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총람(산문)/열녀춘향수절가

(완판)열녀춘향수절가 - II. 사랑 (1/5)

New-Mountain(새뫼) 2020. 7. 1.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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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사랑

 

가. 방자야, 아직 해가 어느 때나 되었느냐

 

이때 도련님이 춘향을 급히 보낸 후에 도저히 잊을 수 없어 책방으로 돌아와, 모든 일에 뜻이 없고 다만 생각이 춘향이라. 말소리 귀에 쟁쟁 고운 태도 눈에 삼삼.

해지기를 기다릴 새, 방자 불러,

“해가 어느 때나 되었느냐?.”

“동에서 아귀 트나이다.”

도련님 크게 화를 내어

“이놈 괘씸한 놈. 서쪽으로 지는 해가 동쪽으로 도로 가랴. 다시금 살펴보라.”

이윽고 방자 여쭈오되

“해가 서쪽 바다로 떨어지고, 황혼 되고 달이 동쪽 고개에서 나옵내다.”

저녁밥이 맛이 없어 잠이 오지 않아 엎치락뒤치락 어이 하리. 퇴령을 기다리려 하고 서책을 보려 할 제, 책상을 앞에 놓고 서책을 자세히 읽는데, ≪중용≫, ≪대학≫, ≪논어≫, ≪맹자≫, ≪시전≫, ≪서전≫, ≪주역≫, ≪고문진보≫, ≪통≫, ≪사략≫, 이백과 두보의 시, 천자문까지 내어놓고 글을 읽을 새

“≪시전≫이라. 암수 정다운 징경이새 물가에 노닐도다. 아름다운 여인은 군자의 좋은 짝이로다. 아서라 그 글도 못 읽겠다.”

≪대학≫을 읽을 새

“대학의 큰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니 춘향에게 있도다. 그 글도 못 읽겠다.”

≪주역≫을 읽는데

“원은 형이고 정이고 춘향이 코 딱 댄 코 좋고 하니라. 그 글도 못 읽겠다. 등왕각이라. 남창은 옛 고을인데, 홍도는 새로운 고을이로다. 옳다. 그 글 되었다.”

≪맹자≫를 읽을 새,

“맹자가 양혜왕을 뵈니, 왕이 말하기를, 노인장께서 천릿길을 멀다 않고 찾아주시니 춘향이 보시러 오셨나이까?”

≪사략≫을 읽는데

“오랜 옛날이라. 천황씨는 이쑥덕으로 왕이 되어 섭제별을 일으키니 힘을 쓰지 않아도 교화로 다스려지더라. 하여 형제 열두 명이 각 일만팔천 세를 살았더라.”

방자 여쭈오되,

“여보 도련님. 천황씨가 목덕으로 왕이 되었단 말을 들었으되, 쑥떡으로 왕이란 말은 지금에 초음 듣는 말이오.”

“이 자식 네 모른다. 천황씨 일만팔천 세를 살던 양반이라 이가 단단하여 목덕을 잘 자셨거니와, 그 당시 선비들은 목떡을 먹겠느냐? 공자님께옵서 나중에 날 사람들을 생각하사 명륜당에 꿈에 나타나고, 당시 선비들은 이가 부족하여 목떡을 못 먹기로 물씬물씬한 쑥떡으로 하라 하여 조선 삼백육십주 향교에 글로 기별하고 쑥떡으로 고쳤느니라.”

방자 듣다가 말을 하되,

“여보. 하느님이 들으시면 깜짝 놀라실 거짓말도 듣겠소.”

또 <적벽부>를 들어 놓고,

“임술년 가을 칠월 십육 일에 소동파는 나그네와 더불어 적벽 밑에서 배를 띄우고 노닐 때, 맑은 바람은 가볍게 불어오고 물결은 잔잔하구나. 아서라 그 글도 못 읽겠다.”

천자문을 읽을 새,

“하늘 천, 땅 지.”

방자 듣고

“여보. 도련님 점잖지 않게 천자는 웬일이오?”

“천자라 하는 글이 사서삼경의 기본이 되는 글이라. 양나라 때 사봉 벼슬하던 주흥사가 하룻밤에 이 글을 짓고 머리가 희었기로, 책 이름이 백수문이라. 낱낱이 새겨 보면 뼈똥 쌀 일이 많지야.”

“소인 놈도 천자 속은 아옵니다.”

“네가 알더란 말이냐.”

“알기를 이르겠소.”

“안다 하니 읽어 봐라.”

“예 들으시오. 높고 높은 하늘 천, 깊고 깊은 땅 지, 홰홰친친 검을 현, 불타다 누를 황”

“예 이놈. 상놈은 틀림없다. 이놈 어디서 장타령 하는 놈의 말을 들었구나. 내 읽을 게 들어라.

하늘이 자시에 처음 열렸으니 태극이 넓고 크다 하늘 천,

땅은 축시에 열렸으니 오행과 팔괘로 땅 지,

삼십삼천 제석님께 빌고 또 비옵나니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 검을 현,

스물여덟 별자리 금목수화토의 오색 중에 순한 색인 누를 황,

우주의 해와 달이 거듭 빛나니 옥황상제 집이 높고도 높도다, 집 우.

해마나 나라의 서울이 흥하고 성하고 쇠퇴하니 옛날이 가고 지금이 온다, 집 주.

우임금이 홍수를 다스리고 기자가 미루어 넓혔으니 홍범구주 넓을 홍.

삼황오제 돌아가신 후 나라를 어지럽히는 악인이 나왔으니 거칠 황.

동방이 장차 밝아오기로 높디높은 하늘가에 번듯 솟아 날 일.

수많은 백성들의 격양가에 거리에는 평화로운 달이 비추노라, 달 월.

차가운 초승달이 날마다 불어나니 삼오 십오 보름밤에 찰 영.

세상만사 생각하니 달빛과 같은지라, 보름밤 밝은 달이 열엿새부터 기울 측.

스물여덟 별자리에 하도와 낙수 벌렸으니 해와 달과 별의 별 진.

애석하게도 오늘 밤은 기생집에서 머무노라. 원앙을 수놓은 이불과 베개에서 잘 숙,

뛰어난 미인들이 좋은 풍류에 봄가을 가리지 않고 늘어섰으니 벌일 렬,

어렴풋한 달빛 어린 깊은 밤중에 온갖 정과 회포를 베풀 장,

오늘은 찬바람이 쓸쓸히 불어 오거니 침실에 들거라, 찰 한,

베개가 높거든 내 팔을 베어라. 이만큼 오너라, 올 래,

끌어당겨 질끈 안고 임의 다리 사이에 드니 눈보라 차가운 바람에도 더울 서,

침실이 덥거든 서늘한 바람을 취하여 이리저리 갈 왕,

춥지도 덥지도 않은 때가 어느 때냐. 낙엽 지는 오동나무에 가을 추,

백발이 장차 올 것이니 소년다운 풍채와 태도를 거둘 수,

낙엽 지는 찬바람에 흰 눈 내린 강산에 겨울 동,

자나 깨나 잊지 못할 우리 사랑 여인의 깊숙한 방에 갈무리할 장,

연꽃이 어젯밤 가랑비에 윤기가 흐르노니 부드러울 윤,

이러한 고운 태도 평생을 보고도 남을 여,

백년기약 깊은 맹서 한없이 넓은 바다에 이룰 성,

이리저리 노닐 적에 세월이 흘러감을 알지 못하니 해 세,

고생을 같이 한 아내 모질게 대하지 못하니 ≪대전통편≫ 법 중 율,

군자의 좋은 짝이 아니냐. 춘향 입 내 입을 한 데다 대고 쪽쪽 빠니 음률 려자 이 아니냐.

애고애고 보고지고.”

소리를 크게 질러 놓으니 이때 사또 저녁 진지를 잡수시고 식곤증이 나 계옵셔 평상에 취침하시다 애고 보고지고 소리에 깜짝 놀래,

“이리 오너라.”

“예.”

“책방에서 누가 생침을 맞느냐? 아픈 다리를 주물렀냐. 알아서 사정을 알리어라.”

통인 들어가

“도련님 웬 목소리요? 고함소리에 사또 놀라시사 사정을 알아보라 하옵시니 어찌 아뢰리까?”

딱한 일이로다. 남의 집 늙은이는 이농증도 있느니라마는, 귀 너무 밝은 것도 예삿일 아니로다. 그러하다 하지마는 그럴 리가 왜 있을꼬.

도련님 크게 놀라,

“이대로 여쭈어라. 내가 ≪논어≫라 하는 글을 보다가, ‘아아 슬프다. 내 늙어서 오랫동안 주공을 꿈에 보지 못했도다.’란 구절을 보다가 나도 주공을 보면 그리하여 볼까 하여 흥이 나서 소리가 높았으니 그대로만 여쭈어라.”

통인이 들어가 그대로 여쭈오니, 사또 도련님 글로 남을 이기려는 열정이 있음을 크게 기뻐하여,

“이리 오너라. 책방에 가 목낭청을 가만히 오시래라.”

낭청이 들어오는데 이 양반이 어찌 용렬하게 생겼던지 만큼 경박한 걸음까지 근심이 담쏙 들었던 것이었다.

“사또 그 새 심심하지요.”

“아, 게 앉소. 할 말 있네. 우리 피차 오랜 벗으로서 같이 공부를 하였거니와 아이 때에 글 읽기같이 싫은 것이 없건마는, 우리 아이 시를 짓는 흥미 보니 어이 아니 기쁠 손가.”

이 양반은 아는지 모르는지 간에 대답하것다.

“아이 때 글 읽기같이 싫은 게 어디 있으리오.”

“읽기가 싫으면 잠도 오고 꾀가 무수하지. 이 아이는 글 읽기를 시작하면 읽고 쓰고 밤낮을 가리지 않지.”

“예 그럽디다.”

“배운 바 없어도 글재주가 대단히 뛰어나지.”

“그렇지요. 점 하나만 툭 찍어도 높은 산봉우리에서 돌을 떨어뜨린 것 같고, 한 일을 그어 놓으면 천 리의 구름이 뭉게뭉게 올라 진을 모양을 이룸이요, 갓머리는 새가 처마에서 엿봄이요, 글씨 쓰는 법을 논한다면 풍랑이 일고 천둥과 번개가 치는 것 같음이요, 내리그어 채는 획은 늙은 소나무가 절벽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 같도다. 창 과자로 이를진대 바른 등나무 넝쿨같이 뻗어갔다 도로 채는 데는 성난 쇠뇌 끝 같고, 기운이 부족하면 발길로 툭 차올려도 획은 획대로 되나니 글씨를 가만히 보면 획은 획대로 되옵디다.”

“글쎄 듣게. 저 아이 아홉 살 먹었을 제 서울 집뜰에 늙은 매화 있는 고로 매화나무를 두고 글을 지어라 하였더니 잠시 지었으되 정성 들인 것이 용이 살아 움직이는 것같이 글씨에 활력이 있고, 한 번 들으면 모두 기억하니라. 조정에 당당한 이름난 선비가 될 것이니, 남쪽을 곁눈질하며 북쪽을 돌아보고 나이가 어림에도 시 한 수를 지었데.”

“장래 정승하오리다.”

사또 너무 감격하여,

“정승이야 어찌 바라겠나마는 내 생전에 급제는 쉬 하리마는, 급제만 쉽게 하면 육품 벼슬이야 데면데면 지나겠나.”

“아니요. 그리할 말씀이 아니라 정승을 못 하오면 장승이라도 되지요.”

사또가 호령하되

“자네 뉘 말로 알고 대답을 그리 하나.”

“대답은 하였사오나 뉘 말인지 몰라요.”

그렇다고 하였으되 그게 또 다 거짓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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