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또는 함께/학교에서 생각하는

첫(1994)

New-Mountain(새뫼) 2013. 2. 18.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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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영 산(인천 부평여중)

 

우리에게 이란 단어가 주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대개 새로움, 신선함, 순수함 그런 것들이 아닐까? 그렇지 않은 삶들도 있었다.

택시 기사도 잘 알지 못하는 곳에 그 곳이 있었다. 인적조차 찾기 어려운 눈밭 가운데 조감도의 황홀한 모습을 상상하고 모인 어리석은 이들이 있었다. 졸업한 고등학교보다 규모가 작은 건물 앞에서 어깨 너머로 구경하고 다닌 다른 대학을 떠올리는 촌내 풀풀 풍기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황량한 벌, 작은 건물 보도블럭 위에서 비 맞으며 첫 입학식이 있었다. 강의도 처음, 축제도 처음, 동아리도 처음, 총학생회도 처음, 학점도 처음, 술도 담배도....우리에게 순수함이란 단어가 낯설었다면 우리는 이 처음이라는 온갖 불편함과 불합리를 이겨내지 못하였을 것이다.하지만 우리가 순수라고 믿었던 좁은 감정을 어리석었다라고 고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대학생활이었다.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공사중인 식당 한 편에서 먼지를 얹어 먹던 첫 식사부터, 첫 방언 답사라는 걸 나가 마을 노인 들보다 먼저 취해 떨어진 것부터.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여학생들의 환호를 받으며 병영집체로 나아가 진천 공수부대에서 뺑뺑이 치다가 그 곳 사병의 자그마한 호의에 울어버리던 추억부터.아침마다 체조 나가라고 기숙사 문을 두드리는 생활관장의 눈을 피해 화장실 변기에 쪼그려 앉던 것부터,개교기념일이라고 번쩍이는 백담사 아저씨 앞에 감히 모시고 부동자세로 훈시듣던 것부터,정말 처음으로 도장 없는 대자보 한 장 몰래 붙이던 것부터,수업거부부터,시험거부부터,도망다니던 교생실습부터,몇십년을 짓씹어도 할 이야기는 많다.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그 곳의 벗들과 술 한잔에 나눌라면 왜 그리 초라해지던지.

우리의 대학은 그렇게 시작했고 첫 졸업식으로 끝이 났다.근엄하게 첫 졸업생에 대한 치사를 하는 총장님의 훈시를 뿌리치고 교가를 부르며 뛰쳐나오므로써 첫 졸업식을 거부했던 것으로 우리의 머리 속에서 대학은 잊혀졌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우리는 근엄함을 요구했던 이들의 바람대로 우리는 교단에 섰다.눈 비비고 학력향상을 위한 보충수업에 참여하러 일찌감치 나선다.결혼한다고 청첩도 준비하고,집 장만한다고 적금도 붓고,만원 전철에 시달리며 자동차 하나 굴릴 소박한 꿈에 젖는다.당장 코 잎에 닥친 애들 고등학교 입시에 한 놈이라도 더 붙여야 하고, 기말고사 문항지를 빨리 제출하라는 연구주임의 시선을 피해야 한다. 이번 겨울방학에 숙직 한번 더 들어갔다고 목청껏 싸우고 육성회장으로부터 거나하게 술 한잔을 얻어 마신다. 차마 돈봉투는 받지 않았지만 대신 날라온 구두 티켓으로 새구두를 산다. 민족, 민주,인간화 교육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서 신한국 세계화 국제화는 안다. 지금 가르치고 있는 것은 페스탈로찌도 아니고 듀이도 아니고 56차 교육과정도 아니고 입시대비 한샘 문제집 풀이다. 15호봉 1급 정교사의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대학을 다녀 온 게 벌써 3년 전이다. 그곳을 작정했던 건 아니고 지나치다 그냥 들렀을 게다. 어떤 모습일까? 궁금함과 자그마한 기대감. 아직도 내 족적이 남아 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곳은 고향일 수밖에 없는 곳. 하지만 다락리 산 7번지는 나의 기억과는 전혀 다른 풍경으로 거기 있었다. 학교가 거기 있음으로 나도 거기 있어야 하는데 내가 서 있는 저만치의 곳에 학교가 있었다.황량함으로.쓸쓸함으로. 모를 사람들뿐이었다. 그 때 그런 감정의 이유를 알지 못했다. 정말 그 느낌이 사실이었다면 누구의 잘잘못이었을까?

첫 해 가르친 한 녀석이 그곳에 적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 녀석은 곧 교무실 내 옆에 앉을 것이다. 조선생 신선생을 들먹이며 퇴근길 술 한잔 어쩌구 할 것이다.그 때까지 그러한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나는 어리석은 선생으로 남을 것이다.나는 어떤 대답을 하여야 한다. 15호봉 1급 정교사의 첫 뉘우침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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