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 이육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北)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 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육사시집(陸史詩集)」(1946)>
* 맹아리 : 꽃망울의 경상북도 방언
어서 너는 오너라
- 박두진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너이 오 오래 정드리고 살다 간 집, 함부로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 앵두꽃도 오얏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낮이면 벌떼와 나비가 날고 밤이면 소쩍새가 울더라고 일러라.
다섯 뭍과, 여섯 바다와, 철이야, 아득한 구름 밖 아득한 하늘가에, 나는 어디로 향해야 너와 마주 서는게냐.
달 밝으면 으례 뜰에 앉아 부는 내 피리의 설운 가락도 너는 못듣고, 골을 헤치며 산에 올라, 아침마다 푸른 봉우리에 올라 서면, 어어이 어어이 소리높여 부르는 나의 음성도 너는 못 듣는다.
어서 너는 오너라. 별들 서로 구슬피 헤여지고, 별들 서로 정답게 모이는 날, 흩어졌던 너이 형 아우 총총히 돌아오고, 흩어졌던 네 순이도 누이도 돌아오고, 너와 나와 자라나던, 막쇠도 돌이도 복술이도 왔다.
눈물과 피와 푸른빛 깃발을 날리며 오너라.……비둘기와 꽃다발과 푸른빛 깃발을 날리며 너는 오너라.……
복사꽃 피고, 살구꽃 피는 곳, 너와 나와 뛰놀며 자라난 푸른 보리밭에 남풍은 불고, 젖빛 구름 보오얀 구름 속에 종달새는 운다. 기름진 냉이꽃 향기로운 언덕, 여기 푸른 잔디밭에 누어서, 철이야, 너는 늴 늴 늴 가락 맞춰 풀피리나 불고, 나는, 나는, 두둥실 두둥실 붕새춤 추며, 막쇠와, 돌이와, 복술이랑 함께, 우리, 우리, 옛날을 옛날을 딩굴어 보자.
(3인 공동 시집 ?청록집?,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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