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풀어 읽기-총람/남원고사

(경판)남원고사 - XV. 아름다운 어울림 (2/2)

New-Mountain(새뫼) 2020. 6. 29.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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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실낱 같은 내 목숨을 어사 낭군 살렸구나

 

“얼싸, 좋을시고.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전생인가, 이생인가. 아무래도 모르겠네. 조물주가 이루었나? 하늘과 신령이 도왔는가? 좋을, 좋을, 좋을시고. 어사 서방이 좋을시고.

세상 사람 다 듣거라, 젊은 나이로 과거에서 장원급제하니 젊어 급제 즐거운 일, 첫날밤 동방에 비치는 환한 촛불에 노총각이 숙녀 만나 즐거운 일, 천 리 타향 옛 고향 사람 만나 즐거운 일. 봄날 심한 가뭄 단비 만나 즐거운 일, 칠십 노인 구대 독신 아들 낳아 즐거운 일, 수삼 천 리 유배 죄인 대사면 만나 즐거운 일, 세상의 즐거운 일 많건마는 이런 일도 또 있는가?

실낱 같은 내 목숨을 어사 낭군이 살렸구나. 좋을, 좋을, 좋을시고. 저리 귀히 되었구나. 어제는 떠돌아다니던 걸인이 오늘날 수어사이라. 어제 잠깐 만났을 제, 조금이나 일깨우지. 그다지도 속였는고? 허판수의 용한 점이 천금이 싸리로다.”

어사가 화답하되,

“무릉도원의 여러 꽃 떨기에 나비 날아오기 제격이요, 영주 봉래 삼신산에 신선 오기 제격이요, 소상강 동정호에 기러기 오기 제격이요, 악양루 등왕각에 시인 문인 오기 제격이요, 얼음과 옥 같은 열녀 춘향에게 어사 오기 제격이라.”

이렇듯이 즐기면서 음식상을 한데 받고, 지난 말을 서로 하며 즐거움을 이기지 못하더라.

이때, 춘향 어미는 춘향의 형상 보기 싫어 집으로 돌아오니, 마음이 산란하여 도로 나와 해남포 당베 빨러 냇가에 갔다가 이 소문을 듣고 아무런 줄은 모르고 즐겁기만 측량 없다. 빨래 그릇에 물조차 담아 이고,

“애고, 내 딸 기특하다. 애고, 내 딸 착한지고. 어사 사위가 뜻밖이라.”

강동강동 뛰놀 적에 인 그릇이 밑이 빠져 물을 모두 내리 쓰고,

“아차, 급히 이노라고 물 담은 줄 잊었구나. 요 몰골을 어찌하리? 오냐, 그만 있거라. 어사 사위 얻었으니 옷 한 벌이야 어디 가랴.”

죽을 듯이 뛰놀 적에,

“좋을, 좋을, 좋을시고. 어사 사위가 좋을시고. 지화자 좋을시고.”

즐거움을 못 이기어 강동강동 뛰놀면서,

“강동에 범이 드니 길라잡이 훨훨. 소주 한 잔 먹었더니 고갯짓이 절로 난다. 탁주 한 잔 먹었더니 엉덩춤이 절로 나네.”

우선 관속들에게 못된 짓을 한다.

“발가락들 모조릴 놈. 한서부터 주리를 할라. 삼번 관속 다 나오소. 술값 셈도 지금하고, 죽값 셈도 마저 하세. 자네들 마음 먹고 내 돈 빚지고 아니 줄까. 고치려도 손이 쉽고 속이려도 잠깐이라.”

총총 걸어 관문으로 들어갈 제, 관속들이 절하며,

“아주머니, 그사이 안녕하옵시오.”

“이 사람들. 요사이 문 지키는 사람은 세력들이 그다지 센가? 그리들 마소.”

“그렇지 아니하니 없소. 망령이오? 그럴 리가 있삽나이까?”

관노 하나 하는 말이,

“여보시오, 자친신네. 이 애 일은 그런 기쁜 일이 없소.”

“이 사람, 웃지 마소. 이제야 말이지, 어제 이서방이 우리 집으로 찾아왔는데, 그 주제 꼴이 순전 거지일러라. 우리 아기는 그래도 차마 박대를 못 하여 잘 대접하였지. 나는 꼴 보기 싫어 밖으로 따 보내었더니, 제라도 염치없어 그 길로 달아났느니라. 오늘 아침에 내가 아기에게 자세히 이르고 다시 생각 말라고 하며, 만일 다시 묻거들랑 방으로 수청 들라 하였더니, 저도 그 꼴 보고 어이없어 샐쭉하고 하릴없이 여겨 어사의 수청 들었나 보외.

지금 당하여 잘된 셈이라. 만일 본관에게 허락 곧 하였다면 오그랑이 되었을 것을 요런 깨판 또 있는가? 이제는 꺼려함이 없으니 이서방이 온다 한들 이런 소문 듣게 되면 무슨 맟에 다시 올까. 애고 그런 흉한 놈을 이제는 아주 조용히 떠나보내라.”

아전 하나 내달으며 하는 말이,

“이 어사가 전임 사또 책방 이도령일세. 철도 모르고 이리 굴다가 큰일 나리. 들어가서 뒤에 올 일을 잘 치소. 늙은 몸에 팔자 좋게 되었네.”

춘향 어미 하는 말이,

“아니외다. 그런 말씀 다시 마오. 서울놈이 음흉하여 가짜 어사로나 다니면 모르거니와, 수의어사야 제집 조상에나 있으리까?”

머리를 썰썰 흔들면서,

“아예 이런 말씀 다시 마오.”

이렇듯이 수작하며 한결같이 춤을 추고 동헌으로 들이달아,

“지화자, 좋을시고. 춘향아, 거기 있느냐, 없느냐?”

하며, 어사를 쳐다보니 어제 왔던 걸객이라. 마른하늘 된 벼락이 어디에서 내려오나. 기가 막혀 벙벙하고, 그만 팔짝 주저앉아 아무 소리도 못하거늘, 어사가 내려다보고 웃고 하는 말이,

“이 사람 춘향 어미, 요사이도 집 팔기를 잘하나? 오늘도 과붓집에서 오나?”

춘향 어미 속이 부적부적 죄어 오건마는 그래도 먹은 값이 있고, 둘러대기를 잘 하는지라. 엄큼한 마음의 두루 쳐 대답하되,

“이제야 말씀이지요, 사또 일을 그때 벌써 다 알았지요. 뉘 개딸년이 몰랐다고요. 그러하기에 해남포 한 필, 당베 두 필 급히 빨러 갔지요. 사또 옷 새로 하여 드리자 하였지요. 그렇지 아니하면 무슨 경에 그것 빨러 갔겠소? 내 일을 나쁘게 알아 계신가 보오마는, 나는 다 속이 있어 그리하였지요. 만일 내 집에서 주무시다가 혹시 은근한 일을 뉘가 알까 하고, 아주 깍짓손 하였지요. 그렇지 아니면 어찌 차마 구박하오리까? 나를 누구만 여기시오? 순라골 까마중이요. 겉은 퍼렇더라도 속은 다 익었지요.”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얼굴이 붉으락 누를락 하거늘 어사가 웃고,

“이 사람 얼굴 들고 말하소.”

“애고, 얼굴에서 쥐가 나오.”

춘향이 하는 말이,

“여보, 그만두오. 그만하여도 늙은 어미 무안하겠소. 그것도 또한 나를 위하노라고 그리하였지, 사또를 미워 그리하였겠소?”

어사가 대답하되,

“그만둘까? 그래도 어미 역성을 드는구나. 네 말이 그러하니 그만두지.”

이리 수작하며 밤이 맟도록 즐거움을 이기지 못하더라.

본관은 창고를 봉하고 파직한다고 감영에 글을 보내 보고하고, 본읍에 밀린 공사 거울같이 처결하고 이방 불러 분부하되,

“관아 안팎의 재물들이 모두 다 부정하게 얻은 것이니, 동헌에 있는 것은 백성들의 곳간에 넣어 두고, 관아 안채에 있는 것은 잘 팔아서 금일 내로 관에 들여놓으라.”

이방이 분부 듣고, 관아 안채의 온갖 물건들을 내놓아 팔 제, 실내마누라 좋은 서답 네 귀에 끈을 달아 갓걸이로 내다 팔고, 책방이 쓰든 총관도 말콩 망태기로 팔아 버리고, 갖은 물건 다 팔아서 어사또에게 바치오니, 창고를 봉하여 넣은 후에 모든 공사 처결하고 좌수 불러 도장을 찍고 춘향의 집으로 나아오니 문 앞의 버드나무와 창밖의 매화는 옛 경치가 새로워라.

서너 날을 묵은 후에 가마 독교 선명히 차려 춘향 태워 앞세우고, 사립가마 꾸며내어 월매 태워 뒤세우고, 집안 살림살이 다 팔아서 부담바리 실은 후에 상단이 태워 부축하여 경성으로 보낸 후에, 전라도 오십칠 관 좌우 도를 다 돌아서 탐관오리 국법을 어겨 거둔 재물 역력히 뒤져내어 흐린 공사 맑혀내고, 효도 아니하고 공경 아니하는 이들 훈계하니, 거리거리 선정비요, 골골이 칭찬하는 소리라.

이렇듯이 돌아다녀 모든 일을 다한 후에 내린 말을 타고 성에 들어 임금 앞에서 명을 받들 제, 상이 반기시며 귀히 여겨 바삐 불러보며 손을 잡으시고 먼 길을 갔다 온 고생을 위로하며 백성들의 불편함을 물으시니, 어사가 머리를 조아려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고 겪은 일을 적은 문서와 그동안의 기록을 두 손으로 받들어 들이오니 상이 받아 살펴보시고 용안이 크게 기뻐하사 칭찬하시며 위로하시되,

"어리고 약한 기질이 여러 달을 먼 곳을 바삐 돌아다녔으나 조금도 상한 바가 없고, 수많은 공사를 백성을 잘 다스리나 하나도 미진함이 없으니 이 짐짓 조정의 으뜸이로다.”

하시고 크게 칭찬하시며 동벽응교 벼슬을 직접 내리시고 상을 무수히 내리시며, 바삐 나가 쉬라 하시니, 때마침 조용한지라.

응교가 땅에 엎드려 춘향의 정절과 전후의 일을 자세히 아뢰오니, 상이 들으시고 희한히 여기사 무릎을 손으로 치면서 몹시 창찬하시되,

“저의 정절 지극히도 귀하도다. 만고의 드문 일이로다. 기생집의 사람들은 길옆의 버들이요 담장 위의 꽃이라. 사람마다 길들이거늘, 열녀 춘향의 절개와 행실이 옛사람에게 지나고, 맑고 높은 현숙한 덕이 사대부가 규수가 미치지 못함이 많으니 이는 자고로 드문 일이라.”

하시고, 이조에 명을 내리사, 정렬부인 직첩을 내리오사 정실부인을 봉하라 하시니, 이런 영광이 어디에 있으리오.

응교가 천만뜻밖에 임금의 은혜가 이러하심을 감축하여 백번 절해 머리를 조아려 은혜에 감사하고 조정에서 물러나와 집에 돌아와, 사당을 찾아뵙고 부모께 나아가 뵈니, 부모가 반기고 친척이 모두 하례하더라.

응교가 부모 앞에 꿇어앉아 전후 사연과 성상의 은혜로운 뜻을 고하오니, 부모가 또한 기뻐 못내 칭찬하고 길일을 택하여 종족을 크게 모으고 모든 절차를 갖추어 정식으로 혼인한 후에 남원집을 부인으로 올려주고 폐백을 갖추어 사당에 고한 후,

백년해로 하올 적에 벼슬은 육경이요, 자녀는 오남매라. 내외 손자 번성하여 곽분양의 자식 많음을 부러워 아닐러라. 부모에게 영화로운 효를 뵈고 친척에게 화목하며 집안 상하에 칭찬 소리가 우레와 같으니 아마도 천고의 기이한 일은 이뿐이요, 춘향의 높은 절개는 다시 없을까 하노라.

 

기사년(1869) 구월 이십팔일 누동에서 쓰기를 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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