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모임, 누구를 위한 일
급하게 사람들을 모았다. 아니 모였다면 다 급한 것이다. 급해야지만 모이는 것이다. 수학적으로 '모이지 않았다면 급한 일은 없는 것이다'와 같은 말이다.
작년의 일이 문제가 되었다. 다른 학교에서는 채웠는데, 우리 학교만 빈칸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도 다른 학교에서 한 것처럼 채워주어야 한다는 것. 그게 사람들이 모인, 사람들을 모은 이유다. 물론 결론은 이미 내려져 있을 거다. 모으기 전에 이미 충분하게 이것저것 다 따져보았을 거다.
둘째 좌장이 설명을 하고, 첫째 좌장이 당위성을 피력한다. 이것이 늘 순서다. 그리고 모은 사람들의 의견을 묻는 거다. 그런데 첫째, 둘째 좌장이 이미 저리 말해 버렸는데, 아니올시다 하고 손을 드는 이들은 거의 없다. 만일 있다면, 눈치가 없는거다. 지나치게 소신이 강한 경우는 별로 없다. 왜냐면 모인 사람들도 다 말석이나마 좌장이라는 말을 듣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짜고 치는 고스톱인양 하자, 그러면 누가 할거냐 하고 사람들을 모은 본래 이유로 넘어가려는데... (사실 우리들을 모은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 누군가가 용감하게 손을 든다. 꼭 해야 하냐고, 그것이 우리 아이들 대학가는데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작년 일이니 작년 담임들이 해야 하는데 이미 이 학교를 떠난 사람들도 있다고, 또 일률적으로 4백여명을 입력해보아야 그게 무슨 학생들의 특이한 자료가 될 거냐고, 주저리주러리...
그렇게 말한 이는 바로 나다. 뭐 내가 하는 말이 반드시 맞는 말인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다. 솔직히. 그래도 모인 자리이니만큼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한다. 그러자고 모인 거 아닌가. 그렇게 모인 취지를 거스르는 발언이 나왔다. 잠시 어색한 적막이 흐른다. 다들 시선이 내게 꽂힌다. 저런 눈치없는 자가 있나. 정말 눈치없지만, 그렇다고 표정에서 그런 말없는 말을 읽어내지 못할 눈치없음도 아니다.
그래도 여기 첫째 좌장은 설득이라는 것을 조금은 안다. 다른데서는 보통 이런 경우 무시당하기 일쑤이지만. 요지는 누군가 왜 그 학교만 그러냐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어쩔거냐, 만약에 내년에 이런 항의가 들어오면 정말 곤란하다. 4백명에게 똑같은 말을 써주어도 그 4백명이 전국 대학으로 흩어지면, 결국은 다 다른 말이 된다. 정말 현실적이다. 이 때쯤 되면 옆에서 누군가가 맞장구치고 장내를 정리한다. 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고 문제는 누가 언제 어떻게 할 것이냐를 의논해보자.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들이 많다. 이렇게 하자. 아니 그건 이것 때문에 곤란하다. 그러면 저러면 어떠냐, 그렇게 하면 이런 점 때문에 문제가 된다. 그러면 어쩌자는 거냐. 나도 할 말은 있다. 하지만 내가 말을 해서는 안되는 자리다. 유일하게 반대했던 사람이 나 아니냐. 그러면에서 나도 꽤나 속이 좁다. 잠자코 된다 안된다오고가는 말들만 듣고 있는 것인데...
문득 곁에 있는 이가 옆구리를 꾹 누른다. 그리고 조곤조곤 속삭인다.
"왜 반대했어."
그야 아닌 것 같으니까 그렇다.
"당신이 내년에 3학년 부장하기로 했잖아. 지금 얘들 말이야."
그것과 이것과 무슨 상관이람.
" 아, 이 사람 좀 보게. 만약에 당신이 맡았을 때 이런 얘기가 나왔다고 해봐. 그건 다 당신이 뒤집어 써야 하는 거라고. 지금 나온게 얼마나 다행인가"
갑자기 뒤통수가 팅팅.. 그랬구나. 그래서 다들 나를 그런 눈으로 보았었는지, 앞의 눈길들을 복기한다. 쟤 왜 저러냐 했을지도 모를 눈총들을. 하기사 애시당초 눈치가 있었으면, 내년에 내가 어떤 일을 하든지 반대라는 것을 하지도 않았을 터. 눈치가 없으니 내 처지도 생각않고 아니다 싶으니 아니라고 한 거다. 그러니까 '나'이지.
하지만, 하지만, 내년에 내가 당장 담당자가 되었어도 아닌 건 아니라고 하지 않았을까. 결국 그러다가 꼬리를 내리겠지만 그래도 우길 때까지 우기지 않았을까. 이런 혼자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사람들은 되네 안되네 씨름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묵묵히 귀 닫고 입 닫고 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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