 불측(不測)한 행실이 어디 있어?”
하며, 노기가 등등하거늘, 찰방이 무안(無顔)하고 대노하여 소저를 부르니라.
이때, 경애 소저 신랑이 도망함을 보고 급히 등촉을 밝히고 자세히 보니 사람의 자취가 있는 듯하며, 사면을 돌아보니 신랑은 벌써 도망하고 무슨 문적이 있거늘, 즉시 펴서 보니 신랑에 족보와 노복의 문서라. 거두어 몸에 지니고 한숨만 쉬이고 앉았더니, 규중(閨中)이 진동하며 유모 춘운이 울며 들어와 말하되,
“찰방께옵서 소저를 부르신다.”
하거늘, 소저 경황없이 나가니 계모 고씨는 음행(淫行)한 년이 나온다 하고, 찰방은 대노하여 소저를 대질(大叱)하기를,
“내가 너를 어미 없다 하고 불쌍히 여겨 금옥 같이 사랑하여 길렀거늘, 너는 외인을 상통하여 집안에 변이 났으니, 어찌한 일이냐?”
하며, 노기등등하여 꾸짖기를 마지 아니 하거늘, 소저 이 말을 들으매 간담(肝膽)이 떨어지는 듯하여 아무 말도 못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공손히 여쭈되,
“부친은 이 말씀이 어찌된 말씀이오니까? 소녀 일찍이 모친을 여의고 부친만 바라옵고 하루 한 시 같이 서른 날을 주야 눈물로 세월을 보내옵고, 죽고자 마음이 시시때때로 있사와도 행여 부친께옵서 아실까 하옵고 지성으로 섬기오며, 규중에 있어 문밖을 나지 않았거늘, 이 말씀이 어찌된 말씀이오니까? 소녀 저저이 여쭈오리다.”
하며,
“어젯밤 삼경(三更)에 창전(窓前)에 사람의 자취가 있삽고 신랑은 도망하오매, 무슨 일인지 깨닫지 못하옵던 차에, 소녀로 음행하였다 하오니, 백옥은 변하려니와 소녀에 마음이야 일호(一毫)인들 변하여 음란한 행실을 하오리까? 이는 반드시 조물(造物)이 시기하고 귀신이 해하고자 함이요, 사람의 반간(半間)한 일이오니 발명(發明) 무(無)로소이다. 죽이신다 하여도 죽을 따름이오나,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오리니, 속히 죽여 황천에 나가서 옳은 귀신이 될까 하나이다.”
하며, 백옥 같은 얼굴에 눈물이 가리여 옷깃을 적시니, 보는 사람이 뉘 아니 불쌍타 하리오.
다만 고씨만 속마음으로 재미있게 생각하며, 소저는 다시 아무 말도 아니하고 섰거늘, 춘운이 여쭈되,
”소비(小婢) 소저의 유모로 젖 먹여 길러 당년에 십육 세가 되도록 규중을 떠날 날이 없사옵고, 한날같이 여행(女行)만 닦아 잡(雜)된 마음이 없는 줄은 소비가 아는 바이요, 소저 옥 같은 몸에 누명(陋名)을 끼치시니, 이는 조물이 시기함이로소이다. 깊이 통촉(洞燭)하시와 소저에 누명을 벗겨 주시어 목숨을 보전케 하여 주옵소서.”
하니, 고씨 곁에 있다가 춘운을 꾸짖기를,
“네 무엇이기에 무슨 말을 하느냐? 사람에 마음은 하루 열두 시로 변하는 줄을 네가 아느냐? 옛말에 ‘한 길 사람에 속은 알지 못하여도 열 길 물속은 안다.’ 하였거늘, 너 같은 늙은 것이 무엇을 알소냐? 우리 가문에는 자고로 이런 변이 없건마는, 내 팔자 기박하여 남의 후처가 되어서 이러한 추한 일을 볼 줄을 어찌 알았으리오.”
하니, 찰방이 무류(無謬)하여 노복을 불러 자기의 누님을 청하여 이 말을 고하니, 매씨(妹氏) 대경하여 경애를 불러 물어 이르기를,
“네 추호도 속이지 말고 자세히 말하라.”
하니, 경애 울며 여쭈되,
“숙모께옵서도 아시는 바이라. 칠 세에 모친을 여의고 계모를 만나 고개를 높이 들지 못하옵고 숨을 크게 쉬지 못하오며, 말을 임의로 못하옵고, 또 한잠을 자주 자오며, 이같이 지성으로 부모를 섬기옵다가 뜻밖에 이러한 누명을 당하오니, 어디 가서 발명하오며, 어찌하여 누명을 벗사오며, 죽어 황천에 간들 어찌 옳은 귀신이 되오리까? 이 세상에서는 누명을 벗을 길이 없사오니, 이런 지원(至冤)하고 절통(切痛)한 사연을 어디 가서 하오며, 빙심(氷心) 옥절(玉節)을 뉘가 아오리까?”
하며, 바로 기절하니, 숙모 붙들고 울며 이르기를,
“네 마음은 내가 다 아는 바이라. 죄는 지은 대로 가나니 누명을 벗을 날이 있으리라.”
하고, 찰방에게 이르기를,
“이 일은 핵변(覈辨)하기가 난처하니, 한 삼사 삭(朔) 두고 자세히 사실(事實)하여 인명(人命)을 무죄히 상하지 말게 하라.”
신신 부탁하거늘, 찰방이 매씨에 말씀을 거역하지 못하여 허락하니라.
이때, 소저 첫날밤 일야(一夜) 동침(同寢)에 태기(胎氣)가 있어 배가 점점 부르고 몸이 달라지는지라. 유모 춘운이 울며 이르기를,
“소저 배가 전과 다르고 몸이 변하여 가오니 어쩐 일이오니까?”
하니, 소저 무류하여 이르기를,
“한 허물을 더 얻었는가 싶지마는, 행례하던 날 밤에 신랑으로 더불어 잠시 동침에 태기가 있는가 싶으니, 이 말을 유모는 누설치 말라.”
하더라.
일구월심(日久月深)에 모해(謀害)만 하려하고 기회만 엿보는 고씨가 어찌 알지 못하리오. 고씨 이미 짐작하고 찰방에게 고하고자 하더니,
마침 찰방이 들어오거늘, 고씨 노기 대발하여 이르기를,
“경애를 벌써 죽여 후환을 없게 하라 하였더니, 나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때까지 있다가, 이제는 흉 한 가지를 더 얻어서 장차 아들자식들도 세상에 행세(行勢)치 못하게 되었으니, 양반에 집 가문에 이런 변괴가 또 어디 있으리오.”
하니, 찰방이 이 말을 듣고 대로하여 소저를 불러보니, 과연 듣는 말과 같은지라. 고씨 또 말하여 이르기를,
“신랑 맞은 날 밤으로 아이 배는 법은 자고에 없는지라. 이는 반드시 외인 남자에 작간(作姦)함이니, 일시(一時)인들 어찌 들어온 것을 보리오. 바삐 죽여 종적을 감추라.”
하며, 시시(時時)로 권하거늘, 찰방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대노하여 제족을 모와 의논하여 죽이려 하더니, 그 매씨 이 말을 듣고 와서 만류하기를,
“지금 행실을 보아서는 죽여서 마땅하나, 그러나 태기가 과연 있으니 이는 두 사람을 죽임이라. 경애 저는 죽여 마땅하거니와 어린 아이야 무슨 죄가 있으며, 또 후세에 가도 원혼이 되리니, 해산(解産)이나 한 연후에 죽여도 바쁘지 아니하리니 아직은 노(怒)를 진정하라.”
하니, 고씨 이 말을 듣고 속으로는 미워하나, 가장 경애 소저를 사랑하는 듯이 말하여 이르기를,
“그 말씀이 옳사오나, 제가 이제 죽이려 하는 줄 알면 필연 야반도주(夜半逃走)할 마음을 둘 뜻 하오니 그저 버려두지 못할지라. 나에 생각건대 큰 두지(斗庋, 뒤주)를 만들어 두지에 가두어 두고 해산 후에 죽이면 좋을까 하나이다.”
하니, 찰방이 그 말을 옳게 여기여 두지를 만들어 두지 속에 가두고 밥을 먹이니, 경애 어찌할 수 없어 밥은 먹으나 세상을 보지 못하고 모친만 부르며 주야로 통곡하더라.
각설(却說), 이때 신계후, 소저와 더불어 담화하다가 놀라 그 날 밤으로 도망하여 오며 생각하니,
‘이는 소저 행실이 부정하여 외인을 잠통(潛通)하다가 간부가 나를 죽이고자 함이라. 세상만사가 도시 팔자소관이니 누구를 한하며 누구를 원망하리오.’
하고, 이 날부터 삼남(三南)을 떠나 정처 없이 행할 세, 낭중(囊中)에 무(無) 일 푼하니 어찌할 수 없어 촌촌이 걸식하매 자연 의복이 남루하더라.
마침 과거(科擧) 보인다는 소문을 듣고 팔도 선비가 구름 모이듯 서울로 올라가거늘, 계후 생각하되,
‘이번에 과거나 하였으면 곤궁(困窮)한 것을 면하리라’
하고, 서울을 향하여 여러 날 만에 남대문 밖에 당도하니, 날은 저물고 기갈은 심한지라. 불고염치(不顧廉恥)하고 한 여각(閭閣)에 들어가니, 마침 과거 선비가 많이 모였거늘, 계후 폐포파립(敝袍破笠)으로 다른 선비와 같이 밥 한 상 달라 하여 먹고 밤을 지내고자 하였더니,
선비들이 상을 물리고 주인에게 하는 말이,
“저 사람을 보니 선비도 아니요 장사도 아니요, 그 모양이 수상하니 다른 데로 보내라.”
한 즉, 주인 이르기를,
“주인의 마음에도 그러하오니 그리하오이다.”
하고, 계후에게 이르되,
“그대 모양을 보고 여러 손님들이 미안하다 하니, 그대는 밥값을 내고 다른 데로 가라.”
하거늘, 계후 이르기를,
“나는 본디 도적이 아니라 가산을 탕패(蕩敗)하고 일을 할 줄 몰라서 의복이 초췌(憔悴)하니 무슨 의심이 있으며, 또 날이 저물었으니 밥 사서 먹은 집에서 자지 어디로 가라 하느뇨?”
하니, 주인과 그 집 여인이며 모든 선비 모두 구박하며, 밥값을 내고 바삐 가라 재촉이 성화(成火) 같은지라.
계후 이르기를,
“내 기갈(飢渴)이 자심(滋甚)하여 불고염치하고 밥은 먹었으나 일 푼 전(錢)도 없으니 후일(後日)에 값사오리다.”
하니, 주인이 이르기를,
“이놈이 실로 도적놈이 분명하도다.”
하고, 달려들어 파립(破笠)을 벗겨두고 내어 쫓으니, 계후 이르기를,
“순라(巡邏)가 엄금(嚴禁)한데 어디로 가라 하나이까? 제발 덕택을 입사와 토방(土房)에서라도 밤을 지내고 가면 은혜가 난망(難忘)이오니 처분을 바라나이다.”
하니, 주인이 바삐 끌어 내치니, 계후 이르기를,
“의관이 없으니 어찌 가오리까? 후일을 정하시고 의관을 주시면 다른 데로 가리다.”
하니, 주인의 처와 딸년이 질욕(叱辱)을 무수히 하며 어서 내쫓으라 하니, 주인이 대노하여 계후에 상투를 잡고 뺨을 치며 내어 쫓으니, 계후 공손히 빌어 이르기를,
“순라에게 잡혀가오면 욕을 면치 못하올 터이오니 하룻밤만 자고 가사이다.”
하니, 주인의 계집과 딸년의 질욕이 무수하며 토방에도 못 올라서게 하니, 그 경상(景像)이 불쌍하고 참혹하더라.
계후 재배하고 이르기를,
“갈 곳이 없사오니 토방에서 하룻밤만 자고 가사이다.”
간청하되, 종시 듣지 아니하고 계집들이 질욕만 무수히 하니, 그 요란함을 듣고 남대문 안팎 사람들이 무수히 모이어 그 경상을 보고 박장대소(拍掌大笑)하더라.
예로부터 사람들이 지극히 궁(窮)하면 달(達)할 때가 돌아오고, 지극히 천(賤)하면 귀(貴)할 때가 돌아오나니, 그러함으로 동지섣달 찬바람 눈 속에서 얼고 마르던 꽃나무도 봄바람 한 번 불면 가지가지 꽃이 피어, 천만 사람에게 사랑을 받음은 자연한 천지의 이치라.
이때 그 건너편 집은 금위영(禁衛營) 사령(使令) 진해운의 집이라. 진해운이 아들은 없고 다만 여아(女兒) 하나뿐이러니 연광(年光)이 십육에 별당에서 글을 익히더니, 이날 황혼에 밖에서 무슨 소리가 요란하거늘 진낭자 몸을 일으켜 후원에 나가서 가만히 살펴보니, 그 앞 여각집에서 어떠한 걸인을 질욕을 하며 끌어 내치되, 걸인이 애걸하고 자기를 간청하나 종시 듣지 아니하거늘, 낭자 한 번 바라보고 마음에 가긍(可矜)히 여겨 모친에게 이르기를,
“저 건너 여각 집에서 걸인을 구박하여 내쫓으려 한즉, 걸인이 순라를 무서워하여 토방에서 자고 가기를 간청하되 종시 불청하오니, 그 걸인에 경상이 가긍한지라.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라함이 어떠하오니까?”
하니, 그 모친이 꾸짖어 이르기를,
“지나가는 걸객에 일을 규중 여자의 말할 바가 아니라.”
하거늘, 진낭자 내심에 대피(待避)하여 이르기를,
“적덕지가(積德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 하였거늘, 어찌 사람이 저러한 광경을 보고 구제(救濟)하지 아니하오리까?”
하고, 체모(體貌)도 돌아보지 않고 문 밖에 나서며 걸객을 불러 이르기를,
“누구인지는 알 수 없사오나, 구태여 자지 말라 하는 데서 자지 말고, 내 집에 와서 밤을 지내고 가라.”
하니, 계후 대희하여 그 처녀를 따라서 객실에 들어가 앉았다가, 노곤(路困)함을 이기지 못하여 한 길치로 누워서 처녀의 은덕을 치사하더라.
이때에 여각 집의 여러 선비들은 진낭자에 후덕(厚德)을 모두 칭찬하나, 저의 모친은 꾸짖어 이르기를,
“너에 부친이 나오거든 이런 말을 하여서 죄를 주리라.”
하더라.
이 적에 진해운이 청사(廳舍)에 다사(多事)하여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금위영 사령청(使令廳)에 누워서 잠이 잠깐 들었으니, 제 집에서 오색 채운이 일어나며 황룡이 여의주를 물고 청천(靑天)으로 올라가거늘, 놀라 깨어나니 침상대몽이라. 청중(廳中)에 수유(受由)하고 급히 나오며 생각하되,
‘분명코 우리 집에 과거 선비 많이 들었도다.’
하며, 나와서 문을 열라하니 문을 열거늘, 해운이 집안을 살펴보니 그 처가 내달아 하는 말이,
“계집아이가 주제넘은 체하고 이 앞 여각 집에서 내어 쫓은 거지를 구태여 데려다가 재우며, 어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매사를 제 임의로 하니, 우리 말년(末年)에 여아를 잘못 두어 고생하리라.”
하거늘, 해운이 이 말은 들은 체도 아니 하고, 객실(客室)로 들어가 등촉을 밝히고 걸인을 자세히 보니, 비록 의복은 남루하나 용모 기상이 짐짓 일세에 영웅호걸이라. 해운이 대희하여 잠이 깨도록 앉아 기다리더니, 해운의 처가 문을 열고 바라 보다가 어이없어 하는 말이,
“제 아비가 저러 하거든 그 자식이야 말하여 무엇 하리오. 저 모양은 차마 혼자 보기가 아깝다.”
하더라. 이때 계후 잠이 깊이 들었다가 눈을 잠깐 떠서 보니, 주인인 듯한 사람이 곁에 앉았거늘 놀라 일어나 앉으니, 해운이 이르기를,
“소인은 이 집 주인이옵더니 청사에 다사하여 집에 있지 못한 탓으로 귀객을 찬 방에다가 모셨사오니, 무례함을 과념(過念)치 마옵소서.”
하고, 생을 내당(內堂)으로 인도하니, 계후 이르기를,
“집 없는 걸객이 객실에서 자기도 은혜 만만(滿滿)하온데, 어찌 내당으로 들어가리오.”
하니, 해운이 이르기를,
“소인은 금위영 사령이오니 말씀을 낮추옵시고 내당으로 들어가사이다.”
하거늘, 계후 여러 번 사양하되, 해운이 종시 듣지 아니하고 내당으로 들어가기를 간청하거늘, 계후 견디지 못하여 내당으로 들어가니, 해운에 처 대하여 웃으며 이르기를,
“자식은 걸객을 객실로 청하여 오고, 아비는 내당으로 청하여 들이니 우습고 망측하다.”
하거늘, 해운이 그 말은 들은 체도 아니 하고 눈을 주어 석반(夕飯)을 재촉하니, 해운에 처 밥상을 들이거늘, 해운이 받아서 계후에 앞에 공손히 놓고 잡수시기를 간청하거늘, 계후 사례하여 이르기를,
“걸객이 내당에 들어오기도 무례(無禮)하온 중에 장차(將次) 진수성찬으로 권하시니, 은혜를 어찌 값사오리까?”
하니, 해운이 연하여 권하거늘, 계후 기갈이 자심하여 권함을 이기지 못하는 체하고 석반을 포식한 연후에 상을 물리니 해운이 이르기를,
“상공에 거주는 어디시며, 성함은 누구라 하시나이까?”
계후 이르기를,
“거주는 정처가 없거니와 성명은 신계후라 하나니다.”
해운이 제 처에게 의복 한 벌을 가져오라 하고, 더운 물에 목욕을 시킨 후에 새로 의복을 입히니, 선풍도골(仙風道骨)이요 세상에 무쌍(無雙)한 기남자(奇男子)라. 해운의 처가 그 풍채 용모를 보고 가군(家君)과 여아의 지감(知鑑)이 있음을 못내 칭찬하더라.
해운이 초당으로 들어가서 여아에 손을 잡고 이르기를,
“너는 연소한 여아로서 어찌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이와 같으리오.”
하며, 칭찬하기를 마지 아니 하더라.
이때 계후는 이리하는 경상을 보고 흉중(胸中)에 의심이 가득하여 생각하되,
‘고금도에서도 흠탐에 후대를 받다가 죽게 된 것을 여자의 구완으로 살아나고, 또 나주에서도 권찰방에게 후대를 받다가 죽게 된 것을 간신히 모면하였거늘, 오늘 또 이러한 후대를 받으니,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으리오. 그러하나 또 하회(下回)를 보아 도망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배사(拜謝) 이르기를,
“이 천한 몸으로 귀 소저의 대덕을 입사와 일야(一夜)를 편히 자고 갈까 하였더니, 또 주인의 이같은 후덕(厚德)을 입사오니, 그 은혜는 백골난망이로소이다.”
하니, 주인이 이르기를,
“일시 구제(救濟)를 어찌 은혜라 하오리까?”
이러할 때에 계명성(鷄鳴聲)이 자자하거늘, 해운이 이르기를
“요사이 이 청중이 다사하여 집에서 자지 못하고 들어가오니, 안녕히 주무시면 아침에 나와서 다시 뵈오리다.”
하며 제 처에게 부탁하여 이르기를,
“손님의 아침밥을 각별히 대접하라.”
하고 청중으로 들어가서 대강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계후를 보고 밤사이 안녕히 주무심을 인사하니, 계후 사례하고 이르기를,
“들으매 과거 날이 멀지 않다 하니 언제나 되나이까?”
해운이 답하기를,
“오늘이로소이다.”
하거늘, 계후 차탄(嗟歎) 이르기를,
“나도 어려서 글자나 배운 탓으로 과거를 보았으면 좋겠으나, 지필먹이 없사오니, 도시 나의 팔자로다.”
하거늘, 해운이 답하기를,
“상공(上公)이 과거를 보시려 하오면 제구(諸具)는 근심치 마옵소서.”
하고, 잠시간에 지필먹을 준비하여 드리거늘, 계후 대희하여 즉시 홍화문(弘化門) 밖에 당도하니, 팔도 선비가 인산인해(人山人海)가 되어 들어가는지라. 마침 해운이 곁에 있다가 고하기를,
“이번 과거에 천행으로 급제하시거든 소인에 집에서 창방(唱榜)을 치르게 하옵소서.”
하거늘, 계후 답하기를,
“주인에 부탁이 아닐지라도 그것은 그리 하려니와, 어찌 대과(大科)하기를 바라리오.”
하며, 장중(場中)으로 들어가 장전(場前)을 바라보니, 백설 같은 백목(白木) 차일(遮日)을 보계(補階) 위에 높이 치고 세백목(細白木) 설포장(設布帳)을 구름같이 둘렀는데, 어전(御前)을 바라보니 위의(威儀)가 엄숙하다.
양산(陽傘)과 일산(日傘)이며, 청개(靑蓋) 홍개(紅蓋) 흑개(黑蓋)와 봉미선(鳳薇扇)이며, 용기(龍旗)와 호미창(虎尾槍) 자개창(紫介槍) 삼지창(三枝槍)은 월도(月刀)를 행오(行伍) 있게 정제(整齊)하고, 시위(侍位)를 바라보니 병조판서(兵曹判書) 번병(藩屛)이요, 도총관(都總管) 별운검(別雲劍)과 승사각신(丞司閣臣) 늘어섰고, 금관조복(金冠朝服) 제제(濟濟)한데 서대옥대(犀帶玉帶) 총총(叢叢)하고, 사모(紗帽)품대(品帶) 쌍학흉배(雙鶴胸背)와 호수립(虎鬚笠) 청철익(靑綴翼)에 착군복(着軍腹) 패동개(佩筒盖)는 선전관(宣傳官)이 분명하고, 선상(先廂)에 훈련대장(訓練大將), 중앙에 금군별장(禁軍別將), 후상(後廂) 어영대장(御營大將)이며, 총관사(總官使) 별군직(別軍職)과 좌우포장(左右捕將) 늘어섰고, 위내군(偉內禁軍) 칠백 명과 전명사(傳命司) 알별감(謁別監)이며 무예차지통장(武藝次知統長)이라. 가전가후(駕前駕後) 별대마병(別隊馬兵) 좌우에는 정원사령(政院使令)과 팔십 명 나장(邏將)이며, 근복군사(近伏軍士) 대답하고 어전뇌자(御前牢子) 벌려 섰다.
시위를 정제 후에 사알(司謁)이 고성(高聲)하여 ‘시관전진전진(試官前進前進)’하니, 시관이 고복(叩伏)한 후 대독관(代讀官)이 글제를 받아들고 현제판(懸製版)에 걸어 놓으니 수만(數萬) 다사(多士) 선비들이 시지(試紙)를 펼쳐 놓고 제각기 글을 지을 제, 이때 신계후은 용연(龍硯)에 먹을 갈아 호황모(胡黃毛) 무심필(無心筆)로 일필휘지(一筆揮之)하니 문불가점(文不加點)이라.
일천(一天)에 선장(先場)하니 상시관(上試官)이 글을 보고 필법(筆法)도 해정(楷正)하거니와 문체도 노련(老鍊)하니, 글자마다 비점(批點)이요 글귀마다 관주(貫珠)로다.
상지상(上之上)에 등(等)을 매겨 휘장(揮場)하여 내 뜨리니 장원급제 하였더라. 상전(上前) 탁봉(坼封)한 연후에 봉내(封內)를 대독(代讀)하니,
“유학(幼學)신(臣)의 신계후 년은 이십 세요, 본은 평산이요, 거주는 한양이며, 부는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우의정(右議政) 신업이라.”
하였거늘, 상이 희색(喜色)이 만안(滿顔)하사 이르기를,
“우의정 신업이 죽은 후에 그 아들이 천변(天變) 화재(火災)에 죽었다 하더니 괴이하다.”
하시더라.
이때 정원사령이 나올 제, 청철익 앞 헤치고 자 셋 치 소매를 보기 좋게 활개치며 장원봉(壯元峰) 연못가에 뚜렷이 나서면서,
“신업 자제(子弟) 신계후, 신계후라.”
이삼호(二三呼) 부르는 소리 장중(場中)이 뒤집히며 춘당대(春塘臺)가 떠나간다. 진해운이 고대(苦待)하다가 신계후의 호명(呼名)함을 듣고 대희하여, 제 집으로 바삐 돌아와서 여쭈되,
“상공이 이번에 대과(大科)를 하였사오니 바삐 들어가사이다.”
하거늘, 계후 여취여광(如醉如狂)하여 바삐 장중으로 들어갈 제, 선풍도골 신계후은 세수를 다시 하고, 도포를 고쳐 입고, 한 걸음에 들어가서 썩 나서니, 정원사령이 부액(扶腋)하여 신래진퇴(新來進退)한 연후에, 신급제(新及第) 신계후에게 특히 사악(賜樂)하시고, 상이 반기사 바라보시매, 용모(容貌) 풍채(風采)가 신업과 방불하여 짐짓 일세에 영웅이라. 상이 옥수(玉手)로 계후에 등을 어루만지시며 이르기를,
“너의 아비 일국(一國)에 유명한 재상으로 갈충보국(竭忠報國)하다가 죽고, 경(卿)은 어려서 화재에 죽었다 하더니, 어찌 명을 보존하여 이같이 글을 지었느뇨?”
하시며 비창(悲愴)하시거늘, 계후 천은을 감축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신이 아비 죽은 후에 화재를 당하였으나, 천행으로 목숨을 보존하여 거처 없이 사방으로 다니옵다가 고향으로 올라 왔나이다.”
이런 말씀이며,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대강 주달(奏達)하오니, 상이 측은히 여기사 이르기를,
“너는 힘을 다하여 정사(政事)를 도와 일국을 태평케 하라.”
하시고,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제수(除授)하시니, 홍화문(弘化門) 밖 나올 적에 머리에 어사화(御賜花)며 몸에 청삼(靑衫)이라. 은패(銀牌) 청개(靑蓋) 전도(前導)하고 금의화동(錦衣花童)은 쌍쌍이 늘어서서 옥저를 희롱하고, 갖은 풍악(風樂) 긴 염불 여민락(與民樂)에 어깨춤이 절로 난다. 수만 명 선비들이 서로 보기 다투어 칭찬하며 뉘 아니 부러워하리오.
이때 진해운이 앞에 나와 뵈옵거늘, 계후 해운의 손을 잡고 치사(致謝)하며 이르기를,
“내 오늘 영귀(榮貴)하게 된 것이 모두 주인의 후덕이라. 그대의 문호(門戶)를 빛내고자 하노라.”
하니, 해운이 대희하여 바삐 집으로 돌아와서 그 처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에서 자던 상공이 금번(今番)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우리 집으로 오신다.”
하니, 그 처와 여식이 대희하여 일변(一邊) 대연(大宴)을 배설(排設)하고 신급제에 오시기를 고대하더라.
이적에 신한림(申翰林)이 남대문으로 향할 새, 풍류 소리가 진동하고 은패 청개 전도하며, 금안준마(金鞍駿馬)에 뚜렷이 앉아 나올 제, 장안 남녀노소 다투어 구경하며 하는 말이,
“구대 독자 신승상의 아들이 화재에 죽었다 하더니, 어디 가서 공부하여 저같이 영귀하였느뇨?”
혹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더라.
주인에 집에 당도할 제, 전일(前日)에 구박하던 사람들이 구경하며 하는 말이,
“일전에 걸객이더니 오늘에는 재상이라.”
하며, 해운의 여식을 지인지감이 있다 하고 칭찬을 무수히 하더라. 이때에 여각 집 딸년과 계집년이 한림에 거동을 보고
“저럴 줄 알았다면 구박이나 아니 하였을 걸.”
하며, 참으로 애걸(哀乞)하더라.
이적에 해운이 한림을 맞아 당상(堂上)에 좌정 후 배반(杯盤)을 드리니, 한림이 못내 주인에 은덕을 감축한 후 수일을 지내매, 진해운이 고하기를,
“소인이 한림께 할 말씀이 있사오나, 들으실는지 알 수 없사와 황송하오이다.”
하거늘, 한림 이르기를,
“내가 그대로 인하여 오늘날 이 같이 영귀하게 되었으니, 주인의 말이면 어찌 수화(水火)인들 피하리오.”
하니, 해운 이르기를,
“소인에게 남아가 없삽고 다만 일녀(一女)를 두어, 용모 재덕은 없사오나 버리시지 마옵시고 빙첩(憑妾)으로 정하옵시면 이는 소인의 집에 큰 영귀오니, 바라건대 듣사오리까?”
하거늘, 한림이 사례 이르기를,
“내 본래 걸객으로 주인에 대덕을 입어 오늘 이같이 영귀하게 되매, 그 은혜는 백골난망(白骨難忘)이거늘, 어찌 천금 같은 영애(令愛)로 혼사까지 의논하리오. 나는 주인의 뜻을 저버리지 아니하리라.”
하니, 해운에 부부 대희하여 즉시 택일하여 길일(吉日)을 당하매, 신랑의 선풍도골과 신부의 화용월태(花容月態) 짐짓 천생연분(天生緣分)이러라.
일일은 한림이 직소(直所)에 앉았더니,
“입직(入直) 한림(翰林) 입시(入侍)하라.”
사알이 전명(傳命)하거늘, 신한림이 바삐 걸어 승명(承命) 입시 전진(前進)하니, 상이 순순(諄諄)이 하교(下敎)하기를,
“궁궐이 깊고 깊어 사해(四海)가 막막하니 불쌍한 것이 백성이라. 창생(蒼生)의 질곡사(桎梏事)를 일일이 살피려고 팔도(八道) 어사(御使)를 보내는데, 양사(兩司) 문신 가려낼 제, 너의 용모와 지은 글을 보니 사직(社稷)의 다행이요 백성의 복이로다. 나이는 비록 젊었으나 동후책을 담임 시켜 호남어사를 특차(特差)하니, 호남은 산세(山勢)를 따라 민심(民心)이 간(奸)한지라. 아무쪼록 백성을 사랑하고 수령(守令) 목백(牧伯)의 치불치(治不治)와 효자(孝子) 열부(烈婦)를 유루(遺漏) 없이 장계(狀啓)한 후, 조심하여 다녀오라.”
하시고, 마패(馬牌)와 유척(鍮尺)을 하사하거늘, 한림이 황공하여 고두사은(叩頭謝恩)한 후 주하기를,
“신이 연소(年少) 무재(無才)하오나 충성을 다하여 성지(聖旨)를 봉행(奉行)하오리다.”
하며, 하직 숙배 후 물러나와, 해운의 부부와 낭자를 이별하고 군명(君名)을 봉승하여 급급히 떠날 적에, 남대문 밖 나가서 청패(靑牌) 역마(驛馬)를 잡아타고 칠패(七牌) 팔패(八牌) 배다리 지나, 애고개 넘어 동작강 얼핏 건너 남태령을 넘어 과천 들어 중화(中火)하고 박막 역마 갈아타고, 냉천고개 인덕원 갈이술막 군포내 사근내 지나, 지지대 넘어 미륵당이 괴구정이 지나 영화 역마 갈아타고, 수원 북문 들이다라 남문 밖에 숙소(宿所)하고, 상류천 하류천과 새술막 대행교 비껴 놓고, 떡전거리 지나가 울중매 넘어 오미진을 지나 진위 들어 중화하고, 회계원 넘어 칠원 지나 가양 역마 갈아타고, 소새 술막 숙소하고, 평원 광야 너른 들을 순식간에 얼른 지나 성환 역마 갈아타고 천안 들어 중화하고, 삼거리를 지나 굴모롱이 다다라 대평을 지나 팽나무 정에 중화하고, 인지원 잠깐 지나 광정 역마 갈아타고, 노성읍내 얼핏 지나 평창역마 갈아타고, 은진읍을 지나 황학정에 숙소하고, 이튿날 평명(平明) 후에 타신 역마 제폐(除癈)하고 삼베로 변복(變服)하고, 역리(驛吏) 역졸(驛卒)을 모두 불러 은밀히 단속하여,
“각기 분발하는데 너희들은 예서부터 우도(右道) 삼십오 관 얼른 다녀 금월 이십일 오시에 나주읍으로 대령하고, 너희들은 예서부터 좌도(左道) 이십일 관 얼른 다녀 금월 이십일 오시에 나주읍으로 대령(待令)하되, 십문(十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 남의 말을 믿지 말고 면면촌촌(面面村村)이 염탐(廉探)하되, 탐관(貪官)학민(虐民) 불법지사(不法之事)와, 불충불효(不忠不孝)하는 놈과, 남을 음해(陰害)하는 놈과, 술먹고 우악(愚惡)하여 노인(老人) 존장(尊長) 모르는 놈과, 살인하고 음치(淫痴)하는 놈과, 국곡(國穀) 투식(偸食)하는 놈과, 유부녀 강간하는 놈과, 남의 분묘(墳墓) 사굴(私掘)하는 놈과, 어진 아내 모함하고 가장(家長) 두고 음행(淫行)하고, 제 것 두고 빌어먹고 주색잡기로 팔린 놈이며, 남에 집에 충화(衝火)하는 놈을 일일이 적어 쥐고, 금월 이십일에 나주읍으로 등대(等待)하라.”
낱낱이 분부한 후 각처로 보내고, 어사 홀로 여산읍 당도하여 면면촌촌이 염탐할제, 각읍 수령들이 어사 나왔단 말을 듣고 환상(還上)에 일이 날까, 세미(稅米)에 축(縮)이 날까, 공사(公事)에 실수가 될까, 선치(善治)하기를 힘쓰더라.
각설, 이때 두지 속에서 일월을 보지 못하고 세월을 보내던 경애 소저는, 우연히 배가 아프고 사지가 노곤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더니, 일개(一個) 남자를 낳은지라. 유모 춘운이 놀라며 국밥을 갖추어 드리고 해산한 종적을 감추어 집안사람을 속이더니, 고씨 경애에 해산한 자취를 알고 찰방더러 이르기를,
“경애 이제는 해복(解腹)하였으니 죽여 없애자.”
하거늘, 찰방이 듣고 더욱 대노하여, 일가 제족과 경애에 외족(外族)과 고씨 친척을 청하여 놓고 죽이려 하더라.
유모 춘운이 이 말을 듣고, 후원에다가 남이 모르게 밤이면 정화수를 떠다 놓고 일월성신(日月星辰)께 축수하며, 낮이면 암축(暗祝)하기를,
“우리 경애 소저 애매(曖昧)이 죽사오니 일월성신과 후토(后土)부인은 불쌍히 여기사 속속(速速)히 살려 주옵소서.”
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낼새, 소저 죽을 날이 임박하매 망극함을 이기지 못하여 아이를 새옷 지어 입히고, 친척과 외편(外便)이며 생월생시와 아무 날에는 어미 죽는 사연을 기록하여 금낭에 넣어 채우고, 얼굴을 한 데 대며 이르기를,
“너는 무슨 팔자로 어미 복중(腹中)을 떠난 지 삼 일만에 모자 서로 이별은 무슨 일인고?”
하며, 목이 메여 울다가, 유모 춘운을 불러 가만히 이르기를,
“목함(木函) 한 개를 짜오되, 물이 들지 아니하게 하라.”
하니, 춘운이 목수를 은근히 청하여 값을 후히 주고 함을 짜서 드리니, 소저 바다 놓고 애통할 제 일월도 무광(無光)하더라.
소저 정신을 진정하여 비단으로 함(函) 바닥에 깔고, 아이를 배불리 젖 먹여 누인 후에 비단으로 덮고 그 위에 신씨네 족보와 종문서를 넣은 후, 뚜껑을 덮고 단단히 동여 춘운을 주어 이르기를,
“이 목함을 강물에 띄우라.”
하며, 인하여 기절하니, 춘운이 소저에 경상을 보고 같이 기절하다가 목함을 남모르게 강물에 띄우니, 수세(水勢)를 따라 떠내려가더라.
그 강물은 나주읍으로 내가려는 강이라.
이때 어사가 나주에 다다라 사면으로 탐문(探問)도 하고 산천도 구경하다가 강가에 다다르니, 일기(日氣)는 온화하고 강물은 잔잔한데 여러 여인들이 빨래를 하거늘, 혹 여인에게라도 무슨 소문이나 들을까 하고 세수도 하며 발도 씻으며 앉았더니, 여러 표모(漂母)들이 한대 모이어 요란하거늘, 어사 몸을 일으켜 가까이 가며 바라보니, 물에 떠오는 목함을 건져 놓고 요란한지라. 어사 점점 가까이 간즉, 모든 여인들이 말하기를
“함속에 아이가 있어 이때까지 살았다.”
하며, 요란히 구는지라. 어사 괴이 여기더니, 그중 늙은 여인이 어사를 보고 이르기를,
“저 양반 이런 일을 보아 계시니까? 아이를 목함 속에다 넣고 물에다가 띄었으니,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나이다.”
하거늘, 어사 이르기를,
“아이가 살았다 하니, 필연코 곡절이 있는 일이라. 먼저 얻은 여인으로 아이를 기르라 하소서.”
하니, 여러 여인이 그 아이를 내어 놓고 보다가, 그 우에 책 한 권과 무슨 문서가 있음을 보고 곧 꺼내어 어사를 주며 이르기를,
“저 양반 글을 아시거든 이것이 무어신가 보아 달라.”
하거늘, 어사가 받아보니 자기 집 족보와 종문서로 자기가 가지고 다니던 바라. 간담이 떨어지고 정신이 아득하여 눈물이 나오는 줄 모르게 옷깃을 적시니, 여인들이 그 거동을 보고 묻기를,
“그 글을 보시고 낙루(落淚)하시니 무슨 곡절(曲折)이 있나이까?”
하거늘, 어사 슬픔을 참고 이르기를,
“그 아이의 신세를 생각하니 자연스레 눈물이 나온다.”
하더니, 여인들이 또 이로되,
“아이 옷고름에 금낭을 채우고 옷 속에 글 쓴 종이가 있으니 보아 달라.”
하고 드리거늘, 어사 받아보니 경애 소저의 필적이라. 정신이 아득하여 말을 못하다가 여인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를 먼저 얻은 여인이 길러 잔명(殘命)을 보존케 하옵소서.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 하였으니, 반드시 후일에 좋은 일을 보리이다.”
하니, 여인들이 답하기를,
“목석이 아니거든 잔명을 어찌 버리리까.”
하거늘, 어사 이르기를,
“이 글 쓴 종이는 소용이 없는 것이라, 나를 주소서.”
하니, 지식 없는 여인들이라. 그리하라 하고 주거늘, 어사 받아 들고 들어갈 제 수풀을 의지하고 조용한 곳에서 경애 소저에 유서(遺書)를 펴보니, 그 글에 하였으되,
‘나는 전생에 무슨 죄악으로 이생에 나서, 칠세에 모친을 여의고 계모를 맛나서 세상에 듣지도 못할 말을 들어 누명을 싣고 죽거니와, 슬프도다. 너는 무슨 팔자로 어미 복중을 떠난 지 삼 일만에 모자 이별을 당하니, 이 무슨 죄악인고.
네 부친은 들어와서 누명만 끼치고 나 죽는 줄을 어찌 알소냐. 춘운의 구함을 입어 너를 세상에 던지니, 어찌 살아나서 네 어미 고혼(孤魂)을 위로할꼬.
네 부친을 찾아 신씨(申氏)의 후대(後代)를 이으라. 금월(今月) 이십이일은 우리 친척이 모이어 나를 죽이려 한즉 죽기는 하나, 황천에 돌아가서 어찌 눈을 감으리오.
백옥 같은 이내 몸에 누명을 싣기는 반드시 고씨의 간계(奸計)건만, 뉘라서 확변(確辯)하여 주리오. 네 부친은 내 몸이 온전한 줄 알고 갔으나, 이 생전에 다시 못보고 죽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며, 네가 어찌 살아 나거던 이 유서를 보고 나의 원통함을 설화(說話)하라. 천지신명과 일월성신은 살피사 잔명을 어찌 구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뇨.
나의 답답하고 설운 사정을 어찌 다 기록하며 한 줄을 기록하면 백 번이나 한숨 나고, 두 줄을 기록하면 천 번이나 눈물 나니, 눈이 어둡고 가슴이 막히며 손이 떨려 세세(細細)한 원한을 말 다 못하고 대강 기록하여, 버리는 아이에게 부치노라.’
하였고, 그 끝에,
‘너의 생월일시는 갑진(甲辰) 삼월 십구일 자시(子時)며, 네 부친에 성명은 신계후라. 본은 평산이요 연은 이십일 세며, 조부는 신업이요, 네 모(母)는 권경애요, 외조(外祖)의 명은 형이요, 진외조(陣外祖)는 최문이라.’
하였더라.
어사 보기를 다하고 대경하여 땅을 치며 대성통곡하며 이르기를,
“이는 소저에 허물이 아니로다. 내 소저를 살리지 못하면 어찌 앙화가 없으며 손복(損福)을 아니 하리오.”
하고, 소저 죽을 날짜를 생각하니 명일(明日)이라. 마음이 떨리고 생각할수록 불쌍하여 몸을 안정치 못하며 분기가 충천하매,
‘천금 같은 우리 낭자의 몸과 백옥(白玉) 빙심(氷心)같은 그 마음에 이렇듯이 누명을 끼쳐 죽으니, 내 어찌 고씨를 살려 두리오.’
하고, 급히 역졸과 서리 등을 모아 나주 부중(府中)에 출도(出道)하여 대강 공사(公事)를 하고 분부하되,
“이 앞 강가에서 아이 얻은 여인은 아이를 안고 들어오라.”
하며, 역졸을 분부하여 교자(轎子)를 내어 보내니, 역졸 등이 교자를 가지고 나와 아이 얻은 여인을 찾으니 과연 있는지라, 역졸 등이 여쭈되,
“어사 출도하시고 아이 얻은 부인으로 아이를 안고 등대하라 하나이다.”
하니, 이때에 여인이 황겁하여 즉시 아이를 안고 교자에 오르매, 역졸 등이 모시고 들어가 고하되,
“애기 얻은 부인을 모셔 들었나이다.”
하니, 어사 바삐 아이를 올리라 하매 아이를 올리거늘, 어사 아이를 받아 자세히 보니 남중호걸이라. 한숨을 짓고 눈물을 흘리니 역졸 등이 수상히 여기더라. 어사 그 여인을 불러 채단으로 후히 상주고 분부하되,
“이 아이를 젖 잘 먹이고, 명일 오시에 나주 동면 권찰방 집으로 대령하라.”
하고, 공사를 본관(本官)에 맡긴 후, 서리 역졸을 데리고 밤으로 행하여 권찰방 집 동리(洞里)로 들어가니 동방이 밝고자 하였더라.
어사 서리를 불러서 분부하되,
“권찰방이 이제 친척을 다 모으고 애매한 제 여식을 후처(後妻)의 말을 듣고 음행(淫行)하였다 하여 죽이려 하니, 너희들은 저 수풀 속에 숨었다가 행인인 체하고 하나씩 들어와서 동정을 살피다가, 내가 부채를 세 번 접치고 일어나거든 급히 출도하라. 응당 권찰방의 후처 족속(族屬)도 모였을 것이니 통성명(通姓名) 하였다가, 고가(高家)라 하는 자는 모조리 때려죽이라.”
분부하시니 서리 역졸 등은 청령(聽令)하고, 역졸 등을 거느려 수풀 속에 숨었더라.
이때 어사가 가만히 다니며 동정을 살필 새, 인적은 고요하고 새소리는 봄 사람의 곤히 든 잠을 깨우고자 하는데, 후원의 두견화는 오직 나를 보고 반기는 듯하더라.
문득 공부하던 자각정을 바라보니 심사가 처량하여 가만히 정자에 올라가 다리도 쉬며 사면을 살펴보더니, 문득 사람에 자최 나거늘 몸을 숨기여 엿보니, 유모 춘운이 산 밑 정결한 곳에다가 정화수를 떠다 놓고 하늘을 향하여 무수히 축수하며 빌며 이르기를,
“명천과 일월성신은 굽어 살피소서. 우리 소저 절행(節行)이 백옥 같사온데 더러운 누명을 싣고 오늘날 죽게 되었사오니, 천지신명은 하감(下瞰)하사 살려 주옵소서. 이러한 누명은 다 고씨의 간계이오니 죄는 지은 데로 가고 우리 백옥 같은 소저를 살려 주옵소서. 주인 되는 권찰방은 깨닫지 못하고 불쌍한 소저를 죽이려 하오니, 이런 통분한 일이 어디 있사오리까?”
하며, 무수히 축원(祝願)하더라.
어사 노파의 축원함을 듣고 내심(內心)에 칭찬하되,
‘정성이 지극하도다.’
하고 서서히 노파를 불러 이르기를,
“무슨 원통한 일이 있기에 저같이 축원하느뇨?”
하니, 춘운이 놀라며 노기등등하여 이르기를,
“어떠한 사람이기에 남의 정성 드리는 곳에 와서 엿보고 있다가 이같이 사람을 놀내느뇨?”
하거늘, 어사 이르기를,
“나는 한양 사람으로서 길을 가다가 날은 저물고, 주인은 정치 못하여 이 정자에서 밤을 지냈거니와, 노파는 무슨 일로 저같이 축원을 하느뇨?”
춘운이 울며 이르기를,
“노파는 권찰방 댁 유모이옵더니, 괴이한 변이 있사와 이같이 정성을 드리나이다.”
하거늘, 어사 이르기를,
“무슨 변고(變故)가 있기에 이같이 정성까지 드리느뇨?”
하니, 춘운이 이르기를,
“누구이신지는 아지 못하오나 사실을 알고자 하오니 자초지종을 들으옵소서. 노파의 상전이 기린찰방을 지내옵고, 전실 최씨 부인이 시년(時年) 이십오 세에 여식하나를 낳고 기세(棄世)하였는데, 여아 이름은 경애라. 노파가 젖을 먹여 기르옵고, 후실의 성은 고씨니, 위인이 넉넉지 못하여 경애 소저를 항상 미워하매 소저 눈물로 세월을 보내옵더니, 연광(年光)이 이십팔 세에 경성 사람 신계후와 결혼하니, 신씨는 문벌도 좋거니와 권씨 댁과 세교(世交)라.
그러함으로 권찰방이 사랑하시매 후실(後室) 고씨 시기하여, 경애 소저 행례(行禮)하던 날 밤에 무슨 거간(巨姦)으로 신랑을 해하려 하였으나, 신랑은 미리 알고 도망하매, 고씨가 말을 내되,
‘소저에 간부가 들어와서 신랑을 죽이려 한즉 신랑이 도망하였다.’
하고, 우리 옥 같은 소저에게 누명을 싣고 음란하다 하여 찰방을 꼬이매, 찰방이 고씨에 말만 듣고 죽이려 하였더니, 찰방의 매씨께서 이 일을 아시고 죽이지 못하도록 말씀하시매 중지하였더니, 이삼 삭이 지난 후에 설상가상으로 소저 첫날밤 일야(一夜) 동품(同品)에 태기 있음을 고씨가 기회로 알고 찰방에게 고하기를,
‘외간 남자를 잠통(潛通)하여 수태(受胎)하였다.’
하매, 찰방이 대노하여 다시 죽이려 한즉, 그 매씨에 권고로 순산(順産) 후에 죽이게 하였더니, 소저 이미 해복하온 즉 죽일 줄로 작정하고 내외 친척을 오늘 다 모아 오시(午時)에 죽이려 하오니, 이런 참혹한 일이 어디 있사오리까. 이러함으로 노파가 하루 한 번씩 천지 일월성신께 축수하온들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
하거늘, 어사 이르기를,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였으니 어찌 죽으리오. 그러나 그 아이는 젖이나 잘 먹느뇨?”
하니, 춘운이 답하기를,
“아기는 어제 목함 속에 넣어서 강물에 띄었사오니,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
하며, 눈물이 비오 듯하거늘, 어사 슬픔을 억제하고 이르기를,
“신랑은 그간에 혹 왔다 갔느냐?”
하니, 춘운이 답하기를,
“신랑이 한번 도망한 이후 이제껏 생사를 알지 못하거니와, 어디 계신 손님이신지 오시 우리 소저가 원통이 죽는 것이나 구경하시다가, 혹 살리실 수가 있거든 살려 주옵소서.”
어사 이르기를,
“지내가는 사람이 어찌 죽는 사람을 살릴 능력이 있으리오마는, 혹 무사(無事)할는지도 알 수 없지요.”
하니, 춘운이 혼자말로 하는 말이,
“에구 불쌍하지, 우리 소저의 신세야. 들으매 우리 전라도에 암행어사가 나왔다는 데 이런 억울한 일을 듣지 못하였는지.”
하고, 안으로 들어가거늘, 어사 그 참혹한 말을 듣고 혼자말로,
“오시 가면 고씨를 죽이고 소저를 구하리라.”
마음을 철석같이 먹고 권찰방에 집 동정을 살피더니, 마음이 조급하매 조갈(燥渴)이 자연 나거늘, 생각하되,
‘전일에 먹던 큰길가 물이나 먹자.’
하고, 우물을 찾아가 물을 먹고 양유정을 의지하여 장차 조치(措置)할 일을 생각하더니, 마침 한 노인이 옥관자(玉貫子)를 부치고 감투를 제쳐 쓰고, 망태를 메고 갈퀴를 가지고 버들나무 아래에 와서 낙엽을 긁거늘, 어사 이윽히 바라보다가 노인에게 묻기를,
“노인은 어느 동리에 계시오니까?”
노인이 돌아보고 부답하며 낙엽만 긁거늘, 어사 무류(無謬)하여 다시 묻기를,
“노인께 말씀을 묻고자 함은 다름이 아니오라, 져 안 동리에 보이는 큰 집이 누구에 집이오며, 그 집에 무슨 대사가 있어 사람들이 저같이 모여드는지 노인이 혹 아시나이까?”
노인이 성을 내어 이르기를,
“지내가는 행인이면 갈 길이나 갈 것이지, 남에 집에 무슨 일이 있던지 알아 무엇하느뇨?”
하며 언사가 불공하거늘, 어사 짐작하고 다시 문 이르기를,
“노인을 뵈오니 동리에서 아실 듯하여 물어 보았는데, 그다지 노하여서 말씀을 하시니까?”
노인이 결을 내어 길가에 가 앉으며 담배 한대를 붙이고 이르기를,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나 이리 와서 내 말을 자세히 들어보오.”
하거늘, 어사 바로 가서 곁에 앉으니, 노인 이르기를,
“내 말을 들어 보시요. 져 집은 권찰방이라 하는 놈에 집이라. 그 놈이 귀도 먹고 눈도 어두운 지룡(地龍)이와 같은 놈이라. 복은 있어서 급제를 한 연후에 이왕 작고(作故)하신 신승상(申丞相) 댁 문하(門下)에 있더니, 신승상의 은덕으로 기린찰방은 하였으나 찰방이 아깝지. 그 놈이 미물(微物)이라도 한 번 급제를 하여 난장(亂場)을 지냈으니 처사(處事)가 범인(凡人)과는 다를 터인데, 윤기(倫紀)를 모르니 저는 저요, 나는 나이라. 관계할 바 아니니, 갈 길이나 가라.”
하거늘, 어사 이르기를,
“권찰방이 무슨 허물이 있기에 노인은 그다지 말씀을 하시나이까?”
하니, 노인이 답하기를,
“그대가 알고자 할지니 자초지종을 자세히 들으라.”
하고, 저저이 하는 말이 춘운의 말과 다름이 없는지라.
어사 이르기를,
“그러할지라도 경애 소저가 허물이 없으면 어찌 제 부모가 죽이려 하리오.”
하니, 노인이 고성으로 대책(大責)하기를,
“보아도 인사(人事)범절(凡節)은 알 듯한 사람이 인사(人事) 불상(不詳)이로고. 늙어가는 사람이 어찌 남의 집 규중지사(閨中之事)에 일호(一毫)인들 부인(否認)을 하리오.”
하며, 노기등등하여 일어나 낙엽만 긁거늘, 어사 무류하기는 하나 내심에는,
‘경애 소저를 구하고 고씨의 원수를 갚으리라.’
하며, 노인에게 작별한 후 찰방의 집으로 들어가니, 이때 찰방에 친척들이 많이 모이어 이리 가며 수군수군, 저리 가며 수군수군하여 형세가 위급한 중, 서리 역졸 등도 하나 둘씩 들어와서 틈틈이 섞여 다니더라.
그 중에 고가인 듯한 놈 십여 명은 안팎으로 드나들며, 찰방의 분을 도도와 하는 말이,
“우리 가문(家門)에는 이런 음녀(淫女)를 두었으면 벌써 죽였지 이때까지 두었으리오.”
하매, 찰방이 노기 대발하여 소제를 끌어내어 죽이려 하매, 최씨들은 눈물만 흘리고 돌아보며, 권씨들도 슬슬 피하는데, 고가(高哥)들은 의기양양(意氣揚揚)하여 죽이기를 재촉하거늘, 어사 소저에 끌려 나오는 것을 살펴보니 흑운(黑雲)같은 머리털은 저대로 풀어지고, 옥 같은 얼굴은 희미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거의 죽게 되었는데, 노복들은 하나도 따르지 않고 오직 노파 춘운이 소저에 옥수(玉手)를 잡고 발을 구르며 통곡하니, 그 형상은 차마 눈으로 보지 못할러라.
어사 대노하여 부채를 세 번 접치고 일어나며 눈치를 보이니, 서리가 눈 한 번 꿈쩍하매 역졸이 손 한 번 끄떡하며 역소(驛召)로 내달아 역장(驛長) 아사(亞使)도 분부 급급(急急)하시니,
“청상적 입고 홍견대(紅絹帒) 띠어라. 사마치 둘렀느냐? 좌견(左牽)을 달아라. 사또 타실 대마(大馬)를 들이되, 안장(鞍裝)을 지우고 배대(帶)를 조르고 덧굴레 씌우며 후걸이 내려라. 평량자(平凉子) 방망이 이리 가져 오나라.”
하며, 사자 같은 마두 역졸 육(六)모 방치 높이 들고 우르르 달려들어,
“암행어사 출도야!”
두세 번 고함치니, 동중(洞中)이 뜨르르할 제, 범같이 날낸 역졸 예 가 번 듯, 제가 번 듯 후다닥 후다닥, 깨어지나니 고가 놈의 대가리요, 부러지나니 고가 놈의 다리라. 권씨와 최씨는 얻어맞으면서도 재미있게 생각하고 고가들은 도망하기에 분주할 제, 찰방은 겁이 나서 나뭇단 속에 가서 숨어 잇고 고씨 부인은 정신없이 아궁이 속에 대가리만 들어 박고 덜덜 떨 제, 동내 두민(頭民) 동장(洞長)들이 죽기를 무릅쓰고 찰방 집에 모이어 자리를 펴고 어사를 모시며 지성으로 거행할새, 어사 당상(堂上)에 좌정하고 역졸을 분부하여,
“이 집 주인 권찰방은 불러들이고 노복 등은 모조리 잡아들여라.”
하니, 역졸 등이 일변(一邊)으로 찰방을 찾으며 일변으로 노복 등을 잡아들일새, 찰방은 간 곳이 없음으로 찾지 못하였거늘 어사 추상(秋霜)같이 호령하며 노복 등을 차례로 문초(問招)할새, 노복 등이 고하기를,
“소인 등은 사또 장하(杖下)에 당장 죽사와도 무슨 죄인지 알 수 없사오니, 죽이시면 다만 죽을 따름이로소이다.”
하거늘, 어사 대노하여 이르기를,
“너의 댁 소저의 일은 너희 등이 알지 못하면 누가 알리오. 바른대로 고하여 죽기로 면하라.”
하시며, 천둥같이 이르시니, 노복 등이 고하기를,
“소인 등이 소저의 억울하심은 아오나 어찌되온 일인지는 알 수 없사오니, 사또 처분만 바라나이다.”
하거늘, 어사 다시 묻기를,
“그러하면 너희 중에 금낭이라 하는 놈이 있느냐?”
하시니, 그 중 한 놈이 얼굴빛이 흙빛 같아지며 벌벌 떨거늘, 어사 바라보시고 역졸을 분부하여 금낭을 잡아내어 엄형하며 문초하시니 금낭이 형벌을 못 이기어 고하기를,
“소인이 지금 장하에 죽사온들 어찌 추호나 기망(欺罔)하오리까? 소인의 상전에 초취(初娶) 부인 최씨 일찍 죽사옵고, 소생에 여아 하나 있사오니, 이름이 경애 소저이온대, 어려서부터 여행을 닦사와 규문을 나지 아니하오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옵더니, 후취(後娶) 부인 고씨 심사가 불량(不良)하여 매양 시기하옵던 중 소저 성례(成禮)하는 날에 고씨 부인이 소인을 보옵고 말하시기를,
‘오늘 신랑의 용모를 보니 짐짓 영웅이라. 장래에 우리 가산을 차지하여 나의 자식으로 개밥에 도토리가 될지라. 너를 속신(贖身)하여 주고 또 상급(賞給)을 많이 줄 터이니, 너는 내 말을 누설치 말고, 오늘 밤 삼경에 신방에 들어가서 신랑만 죽이면 그 후환(後患)은 내가 다 조처(措處)하리라.’
하옵기로, 소인이 죽을 혼이 들어서 칼을 가지고 신방에 들어 가옵더니, 신랑은 눈치를 알라는지 도망하여 없사옵기로 할 수 없사와 그대로 고씨 부인에게 고하였삽더니, 고씨 부인이 말씀 내시기를,
‘신부의 간부가 들어와서 신랑을 해하려 한즉 신랑이 도망하였다.’
하며, 백옥 같은 소저를 음행으로 돌리며 죽이려 하옵더니, 상전의 매씨 되시는 마님께서 누누(累累) 말씀하시와 아직 중지하옵더니,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천만 뜻밖에 첫날밤에 소저 태기 있사오매, 고씨 부인이 이 더욱 기회로 생각하옵고 전후 모함을 다하여 또 죽이려 하옵는 것을, 매씨 마님의 말씀이,
‘소저는 설혹 제 죄가 있어 죽인다 하려니와 복중에 있는 아이야 무슨 죄가 있으며, 한사람의 일로 두 사람을 죽이는 것은 곧 우리 권씨 집을 멸망케 할 적악(積惡)이라.’
하시여 또 중지하였삽더니, 오늘 친족을 모으시고 또 죽이려 하옵는 중이오니, 이
외에는 다른 일은 알지 못하옵는지라. 명철(名哲)하신 사또께옵서 통촉하시여 백백(百百) 무죄(無罪)하온 소저를 살려 주옵시고 소인을 당장 죽여주옵소서. 이밖에는 다시 아뢰올 말씀이 없나이다.”
하거늘, 어사 듣기를 다하고 역졸을 명하여 고씨를 잡아 내여 계하(階下)에 꿇리고 고성 대질하기를,
“세상에 아무리 간특(奸慝)하고 악독하기로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알지 못하며, 무슨 원수로 애매한 사람에게 누명을 싣고 죽이려 하니, 천하에 너 같은 년이야 또 어디 있으리오. 너는 죽여도 오히려 죄가 남을지라. 죽는다고 한(恨)을 하지 마라.”
하니, 고씨 정신없이 아뢰는 말이,
“일이 이같이 발각된 이상에야 무슨 말을 다시 아뢰오리까? 도시 소녀의 죄이오니 사또 처분만 바라나이다.”
할 제, 유모 춘운이 고하기를,
“명천(明天)이 감동하시고 귀신이 도우사 명철하신 어사또께서 임하시여, 옥석(玉石)을 가리시고 원통한 우리 소저를 구하여 잔명을 살리시니, 활인(活人) 대덕(大德)을 어찌 측량하오리까. 천추(千秋) 만대(萬代)에 부귀영화 하옵소서.”
하더라.
어사 분부 이르기를,
“물어 볼 말이 있으니 소저를 잠깐 불러오라.”
하니, 춘운이 고하기를,
“어사또님 대덕으로 죽을 소저를 살이시니 은혜는 백골난망이로소이다. 그러하오나 사또의 명은 봉행(奉行)치 못하리로소이다. 소저가 어려서부터 여행을 닦아 규문(閨門)을 나지 아니 하옵고 외인을 대면치 아니 하였사오니, 오늘 사또에 덕택은 하해 같사오나 다시 죽사와도 나와 뵈옵지는 못하리로소이다.”
하니, 어사 짐짓 염치(廉恥)없이 호령(號令)하기를,
“내가 소저의 억울히 죽을 것을 살리었는데 어찌 대면치 못하리오. 만약 나와 나를 보지 아니할진대 잡아 내이리라.”
하며 추상같이 이르니, 춘운이 울며 고하기를,
“사또 분부 이러하실진대 이는 소저를 살리심이 아니오라, 도리어 소저의 명을 재촉하심이 통촉하옵소서.”
하며, 눈물이 비 오듯 하거늘, 어사 마음이 감동되어 음성을 나직이 하여 이르기를,
“노파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느냐?”
하시매, 노파 답하기를,
“어찌 알지 못하오리까. 우리 소저를 살려 주신 암행어사로소이다.”
하거늘, 어사 크게 웃으며 이르기를,
“노파는 아무리 늙어서 눈이 어둡기로, 십 삭 전의 신랑 신계후를 알아보지 못하느냐?”
하니, 노파가 눈물을 씻으며 자세히 바라보다가 어사 앞으로 달려들어 엎어지며 울음 반 웃음 반으로 하는 말이,
“이 정녕 우리 댁 새 서방님이시니까? 노파는 어사또로만 알았삽고, 새 서방님으로는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하늘이 도우시니까, 우리 소저의 복이시니까?”
하며 대성통곡하다가, 정신을 진정하여 안으로 들어가며 급급히 하는 말이,
“새 서방님 새 서방님. 소저가 어사또로 오셨습니다.”
하더라.
이때 소저는 자기를 죽이려고 친척이 모여들며 수군수군 함을 보매 속으로 생각하되,
‘죽기는 섧지 아니하나 누명을 쓰고 황천에 돌아가면 어머님을 어찌 대면하며, 또 어린 아이를 세상에 낳은 지 삼일 만에 강물에 띄웠으니 응당 죽었으려니와, 설혹 살았다 하더라도 저의 어미가 원통이 죽은 줄 어찌 알며, 부친을 어찌 찾아 부자 상봉하며, 부자 상봉 하더라도 어찌 서로 알리요. 친아버지도 나에 원통함을 아지 못하시고 죽이려 하시거든, 어떠한 사람이 그 아이를 구제하여 양육(養育)하며, 양육한다 하더라도 문자를 두었다가 주리오. 가군(家君)되는 이는 나의 이러한 사정은 알지 못하고 내 행실이 그르다 하리니, 어디 가서 호소하며, 누가 있어 발명(發明)하리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매 눈물이 흘러 앞을 가리고 정신이 아득하여 앉았더니,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며 친척들은 하나도 보이지 아니하고 노복의 살려달라는 소리만 들이더니, 춘운이 들어오며 하는 말이 알아들을 수 없이 하니, 죽이기만 바라고 앉았더니, 춘운이 다시 하는 말이,
“아차아차, 노파가 반가운 바람에 말을 뒤집어 하였습니다. 이런 희한한 일이 어디에 또 있으리오. 우리 새 서방님이 도망을 하셨다가 어사되어 오실 줄을 누가 알았으리오. 소저는 바삐 나가 보옵소서.”
하며, 일희일비(一喜一悲)하여 어찌 할 줄을 알지 못하는지라. 소저 이 말을 들으매 정신이 아득하여 넘어지며 불성인사(不省人事)하는지라, 춘운이 소저의 기절함을 보고 급히 나가 어사또께 고하기를,
“우리 소저 어사또님 오셨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기절하였나이다.”
하매, 어사 황망히 버선발로 뛰어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과연 기색(棄色)하였는지라. 급급히 서리를 불러 약을 드리라 하여 소저를 먹이고, 일변 방에 불을 덥게 때라 하며 앉았더니, 한참 만에 소저 정신을 차리는지라.
어사 낭자에 용모를 바라보니 이별한 지 일 년이 못되었으나, 어두운 두지 속에서 일월을 보지 못하여 꽃 같던 용모가 변하여 수척하여 졌는지라. 어사가 사례(謝禮)하며 이르기를,
“낭자로 하여금 이 같은 액(厄)을 당하게 함은 도시 생(生)의 과실(過失)이니, 조금도 괘념(掛念)치 마옵소서.”
하니, 낭자 다만 울기만 하거늘, 어사 이르기를,
“낭자 이같이 울기만 함은 소생을 원망하며 어서 가라 하심이니, 어찌 앉아 있기를 바라리오.”
하니, 낭자 마지못하여 염용(斂容)하며 답하기를,
“이는 도시 첩에 팔자 기박하여 이리 되었사오니,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한하오리까?”
하며 말할 즈음에, 서리 들어와 고하기를,
“나주성 밖에 사는 여인이 아기를 데리고 와서 문밖에 대령하였나이다.”
하거늘, 어사 대희하여 아이를 받아들이라 하니, 서리 여인을 데리고 들어오매 여인이 아기를 드리거늘, 어사가 바다 낭자를 주며 이르기를,
“낭자는 어서 아이 젖을 먹이라.”
하니, 낭자 받아 안고 정신없이 울다가 이르기를,
“너는 어찌 살아나서 어미를 다시 찾아 왔느냐.”
하며, 아이를 어루만지고 눈물이 앞을 가리거늘 어사 위로하며 지난 일을 일일이 말할새, 낭자를 이별하고 고생하던 말이며, 한양으로 들어가서 과거 보던 말이며, 진낭자에게 장가가던 말이며, 어사로 전라도에 순행하다가 아이 찾던 말이며, 급히 와서 낭자를 구하던 사연을 이르니, 낭자 또한 지난 사연을 대강 고하니, 어사 더욱 대노하여 고씨를 당장 죽이고자 하거늘, 낭자 아미를 숙이고 고하기를,
“고씨 제죄(諸罪)는 죽여 마땅하오나 부친으로 십여 년 동거할 뿐 아니오라, 아들을 삼형제나 낳은 즉, 첩의 모친이라. 자식 되어 부모를 죽이면 후토(後土)에 가서라도 어찌 대면을 하오리까? 이는 반드시 첩에 팔자오니 명철하신 사또는 활인지덕을 베푸사 이 아이로 장수케 하옵소서. 불연(不然) 즉, 첩을 대신 죽여 후세라도 자식이 부모를 죽였다는 말을 없게 하옵소서.”
어사 낭자를 칭찬하고 외당(外堂)에 나와, 다시 고씨를 불러 분부하기를,
“너를 죽여 훗사람을 징계하고자 하였더니, 소저의 효성을 보와 죄를 사(赦)하고 살리나니, 일후(日後)에는 그러한 악독한 마음을 먹지 말고 회과(悔過) 자책(自責)하여 부녀의 덕을 삼가, 어진 부인이 되어 친족 향리(鄕里)에 칭찬 듣기를 바라노라.”
하고, 물러 보내니, 고씨 잔명을 보전하매, 소저의 성덕(成德)과 어사에 은혜를 감축(感祝)히 여겨 전일을 뉘우치더라.
이때 어사 찰방을 찾아 들이라 하나 찰방에 간 곳을 알지 못하더니, 노복이 문득 보매 부엌 나뭇단이 흔들리거늘 들어본 즉, 찰방이 정신없이 나뭇단 속에서 들었거늘, 나가 어사또에게 이 연유를 고하니, 어사 웃으며 서리를 보내어 청하니, 찰방이 그제야 사위가 어사된 줄을 알고 대경대희하나, 나와서 어사를 볼 낯이 없는지라. 무류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서리 편에 전갈하되,
‘고씨를 죽여야 나가 대면하리라.’
하니, 어사 대소(大笑)하며 서리더러 이르기를,
“소저의 효성으로 고씨를 용서하였으니 허물치 마옵시라.”
하고, 모셔오라 하니,
서리 들어가서 어사에 말씀을 고하고 청하니, 찰방이 무안하나 어찌할 수 없어 서리를 따라 나와 어사를 보고 사죄하며 이르기를,
“노부(老父) 지식이 없어 가변(家變)을 자취(自取)하여 천륜을 끊게 되었거늘, 어사에 명감(明鑑)으로 가변을 정돈하고 옥석을 구별하여 주니 부끄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노라.”
하거늘, 어사 답하기를,
“이는 악장(岳丈)에 하신 바 아니요, 가운(家運)일 뿐더러 낭자에 운수이오니, 누구를 원한(怨恨)하오리까.”
하더라.
이때 찰방이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고씨 죽여 분을 풀리라 하며 노기등등하거늘, 어사 난처하여 찰방을 만단(萬端)으로 위로하되 듣지 아니하거늘, 어사 어찌할 수 없어 이르기를,
“실로 그러하실진대 여서(女壻)가 고금도에 가서 원수를 갚고 돌아오는 길에 고씨를 죽일 것이니, 그리 아시고 악장은 금일이라도 거마(車馬)를 차려 낭자를 데리시고 한양으로 올라가소서.”
하니, 찰방이 허락하거늘, 어사 우양(牛羊)을 많이 잡아 대연을 배설하고, 동리 제인을 모아 즐긴 후, 찰방이 소저와 춘운을 데리고 한양 성내로 올라갈새, 보는 사람이 칭찬 아니하는 이 없더라.
이때 어사또 찰방을 서울로 보낸 후에 다시 고씨를 불러 이르기를,
“내 그대를 죽여서 찰방에 원한을 풀 것이로되, 그대에 어린 자식을 생각하고 소저에 효성을 감동하여 용서하거니와, 후일에는 조심하라.”
하고, 고씨의 자식들을 불러 당부하되,
“너희는 모친을 모시고 남은 전답으로 근농(勤農)하여 지내라.”
순순히 부탁하고 노복에 금낭을 잡아드려 계하에 꿇리고, 꾸짖어 이르기를,
“너는 재물만 탐하여 살인하기를 좋아하니, 너 같은 무도한 놈이야 천하에 어디 있으리오. 죽는 것을 한하지 말라.”
하시고, 때려죽이니 다른 노복들이 혼비백산하여 어찌 할 줄을 모르더라. 또 낙엽 긁던 노인을 불러 이르기를,
“노인은 실로 정직(正直) 군자라. 위로하고자 청하였노라.”
하니, 노인이 복지(伏地) 주하기를,
“천한 나이 칠십이라. 노망(老妄)하와 어사또를 알지 못하옵고 망령되이 말씀하였사오니, 그 죄를 용서하옵소서.”
하거늘, 어사 이르기를,
“여러 말을 하지 말라. 내 어찌 그를 허물하리오.”
하고, 주찬(酒饌)을 드려 후히 대접하여 보내고, 또 아이 데려온 여인을 불러 이르기를,
“그대는 죽을 인명을 살렸으니 그 은혜가 적지 아니하도다.”
하고 황금 백 냥과 백목(白木) 오십 필을 상사(償賜)하여 보내신 후, 즉시 서리에게 분부하시되,
“건장한 역졸 백여 명을 택하여 고금도에 들어가서 흠탐의 집 남녀노소를 낱낱이 결박하여 대령하라.”
하시고, 어사또 고금도로 향할 제, 한 주막에 들어 밤을 지낼새, 몸이 곤하여 잠이 들었으니, 비몽사몽간에 곡성(哭聲)이 낭자(狼藉)하며 한 사람이 앞에 와서 뵈거늘, 어사 바라보니 소년 계집이 남복(男服)을 입고 여쭈되,
“첩은 낭군에 대신으로 죽어 원혼이 되었사오니, 첩에 사정을 굽어 살피옵소서. 첩의 제족(諸族)은 다 죽일지라도 첩의 부모는 잔명을 살려 주옵시기를 바라나이다.”
하고, 인하여 간 데 없거늘, 놀라 깨어나니 침상일몽이라. 어사 일어나 앉아 생각하되,
‘이는 낭자가 나를 살리려고 남복을 입고, 내 대신 죽어 내 종적을 감추었도다. 내 어찌 낭자에 고혼(孤魂)을 위로하여 그 말을 듣지 아니 하리오.’
하고, 이튿날 평명(平明)에 고금도에 당도하니, 역졸들이 죄인을 다 잡아 등대(等待)하였거늘, 어사 분부 이르기를,
“너희 등이 서울 사시던 신승상 댁을 아느냐?”
흠탐이 답하기를
“해도(海島) 중에 있는 우맹(愚氓)이 어찌 아오리까?”
하거늘, 어사 이르기를,
“그러하면 연전(年前)에 너의 사위를 죽인 일이 있느냐?”
하시니, 흠탐이 답하기를,
“사람이 어찌 제 사위를 죽이오리까? 이는 백백 무죄 하옵나이다.”
하거늘, 어사 대노하여 이르기를,
“신승상에 아들 신계후가 연전에 너의 사위가 되었다가, 죽이려 함을 알고 도망한 계후가 오늘 어사로 나려온 신계후, 나를 아느냐?”
하며, 호령이 추상 같으니, 흠탐이 혼비백산하여 살지 못할 줄 알고 자백하기를,
“소인이 죽을 혼이 들어 큰 죄를 지었으니, 당장에 죽여주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며, 다시 말을 못하고 다만 고개만 수그리고 있는지라.
어사 대질하기를,
“너에 죄를 생각하면 당장 죽일 것이로되, 너의 여식을 생각하여 십분 용서하여 살리나니 그리 알라.”
하시니, 흠탐이 고두사례(叩頭謝禮)하며 쥐 숨듯 도망하거늘, 어사 분부하여 그 남은 죄인은 죄지경중(罪之輕重)을 따라서 처결하니라.
어사 그날 밤에 고금도에서 숙소를 정하였더니, 비몽(非夢) 간에 낭자 울며 어사 전에 들어와 사례하며 이르기를,
“첩을 생각하시와 부모를 살려 주시니 은덕이 하해 같사오나, 다만 바라는 바는 첩에 신체를 가죽부대에 넣어서 이 앞바다에 던진 것이 바위틈에 끼어 지금까지 있사오니, 잠시라도 부부 되었던 정리(情理)를 생각하시와 건져 육지에나 묻어 주옵시면, 죽은 고혼(孤魂)이라도 황천에서 다시 만나 그리던 정회(情懷)를 풀고 은덕을 만분지일이라도 갑사오리다.”
하며, 연연(戀戀)히 일어나며 눈물을 흘리고 나가거늘, 어사 놀라 깨어나니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 낭자는 간 데 없고 말소리만 귀에 쟁쟁(錚錚)하며, 형용만 눈에 암(暗)암(暗)하여 비창(悲愴)한 언사(言辭)가 가슴에 사무치니, 심사 산란하여 수색(愁色)을 띄우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서리를 불러 분부하되,
“잠수부를 불러 이 앞바다 바위틈에 가죽부대를 건지라.”
하였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부대를 건져 바치거늘, 어사 열고 보니 낭자에 신체가 산 사람과 일반이라. 어사 비창함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며 관곽(棺槨)을 갖추어 향양지지(向陽之地)에 길일(吉日)을 택하여 안장(安葬)하고, 황금 오백 냥을 동중(洞中)에 부쳐서 일 년 일 차로 향화(香火)를 받들며 금화(禁火) 금초(禁草)를 하게 하였더니, 그날 밤에 낭자 녹의홍상(綠衣紅裳)으로 들어와 재배하고 이르기를,
“낭군에 은덕으로 수중의 고혼이 세상에 나와, 혼백이 편안한 중 연년(年年)이 향화를 받게 되었사오니, 낭군은 내내 부귀영화 하옵시고 자손이 만당(滿堂)하옵다가, 후세에 다시 만나 부부되어 이 세상에 그리던 원한을 풀고, 오늘 낭군에 은덕을 만분지일이라도 갚을까 하나이다.”
하고, 은연히 가거늘, 놀라 깨어나니 역시 일몽이라. 낭자에 맑은 영혼을 탄복하고, 인하여 길을 떠나 각 읍을 순행하여 염탐하여 선불선(善不善)을 각별히 살피더라.
이때 권찰방은 소저와 춘운을 데리고 한양에 득달(得達)하여 진해운에 집에 다다르니, 해운이 마자 찰방은 외당에 거하게 하고 권낭자는 내당에 모시고 진소저와 상면(相面)케 하니, 낭자 진소저의 용모를 한 번 바라보매, 태도 요요정정하여 어진 마음이 가슴에 가득하여 보이는지라. 진소저에 손을 잡고 이르기를,
“우리 가군이 일시 곤궁하였더니, 그대에 구제함을 입어 영귀하게 되었으니, 그대에 맑은 덕은 이로 측량치 못하리로다.”
진낭자 아미를 숙이고 공순히 대답하기를
“소첩은 천인에 자식이라. 금수(禽獸)가 봉황(鳳凰)에 참예(參預)하와 낭자의 사랑하심을 입사오니, 소첩은 하늘에 오른 듯 싶거늘, 어찌 칭찬을 듣사오리까. 도리어 마음이 무류하도소이다.”
하거늘, 권낭자 이 뒤로부터 진낭자의 지인지감과 덕행이 있음을 못내 탄복하더라.
진해운이 이날부터 권찰방과 낭자를 지성으로 봉양하고 진낭자도 주야로 낭자에 곁을 떠나지 아니하매 양인(兩人)에 정의(情誼)가 비할 데 없는 중, 낭자 자연 마음이 편안하매 점점 태도가 요요하고 골격이 표표(表表)하여지매 세상에 무쌍(無雙)이라. 해운이 권낭자의 온공(溫公) 화려함을 날로 칭찬하더라.
이적에 어사 각 읍을 엄찰(嚴察)하고 백성을 애휼(愛恤)하니, 일년지간(一年之間)에 명망이 사해에 진동하여 거리거리 선정비(善政碑)라. 전라도 오십육 관을 저저(這這) 순찰(巡察)하고 서울로 올라와 탑전(榻前)에 숙배(肅拜)하오니, 상이 대희 칭찬하기를,
“경으로 중임을 맡겼더니, 한번 순찰하매 만민의 호원지통(呼冤之痛)이 없게 하고 과인의 마음을 편안케 하니, 이는 국가의 흥복(興福)이라.”
하시거늘, 어사 주하기를,
“도시 전하의 성덕이옵거늘, 어찌 신에 미련한 생각으로 민정(民情)을 살피오리까?”
하고, 물러나와 진해운의 집에 이르니, 찰방과 해운이 맞아 서로 반기며 무사히 다녀옴을 치하하더라. 어사 내당으로 들어가니 두 낭자 반기며 나와 맞거늘, 어사 눈을 들어 권낭자를 바라보니, 새로 아름다운 태도 요요정정하여 세상에 쌍이 없고, 진낭자를 바라보니 화용월태 당시에 독보(獨步)러라. 어사 반가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두 낭자에 손을 잡고 이르기를,
“내 원로(遠路)에 있어 의합(意合)지 못할까 하였더니, 이같이 화목한 기상을 보니, 이는 나의 집 큰 복이라.”
하며, 아이를 자세히 보니 영웅의 기상이라. 부모를 생각하고 슬퍼하매, 권낭자 역시 자기가 지낸 일을 생각하고 슬퍼하더니, 부부 서로 의논하여 아이 이름을 고행이라 하더라.
이 적에 성상이 특별히 신계후로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제수하시니, 참판이 탑전에 들어가 천은을 축수하고 물러나와, 큰 집을 배설하고 각기 처소를 정할새, 충실각에는 권낭자가 노파 춘운을 데리고 있게 하고, 활인각에는 진낭자가 있게 한 연후에, 진해운으로 가사를 맡기고,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도웁고 정사를 힘쓰니 조정에 일이 없고 백성이 편안하더라.
일일은 탑전에 들어갔다가 한가함으로 전후 고생하던 일을 낱낱이 주달할 새, 고금도에 일이며, 권낭자가 죽게 되었던 일이며, 진낭자의 구하던 일을 아뢰니, 상이 들으시고 측은히 여기사, 고금도 김낭자는 정렬부인을 봉하시며 열녀문을 세우시고, 권낭자는 충렬부인을 봉하시고, 진낭자는 숙인(淑人)을 봉하시며, 신계후로 이조판서를 제수하시니,
판서 탑전에 사은한 후 장인 권형의 사연(事緣)을 주달(奏達)하니, 상이 또한 권형으로 황주 목사를 제수하시거늘, 권형이 또한 탑전에 들어가 천은을 숙배하고, 물러나와 대연을 배설하고 일문이 즐긴 후, 권형은 치행을 차려 황주로 도임하고, 판서는 일변 사람을 고금도로 보내어 김낭자 분묘에 비석을 새겨 세우되, ‘만고 열녀 부인 김씨지묘’라 하였더라.
가는 세월이 물결 흐르듯 하여 고행에 나이 십오 세라. 위인이 총명(聰明)영오(英悟)하여 문장과 명필이 당시에 독보되매, 판서 날로 사랑하여 어진 낭자를 널리 구하더니, 이때 진승상이 있어 남자는 없고 일녀를 두었으되 나이 십팔 세라. 인물과 재덕이 당시에 무쌍이라. 승상이 부부 매일 사랑하시며 저와 같은 배필을 널리 구하더니, 마침 신판서 집에서 매파를 보내어 구혼(求婚)하거늘, 승상이 대희하여 즉시 허혼(許婚)하여 보내니 신판서 대희하여 길일을 택하니, 삼월 십오일이라. 길일을 당하매 고행이 금관(金冠)옥대(玉帶)에 청사(靑紗)관복(官服)을 입고 금안(金鞍)준마(駿馬) 상(上)에 높이 앉았으니, 선풍도골이요 영웅호걸이라.
승상 댁에 다다르니 백목(白木) 차일(遮日)을 높이 쳐서 반공(半空)에 솟아 있고, 대소 병풍을 둘러치고 포진(鋪陳) 범절(凡節)이 일광을 가리었더라. 신랑이 교배석(交拜席)에 들어가니, 승상이 소저의 단장(丹粧)을 재촉하여 나올 새, 추팔월 밝은 달이 산 뒤에 반만 비치는 듯, 모란화 아침 이슬을 머금은 듯하더라. 교배석에서 신랑 신부가 서로 교배(交拜)하고 섰는 태도 짐짓 요조숙녀(窈窕淑女)요 군자호구(君子好逑)러라.
관광(觀光) 제인(諸人) 모두 보고 이 천정연분(天定緣分)이라고 무수히 칭찬하더니, 어느덧 황혼이 되매 동방화촉에 신랑 신부 일야를 지내고, 날이 밝으매 승상께 문후(問候)하고, 집에 돌아와서 부모께 보이니, 판서 부부 더욱 사랑하시더라.
이때 성상께옵서 계후로 좌승상을 배(拜)하시고 겸하여 태평과(太平科)를 뵈일 새 고행이 장원급제 하였더니, 일 년이 못되어 나주목사를 하였다가 전라감사로 승차하여 도처에 만인산(萬人傘)을 받았더라.
진씨 또한 일남 일녀를 두었더니, 승상이 우연 득병하여 세상을 바리시니 향년이 칠십오 세러라. 감사 형제 효성으로 선산에 안장하고 삼년 초토(草土)를 지낸 후, 연하여 권씨 진씨 기세하시니 또한 선산에 안장하니라.
세월이 여류하여 고행의 벼슬은 우승상에 이르고, 천행의 벼슬은 보국(保國)에 이르러는 대승상은 삼남 일녀를 두어, 다 명문거족에 혼인하여 개개(箇箇) 급제에 유자(有子) 생녀(生女)하고, 보국은 일자 이녀를 두어 또한 권문세가(權門勢家)에 혼인하고 급제하여 복록이 비할 데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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