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또는 함께/기쁘거나 슬프거나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

New-Mountain(새뫼) 2013. 2. 11.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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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기와 드러내기


나이 사십을 훌쩍 넘었어도, 여전히 두려운 것은 두려운 거다. 내 성격이 본래부터 그러하기 때문이라면 정말 좋은 핑계거리이겠지만, 그 핑계도 어지간한 나이일 때만 가능하다. 세상 살만큼 살았고, 내 아이들도 클 만큼 컸으며,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훨씬 많은 이 때에도, 여전히 세상이 두렵다면 그것은 정말 문제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세상이 두렵고 그 세상에서 나와 부대끼는 사람들이 두려운 것을. 왜 두려운가를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왜 두려움을 떨져 버리지 못했는가를 되새겨 본 것도 아니다. 왜 이런 마음을 머릿속에 담고도 사십 몇 년을 살아가는가를 후회 안해본것도 아니다. 하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이고, 여전히 나란, 나란 사람이란, 이 세상 속의 나란 사람이란 변함없이 세상과 나와의 관계맺음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나는 여전히 그대로인데 세상만이 정말 천박하게 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때문은 아니다. 거꾸로 세상은 그대로이지만 나만 비겁하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나와 세상이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니 나와 세상이 맞지 않을 거라도 지레 짐작해버리고 그걸 내 삶의 좌우명처럼 애지중지 품으며 살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무엇이 진실이든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왜 이런 사춘기적 감상을 늦은 밤 적어가느냐이다. 그것은.... 고통이다. 을씬거리는 추위, 떨리는 손가락, 어질한 시선, 그걸 품고 쉬이 잠자리를 가까이하기 힘든 것이다. 한잔을 빌려 떠벌이지 않으면 쉬 맘을 달랠 수 없는 이들처럼, 가슴 속에서 스멀거리며 올라는 약간의 감상을 증폭시켜 문제시하고, 그걸 보며 다시 나를 달래려는 얄팍함이 이 늦은 시간에 컴퓨터 앞에 나를 불러 앉힌 것이다. 물론 마음의 정리가 쉬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안다. 하지만 그래도 적어도 몇분 동안만이라도 그것이 세상 속에서의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그래 나란 나란 놈을 본래 그런 것이었어 하고 되내이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세상 운운한 것이 정말 핑계이었을 수도 있다. 어울리지 못한 것은 나와 세상이 아니라 나와 나 자신이었을지도, 


다만, 이러 적어 두고도 여전히 비겁한 것은

왜 이런 주저리들을 적고자 했는지를 끝내 밝히 않은 것.

감추고 싶은 것은 감춘채 드러내고 싶은 거만 드려내려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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