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풀어 읽기-총람/남원고사

(경판)남원고사 - XIV. 어사 출도 (1/3)

New-Mountain(새뫼) 2020. 6. 29.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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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V. 어사 출도

 

가. 아마도 이 놀음이 고름이 되리로다

 

새벽에 문을 나서 군관 서리, 역졸들을 입짓으로 뒤를 따라 청운사로 들어가니, 각읍에 퍼진 염탐꾼 각각 옷을 바꿔 입고 다 모였다. 배 장사, 미역장사, 망건장사, 파립 장사, 황아 장사, 걸객이라.

밤중에 딴 방 잡아 불을 켜고 오십삼 관 염탐한 글을 각 항마다 조목조목 비교하여, 모일 모 역 모장터로 자리를 확실히 잡아 기약 헤쳐놓고, ‘금일 오후 본부 생일잔치에 부채 펴셔 들거들랑 출또하고 들어오라.’ 약속을 정한 후에, 해 뜰 무렵에 이르러서 백번이나 당부하던 옥문 밖은 아니 가고, 관문 근처 다니면서, 잔치 낌새 살펴보니 생일잔치 분명하다.

백설 같은 구름차일 보계판도 높을시고. 왜병풍에 모란 병풍을 좌우에 둘러치고, 화문등매, 채화석에 만화방석, 총전 보료, 몽고전 담요로다. 청사초롱, 양각등, 유리등을 붉은 무명으로 줄을 하여 휘황하게 걸어놓고, 붉고 푸른 청사초롱을 서까래 수대로 층층이 걸어두고, 샛별 같은 요강, 타구, 용촛대, 놋촛대를 여기저기 벌려놓고, 인근 읍 수령들이 차례로 모여 올 제, 사람과 말들이 끊임이 없이 이어지니, 대청 위에는 부사, 현감, 대청 아래에는 만호, 별장이라.

임실 현감, 구례 현감, 고부 군수, 전주 판관, 함열 현감, 운봉 영장 푸른 하늘에 구름 모이듯, 용문산에 안개 피듯, 사면으로 모여드니 위엄과 기세가 엄숙하고 호령이 서리 같다.

차례로 벌려 앉아 아이 기생 녹의홍상, 어른 기생 전립 쓰고 좌우에 벌려 서고, 거북 같은 거문고, 가얏고, 양금, 생황, 삼현 소리 반공중에 어리었다. 주안상을 들이면서 술잔을 돌리면서 권주가라. 흥을 겨워 한창 놀 제 입춤 후에 칼춤 보고, 거문고에 남자의 창이며, 해금과 피리에는 여자의 창이라.

이렇듯이 즐길 적에 저 걸인의 거동 보소. 두루 돌아다니면서 혼잣말로,

“아마도 이 놀음이 고름 되리로다. 이놈의 자식들 잘 호강한다. 실컷 놀아라. 얼마 놀리? 매우 잘 노는구나.”

하며, 얼굴 형상 검게 하고 주적주적 들어가며,

“여쭈어라, 사령들아. 멀리 있는 걸객으로 좋은 잔치 만났으니 술잔이나 얻어먹자.”

나아가고 물러서며 들어가니 좌상에 앉은 수령 호령하되,

“이것이 어인 걸객이니? 바삐 집어 내떨어라.”

뭇 사령이 달려들어 등 밀거니 배 밀거니 팔도 잡고 다리도 잡고 뺨도 치고 멱살 끌며,

“이분네 어디에를 들어오시오. 바삐 나가라니까?”

오동지 진상처럼 종종걸음으로 배추밭에 똥덩이처럼 밖으로 내던지니, 어사가 가장자리로 떨어져 분한 마음이 하늘을 찌를 듯이 북받쳐 오르나, 충분히 참고 일어서서 반항하여 들어가니 한결같이 구박한다. 어사라도 하릴없어 뒷문으로 가서 보니, 게도 잡인 출입을 금함이 대단한지라. 들어갈 길이 전혀 없다. 한 모롱에 앉았다가 옆에 앉은 노인더러 묻는 말이,

“이 사또 소문 들으니, 백성을 잘 다스리기로 유명하여 백성들이 만세불망선정비를 세운다 하니, 그러할시 분명한지?”

그 노인 대답하되,

“예, 이 사또요? 일 처리는 잘하는지 못하는지 모르거니와, 참나무 휘온 듯하니 어떻다 할지요?”

어사가 왈,

“그 일 처리하는 공사가 무슨 공사라 하는지?”

그 사람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그 공사 이름은 쇠코뚜레 공사라 하지요. 원님의 욕심이 어떤지 모르거니와 쌀과 돈과 포목을 다 고무래질하여 들이니 어떠할지요? 색에는 굶어 죽은 귀신이요, 정사에는 똥주머니라. 아무 데도 바닥 첫째는 가지요. 이번에도 사십팔 면 집집마다에 백미 세 되, 돈 칠 푼에 계란 세 개씩 거두어 잔치하니 거룩하고 무던하지요.”

어사가 들을 만하고 앉았더니, 문 보는 하인들이 어사더러 하는 말이,

“우리 잠깐 입시하고 올 사이에 아무라도 들어가거든 이 채찍으로 먹여주고, 문을 착실히 보아 주오. 잔치 마친 후에 음식이나 많이 얻어 주오리다.”

어사가 다행하여,

“글랑은 염려를 아주 놓고 가라니까?”

하인들이 입시 간 사이에,

한 사람이 들어가려 하고 기웃기웃하거늘, 어사 하는 말이,

“어수선한 낌새에 좋은 판에 아니 들어가고 무엇하리. 저기 있는 아이들아. 내 알 것이니 모두 들어가 구경하라.”

마음대로 터놓으니 과거 보려 과장에 들어서는 선비처럼 뭉게뭉게 뒤끓어서 함부로 들어가거늘, 어사도 섞여 들어가며,

“좋다. 잘 들어온다. 한 모롱이 치워라.”

죽층교 보계판으로 북적북적 올라가니, 좌중의 수령들이 하인 불러 호령할 제, 운봉 영장 곁눈으로 어사 잠깐 살펴보니, 얼굴이 크고 눈썹 사이가 넓으며, 눈이 맑고 시원하고 눈알의 흑백이 분명하여 아름답고, 콧마루가 우뚝하여 가을 달과 같고 수염은 많으나 길지 아니한데, 귀는 이리처럼 늘어져 있고, 코는 사자처럼 솟았도다.

웃어도 이가 드러나지 아니하며 배는 늘어지고 허리는 굵도다. 인중이 기니 부유하기는 정한 이치인데 콧마루와 두 눈썹 사이가 두터우니 창고가 가득 찬 격이라. 이마와 코와 턱이 균형을 맞추었고 좌우의 광대뼈가 잘 갖추어졌음이라.

말이 간결하고 맑아 뜻이 높고, 행동거지와 앉은 모습이 침착하고 조용하며, 몸집이 크고 씩씩하고, 팔과 다리의 울타리와 벽이 견고하다. 솔개의 어깨뼈에 얼굴빛은 혈색이 좋으니 비할 데 없는 영웅호걸이라.

삼십에 승상이요, 구슬이 바다로 나오니 팔십에 태사로다. 운봉이 마음에 놀라고 의심하여 본관에게 통하는 말이,

“여보시오, 그분을 보아하니 의복은 누추하나 양반임이 분명하오니, 우리네가 양반을 대접 아니하고 뉘가 한단 말이오니까?”

한편 청하여 끝자리에 자리를 주고

“이 양반, 예 앉으시오.”

어사가 이 말 듣고,

“그야 양반이로고. 똑같이 양반 아끼니 운봉이야 참사람을 아는고.”

하며 북적북적 높은 자리로 올라가서 본관 곁에 앉아 진똥 묻은 두 다리를 앞으로 펴 벌리니, 본관이 혀를 차며,

“거기도 눈이 있지. 다리를 어디에다가 뻗는닷? 거기 도로 오그리라니. 어허, 운봉은 야릇하것다.”

어사가 대답하되,

“여북하여야 그리하오. 내 다리는 뻗기는 하여도 임의로 오그리지 못하오.”

그대로 앉았더니, 운봉이 민망하여 곁자리로 청하여 말씀하더니 좌중의 큰 상 든다.

수파련에 갖은 기이한 꽃, 여러 음식으로 차담상이 차례로 들어오는데 어사가 공복이라 음식 보고 시장기가 크게 일어나니, 모인 여러 사람에게 통하는 말이,

“윗전에 말씀 올라가오. 지나가는 걸객으로 배고픔이 매우 심하니, 요기시켜 보내시오.”

운봉 영장 하인 불러,

“상 하나를 가져다가 이 양반께 받자오라.”

귀신 같은 아이놈이 상 하나를 들어다가 놓으니 어사가 눈을 들어 살펴보니, 모퉁이 닳아버린 값싼 소반에 뜯어 먹던 갈비 한 대, 대추 세 개, 생밤 두 낱, 소금 한 줌, 장 한 종지에 저린 김치 한 보시기, 모주 한 사발, 면 한 그릇 덩그렇게 놓았거늘,

“남의 상 보고 내 상 보니, 없던 심정이 절로 난다.”

가장 실수하는 체하여 한복판에 뒤집어 놓고,

“아차, 이 노릇 보게. 먹을 복이 못되나 보다.”

두 소매 옷자락으로 엎친 모주를 묻혀다가 좌우 벽에 뿌리며, 좌우 수령에게 함부로 대고 뿌리니 모든 수령 하는 말이,

“어허, 이것이 무슨 짓이란 말인고. 미친 손이로고.”

어사가 대답하되,

“온통으로 적시는 내 옷도 있소. 약간 튀는 것이야 그것으로 관계 할라오?”

무진무진 뿌리거늘, 운봉이 민망하여 받아 든 상 물려 놓고 권하거늘, 어사가 하는 말이,

“이것이 웬일이오?”

운봉이 하는 말이,

“염려 말고 어서 자시오. 내 상은 또 내어오지요.”

어사가 상을 받아 놓고 트집 하는 말이,

“통인, 여보아라. 윗전에 ‘말씀 한마디 올라가오.’ 하여라. 내 가만히 보니, 어떤 데는 기생하여 권주가로 술 들이고, 또 어떤 데는 기생 권주가는 고사하고, 떠꺼머리 아이놈 하여 얼렁뚱땅하니 어찌한 일인지. 술이란 것은 권주가 없으면 맛이 없음이라. 그중 기생 된 년으로 하나만 내려보내시면 술 한 잔 부어 먹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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