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또는 함께/학교에서 생각하는

별헤는 밤(1998)

New-Mountain(새뫼) 2013. 2. 11. 22:13
728x90

별 헤는 밤

인천국어교사모임 신 영 산(운산기계공고)

 

이제 교과서에 출석부를 들기 시작한지도 두 자리 햇수. 그간 학교나 교과서가 몇 차례 바뀌었지만 학교 현관 앞 거울에 비춰지는 내 모습은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어쩌다 거리에서 마주친 애업은 제자를 보았을 때나, 더 이상 맞는 구멍이 없어 허리띠에 송곳을 찌를 때. 그 때 정도 그렇게 저렇게 세월이 지나왔음을 보여줄 뿐. 그러나 이 적지 않은 시간 속에서 내게 남은 것은 무어란 말이냐. 여기에서 고민을 시작한다.

 

애초 그렇게 하기로 예정했던 수업은 아니었다. '잊지 못할 윤동주'라는 단원이 있었다. 교과서도 읽고, 시도 몇 편 읽어주고, 마루타 어쩌고 해 주다가, 눈에 띈 아이들의 얼굴들. 무표정과 관심 없음과 귀찮음과 간간 시계를 올려다보는 수고스러움. 모두들 그렇게 주어진 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 역시 그런 의미 없는 시간 보내기. 그러다가

"모두 책 뒤를 펴보자. 어디어디. 거기 '별 헤는 밤' 이라는 시가 있을 거다. 찾았나?" 앞 뒤 다 떼어버리고 중간쯤만 보자. 그래 거기. 별 하나에 무어, 별 하나에 또 무어 하는 부분이 있지? 자 아무거나 꺼내놓고 너희들도 한 번 적어보자. 별 하나에 너희가 가장 소중한 것을 적어보는 거야?"

공고 학생들, 산업 역군의 꿈을 품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학생은 전혀 없고, 단지 90%를 밑도는 성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기 앉아 있는 학생들, 예상한대로 반기는 표정은 없다. 다만 귀찮은 일거리가 하나 생겼구나 하는 찌뿌드하게 일그러지는 얼굴일 뿐. 그래도 어찌하랴. 한 번 빼어든 칼이니. 협박에 공갈에 애원에 부탁에 아양까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공식적 비공식적 교수방법을 다 동원하여 기어이 녀석들의 펜을 쥐게 하기를 성공했다.

그리고 발표하기. 역시 손을 드는 녀석은 없다. 강제로 이름을 부를 밖엔. "누구?" "아직요." "누구는?" "싫어요." 녀석들이 알아서 발표해주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이미 글러 버린 것. 통로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낚아챘다. 어어 안 되는데 그런 소리를 뒤로 무시하고 말이다. 그렇게 하여 교탁 위에는 종이들이 쌓였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다.

별 하나에 사랑과 우정과...  별 하나에 어머니와 아버지와...  별 하나에 괴로움과 고독함과...  별 하나에 시와 소설과.... "야, 임마 그것밖에 쓸 게 없냐. 이건 패러디가 아니라 애들 장난이다." "패러디가 뭔데요?" "관두자." 다 그렇고 그런 얘기겠지. 마저 읽기를 포기하려다가 한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그래 저 녀석은 뭐라 썼나. 입학하고 며칠 뒤 교실 한 가운데에서 술 냄새 풀풀 풍기며 큰 대자로 누워 있던 녀석. 또 며칠 후 친구들의 금품을 갈취한 혐의로 3월 내내 교실보다 학생과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 녀석. 추운 새벽 삐끼 뛰면서 나보다도 더 많은 돈을 번다는 녀석. 저 녀석이 담임 시간인 국어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적인 일이다. 녀석은 뭐라 썼을까? 부지런히 녀석의 이름을 찾았다. 드디어 읽기 시작, 결코 낭랑하지 못한 목소리로.

별 하나에 오토바이와, 별 하나에 핸드폰과, 별 하나에 필라 츄리링과, 별 하나에 경숙이(아마도 여자 친구인 듯).... "이게 뭐냐?" "제 꿈이에요." "꿈?" 녀석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꿈이라고. 순간 멍해지는 듯한 느낌.

수업을 마치고도 그 '꿈'이라는 단어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녀석이 원하는 꿈이 내가 생각하는 꿈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녀석은 그 꿈을 위해 친구들의 주머니를 노리고, 새벽 취객들의 소매를 끌고 있었던 것. 그렇게 녀석은 제 꿈을 하나하나 늘어놓고 있었다. 제법 진지하게. 그리고 꿈을 이루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가고 있었던 거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다음은 내 차례이다.

벌써 십 년이 지났지만 무엇도 거침없이 소주 한잔에 대학 구내를 휩쓸며 부르짖었던 내 꿈은 지금 어디 있다는 말인가? 나도 분명 꿈이 있었을 거다. 그러나 그 꿈이 무엇이었는지도 분명하게 떠오르지도 않는다. 아마 선생님에 대한 것이었든지 문학에 대한 것이었든지 뭐 그런 것이었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뿐.  그러나 지금은 꿈이 '없다'도 아니고 '모른다'가 되어버렸다.

녀석은 내 고민을 자극했다. 하루를 어떻게, 무엇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빨리빨리를 부르짖는 높은 분들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컴퓨터를 두드리고, 한 시간 수업을 '마쳤다'가 아니라 '때웠다'로 여기면서. 또 가끔 교과 모임에 나가 연구 비슷한 흉내내는 것이 유일한 지적 위안. 애타게 월급날 기다리는 한낱 봉급쟁이의 꿈. 어쩌다 수업 단축이라도 하여 조금이라도 쉬어보고픈 안락한 꿈. 그런 거 말고 진짜 꿈.

꿈이 없으면 좌절도 없다. 그러고 보면 그간 꿈을 모르기에 좌절도 없었던 거다. 하루하루는 정말 하루하루일 뿐이고, 조금 더 단순하게, 조금 더 편하게, 조금 욕심이 있다면 약간 물질적인 윤택을 바라면서. 그것으로 끝이다. 더 이상의 무엇도 없다. 정말 없었다. 정말

 

다시 그 녀석의 얘기. 검찰과 경찰과 학생과를 들락거리더니 녀석은 끝내 학교를 그만 두고 말았다. 녀석은 좌절한 것일까? 애당초 무사히 학교를 마치는 것이 녀석의 꿈이 아니었다면 녀석은 좌절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몇 개월이 더 지난 후 우연히 듣게 되는 녀석의 삶. 자살을 기도했다고 했다. 죽지는 않았지만 녀석이 꾸었던 그런 꿈들이 더 이상 필요없는 몸과 마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다시 소식이 없다. 나 역시 찾지 않았다. 더 이상 나의 학생이 아니었기에 말이다. 또 평상의 단순한 내 삶을 살아야 했기에.

녀석을 잊어버리는 것으로, 내 꿈에 대한 고민도 접어두었다. 정말 세월만큼 편리한 것은 없다. 그러나 한 해가 지나고 또 다른 아이들을 모아놓고 '잊지 못할 윤동주'를 가르칠 때 나는 다시  녀석이 떠올렸다. 그리고 거기 겹쳐지게 나를 떠올렸다. 당연히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니 변하려 하지 않는 몸부림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밥 세끼를 찾아 먹을 수 있었기에.

 

다만 복잡하지 않은 고민 하나. 새로운 녀석들에게 다시 '별 헤는 밤'을 써보게 할까? 아니면 다음 구절 빈칸을 메워 보게 할까?

그러나 이걸 진실하게 써 보아야 하는 이는 따로 있을 것이다.

"□□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