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문전(玄壽文傳)
경판 파리동양어학교본
현수문전 권지상(券之上)
대송(大宋) 신종(神宗) 연간(年間)에 이부시랑(吏部侍郎) 현택지는 태학사(太學士) 현광의 손(孫)이요, 우승상(右丞相) 현범의 아들이라. 그 부인 장씨(張氏)는 병마대도독(兵馬大都督) 장기의 여(女)이니, 공(公)의 위인(爲人)이 관후대덕(寬厚大德)하고, 부인이 또한 인자(仁慈)한 숙녀(淑女)로 부부가 화락(和樂)하며 가산(家産)은 유여(有餘)하되,
연기(年紀) 사십에 슬하(膝下)에 남녀간(男女間) 재미를 보지 못하여 만사에 뜻이 없고, 벼슬을 귀히 여기지 아니하며, 명산(名山) 대찰(大刹)을 찾아 정성을 무수히 들이며, 혹 불쌍한 사람을 보면 재물을 주어 구제(救濟)한 일이 많되, 마침내 효험(效驗)이 없음으로, 부부가 매양 슬퍼 탄(嘆)하며 이르기를,
“우리 무슨 죄악(罪惡)으로 일점(一點) 혈식(血息)을 두지 못하여, 후사(後嗣)를 끊게 되었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오.”
하며, 술을 내와 마시며 심사를 정(定)하지 못하더니,
홀연, 노승(老僧)이 문전(門前)에 이르러 시주(施主)하라 하거늘, 시랑(侍郞)이 본디 시주하기를 좋아하는 고로, 즉시 불러 보니, 그 중이 합장(合掌) 배례(拜禮)하며 이르기를,
“소승(小僧)은 천축국 대성사 화주(化主)이옵더니, 절을 중수(重修)하오매 재물이 부족하기로 상공(上公)께 적선(積善)하심을 바라오니, 천 리에 허행(虛行)을 면하게 하소서.”
하거늘, 시랑이 웃으며 이르기를,
“존사(尊師)가 부처를 위하여 이에 이르렀거늘, 내 어찌 마음에 감동치 아니하리오. 존사에 정성을 표하리라.”
하고 채단(綵緞) 백 필(疋)과 은자(銀子) 일천 냥을 권선문(勸善文)에 기록하고, 즉시 내어 주며 이르기를,
“이것이 비록 적으나 정성을 발원(發願)함이니 존사는 허물치 말라.”
그 중이 백배(百拜) 사례하며 이르기를,
“소승이 시주하심을 많이 보았으되, 상공 같으신 이를 보지 못하였거니와, 다 각기 소원을 기록하여 불전(佛殿)에 축원(祝願)하옵나니, 상공은 무슨 소원을 기록하여 주옵시면 그대로 하오리이다.”
시랑이 탄하며 이르기를,
“약간 재물을 시주하고 어찌 소원을 바라리오만은, 나의 팔자가 사나워 후사를 전할 곳이 없으니, 병신(病身) 자식이라도 있으면 막대한 죄명(罪名)을 면하고자 하나, 어찌 바라리오.”
노승 이르기를,
“상공의 소원대로 하리이다.”
하고 하직하고 가거늘, 시랑이 내당(內堂)에 들어가 노승의 수말(首末)을 이르고 서로 위로하더니, 차년(此年) 추(秋)에 부인이 태기(胎氣) 있으매 시랑이 대희(大喜)하여 십 삭(朔)을 기다리더니,
일일은 상서(祥瑞)의 구름이 집을 두르고 부인이 일개(一個) 옥동(玉童)을 생(生)하니, 시랑 부부가 불승(不勝) 환열(歡悅)하여 이름을 수문(壽文)이라 하고 장중보옥(掌中寶玉) 같이 사랑하니 친척(親戚)과 노복(奴僕)들이 즐겨 하더라.
수문이 점점 자라 오 세에 이르매, 총명(聰明) 영매(英邁)하여 모를 것이 없고 글을 읽으매 칠서(七書)를 능통(能通)하며 손오(孫吳) 병서(兵書)와 육도삼략(六韜三略)을 좋아하고, 혹 산에 올라 말 달리기와 활쏘기를 익히니, 부모가 좋아하지 아니하나, 더욱 기뻐함을 마지아니하니 수문이 비록 오 세 소아이나, 숙성(熟成)함이 큰 사람에 가깝더라.
차시 황숙(皇叔) 연평왕이 불의지심(不意之心)을 두어, 우사장군(右司將軍) 장흡 등으로 반역(叛逆)을 꾀하다가 발각함이 되매, 연평왕을 사사(賜死)하시고 기자(其子)를 원찬(遠竄)하시며, 여당(餘黨)을 잡아 처참(處斬)하실새, 이부시랑 현택지 또한 역률(逆律)의 연좌(連坐)를 면치 못하매 시랑을 나문(拿問)하실새, 시랑이 불의지화(不意之禍)를 당하여 고두(叩頭) 읍(泣)하며 이르기를,
“신(臣)의 집이 칠대(七代)로부터 국은(國恩)을 입사오매, 신 또한 벼슬이 이부시랑에 참여(參與)하오니 외람(猥濫)하옴이 있사오나, 동동촉촉(洞洞燭燭)하여 국은을 저버리지 아니하옵고, 신의 가산(家産)이 자연 도주(陶朱) 의돈(猗頓)의 재물만 못지아니하여, 일신의 너무 다복(多福)함을 조심하옵거늘, 어찌 역모(逆謀)에 투입(投入)하여 집을 보전(保全)치 아니하오리까. 복망(伏望) 성상(聖上)은 신의 사정을 살피사 칠대 군신지의(君臣之議)를 하념(下念)하옵소서.”
상이 가로되,
“경(卿)의 집일은 짐이 아는 바이라. 특별히 물시(勿施)하나니, 경은 안심하라.”
도어사(都御史) 정학이 주(奏)하기를,
“현택지 비록 애매(曖昧)하오나 죄명(罪名)이 있사오니, 마땅히 관작(官爵)을 삭(削)하옵고, 원찬하옴이 좋을까 하나이다.”
상이 마지못하여 무량도로 정배(定配)하라 하시니, 차시(此時) 금오관(金吾官)이 급히 몰아 길을 떠날새, 집에 가지 못하고 바로 배소(配所)로 향하니 부인과 아자(兒子)를 보지 못하고 아득한 심사를 진정하지 못하여, 한 곳에 다다르니 층암절벽(層巖絶壁)은 하늘에 닿았고 풍랑(風浪)이 대작(大作)하여 서로 언어를 알지 못하더라.
시랑이 더욱 슬퍼하며 무량에 이르니 악풍(惡風) 토질(土疾)이 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견디기 어려우나, 소무(蘇武)의 절개(節槪)를 효칙(效則)하여 마음을 온전(穩全)하게 하니, 그 충의(忠義)를 가히 알리러라.
차시(此時) 장부인(張夫人)이 이 소식을 듣고 망극하여, 아자 수문을 데리고 주야로 슬퍼하니, 수문이 모친을 위로하여 이르기를,
“소자가 있사오니 너무 과도히 슬퍼 마소서.”
하며 궁마지재(弓馬之才)를 익히니, 부인이 그 재조를 일컬으며 날과 달을 보내나 시랑의 일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눈물이 나상(羅裳)의 이음차니 어찌 참연(慘然)치 아니하리오.
각설, 운남왕(雲南王)이 반(叛)하여 중원(中原)을 침범하니, 동군(東郡)태수(太守)가 급히 상달(上達)하온대, 상이 대경(大驚)하사 대사도(大司徒) 유원충으로 대원수(大元帥)를 내리시고, 표기장군(驃騎將軍) 이말로 선봉을 내리시며 영주(永州) 도독(都督) 한희로 운량관(運糧官)을 내리시고, 청주(靑州) 병마도위(兵馬都尉) 조광본으로 후군도총사(後軍都總司)를 삼아,
정병(精兵) 이십만, 철기(鐵騎) 십만을 조발(調發)하여 반적(叛賊)을 치라 하시니, 유원충이 대군(大軍)을 휘동(麾動)하여 금릉에 다다르매, 운남(雲南) 선봉장(先鋒將) 곽자희 십육 주(州)를 쳐 항복받고 금릉을 취하니,
차시(此時) 장부인이 시랑이 적소에 감으로 아자 수문을 데리고 금릉 땅에 내려와 살더니, 불의(不意)에 난을 당하매 대경실색(大驚失色)하여 수문을 데리고 황축산에 피난할새, 중로(中路)에서 도적을 만나매, 부인이 황황(遑遑) 망조(亡兆)하여 닫더니, 도적이 수문의 상모(相貌)가 비범(非凡)함을 보고 놀라 이르되,
“이 아이가 타일(他日)에 반드시 귀히 되리로다.”
하고 데리고 가니, 장부인이 대경(大驚) 망극하여 통곡하다가 혼절(昏絶)하니, 시비 채섬이 공자(公子)의 생사를 알지 못하고 통곡하다가 부인을 구호(救護)하여 향할 바를 알지 못하더니, 이윽고 도적이 물러가거늘, 부인이 채섬을 붙들고 집에 찾아오니라.
차시 적장(敵將)이 금릉을 쳐 얻고 송진(宋陣)을 대하매, 벽하(碧河)를 사이의 두어 진(陣)치고 대질(大叱)하기를,
“우리 운남왕이 송황제(宋皇帝)와 더불어 골육지친(骨肉之親)이라. 연평왕을 죽이고, 그 세자(世子)를 안치(按治)하니 불인(不仁)함이 이러하고, 황친(皇親) 국족(國族)을 일률(一律)로 죽이니 어찌 차마 할 바이리오. 너의 천자가 만일 마음을 고치지 아니하면 당당히 송국(宋國)을 무찔러, 무도(無道)한 송제(宋帝)를 없이 하고, 우리 대왕으로 천자를 삼고자 하나니, 너희들도 천시(天時)를 짐작하거든 빨리 항복하여 잔명(殘命)을 보존(保存)하라.”
유원충이 대노하여 꾸짖기를,
“이 무지(無知)한 오랑캐. 감히 천위(天位)를 역(逆)하여 천하에 용납하지 못할 역적이 되매 천벌을 어찌 면하리오. 나의 칼이 사정(私情)이 없나니, 빨리 나와 칼을 받으라.”
하고 백설(白雪) 부운총(浮雲鏦)을 몰아 내달으니, 적진 중에서 한 장사가 맞아 나오매, 이는 운남왕의 제이자(第二子) 조승이라. 삼척(三尺) 양인도(兩刃刀)를 들고 대호(大呼)하기를,
“우리 구태여 천자를 범(犯)함이 아니라. 송제(宋帝) 전일 허물을 고치지 아니함은, 여등(汝等)이 간(諫)하지 아니함이요, 간신(奸臣)을 가까이 하고 현신(賢臣)을 멀리함은, 여등이 모역(謀逆)할 의사를 둠이니 부끄럽지 아니하여 어찌 나를 대적(對敵)하고자 하느뇨.”
송진 중에서 차언(此言)을 듣고 참색(慙色)이 만면(滿面)하여 싸울 마음이 없더니, 부장(副將) 적의 분기(憤氣)에 대발(大發)하여 바로 조승을 취하니, 조승이 대노하여 교봉(交鋒) 사십여 합(合)에 승부를 결(結)치 못하더니, 조승이 문득 말혁(革)을 잡고 이르기를,
“종시(終是) 내 말을 듣지 아니하니, 후일 뉘우침이 있으나, 믿지 못하리로다.”
하고 말을 돌리어 본진(本陣)으로 가거늘, 송진 장졸(將卒)이 대적하지 못하더니, 문득 적진 중에 일원(一員) 대장이 출마(出馬) 대호하기를,
“송장(宋將)은 닫지 말고 내 말을 들으라.”
모두 보니 이는 산양인(山陽人) 범영이라. 본디 적의로 더불어 동문(同門)수학(修學)한지라. 적의 경문(警問)하며 이르기를,
“현제(賢弟) 어찌 이곳에 참례(參禮)하였느뇨?”
범영이 체읍(涕泣)하며 이르기를,
“이제 송제 실덕(失德) 무도(無道)하여 제후(諸侯)를 공경하지 아니하고, 재물을 탐하여 선배(先輩)를 대접(待接)하지 아니하니, 어찌 임금의 정사(政事)라 하리오. 우리 운남왕은 송실지친(宋室之親)이라. 일찍 그른 일이 없고 인자(仁慈) 공검(恭儉)함으로 천자가 구하는 재보(財寶) 미녀(美女)를 보내지 않은 바가 없으며, 표(表)를 올려 간(諫)함이 한두 번이 아니로되, 심지어 사자(使者)를 참(斬)하고 듣지 아니하기로, 마지못하여 이신벌군(以臣伐君)하니 그대는 천자가 개과(改過)하심을 간(諫)하라.”
하고 소매로 부터 일봉(一封) 표(表)를 내어 주며 이르기를,
“이 표를 천자께 드려 허물을 아르시게 하라.”
하고 회군(回軍)하여 가거늘, 적의 본진에 돌아와 원수께 표를 들이고, 범영의 말을 이르니 유원충이 청파(聽罷)의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을 내지 아니하더니, 문득 군을 거두어 본국의 돌아와 천자께 표를 올렸더니, 상이 그릇하심을 깨달으사 제국(帝國)의 조서(詔書)를 내리 오시니 운남국이 안병(按兵) 부동(不動)하더라.
각설. 장부인이 수문을 잃고 집에 돌아오매, 도적이 와 세간을 노략(擄掠)하여 가고 집이 비었거늘, 부인이 더욱 망극하여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더니, 정신을 차려 채섬을 붙들고 이르기를,
“나의 팔자가 기구하여 상공께오서는 적소(謫所)에 계시고, 공자(公子)는 난중(亂中)에 잃고 집에 돌아오매, 가중지물(家中之物)이 없었으니 죽을 줄 알거니와 무량도를 찾아 상공을 만나보고 죽으리라.”
하고 채섬을 데리고 서천 무량으로 향하니라.
재설(再說), 수문이 도적에게 잡히어 진주(晉州)에 있더니, 그 도적이 회군(回軍)하여 본국으로 가매, 수문을 구계산 하(下)에 버리고 가며,
“나중에 너를 데려감이 좋으나 군중(軍中)에 무익(無益)하므로, 이곳에 두고 가느니 너는 무사히 있으라.”
하고 가거늘, 수문이 이르기를,
“갈 바를 알지 못하여 모친의 종적을 찾되, 어찌 알리오?”
여러 날 먹지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며 사면(四面)으로 다니다가, 날이 저물매 수풀 속에 들어 밤을 지내더니, 홀연 노인이 곁에서 불러 이르기를,
“너는 어린 아이로 어찌 이곳의 누워 슬피 우느냐? 나와 함께 있음이 어떠하뇨?”
하고 소매로부터 실과(實果)를 내어 주거늘, 수문이 받아먹으며 재배(再拜)하며 이르기를,
“대인(大人)은 뉘시기에 여러 날 주린 아이를 구제하시니, 은혜 망극하거니와 또한 양육(養育)하심을 이르시니, 난중에 잃은 모친을 맞는 듯 반갑기 측량(測量) 없도소이다.”
노인이 웃고 이르기를,
“네 모친이 무사히 있으니 너는 염려 말라.”
하고, 함께 돌아오니 수간(數間) 초옥(草屋)이 단정히 있고, 학의 소리가 들리더라. 노인이 수문을 데려온 이후로 심히 사랑하며 단저를 내어 곡조를 가르치니, 오래지 아니하여 온갖 곡조를 통하니 노인이 즐겨 이르기를,
“네 재조를 보니 족히 큰 사람에 이를지라. 매양 태평한 때가 없으리니, 네 이것을 숭상(崇尙)하라.”
하고 일권(一券) 책(冊)과 일척(一尺) 검(劍)을 주거늘, 수문이 받아 보니, 그 칼에 서기(瑞氣) 엉기었고, 그 책은 전에 보던 책 같으나 병서에 모를 대문(大文)이 있더라.
수문이 낮이면 병서를 공부하고, 밤이면 칼 쓰기를 좋아하니, 무정한 세월에 노인의 애휼(愛恤)함을 힘입어 일신(一身)은 안한(安閑)하나, 엄친(嚴親)은 적소(謫所)에 계심을 짐작하고, 모친은 난중에 실산(失散)하여 존망(存亡)을 알지 못하니, 설움을 견디지 못하여 눈물이 흐름을 억제(抑制)치 못하나, 마음이 강잉(强仍)하여 요행 만나뵈옴을 축원하더라.
일일은 노옹(老翁)이 수문을 불러 이르기를,
“내 너를 데려온 지 어느덧 아홉 해라. 함께 있을 인연(因緣)이 진(盡)하였으니, 오늘 이별을 면치 못하려니와, 장부(丈夫)의 사업(事業)을 잃지 말라.”
수문이 이 말을 듣고 악연(愕然)하여 이르기를,
“대인이 소자를 사랑하심이 과도(過度)하사, 배운 일이 많사와 망극한 은혜를 잊지 못하더니, 이제 떠남을 이르시니 향할 바를 알지 못하오매, 어느 날 대인 은덕을 보은(報恩)하옴을 원하나이다.”
노인이 수문의 말을 듣고 자닝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르기를,
“나는 일광대사요, 이 산 이름은 남악(南岳) 화산(華山)이라. 벌써 너를 위하여 이곳에 있더니, 네 이제 재조가 비상함을 보매 실로 염려는 없는지라. 그러나 오는 액화(厄禍)를 피하지 못하리니, 만일 위태함이 있거든 이를 떼어 보라.”
하고, 즉시 세 봉(封) 글을 주거늘, 수문이 받아보니 그 속은 알지 못하나 겉봉에 제차(第次)를 썼더라. 드디어 하직할새 눈물을 흘리고 백배(百拜) 사례하며 모친의 말을 묻고자 하더니, 문득 간 곳이 없는지라. 수문이 크게 놀라 공중에 하직하고 길을 당하니, 그 향할 바를 알지 못하여 추창(惆愴)한 거동(擧動)이 비할 데 없더라.
각설(却說), 현시랑(玄侍郞)이 적소에 가 겨우 수간 초옥을 얻어 머물매, 수하(手下)에 아무 시자(侍者)도 없고 해중(海中)독기(毒氣)의 견디지 못함은 이르기도 말고, 적막한 산중에 한서(寒暑)를 견디며 부인과 아자 수문을 생각하고 주야로 통곡하더니, 일일은 무량도 지키는 군사가 고(告)하되,
“어떤 부인이 찾아와 시랑을 뵈와지라 하더이다.”
하거늘, 시랑이 경아(驚訝)하며 이르기를,
“나는 천자께 득죄(得罪)한 죄인이거늘, 수천 리 원로(遠路)에 어떤 부인이 와 찾으리오.”
하고 군사를 달래어 들여보냄을 이르니, 이윽고 왔거늘 보니 다른 이 아니요, 곧 장부인(張夫人)이라. 어린 듯 아무 말을 이르지 못하더니 서로 붙들고 통곡하며 인사를 차리지 못하더니, 부인이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전후(前後) 수말(首末)을 이르니, 시랑이 앙천(仰天) 탄하며 이르기를,
“나의 팔자가 갈수록 사오나와 칠대(七代)까지 독자(獨子)로 내게 와 후사(後嗣)를 잇지 못하게 되었더니, 하늘이 불쌍히 여기사 늦게야 아들 수문을 얻으매 불효를 면할까 하였더니, 여앙(餘殃)을 면치 못하여 난중(亂中)의 잃으매, 그 생사를 알지 못하고 겸하여 나는 국가의 죄명으로 이처(異處)로 있어 천일(天日)을 보지 못하니, 어느 날 함께 모임을 바라리오.”
말을 마치며 혼절(昏絶)하니, 부인이 만단개유(萬端改諭)하여 시랑을 뫼시고 함께 머무니, 적막함이 대강 없으나 한갖 수문을 생각하고 요행 살았다가 서로 만나 봄을 하늘께 축수(祝手)하더라.
재설(再說), 수문이 대사와 이별하고 정처 없이 다니매, 행중(行中)에 반전(半錢이 없음으로 기갈(飢渴)이 자심(滋甚)하니, 몸이 곤비(困憊)하여 한 반석(盤石) 위에 누어 쉬더니, 문득 잠이 들매 일위 노인이 갈건(葛巾)도복(道服)으로 죽장(竹杖)을 끌고 수문을 깨어 이르기를,
“너는 어떤 아이기에 바위 위에서 잠을 자느냐?”
수문이 놀라 일어나 재배하며 이르기를,
“소자는 난중에 부모를 잃고 정처 없이 다니므로 이곳에 왔나니, 성명은 현수문이로소이다.”
노인이 수문의 상모(相貌)가 비범함을 보고 이르기를,
“네 말을 들으니 심히 비감(悲感)한지라. 제처(諸處)로 다니지 말고 나와 함께 있음이 어떠하뇨?”
수문이 공경하여 답하기를,
“소자는 친척도 없고 빌어먹는 아이라. 대인이 더럽다 아니 하시고 거두어 주시고자 하시니 은혜 망극하도소이다.”
노인이 인하여 수문을 데리고 집에 돌아오니, 원래 이 노인은 성명이 석광위라.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있더니 남의 시비를 피하여 고향에 돌아오매, 부인 조씨(趙氏) 일녀(一女)를 생(生)하니 이름은 운혜요 자는 월궁선이라.
덕행(德行)이 태임(太妊)을 효칙(效則)하여 아름다움이 있으나, 일찍 모친을 여의고 계모 방씨(方氏)를 섬기매 효행이 지극하므로, 석공(石公)이 매양 택서(擇壻)하기를 힘써하더니, 이날 우연히 물가에 노닐다가 수문의 영웅을 알고 데려옴이러라.
석공(石公)이 방씨에게 이르기를,
“내 우연히 아이를 얻으니 천하의 영웅이라. 운혜의 배필을 삼고자 하나니, 수이 택일(擇日)하여 성혼(成婚)하리니 부인은 그리 알으소서.”
방씨 내심에 헤오되,
‘운혜를 매양 시기하더니, 또 저와 같은 쌍을 얻을진대, 내 어찌 견디리오.’
하고 거짓 노색(怒色)을 띠어 이르기를,
“운혜는 여중(女中) 군자(君子)라. 이제 그런 아이를 얻어 사위를 삼으면, 남이 알아도 그 계모가 택서 않음이 나타나오리니, 원상공은 명가(名家) 군자를 가리어 사위를 삼음이 좋을까 하나이다.”
석공이 변색하며 책(責)하기를,
“이 아이 비록 혈혈(孑孑)무의(無依)하나 현시랑의 아자(兒子)이라. 후일 반드시 문호(門戶)를 빛내리니 부인은 다시 이르지 말라.”
하고 즉시 소저(小姐)를 불러 운환(雲鬟)을 어루만지며 이르기를,
“내 너를 위하여 호걸(豪傑)의 사람을 얻었으니 평생 한이 없도다.”
소저가 아미(蛾眉)를 숙이고 부답(不答)하더라.
석공이 방씨를 취(取)한 후, 이녀(二女) 일자(一子)를 생(生)하니, 장녀의 명은 휘혜요, 차녀의 명은 현혜요, 일자가 있으니 이름이 침이라.
공이 매양 치가(治家)함이 엄숙(嚴肅)하므로 가중 사람들이 범사(凡事)를 임의(任意)로 못하더니, 공이 수문을 데려옴으로부터 지극히 사랑하고 대접하며 별당을 정하여 머물게 하고 서책(書冊)을 주어 공부하라 하니, 수문의 문재(文才) 날로 빼어나매 석공이 더욱 사랑하나, 다만 방씨는 수문의 재조를 밉게 여겨 앙앙(怏怏)한 심사를 품었더라.
일일은 석공이 수문을 불러 묻기를,
“네 어려서 부모를 실산(失散)하여 그 근본을 알지 못하거니와, 노부(老夫)가 초취(初娶) 조시(早時)에 일녀(一女)가 있으니 춘광(春光)이 삼오(三五)라. 비록 아름답지 못하나 군자의 배필됨이 욕되지 않으리니, 그윽이 생각하건대 너와 성혼하고자 하나니 알지 못게라. 네 뜻이 어떠하뇨?”
수문이 청파(聽罷)에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여 두 번 절하여 이르기를,
“대인의 위자(慰藉)하심이 이같이 이르시니 황공무지(惶恐無地)하오나 일개(一介) 걸인(乞人)을 거두어 천금(千金) 귀소저(貴小姐)로 배우를 정하고자 하시니, 불감(不敢)함을 이기지 못하리로소이다.”
석공이 웃으며 이르기를,
“이는 하늘이 주신 인연이라. 어찌 다행치 아니하리오.”
하고 즉시 택일(擇日) 성례(成禮)하니 신랑의 늠름(凜凜)한 풍채 사람의 눈을 놀래고, 신부의 요요(姚姚)한 태도가 만좌(滿座)의 황홀하니 짐짓 일쌍(一雙) 가위(可謂)라. 공이 기뻐함을 마지아니하여, 부인 방씨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또 여아가 둘이 있으니, 저 현랑(玄郞)과 같은 사위를 얻으시면 좋으리로소이다.”
부인이 내심에
“저와 같으면 무엇에 쓰리오.”
하고, 다만 점두(點頭) 부답(不答)하더라.
날이 저물매 양인(兩人)이 신방에 나아가니 원앙(鴛鴦) 비취(翡翠) 길들임 같더라.
세월이 여류(如流)하여 여러 춘광이 지내매, 방씨 소생 두 소저도 장성하여 성혼(成婚)하니 장(長)은 통판(通判) 이경의 며느리 되고, 차(次)는 참지정사(參知政事) 진관오의 며느리 되매, 두 서랑(壻郞)의 사람됨이 방탕하여 어진 이를 보면 좋아 아니하고, 아당(阿黨)하는 이를 보면 즐겨하니, 방씨 매양 좋아 아니하여 현생(玄生)의 일을 점점 밉게 여기고, 박대(薄待)할 마음이 날로 간절하나 석공의 치가함을 두려워 행치 못하더라.
석공이 나이 칠십에 이르매 하늘의 정한 수한(壽限)을 어찌 면하리오. 졸연(猝然) 득병(得病)하여 백약이 무효(無效)하니, 스스로 회춘(回春)하지 못할 줄 알고, 부인과 현생(玄生) 부부와 아자(兒子) 침을 불러 좌우에 앉히고, 유체(流涕)하며 이르기를,
“내 이제 죽으나 무슨 한이 있으리오마는, 다만 침아의 성혼함을 보지 못하니 이것이 유한(有恨)이나, 그러나 현서(賢壻) 현생(玄生)의 관후(寬厚) 대덕(大德)을 믿나니 돌아가는 마음이 염려 없거니와, 부인은 모름지기 가사(家事)를 전과 같이 하면 어찌 감격하지 아니 하리오.”
하고, 장녀 운혜를 가까이 앉히고 귀에 대고 이르기를,
“네 모친이 필경(畢竟) 불의지사(不義之事)를 행하리니, 시비(侍婢) 향랑의 말을 듣고 어려운 일을 생각지 말라.”
하고 현생을 돌아보아 소저의 일생을 당부하니, 현생이 눈물을 흘리고 이르기를,
“소서(小壻)가 악장(岳丈)을 뫼시고 길이 있을까 하였더니, 가르치시는 말씀을 듣사오니 어찌 잊음이 있으리까마는, 대인(大人)의 은혜를 갚지 못하왔사오니 어찌 인자(人子)의 도리라 하리까.”
공이 오열(嗚咽) 장탄(長歎)하며 이르기를,
“그대는 영웅이라. 오래지 아니하여 이름이 사해(四海)에 진동하리니, 만일 여아의 용렬(庸劣)함을 생각하지 않으면, 이는 나를 잊지 않음이라. 그대는 길이 무양(無恙)하라.”
하고 상(床)에 누우며 명(命)이 진(盡)하니 향년(享年)이 칠십육 세라. 부인이 발상(發喪) 통곡하고 소저가 혼절하니 모든 자녀와 노복들이 망극 애통하고, 현생이 또한 애통함이 친상(親喪)에 다름이 없이 상수(喪需)를 극진히 하며 예(禮)로써 선산(先山)에 안장(安葬)하니 일가(一家) 친척(親戚)이 칭찬 아니하는 이 없더라.
차시, 방씨 현생의 지극히 보살핌을 도리어 싫게 여겨, 무슨 일에 기탄(忌憚)이 없으매 박대함이 자심(滋甚)하고, 심지여 노복(奴僕)의 소임(所任)을 시키니, 이때 아자 침의 나이 십 세라. 모친을 붙들고 간(諫)하기를,
“이제 매형(妹兄)이 우리 집의 있으매 무슨 일에 간험(艱險)하기는 소자보다 더하거늘, 태태(太太)는 천대(賤待)하심이 노복으로 같게 하시니, 어찌 부친 유교(遺敎)를 저버리시는고?”
방씨 대노하여 꾸짖기를,
“현가(玄家) 축생(畜生)이 본디 식량(食糧)이 많은 놈이라. 밥만 많이 먹고 공연히 집에 있어 무엇에 쓰리오. 그적 두기 볼 수 없기로 자연 일을 시킴이거늘, 너는 어미를 그르다 하고 그놈과 동심(同心)이 되니 어찌 인자(人子)의 도리라 하랴.”
침이 다시 말을 못하고 물러나더라.
방씨 갈수록 보챔이 심하매 혹 나무도 하여 오라하며, 거름도 치라 하니 현생이 사양하지 아니하고 공순히 하니 현생의 어짊이 이 같더라.
방씨 혹 이생(李生)과 진생(秦生)을 보면 크게 반기며 대접을 가장 후히 하되, 홀로 현생에 이르러는 구박함이 자심하더니, 일일은 노복이 산간(山間)에 가 밭을 갈다가 큰 범을 만나 죽을 뻔한 수말(首末)을 고하니, 방씨 이 말을 듣고 그윽이 기뻐 현생을 그곳에 보내면 반드시 범에게 죽으리라 하여, 즉시 현생을 불러 거짓 위로하고 이르되,
“상공(上公)이 기세(棄世)하신 후, 가사를 내 친집(親執)하매 현서(賢壻)를 자주 위로치 못하니 심히 저어하거니와, 요사이 춘경(春耕)을 다 못하여 아무 산하(山下)의 밭이 불농(不農)하기의 이르니, 현서는 그 밭을 갈아줌이 어떠하뇨?”
현생이 흔연(欣然) 허락하고, 쟁기를 지고 그곳의 이르러 밭을 갈새 문득 석함(石函)이 나타나거늘, 생(生)이 놀라 자세히 보니 글자로 새겼으되, ‘한림학사(翰林學士)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대원수(大元帥) 바리왕 현수문은 개탁(開坼)하라.’ 하였거늘,
현생이 경아하여 열어보니 그 속의 갑옷과 투구며 삼척 보검(寶劍)이 들었거늘, 그제야 남악(南岳) 노인의 말을 생각하고 크게 기뻐 가지고 집에 돌아와 깊이 간수(看守)하고 방중(房中)의 앉았더니, 방씨 날이 저물도록 현생이 돌아오지 않음을 기뻐 필연 호환(虎患)을 면치 못하리라 하였더니, 문득 제 있던 별당에서 글소리가 나거늘 의심하여 노복으로 하여금 그곳의 가보니 과연 그 밭을 다 갈고 왔는지라.
방씨 마음에 희한히 여기나 무슨 계교로 없이하고자 하더니, 문득 일계(一計)를 생각하고, 서종남(庶從南) 방덕을 불러 이르되,
“우리 상공이 생시에 망령된 일을 하여 괴이한 아이를 길에서 얻어, 장녀 운혜로 배우(配偶)를 삼으매 보기 싫음이 심하여 눈의 가시 되었으니, 일로 하여 내게 대환(大患)이 되거니와, 네 상처(喪妻)한 후로 이때까지 재취(再娶)치 못하였으니, 그 현가(玄家)를 없이하고 그 처를 취하면 어찌 좋지 아니하랴?”
방덕이 대열(大悅)하여 그 없이하는 계교(計巧)를 물으니 방씨 이르기를,
“네 독한 약을 얻어주면, 내 스스로 처치할 도리 있으니 너는 주선(周旋)하라.”
이튿날 덕이 과연 약을 얻어 왔거늘, 방씨 밥에 섞어 내어 보내느라.
차시, 현생이 방씨의 괴롭게 함을 견디지 못하여 탄식함을 마지 아니 하더니, 전일 사부(師父)가 주던 봉서(封書)를 생각하고, 일봉을 떼어 보니, 하였으되,
‘석공이 죽은 후 방씨의 심한 간계(奸計) 있으리니 밥 먹을 때에 저를 내어 불면 자연 좋으리라.’
하였거늘, 생이 밥상을 받아 곁에 놓고 저를 부니, 방안에 서기(瑞氣) 일어나고 그릇에 담은 밥이 사라지거늘, 현생이 크게 괴이 여겨 그 밥에 약을 섞었음을 짐작하고 태연히 상을 물리고 앉았으니, 방씨 일마다 이루지 못함을 분노하여 공연히 운혜 소저를 휘욕(揮辱)하더라.
차시, 현생이 방씨의 화를 면치 못할까 저어하여 소저를 보고 이르기를,
“이제 방씨의 흉계 심하니 내 스스로 피(避)하는만 같지 못하나, 그대의 일신도 무사치 못하리니 일로 근심하노라.”
소저가 유체(流涕)하며 이르기를,
“군자가 피하고자 하실진대 어찌 첩을 생각하시리오. 다만 거처하심을 알지 못하니 초창(怊悵)하심이 비할 대 없거니와, 길에 반전(半錢)이 없으리니 이를 팔아 가지고 행하소서.”
하며 향랑을 불러 옥지환(玉指環)과 금봉차(金鳳釵)를 팔아 은자 백 냥을 받아 현생을 주며 이르기를,
“이제 군자가 떠나시면 장차 어디로 향하오며, 돌아오실 기약은 어느 때로 하시리까?”
현생이 답하기를,
“나의 일신이 도로(道路)에 표박(漂迫)하니 정할 수 없거니와, 어느 날 만나기 묘연(渺然)하니 그대는 그 사이 보중(保重)하라.”
하고 눈물을 흘리거늘, 소저가 또한 심사를 정하지 못하여 눈물을 흘려 이르기를,
“이제 한번 이별하매 세상사를 알지 못하나니, 신물(信物)이 있음이 좋을까 하나이다.”
하고 봉차鳳釵)를 꺾어 반씩 가지고 애연(哀然)이 이별하니, 현생이 받아 가지고 시 일수(一首)를 지어 소저를 주니 그 글에 이르기를,
칠년의탁재성각(七年依託在星閣)하니
금일상별하시봉(今日相別何時逢)고
부부은중여산해(夫婦恩重如山海)하니
십재이회응위몽(十載離會應爲夢)이라
하였더라.
소저가 받아 간수하고, 양협(兩頰)의 옥루(玉淚)가 종횡(縱橫)하여 아무 말을 이루지 못하니, 현생이 다시 당부하며 이르기를,
“그대 방씨의 불측(不測)한 화를 당할지니, 삼가 조심하라.”
하고 침을 보아 이별하며, 내당에 들어가 방씨에게 배별(拜別)하며 이르기를,
“소서가 존문(尊門)에 있은 지, 여러 해에 은공(恩功)이 적지 아니하오나, 오늘날 귀택(貴宅)을 떠나오니 그리 알으소서.”
하고 조금도 불호(不好)한 빛이 없으니, 방씨 심중(心中)에 즐겨 이르기를,
“상공이 기세하심으로 자연 현랑을 대접하지 못하여 이제 떠나려 하니, 어찌 만류(挽留)하리오.”
하고 옥배(玉杯)에 술을 가득 부어 권하니, 현생이 받아 앞에 놓고 소매에서 옥저를 내어 이르기를,
“소생이 이별곡을 불어 하직하나이다.”
하고 한 곡조를 부니 소리가 심히 청아(淸雅)하더라. 문득 잔 가운데에서 푸른 기운이 일어나 독한 기운이 사람에게 쏘이니, 현생이 저를 그치고 소매를 떨쳐 표연(飄然)히 가니, 방씨 그 거동을 보고 십분 의아(疑訝)하여 분한 심사를 억제치 못하고 다만 다시 봄을 당부하더라.
현생이 다시 재성각에 들어가 소저를 위로하고 문을 나서니, 부운(浮雲) 같은 형용(形容)이 향할 바를 알지 못하여 서천(西天)을 바라고 가더니, 날이 저물매 구계촌 주점(酒店)의 이르니, 한 이고(尼姑)가 들어와 권선문(勸善文)을 펴 놓고 이르기를,
“빈승(貧僧)은 금산사 칠보암에 있더니, 시주하심을 바라나이다.”
하거늘 현생 이르기를,
“행인의 가진 것이 많지 아니하나, 어찌 그저 보내리오.”
하고, 가진 은봉(銀琒)을 내어 주며 이르기를,
“이것이 적으나 주노라.”
하거늘 노승이 사례하며 이르기를,
“거주(居住)와 성명을 기록하여 주시면 발원(發願)하리로소이다.”
현생이 말을 듣고 즉시 권선문에 기록하되,
‘절강 소흥부에 있는 현수문이라.’
하고.
‘기처(其妻) 석씨(石氏)라.’
하였더라. 그 중이 백배 사례하고 가니, 현생이 본디 관후(寬厚)하므로 그 은자(銀子)를 다 주고 행중(行中)의 일 푼 반전(半錢)이 없는지라. 전전(轉轉)히 길을 떠나 행하니라.
재설(再說), 방씨 현생의 나간 후로, 방덕과 정한 언약이 뜻과 같이 될 줄 알고 크게 기뻐 시비 난향을 재성각에 보내어 소저를 위로하더니, 일일은 방씨 소저의 침소에 와 외로움을 위로하고 이르기를,
“사람의 팔자는 미리 알 길 없는지라. 너의 부친이 그릇 생각하시고 현가(玄家)로 배필을 정하시매, 실로 너의 전정(前程)을 작희(作戲)하심이라. 이러므로 너의 일생을 염려하더니, 과연 제 스스로 집을 버리고 나가시매 다시 만날 길 없으리니, 너의 청춘이 아까운지라. 어미 마음의 어찌 원통치 아니하리오. 나의 서종(庶從)이 있으니, 인물이 비범하고 재조가 과인하여, 향당인(鄕黨人)이 추앙(推仰)치 않은 이 없으나, 일찍 상처(喪妻)하고 재취(再娶)치 못하였으니, 널로 하여금 성친(成親)하고자 하나니, 네 내 말을 들을진대 화(禍)가 변하여 복(福)이 되리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랴.”
소저가 청파(聽罷)에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벽력(霹靂)이 꼭두를 누른 듯하고, 더러운 말을 귀로 들었으매 영천수(潁川水)가 없음을 한(恨)하나, 본디 효성이 출천(出天)하므로, 계모(繼母)의 심사를 알고 변색하며 답하기를,
“모친이 소녀를 위하심이나 옳지 아닌 말씀으로 교훈(敎訓)하시니 어찌 봉행(奉行)하오리까?”
말을 마치며 일어서니, 방씨 대노하여 꾸짖기를,
“네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면, 금야(今夜)에 겁칙할 도리 있을 것이니, 네 그를 장차 어찌 할 소냐.”
이처럼 이르며 무수히 구박하고 들어가니, 소저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계교(計巧)를 생각하더니, 이윽고 침이 들어와 불러 이르기를,
“금야에 방덕이 여차여차 하리니 저저(姐姐)는 바삐 피할 도리를 행하라.”
소저가 이 말을 듣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급히 유모를 불러 의논하더니, 문득 부친 유서를 생각하고 떼어보니, 하였으되,
‘만일 급한 일이 있거든 남복(男服)을 개착(改着)하고 도망하여, 금산사 칠보암으로 가면 자연 구할 사람이 있으리라.”
하였거늘, 소저가 향랑을 불러 수말을 이르고, 급히 남복을 고쳐 입고 담을 넘어 달아 나니라.
차야(此夜)에 방덕이 방씨의 말을 듣고 밤들기를 기다려, 마음을 죄고 가만히 소저의 침소로 월장(月墻) 출입하여 동정을 살펴보니, 인적이 고요하고 사창(紗窓)의 등불이 희미하거늘, 방문을 열고 들어가매 종적이 없는지라.
대경실색하여 부득이 돌아오니, 방씨 또한 놀라고 어이없어 방덕을 도로 보내고 운혜 소저의 도망함을 괘씸히 여기더라.
차설 석소저(石小姐)가 향랑을 데리고 밤이 새도록 정처 없이 가더니, 여러 날 만에 한 곳에 다다르니 경개(景槪) 절승(絶勝)하여 기화(奇花)는 만산(滿山)한 가운데 수목(樹木)이 참천(參天)하거늘, 노주(奴主)가 서로 붙들고 들어가니, 향풍(香風)이 이는 곳에 풍경소리가 은은히 들리거늘,
“필연 절이 있도다.”
하고, 점점 들어가니 일위 노승(老僧)이 합장(合掌) 배례하며 이르기를,
“공자는 어디로 좇아 이곳에 이르시니까?”
소저가 연민(憐憫)히 답례하고 이르기를,
“우리 우연히 지나더니 선경(仙境)을 범(犯)하오매 존사(尊師)는 허물치 말라.”
노승이 답하기를,
“이곳은 외객(外客)이 머물지 못하거니와, 들어와 머물러 가심이 어떠하시니까?”
소저가 십분 다행하여 함께 들어가니 심히 정결하더라. 노승이 처소(處所)를 정하여 주며 차를 내와 권하니, 은근한 정이 예보던 사람 같더라.
일일은 노승이 소저에게 이르기를,
“공자의 행색을 보니 여화위남(女化爲男)하심이니, 이곳 승당(僧堂)은 외인의 출입이 없으매 공자는 염려치 마소서.”
소저가 놀라 이르기를,
“나는 석상서의 아자(兒子)이라. 존사(尊師)가 이르는 말을 알지 못함이로다.”
하고 서로 말하더니, 이날 모든 승이 불전에 공양(供養)할새 축원하는 소리를 들으니, 소흥현 벽계촌의 사는 현수문과 부인 석씨(石氏)를 일컫거늘, 소저가 크게 의심하여 이고(尼姑)에게 묻기를,
“어찌 남의 성명을 알고 축원하느뇨?”
제승(諸僧)이 권선문을 뵈며 이르기를,
“이처럼 기록하였기로 자연 앎이로소이다.”
하거늘, 소저가 자세히 보니 과연 현생의 성명이 있거늘, 그 연고를 물으니 이고가 답하기를,
“빈승(貧僧)이 불상(佛像)을 위하여 권선(勸善)을 가지고 두루 다니다가 구계촌의 이르러, 한 상공(上公)은 만나니 다만 행중(行中)의 은자 백 냥만 있으되, 정성이 거룩하여 모두 주옵시니, 절을 중수(重修)한 후로도 그 상공의 수복(壽福)을 축원하거니와, 공자가 어찌 자세히 묻나이까?”
소저가 답하기를,
“이 사람이 과연 나의 지친(至親)이러니, 성명을 보매 자연 반가워 물음이로다.”
이고가 이 말을 듣고 더욱 공경하더라. 소저가 차후(此後)로 법당에 들어가 그윽이 축원하며, 혹 심심하면 매화를 그려 족자(簇子)를 만들어 파니, 일신의 괴로움이 반점(半點)도 없으나 주야(晝夜)로 현생을 생각하고 슬퍼하더라.
각설, 현수문이 은자를 모두 시주하고, 행중에 일 푼 반전(半錢)이 없으나 동서로 방황하여 지향(志向)할 바를 알지 못하고, 전전(輾轉)이 기식(寄食)하니 그 초창(怊悵)한 모양이 비할 데 없더라.
차시, 천자가 운남왕의 표(表)를 보시고 허물을 고치시며, 어진 이를 대접하사 천하의 호걸을 뽑으실새 문무과(文武科)를 뵈시니, 황성으로 올라가는 선비가 무수한지라. 그 중 한 선비가 현생을 보고 묻기를,
“그대 과행(科行)인가 싶으니, 나와 함께 감이 어떠하뇨?”
현생이 과행이란 말을 듣고 심중(心中)의 기뻐하며 허락하고, 여러 날 만에 황성에 이르매, 문득 한 사람이 내달아 현생을 붙들고 이르기를,
“내 집이 비록 누추하나 주인(主人)을 정하시면, 음식지절(飮食之節)이라도 값을 받지 아니하오리니, 그리 아옵소서.”
하고 청하거늘, 현생이 남의 은혜 끼침이 불가하나, 이때를 당하여 도리어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여 주인을 정하고, 있으니 장중(場中) 제구(諸具)를 낱낱이 차려 주거늘, 현생이 도리어 불안하여 주인의 은혜를 못내 일컫더라.
과일이 다다르니 천자가 황극전(皇極殿)의 어좌(御座)하시고 문과(文科)를 뵈시며, 연무대(硏武臺)에 무과(武科)를 배설(排設)하사 명관(名官)으로 뵈게 하시니,
현생이 과장에 나아가 글제를 보고 심중의 대희하여 순식(瞬息)에 글을 지어 바치고, 주인의 집에 찾아오더니 연무대에 무소(武所)를 보고 마음의 쾌활하여 구경하다가, 남의 궁시(弓矢)를 빌어 들고 과거 보기를 원하니,
차시, 명관 유기 좌우를 호령하여 내치라 하니, 사예교위(司隸校尉) 만류하며 이르기를,
“방금 천하인심이 황황(遑遑)하매 황상이 근심하사, 문무 인재를 뽑으시거늘 일찍 단자(單子)를 못하여 호명(呼名)함이 없거니와, 제 재조를 봄이 좋을까 하나이다.”
명관이 옳이 여겨 불러 뵈니, 살 다섯이 한 구멍에 박힘 같이 과녁을 맞히니 만장중(滿場衆)이 대경실색(大驚失色)하고 명관이 그 재조를 칭찬하며 장원에 정하니라.
차시, 상이 수만 장 글을 고르시다가 현생의 글에 이르러는, 상이 대열(大悅)하사 자자(字字)이 주점(朱點)을 내리시고 피봉(皮封)을 떼어 신래(新來)를 재촉하시니, 차시 수문이 미처 주인에 가지 못하고 호명을 들어 계하(階下)에 이르니, 상이 수문의 상모(相貌)를 보시고 더욱 대열하사 신래를 진퇴(進退)하시더니,
무소(武所)의 방(榜)을 주달하였거늘, 상이 보시니 장원은 소흥 현수문이라 하였거늘, 성심(聖心)이 대열하사 그 희한함을 이르시고 좌우를 돌아보사 이르기를,
“짐이 만고(萬古) 역대(歷代)를 많이 보았으되, 한 사람이 과거를 보매 문무과에 참방(參榜)함을 보지 못하였나니, 어찌 장구지술(長久之術)에 기특하지 아니하리오.”
하시고 인하여 계화(桂花) 청삼(靑衫)을 주시며 벼슬을 내리사 춘방학사(春坊學士) 겸 사의교위(司儀校尉)를 내리시니, 수문이 복지(伏地) 주(奏)하기를,
“신(臣)이 하방(下方) 미천한 사람으로 우연히 문무방(文武榜)의 참여하오매 황공(惶恐) 송률(悚慄)하옵거늘, 더구나 중한 벼슬을 주옵시니 무슨 복록(福祿)으로 감당하오리까. 복원(伏願) 성상은 신의 작직(爵職)을 거두사 세상에 용납(容納)하게 하소서.”
상이 수문의 주사(奏辭)를 들으시고 더욱 기특히 여기사 묻기를,
“경(卿)의 선조(先朝)는 입조(入朝)한 이 있느뇨?”
현한림(玄翰林)이 주하기를,
“신이 오 세에 난(亂)을 만나 부모를 실산(失散)하였사오니, 선세(先世)의 입조함을 기록하지 못하오며, 신의 아비는 난시전(亂時前)에 실리(失離)하오매 알지 못함이로소이다.”
상 이르기를,
“경이 부모를 실리하매 능히 취처(娶妻)함이 없으리로다.”
한림이 주하기를,
“혈혈단신(孑孑單身)이 도로에 분주(奔走)하여 의탁하올 곳이 없더니, 참지정사 석광위가 무휼(撫恤)하므로 그 여식(女息)을 취(娶)하니이다.”
상 이르기를,
“석광위는 충효가 겸전(兼全)한 재상이라. 벌써 고인(故人)이 되었으나, 경을 얻어 사위를 삼음은 범연(泛然)치 아니하도다.”
하시고 쌍기(雙旗)와 이원풍악(梨園風樂)을 사급(賜給)하시니 한림이 마지 못하여 사은(謝恩) 퇴조(退朝)하고 주인의 집으로 올새, 도로에 관광자(觀光者)가 희한한 과거(科擧)도 있다 하며 책책(嘖嘖)이 칭찬하더라.
한림이 몸이 영귀함이 있으나 부모를 생각하매, 자연 눈물이 이음 차(次) 청삼(靑衫)에 떨어지니 주인이 위로하고 이르기를,
“상공(上公)이 소복(小僕)을 알지 못하시리니, 소복은 대상공(大上公) 노자(奴子) 차복이옵더니, 대상공이 적소(謫所)에 가실 제 이 집을 맡겼더니 수일 전에 일몽(一夢)을 얻사오니, 주인댁 공자(公子)라 하여 문 앞 돌 위에 앉아 쉬더니 이윽고 황룡을 타고 공중에 오르거늘, 놀라 깨어 날이 밝은 후 저 돌에 앉아 쉬는 사람을 기다리더니, 과연 상공이 그 돌의 앉아 쉼을 보고 반겨 뫼심이러니, 이제 상공이 문무(文武) 양과(兩科)를 하시사 문호(門戶)를 다시 회복하시리니, 소복도 어찌 즐겁지 아니하리까.”
한림이 홀연 이 말을 들으매 크게 반가워 묻기를,
“그대 대상공의 휘자(諱字)를 알 것이오. 무슨 일로 적소에 가셨느뇨?”
차복 이르기를,
“그 휘자는 택지요, 벼슬이 이부시랑이러니, 뜻밖에 황숙(皇叔) 연왕이 모역(謀逆)할새, 상공 이름이 역초(逆招)에 있으므로 무량도에 정배하시니, 기후(其後)는 소식을 알지 못하나이다.”
한림이 청파(聽罷)에 헤아리되,
‘부친이 적거하셨단 말을 들음이 희미하더니, 과연 이 말을 들으니 옳도다.’
하고 전후수말을 자세히 물어 알고, 차복의 유공(有功)함을 일컬으며 삼일(三一) 유가(遊街) 후 표를 올려 부모 찾기를 주달(奏達)하오니, 상이 가로되,
“경의 효성이 지극하여 실산(失散)한 부모를 찾고자 하나, 아직 국사를 보살피고 후일 말미를 얻어 천륜(天倫)의 온전함을 잃지 말라.”
하시니 한림이 마지못하여 다시 주달치 못하고 직임(職任)에 나아가나 매양 부모를 생각하며 석소저를 잊지 못하여 석부(石府)에 찾아감을 원하더라.
차시 남만왕(南蠻王)이 반(叛)할 뜻이 있음을 상이 근심하사, 만조(滿朝)를 모으시고 위유사(慰諭使)를 정하고자 하실새 대신(大臣)이 주하기를,
“남만(南蠻)은 강국이오니 달래기 어려울지라. 이제 현수문 곧 아니오면 그 소임을 당하지 못하오리니, 이를 보내심이 좋을까 하나이다.”
상이 옳이 여기사 현수문으로 남만위유사를 배(拜)하시니, 한림(翰林)이 즉시 사은하고 길을 차릴새, 상이 당부하여 가로되,
“짐이 경의 충성을 아느니 삼촌(三寸) 혀로 남만을 달래어 반함이 없을진대 경의 공을 잊지 아니하려니와, 이름이 육국(六國)에 진동하던 소진(蘇秦)의 공명을 압두(壓頭)하리니, 어찌 만대(萬代)에 허루(虛漏)한 공이리오.”
한림이 성교(聖敎)를 받자와 사은하고 발행하여, 수삭(數朔) 만에 남만국(南蠻國)에 이르니, 왕이 제신을 모으고 의논하기를,
“송천자(宋天子)가 외유사를 보내었으니, 좌우에 도부수(刀斧手)를 매복하였다가 만일 뜻과 같지 못하거든 당당이 죽이리라.”
하고 천사(天使)를 볼새, 어사(御使)가 들어가니 왕이 교(轎) 위에 걸터앉아 천사를 맞거늘, 어사가 대노하여 꾸짖기를,
“족하(足下)는 일방(一方)의 작은 왕(王)이요, 나는 천자의 사신이라. 조서를 뫼시고 왔거늘, 당돌히 걸터앉아 천사를 보니, 그 예법(禮法)이 없음을 알거니와, 그윽이 족하를 위하여 취(取)치 아니하노라.”
왕이 노기(怒氣) 대발하여 빨리 내어 베라 하니, 어사가 안색을 불변하고 꾸짖기를 마지아니하니, 왕이 천사의 위인을 취맥(取脈)하고자 하다가 점점 실체(失體)함을 깨달아, 그제야 뜰에 내려 사죄하며 이르기를,
“과인(寡人)의 무례(無禮)함을 용서하소서.”
어사가 비로소 알고 공경하며 이르기를,
“복(僕)이 대왕의 성심을 아나니 무슨 허물이 있으리오. 이제 우리 황상이 성신문무(聖神文武)하사 덕택(德澤)이 제국(諸國)에 미쳤거늘, 왕은 어찌 그를 알지 못하고 공순하심이 적으시뇨?”
왕이 만만 사례하며 이르기를,
“과인이 군신지례(君臣之禮)를 모름이 아니로되, 황상이 과인국(寡人國)을 아끼지 않으시매 자연 불공(不恭)한 의사를 두었으나 이제 성지(聖旨) 여차하심을 받자오니, 어찌 감히 태만(怠慢)함이 있으리오.”
하고 황금 일천 냥과 채단(綵緞) 일천 필을 주니, 어사가 받아 가지고 길을 떠나니 왕이 멀리 나와 전송하더라.
어사가 본국으로 돌아올새 길에서 먼저 무사히 돌아오는 표(表)를 상달(上達)하였더니, 상이 보시고 대열하사 또 교지를 내리어, 돌아오는 길에 각처 민심을 진정하되 혹 주리는 백성이 있거든 창고를 열어 진휼(賑恤)하라 하시니, 어사가 교지를 받자와 북향(北向)사은(謝恩)하고 각 읍을 순수(巡狩)할새, 위의(威儀)를 물리치고 암행(暗行)으로 다니니, 각 읍 진현(陣縣)을 선치(善治)하지 않을 리 없고, 백성들이 어사를 위하여 송덕(頌德) 않을 리 없더라.
두루 다니다가 한 곳에 다다르니 이곳은 금산사 칠보암이라. 제승(諸僧)이 관행(官行)이 이름을 알고 황황하여 피하고자 하더니, 어사가 당상(堂上)에 좌정(坐定)하고 제승을 불러 묻기를,
“이 절을 중수(重修)할 때에 권선문을 가지고 다니던 승이 그저 있느냐?”
그 중 한 노승이 답하기를,
“소승이 과연 그이거니와 노야(老爺)가 어찌 하문(下問)하시니까?”
하며 어사를 자세히 보니, 삼사 년 전에 구계촌에서 은자 일백 냥 시주하시던 현상공(玄上公)이라. 대경(大驚) 대희(大喜)하여 다시 합장 사배(四拜) 이르기를,
“소승이 천(賤)한 나이 만사와 눈이 어둡기로 미처 알지 못하였거니와 은자 일백 냥 시주하시던 현상공이니잇가?”
어사가 노승의 말을 듣고 깨달아 그 사이 무고(無故)히 있음을 기뻐하며 묻기를,
“아까 법당에 한 소년 선비가 나를 보고 피하니 그 어떤 사람인고?”
노승이 답하기를,
“그 사람이 이 절의 머무른 지 오래되어 거주(居住) 성명을 알지 못하옵고, 혹 불전(佛前)에 축원할 때, 상공 성씨(姓氏)와 명자(名字)를 듣고 가장 반겨하더이다.
어사가 이 말을 듣고 문득 놀라 헤아리되,
‘내 잠깐 볼 때에 얼굴이 심히 익기로 괴이 여겼더니 무슨 곡절이 있도다.’
하고 그 소년 보기를 권하니, 노승이 즉시 어사를 인도하여 그 소년의 처소로 오니, 이때 석소저가 어사의 행차를 구경하다가, 서로 눈이 마주치매 낯이 심히 익으므로 가군(家君)을 생각하고 침석의 누었더니, 문득 이고가 급히 들어와 고하기를,
“전일(前日) 일가(一家)라 하고 반겨하던 현상공이 어사로 마침 와 계시매 공자를 위하여 뫼시고 왔나이다.”
소저가 미급답(未及答)에 어사가 들어 보니, 비록 복색(服色)을 고쳤으나 어찌 주야 사모(思慕)하던 석소저를 몰라보리오.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여 반향(半晌)이나 말을 이루지 못하더니, 오랜 후 정신을 차려 소저를 대하여 이르기를,
“그대 모양을 보니 방씨의 화를 보고 피하였음을 짐작하거니와, 이곳에서 만날 줄 어찌 뜻하였으리오.”
소저가 그제야 현생인 줄 알고 누수(淚水)가 여우(如雨)하여 진진(津津)히 느끼며 이르기를,
“첩의 팔자가 기구함이오니 어찌 하오리까마는, 그 사이 군자는 무슨 벼슬로 이곳에 지나시니까?”
어사가 탄식하고 전후수말을 자세히 이르기를,
“천은이 망극하여 문무에 함께 참방하였더니, 외람(猥濫)히 중작(重爵)을 당하여 위유(慰諭) 순무도어사(巡撫都御史)를 내리시매, 마침 이곳의 이르러 그대를 만나니, 이는 하늘이 지시(指示)함이라. 어찌 만행(萬幸)이 않으리오.”
소저가 내심에 기뻐 전후 사단(事端)을 이르기를,
“첩이 이곳에 은신하였다가 천우신조하여 군자를 만났으니, 이제 죽으나 무슨 한이 있으리오까?”
하고 옥루(玉淚)가 종행하여 옷깃을 적시는지라. 어사가 즉시 본부에 전령(傳令)하여 위의(威儀)를 갖추어 오라 하고, 제승을 불러 그 은공을 이르며 금은을 내어 주니, 제승이 백배 사례하고,
“천하의 희한한 일도 있도다.”
하며 여러 해 깊은 정이 일조(一朝)에 이별함을 애연(哀然)하여 눈물을 흘리더라.
이윽고 본부에 위의 왔거늘, 석소저와 향랑이 불전에 하직하고 제승에게 이별하며, 교자(轎子)를 타고 금산사를 떠나니 행차의 거룩함이 일경(一境)에 들리더라.
여러 날 만에 황성의 이르러 석부인(石夫人)은 차복의 집으로 행하게 하고, 어사가 바로 궐하(闕下)에 봉명(奉命)하오니, 상이 인견(引見)하시고 남만왕을 위유(慰諭)함과 각 읍에 순무하던 일을 물으시고 대열하사 가로되,
“만일 경(卿)이 곧 아니런들 어찌 이 일을 당할까?”
하시고 즉시 벼슬을 돋우어 문현각(文顯閣) 태학사(太學士)를 내리시니, 학사가 여러 번 사양하되, 상이 불윤(不允)하시매 마지못하여 사은하고, 처 석씨(石氏) 만난 일을 주달(奏達)하오니 상이 들으시고 더욱 희한히 여기사, 부인 직첩(職牒)을 내리오시니, 학사(學士)의 은총이 조정의 진동하더라.
각설(却說), 북토왕(北吐王, 吐蕃)이 반(叛)하여 철기(鐵騎) 십 만을 거느리고 북방을 침노(侵擄)하니, 여러 군현(郡縣)이 도적에게 앗긴 바가 되니, 인주(麟州) 자사(刺史) 왕평이 급히 계문(戒文)하였거늘, 상이 보시고 대경하사 토적(討賊)할 일을 의논하실새, 반부(班府) 중에 일인이 출반주(出班奏)하기를,
“신이 비록 재조가 없사오나 도적을 파(破)하오리니, 복원(伏願) 성상은 일지군(一枝軍)을 주시면 폐하의 근심을 덜 리이다.”
모두 보니 문현각 태학사 현수문이라. 상이 기특히 여기사 이르기를,
“짐이 박덕(薄德)하므로 도적이 침노하매 경의 연소(年少)함을 꺼렸더니, 이제 경이 출전함을 자원하니 짐 심히 환열(歡悅)하도다.”
하시고 대원수를 내리시며, 정동장군 양기로 부원수를 내리사, 정병 팔십만을 조발하여 주시며 이르기를,
“짐이 경의 충성을 아느니 수이 도적을 파하고 돌아오면 강산(江山)을 반분(半分)하리라.”
원수(元帥)가 돈수(敦壽) 사은하고 대군을 휘동(麾動)하여 여러 날 만에 감몽관의 이르러 결진(結陣)하니 적진이 벌써 진을 굳게 쳤는지라. 원수가 대호(大呼)하기를,
“적장은 빨리 나와 칼을 받으라.”
하고 황금 투구에 쇄자갑(鎖子甲)을 입고, 손에 삼척 장검(長劍)을 쥐었으니 위풍이 맹호(猛虎)같고 군제(軍制) 엄숙(嚴肅)하더라.
북토왕이 바라보매 비록 소년대장이나 의기(意氣) 등등(騰騰)하여 천신이 하강(下降)한 듯한지라. 아무리 여러 고을을 얻어 승승장구(乘勝長驅)하였으나, 마음이 최절(摧折)하여 싸울 뜻이 없더니, 선봉장 약대 정창(挺槍) 출마(出馬)하여 대호하기를,
“송장(宋將) 현수문은 빨리 나와 자웅(雌雄)을 결(結)하자.”
하며 내닫거늘, 원수가 대노하여 맞아 싸울새, 수합(數合)이 못하여 적장이 저당(抵當)치 못할 줄 알고 달아나거늘, 원수가 따라 충돌하니 칼이 다다른 곳에 적장의 머리 추풍낙엽 같고, 호통이 이는 곳에 북토왕이 사로잡힌 바가 된지라. 원수가 본진에 돌아와 승전한 잔치를 파하고 상기(上記) 표(表)를 올리니라.
차시 또 석상왕(石上王, 西蕃)이 반하여, 정병 십만을 거느리고 대국(大國)을 침노할새, 강병 맹장이 무수하므로 지나는 바 망풍귀순(望風歸順)하니 상이 들으시고 대경하사 가로되,
“도적이 처처(處處)에 분기(奮起)하니 이를 장차 어찌 하리오.”
우승상 경필이 주하기를,
“이제 미처 초적(草賊)을 파하지 못하옵고, 또 북적(北狄)이 침노하니 조정의 당할 장수가 없사오매, 현수문이 돌아옴을 기다려 파함이 좋을까 하나이다.”
상이 양구(良久) 후 가로되,
“현수문이 비록 용맹하나 남만(南蠻)국에 다녀와 즉시 전장의 나갔으니 무슨 힘으로 또 이 도적을 파하리오. 짐이 친정(親征)하고자 하나니 경등은 다시 이르지 말라.”
하시고 먼저 현원수(玄元帥)에게 사(使)를 보내어 이 일을 알게 하고, 상이 친히 대장이 되사 경필로 부원수(副元帥)를 삼고, 표기장군(驃騎將軍) 두원길로 중군장(中軍將)을 내리시고, 거기장군(車騎將軍) 조경으로 도성을 지키오고 택일(擇日) 출정(出征)하실새 정기(旌旗)는 폐일(閉日)하고 고각(鼓角)은 훤천(喧天)하더라.
여러 날 만에 양해관에 이르니, 적장 왕가가 송천자가 친정하심을 듣고 의논하기를,
“우리 진중(陣中)에 용맹한 장수가 무수하거늘, 천자가 아무리 친히 와 싸우고자 하나 우리를 어찌 당하리오.”
하고 방포일성(放砲一聲)에 진문(陣門)을 크게 열고 한 장수가 내달아 싸움을 돋우니 이는 양평공이라. 상이 보시고 부장 경필로 하여금 나아가 싸우라 하시니, 두원길이 내달아 이르기를,
“폐하는 근심 마옵소서. 신이 먼저 싸워 적장의 머리를 베어오리이다.”
하고 말에 올라 칼을 춤추이며 내달아 대호하기를,
“적장은 나의 말을 들어라. 우리 천자가 성신문무(聖神文武)하시고 덕택이 아니 미친 나라가 없거늘, 너 같이 무도한 오랑캐가 그 덕택을 알지 못하고 감히 군을 발하여 일경(一境)을 요란케 하니, 내 너를 베어 국가의 근심을 없이 하리라.”
하고 말을 마치며 바로 양평공을 취하니, 양평공이 맞아 싸워 오십여 합에 승부를 결치 못하더니, 적진 중에서 또한 장수가 내달아 양평공을 도우니 두원길이 좌충우돌(左衝右突)하여 싸우매 수합이 못하여 죽은 바가 되니, 상이 근심하사 진동장군(鎭東將軍) 하세청으로 나아가 싸우라 하시니, 하세청이 두원길의 죽는 양을 보고 분기 대발하여 말에 올라 내달으며 대호하기를,
“어제 싸움은 우리 장수를 죽였거니와 오늘은 너를 죽여 두원길의 원수를 갚으리라.”
하고 맞아 싸워 사십여 합에 이르매, 상이 장대(將臺)에서 양진(兩陣) 싸움을 보시더니 날이 늦으매 하세청이 행여 상할까 하여 쟁(錚)을 쳐 군을 거두고, 날이 밝으매 하세청이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내달아 싸움을 돋우며 웨기를,
“적장 양평공은 어제 미결(未決)한 싸움을 결(結)하자.”
하고 싸우더니 수합이 못하여 양평공의 칼이 번듯하며 하세청의 머리 마하(馬下)에 내려지는지라. 상이 이를 보시고 대경하사, 제장을 돌아보아 이르기를,
“뉘 능히 적장의 머리를 베어 양장(兩將)의 원수를 갚을꼬.”
좌우가 묵묵하고 나와 싸울 장수가 없는지라. 상이 탄식할 즈음의 적진이 사면을 에워싸고 대호하기를,
“송제(宋帝)는 빨리 나와 항복하라.”
하니 어찌 되고 하회(下回)를 분석(分析)하라.
현수문전 권지중(券之中)
차설 천자가 적진(敵陣)에 싸이어 위급함이 조석에 있더니, 마침 현원수가 북토왕을 토평(討平)하고 승전고를 울리며 완완(緩緩)히 회군하여 형주(荊州)지경(之境)이 다다르니 중사(中使)가 교지(敎旨)를 받자와 들이거늘, 원수가 북향(北向) 사배(四拜)하고 떼어 보니,
‘그 사이 또 석상왕이 반하여 십이 읍을 항복받고 양해관의 들어와 침노하매, 상이 친정하시니 원수가 만일 승전 귀국하거든 상을 도우라.’
하신 조서(詔書)이라. 원수가 남필(覽畢)에 대경하여 사관을 돌려보내고, 즉시 선봉장 양기를 불러 조서의 말씀을 이르며 이르기를,
“이제 천자가 친정하시매 석상왕의 강병을 당하기 어려우시리니, 내 단기로 먼저 급히 가, 상을 구하리니 그대는 대군을 거느리고 뒤를 쫓아오라.”
하고 말을 달려 서평관을 향하다가, 양경지경의 이르러 피란(避亂)하는 백성의 말을 들으니,
“천자가 양평관에서 싸우시매 적진에 싸이어 위태함이 시각에 있다.”
하거늘 원수가 이 말을 듣고 천지 아득하여 급히 말을 채쳐 바로 양평관에 다다르니 과연 천자가 여러 겹에 싸이어 거의 위태하신지라.
원수가 분노하여 칼을 들고 소리를 크게 지르며 적진을 짓치니, 적진 장졸이 불의의 변을 만나 죽는 자가 무수하니, 원수가 단기(單騎)로 달려들어 십만 적병을 무인지경(無人之境) 같이 횡행(橫行)하며 사졸(士卒)을 풀 베 듯하니, 그 용맹을 가히 알지라.
적장 양평공이 군사를 거두어 물러 진치고 현원수의 용맹을 일컫더라.
원수가 즉시 천자께 복지하여 이르기를,
“신이 북토를 파한 후로 다른 변이 없을까 하였더니, 또 석상 도적이 일어나 폐하의 친정하심을 듣고 빨리 오지 못하여 성체(聖體) 곤하심을 미처 구완하지 못하오니, 신의 죄 만사무석(萬死無惜)이로소이다.”
상이 적진에 싸이어 이미 항복고자 하매, 제장의 간함을 듣고 혼백(魂魄)이 몸에 있지 아니하여 다만 장탄(長歎) 유체(流涕)할 따름이더니, 문득 진중이 요란하며 적병이 물러감을 보고, 천신이 도우사 송실(宋室)을 보전함인가 하고 장탄하더니, 문득 현원수의 복지 주언(奏言)을 들으시고 몽중(夢中)인가 의심하며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여 그 손을 잡으시고 유체하며 이르기를,
“경이 국가를 위하여 공을 세움이 한두 번이 아니므로, 경의 충성을 일컫더니 이제 경이 또 짐의 위태함을 구하여 사직을 안보케 하니 만고(萬古)의 대공(大功)이라. 어찌 보필지신(輔弼之臣)이 아니리오.”
원수가 고두(叩頭) 주하기를,
“신이 적장(敵將)의 형세를 보오니 졸연(猝然)히 파하기 어려울지라. 명일(明日)은 당당히 적장을 베어오리니, 폐하는 근심치 마옵소서.”
하고 군사를 정제(整齊)하며 제장을 불러 약속을 정할새, 이윽고 북토왕 파한 대군이 이르렀거늘, 원수가 군을 합하여 점고(點考)하니 정병(精兵)이 백만이요 용장(勇將)이 수십 원(員)이라.
우양을 잡아 대군을 호궤(犒饋)하고, 이튿날 원수가 말에 올라 진문(陣門)을 크게 열고 싸움을 돋우니, 적장 양평공이 원수의 위풍(威風)을 보고 즐겨 나오지 아니하더니, 한 장수가 내달아 맞아 싸우니 이는 적장 약대라. 원수가 소리가 크게 지르고 교봉(交鋒) 팔십여 합에 승부를 결(結)하지 못하더니, 날이 저물매 양진(兩陣)이 쟁(錚)을 쳐 군을 거두니 원수가 돌아와 황상께 주하기를,
“신이 거의 적장(敵將)을 잡게 되었더니, 어찌 군을 거두시니까.”
상 이르기를,
“적장 약대는 용맹한 장수이라. 혹 실수할까 하여 군을 거두니라.”
하시니, 원수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물러 나니라.
원수가 차야(此夜)의 제장(諸將)을 불러 파적(破敵)할 계교를 의논할새, 선봉장 양기를 불러 이르기를,
“그대는 오천 군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삼십 리만 가면 화산이란 뫼가 있으니, 그곳에 매복하였다가 여차여차하라.”
하고 또 후군장 장익을 불러 이르기를,
“그대는 철기 오천을 거느리고 하람원에 매복하였다가 이리이리하면 가히 적장을 사로잡으리라.”
하고 천자가 거짓 중군이 되어 군마를 거느리고, 적진 앞에 나아가 싸움을 돋우시게 하여 약속을 정하고 날이 밝은 후 진문을 크게 열고 싸움을 돋우니, 약대 불승(不勝) 분노하여 양평공을 대하여 이르기를,
“오늘날 싸움에 송장(宋將) 현수문을 잡지 못하면, 맹세코 돌아오지 아니리이다.”
하고 언파(言罷)에 진 밖에 내닫거늘 양평공 이르기를,
“장군은 경적(輕敵)하지 말라.”
약대 응낙하고 말을 달려 내다르며 대호하기를,
“적장은 미결(未決)한 자웅(雌雄)을 오늘날 결하자 하고 내달으니 원수가 냉소(冷笑)하고 맞아 싸워 칠십여 합에 승부를 결치 못하더니, 원수가 말을 돌리어 달아나니, 약대 따르더니 문득 좌우의 함성이 진동하며 손외 일시에 대발하여 군사가 무수히 죽고, 약대의 말 발이 걸려 거꾸러지매 갑주(甲冑)는 다 깨어지고 방천검(方天劍)이 부러지니 겨우 목숨을 도망하여 본진의 돌아가니 양평공이 위로하기를,
“장군이 큰 말을 하기에 내 염려하였더니, 불행이 패함을 보니 차후는 경적하지 말라.”
하더라.
원수가 계교로써 약대를 잡게 되었더니, 제 본디 용맹하므로 잡지 못함을 분노하여 또 무슨 계교로 잡음을 의논하더라.
차시 양평공이 송진(宋陣) 파할 묘책(妙策)을 의논하더니, 밤이 깊은 후 문득 자하산에 함성이 일어나거늘 양평공이 놀라 탐지(探知)하니 아무 것도 없는지라. 심하에 괴이 여겨 혹 귀졸(鬼卒)인가 하였더니 또 산 좌편(左便)에서 납함(吶喊)하는 소리가 나거늘, 적진 장졸이 내달아 막고자 하더니 체탐(體探)이 보(報)하되,
“그 산에 군사 하나도 없고 다만 눈에 재 같은 것이 뵈더이다.”
하거늘, 양평공이 크게 의혹하여 이르기를,
“송장 현수문은 당시 명장이라. 재조를 부려 우리를 놀램이로다.”
하고 제장을 불러 진중(陣中)이 요동치 말라 하더라.
원수가 제장을 불러 이르기를,
“내 아까 술법을 행하여 적장의 마음을 속였으니, 지금 우리 일시에 협공하면 제 반드시 나와 싸우리니 적장 잡기를 어찌 조심하리오.”
하고 대군을 몰아 크게 납함하며 일시의 짓쳐 들어가니, 적진이 처음은 헛일로 알고 준비함이 없다가 십만 대병이 급히 쳐들어오매, 미처 손을 놀리지 못하여 죽는 장졸이 무수하고 사산분궤(四散奔潰)하는지라.
양평공이 대노하여 약대를 거느리고 죽기로써 싸우매, 화광(火光)이 충천(衝天)하고 함성이 물끓 듯하니 주검이 쌓이어 산을 이루고 유혈이 모이여 내 되었더라. 원수가 양평공을 취하니 양평공이 당하지 못하여 달아나니, 석상왕이 원수의 용맹함을 보고 싸울 마음이 없어 달아나니 날이 이미 새었더라.
한 장수가 일군(一軍)을 거느리고 짓쳐오니 석상왕이 갈 길이 없는지라. 양평공이 이르기를,
“사세 위급하니 왕은 잠깐 요술을 행하소서.”
석상왕이 옳이 여겨 진언(眞言)을 염(念)하니 문득 안개 자욱하여 지척을 분변(分辨)치 못하니, 원수가 뒤를 따르다가 날이 밝음을 다행히 여기더니 문득 안개 자욱하여 길이 아득함을 보고, 소매에서 단저를 내어 부니 안개 사라지고 일광이 명랑한지라.
원수가 그제야 적장의 닫는 양을 보고 풍우(風雨)와 같이 따르니, 석상왕이 그 저 소리를 듣고 대경실색하여 이르기를,
“오늘날 아등(我等)이 이곳에서 명을 마치리로다. 송국 대장 현수문의 재조를 오늘이야 쾌(快)히 알괘라. 나의 술법은 다만 안개 피울 줄만 알더니 현수문의 저 소리는 서역국 일광대사의 우제성(雨際聲)이니 어찌 놀랍고 두렵지 않으리오. 내 십 년 공부하여 재조를 배웠으매 나를 대적할 자가 없을까 하였더니 이제 속절없이 되었으니, 어찌 아깝고 슬프지 아니하리오.”
하고, 장탄(長歎) 불이(不二)하며 닫더니 군마(軍馬)가 피곤하여 멀리 가지 못하고, 원수의 대진(大陣)이 다다라 한 번도 싸우지 못하고 원수의 자룡검(子龍劍)이 이르는 곳에 약대의 머리 내려지는지라. 양평공이 낙담상혼(落膽喪魂)하여 아무리 할 줄 모르고 석상왕에게 이르기를,
“우리 기병(起兵)한 후로 싸움을 당하매, 송장 현수문만 못하지 아니하더니 오늘 저 소리 일곡(一曲)에 명장 약대 죽고, 우리 또한 죽게 되었으니 누를 한(恨)하리오. 이른바 천지망아(天之亡我)요, 비원지죄(非怨之罪)라.”
하고 언파(言罷)에 자문(自刎)하고자 하더니, 일성(一聲) 호통(號筒)에 석상왕과 양평공이 사로잡힌 바가 되니, 원수가 군중의 호령하여 함거(檻車)에 넣고 대진(大陣)을 돌리어 본진으로 돌아올새, 승전(勝戰)한 북소리가 원근에 진동하더라.
차시 상이 현원수의 오래 돌아오지 않음을 근심하사 부장 양기를 보내어 돕고자 하시더니, 날이 새고 사시(巳時) 지나도록 소식이 없음을 크게 근심하시더니, 문득 원수가 약대의 머리를 베어들고 승전하여 돌아옴을 보시매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여 마주 나와 원수를 맞으니, 원수가 급히 말에서 내려 복지(伏地)하오니, 상이 가로되,
“만일 경 곧 아니런들 짐의 목숨이 지금 살았으며, 경의 용맹 곧 아니면 어찌 적장 약대를 베리오. 짐이 그 공을 헤아리면, 천하를 반분하여도 갚지 못하리로다.”
원수가 성교(聖敎) 여차하심을 망극하여 고두(叩頭) 주하기를,
“신이 성은을 입사와 조정에 충수(忠隨)하오매 난시(亂時)를 당하오면 전장(戰場)에 나아가 도적을 소멸하옴이 군신지도(君臣之道)의 떳떳하온 일이오니, 폐하가 어찌 성교를 과도히 하사 신의 몸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상이 원수의 충성된 말을 더욱 기특히 여기시고 제장 군졸을 모아 소를 잡으며 술을 걸러 삼군을 호궤(犒饋)하고 사로잡힌 적장들을 원문(轅門) 밖에 처참(處斬)하라 하시고 즉일 회군할새, 자사(刺史) 수령(守令)이 지경(地境) 대후(大厚)하더라.
행하여 충주(忠州)의 이르니, 충주 자사 연숙이 상께 주하기를,
“근간(近間) 시절이 흉흉하여 처처에 도적이 다니오며, 주려 이산(離散)하는 백성이 많사오되 홀로 심한 곳은 서천(西天) 땅이오니, 복망 폐하는 진무사(鎭撫使)를 보내오사 백성을 무휼(撫恤)하소서.”
하거늘 상이 주사(奏辭)를 들으시고 근심하사 환국(還國)하신 후 안찰사(按察使)를 가리어 보내고자 하시더니, 원수가 주하기를,
“이제 도적을 평정하였으매 천하 백성이 안둔(安屯)치 못하오리니, 신이 비록 병혁(兵革)의 곤함이 있사오나 서천의 가 백성을 진정하고 기황(饑荒)의 주림을 면케 하오리니, 폐하는 근심치 마소서.”
하거늘 상이 원수의 몸이 곤뇌(困惱)하므로 서천에 보냄을 아껴 이르기를,
“경이 어찌 또 그 소임을 당하리오. 경을 위하여 허(許)하지 아니하나니 경은 무려(無慮)하라.”
원수가 굳이 고하여 가기를 원하오니, 상이 마지못하여 바로 서천으로 보내고, 상이 황성으로 돌아오사 제장 군졸을 상사(償賜)하시고 만조(滿朝)를 모아 진하(陳賀)하시며 만세를 부르더라.
각설, 장부인이 무량도에 가 현시랑과 함께 의지하여 부부가 매양 수문을 생각하고 슬픈 눈물이 마를 날이 없음으로 거의 죽게 되었더니, 갈수록 팔자가 불행하여 석상왕의 난을 만났으니 무량은 서천 땅이요, 석상국에 가까운 지라.
난시(亂時)를 당하니 밥을 얻어먹지 못하여 여러 날 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부부가 서로 다니며 주린 양을 채우더니, 일일은 그곳 백성이 이산하여 오야촌으로 가는지라.
현시랑의 부부도 함께 오야로 가더니 도적이 폐야(蔽野)하여 사람을 죽이고 양식을 탈취하는지라. 현시랑이 도적을 만나 약간 얻은 양식을 도적에게 잃고 부인 장씨를 찾으니 간 곳이 없는지라.
사면으로 찾되 만나지 못하매 필연 도적에게 죽은가 하여 주야로 통곡하며, 멀리 가지 못하는 죄인이매 다만 무량을 떠나지 못하더니, 천자가 친정(親征)하사 도적을 파하시고 황성의 회환(回還)하사 옛날 시랑 현택지의 무죄함을 깨달으시고 특별히 죄명(罪名)을 사(赦)하시며, 인하여 계양(桂陽) 태수(太守)를 내리시니,
사관(辭官)이 급히 내려와 현시랑을 찾아 계양으로 도임(到任)하게 하시니, 현시랑이 북향(北向) 사은(謝恩)하고 계양의 가 도임하니, 어찌 즐겁지 않으리오마는, 부인 장씨 수만 리 적소(謫所)에 내려와 또 실산(失散)함을 생각하매 눈물이 샘솟듯하여 심장을 사르며 어느 날 만남을 원하더라.
이적에 장부인이 도적에게 쫓기어 현시랑을 잃고 찾을 길 없어 오야촌에서 있더니, 순무(巡撫) 어사(御史)가 내려와 이향(離鄕)한 백성은 제 본 곳으로 돌려보내고, 주린 백성은 창고를 열어 진휼(賑恤)하니 장부인이 도로 무량으로 가는지라.
순무사(巡撫史)가 친히 점고(點考)하여 보낼새, 어사가 문득 장부인의 턱 아래 혹이 있음을 보고, 마음이 자연 슬퍼 자기 모친을 생각하고 가까이 옴을 일러 별좌(別坐)하고 묻기를,
“부인의 행색을 보니 여항(閭巷)의 사람은 아닌가 싶으니 무슨 일로 이곳에 사시니까?”
부인이 어사의 친문(親問)함을 들으매,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고 이르기를,
“첩이 본디 경사(京師) 사람으로 가군(家君)이 적거(謫居)하오매 다만 아자(兒子)를 데리고 금릉 땅에 사옵더니, 운남의 난을 만나 아자를 잃고 의지할 곳이 없으매, 이곳 가군 적소로 왔더니 갈수록 팔자가 기구하여 또 난을 만나매, 가군을 잃고 이곳의 혼자 의지하온 지 오래지 아니하옵더니, 이제 어사또의 하문하오심을 얻사오니 진정(眞情)을 발(發)하오매 어찌 슬프지 아니하오리까?”
하며 누수(淚水)가 여우(如雨)하니 어사가 그 부인의 말을 들으매 자연 슬퍼 흉격(胸膈)이 막히오고 호흡을 통(通)치 못하더니, 문득 가졌던 봉서(封書)를 떼어보니 하였으되,
‘갑자(甲子) 추구월(秋九月) 이십사일에 도적을 파(破)하고 대공을 이룬 후 오야의 들어가 실산한 부모를 찾으리라.’
하였거늘, 어사가 놀라 즉시 부인 앞에 가까이 앉으며 묻기를,
“그리하오면 아자의 이름이 무엇이며 몇 살이나 되었더니까?”
부인이 탄하며 이르기를,
“아자의 이름은 수문이요, 성은 현이요, 겨우 다섯 살 되어 잃었나이다.”
원수가 이 말을 듣고 계하(階下)의 내려 재배 통곡하며 이르기를,
“불초자(不肖子) 수문이로소이다.”
하며 모친을 붙들고 방성대곡(放聲大哭)하니, 장부인이 천만(千萬) 몽매(夢寐)의 아자 수문이 왔음을 알고 일변 반갑고 일변 놀라,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하고 자세히 보니 과연 어려서 모습이 있거늘, 어사의 손을 잡고 통곡하며 이르기를,
“내 너를 잃은 지 벌써 십삼 년이라. 생사를 알지 못하여 주야로 설워하더니 이제 몸이 저렇듯 그 사이 영귀(榮貴)하여 산 낯으로 모자가 상봉하니, 이는 하늘이 도우심이로다.”
어사가 울며 이르기를,
“소자가 어려서 모친 무릎에 앉아 매양 모친 턱 아래 있는 혹을 만지며 놀던 일과, 모친이 소자를 안으시고 이르시되, 네 부친이 적소에 계서 너를 오죽 보시고 싶으랴 하시던 말씀이 생각하오면 희미하오나, 누구에게 물을 곳이 없더니, 소자가 과거볼 때에 창두(蒼頭) 차복이라 하고 후히 대접하며 자세히 가르치기로 부모 찾기를 원하오나, 외람히 벼슬에 참여한 후로 풍진(風塵)의 요란함이 있사와 갑주(甲冑)를 벗을 날이 적으므로 천연(遷延)하였더니, 이제 모친은 만나거니와 부친을 어느 날 만나리까.”
하며 주인하였던 사람을 불러 그 사이 은혜를 이르며 은자(銀子)를 주어 정을 표하고, 위의(威儀)를 갖추어 모부인을 모시고 올라올새, 먼저 상께 표를 올려 서천 제읍(諸邑)이 안둔함을 상달(上達)하고, 버금 실산하였던 모친 만난 소유(所由)를 주달(奏達)하였더라.
원수가 모부인을 뫼시고 올라올새, 소과(所過) 군현(郡縣)이 지경 대후하며 천하의 희한한 일도 있다 하며 분분(紛紛) 치하하더라.
여러 날 만에 소흥현의 다다라 문득 석공을 생각하고, 그 집의 소식을 물으니 혹(或)이 답하기를,
“석참정(石參政) 부인 상시(常時) 가산이 탕패(蕩敗)하여 살 길이 어려우므로 동리 백성을 부치어 재물을 구하다가, 혹 아니 주면 악형(惡刑)으로 침노하니 동리 백성이 살 길 없어, 혹 도망도 하며 혹 욕(辱)도 하더니, 기간에 불행한 사람이 있어 그 집에 잡히어 악형을 당하더니, 인하여 죽으매 살인으로 얽히어 그 집 석생(石生)이 살인 원범(原犯)이 되었으매 지금 옥중의 갇히어 살지 못하겠다.”
하거늘, 원수가 청파(聽罷)에 방씨 요악(妖惡)을 짐작하나, 악장(岳丈)의 유언을 생각하고 그 석침을 불쌍히 여기며 즉시 태수를 보고 석침을 백방(白放)하고, 석침을 불러 보니 석침이 알지 못하고 다만 머리를 조아 은혜를 사례하니, 원수가 이르기를,
“네 나를 알 소냐. 얼굴을 들어 자세히 보라.”
석침이 곡절을 알지 못하고 잠깐 눈을 들어 보니, 여러 해 오매불망(寤寐不忘)하던 매부 현생(玄生)과 방불(髣髴)하되, 그 실사(實事)를 알지 못하여 묵묵부답(黙黙不答)이거늘, 원수가 이르기를,
“나는 곧 네 매형이라. 어찌 몰라 보느뇨?”
하고 가내(家內) 안부를 물으니, 석생이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고 말을 내지 아니하더니, 오랜 후 정신을 차려 이르기를,
“현형(玄兄)이 나가신 후로 소식을 알지 못하더니, 이제 매형이 저렇듯 영귀하여 죽을 인생을 살게 하오니 은혜난망이오나, 소제(小弟)는 모친의 편협(偏狹)으로 이런 가화(家禍)를 당하오니 참괴(慙愧)함을 이기지 못하리로소이다.”
원수가 즉시 석침을 당상(堂上)의 올리고 전후수말을 물으며, 일변(一邊) 자사에게 전령(傳令)하여 제전(祭典)을 차리되, 석참정 산소로 등대(等待)하라 하더라.
각설. 천자가 환국하신 후로 현원수의 돌아옴을 날로 기다리더니 문득 표를 올렸거늘 보시니 서천 백성을 진무하고 난시에 실산하였던 모친을 만나 함께 돌아오는 표문(表文)이라.
상이 남필(覽畢)에 그 진충보국(盡忠保國)함을 못내 일컬으시며 또한 모친을 만남을 희한히 여기사 가로되,
“대원수 현수문은 문무가 겸비(兼備)하고 충효가 쌍전(雙全)하니 만고의 희한한지라. 어찌 송실의 보필지신(輔弼之臣)이 아니리오.”
하시고, 벼슬을 돋우사 금자(金紫) 광록대부(光祿大夫) 우승상(右丞相) 겸 계림후(鷄林侯) 위국공(魏國公) 삼도순무어사(三道巡撫御史)를 내리시고, 그 모친은 정경부인(貞敬夫人) 직첩(職牒)을 내리오사 사관으로 하여금 주야로 달려가게 하시니,
이때 사관이 교지를 받들고 원수를 찾아 내려오다가 소흥현(紹興縣)에 이르러 원수의 행차를 만나니, 원수가 사관을 맞아 교지를 받잡고 북향사배하며 성은이 융성함을 망극하여 눈물을 흘리니, 열읍(列邑) 수령이 추앙(推仰) 않는 이 없어 행여 무슨 죄에 걸릴까 저어하더라.
승상이 사관을 돌려보내고 모부인(母夫人)께 이 일을 고하며, 즉시 석공 분묘(墳墓)에 올라가니 벌써 포진(鋪陳) 범절(凡節)과 제수(祭需)를 등대(等待)하였더라. 승상이 석공 묘전(墓前)에 나아가 제문을 지어 제하니, 그 제문에 이르기를,
‘모년 모월 모일의 금자 광록대부 우승상 겸 삼도순무어사 소서(小壻) 현수문은 삼가 악장 석공 묘하의 고하옵나니, 오호(嗚呼)라. 소자가 일찍 부모를 실리(失離)하고 혈혈단신이 정처 없이 다니매, 그 추한 모양이 인류(人類)의 섞이지 못하거늘, 악장이 거두어 사랑하시니 그 은공은 태산이 가벼웁고 하해(河海) 얕거늘, 하물며 천금(千金) 재녀(才女)로 호연(好緣)을 허(許)하시니 쇄골(碎骨) 분신(焚身)하여도 어찌 은혜를 갚으리까. 그러나 소자의 운수가 불길함을 면치 못하여 잠깐 은혜를 잊고 귀택(貴宅)을 떠나오매, 우연히 문무과의 참방하여 외람히 조정에 충수하오매, 전장의 나아가 도적을 파하고 벼슬이 일품의 거하오니 천은이 망극하온지라. 악장의 애휼지택(愛恤之澤)이 아니면 어찌 목숨이 보전하여 이에 이르리까.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악장의 유교(遺敎)를 봉행(奉行)하여 사사(事事)의 영험(靈驗)하심을 보오니, 어찌 알으심이 이 같사오며, 또한 처(妻)의 열행(烈行)이 무상(無上)하여 여화위남(女化爲男)함을 보오니 어찌 감동치 아니리까. 그러나 금일 침아를 만나니, 악장을 만나 뵈옴 같은지라. 슬프다. 석일 은공을 어찌 잊으리까. 만일 악장의 영혼이 계실진대 한 잔 술을 흠향(歆饗)하소서.’
하였더라.
읽기를 마치매 일장통곡하니 산천이 슬퍼하는 듯하더라. 석생(石生)이 또한 옛일을 생각하고 슬피 통곡하니 승상이 위로하고 산의 내려 석부(石府)로 이르니 장부인이 벌써 석부에 와 아자 현승상이 돌아옴을 기다리더라.
이때 방씨 현생이 나간 후로 마음의 시원하여 앓던 이 빠짐 같더니, 여러 세월이 지난 후 어찌 귀히 되어 석공 산소의 소분(掃墳)하고 집에 이르름을 듣고 대경하여 놀란 기운이 가슴에 가득하매, 한 술 물도 먹지 아니하고 전일(前日)을 생각하여 어찌할 줄 모르더니, 이윽고 현승상이 들어와 배알(拜謁)하거늘, 방씨 황망이 답례하고 무류(無謬)히 앉았거늘, 승상이 방씨의 기색을 알고 문후(問候)하는 말을 마치매 방씨 이르기를,
“내 석일(昔日) 현서(賢壻)를 구태여 괄시함이 없으매, 그대 스스로 집을 버리고 나가니 내 마음이 심히 불안하거니와, 여아(女兒)가 또한 그대의 생사를 알지 못하여 주야 슬퍼하더니, 인병불기(因病不起)하여 세상을 버린 지 벌써 삼 년이 지나는지라. 이제 그대 저처(底處)로 몸이 영귀함을 보니 제 살아 있으면 영화를 함께 보리니 이 일을 생각하면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오.”
하고 눈물을 흘리거늘, 승상이 이 말을 듣고 짐짓 모르는 체하여 놀라 이르기를,
“소서의 팔자가 사오나와 오 세에 부모를 실리하고 정처 없이 다니니, 그 추한 몸이 사람 같지 아니하거늘 상공이 거두어 애육(愛育)하사 귀소저(貴小姐)로 배우(配偶)를 정하시매 상공 유교(遺敎)를 잊지 아니하고, 소저를 찾아 부귀를 함께 지낼까 하였더니, 이제 소서로 말미암아 세상을 버렸으니, 소서가 무슨 낯으로 악장 분모에 가 뵈오며 악모(岳母)를 대하리까. 그러나 그 산소나 가르쳐 주소서.”
방씨 이 말을 들으매, 언사(言辭)가 대덕(大德)함을 중심(中心)에 헤아리고, 무슨 말로 대답할꼬 하여 묵묵부답이러니, 양구(良久) 후 희허(噫虛) 탄하며 이르기를,
“제 죽은 후 그대의 사생(死生)도 알지 못하고, 또한 혈식(血息)이 없음으로 임자 없는 신체라 하여 화장(火葬)을 하였으니, 이 일을 생각하면 더구나 면목이 맺혀 말을 못하노라.”
승상이 방씨의 간특(奸慝)함을 아나, 본디 관후장자(寬厚長者)이라. 조금도 불쾌히 여기지 아니하고, 석생을 불러 가져온 바 금은을 주며 그 사이 노모(老母)를 봉양하라 하고, 재성각에 가 전에 있던 처소를 보니 자취 완연하고, 석공의 가르치시던 말씀이 들리는 듯하여 비창(悲愴)한 눈물이 관대(冠帶)를 좇아 흉배(胸褙)를 적시는지라.
인하여 석공 사묘(祠廟)에 하직하고 방씨에게 이르기를,
“소서가 국사(國使)로 왔으매 중한 절월(節鉞)이 밖에 있어, 오래 지체함이 불가한고로 지금 떠나노라.”
하고 모부인을 뫼시고 길을 떠날새, 당초 장부인이 시비 채섬을 데리고 무량으로 갔더니 난리를 만나 분산(分散)하여 함께 오지 못하였더니, 어찌 이 일을 알고 뒤를 따라 왔는지라. 장부인이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여 함께 올라오니 채섬은 보교(步轎)를 태웠더라.
소과(所過) 열읍(列邑)이 명함(名銜)을 들이고 지경 대후하더니, 계양의 이르러는 태수가 공장(公狀)과 명함을 들이거늘, 보니 계양태수 현택지라 하였거늘, 승상이 크게 의혹하여 혹 동성(同姓)이 있는가 하고 장탄(長歎) 불리(不離)하더니, 모부인 장씨 급히 승상을 청하여 이르기를,
“아까 일몽(一夢)을 얻으니 너의 부친이 이르되, 아자 수문을 데려왔다 하며 통곡하거늘, 놀라 깨어나니 마음이 어지러워 너를 청함이니 오늘날 무슨 소식을 들을 듯하도다.”
승상 이르기를,
“아까 본현(本縣)의 명함을 보니 부친의 성함과 같은지라. 심히 괴이하도소이다.”
장부인이 또한 의아하여 수색(愁色)이 만면하거늘, 승상이 자연 기운이 막혀 호흡을 통하지 못하더니, 문득 봉서를 생각하고 떼어보니, 하였으되,
“갑자(甲子) 동 십일월의 우승상 위국공에 이르고 계양 땅을 지나다가 부자가 상봉하리라.”
하였거늘, 승상이 남필(覽畢)에 신기함을 탄복하고 대경(大驚) 대희(大喜)하여 즉시 태수를 청하여 들어오라 하니, 태수가 황공하여 무슨 죄가 있는가 하고 계하에 이르러 배알하니, 승상이 급히 뜰에 내려 황망이 답례하고 함께 당(堂)에 올라 자세히 보니 백발노인이라.
체도(體度)가 단아(端雅) 수려(秀麗)하고 기위(奇偉) 엄숙하여 호호(皓皓)한 수염이 무릎에 가까운 지라. 승상이 일견(一見)의 유체(流涕)하며 이르기를,
“감히 묻잡나니 자제가 있나이까?”
태수가 이르기를,
“소관이 본디 자녀간(子女間) 두지 못함을 한하더니, 늦게야 일자(一子)를 두어 후사를 이을까 하였더니, 제 오세에 이르러 소관이 무량도에 정배하오매 집에 가 다녀가지 못하므로, 제 얼굴을 보지 못하고 처에게도 이별을 이르지 못하고 바로 적소에 내려가 집안 소식을 전하지 못하더니, 제 장씨 난을 만나 아들을 잃고 의지할 곳이 없어 소관의 적소로 찾아오매, 요적(寥寂)함은 면하오나 귀히 여기던 자식을 잃었사오니, 벌써 죽어 뼈도 남지 못하리로되, 완명(頑命)이 보전하여 몽은(蒙恩)하기를 바라더니, 갈수록 흉한 운수를 만나 석상의 난을 당하오매, 또 그곳에서 처를 잃고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더니, 천은이 망극하여 소관의 죄명을 푸시고 탕척서용(蕩滌敍用)하여 이 고을 태수를 내리시니, 마지못하여 도임은 하였으나, 처자를 생각하고 세월을 보내더니 오늘날 승상 노야(老爺)의 행차(行次)가 욕림(辱臨)하사 하문(下問)하심을 얻사오니, 소관의 심사가 자연 좋지 못하도소이다.”
승상이 청파에 그 부친이심을 짐작하고 우(又) 묻기를,
“아자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시니까?”
답하기를,
“수문이로소이다.”
승상이 급히 당(堂)에 내려 재배 통곡하며 이르기를,
“불초자(不肖子) 수문이로소이다.”
하고 방성대곡하니 태수가 어린 듯이 앉았다가, 그제야 아자 수문임을 알고 붙들고 통곡하니, 열읍 수령이 모두가 이 일을 보고 희한히 여기더라.
태수가 수문을 붙들고 전후수말을 자세히 무르며 신기히 여기더니, 승상이 모부인을 만나 뫼시고 오는 말에 이르러는 태수가 더욱 방성통곡하니, 시비 채섬 또한 통곡하고 듣고 보는 사람이 다 우니, 모두 우는 빛이라.
승상 부자와 부인이며 시비 채섬과 일당(一黨)의 모이어 지난 일을 일컬으며 종일토록 즐기고 날이 밝은 후, 승상이 또 표를 올려 부친 만난 소유(所由)를 상달(上達)하였더니 상이 보시고 희한히 여기사 가로되,
“현택지, 수문의 부친인 줄 벌써 알았던들 어찌 무량도에 오래 두었으며 벼슬을 돋우지 아니하리오.”
하시고, 현택지로 양현후(陽縣侯) 초국공(楚國公)을 봉하시고 사관을 보내시니, 사관이 주야(晝夜) 배도(倍道)하여 계양에 이르매, 태수와 승상이 교지를 받자와 북향사배하고 황은이 감축함을 못내 일컬으며, 사관을 돌려보내고 태수가 신관(新官)과 교체(交替)하며 길을 떠나 함께 올라올새, 금릉 선산(先山)의 올라 소분하고, 고택(故宅)을 찾아보니 형용(形容)은 의구(依舊)하나 풀이 사면에 무성하였으니, 초창(悄愴)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웃 백성을 불러 금은을 주며 옛 정을 표하고, 여러 날 만에 황성의 득달하니 상이 승상 부자의 돌아옴을 들으시고, 궐문 밖에 나와 맞으시니 승상 부자가 복지 사은하온대, 천자가 반겨 승상의 손을 잡으시고 가로되,
“짐이 경을 만 리 외에 보내고 염려를 놓지 못하였더니, 수차 올린 표를 보고 무사히 열읍 백성을 진무함을 알았으니, 경의 효성이 지극하여 실산한 부모를 찾아 함께 돌아옴을 들으니 만고에 희한한 일이라. 어찌 기쁘지 아니 하리오. 그러나 짐이 경의 부친을 알지 못하여 오래 무량도 악풍(惡風)을 쏘이게 하였으니 짐이 어찌 용열(容悅)함을 면하리오.”
승상 부자가 면관(免冠) 돈수(敦壽)하며 이르기를,
“신의 부자가 천은이 망극하여 외람히 높은 벼슬에 충수하오니, 복이 손(損)할까 두려우매 동동촉촉(洞洞燭燭)하여 몸 둘 바를 알지 못하옵거늘, 폐하가 갈수록 성교 여차하시니 도리어 후회 있을까 저어하나이다.
상이 더욱 기특히 여기시고 만조를 모아 크게 잔치하시고, 출전하였던 제장을 불러 벼슬을 돋우시고, 사졸(士卒)을 상사하시며 조회를 파하시니 승상 부자가 퇴조(退朝)하여 차복이 있는 곳으로 오니, 모부인이 석부인으로 더불어 말씀하고 또한 집을 크게 고쳤으니, 이는 벌써 나라에서 고쳐 주심이라. 차복이 초국공과 승상을 모셔 지극히 섬기니 가중사(家中事)를 총찰(總察)하게 하더라.
차시 천자가 승상의 공을 기린각(麒麟閣)의 올리시고, 단서(丹書) 칠 권을 종묘(宗廟)에 두시사 만대(萬代)의 유전(留傳)하게 하시고, 현승상을 명초(命招)하사 이르기를,
“짐이 경의 공을 갚음이 적기로 이제 위왕(魏王)을 봉하나니, 경은 위국(魏國)에 가 치국안민(治國安民)하면 짐이 꺼리는 바를 면할지라.”
하시고, 대완마(大宛馬) 천 필을 사급(賜給)하시니, 승상이 면관(免冠) 돈수(敦壽)하며 이르기를,
“신이 하방(下方)의 포의(布衣) 서생(書生)으로 우연히 문무방의 참여하여 약간 공이 있다 하옵고, 벼슬이 일품(一品)에 거함도 외람하여 황공무지(惶恐無地)하옵거늘, 이제 폐하가 또 왕작(王爵)에 나아가라 하시니 이는 죽사와도 감히 당치 못하오리니, 폐하가 어찌 이런 조서를 내리어 신의 외람함을 더하고자 하시나니까.”
상이 불윤(不允)하시고 퇴조하라 하시니, 승상이 옥계의 머리를 조아리니 흐르는 피 이어지되, 연(連)하여 불윤하시니 승상이 마지못하여 사은(謝恩) 퇴조하고, 본부에 돌아와 부친 초국공과 모부인께 탑전(榻前) 설화를 고하고 갈수록 황은이 망극함을 일컫더라.
각설, 제남후(諸南侯) 조길은 황제 지친(至親)이라. 매양 찬역(簒逆)할 뜻을 두어 군마를 많이 모으고 연습하며, 용력(勇力) 있는 사람을 모아 병(兵)을 일으키고자 하되, 다만 현수문이 두려워 감히 생의(生意)치 못하는지라.
차시 한 사람이 있으니 성명은 우사기라. 용력이 과인(過人)하므로 일찍 별장(別將)을 하였더니, 현승상이 토번(吐蕃)을 칠 때에 장계(狀啓) 지완(遲緩)한 죄로 죽이려 하다가 사(赦)하고 결곤(決棍) 사십 도(度)로 내쳤더니 벼슬도 못하매,
제남후를 찾아보고 함께 모역(謀逆)하니 제남후가 그 용력과 재조를 기특히 여겨 괴수(魁帥)를 정하였더니, 차시 현수문이 나라의 유공함을 밉게 여겨 우사기로 하여금 없이 하고자 할새, 제남후가 칼을 주며 이르기를,
“그대 이 칼을 가지로 궐하(闕下)의 가 이리이리 하면 천자가 반드시 현수문을 죽이지 아니하면 원찬(遠竄)하리니 그대는 이 일을 행하라.”
우사기 응낙하고 가니라.
차시 천자가 미양궁의 계시더니 재화(災禍)가 있음을 피하사 태양궁에 옮기시니, 태양궁은 궐문(闕門)에서 깊지 아니한지라. 우사기 본디 용력이 있어 능히 십 장(丈)을 뛰는지라. 우사기 칼을 들고 궁장(宮牆)을 뛰어 넘어 미양궁을 찾아다니더니, 문 지킨 장수에게 잡힌 바가 되어 천자께 아뢰되, 상이 진노(震怒)하사 급히 오천문에 전좌(殿坐)하시고 그 놈을 잡아들여 국문(鞫問)하시니, 우사기 주하기를,
“승상 현수문이 신에게 이르되, ‘내 국가를 위하여 허다(許多) 도적을 파하매 그 공이 적지 아니하되, 천자가 거짓 대접하는 체 하시고 좋지 않은 위왕을 시키시니 마지못하여 위국으로 가려니와, 실로 나를 위함이 아니니, 네 이 칼을 가지고 궐중(闕中)의 들어가 상을 하수(下手)하면, 그 공으로 너를 벼슬을 중히 시키리니 부디 내 말을 허수히 알지 말라.’ 하옵거늘, 신이 그 말을 듣고 이에 미침이오니 다른 일은 없음이로소이다.”
상이 이 말을 들으시고 헤오되,
‘이는 필연 어떤 역적이 있어 현수문을 없이 하고자 함이로다.’
하시고, 성심(聖心)이 진노하사 먼저 이 놈을 엄형(嚴刑)을 중히 하매 제 어찌 견디리오. 개개(箇箇) 복초(服招)하는 말이 무비(無非) 현수문을 모함하는 말이라.
황제 크게 노하사 급히 우사기를 처참하고 군을 발하여 제남후 조길을 잡아 죽이려 하실새, 급히 위왕 현수문을 명초(命招)하시니, 이때 위왕이 부중(府中)에 있어 위국으로 가려하고 치행(治行)하더니, 불의에 이런 변고가 있음을 듣고, 위왕 부자가 궐외의 이르러 죄를 기다리더니, 문득 부르시는 패문(牌文)을 보고 배복(拜伏) 이르기를,
“이제 수문이 죄명을 면치 못하고, 심상(尋常)히 탑하(榻下)에 입시(入侍)하옴이 신자의 도리 아니오니, 황상의 명교(命敎)를 봉승(奉承)치 못하리니, 이 일로 상달(上達)하라.”
하고 부자가 관(冠)을 벗고 땅에 초석(草席)을 깔고 궐외에 엎드리거늘, 명관(命官)이 들어가 이대로 상달하오니, 상이 들으시고 대경하사 가로되,
“위왕 현수문은 나의 고굉지신(股肱之臣)이라. 비록 흉적(凶賊)이 있어 참소(讒訴)하는 자가 있으니 그 충심(忠心) 효행(孝行)은 거울 같이 알거늘, 어찌 그런 거조(擧措)를 하여 나의 마음을 불안케 하랴.”
하시고 위왕께 조서를 내리어 위로하시며 빨리 입시함을 재촉하시니, 위왕 부자가 황공하여 즉시 관을 갖추고 탑하에 복지하오니, 상이 반기사 이르기를,
“짐이 경의 충성을 아나니, 비록 참소하는 말이 있으나 옛날 증모의 북 던지고 달아남을 본받지 않으리니, 경은 안심 찰직(察職)할지어다.”
위왕이 다시 일어나 배주(拜奏)하기를,
“성교(聖敎) 여차하옵시니 아뢸 말씀 없거니와, 신의 이름이 벌써 죄인(罪人)구초(口招)에 씹혔사오니, 복망 폐하는 신의 작위를 삭(削)하사 후인(後人)을 징계(懲誡)하소서.”
상이 불윤하시고 가로되,
“이제 제남후 조길이 반함을 꾀하매, 경의 용맹을 꺼려 경을 없이 하고자 함이니, 급히 조길을 잡아 죽이고자 하나니, 경 곧 아니면 능히 당할 자가 없는지라. 경은 모름지기 행하라.”
하시고 정히 조서할 즈음에 좌승상 설개 급히 들어와 주달하되,
“난데없는 도적이 황성 밖에 이르러 백성을 무수히 죽인다.”
하거늘 상이 대경하사 급히 위왕으로 하여금 어림군(御臨軍) 삼천을 풀어 주시며 그 도적을 잡으라 하시니, 이 도적은 제남후 조길이 벌써 모사(謀事)가 발각한 줄 알고 기군(起軍)함이라.
위왕이 군을 거느리고 융복(戎服)을 갖추어 입고 토산마(土産馬)를 타고 전에 쓰던 자룡검(子龍劍)을 비껴들고 나아가니, 조길의 군마가 개미 같이 왕래하거늘, 위왕이 여성(厲聲) 대매(大罵)하기를,
“무지한 필부(匹夫)가 외람한 뜻을 두고 기병 범궐(犯闕)하니 네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
하고 달려드니 조길이 답하기를,
“천자가 무의(無義) 무도(無道)하여 나 같은 충량지신(忠亮之臣)을 멸시(蔑視)하고 간신을 가까이 하므로, 오래지 아니하여 천하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줄 알고, 차라리 나 같은 황친(皇親)이나 가짐이 좋을까 하여 하늘께 명을 받잡고 옥새를 찾으려 하거늘, 네 어찌 천시(天時)를 알지 못하고 나를 항거하고자 하느뇨? 이제 네 머리를 베어 나의 위엄을 빛내리라.”
하고 달려들어 수합을 싸우더니, 위왕의 자룡검이 번듯하며 조길의 머리 내려치는지라. 그 머리를 기에 달고 들어와 상게 주달하오니, 상이 초국공과 더불어 말씀하시다가 위왕이 반일지내(半日之內)에 반적(叛賊)의 머리를 베어옴을 크게 기특히 여겨 가로되,
“경의 용병(用兵)은 고금에 희한하도다.”
위왕 이르기를,
“이 조길 같은 도적은 서절구투(鼠竊狗偸)이오니 어찌 족히 근심하오리까?”
상이 기뻐하사 도리어 위국에 내려가면 조정이 비게 됨을 슬퍼하시나, 마지못하여 떠나감을 재촉하시니 왕이 또한 애연(哀然)하나, 인하여 하직하고 부친 초국공과 모부인 장씨와 부인 석씨와 시비들을 거느리고 길을 차려 위국으로 내려가니, 풍성(豊盛)한 위의 거룩하더라.
각설, 선시(先時)에 석상왕이 반하여 현원수로 더불어 싸우다가 패하매, 약대와 양평공이 죽은 후로 그 가속(家屬)을 찾아 처참하더니, 약대의 여(女)는 이름이 노양춘이니 나이 십육이요, 양평공의 여는 계양춘이니 나이 십칠 세라. 미처 출가(出嫁)하지 못하고 집에 있더니, 자식을 다 잡아 죽임을 보고 도망하여 무계산의 들어가 숨고 둘이 약속하되,
“우리 조상이 다 번국(藩國) 신하(臣下)이라. 우리 부친이 불행한 때를 만나 현수문에게 목숨을 버린 바가 되었거니와 우리는 비록 남자는 아니나 아비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지하에 돌아가나 하면목(何面目)으로 부친을 뵈오리오. 요사이 들으니 현수문이 그 공으로써 위왕을 봉하여 위국으로 온다 하니 수문은 본디 소년이라. 우리 얼굴이 비록 곱지 못하나 제 우리를 보면 반드시 마음을 돌리어 가까이 보기를 구하리니, 이때에 우리 소원을 이루면 그 날 죽어도 한이 없으리니 어찌 다행치 않으리오.”
하고 위국에 가 보수(報讎)할 일을 꾀하더라.
재설(再說) 위왕이 길을 행하매, 서천 군마와 제신이 시위(侍衛)하였으니, 위의 거룩함이 진실로 왕자(王者)의 행함을 가히 알지라. 마침 소흥으로 지나더니 전군에 전령(傳令)하여 석참정 부중(府中)으로 사처(私處)를 정하라 하니라.
이때 방씨 가산이 점점 탕패(蕩敗)하여 조석(朝夕)을 이루지 못하더니 뜻밖에 위왕의 행차가 이른다 하거늘, 방씨 놀라 이르기를,
“내 집이 비록 빈한(貧寒)하나 사부(士夫)의 집이거늘 무슨 일로 내 집에 사처를 정하니 실로 괴이하도다.”
하고 황황(遑遑) 불이(不二)하더니, 이윽고 왕이 바로 내당으로 들어오거늘 앞에 앉아 침이 인도하여 들어오니, 다른 이 아니요, 곧 현생(玄生)이라.
건장한 위의 전보다 더하고 면류관(冕旒冠)에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백옥홀(白玉笏)을 쥐었으니, 봉(鳳)의 눈을 살피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수염이 가슴에 닿았으매 단정한 걸음으로 당상(堂上)에 오르거늘, 방씨 황망히 당하(堂下)에 내려서는지라.
왕이 오르심을 청하고 예(禮)하니, 방씨 어찌할 줄 알지 못하고 마음의 황공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니 왕이 묻기를,
“아까 침아를 보고 악모(岳母)의 안녕하심은 알았거니와 그 사이 향화(香火)나 끊지 아니하고 망녀(亡女)의 제사나 절(絶)치 아니하였나이까?”
방씨 대답하기를,
“왕이 옛일을 잊지 않으시고, 이처럼 찾아보며 봉제(奉祭) 범절(凡節)을 물으시니 황공 감사하거니와, 아무리 빈한하나 망녀의 제사는 이때까지 궐(闕)치 아니하였으니 제 죽은 날을 당하면 소첩(小妾)이 비감(悲感)하여 하나이다.”
정언간(定言間)에 시비 고하되,
“위국 중전(中殿) 낭랑(娘娘)이 시비 향랑을 데리고 오신다.”
하거늘, 방씨 이르기를,
“향랑은 죽은 소저의 시비라. 소저와 같이 세상을 이별하였거늘 네 어찌 그릇보고 와 분주히 구느냐?”
하고 꾸짖더니, 이윽고 위왕비(魏王妃) 칠보(七寶) 화관(花冠)에 운무의(雲霧衣)를 입고 쌍옥패(雙玉佩)를 찼으니, 무산선녀(巫山仙女)가 요지(瑤池)에 내림 같고, 월궁항아(月宮姮娥)가 옥황(玉皇)에 오름 같으니, 보기에 황홀하여 무슨 곡절을 알지 못하고 박힌 듯이 섰다가 이르기를,
“낭랑이 향촌(鄕村)의 외로운 사람을 보고 이다지 공경하시니, 황공무지로소이다.”
낭랑이 미급답(未及答)에 향랑이 급히 들어와 고하기를,
“낭랑은 곧 석소저라. 부인이 어찌 몰라보시나이까?”
하며, 문안을 드리거늘, 방씨 이 말을 듣고 대경실색(大驚失色)하여 안색(顔色)이 여토(如土)하고 눈의 동자(瞳子)가 없음 같아, 위비(魏妃)와 향랑을 이윽히 보다가, 다만 두 손을 비벼가며 서서 죽은 사람 같거늘, 왕이 좌(座)에 앉았다가 그 거동을 보고 즉시 침을 부르니, 침이 계하(階下)의 이르러 모친이 기망(欺罔)한 죄를 대죄(待罪)하니, 위왕비 침의 대죄함을 보고 친히 당(堂)에 내려 그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함께 당에 올라 곁에 앉히고 위로하기를,
“너를 그 사이 오래 보지 못하였더니, 이처럼 장성하니 어찌 기특하지 않으리오.”
하고, 방씨 앞에 나아가 위로하기를,
“태태(太太)는 과려(過慮)치 마소서. 이왕사(已往事)를 생각하시고 무색(無色)히 여기시나, 다 소녀의 운수가 불길(不吉)하옴이니, 생각하오면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 어찌 천륜지리(天倫之理)에 참괴(慙愧)함을 품으리까?”
하며 침아를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리거늘, 방씨 이 말을 듣고 더욱 무안하여 아무 말도 대답지 못하더라.
이날 왕과 비 석공(石公) 사묘(祀廟)에 나아가 함께 배알하고 슬피 통곡하며 재성각에 가 밤을 지낼새, 옛일을 생각하고 비회(悲懷) 교집(交集)하여 눈물흐름을 깨닫지 못하는지라.
날이 밝은 후 왕과 비 방씨께 하직하고 길을 떠나 여러 날 만에 위국의 이르니 문무백관이 모이여 천세(千歲)를 부르더라.
일일은 비(妃) 왕에게 이르기를,
“첩의 계모 방씨 비록 심사가 어질지 못하나, 이제 우리 영귀함을 보시고 심히 무안히 여기시니, 침아에게 뫼시고 오라 하여 수삼삭(數三朔) 뫼심이 어떠하니까?”
왕이 옳이 여겨 글월과 위의(威儀)를 보내었더니, 그 사이 방씨 애가 말라 죽고, 홀로 석생이 초토(草土)에 있기로 석생만 데려 왔다 하거늘, 왕비 침의 손을 붙들고 통곡하며 침을 불쌍히 여겨, 위국에 함께 있더라.
왕이 위국에 즉위(卽位)하여 그 부친 초국공으로 태상왕(太上王)을 봉하고 나라를 다스리니, 백성이 평안하여 길에 흐른 것을 줍지 아니하고 산에 도적이 없으니 위왕의 인덕을 가히 알리러라.
각설, 이때 계양춘 등이 무계산의 은거(隱居)하였더니, 위왕이 내려와 위(位)에 직(職)함을 듣고 노양춘과 함께 남복(男服)을 개착(改着)하고, 서동(書童)의 모양같이 하여 형제라 칭하고, 위국에 이르러 한 사람을 찾아 주인을 정하여 있으니, 이 사람은 위국 궁녀(宮女)의 아비라.
그 서동들이 도로 여복을 갖추고 의탁(依託)함을 구하거늘, 그 주인이 본디 자녀간 없음으로 심히 사랑하여 부녀지의(父女之義)를 맺고 함께 있으니, 계양춘 형제 인물이 일색(一色)이므로 동리 사람이 일컫지 않은 이 없으매, 자연 위국 궁녀들도 불러 보기를 자주하매 소문이 파다하여 위왕도 아는 지라.
위왕이 구경하고자 하여 그 여아를 부르라 하니, 계양춘 등이 마음에 기뻐 제 원(願)을 이룰까 하고 단장을 성비(盛備)히 하여 전하(殿下)에 이르니, 왕이 눈을 들어 자세히 보매 두 아이의 얼굴이 과연 아름다워 태도가 심히 정숙하나, 미간(眉間)의 살기(殺氣)가 은은(隱隱)하고 요기(妖氣)의 모양이 나타나는지라.
왕이 일견(一見)에 괴이 여겨 물리치니, 양춘 등이 물러와 소원을 이루지 못함을 한탄하더니, 문득 한 계교를 생각하고 의논하기를,
“우리 등이 궁녀에 참여하면 반드시 왕에게 근시(近侍)하리니, 왕이 비록 여색(女色)을 좋아 아니하나, 친압(親狎)함이 간절한즉 그 마음을 돌이키기 쉬우리니 어찌 때 좋지 않으리오.”
하고 궁녀 됨을 자원하였더니, 과연 궁녀에 충수(充數)하매 거짓 동류(同類)를 사랑하고 인의(仁義) 있으니, 모든 궁녀들도 다행히 여기더라.
차시 좌승상 노상경이 주하기를,
“요사이 궁중에 요기(妖氣)로운 기운이 있사오니, 신이 헤아리옵건대 궁녀 중 무슨 요열(鬧熱)이 있는가 하오니 전하는 살피소서.”
하거늘 왕이 크게 의혹하여 궁녀들을 초택(抄擇)하니, 과연 전에 불러보던 계양춘 형제 있는지라. 왕이 그 요녀(妖女)를 죽이고자 하되, 죄를 범(犯)치 않으므로 멀리 내치라 하니. 계양춘 등이 어찌할 수 없어 나오매 분노함을 이기지 못하여 도로 남복을 개착하고, 진국(晉國)을 찾아 가니 진왕(晉王)이 본디 천자를 원망하며 기병할 의사를 두었으나, 양국이 현수문에게 망함을 보고 생심(生心)도 발구(發口)치 못하였더니, 차시 양평공의 여(女) 계양춘이 진국의 와 궁녀 됨을 듣고 계양춘을 불러보니 천하의 드문 일색(一色)이라. 드디어 첩을 삼고 노양춘으로 대장 우골대의 첩을 삼게 하니라.
진왕이 주야로 계양춘에게 혹하여 놀며 이르기를,
“너의 부친이 현수문에게 망하니 너의 마음이 어찌 섧지 아니하랴?”
계양춘이 울며 이르기를,
“첩의 평생소원이 아비 원수를 갚고자 하되, 계집의 소견이 매양 좁기로 의사를 내지 못하였더니, 이제 왕이 첩을 위하여 한번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즉, 앙천지시(仰天之時)가 다 좋을까 하나이다.”
왕이 희(喜) 묻기를,
“어찌 이름이뇨?”
계양춘이 고하기를,
“이제 현수문이 조정을 떠나 수천 리에 있으니, 이때를 타 기군(起軍)하여 바로 황성을 치면 조정에 당할 장수가 없으매, 반드시 송제(宋帝)를 항복 받으리니, 왕이 스스로 천자위(天子位)에 직(職)하시면 현수문을 죽이기는 여반장(如反掌)이오니, 어찌 이를 생각하지 않으시니까?”
진왕이 청파(聽罷)에 무릎을 치며 이르기를,
“내 과연 잊었더니, 이제 네 말을 들으니 흉금(胸襟)이 열리는지라. 오늘로 좇아 일을 행하리라.”
하고 드디어 제장(諸將) 군졸(軍卒)을 조발(調發)할새, 우골대로 선봉을 삼고, 마골대로 후군장을 삼고, 호골대로 중군을 삼아, 정병 십만을 조발하여 황성으로 행할새, 진왕이 스스로 대원수가 되어 제장으로 의논하기를,
“우리 이제 행군하여 송제를 잡으려 하매 일이 발각하면 대사를 이루지 못하리니, 밤이면 행하고 낮이면 산의 숨어 사람이 모르게 행진하여 바로 황성을 치면 천자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사로잡히리니, 제장은 영을 어기지 말라.”
하고 행군을 재촉하니, 이때 노양춘이 우골대에게 이르기를,
“장군이 병을 거느리고 황성으로 향하매 첩이 또한 말 뒤를 쫓고자 하나니, 옛날 초패왕(楚霸王)도 우미인(虞美人)을 데리고 전장(戰場)에 다녔으니 족히 부끄럽지 않을지라. 쫓아다님을 원하나이다.”
진왕이 옳이 여겨 함께 행하니라. 우골대 등이 낮이면 산에 숨고 밤이면 길을 나니, 지나는 바에 자사(刺史) 수령(守令)이 알지 못하고 또한 위국이 수천 리 외에 있으매 위왕도 아득히 모르니 어찌 송실(宋室)이 위태치 않으리오.
이적에 진왕이 군을 몰아 함곡관에 이르니, 관을 지킨 장수 조현이 막거늘 일 합에 베고 달려 황도(皇都)에 이르니, 차시 천자가 불의(不意)에 변을 만나는지라. 성문을 굳게 닫고 어찔할 줄 모르더니, 상이 앙천(仰天) 탄하며 이르기를,
“짐이 매양 진국을 꺼리더니, 이제 반하여 적병이 성하에 이르매 조정에 당할 장수가 없고, 수문은 수천 리 밖에 있으매 누구를 믿고 사직(社稷)을 안보(安保)하리오.”
말을 마치며 용루(龍淚)가 종행(縱行)하니, 반부(班府) 중에 일인이 출반주(出班奏)하기를,
“신이 비록 재조가 없사오나 일지군(一枝軍)을 주시면 적병을 소멸하고 폐하의 근심을 덜리이다.”
모두 보니 정동장군 양기라. 상이 대열(大悅)하며 이르기를,
“경이 석일(昔日) 현수문을 따라 양국 도적을 파할 때에 소년대장으로 그 예기(銳氣)를 믿었거니와, 이제 벌써 백수(白鬚) 노장(老將)이라도 남은 용력이 있어 급한 도적을 파하고자 하니, 어찌 만행(萬幸)이 않으리오.”
하시고 즉시 수성군(守城軍) 십만을 조발하여 파적(破敵)하라 하시니, 양기 군을 거느리고 일성포향에 서문을 크게 열고 내달아 대호하기를,
“내 비록 노장이나 너 같은 쥐무리는 초개(草芥) 같이 알거늘 너의 오랑캐 감히 나를 대적할 소냐?”
하고 맞아 싸워 팔십여 합에 승부를 결치 못하더니, 우골대 거짓 패하여 달아나다가 도로 돌아서며 칼을 들어 양기의 머리를 베고, 좌충우돌하며 송황제 항복함을 재촉하니 능히 당할 자가 없는지라. 상이 유체(流涕)하며 이르기를,
“조정에 양장(良將)이 없고 밖에 도적이 급하니 이를 장차 어찌 하리오. 사람을 위국에 보내어 위왕 현수문을 청하면, 이 도적을 근심할 바가 없으되, 수천 리 밖에 어찌 사람을 보내며, 비록 보냄이 있으나 도적이 죽이고 보내지 않으리니 어찌 오백년 종사(宗社)를 오늘날 망할 줄 알리오.”
하고 슬피 통곡하니 조신(朝臣)들이 능히 말을 이루지 못하고 다만 체읍(涕泣)할 따름이라.
각설 위왕이 본국에 있은 지 벌써 수년이라. 천자께 조회(朝會)하려 하고 군마를 거느리고 황성으로 나아갈새, 진교역의 이르러 밤을 지내더니 문득 한 백발노인이 갈건(葛巾) 도복(道服)으로 표연(飄然)히 이르러 이르기를,
“나는 남악 화산의 일광대사이러니 급히 전할 말이 있기로 왔노라.”
하고 이르기를,
“이제 진국이 반하여 가만히 황성을 침범하매 그 위태함이 시각(時刻)에 있거늘 왕이 어찌 알지 못하고 구하지 않느뇨?”
하고 밖으로 나가거늘 위왕이 대사를 보고 반겨 다시 말을 묻고자 하다가 놀라 깨어나니 침상(枕上) 일몽(一夢)이라. 마음이 서늘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뜰에 내려 천문을 살펴보매, 과연 자미성(紫微星)이 희미하여 곤(困)함이 특심(特甚)하거늘, 무슨 변고(變故)가 있음을 알고 급히 군마를 물리고 천리 토산마를 채쳐 청수강을 건널새, 진관(鎭官)이 주하기를,
“진번(晉蕃)이 반하여 황성을 치매 황제의 사생(死生)이 어찌 된 줄 모르오니, 왕은 급히 구하소서.”
하거늘 왕이 대경하여 말을 채쳐 달려가니 일주야(一晝夜)에 일천삼백 리를 행하매 토산마가 곤하여 능히 가지 못하거늘, 왕이 잠깐 쉬어 피란(避亂)하는 백성에게 물으니 답하되,
“도적이 서문을 쳐 무수한 장수를 베고 궁성(宮城)을 앗으니 성중이 크게 위태하다.”
하거늘, 위왕이 이 말을 듣고 망극하여 나는 듯이 송진의 이르니, 벌써 송장(宋將) 양기 도적에게 죽고, 병마사 조철이 군을 거느리고 나와 싸울 마음이 없어 황황 망극(罔極)하더니, 위왕이 단기로 진을 헤치고 들어옴을 보고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여 울며 황상의 위태함을 이르니, 왕이 묻기를,
“황상이 어디 계시뇨?”
조철 이르기를,
“적병이 서문으로 들어가 싸우더니, 상이 어느 곳에 피하신지 알지 못하도소이다.”
위왕이 차언(此言)을 들으매 분기(憤氣) 충돌하여 조철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뒤를 따르라 하며, 서문의 이르러 적진을 엄살(掩殺)하는지라.
차시 진왕이 서문루(西門樓)의 올라 제장을 모으고, 송제의 항복함을 재촉하며 계양춘과 즐기며 이르기를,
“네 만일 남자로 났을진대 지혜 족히 천하를 얻어 용루(龍樓) 봉궐(鳳闕)에 높이 앉고 육국(六國) 제후(諸侯)의 조공(朝貢)을 받으리로다. 네 한 번 묘책을 내매 내 천하를 취하게 되었으니, 이는 천고의 희사(喜事)이라. 내 보위(寶位)에 오르는 날 너로써 황후를 봉하여 백년을 열락(悅樂)하리라.”
하니, 계양춘이 이 말을 듣고 양양자득(揚揚自得)하더니 문득 서문이 요란하며 일원(一員) 대장이 칼을 들고 진중을 시살(廝殺)하매 장졸이 무수히 죽고 호골대 또한 죽었는지라. 진왕이 대경실색하여 마골대로 나가 싸우라 하니, 마골대 진밖에 내달으며 꾸짖어 이르기를,
“네 무지한 필부(匹夫)가 천의(天意)를 알지 못하고 송제에 항복받은 우리에 항거하느뇨?”
하고 내달으니 위왕이 분발(奮發)이 충관(衝冠)하여 황금 투구에 은갑(銀甲)을 입고 천리토산마(千里土産馬)를 탔으며 손에 자룡검을 들고 내달으니, 사람은 천신(天神) 같고 말은 비룡(飛龍) 같더라. 소리를 크게 하여 꾸짖어 이르기를,
“나는 위왕 현수문이라. 너의 무도한 오랑캐 감히 황성을 범하니 어찌 하늘이 두렵지 않으리오. 빨리 나와 목숨을 재촉하라.”
하고 맞아 싸우더니 수합이 못하여 자룡검이 이르는 곳에 마골대의 머리 마하(馬下)에 내려지는지라. 위왕이 좌충우돌하여 적진을 짓밟으니 주검이 뫼 같고 피 흘러 내가 되었더라.
위왕이 바로 진왕을 베고자 하여 무인지경 같이 횡행(橫行)하니 적진 장졸이 현수문이란 말을 듣고 황겁(惶怯)하여 싸우지 아니하거늘, 위왕이 그제야 서문의 이르러 문을 열라 하니 문 지킨 장수가 굳이 막거늘,
“위왕 현수문 왔음을 천자께 아뢰라.”
하니, 이윽고 문을 여는지라.
이때 상이 성밖에 나가 피하지 못하고, 위왕 현수문만 생각하고 눈물을 내리오시며 항복하고자 하시더니, 문득 현수문이 와 적진을 물리치고, 서문을 열어 달라 하는 말을 들으시고, 대희(大喜)하여 꿈인가 생시인가 하시다가 문 외에 나와 맞으시니, 위왕이 말에서 내려 복지(伏地) 유체(流涕)하오니, 상이 위왕의 손을 잡으시고 유체하며 이르기를,
“경이 위국의 있으매 수천 리 외의 통기(通寄)함이 없거늘, 경이 어찌 알고 이르러 짐의 급함을 구하니, 이는 하늘이 경을 내시사 짐을 주심이로다.”
위왕이 읍주(泣奏)하기를,
“폐하의 곤하심이 다 신이 더디 온 죄로소이다.”
하고 알고 온 수말(首末)을 주달하오니, 상이 더욱 희한히 여기시며 파적(破敵)할 일을 의논하시니 위왕 이르기를,
“이제 적병이 성밖 십 리를 물려 진 쳤으니 폐하는 근심치 마소서.”
하고 토산마를 이끌어 내니 그 말이 죽었거늘, 위왕이 붙들고 통곡하며 이르기를,
“내 네 공을 힘입어 천자를 위하더니 네 오늘날 뜻밖에 나를 버리고 죽으니 내 어찌하리오.”
하고 슬퍼함을 마지아니하니 천자가 이를 보시고 크게 놀라사 타시던 대완마를 사급하시고 철기 삼천을 주시며, 임기로 선봉을 삼고 적진을 파하라 하시니,
위왕이 사은하며 즉시 군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니 적진 장졸이 멀리 바라보고 위풍(威風)에 쫓기어 강을 건너 진치고 나오지 아니하거늘, 위왕이 따라 강을 건너 진치고 제장을 불러 이르기를,
“예서 십 리만 가면 사곡이란 들이 있어 무성한 갈대가 백 리를 연(連)한 곳이라. 오늘 사경(四更)에 군사 하나씩 흘러가 그곳에 매복하였다가 명일(明日) 싸움에 적군이 그 앞을 지나리니, 일시에 불을 놓아 그 뒤를 치면 가히 진왕을 사로잡으리라.”
임기 청령(聽令)하고 물러나니라.
차시 진왕이 현수문에게 일군(一軍)이 대패함을 분노하여, 우골대로 선봉을 삼고 싸움을 돋우나, 위왕이 진문을 크게 열고 말에 올라 대매(大罵)하기를,
“너의 무도한 오랑캐 어찌 나를 당할 소냐. 빨리 나와 내 칼을 받으라.”
하고 맞아 싸워 삼십여 합에 승부를 결치 못하더니, 우골대 기운이 진(盡)하고 군마가 곤뇌(困惱)하매 군을 돌리어 본진으로 달아나거늘, 위왕이 급히 따르니 적진이 사곡으로 지나는지라. 문득 사곡에서 방포(放砲) 소리 나며 일시에 불이 일어나고 사면의 함성이 물 끓듯 하거늘 적진이 황겁하여 서로 항오(行伍)를 차리지 못하고 사산분궤(四散奔潰)하는지라.
진왕이 우골대를 붙들고 계양춘을 돌아보아 이르기를,
“이를 장차 어찌 하리오. 사면에 화광이 충천하고 복병이 대발(大發)하니 비록 날개 있어도 살기를 도모치 못하리로다.”
하고 방성대곡(放聲大哭)하니 장졸이 다 넋을 잃고 아무리 할 줄 모르는 지라. 위왕이 불 일어남을 보고 승승장구하여 적진을 시살하고 자룡검을 들어 우골대의 머리를 베어 내리치니, 진왕이 우골대의 죽는 양을 보고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이르기를,
“천지망아(天之亡我)요, 비전지죄(非戰之罪)라.”
하며 칼을 빼어 스스로 멱을 찔러 죽으니, 모든 군사가 손을 묶어 살기를 빌거늘, 위왕이 그 항졸(降卒)을 살려 보내고 진을 거두어 돌아올새, 진왕의 머리를 베어 기에 달고 승전고를 울리며 회군하더니 문득 한 계집이 애연(哀然)히 울거늘, 자세히 보니 전일 위국에서 보던 노양춘이라.
크게 괴이 여겨 인하여 죽이고 황성의 들어와 적진을 함몰(陷沒)함을 주달하오니, 상이 대열하사 가로되,
“먼저 경이 이르러 오매 짐이 보고 마음을 놓이더니, 이제 승전함을 들으니 마음이 더욱 평안한지라. 경의 충성이 하늘에 이름이라. 적병을 파하고 오늘날 진국 도적을 파하여 짐의 위태함을 건져 내었으니 천고에 쌍 없는 대공이라. 무엇으로 갚으리오.”
하시고 제장 군졸을 상사하시며 만조를 모아 크게 잔치하시고, 사방에 방 부처 백성을 안무(按撫)하고 조회를 파하시니, 위왕이 천은이 감축함을 사례하고 위국으로 돌아오니, 상이 십 리에 나와 전송하시고 떠남을 심히 결연(缺然)하사 용루(龍淚)를 내리시니, 위왕이 또한 눈물을 흘리고 이별하여 본국으로 돌아오니, 태상왕 부부와 왕비며 석침이 반겨 무사 환국(還國)함을 못내 일컫더라.
위왕이 매양 침을 사랑하매 벼슬을 주었으니 이날 그 벼슬을 돋우어 우승상을 삼으니, 위왕의 용맹함과 어진 덕택이 천하에 진동하더라.
현수문전 권지하(券之下)
차설 위왕 부모가 붕(崩)하거늘, 위왕이 거상(居喪)에 애회(哀懷) 지극하거늘, 천자가 들으시고 삼 년 조공을 말라 하시며 조문(弔問)하시니, 위왕이 천은을 일컫고 삼상(三喪) 마친 후 일 년에 한 번씩 조회에 참예(參預)하니 상이 가로되,
“짐이 이제 연만(年晩)하여 경을 오래 보지 못하리니 한심하거니와, 태자가 있으니 족히 종사를 이으리로되, 아는 일이 적으매 치국(治國)함을 염려하나니 경의 아들 하나를 주어 태자를 돕게 하면 짐의 마음이 좋을까 하노라.”
위왕이 돈수(敦壽) 주하기를,
“신의 자식이 여럿이 있사오니 다 용렬(庸劣)하오니 어찌 감당하오리까마는, 제이자(第二子) 담으로 태자를 뫼시게 하오면, 반드시 유익함이 있을 듯하옵고, 또 세 사람을 천거하오리니 백마천과 기수하와 여동위라. 이 사람이 족히 태자를 보필하오리니 무슨 염려 있으리까?”
상이 대열하사 사자를 보내어 현담을 부르시며, 삼인을 불러 인견(引見)하시고 이르기를,
“그대 등을 위왕이 천거하여 태자를 돕게 함이니 여등(汝等)은 종사를 보전케 하라.”
사인(四人)이 사은하고 태자를 뫼시니라.
위왕이 본국에 돌아감을 하직하오니 상이 타루(墮淚)하며 이르기를,
“짐의 나이 많고, 경의 나이 많으니 피차 세상이 오래지 아닐지라.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위왕이 또한 슬픈 심사를 금치 못하나 인하여 하직하고 본국의 돌아가니라.
슬프다. 황제 졸연(猝然) 환우(患憂)가 계시사 회춘(回春)하지 못할 줄 아시고 태자를 불러 유체하며 이르기를,
“내 죽은 후 너를 믿나니, 네 이제 장성하였으매 범사를 알려니와 수하(手下)에 현담과 백마천 등이 있으니, 간(諫)하는 말을 신청(信聽)하고 혹 어려운 일이 있거든 위왕 현수문과 의논하면 천하가 태평하리니 삼가 유언(遺言)을 잊지 말라.”
하시고 붕(崩)하시니, 춘추(春秋)가 칠십오 세라.
태자가 망극애통하사 선릉(先陵)에 장(葬)하시고, 보위(寶位)에 직(職)하시니 임자(壬子) 동 십일월 갑자(甲子)이라. 문무백관(文武百官)이 진하(進賀)를 맞고 만세를 호창(呼唱)하더라.
황숙(皇叔) 등이 산중(山中)에 피하였더니, 천자가 붕하심을 듣고 들어와 신천자(新天子)를 도우며 교언(巧言)으로 천자께 붙어 간신이 되니, 상이 부왕(父王)의 유교(遺敎)를 돈연(頓然)히 잊으시고, 간신의 말을 믿으사 정사(政事)가 날로 어지러운지라.
현담 등이 자주 간하되 듣지 아니시고, 대신과 백마천 등의 벼슬을 파직하시며 현담의 죄를 의논하시니, 간신 등이 주하기를,
“위왕 현수문이 비록 촌공(寸功)이 있으나, 선제(先帝)의 대덕(大德)으로 왕작을 주옵시니 은혜 백골난망이거늘, 일 년의 한 번씩 하던 조회를 폐하오니 만일 수문을 그저 두오면 후환이 되올 지라. 이러므로 서천(西天) 한중(漢中)을 도로 들이라 하시고 진공(進貢) 예단(禮單)을 타국(他國) 예(禮)로 거행하게 하소서.”
상이 옳이 여기사 즉시 조서를 내리어 사신을 발송(發送)하시니라.
각설 위왕이 천자가 붕하심을 듣고 방성통곡하여 황성에 올라가 신천자께 조회하려 하더니, 문득 사관이 내려와 교지를 전하거늘, 왕이 북향사배하고 조서를 보니 가로되,
“슬프다. 국운이 불행하여 선제 붕하시고 짐이 즉위하니 어찌 망극하지 않으리오. 경이 신자(臣子)가 되어 한 번도 조회치 아니하니, 이는 선제 대덕을 저버림이라. 마땅히 문죄(問罪)할 일이로되, 아직 용서하고 서천 일지(一地)를 환수(還收)하되 진공은 타국 예와 같이 하라.”
하였더라.
위왕이 마음의 헤아리되,
‘조정에 간신이 이서 천자의 총명을 가리움이니 어찌 분한(憤恨)치 않으리오.’
하고, 즉시 주문을 지어 보내니 이르기를,
“위왕 현수문은 돈수백배(敦壽百拜)하고 글을 성상(聖上) 탑하(榻下)에 올리옵나니, 오호(嗚呼)라. 신이 선제 대덕을 입사와 벼슬이 왕작에 있사오니, 진충보국(盡忠保國)함을 원하오매 성상의 조서대로 봉행(奉行)치 않으리까마는 선제 서천으로써 신(臣)을 주심이요, 신이 서천으로써 왕업이 되옵거늘, 이제 폐하가 선제의 유교를 잊으시고 신으로 하여금 부족하게 여기사 베어주신 땅을 덜고자 하시니 어찌 황공(惶恐) 송률(悚慄)치 않으리까. 복망 폐하는 선제의 유교를 생각하시사 조신(朝臣)의 그릇 간함을 듣지 마시고, 신이 차지한 땅을 보존케 하소서.”
하였더라.
상이 남필(覽畢)에 제신을 뵈시고 의논하시니, 제신이 주하기를,
“위왕의 표(表)를 보오니, 그 첫째는 폐하를 원망하여 밝지 아닌 임금으로 돌려보냄이요, 둘째는 조정의 간신이 있어 국정이 무너져 버림으로 이름이니 극히 외람하온지라. 그러나 현수문은 선황제 총신(寵臣)이라. 가볍게 다스리지 못하오리니 먼저 현담을 나수(拿囚)하고 그 땅을 환수한다 하시면, 제 어찌 거역하리까.”
상이 옳이 여기사 즉시 현담을 구리산에 가두시니, 백마천 등 삼인이 태자를 버리고 위국에 돌아와 천자의 무도함을 이르니, 위왕이 이 말을 듣고 선제 지우(知遇)하시던 은혜를 생각하고 충성된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더니, 또 사신이 이르렀다 하거늘, 왕이 전과 같이 하여 돌려보내었더니 천자가 들으시고 대노하사 기병(起兵) 문죄(問罪)하고자 하시거늘, 만조(滿朝)가 일시에 간하기를,
“만일 병(兵)을 일으키면 반드시 위왕에게 패하리니, 현담을 젓 담아 수문에게 보내면 수문이 보고 분노하여 제 스스로 기병하리니, 이때의 수문을 잡아 죽임이 만전지책(萬全之策)일까 하나이다.”
상이 대희하사 즉시 현담을 젓 담아 위국에 보내니, 위왕이 이 일을 보고 크게 통곡하며 승상 석침을 돌아보아 이르기를,
“이제 천자가 자식을 죽여 아비에 뵘은, 나의 마음을 분하게 하여 기병함을 권함이요, 내 아무리 하여도 이신벌군(以臣伐君)은 않으리니 그대로 고하라.”
하니, 사자가 돌아와 위왕을 말을 고하니, 상이 들으시고 일변(一邊) 무안(無顔)하나 분기를 참지 못하시거늘, 제신이 주하기를,
“위왕 현수문이 비록 기병하여 있으나 그 용력을 당할 자가 없사오리니, 먼저 서번국(西蕃國)에 사신을 보내어 위국을 치라 하시면, 번국(蕃國)이 반드시 위국을 칠 것이니, 그때 함께 대군을 일으켜 좌우로 치면 현수문이 비록 용력이 있으나 어찌 양국 대병을 당하리까.”
상이 크게 기뻐 사신을 서번국에 보내시되, 모월 모일의 위국을 치면 대국 병마를 보내어 접응하리라 하였거늘, 서번왕(西蕃王)이 마지못하여 진골대로 선봉을 삼고 구골대로 후군장을 삼아 정병 십만을 조발하여 위국으로 나아가니, 벌써 대국 병마가 이르렀더라.
차시 위왕이 선제를 생각하고 세상 일이 그릇됨을 슬퍼 눈물을 흘리고 행여 천심(天心)이 돌아설까 하여 탄식함을 마지아니하더니, 문득 보(報)하되,
“서번국이 병을 거느리고 위국지경(魏國地境)에 이르렀다.”
하더니, 또 보하되,
“천자의 대병이 이르렀다.”
하거늘, 위왕이 대경하여 급히 방비할새,
제일자(第一子) 현후를 불러 이르기를,
“너는 삼천 군을 거느려 한중(漢中)에 진(陣)치고 이리이리 하라.”
하고, 제삼자(第三子) 현첨을 불러 이르기를,
“너는 삼천 철기를 거느리고 서강원에 가 진을 치되, 남주성 백성을 다 피란하라.”
하고, 계교를 이르며 위왕은 대군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아가 진을 치더니, 과연 번국 대장 진골대 급히 군을 몰아 남주성에 들어가니 백성이 하나도 없고 성중이 비었거늘, 진골대 대경하여 도로 회진(回陣)하고자 하더니, 현첨이 번군이 성의 듦을 보고 군을 급히 내와 에워싸며 산상(山上)의 올라 웨기를,
“서번이 어찌 감히 우리를 당할 소냐. 옛날 양평공과 우골대 다 내 칼에 죽었거늘, 네 맞아 죽고자 하니 어린 강아지 맹호(猛虎)를 모름이로다. 제 죽은 혼이라도 나를 원(怨)치 말고 천자를 원(怨)하라.”
하고, 화전(火箭)을 급히 쏘니 성중에 화염이 창천하여 모두 불빛이라. 적군이 견디지 못하여 화염을 무릅쓰고 달아나더니, 또 위왕의 진을 만나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서로 짓밟아 죽는 자가 불가승수(不可勝數)이라. 진골대 탄하며 이르기를,
“위왕은 만고영웅이라. 인력으로 못하리로다.”
하고 항복하여 이르기를,
“우리 왕이 구태여 싸우려 함이 아니요, 천자가 시킴이니 바라건대 위왕은 잔명(殘命)을 살리소서.”
위왕 이르기를,
“서번이 과국(寡國)과 본디 친하고 혐의(嫌疑) 없기로 놓아 보내거니와, 차후는 아무리 천자의 조서가 있으나 기병할 의사를 먹지 말라.”
하고 돌려보내느라.
차시 천병(天兵)이 구골대와 합병(合兵)하여 화음현의 이르니, 백성들이 길에서 울거늘 그 연고를 물으니 답하기를,
“위왕이 서번국에 패하여 거창산에 들어가 백성을 모아 군(軍)을 삼으니 저마다 도망할새, 처자(妻子)를 잃었으매 자연 슬퍼 우나이다.”
하거늘, 구골대 차언(此言)을 듣고 대열하여 위왕을 잡으려 하고 거창산으로 군을 몰아 들어가니, 길이 험하고 수목이 무성하여 행군하기 어려운지라. 점점 들어가니 과연 산상의 기치(旗幟) 창검(槍劍)이 무수히 꽂혔고 진중이 고요하거늘, 크게 고함하며 들어가니 군사가 다 초인(草人)이요, 사람은 하나도 없는지라.
구골대 크게 놀라 어찌할 줄 모르더니, 문득 산상에서 방포 소리가 나며 불이 사면으로 일어나며 시석(矢石)이 비 오듯 하는지라. 구골대 앙천(仰天) 탄하며 이르기를,
“내 어찌 이곳의 들어와 죽을 줄을 알리오.”
하고 죽기로써 화염을 무릅쓰고 산문(山門)을 나오니 또 좌우에서 함성이 대진(大振)하고 쫓아오니, 구골대 능히 대적하지 못하여 투구를 벗고 말에서 내려 복지하며 살기를 빌거늘, 위왕이 크게 꾸짖고 중곤(中棍) 삼십을 처 내치니, 구골대 백배 사례하고 돌아 가다가 인하여 죽으니, 양국 대병이 대패하매 번왕이 탄하며 이르기를,
“내 천자의 조서를 보고 망령되이 기병하였다가 아까운 장졸만 죽였으니 어찌 분한치 않으리오. 이후는 위지(魏地)를 범치 못하리로다.”
하더라.
차시 천자가 삼로병(三路兵)이 대패함을 듣고 크게 몰라 차탄(嗟歎)하며 이르기를,
“위왕은 과연 천신(天神)이로다. 뉘 능히 당하리오.”
제신이 주하기를,
“폐하가 위를 처 함몰하고 위지를 환수하고자 하시다가, 도리어 패한 바가 되어 열국(列國)의 웃음을 면치 못하게 되오니, 신등(臣等)이 또한 참괴(慙愧)하도소이다.”
상이 차탄하심을 마지아니하시더라.
각설 이때 흉노(匈奴) 묵특이 천자가 혼암(昏暗)함을 듣고 대군을 조발(調發)할새, 왕굴통으로 대장을 삼고 진고란으로 참모장군(參謀將軍)을 삼아 먼저 옥문관을 쳐 항복받고, 하람성에 이르니 천자가 크게 황겁하여, 장기백으로 대원수를 삼고, 우흥으로 후군장을 삼아 십만 병을 주시며 북호(北胡)를 파하라 하시니, 장기백이 대군을 휘동하여 하람에 이르니, 적장 왕굴통이 진문(陣門)을 열고 나와 웨기를,
“너의 천자가 무도 포악하여 국체(國體)를 무너뜨려 버리니, 하늘이 나같은 장수를 내시사 무도한 황제를 소멸케 하시니, 너의 무리 죽기를 재촉하거든 빨리 나와 칼을 받으라.”
하고 내다르니, 장기백이 대노하여 칼을 들고 맞아 싸울새, 수합이 못하여 적장을 당치 못할 줄 알고 달아나니, 굴통이 승세(勝勢)하여 물밀듯 들어오니 황제 대경실색하여 성문을 굳이 닫고 나지 않으니, 굴통이 군을 재촉하여 황성을 겹으로 싸고 엄살(掩殺)하니 뉘 능히 당하리오.
상이 앙천 탄하며 이르기를,
“이제 적병이 강성하여 성하에 다다르니 어찌 사직(社稷)을 보존하리오.”
하시고 시신(侍臣)을 거느려 차야(此夜)에 도망하실새 구리산으로 들어가니, 왕굴통이 천자가 도망하여 구리산으로 감을 알고 군을 몰아 급히 따르니라.
이적에 진단이란 사람이 있으니, 벼슬이 승상에 이르렀더니 조정을 하직하고 수양산의 은거하였더니, 흉노의 병이 강성하여 천자가 위태하심을 보고, 천리마를 타 위국의 이르러 왕을 보고 이르기를,
“이제 신천자(新天子)가 비록 무도하나, 우리는 세세(世世) 국록지신(國祿之臣)이라. 간절한 마음을 놓지 못하더니, 이제 흉노가 기병하여 황성의 이르매, 천자가 구리산으로 피란하사 급함이 조석에 있으나, 조정에 모사(謀士) 맹장(猛將)이 없으니 송실이 위태할지라. 왕 곧 아니면 회복하지 못하리니, 전(前) 일을 개회(介懷)치 말고 선제를 생각하여 천자를 구하소서.”
위왕이 정색(正色)하며 이르기를,
“황제 무단히 복(伏)의 자식을 죽여 젓 담아 보내니 그 일을 알지 못하고, 또 기병하였으나 이는 적국이라. 현형(賢兄)은 다시 이르지 마소서.”
진단 이르기를,
“왕의 아들은 곧 복(伏)의 사위라. 사람이 어찌 온전하리오마는 한 자식을 위하여 선제를 저버리지 못하리니, 왕은 재삼 생각하라.”
왕이 그 충성된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복이 선제의 망극한 은혜를 잊음이 아니로되, 형장(兄丈)의 충언을 감동하여 천자를 구하리이다.”
하고 즉시 군마를 정제(定制)하여 구리산으로 향할새, 기치창검(旗幟槍劍)이 햇빛을 희롱하더라.
차시 천자가 적진에 싸이었으매 양초(糧草)가 진(盡)하여 시신(侍臣)이 많이 주려 죽는지라. 상이 앙천(仰天) 탄식하며 항(降)하고자 하더니, 문득 티끌이 일어나며 대진(大陣)이 풍(風)같이 몰아 와 왕굴통과 싸우거늘, 상이 성루의 올라 자세히 보니 다른 이 아니요, 곧 위왕 현수문이라.
자룡검이 이르는 곳에 장졸의 머리 추풍낙엽(秋風落葉) 같더니, 수합이 못하여 왕굴통의 머리 마하에 내려지는지라. 흉노가 위왕이 왔음을 알고 상혼(喪魂)낙담(落膽)하여 약간 군사를 데리고 쥐 숨듯 달아나니라.
위왕이 흉노를 파하고 산문에 진치고 굴통의 머리를 상께 보내어 이르기를,
“나는 위왕 현수문이라. 오늘 이곳의 와 천자를 구함은 선제 유교를 봉승(奉承)함이니 다시 보기 어렵도다.”
하고 진을 돌리어 본국으로 돌아가거늘, 천자가 이 거동을 보시고 대찬(大讚)하기를,
“위왕은 실로 충량(忠亮)의 영웅이로다. 만일 위왕 곧 아니면 어찌 흉노를 파하리오.”
하시고 사관(辭官)을 보내어 치사(致謝)하고자 하시거늘, 승상 조진이 간하기를,
“현수문이 비록 공이 있으나, 선제(先帝)만 위하고 폐하는 위하지 아니하오니, 어찌 그런 번신(藩臣)에게 치하하리까.”
상이 그렇게 여기시고 환국하시며 만조를 모아 진하하시더라.
각설 계양춘이 진왕 죽은 후 겨우 목숨을 보전하여 천리마를 타고 여진국(女眞國)으로 향하더니, 진강산 하에 이르러는 길이 홀연 끊어져 갈 수 없는지라. 앙천 탄하며 이르기를,
“내 여자의 몸으로 만고의 없는 일을 하다가, 이제 이곳에서 죽으리로다.”
하고 슬퍼 통곡하더니, 문득 일위(一位) 노옹(老翁)이 산상(山上)에서 내려오거늘 반겨 가는 길을 물으니, 노옹 이르기를,
“그대 아비 원수를 갚고자 하여 여화위남(女化爲男)하고 주유(周遊) 천하(天下)하니 어찌 길을 나에게 묻느뇨?”
양춘이 대경하여 이르기를,
“선생이 벌써 근본을 아시니, 어찌 은휘(隱諱)하리까.”
하고 전후사를 자세히 이르니 노옹 이르기를,
“위왕 현수문은 일광대사의 술법을 배웠으니 뉘 능히 당하리오. 내 천문을 보니 송태자 위왕을 박대(薄待)하여 망하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하늘이 무심하리오. 위왕이 한번 공을 갚은 후 다시 아니 도우리니, 그대는 여진국에 가면 반드시 황후가 되리니 천기를 누설치 말라.”
하고 환약 세 개를 주며 이르기를,
“제일은 개용단(改容丹)이니 여진에 갈 제 먹고, 그 다음은 대국과 싸울 제 자객을 먹이면 천하를 도모할 것이요, 그대 가는 길에 또 도인을 만나리니 성명은 신비회라. 부디 그 사람을 데려가게 하라.”
하고 인하여 이별하니, 계양춘이 배사(拜謝) 하직하고 한 곳에 다다르니 강물이 가로질러 건너기 망연하더니, 문득 일인(一人)이 낚시를 들고 물가의 앉았다가 배를 대어 건너거늘, 계양춘이 노인의 말을 생각하고 사례 하거늘,
기인(其人) 이르기를,
“금일 우연히 만나 물을 건너거니와 공자는 소원을 이루소서.”
하고 가거늘, 계양춘이 이별하고 여러 날 만에 여진의 이르러 개용단을 먹으니 인물이 천하일색(天下一色)이 된 지라. 여진 궁녀들이 다투어 구경하더니 왕이 이 말을 듣고 불러 보니 과연 일색이라. 일견(一見)의 대혹하여 함께 취침(就寢)하니 이러므로 정이 비할 데 없어 아들을 낳으니 여진왕이 워낙 무자(無子)하던 차 더욱 침혹(沈惑)하더라.
일일은 계양춘이 왕에게 이르기를,
“이제 군마와 장수가 족하니 한 번 중원 강산을 다투어 변방(邊方)의 좁은 곳을 면하옴이 좋을까 하나이다.”
왕 이르기를,
“내 또한 뜻이 있으되, 매양 위왕 현수문을 꺼리노라.”
양춘이 웃으며 이르기를,
“왕이 어찌 이다지 무식하뇨. 천자가 수문을 박대 태심(太甚)하되, 수문은 충신이라. 선제의 은혜를 생각하고 흉노난의 급함을 구하였거니와 다시는 돕지 아니할 것이니 염려치 마소서.”
왕이 청파(聽罷)에 대희하여 이르기를,
“그대는 짐짓 여중(女中) 군자(君子)로다. 내 어찌 기병치 않으리오.”
양춘 이르기를,
“왕이 기병할진대 모사를 얻어야 하리니, 듣자온즉 화룡강의 신비회란 사람이 있어 재조와 도행(道行)이 제갈무후(諸葛武侯)에 지난다 하오니 청하소서.”
왕이 예단(禮單)을 가지고 삼고초려(三顧草廬)하는 예(禮)를 행하여 함께 돌아오니라. 왕이 계양춘의 말이 다 신기함을 아름다이 여겨 아골대로 선봉을 삼고 신비회로 모사를 삼아 택일 출사(出師)할새, 계양춘도 전복(戰服)을 입혀 함께 군중에 행하니라.
재설, 천자가 위왕의 도움으로 흉노의 핍박함을 면하여 종사를 보전하였으나, 간신의 말을 듣고 위왕을 대접하지 아니하나, 위왕은 한중(漢中)을 베어 천자께 드리니 천자가 조신을 모으고 즐겨하더니, 문득 초마(哨馬)가 급보(急報)하되,
“여진국 아골대 대군을 거느리고 지경(地境)에 이르렀다.”
하거늘, 황제 대경하여 만조를 모아 의논하되,
“뉘 적병을 막으리오.”
대사마(大司馬) 장계원이 출반주(出班奏)하기를,
“신이 비록 재조가 없사오나 적장의 머리를 베어오리이다.”
상이 기뻐하사 육십만 대군과 천여 원 장사를 조발하여 풍수성의 이르니, 적장 아골대 군마를 거느려 진치고, 여진왕이 십만 대병을 거느려 후응(後應)이 되었으니 호풍(胡風)이 천 리에 놀라더라.
장원수가 진문을 열고 대호하기를,
“반적(叛賊) 여진은 빨리 나와 내 칼을 받으라. 나는 송조(宋朝) 대원수 장계원이라. 너 같은 쥐 무리를 없이하고자 하나니, 만일 나를 두렵게 여기거든 미리 항복하여 목숨을 보전하라.”
하고 싸움을 돋우니, 아골대 이 말을 듣고 분노하여 칼을 들고 내다르며 이르기를,
“나는 여진장 아골대라. 너의 황제 무도하므로 하늘이 나 같은 장사를 내시사 송실의 더러운 임금을 없이하고 천하를 진정하고자 하나니, 너는 천의(天意)를 알지 못하고 당돌한 말을 하느냐.”
하고, 맞아 싸울새 양장(兩將)의 검광(劍光)이 번개 같으니, 짐짓 적수(敵手)라. 칠십여 합을 싸우되 승부를 결치 못하고 각각 본진에 돌아 오니라. 신비회가 아골대에게 이르기를,
“송장 장계원의 재조를 보니 졸연(猝然)히 잡기 어려울지라. 이제 한 계교 있으니 그대는 군을 거느려 구리성에 진치고, 후군장 신골대는 일천 군을 거느리고 백룡강을 건너가 이리이리 하라.”
하고 진골대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여차여차 하라.”
하니, 제장이 대희하여 모사(謀士)의 신출귀몰(神出鬼沒)한 계교를 탄복하고 물러나니라.
날이 밝으매, 장원수가 분기를 참지 못하여 외갑(外甲)을 정제(整齊)하고 정창(挺槍) 출마(出馬)하여 싸움을 돋우니, 아골대 또한 분노하여 내달아 이르기를,
“어제 너의 목숨을 불쌍히 여겨 돌려보내었거니와 오늘은 당당히 용서치 못하리라.”
하고, 십여 합을 싸우더니 골대 거짓 패하여 달아나매, 장원수가 급히 그 뒤를 따르더니 홀연 땅이 무너지며 수천 인마(人馬)가 지함(地陷)의 빠져 일진(一陣)이 대패하니, 적진 장졸이 일시의 짓치매 장원수가 투구를 잃고 얼굴이 상하여 거의 죽게 되었더니, 제장의 구함을 입어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백룡강을 버리고 달아나니 삼십여 리를 간 지라.
기갈(飢渴)을 참지 못하여 다투어 강수(江水)를 마시더니, 문득 급한 물이 이르러 죽은 군사가 무수한지라. 장원수가 겨우 수십 기를 거느리고 도망하여 경사(京師)로 올라 오니라.
아골대 승승장구(乘勝長驅)하여 무인지경(無人之境) 같이 함곡관에 다다라 진치고 군을 쉬오며, 열읍(列邑) 창고를 열어 군량(軍糧)을 삼으니 위태함이 조석에 있는지라.
차시 천자가 장원수가 패하여 옴을 보시고 크게 근심하사, 제신을 모으시고 도적 파함을 의논하시더니, 또 보(報)하되,
“도적이 함곡관에 이르러 진치고 열읍 창고를 여러 군기와 양식을 내어 임의(任意)로 처치하니 위태함이 조석에 있다.”
하거늘, 천자가 들으시고 대경실색하여 하늘을 우러러 탄식 유체(流涕)하며 이르기를,
“짐의 운수가 불길하여 허다 병혁(兵革)을 만났으되, 위왕 현수문 곧 아니면 종사(宗社)를 보전하지 못하리로되, 그 공을 미처 생각지 못하고 그른 일을 많이 하여 앙화(殃禍)가 이처럼 미쳤으나, 아무리 급한들 무슨 낯으로 다시 구완을 청하리오.”
하고 눈물을 흘리시며 어찌할 줄 모르시니 좌우제신이 묵묵부답(黙黙不答)이러니, 문득 한 사람이 주하기를,
“현수문은 충효(忠孝) 겸전(兼全)한 사람이라. 폐하가 비록 저를 저버림이 있으나 저는 이런 줄 알면 반드시 구하오리니 이제 급히 사관을 택정(擇定)하여 위국에 구완을 청하시면 도적을 파하리니와, 이제 만일 그렇지 아니 하오면 송실을 보전치 못하오리니, 복망 폐하는 익히 생각하소서.”
천자가 이 말을 들으시고 용안(龍顔)에 참색(慙色)이 가득하사 자세히 보니 병마도총(兵馬都摠) 박내신이라. 마지못하여 조서를 닦아 사자를 주어 위국으로 보내시고, 다시 군마를 조발하여 장계원으로 대원수를 삼고, 박내신으로 부원수를 삼아 적병을 파하라 하시니, 양장이 대군을 휘동하여 함곡관의 다다르니 정병이 백 만이오 용장이 수십 원이라.
진세(陣勢)를 엄숙히 하고 싸움을 돋우니, 적진이 송진의 위엄을 보고 견벽불출(堅壁不出)하며 파할 계교를 의논하더니, 계양춘이 여진왕에게 이르기를,
“첩이 아무 지식이 없사오나, 송진 형세를 보니 비록 먼저 한번 이기었으나 다시 파하기 어려우리니, 첩이 금야(今夜)에 양장(兩將)의 머리를 베어 오리이다.”
왕이 믿지 아니하고 모사 신비회를 돌아보아 이르기를,
“여자가 어찌 양장의 머리를 베리오.”
하고 미소(微笑) 부답(不答)이거늘, 계양춘이 고하기를,
“첩이 만일 그렇지 못하올진대 군법을 면치 못하리니, 왕은 염려치 마소서.”
하고 가만히 진도관을 불러 이르기를,
“내 그대 재조를 아나니, 금야에 자객이 되어 송진의 들어가 양장의 머리를 베어올 소냐.”
진도관 이르기를,
“들어가면 베어 오려니와, 들어가기 어려움을 근심하노라.”
계양춘 이르기를,
“내게 기이한 약이 있으니, 이름은 변신(變身) 보명단(保命丹)이라. 이를 먹으면 곁의 사람이 몰라보나니 어찌 들어가기를 근심하리오.”
진도관이 응낙하고 약을 가지고 밤을 기다려 비수(匕首)를 품고 송진에 나아갈새, 그 약을 먹으니 과연 곁에 군사가 알지 못하거늘, 진도관이 방심(放心)하고 완완(緩緩)히 대(臺)에 이르러 보니, 박내신은 촉(燭)을 돋우고 병서를 읽고, 장계원은 상처를 앓아 서안(書案)에 의지하여 신음하거늘, 진도관이 비수를 날려 양장의 머리를 베어들고 완완히 나오되, 군중에 알 이 없더라.
진도관이 본진에 돌아와 수급(首級)을 계양춘에게 드리니, 여진왕이 이 말을 듣고 대희하여 계양춘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과연 신선의 여아로다.”
하고 또 진도관을 보아 이르기를,
“네 비록 약을 먹었으나 만군(萬軍) 중에 들어가 상장(上將)의 머리를 낭중취물(囊中取物) 같이 하니 어찌 일공(一功)이 아니리오.”
하며 그 수급을 기에 달아 송군(宋軍)을 뵈어 이르기를,
“너의 대장의 머리를 얻어왔으니 비록 쓸데없으나 찾아 가라.”
하니 송군이 대경하여 서로 도망하거늘, 생각하니 어찌 가련치 않으리오.
이때 아골대 한 번도 싸우지 아니하고 양장의 머리를 얻으매, 마음이 상활(爽闊)하여 송진(宋陣)을 시살(弑殺)하니 일합이 못하여 함몰하고, 군을 몰아 들어올새, 또 창덕현을 파하고 물밀듯 황성에 이르니 감히 나 싸울 자가 없더라.
차시 천자가 이 말을 들으시고 통곡하며 이르기를,
“적세 강성하여 대국 명장을 다 죽이고 황성을 범한다 하니, 짐에게 이르러 삼백 년 기업(基業)이 망할 줄 어찌 알리오.”
하시고 용루(龍淚)를 내리 오시니 만조(滿朝) 제신이 막불(莫不) 유체(流涕)러라.
각설 위왕 현수문이 천자의 박절하심을 통한히 여기나, 그러나 조금도 원망치 아니하며 매양 천심(天心)이 손상(損傷)함을 한(恨)하고, 국운(國運)이 오래지 않음을 슬퍼하며 여러 아들을 불러 경계하며 이르기를,
“노부(老父)가 출어(出御) 세상(世上)하여 허다 고초(苦楚)를 많이 지내고, 일찍 용호방(龍虎榜)에 참여하여 출장입상(出將入相)하니, 이는 천은(天恩)이 망극한지라. 갈수록 천은이 융성하여 벼슬이 왕작(王爵)의 거(居)하니 이는 포의(布衣)에 과극(過極)한지라. 이러므로 몸이 마치도록 나라를 돕고자 하나니, 여등은 진충(盡忠) 갈력(竭力)하여 천자를 섬기고 소소(小小)한 현담의 일을 생각하지 말라.”
하고 누수를 흘리더니, 문득 보하되, 천자의 사관이 이르렀다 하거늘, 위왕이 놀라 헤아리되,
‘천자가 또 어느 땅을 들이라 하시도다.’
하고 성외에 나가 맞으니 사관이 조서(詔書)를 드리며 이르기를,
“천자가 방금 여진의 난을 만나 적병이 황성의 이르매 그 위태함이 조석의 있기로 급히 구완을 청하시더이다.”
위왕이 천사(天使)의 말을 듣고 대경하여 북향(北向) 사배(四拜)하고, 조서를 떼어보니, 그 조서의 이르기를,
“짐이 불행하여 또 여진의 난을 당하매, 적세 크게 강성하여 성하에 이르니 사직의 위태함이 조석에 있는지라. 방금 조정에 적장 아골대 당할 장수가 없으니 어찌 종사를 보전하리오. 이는 다 짐이 자취(自取)한 죄라. 누구를 한하며 누구를 원망하리오. 허물며 경은 선제 충신이요 만고의 대공(大公)이거늘, 짐이 잠깐 생각하지 아니하고 간신의 말을 좇아, 경을 부족히 여기며 그 아들을 젓 담아 보내었으니, 첫째는 선제의 유교(遺敎)를 저버린 죄요, 둘째는 스승을 죽인 죄요, 셋째는 선조(先朝) 충신을 만모(慢侮)한 죄요, 넷째는 서천을 환수한 죄이니, 이런 중죄를 짓고 어찌 안보하기를 바라리오마는, 이왕에 자작지죄(自作之罪)는 회과(悔過)하였거니와, 이제 위태함을 당하여 부끄럼을 무릅쓰고 사자를 경에게 보내나니, 경이 비록 연만하여 용맹이 전만 못하나 그 재조는 늙지 아니하리니, 만일 노(怒)를 감추고 원망을 두지 아닐진대, 한번 기군(起軍)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 족히 천하를 보존하리니, 국가 안위는 재차(再次)일 게라. 모름지기 경은 익히 생각하여 짐의 허물을 사(赦)하고 선제의 유교를 돌아봄이 어떠하뇨.”
하였더라.
위왕이 남필(覽畢)에 일변 놀라고 일변 슬퍼 흐르는 눈물이 백수(白鬚)를 따라 이어지며 묵묵무언(黙黙無言)이러니 오랜 후 표를 닦아 사관을 돌려보내고, 급히 군사를 발하여 천자를 구하고자 할새,
장자(長子) 현후로 후군장(後軍將)을 삼고, 삼자(三子) 현첨로 좌익장(左翼將)을 삼고 승상 석침으로 군사장군(軍師將軍)을 삼아, 철기 백만을 거느리고 급히 행군하여 황성으로 향하니, 위왕이 홍안(紅顔) 백발(白髮)이 자못 씩씩하여 갑주(甲冑)를 정제(整齊)하고 손에 자룡검을 잡았으니, 사람은 천신 같고 말은 비룡 같아 군제(軍制) 엄숙한 가운데, 정기(旌旗)는 폐(廢)일(日)하고 금고(金鼓)는 훤천(暄天)하니, 가는 길에 비록 도적이 있으나 위풍(威風)으로 좇아 쓰러지니, 위왕의 조화 있음을 가히 알지라.
여러 날 만에 황성의 이르러 진치고 적진 형세를 살펴보니, 여진왕이 아골대와 더불어 진세를 웅장히 하고 기운이 활달하여 천지를 흔들 듯한지라. 위왕이 군중에 전령하여 이르기를,
“적진이 비록 싸움을 돋우나 일절(一切) 요동(搖動)치 말라.”
하고 진(陣)을 변하여 팔문금사진(八門金蛇陣)을 치고 상께 표문을 올리며 연(然)하여 군사를 쉬게 하더라.
차설 천자가 적세 위태함을 보시고 어찌할 줄 알지 못하고, 다만 하늘을 우러러 장탄 유체하시며, 요행 위왕의 구병(救兵)이 이를까 하여 성문을 굳게 닫고 주야로 기다리시더니, 과연 위왕이 십만 대병을 거느리고 성외의 이르러 표문(表文)을 올린다 하거늘, 상이 대열하사 그 표문을 떼어보니, 하였으되,
“위왕 현수문은 삼가 표문을 황상 용탑(龍榻) 하(下)에 올리옵나니, 신이 본디 하방(下方) 천생(賤生)으로 선제의 망극한 은혜를 많이 입사오매. 그 갚을 바를 알지 못하여 몸이 마치도록 성은을 잊지 아니하옵더니, 이제 폐하가 선제의 뒤를 이으사 신의 용렬함을 깨달으시고, 서천 일지(一地)를 도로 거두시며 죄를 자식에게 미루어 그 뒤를 끊고자 하시니, 신의 마음이 어찌 두렵지 않으리 마는, 본디 충을 지키는 뜻이 간절한 고로, 저적에 흉노의 난을 평정하고 폐하의 위태함을 구하였으나 뵈옵지 아니하고 감은 폐하가 신을 보기 싫은 뜻을 위함이러니, 이제 또 여진이 반하여 황성의 이르매 그 위태함을 보시고 구완을 청하시니, 신이 어찌 적병이 이른 줄 알면서 편히 있음을 취하리까마는, 천한 나이 벌써 칠순에 가까운지라. 다만 힘이 전만 못함을 두려워 양아(兩兒)를 데리고 군을 발하여 이르렀으나, 옛날 황충(黃忠)만 못하지 아니 하오리니, 바라건대 폐하는 근심치 마소서.”
하였더라.
상이 남필에 대찬하기를,
“위왕은 만고충신이라. 짐이 무슨 낯으로 위왕을 대하리오.”
하시고 멀리 나와 맞고자 하나, 적병이 강성함을 두려워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장탄 불이 하시더니 조신 중 일인이 출반주하기를,
“이제 위왕 현수문이 대군을 거느리고 와 진(陣)치매, 적장 아골대 그 진세 엄숙함을 보고 십 리를 물러 진쳤으매 그 겁(怯)함은 짐작하오리니, 폐하가 일지군(一枝軍)을 주시면 신이 한번 전장에 나아가 위왕의 일비지역(一臂之役)을 돕사올까 하나이다.”
모두 보니 이는 도총병마(都總兵馬) 설연이라. 상이 기뻐하사 즉시 군사를 나누니 겨우 수천 기라. 당부하여 가로되,
“적장 아골대는 지모가 과인하고 모사 신비회는 의량(意量)이 신묘(神妙)하니 삼가 경적(輕敵)하지 말라.”
설연이 사은하고 군을 거느려 위왕진에 이르니, 위왕이 반기며 적진 파할 계교를 의논하고 제장을 불러 이르기를,
“적장 아골대는 짐짓 지모가 잇는 장수이라. 우리 군사가 수천 리를 몰아 왔으매 반드시 그 피곤함을 알고 쉬지 못하게 하여, 싸움을 돋우되, 내 그 뜻을 알고 삼일을 견벽불출(堅壁不出)함이니, 명일 싸움에 제장은 나의 뒤를 따르라.”
하고 날이 밝은 후 방포일성(放砲一聲)의 진문(陣門)을 크게 열고 말에 올라 내다르며 대호하기를,
“적장 아골대는 빨리 나와 내 칼을 받으라. 나는 위왕 현수문이라. 나의 자룡검이 본디 사정이 없기로 반적의 머리를 무수히 베었나니 허물며 너 같은 무도한 오랑캐 목숨은 오늘 내 칼 아래 달렸으니 바삐 나와 칼을 받으라.”
하는 소리가 우레 같으니, 아골대 분노하여 진밖에 내다르며 꾸짖기를,
“나는 여진국 대장 아골대라. 우리 왕이 하늘께 명을 받아 무도한 송(宋)천자(天子)를 멸하고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매, 벌써 삼십육도 군장(君長)을 쳐 항복받고 이제 황성을 무찔러 천자를 잡고자 하거늘, 너는 천시(天時)를 알지 못하고 무도한 황제를 구하고자 하니, 이른바 조걸위학(助桀爲虐)이라. 네 어찌 늙은 소견이 이다지 모르나뇨.”
하고 맞아 싸울새 칠십여 합에 이르되, 승부를 결치 못하는지라. 위왕이 비록 노장(老將)이나 용력(勇力)이 족히 소년 아골대를 당하니 검광이 번개 같아 동을 쳐 서를 응하고, 남을 쳐 북장(北將)을 베니 그 용력을 가히 알지라.
날이 저물매 각각 본진으로 돌아가니, 위왕이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제장 군졸을 모으고 의논하기를,
“내 서번 도적을 칠 때에 초인(草人)을 나와 같이 만들어 적진을 속였더니 이제 또 그처럼 속이리니, 그대는 약속을 잃지 말라.”
하고 수일이 지난 후 철기 백만을 거느리고 진 좌편 호인곡에 매복하고, 후군장 현후를 불러 이르기를,
“너는 군을 거느리고 적진과 싸우다가 이리이리 하라.”
하고 밤들기를 기다려 싸움을 돋우며 대호하기를,
“적장 아골대는 전일 미결(未決)한 승부를 오늘날 결단(決斷)하자.”
하고 자룡검을 들고 내다르니, 여진왕이 아골대에게 이르기를,
“위왕 현수문이 심야(深夜)에 싸움을 재촉하니 무슨 계교 있음이라. 삼가 경적하지 말라.”
아골대 응낙하고 말에 올라 진문을 열고 내달아 싸울새, 등촉(燈燭)이 휘황한 가운데 위왕이 엄숙한 거동이 씩씩 쇄락(灑落)하여 금고(金鼓) 소리는 산천이 움직이고 함성은 천지진동하니, 번개 같은 검광은 횃불이 무광(無光)하고 분분(紛紛)한 말발굽은 피차(彼此)를 모를러라.
서로 삼십여 합을 싸우더니 위왕이 거짓 패하여 달아날새, 아골대 승세(勝勢)하여 급히 뒤를 따르매 위왕을 거의 잡을 듯하여 수십 리를 따르니, 아골대의 칼이 위왕 목에 이르기를 한두 번이 아니로되, 종시(終是) 동(動)치 아니하는지라.
아골대 의혹(疑惑)하여 군을 돌리고자 하더니, 문득 뒤에서 함성이 일어나며, 또 위왕이 여진왕의 머리를 베어 들고 군을 몰아 짓치니, 앞에는 현첨, 석침과 도총병마 설연이 치고, 뒤에는 위왕이 치니 아골대 비록 용맹하나 거짓 위왕이 싸움도 어렵거든 하물며 정작 위왕의 일광도사 술법을 당하리오.
위왕의 칼이 이르는 곳에 장졸의 머리 검광을 좇아 떨어지니 아골대 낙담상혼(落膽喪魂)하여 동을 바라고 달아나는지라. 위왕이 군을 재촉하여 따르니 아골대 대적하지 못할 줄 알고 말에서 내려 항복하여 이르기를,
“이제 우리 왕이 벌써 죽었고, 소장이 세궁(勢窮) 역진(力盡)하였사오니 바라건대 위왕은 잔명(殘命)을 살리소서.”
하거늘, 위왕이 아골대를 잡아 꿇리고 꾸짖기를,
“네 임금과 함께 반하여 대국을 침범하니 마땅히 죽일 것이로되 항자(降者)를 불살(不殺)이라. 차마 죽이지 못하고 놓아 보내나니, 너는 돌아가 마음을 고치고 행실을 닦아가 어진 사람이 되게 하라.”
하고 등 팔십을 쳐 원문(轅門) 밖에 내치고 삼군을 모아 상사하며 방(榜) 붙여 백성을 안무하고 승전한 표(表)를 올리더라.
차시 천자가 적진의 싸이어 성중 백성이 많이 주려 죽으니, 이러므로 천자가 자주 통곡하시며 위왕의 승전하기를 하늘께 축수하더니, 이날 위왕이 여진왕을 죽이고 아골대를 사로잡아 항복받은 표문을 보시고 크게 기뻐하사 만조를 모으시고 성문에 나와 나 위왕을 맞으실새,
위왕이 복지 통곡하오니, 상이 수레에 내려 왕의 손을 잡으시고 참색(慙色)이 용안(龍顔)에 가득하사 눈물을 흘리시며 가로되,
“짐이 혼암(昏闇) 무지(無知)하여 경 같은 만고충신을 대접하지 아니하고, 또 경의 어진 아들을 죽였으니 무슨 낯으로 경을 대하리오. 이러므로 짐의 죄를 하늘이 밉게 여기사 송실을 위태하게 하심이로되, 경은 추호(秋毫)를 혐의(嫌疑)치 아니하고, 저적에 흉노난을 소멸하며 이제 또 여진의 흉적을 파하니, 경의 충성은 만대의 썩지 아니하고 짐의 허물은 후세의 침 받음을 면치 못하리니,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오.”
위왕이 천자가 너무 자복(自服)하심을 보고 읍(泣)주(奏)하기를,
“신이 본디 충성을 효칙(效則)고자 하여 선제의 망극한 은혜를 갚지 못하였기로 몸이 마치도록 나라를 위하오매, 어찌 폐하의 약간 그러심을 혐의하오리까마는, 저적에 흉노를 파하고 폐하를 뫼시지 아니하고 곧바로 위국에 돌아감은 세상공명을 하직(下直)하고자 함이러니, 갈수록 국운의 불행함을 면치 못하여 또 여진의 난을 만나사 위태하심을 듣자오매, 신이 비록 천한 나이 많사오나 어찌 전장(戰場)을 두려워하리까. 이제 폐하의 홍복(弘福)으로 도적을 파하오나 이는 하늘이 도우심이라. 신의 공은 아니로소이다.”
상이 더욱 칭찬하시며 함께 궐중의 들어와 새로이 진하(陳賀)하시고 위왕의 공을 못내 일컬으시며 황금 일천 냥과 채단 오백 필을 사송(賜送)하시고 가로되,
“짐이 경의 공을 생각하면 무엇으로 갚을 바를 알지 못하나니, 이제 경의 나이 쇠로(衰老)하매 연연(年年)이 조공하는 예(禮)를 폐하고 안심 찰직(察職)할지어다.”
위왕이 돈수(敦壽) 사례하고 인하여 하직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니라.
재설 아골대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모사 신비회와 계양춘을 찾아 데리고 여진의 들어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르기를,
“우리 계양춘의 말을 듣고 백만대병을 일으켜 대국을 치매, 위왕 현수문의 칼아래 귀신이 다 되고 다만 돌아오는 사람은 우리 수삼 인이라. 어찌 통한치 않으리오.”
하고 다시 반(叛)함을 꾀하더라.
위왕이 본국의 돌아가 현후, 현첨 두 아들이 무사히 돌아옴과 석침이 또한 성공하고 함께 돌아옴을 기뻐, 모든 자녀를 거느리고 잔치를 배설하여 크게 즐길새, 왕비 석씨를 돌아보아 이르기를,
“비(妃)와 과인(寡人)의 옛날 일을 생각하면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 어찌 이처럼 귀히 됨을 뜻하였으리오. 다만 한하는 바는 송실이 오래 누리지 못할까 두렵나니 이제 과인이 연기(年紀) 팔순이라. 오래지 아니하여 황천길을 면치 못하리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왕비 또한 비회(悲懷) 교집(交集)하여 이르기를,
“신첩(臣妾)이 당초 계모의 화를 피하여 칠보암에 있을 제, 노승의 후은(厚恩)을 입사와 우리 부부가 서로 만나게 하였으니, 이를 생각하면 그 은혜 적지 아니 하온지라. 이제 사람을 그 절에 보내어 불공하고 제승에게 은혜를 갚고자 하오니 복망 전하(殿下)는 신첩의 사정을 살피소서.”
위왕이 옳이 여겨 금은 채단으로 옛정을 표하여 보내더라.
차시 백관이 왕과 또 비의 성덕(聖德)을 하례(賀禮)하고 조회를 마치고 잔치를 파하니 위국 인민(人民)이 칭(稱)복(福)하지 않는 이 없더라.
일일은 위왕이 마음의 자연 비감(悲感)하여 전에 입던 갑주와 자룡검을 내어 보니, 스스로 삭아 조각이 떨어지고 칼이 부스러져 썩은 풀 같은지라. 위왕이 대경 탄하며 이르기를,
“수십 년 전에 내 타던 말이 죽으매 의심하였더니, 그 후로 과연 선제 붕하시고, 또 이제 성공한 갑주와 칼이 스스로 삭아 쓸 데 없이 되었으니, 차(此)는 반드시 나의 명이 진(盡)한 줄 알지라. 슬프다. 세상 사람이 다 각각 수한(壽限)의 정함이 잇나니 내 어찌 홀로 면하리오.”
하고 즉시 현후를 봉(封)하여 세자를 삼고, 석침으로 좌승상을 삼으며 용상에 눕고 일어나지 못하더니, 스스로 회춘(回春)치 못할 줄 알고 왕비와 후궁을 부르며 모든 아들을 불러 유체(流涕)하며 이르기를,
“과인이 초분(初分)은 비록 사오나오나 이제 벼슬이 왕작에 거하고 슬하의 아들 구형제를 두었으니 무슨 한이 있으리오. 그러나 송실(宋室)이 장구(長久)치 못할까 근심하나니 돌아가는 마음이 가장 슬프도다. 너희는 모름지기 후사(後嗣)를 이어 충성으로 나라를 받들고 정사를 닦아, 백성을 평안하게 하라.”
하고, 상의 누우며 명이 진하니 춘추 칠십팔이라. 왕비와 모든 자제 발상(發喪) 거애(擧哀)하니 위국 신민(臣民)이 통곡 않는 이 없고 일월(日月)이 무광(無光)하더라.
왕비 석씨 일성(一聲) 통곡에 혼절(昏絶)하니 시녀의 구함을 입어 겨우 정신을 차린지라. 왕비 세자 현첨을 불러 이르기를,
“사람의 명은 도망하기 어려운지라. 세자는 모름지기 과도히 슬퍼 말고 만수무강(萬壽無疆)하라.”
하고 이어 훙(薨)하니 모든 자녀와 군신의 애통함은 이르지 말고, 석침이 슬퍼함을 부모상 같이 하여 지극 애통하며 상구(喪具)를 차려 신릉에 안장(安葬)하니라.
재설 천자가 위왕의 관인(寬仁) 대덕(大德)을 오래 잊지 못하사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위문하시더니, 일일은 천문관(天文觀)이 주하되,
“금월 모일의 서방(西方)으로 두우성(斗牛星)이 떨어지오니 심히 괴이하도소이다.”
상이 들으시고 괴이 여기시더니, 문득 위왕이 훙한 주문(奏文)을 보시고 방성대곡하시며 즉시 조문사(弔問使)를 보내사 예단을 후히 보내시니, 인국(隣國)이 또한 위왕의 훙함을 듣고 슬퍼함을 마지 아니하며 다 각각 부의(賻儀)를 보내니 불가(不可)승수(勝數)라.
천자가 위왕의 제삼자 현첨을 봉하여 위왕을 삼으시고, 종사를 이으라 하시니 현첨가 교지를 받자와 북향 사은하고 인하여 위(位)에 직(職)하니, 임신(壬申) 추 구월 갑자(甲子)라. 문무백관이 모이어 천세를 호창(呼唱)하고 진하를 마치니 왕이 자못 부(父)풍(風) 모습이 있는 고로, 정사를 다스리니 사방의 일이 없고 백성이 태평하더라.
차시 천자가 위왕 현수문이 훙한 후로 그 공을 차마 잊지 못하여 친히 제문을 지으시고 사관을 명하여 위왕묘에 제(祭)하라 하시니, 사관이 달려 위국의 이르매 왕이 맞아 천은을 사례하고 함께 능침(陵寢)의 올라 제하니, 그 제문에 가로되,
“모년 모월 모일의 송천자(宋天子)는 사신을 보내어 위왕 현공(玄公) 묘하(墓下)에 제하나니,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왕의 충성이 하늘에 사무침이여. 선제(先帝) 귀히 대접하시도다. 도적이 자주 기병(起兵)함이여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도다. 송실의 위태함을 붙듦이여. 족히 천하를 반분(半分)하리로다. 갑주를 벗은 날이 드묾이여. 그 공이 만고의 희한하도다. 양조(兩朝)를 도아 사직을 안보함이여. 큰 공이 하늘의 닿았도다. 허다 적장을 베임이여. 이름이 사해의 진동하도다. 충회 겸전함이 고금에 드묾이여. 덕택이 만민에 미쳤도다. 왕의 충절이 불변함이여. 맑음이 가을 물결 같도다. 원망을 두지 않음이여. 늙도록 마음이 변치 아니하도다. 여진을 파함이여. 짐의 급함을 구하도다. 갈수록 공이 높음이여. 갚을 바를 알지 못하도다. 짐이 혼암(昏闇)함이 심함이여. 충량(忠亮)을 몰라보도다. 죄상(罪狀)이 무궁함이여. 후회막급(後悔莫及)이로다. 왕의 음성이 귀의 쟁쟁함이여. 지하의 돌아가 만나보기 부끄럽도다. 슬프다. 왕이 한 번 귀천(歸天)하매 어느 날 그 공을 생각하지 않으리오. 이제 짐이 구구(久久)한 정성을 차마 잊지 못하여 일배(一杯) 청주(淸酒)를 표하나니, 위유(慰諭) 영혼(靈魂)은 흠향(歆饗)하라.”
하였더라.
읽기를 다하매 왕과 제신이 일시의 통곡하니, 산천초목이 슬퍼하는 듯하더라. 왕이 사관을 위하여 예단을 후히 하고, 천은이 망극함을 못내 일컬으며 멀리 나와 전송하더라.
재설(再說), 천자가 위왕 현수문이 훙한 후로 고굉지신(股肱之臣)을 잃었으매 성심(聖心)이 번뇌(煩惱)하사 매양 변방(邊方)을 근심하시는지라. 조정의 간신이 권세를 잡으매 충량(忠亮)을 모해하며 불의를 일삼으니, 천자가 아무리 총명(聰明)영매(英邁)하시나 어찌 간신의 가리움을 면하리오.
이때 종실(宗室) 조충이 주하기를,
“위왕 현수문이 비록 전장의 공이 있으나, 선제의 성신문무(聖神文武)하신 덕택으로 왕위를 주시오니 이는 저에게 과복(過福)하온지라. 혹자(或者) 도적이 있으면 한번 전장에 나아가 전필승(戰必勝)하고 공필취(功必取)함은 군신지리(君臣之理)에 떳떳하옵거늘, 수문이 죽은 후로 또 그 아들로 왕위를 전하게 하시니, 기자(其子) 현첨이 천은이 망극함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뜻이 교앙(驕昂)하여 천자를 업수이 여기고 마음을 외람히 먹은 즉 반드시 제어(制御)할 도리 없사오리니, 복망 폐하는 현첨의 왕작을 거두사 범을 길러 근심됨이 없게 하소서.”
상이 청파(聽罷)에 묵묵부답이거늘, 차시 조정이 조충의 말이 두려워 그른 줄 알되 부득이 준행(遵行)하더니, 이 날 조충의 주사(奏辭)를 듣고 그저 있지 못하여 그 말이 옳은 줄로 주달하온대, 천자가 양구(良久) 후 가로되,
“짐이 종사를 보전하기는 현수문 곧 아니면 어찌 하리오. 그러나 선제 심히 사랑하신 바이거늘 이제 그 공을 잊지 아니하고, 기자(其子)가 종사를 잇게 함이 있더니, 경등의 말을 들으니 심히 의심되도다.”
조충이 또 주하기를,
“현첨도 또한 용력이 있는 자이라. 제 형 현담을 젓 담은 혐의를 매양 생각하고 황제를 원망하여 설분(雪憤)함을 발(發)보이고자 하나, 제 아비 교훈이 엄숙하므로 미처 못하였더니, 이제는 기부(其父)가 돌아가고 거리낌이 없으매 반드시 그저 있지 아니하오리니, 그 근심됨이 적지 아니 하올지라. 폐하는 익히 생각하소서.”
상이 이 말을 들으시고 그렇게 여기사 그 힘을 차차 덜고자 하여, 서천 일지(一地)를 도로 바치라 하시고 조서를 내리오시니라.
각설 위왕 현첨이 부왕의 충성을 효칙하여 천은이 융성함을 망극히 여기고 위국을 다스리니, 위국 인민이 풍속의 아름다움을 즐겨 송덕(頌德)하지 않은 이 없더라.
일일은 위왕이 조회를 파한 후 상의 의지하였더니, 문득 백발노옹이 청려장(靑藜杖)을 집고 난간(欄杆)으로 좇아 방중(房中)의 이르거늘, 왕이 잠깐 보매 기위(奇偉) 엄숙한지라. 황망히 일어나 서로 예(禮)하고 좌(座)를 정하매 왕이 묻기를,
“존공(尊公)은 어대 계시관대 어찌 이리 오시니까?”
노옹 이르기를,
“나는 남악 화산 일광대사라. 그대 부친이 나의 제자가 되어 재조를 배홀 때의 정이 부자간 같아서 팔년을 함께 지내매, 그 정성이 지극함을 탄복하여 혹 어려운 일을 가르침이 있더니, 하늘이 도우사 일신의 영귀함을 누리다가, 세월이 무정하여 어느덧 팔십 향수(享壽)하고 천상에 올라가시니 가장 슬프거니와, 또 그대를 위하여 이를 말이 있기로 왔노라.”
왕이 노옹의 말을 듣고 다시 일어나 재배하며 이르기를,
“대인이 선친(先親) 스승이라 하오니 반갑기 측량 없거니와, 무슨 말씀을 이르고자 하시나이까?”
대사가 이르기를,
“그대 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거하니, 그 무강한 복록은 비할 데 없거니와 이제 신천자(新天子)가 혼암(昏闇) 무도(無道)하여 간신이 그릇하는 일을 신청(信聽)하니 기세(氣勢) 부장(不長)이라. 그대의 충량(忠亮)을 알지 못하고 크게 의심을 발하여 왕작을 거두고자 하시리니, 만일 위태한 일이 있거든 그대 부왕의 가졌던 단저가 있으리니, 그 저는 곧 당초 석참정을 주어 그대 부친에게 전한 바이라. 이를 가져다가 내어 불면 위태함이 없으리니 그대는 명심불망(銘心不忘)하라.”
하고 또 소매로부터 환약(丸藥) 일개를 내어 주며 이르기를,
“이 약 이름은 회생단(回生丹)이니 천자의 환우(患憂) 계시거든 이 약을 쓰라.”
하고 인하여 하직하고 가거늘, 왕이 신기히 여겨 다시 말을 묻고자 하다가 홀연 계하(階下)에 학의 소리로 놀라 깨어나니 침상(沈床) 일몽(一夢)이라. 왕이 정신을 차려 자리를 보니 환약이 놓였거늘, 심중에 의혹하여 집어 간수하고 즉시 좌승상 석침을 명초(命招)하여 몽중 설화를 이르며, 부왕의 가졌던 저를 내어 보고 탄식함을 마지 아니 하더라.
수월이 지난 후 홀연 천사(天使)가 이르렀다 하거늘, 왕이 맞아 사례하온대 사관 이르기를,
“천자가 왕의 지방(地方)이 좁고 길이 멂을 염려하사 먼저 서천 일지(一地)를 환수하라 하시고, 왕을 보지 못함을 한(恨)하사 특별이 사관을 보내시며 함께 올라옴을 기다리시더이다.”
하고 조서를 들이거늘 왕이 조서를 보고 북향 사배하며 의아함을 마지아니하여 이르기를,
“망극한 황은이 이처럼 미쳤으니 어찌 황공 송률(悚慄)치 않으리오.”
하고 함께 발행할새, 좌승상 석침을 데리고 황성으로 향하니라. 여러 날 만에 황성의 다다르니, 홀연 수천 군마가 내달아 위왕을 에워싸며 무수히 핍박(逼迫)하거늘, 위왕이 크게 놀라 문득 일광대사의 가르친 일을 생각하고 단저를 내어 부니 소리가 심히 처량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인도하는지라.
여러 군사가 일시에 흩어지니, 이는 종실 조충이 본디 외람한 뜻을 두었으나 매양 위왕 부자를 꺼리더니 이제 비록 현수문은 죽었으나 기자(其子) 현첨을 시기하여 상께 참소(讒訴)하더니, 이날 가만히 위왕 현첨을 잡아 없이 하고자 하다가 홀연 저 소리를 듣고 스스로 마음이 풀어진 바가 되니, 천도(天道)의 무심치 않음을 가히 알지라.
위왕이 그 급한 화를 면하고 바로 궐내에 들어가 탑전에 복지하오니, 상이 보시고 일변 반기시며 일변 부끄러워 가로되,
“경을 차마 잊지 못하여 가까이 두고자 함이러니, 이제 짐의 몸이 불평(不平)하여 말을 이르지 못하노라.”
하시고 도로 용상(龍床)에 누어 혼절하시니 급하심이 시각에 있는 지라. 만조가 황황(遑遑) 망조(亡兆)하고, 위왕이 또한 상 위급하심을 크게 놀라 문득 환약을 생각하고 낭중(囊中)으로부터 내어 시신(侍臣)을 주며 이르기를,
“이 약이 비록 좋지 못하나 응당 효험(效驗)이 있을 듯하니, 갈아 씀이 어떠하뇨?”
만조가 다 황황한 가운데 혹 다행히 여기며 혹 의심도 내니 있더니, 곁에 조충이 모셨다가 이를 보고 생각하되,
‘만일 상이 회춘하지 못할진대 성사(成事)할 조각을 만남이니 어찌 다행치 않으리오.’
하고 급히 받아 시녀로 하여금 갈아 쓰게 하였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호흡을 능히 통하시고 또 정신이 씩씩하사 오히려 전보다 심사가 황홀하신지라. 급히 위왕을 인견(引見)하사 이르기를,
“짐이 아까 혼절하였을 때에 한 도관이 이르되, ‘송천자가 충량지신(忠亮之臣)을 몰라보고 난신적자(亂臣賊子)를 가까이 하는 죄로 오늘 문죄(問罪)하고자 하였더니, 송국의 위왕 현첨의 충성이 지극하기로 환약을 주어 구하라.’ 하였으니 급히 나가라 하거늘, 깨어 생각하니 경이 무슨 약으로 짐의 급한 병을 구하뇨.”
왕이 주하기를,
“마침 환약이 있사와 다행히 용체(龍體)의 환우가 급하심을 구하오나 이는 다 폐하의 성덕이로소이다.”
상이 희한히 여겨 가로되,
“경의 부친이 충효 지극하여 선제와 짐을 도운 공이 태산이 오히려 가벼웁고 하해(河海) 오히려 얕은지라. 그 갚을 바를 알 못하더니, 기자(其子) 경이 또 충효 쌍전(雙全)하여 파적(破敵)한 공은 이를 것도 없고, 선약을 얻어 짐의 죽을 병을 살려내니 만고의 없는 일대 충신이라. 무엇스로 그 공을 갚으리오.”
하시고 좌우를 돌아보시니 조충 등 팔십여 인이 다 간신이라. 상이 그 환약을 진어(進御)하신 후로 흐리던 정신이 맑아지고 어두운 마음이 온전하여 누구는 그르며 누구는 옳음을 판단하시니 이러므로 자연 천하가 대치(大治)하더라.
이날 위왕이 본국의 돌아감을 주하고 사은 퇴조(退朝)하온대, 상이 위로하며 이르기를,
“짐이 망령되어 경에게 사신을 보내어 서토(西土)를 들이라 하였더니, 이제 경을 만난 후로 짐의 그릇한 일을 황연(晃然)히 깨달았으니 경은 의심치 말고 안심 치국(治國)하라.”
하시고, 조서를 거두시며 금은 채단을 많이 상사하시니, 위왕이 천은을 사례하고 석침과 함께 본국의 돌아가 여러 대군을 모아 형제 서로 천자의 하시던 일을 이르며 일광대사의 기이한 일을 일컫더라.
일일은 좌승상 석침이 주하기를,
“신이 선왕의 후은을 입사와 벼슬이 상위(相位)에 거하오니 은혜 망극하온지라. 오래 부친 산소의 다녀오지 못하였으니 바라건대 전하는 수삭(數朔) 말미를 주시면 다녀올까 하나이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희허(喜許) 탄하며 이르기를,
“선왕이 매양 석참정 산소에 자주 친행(親行)하심을 과인이 잊지 아니하였으나, 그 사이 삼년 상을 지내고 또 천자의 명초하심을 인하여 자연이 잊은 모양 같더니, 이제 승상의 말을 들으니 과인도 선왕의 하시던 일을 효칙하여 함께 나아가리라.”
하고 즉시 발생하여 석참정 산소의 가 정성으로 제하고 돌아와 정사를 다스리니 위국이 태평하여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더라.
세월이 여류하여 위왕의 나이 사십이 되매 삼자 일녀를 두고, 여러 형제 다 각각 자녀를 많이 두어 영총(榮寵)이 무궁하니 천하의 이런 복록이 어디 있으리오. 대대로 충신(忠臣) 열사(烈士)가 계계승승(繼繼承承)하더라.
천자가 또한 위왕 부자의 대공을 잊지 아니하시고, 그 화상(畫像)을 그려 기린각(麒麟閣)에 걸고 단서(丹書) 칠 권을 만들어 만고충신이라 하사 사적을 기록하시고 종묘의 감(鑑)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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