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풀어 읽기-총람/남원고사

(경판)남원고사 - XIII. 옥중 재회 (2/2)

New-Mountain(새뫼) 2020. 6. 29.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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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무쪽록 급제하사 이 원한을 씻어주오

 

한편으로 반기며 한편으로 아득하여, 정신이 어질하여 엎드렸다가, 밥 먹을 만큼 잠깐 사이에 일어나 문틈으로 바라보며 눈물 오월 홍수 같아서 슬피 울며 하는 말이,

“사람이 초년 가난하고 어렵기 또한 예사이건마는, 서방님 의관이 남루한들 저다지도 되었는고. 애고 내 신세를 어찌하리.”

어사가 이 형상을 다 보고 속이 터지는 듯 가슴이 답답. 들입다 붙들고 싶으나 겨우 참고 대답하되,

“어허 이것이나 내 것이라고? 상투 바람으로 다니다가 임실 읍내 올벼 논에 막대 씌워 세운 것을 앞뒤 사람 없을 적에 가만히 도적하여 쓰고 부리나케 도망하여 어제 이리 왔거니와 임자가 날까 사람 많은 곳은 가기 싫더라.”

춘향이 어미 불러,

“애고, 어머니. 내 말 듣소. 서방님이 정처 없이 떠돌며 빌어먹을지라도, 관망의복이 선명하여야 남이 업신여기지 아니하고 깨끗한 음식을 먹이나니, 서방님이 날 데려갈 제 쓰려 하고 장만하였던 의복, 초록 비단 곁마기이며, 보라 비단 속저고리, 남색 비단 핫치마며, 진홍 비단 홑치마, 올이 고운 비단 고장바지, 흰 눈을 꽃무늬처럼 넣은 넓은 바지, 담비 털 갖저고리, 양가죽 볼끼, 가죽 토시며, 굵은 베 두 필 장롱 속에 들었으니, 그것 모두 들어내어 헐값에 내어 팔아 탕탕 팔아 서방님 통영갓, 외올망건, 당베 도포, 비단 수건 장만하여 들이고, 옻칠한 부채 한 자루 비녀 궤에 들었으니, 한편에는 넓은 논에 날아다니는 백로가 그려 있고, 또 한 편에는 그늘진 나무에서 지저귀는 꾀꼬리 그렸으니, 날 본 듯이 쥐시게 드리고, 내 말대로 부디 하여 주오.”

춘향 어미 이 말 듣고, 독을 내어 하는 말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바라더니, 이제는 바라던 길도 끊어지고 기다리던 일도 허사이다. 이 설움을 누구더러 하잔 말인고? 방정맞다. 나는 네 시중을 밤낮으로 들건마는, 전혀 말 선물뿐이지. 모주 한 잔 먹으라고 돈 한 푼 주는 일이 이때까지 없었구나. 이 원수의 놈은 보자마자 옷 팔아라, 노리개 팔아라, 호사시켜라, 잘 먹여라, 어찌한 곡절이니? 좀 알자꾸나. 내 마음대로 할 양이면 단단한 참나무 몽치로 동여매고 주리를 한참 틀면 가슴이 시원할 듯하다.”

춘향이 울며 하는 말이,

“애고 이것이 무슨 말씀이오? 서방님이 책방으로 계실 적에 어떻게 지내었소. 헤어지면 멀어진다고 은혜 저버리는 일 나는 차마 못 하겠소. 어머니 마음 저러하면 내 몸 하나 슬퍼져서, 차라리 불효는 되려니와 마음은 고치지 못하겠소.”

춘향 어미, 이 말 듣고, 겁내어 농쳐 하는 말이,

“속없는 말 듣기 싫다. 내 말이 정말이냐? 낸들 설마 분수없으랴? 요망한 말 다시 말고 안심하라. 너 하라는 대로 다 하면 그만이지.”

춘향이 대답하되, 지완

“어머니, 그러면 나는 마음 놓고 잘 먹겠소. 여보 서방님 내 말 듣소. 내일이 본관 생일잔치니 취중에 술주정 나면 응당 날을 잡아 올려 죄를 자백하라 칠 것이니, 오늘은 집에 돌아가서 나 자던 방 치우시고, 나 깔던 요를 펴고, 나 덮던 이불 덥고, 나 베던 베개 베고, 평안히 쉬신 후에 내일 일찍 나와 날 치라고 올릴 적에 칼머리나 들어다가 삼문 앞에 놓아 주소.”

어사가 이른 말이,

“이 애, 그것은 과연 어렵구나. 내 아무리 죽게 되었은들 칼머리를 어찌 들며, 본관이 만일 나인 줄 알면 필연 욕을 달할 것이니, 그것인들 아니 위태하냐? 그때를 보고 할 말이다.”

“여보, 서방님. 내 말 듣소. 이 위에 한 번 더 맞으면 북두칠성 일곱 분과 삼태 육성 여섯 분이 다투어 목숨을 주어도 살 가망이 없으리니, 나 죽기도 섧거니와 나 죽는 모양 보시는 서방님 마음 오죽할까? 적막하고 외로운 내 혼과 내 시신을 밖으로 끌어낼 것이니, 서방님이 삼문 밖에 섰다가 내 신체 나오거든 들입다 덥석 안고 집으로 나와, 나 자던 방 내 금침에 나를 누인 후에 서방님도 한 데 누어, 한 몸이 두 몸 되고 두 입을 한데 대어 서방님 더운 침을 흘려 넣고, 잠깐 동안 누웠을 제 서방님이 말을 하되,

‘춘향아, 춘향아. 무슨 잠을 이리 깊이 들었나니?’

수없이 여러 번 불러 불러보고, 죽어서 영원히 이별하니 하릴없다 귀에 대어 아미타불 세 마디 염불하고, 몸이 쾌히 식은 후에 그제야 일어나 시신을 거두어 홑이불을 보기 좋게 덮어놓고, 나 입던 속적삼을 내어다가 지붕마루에 올라서서 내 혼백을 부를 적에, 서방님 초성 높여, ‘해동 조선국 전라좌도 남원부 부내면 향교리 거하온 곤명 갑인생 김씨 춘향 혼백은 서방세계로나 극락세계로나 <천수경> <법화경>으로 새내오, 복복.’

혼백 불러 들어와서 우리 어머니하고 한참 통곡하신 후에 어머니를 부디 불쌍히 여기시오. 그 형상이 어떠하겠소? 대소렴을 할지라도 명주 비단 하지 말고, 흰 무명으로 염습하고 육진장포로 매를 하고, 관일랑 하지 말고 뒷동산에 솔찜하여 두었다가, 서너 달이 지나면은 썩은 송장 추깃물이 물 쉽게 빠질 것이니, 피부와 뼈가 서로 이어져 감쪽같이 가볍고 단출해지거든, 칠성판 한 잎만 받혀서 아무렇게나 끈을 묶어, 서방님이 친히 지고 걸음걸음 올라가면서, 내 적삼을 가지고 고개마다 올라서서 서방님이 초혼하되,

‘네 신체를 내가 지고 가니, 네 혼백도 자손이나 보살필 사람이 없어서 떠도는 외로운 혼령 되지 말고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가끔 적삼만 휘두르면 내가 혼백이라도 즐거워 허공 중천 어두운 가운데 서울까지 따라가서, 서방님댁 무덤 아래에 벗어 놓고 아무 데라도 해자 안에 묻어 주고, 무덤 앞에 비를 세우고 여덟 자만 쓰되, ‘수절원사 춘향지묘’라 하여 쓰고, 정월 보름, 이월 한식, 삼월 삼짇날, 사월 시제, 오월 단오, 유월 유두, 칠월 백중, 팔월 추석, 구월 구일, 시월 시제, 동지, 섣달 납향까지 서방님 산소 출입하실 적에 제사 지낸 퇴선으로 내 무덤에 옮겨 놓고, 서방님이 친히 와서,

‘배불리 제물을 받으라.’

이렇듯이 하여 주옵시면 내가 비록 저승에 있으나 감축하여 즐겁고, 좋아하여 춤을 추고, 만수무강 축원하며, 서방님 오고가실 때에 자취 소리 음성이나 들어보세. 애고 애고, 설운지고. 나 죽어 없다 말고 글공부 착실히 하여 아무쪼록 급제하사 이 분함을 씻어 주소. 애고 애고, 설움이야. 이를 어찌하잔 말인고?”

어사가 목에 침이 말라 하는 말이,

“옛말에 일렀으되, 몹시 왕성하면 얼마 가지 못해서 반드시 패망한다니, 본관이 네게 너무 기승을 피었으니, 무슨 낭패 볼 일이 있을 줄 어찌 알리?

울지 마라, 울지 마라. 너도 세상 볼 날이 아니 있으랴?”

입맛 다시고 옥문 틈으로 손을 넣어 춘향의 손을 마주 쥐고,

“너무 설워 마라. 입이나 좀 대어 보자.”

옥문 틈으로 맞추려 한들, 그림 속의 꽃이로다. 이런 때에는 황새 자식이나 됐다면 좋을 뻔하다. 하릴없어 물러서서 혼잣말로 이를 갈고 하는 말이,

“이놈, 내일 생일잔치 할 양이면 더욱 좋다. 내 솜씨로 몸소 나가서 급한 마파람을 몰아다가 한없이 넓고 푸른 바다에 떠 있는 논병아리를 만들리라.”

마음이 떨리고 뼈가 저리고 눈에 불이 난다.

“돌절구도 밑이 빠지고 마루 구멍에 볕이 든다. 이놈, 매양 기승을 부릴까. 어디에 보자.”

의기가 북받치어 탄식하고 춘향을 이별하고 돌아서니, 사라져 울고 들어갈 제 장부의 간장이 다 녹는구나.

춘향 어미 따라간다. 춘향이 보는 데는 천연스레 데리고 오더니, 한 모롱 돌아서서 다른 소리 하는 말이,

“서방님, 어디에로 가려 하오.”

어사가 대답하되,

“집으로 가지.”

춘향 어미 하는 말이,

“이것이 이른바 드레질이오. 집 없는 줄 분명히 알며 집이란 말이 웬 말이오. 환자와 빚을 주워 쓰고 못 바쳤더니, 정해진 날짜 한 번 두 번 지나가매, 지난번에 약장하고 면임이 나와서 관에서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하여 팔아 들어간 것을 어디에로 가자 하오?”

“그러면, 자네 그 집에 있기는 무슨 일인고?”

“경신년 글 외듯 하라 하오? 거기 깨어진 노구 찾으러 갔다가 공교롭게 똑 만났지요.”

“그러면, 자네는 어디에 가 있노?”

“글쎄요. 읍내 다 과붓집 같은데 홀어미 집 같은 데로 다니면서 불씨나 거두어 주고 눌은 밥술이나 얻어먹지요.”

“이 사람, 그리하면 자네 가는 데 나도 함께 가세.”

춘향 어미 깜짝 놀라 하는 말이,

“마구 곤장 맞고 발가락 뽑히고, 나까지 쫓겨나 한길에서 자게 하려는가? 실없는 말 다시 말고 여관 쪽으로 나가서 보지.”

어사가 어이없어 저를 어찌 갉을쏘냐? 뒤쪽으로 돌아서서 객사의 헛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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