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풀어 읽기-총람/덴동어미화전가

덴동어미화전가(소백산대관록) - 제2부 _ 3.도부장사 황도령

New-Mountain(새뫼) 2020. 10. 22.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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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부

 

3. 도부장사 황도령

 

울산 읍내 황도령이 나더러 하는 말이

여보시오 저 마누라, 어찌 저리 슬퍼하오.

하도 내 신세가 가난하고 구차하기로

이내 마음 몹시도 슬프다오.

아무리 가난하고 구차한들

나처럼 가난하고 구차할까.

 

우리 집이 자손 귀해 오대 독자 우리 부친

오십이 넘도록 자식 없어

일생 한탄이 무궁하다가

쉰다섯에 날 낳으니 육대 독자 나 하나라.

손안의 제일가는 보배같이

안고 업고 겨우 키우더니

세 살 먹어 모친 죽고, 네 살 먹어 부친 죽어

도와줄 가까운 친척이 본래 없어

외조모 손에 키워졌더라.

열네 살 먹어 외조모 죽고

열다섯 살에 외조부 죽고

외사촌 형제 같이 있어

삼 년 상을 지냈더니

남의 빚에 못 견뎌서 외사촌 형제 도망가고

의탁할 곳이 전혀 없어

남의 집에 머슴으로 들어가

십여 년을 고생하니 장가 밑천 되더이다.

 

서울 장사가 남는다고

새경 받은 돈을 모두 받아내어

참깨 열 통 무역하여

대동선에 부쳐 싣고

큰 북을 둥둥 울리면서

닻 감는 소리 신명난다.

도사공은 키를 들고 입사공은 춤을 추네.

한없이 큰 바다로 떠나가니

신선놀음 이 아닌가.

 

해남관 앞바다를 지나다가

바람 소리 일어나며 왈칵 덜컥 파도 일어

천둥 끝에 벼락 치듯

물결은 출렁이며 산더미 같고

하늘은 캄캄하여 안 보이네.

수천 석 실은 그 큰 배가

회오리바람에 가랑잎 뜨듯

빙 돌며 떠나가니 살 가망이 있을런가.

한없이 넓고도 큰 바다에

바라는 바 없이 떠나가다

한 곳에 들이 받쳐 수천 석을 실은 배가

조각조각 깨어지고 부서지고

수십 명 접꾼들이

언뜻 보이다가 사라지니 못 볼러라.

나도 역시 물에 빠져

파도 머리 밀렸다가 마침 눈을 떠서 보니

배 조각 하나 둥둥 떠서 내 앞으로 들어오니

두 손으로 끌어 잡아 가슴에다 붙여놓으니

물을 무수히 토하면서

정신 조금 수습하니 아직 살긴 살았다마는

아니 죽고 어찌할꼬.

오르는 파도 더미 손으로 헤치고

내리는 파도 더미 가만히 있으니

힘은 조금 들었지만 몇 달 며칠 기한 있나.

기한 없는 이 바다의 몇 달 며칠 살 수 있나.

밤인지 낮인지

정신없이 기한 없이 떠나간다.

풍랑소리 벼락 되고

물거품이 구름 속에 흐릿하게 안개 되네.

물귀신의 울음소리 응얼응얼 귀 막힌다.

 

어느 때나 되었는지 풍랑소리 없어지고

넓고도 큰 바다가 잠을 자고

까마귀 울음소리 들었거늘

눈을 들어 살펴보니 백사장이 뵈는구나.

두 발로 박차면서 손으로 헤엄치니

백사장에 닿는구나.

엉금엉금 기어 나와 정신없이 누웠다가

마음을 단단히 고쳐먹고

다시 일어나 살펴보니

나무도 풀도 돌도 없고

다만 해당화가 붉어 있다.

몇 날 며칠 굶었으니

배인들 아니 고플쏜가.

엉금 설설 기어가서 해당화꽃 따 먹으니

정신이 점점 돌아와서

또 그 옆을 살펴보니

절로 죽은 고기 하나 커다란 게 게 있구나.

불이 있어 구울 수 있나.

생으로 실컷 먹고 나니

본정신이 돌아와서

눈물도 울음도 인제 나네.

 

아무도 없는 외딴 섬의 백사장에

혼자 앉아 우노라니,

난데없는 어부들이 배를 타고 지나다가

우는 걸 보고 괴이하게 여겨

배를 대고 나와서는

나를 흔들며 하는 말이

어찌 사람이 혼자 우나.

울음 그치고 말을 해라.

 

그제야 자세히 돌아보니

육칠 명이 앉았는데 모두 다 어부여라.

그대들은 어디 살며 이 섬은 어디니까.

이 섬은 제주 한라섬이요,

우리는 다 정의에서 왔노라.

고기 잡으러 지나다가 울음소리 따라왔다.

어느 곳의 사람으로 무슨 일로 예 와 우나.

 

나는 본디 울산에 살았는데

장삿길로 서울 가다가

세찬 바람과 물결 만나 배 깨지고

물결에 밀려 내쳐졌으니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

어느 곳인 줄 아오리까.

제주도 우리 조선이러니

가는 길을 인도해 주오.

 

한 사람이 일어서며 손을 들어 가리키되

제주 읍내 저리 가고, 대정 정의 이리 가지.

제주 읍내 가오리까, 대정 정의 가오리까.

 

밥과 고기 많이 주며

자세히 일러주며 하는 말이

이곳에서 제주읍 가자 하면

사십 리가 넉넉하다.

제주 관아 찾아들어 본 사정을 아뢰오면,

우선 입에 풀칠은 할 것이요,

고향 가기 쉬우리라.

신신이 당부하고 배를 타고 떠나간다.

가리키던 그곳으로 제주 관아 찾아가니

본관사또 들으시고 불쌍하게 생각하여

돈 오십 냥 내어 주고 전령 한 장 내주시며

네 이곳에 있다가 왕래선 있거들랑

사공 불러 전령 주면 뱃삯 없이 잘 가리라.

 

그럭저럭 세 달 만에 왕래선에 건너와서

고향이라 돌아오니 돈 두 냥이 남았구나.

사기점에 찾아가서 두 냥어치 사기 지고.

마을마다 집집마다 도부하며

밥일랑은 빌어먹고

서너 달을 하고 나니 돈 열댓 냥 되었지만

삼십 넘은 노총각이 장가 밑천 가망 없네.

애고 답답 내 팔자야, 언제 벌어 장가갈꼬.

머슴 살아 사오백 냥

큰 바다 한 알의 좁쌀처럼 부쳐두고

두 냥 밑천 다시 번들 언제 벌어 장가갈까.

 

그런 날도 살았는데 슬퍼 마오 울지 마오.

마누라도 슬프다 하되 내 설움만 못하오리.

여보시오 말씀 듣소.

우리 사정 따져 말하건대

삼십 넘은 노총각과 삼십 넘은 홀과부라.

총각의 신세도 가련하고

마누라의 신세도 가련하니

가련한 사람들 서로 만나

같이 늙어가면 어떠하오.

 

가만히 곰곰 생각하니

먼저 얻은 두 낭군은 홍살문 안 사대부요,

큰 부자의 살림살이

집안 재산 다 써 버리고 몸까지 망쳤으니

즐거운 일 다 했으니 슬픈 일이 닥쳐왔나.

저 총각의 말 들으니 육대 독자 내려오다

죽을 목숨 살았으니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오나 보다.

마지못해 허락하고 손잡고서 내가 한 말

우리 서로 불쌍히 여겨 허물없이 살아보세.

 

영감은 사기 한 짐 짊어지고

골목에서 크게 외치고

나는 사기 광주리 이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도부한다.

아침저녁 밥을 빌어 한 그릇에 둘이 먹고

남쪽 북쪽 마을마다 다니면서

부지런히 도부하니

돈 백이나 될 만하면 둘 중 하나 병이 난다.

병구완에 약을 쓰며 하다 보면

남의 신세를 지게 되고

다시 다녀 부지런히 일을 하며 돈을 모아

또 돈 백이 될 만하면, 또 하나가 탈이 나서

한 푼 없이 다 쓰고 마네.

도부장사 한 십 년 하니

장딴지에 털이 빠져 없어지고

모가지가 자라목 되고 발가락이 무지러졌네.

 

산 밑 주막에 영감을 머무르게 하여 놓고

궂은 비 실실 오는 날에

건너 동네 도부 가서 한 집 건너 두 집 가니

천둥소리 볶아치며 소낙비가 쏟아진다.

주막 뒷산 무너지며 주막터를 빼 가지고

동해수로 달아나니 살아날 이 누구런고.

건너다가 바라보니

넓고도 큰 바다 뿐이로다.

망측하고 기막히다, 이런 팔자 또 있는가.

남해수에 죽을 목숨 동해수에 죽는구나.

주막에나 있었다면 같이 따라 죽을 것을

먼저 괴질에 죽었다면

이런 일을 아니 볼 걸

금방 죽을 걸 모르고서

천년만년 살자 하고 도부가 다 무엇인고.

도부 광주리 메다 박고 생각 없이 앉았으니

억장이 무너져 기막히네.

죽었으면 좋겠으나

살아있는 목숨이 못 죽는구나.

 

아니 먹고 굶어 죽으려 하니

그 집 댁네가 억지로 권하니

죽지 말고 밥을 먹게, 죽은들 시원할까.

죽으면 쓸 데 있나, 살기만도 못하니라.

저승을 누가 가 보았나,

이승 만은 못하리라.

고생이라도 살고 보지. 죽어지면 말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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