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의 만남
버스 가득 아이들을 실었다. 겨울이었어도 날은 포근했고, 아이들의 표정도 밝았다. 그 아이들이 어떤 계기로 모이게 되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누군가 체험학습을 다녀와야 한다고 했고, 다들 꺼려하는데 눈치없는 내가 나선 것이다. 단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겠다고 다짐을 받아 놓고.
무슨 체험활동? 적어도 이 학교에서 문학기행이라는 것은 없었다. 처음이 중요한 것. 그래서 문학기행이었다. 내가 시작하면 다음에 누군가도 또 하겠지.
어디로? 대부분의 문학 관련 유적지들은 지자체의 과시욕으로 포장되어 물씬 돈 냄새가 글 냄새보다 더 강하게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안그런 곳도 몇 곳 있기는 하다. 강진의 김영랑이나 부여의 신동엽. 하지만 인천에서 거기까지 오며 가며 할 수는 없는 거리다.
그래서 강원도. 춘천의 김유정과 원주의 박경리였다. 둘 다 내가 다녀온 곳이다. 최근에. 그리고 둘 다 깊이 각인되어 있는 곳이다.
김유정문학촌. 재작년 겨울에 다녀왔다. 무척 추웠었다. 아마 춥지 않았더라면 거기도 지차체의 과시욕만을 보고 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겨울이었고, 무척 추웠기 때문에 황량함이 인적을 막았었다. 김유정 문체의 유머스러움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그 배경이 마음에 들었었다. 아마 그때 이렇게 나름 결론을 내렸을 거다. 이런 곳에서 살았으니 그런 글을 썼겠지.
올해도 다르지 않다. 날은 많이 풀렸지만, 을씬스러움은 여전했다. 화장실도 얼었고, 온통 눈밭이었으며, 사람고 우리밖에는 없었다. 동백꽃 조차도 제대로 읽지 않은 아이들이었지만, 어떠랴. 눈밭에서 뛰어노는 모습이 보기 좋으면 되는 것을. 그것으로 문학기행의 최소한의 목적은 이룬 것이다.
박경리문학공원. 원주에 있다. 역시 작년 가을에 다녀온 곳이다. 하지만 각인의 이유는 전혀 다르다. 토요일 오전 정말 끔찍한 영동고속도로를 달려 겨우 도착하고, 서둘러 도시락을 먹고, 더 끔찍한 상행영동고속도로를 기다시피하여 결국 기억에 남은 것은 피곤함밖에는 없었다. 또 여전히 다 읽지 못한 '토지'였기에, 빚이라도 진 기분으로 돌아왔던 기억밖에는 없다.
올해 다 식은 도시락을 버스 한켠에서 벗겨 먹는 것으로 다시 그 자리에 섰다. 사람만 달라졌지만 여전이 똑같은 어조의 나레이터 아주머니. 너무나도 깔끔해 나같이 어수룩한 이가 끼어들기가 거북한 분위기. 여전히 다 읽지 않은 '토지'. 하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즐거웠다. 왜? 인천을 떠나서이고, 적어도 그 시간만은 학원이니 과외니 하는 짓누름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시 포근하고 눈도 쌓여있고.
그래도 인상 깊었던 장면 둘.
아이들이 무수히 쌓아놓은 신발과 박경리의 소박한 책상
또 하나, 이번 기행에 같이 했던 이들.
교사에 뜻을 두고 사범대학을 졸업하였으나, 지리 교사를 뽑지 않아, 아예 임용고사조차 볼 기회를 박탈당해 기간제 교사를 전전하는 젊은 선생님과, 삼십년 가까이 교사를 하였으나 점점 설 자리의 부족함을 느끼고 새 자리를 찾아 용감하게 명예퇴직하는 늙은 선생님이 내 옆에 있었다.
내가 있었던 두 시간은
김유정과 박경리가 아니라
시작하고 싶으나 시작하지 못하는 것과, 계속하고 싶으나 계속하지 못하는 두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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