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위한 교육을 위하여
-파브르 식물기를 읽고
신 영 산(인천 계산고)
"정확히 말하고 또한 쓰도록 가르쳐주신 선생님들, 제발 저희들에게 자유롭게 말하고 쓰게 해 주십시오. 선생님들이 좋아하시는 정의(定議)는 우리들이 좀더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셈을 가르치고 싶은 분은 필요할 때 손가락으로 계산하도록 해 주십시오."
이런 말들은 요즈음 학교와 교사를 비판하며 여러 곳, 여러 장소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교사라면 이런 비판을 견뎌내지 못한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교육과 교사에게 주어진 현실이 뒤따르지 못하는 때문이다. 그런데 위 항변은 대한민국 어느 고등학생의 독백도 아니고,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시리즈로 다루는 신문 기사의 한 부분도 아니다.
파브르를 모르는 사람들은 없다. 누구나 어릴 적 어린이 명작동화 내지 위인전을 통해 한번쯤은 '파브르의 곤충기'를 읽어보았을 거다. 그 파브르가 쓴 '파브르 식물기'의 한 부분을 옮긴 것이다. 하지만 위의 글은 우리가 아는 '파브르의 곤충기'와는 많이 달라 보인다. 우선 파브르가 식물기를 썼다는 것이 생소하고, 또 과학자인줄 알았던 그가 곤충 얘기도 식물 얘기도 아닌 아이들과 교육 얘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 새롭다. 더욱이 지금부터 100여년전 프랑스의 사람이었던 그가 한 말이 오늘날 우리 사회, 학교에서도 다름없이 통할 수 것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아버지요, 학교 선생이었던 파브르는장난꾸러기인 그의 아이들에게 까다로운 '과학'을 무리 없이 가르치기 위해 '나무이야기'를 해주겠다면서 식물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단순하게 나무만의 과학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식물들의 삶을 말하고, 그것과 연관된 우리들의 사람을 너무나도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 게다가 옳은 것이지만 기성세대이기에, 또 가르치는 자이기에 감추었던 말까지도 용기 있게 고백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을 단순하게 자연과학 도서로 분류할 수는 없을 듯하다. 식물을 소재로 하여 인간의 얘기를 하는 인문과학 도서이며, 사회와 교육을 말하는 사회과학 도서이기도 하다. 더 읽어보자.
"더욱 치명적인 것이 있다. 프랑스에서는 한 사람의 생애 가운데 근 10년 동안을, 그것도 인생의 꽃다운 나이에 어린이들에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우게 하는 것이다. 너희들에게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낱말을 억지로 외우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해야 한다면, 과연 우리는 파브르처럼 말할 수 있을까? 아마 이렇게 말하지는 않을까? '지금 너희가 배우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고, 너희들의 삶에 당장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너희들의 교양을 넓히고, 지식과 학문을 쌓기 위한 것이며, 입시에 성공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사실 이렇게 말한다 해도 그것은 가장 완곡한 표현일 테다.
그러나 파브르는 교양과 지식과 학문을 인간의 삶과 나누어 생각하지 않는다. 식물도 곤충도 마찬가지 시각에서 바라본다. 파브르의 식물들은 아이들의 친구이고, 부모이고, 이웃이다. 아이들처럼 재잘거리고, 어른들처럼 싸우며 어머니처럼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 이렇게 파브르는 모든 식물을 최대한 아이들 삶의 주변으로 몰아온다. 그리고 아이들의 삶 안에서 식물을 바라보게 한다. 식물을 보고 거기서 자신의 삶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식물기에서 학교나 교육을 비판할 수도 있고, 부끄러운 자기 고백도 가능한 것이다.
자, 그러면 우리 얘기를 해보자. 교양이던 학문이던 지식이던 간에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것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혹 별로 삶에 도움도 되지 않을 라틴어와 같은 것을 교과목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 아이들에게 그들의 삶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강 건너, 산 너머의 무엇을 진리라고 강요하고 이를 무조건 따르게 하고 있지는 않을까?
본래 학문이라는 것들은 우리 삶 자체를 다루는 것일 게다. 또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우리 곁에서 존재하는 것들도 지식일 거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가르침이라는 긴 터널 안에서 학문과 지식은 우리의 삶과 멀어져만 갔다. 교양이라는 것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물론 학교가 그 모든 책임을 질 수는 없다. 그럼에도 심각하게 반성할 것이 하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교사라는 사람들은 아이들이 알지 못하는 지식을 조금 더 알고 있다고 자부하기에 아이들의 반대편에 서서 안도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반성 말이다. 그리고 이런 지식을 삶과 멀리하여 점점 낯설게 그리고 어렵게 만들어 우리 위치를 공고하게 다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식을 낯익고 쉬운 것으로 되돌리는 것은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파브르도 이런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이제까지 나는 알아듣기 쉬운 말, 너희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얘기해 왔다. 학문적 표현은 피해왔다. 그러다 보니 이제 그 벌을 받게 됐다. 단 한마디로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이런 아쉬움은 나 역시 다르지 않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들이지마는 그 식물들을 삶에서 흔히 쓰는 언어로 설명하는 자체가 이미 부담스러워 졌다. 많은 학자들에 의해 낯설게 하기 어렵게 하기가 진행된 결과이다. 그리고 낯설고 어려운 것은 다시 우리 삶으로 되돌릴 려는 노력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파브르가 어느 인디안의 함성소리라고 표현했을 만큼 괴상한 학명으로 식물들은 포장되어 있다.
따라서 국어 선생인 나도, 아이들도 이 책은 어렵다. 바로 곁에 있는 이웃을 한참이나 돌아가도 제대로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아직도 일본 학자의 찌끄러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학문 용어가 대부분인 우리 모국어로 번역을 했으니 더욱 그렇다. 다만 식물과 과학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거듭 이 책을 읽게 되는 것은 파브르의 트인 생각에 내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이고, 나를 반성할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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