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총람(산문)/구운몽 한문본

권지이 - 4. 소유가 낙양에 돌아왔지만 계섬월은 사라져 볼 수 없었다

New-Mountain(새뫼) 2020. 11. 26.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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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소유가 낙양에 돌아왔지만 계섬월은 사라져 볼 수 없었다

 

至洛陽 舊日經過之跡 尙不改矣.

當時以十六歲藐然一書生, 着布衣跨蹇驢 搰搰棲棲行色艱關,

不啻如蘇秦十上之勞矣, 才過數年建玉節駈駟馬, 洛陽縣令奔走除道, 河南府尹匍匐導行,

光彩照耀於一路, 先聲震懾於諸州, 閭里聳觀行路咨嗟 豈不誠偉哉?

지락양 구일경과지적 상불개의

당시이십육세막연일서생 착포의과건려 골골서서행색간관

불시여소진십상지로의 재과수년건옥절구사마 낙양현령분주제도 하남부윤포복도행

광채조요어일로 선성진섭어제주 여리용관행로자차 기불성위재

 

행차가 낙양(洛陽)에 다다랐는데, 지난날 지나갔던 자취들은 아직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당시에는 십육 세의 막연한 한낱 서생으로서, 베옷을 걸치고 다리 저는 나귀에 걸터앉아 힘에 부치고 마음이 답답하여 행색이 구차하였었다.

이제 소진(蘇秦)이 열 나라 위에 군림한 공로와 같지는 않다 하더라도, 겨우 몇 년이 지나 옥절(玉節)을 세우고 사마(駟馬)를 몰고 가며, 낙양 현령(縣令)이 분주히 길을 고치고, 하남 부윤(河南府尹)이 공손히 길을 인도하니, 광채가 한길에 밝게 비치고, 미리 알려진 명성이 여러 고을을 떨며 두렵게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행로를 조용히 바라보며 부러워하는데, 어찌 정말 볼만한 광경이 아니겠는가?

 

翰林先使書童, 往探桂蟾月消息, 書童往蟾月之家 重門深鎖,

畫樓不開 惟有櫻桃花, 爛開於墻外而已 訪於隣人卽曰 :

“蟾月去年春與遠方相公, 結一夜之緣, 其後稱有疾病 謝絶遊客, 官府設宴 托故不進矣.

未幾佯狂 盡去珠翠之飾, 改着道士之服 遍遊山水, 尙未還歸 不知其方在何山矣.”

한림선사서동 왕탐계섬월소식 서동왕섬월지가 중문심쇄

화루불개 유유앵도화 난개어장외이이 방어린인즉왈

섬월거년춘여원방상공 결일야지연 기후칭유질병 사절유객 관부설연 탁고부진의

미기양광 진거주취지식 개착도사지복 편유산수 상미환귀 부지기방재하산의

 

한림이 먼저 서동으로 하여금 계섬월의 소식을 알아보라 하여, 서동이 섬월의 집을 찾았으나 중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화루(畫樓)도 열리지 않은 채, 아직 앵두꽃만이 담 밖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을 뿐이어서, 이웃 사람을 만나 물었더니 답하기를,

“섬월이 지난해 봄에 먼 고장의 상공(相公)과 더불어 하룻밤 인연을 맺은 후로는, 병이 있다고 핑계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사절하며, 관가에서 베푼 잔치에도 그 이유를 들어 나아가지 아니하였나이다. 얼마 안 가서 거짓 미친 체하며, 구슬과 비취 따위의 패물을 다 떼어 버리고, 도사(道士)의 의복으로 바꿔 입고는 두루 산수를 구경한다 떠났나이다. 아직 돌아오지 아니하였으니, 어느 산에 있는지 그 정처를 알지 못합니다.”

 

書童以此來報, 翰林歡意 遂沮若墜深坑, 過其門墻 撫迹潛辛, 夜入客館不能交睫.

府尹進娼女十餘人而娛之, 皆一時名艶也.

明粧麗服三匝圍坐, 前者天津橋上諸妓 亦在其中矣.

爭姸誇嬌欲睹一眄, 而翰林自無佳緖不近一人, 翌曉臨行 遂題一詩於壁上.

서동이차래보 한림환의 수저약추심갱 과기문장 무적잠신 야입객관불능교첩

부윤진창녀십여인이오지 개일시명렴야

명장려복삼잡위좌 전자천진교상제기 역재기중의

쟁연과교욕도일면 이한림자무가서불근일인 익효임행 수제일시어벽상

 

서동이 돌아와 이 연유를 아뢰니, 한림의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 마침내 깊은 구멍에 떨어지는 것과 같이 막힌 듯하였다. 그 문과 담을 지나면서, 남몰래 그 자취를 어루만지고, 밤에 객관(客館)에 들어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윤이 기생 십여 명을 보내어 즐거이 해 주려는데, 모두가 한때에 곱기로 이름난 자들이었다. 아름다운 단장과 화려한 의복을 차려입고 삼면으로 둘러앉았는데, 이전에 천진루(天津樓) 위에 있던 여러 기생도 또한 그중에 있었다. 아름다움을 겨루고 교태를 자랑하며 한 번 눈여겨보기를 바랐지만, 한림은 자연 아무런 흥취가 없어 한 사람도 가까이함이 없이, 이튿날 새벽 떠나면서 마침내 한 수의 시를 벽 위에 지어 놓았다.

 

其詩曰 :

기시왈

 

雨過天津柳色新 우과천진류색신

風光宛似去年春 풍광완사거년춘

可憐玉節歸來地 가련옥절귀래지

不見當壚勸酒人 불견당로권주인

 

그 시에 읊기를,

비 내린 천진 지나니 버들 빛이 새로우니

풍광은 완연하게 지난봄과 같았구나.

가련하도다, 옥절 들고 다시 찾아 왔는데

술자리에 술 권하던 이 보이지 않는구나.

 

寫吃投筆 乘軺取其前路而去, 諸妓立望行塵 只切慙赧而已.

爭謄其詩納於府尹, 府尹責衆娼曰 : “汝輩若得楊翰林之一顧, 則可增三倍之價 而一隊新粧,

皆不入於翰林之眼, 洛陽自此無顔色矣.”

問於衆妓知翰林屬意之人, 揭榜四門訪蟾月去處, 以待翰林復路之日.

사흘투필 승소취기전로이거 제기립망행진지절참난이이

쟁등기시납어부윤 부윤책중창왈 여배약득양한림지일고 즉가증삼배지가 이일대신장

개불입어한림지안 낙양자차무안색의

문어중기지한림속의지인 게방사문방섬월거처 이대한림부로지일

 

시 쓰기를 마치자 붓을 던지고 수레에 올라 앞길을 취하여 나아가니, 여러 기생이 우두커니 서서 가는 길에 이는 먼지만을 바라보고, 다만 무척 부끄러워 무안해할 뿐이었다. 서로 다투어 그 글을 베껴서 부윤에게 바치니, 부윤이 여러 창기를 꾸짖으며 이르기를,

“너희가 만일 양한림의 한 번 돌아봄을 얻었다면, 세 배나 그 값을 더할 수 있었을 것이로다. 한 무리나 새로 단장을 하고서도 모두 한림의 눈에 들지 못하였으니, 이로부터 낙양 땅이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되었도다.”

여러 기생에게 한림의 마음에 있는 사람을 알아내도록 묻고, 네 문에 섬월이 간 곳을 찾아내는 방을 붙이도록 하며, 한림이 다시 길을 지나는 날을 기다렸다.

 

翰林至燕國絶徼之人, 未曾賭皇華威儀 見翰林, 如地上祥麟 雲間瑞鳳,

到底擁車塞路, 無不以一覩爲快, 而翰林威如疾雷 恩如時雨,

邊民亦皆欣欣, 鼓舞嘖舌相稱曰 : “聖天子將活我矣.”

한림지연국절요지인 미증도황화위의 견한림 여지상상린 운간서봉

도저옹거색로 무불이일도위쾌 이한림위여질뢰 은여시우

변민역개흔흔 고무책설상칭왈 성천자장활아의

 

한림이 연나라에 다다르니, 아득한 변방 사람들이 일찍이 황제 사자의 위의를 보지 못하였다가 한림을 보니, 상서로운 땅 위의 기린 같고 구름 속의 상서로운 봉황과 같았다. 마침내는 다투어 수레를 둘러싸고 길을 메우면서, 한 번 보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한림의 위엄이 빠른 우레와 같고, 은혜는 때를 맞춰서 내리는 비와 같아서, 변방 백성들이 역시 기뻐하였다.

북을 치고 춤을 추면서 서로 다투어 이르기를,

“성천자(聖天子)가 장차 우리를 살리실 것이로다.”

 

翰林與燕王相見, 翰林盛稱天子威德朝廷處分, 以向背之執順逆之機, 縱橫闢闔 言皆有理,

滔滔如海波之瀉, 凜凜如霜颷之烈, 燕王瞿然而驚 惕然而悟,

乃以膝蔽地而謝曰 : “獘藩僻陋 自外聖化習故, 狃常迷不知返 此承明敎大覺前非.

自此當永戢狂圖 恪守臣職, 惟皇使歸奏朝廷, 使小邦因危獲安, 轉禍爲福 則是小鎭之幸也.”

因設宴於辟鏤宮, 以餞翰林將行, 以黃金百鎰名馬十匹贐之, 翰林却不受 離燕土而西歸.

한림여연왕상견 한림성칭천자위덕조정처분 이향배지집순역지기 종횡벽합 언개유리

도도여해파지사 늠름여상표지렬 연왕구연이경 척연이오

내이슬폐지이사왈 폐번벽루 자외성화습고 뉴상미부지반 차승명교대각전비

자차당영집광도 각수신직 유황사귀주조정 사소방인위획안 전화위복 즉시소진지행야

인설연어벽루궁 이전한림장행 이황금백일명마십필신지 한림각불수 이연토이서귀

 

한림이 연왕과 서로 만나서, 천자의 위엄있는 덕망과 조정의 처분을 자주 일컬으며, 쫓고 등지는 일과 순종과 거역의 도리를 역설하며 이치를 잘 알아듣도록 타일렀다. 도도함이 바다 물결을 뒤치는 듯하고, 늠름함이 추상같아서, 연왕이 놀라며 두려워하더니, 곧 사리를 깨달았다.

땅에 꿇어앉아 사죄하기를,

“변방이 괴팍하고 고루하고 황제의 덕화가 자연히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외람되이 조정의 명에 거역하였음을 알지 못하였는데, 이제 밝은 가르침을 받아 이전의 잘못을 크게 깨달았사옵니다. 이로부터 응당 어리석은 마음을 길이 정제하고, 삼가 신하 된 자의 직분을 닦겠사옵니다. 오직 황사(皇使)는 돌아가 조정에 아뢰어, 작은 나라가 위태함으로 인하여 편안함을 얻고, 전화위복이 되도록 해 주시면, 이 작은 땅으로서는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인하여 벽루궁(辟鏤宮)에서 잔치를 베풀고 한림이 장차 떠나려 할 때, 황금 천 근과 명마 열 필을 주거늘, 한림은 이를 물리치고 받지 않고서, 연나라 땅을 떠나서 서쪽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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