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풀어 읽기-총람/남원고사

(경판)남원고사 - XIII. 옥중 재회 (1/2)

New-Mountain(새뫼) 2020. 6. 2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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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II. 옥중 재회

 

가. 선녀같던 네 모습이 산 귀신이 되었구나

 

춘향의 거동 보소. 정신이 아주 혼미하게 앉았다가 부르는 소리 듣고 급히 일어 나오다가, 형문 맞은 정강이를 옥 문턱에 부딪히고 애구 소리 크게 하며,

“어머니가 놀라겠다.”

목 안 소리로 겨우 애고 애고 하고, 진정하여 대답하되,

“어머니, 이 밤중에 또 왜 왔소. 밤이나 제발 평안함이 쉬시오. 저리 애쓰다가 마저 병이 들면 구할 리가 뉘가 있소? 이미 보러 와 계시니, 내 속곳이나 가져다가 앞 냇물에 솰솰 빨아 양지바르게 널어 주오. 차마 가려워 못 살겠소.”

춘향 어미 손목 잡고 대성통곡 우는 말이,

“이를 어찌하자니? 내 장례를 네가 치러야 하는데, 네 장례를 내가 치르니 누가 내 장례를 치를까? 애고 애고, 설움이야. 내 곡을 네가 해야 하는데, 네 곡을 내가 하게 되니, 내 곡은 누가 하리.”

서로 붙들고 한창 울다가 춘향이 눈 들어 어사가 멀리 섰는 양을 보고 묻되,

“저 뒤에 섰는 이가 누구요?”

대답하되,

“재 너머 이풍헌이 자릿값 받으러 왔단다.”

“그러면 얻어 드리지요. 이 밤에 무슨 일 예까지 뫼셔 왔소. 날 보고 가시려오? 이풍헌님 이리 오오. 그사이 평안하옵시고 아낙 문안도 안녕하옵시오? 대수로이 이 밤에 보러 오시니 감격하오.”

춘향 어미 하는 말이,

“자세히 보아라. 이놈의 자식 꼴 된 것. 뻔뻔이 아들놈 너를 찾아왔단다.”

춘향이 울며 하는 말이,

“그 뉘라서 날 찾는고. 날 찾을 이 없건마는 이곳이 흉한 옥중이라 형문 맞아 죽은 귀신, 목을 매어 죽은 귀신, 억울하게 죽은 귀신, 뭇 귀신이 날 찾는가? 주문이나 읽어보자. 여섯 글자로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을 표현하나니, 옴마리반메훔.”

왼발 구르며,

“멀리 쎅쎅. 그렇지 아니하면 상산사호 벗이 없어 바둑 두자 날 찾는가. 영천수에 귀 씻던 소부 허유 속세의 일을 의논코자 날 찾는가? 술 먹는 게 세상 제일인 유령이가 술 먹자 날 찾는가? 시 짓는데 끝이 없는 이태백이 시부를 읊자 날 찾는가? 위수의 늙은 어부 강태공이 낚시질하려 날 찾는가? 수양산 백이 숙제 고사리 캐자 날 찾는가? 면산 깊은 곳의 개자추가 불타 죽자 날 찾는가? 황릉묘의 아황 여영 시녀 없어 날 찾는가? 천태산 마고선녀 숙낭자를 물으려고 날 찾는가? 날 찾을 리 없건마는, 그 뉘라서 날 찾는고?”

춘향 어미 하는 말이,

“네 서방 이도령이 너를 보라 왔단다. 바라고 믿었더니 잘 되었다. 거룩하고 의젓하다. 네 서방도 좋음도 좋다. 이제는 무엇을 믿고 바라나니?”

춘향이 이 말 듣고 옴찔 놀라 불빛에 바라보니, 팔도에 비하지 못할 상거지가 뚜렷하다.

“애고, 어머니도 망령이오. 눈이 어두워도 마련이 없소.”

“날더러 눈이 어둡다고 한다마는, 네 밝은 눈으로 자세히 보아라. 이가 놈이 아니요, 어떤 역적의 아들놈이냐?”

어사가 멀리 서서 모녀의 거동을 보다가, 어이없고 기가 막혀 눈물을 머금고 느릿느릿 나아가 하는 말이,

“춘향 어미, 등불 드소. 얼굴이나 자세 보세.”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꽃다운 얼굴과 고운 자태 홀연히 변하여 빈 산에 뒹구는 해골이 되었고, 옥 같은 피부와 꽃 같은 몸에 피 흔적이 난만하며, 난초 같은 기질과 연꽃 같은 고운 모습 거의 사라지게 되었거늘, 정신이 산란하여 급히 소리하되,

“춘향아, 어디 보자. 저 형상이 웬일이니? 백옥 같은 고운 모습 해골같이 되었으며, 선녀 같은 네 모양이 산 귀신이 되었구나. 연두저고리에 분홍치마 입던 몸에 몽당치마 웬일이며, 비단 당혜 신던 발에 헌 짚신이 웬일이니? 반가운 중 놀랍도다. 나도 가운이 불행하여 급제도 못하고 가산도 탕진하여, 여러 해 빌어먹고 다니노라니 진작 한 번도 못 와 보고, 풍년 든 데만 찾노라니, 금년이야 이곳을 지나다가 공교롭게 네 편지도 보고, 네 소문도 들으니 나로 하여 저렇듯 죽을 고생 당하니, 너 볼 낯이 없건마는 옛 정리를 생각하여 그저 간들 못할지라.

보러 오기는 왔다마는 반가운 중 무안하고 슬픈 중 부끄럽다. 아니 보니만 못하구나. 내 모양이 이리될 제, 어느 겨를에 너를 찾으며, 금년으로 일러도 이곳 시절이 거의 비슷하매, 동냥하기 골몰하여 진작 오지 못하였다. 우리 둘이 당초 언약 아무리 굳었은들 시방 와서 할 수 없다. 꼴을 본들 모를쏘냐? 날 바라고 어찌하리. 몸 잘 조리하려무나.”

춘향이 그 말 듣고 다시 보니, 영락없다. 말소리와 하는 모습 잊지 못한 낭군님이 분명하다.

“생시냐, 꿈이냐? 만일 꿈 곧 아니면 이 몸이 죽었도다. 죽은 혼일만정 왔다 하니 반가워라. 모든 혼백들이 나타난다.”

혼절하여 정신을 잃었더니, 오래되어 깨어나서 우는 말이,

“애고, 이것이 웬일이며, 이 말이 웬 말이오.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는가 바람결에 불려왔나, 떼구름에 싸여 왔나? 무릉도화 범나비인가, 문 앞에 심어 놓은 버드나무 사이의 꾀꼬리인가? 험한 벼슬살이 골몰하여 못 오던가, 말달리기 닭싸움에 술 마시며 여자들 외입하여 못 오던가? 산이 높아 못 오던가, 물이 깊어 못 오던가? 산이거든 돌아오고, 물이거든 건너오지. 어찌 그리 못 오던가.

가을 달은 밝은 빛을 드리우니 달이 밝아 못 오던가. 해지는 장사 땅에 가을빛이 아득해지니, 날 저물어 못 오던가. 촉나라로 가는 길이 푸른 하늘을 오르기보다 더 어렵다 하니 길 험하여 못 오던가. 북해의 기러기는 편지 전하는 것이 늦어져 돌아오는 것이 부끄럽다 하니, 소식 몰라 답답하데. 천지는 변함없이 동정호에 떠 있는데 오로지 원하느니 내내 취해 안 깨는 것이라 하니 술 취하여 못 오던가. 흰 눈이 빈 산에 가득한데, 가죽옷도 따뜻하지 않고 비단옷도 얇다 하니, 날이 추워 못 오던가. 고개 한 번 돌려 웃으면 백 가지 교태 짓는 새 사랑 겨워 못 오던가.

삼월 심한 가뭄에 단비를 만났음이요, 천 리 타향에서 오랜 벗을 만났음이라. 기쁘도다, 이 몸이 죽어져서 후세에나 볼까 하였더니 천만의외 오늘 다시 상봉하니, 칠 년 큰 가뭄에 빗발 보듯, 구 년 홍수에 햇빛 보듯, 반갑기도 측량 없네. 오늘 저녁 근심으로 죽는다 해도 한이 생길까. 얼싸 좋을시고.

그러하나, 그사이 몸이나 한결 같으옵시고, 병이나 아니 났소? 뽕밭이 바다가 되듯 짧은 시간 동안 바뀐다 해도 하였던들 저다지도 변할까. 어찌 그리 무정하오. 어이 그리 야속하오. 아무리 저 몰골이 되었던들 옛 정리를 잊으시고 말씀조차 그리하오. 내 몸 조리를 하라시니 그러면 애초에 어찌하여 산천은 변하기 쉬우나, 이 마음은 변하기 어려울 것이라 맹세하였소.

어찌하던지 날 살려주오. 칼과 족쇄 벗겨주오. 걸음이나 시원히 걸어보세. 나의 몸을 옥문 밖에 내어주오. 세상 구경 다시 하세. 반갑기도 그지없고 기쁘기도 측량 없네.  

과연 말씀이지, 서방님 바라기를 남쪽을 정복하고 북쪽을 토벌하기 요란할 제, 명장같이 나라를 세우고 국토를 넓히는 공신같이 믿고 바랐더니, 이제 저 몰골이 되었으니 애고 나는 죽네. 죽으나 한이 없소. 저 지경으로 내려오니 남의 천대 오죽하며 배고픔에 추위인들 적었을까? 불쌍하고 가련히도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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