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총람(산문)/남원고사

(경판)남원고사 - VIII. 춘향 시련 (1/4)

New-Mountain(새뫼) 2020. 6. 26. 09:16
728x90

VIII. 춘향 시련

 

가. 네가 춘향이냐, 과연 듣던 말과 같다

 

사또 골을 내어 호령하되,

“네 그놈들을 모두 다 몰아 내치고 그중 영리한 사령놈 부르라.”

천둥과 벼락이 치듯이 분부하되,

“네 이제로 바삐 잡아 대령하라.”

긴 대답 한마디에 군노사령 명을 듣고, 성화같이 바삐 나와 춘향의 집에 이르러서 호흡이 헐떡거리며 하는 말이,

“사람 죽게 되었다. 바삐 가자.”

춘향이 대답하되,

“애고, 이것이 웬 말인고. 말이나 자세히 아옵시다.”

“말이나 절이나 가면서 할 양으로 어서 수이 나섰거라.”

“나는 새도 움직여야 나느니, 술이나 먹고 가사이다.”

“관술이나 오술이나 가다가 먹을 양으로 어서 급히 나오너라.”

춘향이 하릴없어 돈 닷 냥 내어다가 사령 주며 하는 말이,

“이 물건이 사소하나, 잠깐 외상술값이나 보태시오.”

군노사령 돈 받아 차며 하는 말이,

“네 정을 막는 것은 의리가 아닌 고로 받아는 가거니와 마음에 겸연쩍하다.”

춘향이를 앞세우고 사령 관노 뒤를 따라 객사 앞으로 돌아올 제, 저 춘향의 거동 보소.

흩은 머리 집어 꽂고, 때 묻은 헌 저고리 다 떨어진 도랑치마 허리 위에 눌러 매고, 짚신짝을 발감개로 하고, 바람 맞은 병인처럼 죽으러 가는 양의 걸음으로 저녁나절 먼 포구에 새들이 짝지어 나는데 짝 잃은 원앙이요, 따뜻한 날 화초 사이로 봄바람이 부는데 꽃 잃은 나비로다.

보름날 밤 밝은 달이 검은 구름에 싸이는 듯, 금화분의 고운 꽃이 모진 광풍에 쓸렸는 듯, 수심이 첩첩하고 슬픈 눈물이 얼굴에 가득하여 정신없이 돌아올 제, 관문 앞을 바라보니 구름 같은 군노사령 거동 보소. 안개같이 모였다가 바삐 오라 재촉소리 성화같이 지르거늘, 뒤에 오던 군노사령 손을 들어 하는 말이,

“대먹줄을 말 시켰다. 요란스레 굴지 마라.”

군노사령 이 말 듣고,

“이 애, 만일 그러하면 중병일랑 내 당하마. 사람 너무 몰지 마라. 해가 아직 멀었으니 해 전에만 들어오면 어떻든지 그만이다.”

이렇듯이 지저귀더라.

군노사령 들어가 아뢰되,

“춘향을 대령하였소.”

사또 반겨,

“바삐 불러들이라.”

군노사령 영을 듣되,

“춘향이 현신 아뢰오.”

사또 나가 앉아 얼굴 형상 자세히 보니, 형산의 백옥이 먼지 속에 묻혔는 듯, 가을 물결 위의 연꽃이 소나기에 쓸렸는 듯,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와 모습이 근심하는 빛을 띠었고, 먼 산을 바라보는 고운 눈썹이 시름하는 태도를 머금었으니, 원하는 듯 느끼는 듯 구슬픈 모습이 사람의 한 조각 간장을 다 녹이는지라.

신관이 이를 보매 마음이 더욱 급하고 뜻이 가장 황홀하나, 그래도 먹은 값이 있어 남의 말을 들으려고 책방 이낭청에게 묻는 말이,

“이 사람 이낭청. 춘향의 소문은 그리 높지만 지금 봄에는 이름만큼 실속은 없음이로세.”

이 이낭청 이 자는 서울서부터 요긴한지라. 대소사를 이낭청과 의논하면 콩을 가져 팥이라 하여도 곧이듣는 터이요, 또 대답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하여 평생 사면에서 봄바람 불 듯 언제 어떠한 경우라도 좋은 낯으로만 남을 대하더라.

이때에도 함께 있더니 대답하되,

“글쎄, 그러하오마는 전혀 유명무실이라 할 길도 없고, 또 이제 유명무실 아니라 할 길도 없소이다.”

“이 사람, 한갓 외모가 추할 뿐 아니라, 여러 모로 뜯어보아도 한 곳 별로 취할 데 없네.”

“글쎄, 그러하외다.”

이렇듯이 수작할 제, 통인의 윤득이 아뢰오되,

“의복이 남루하고 단장을 그만두어 그러하옵지, 의복 단장 선명히 꾸미오면 짝이 없는 제일 미인이오니, 용서하여 놓아주지 마옵소서.”

신관이 이 말 듣고 또다시 역력히 보는 체하더니 하는 말이,

“과연 듣던 말과 같다. 이 사람 이낭청 저런 몸을 파는 것들이 때 묻고 되바라지고 간악하고 요괴롭고 예사롭지 아니하건마는, 이것이야 짐짓 평범한 여염집에서 살림할 지어미 될 듯 하외.”

“글쎄, 그러하오마는 여염살이 할 지어미 되리라 할 길도 없고, 또 정녕히 여염살이 못할 지어미라 할 길도 없소.”

“이 사람, 제 의복은 비록 허술하나, 형산의 백옥을 다듬지 아니하고, 팔월 보름의 밝은 달이 검은 구름을 벗지 못한 듯 하외.  아무리 일색이라도 눈코 각각 뜯어보면 한 곳 흠은 있건마는, 이것은 아무리 보아도 조각조각 금싸라기요, 모란처럼 천하에서 아름다운 인물이로세. 아까 삼문 간 들어올 제 잠깐 찡긋할 마디의 나도 빨리는 보았지. 잇속이 선 수박씨를 주홍 당사로 조롱조롱 엮어 주홍 쟁반에 세운 듯하고, 두 눈썹은 수나비가 마주 앉아 너울너울 노니는 듯하더구먼.

제가 나를 속이려고 의복 형상 남루하게 하고 얼굴 단장 허술하게 하였나 보외. 그것이 더욱 좋거든. 오리 알에 제 똥 묻은 것 같아서 어수룩한 줄 아는가?”

“글쎄, 그러하오마는 보기에는 어수룩하다 할 길도 없고, 또 전혀 어수룩하지 아니하다 할 길도 없소.”

“이 사람, 자네 말대답은 평생 넌출지게 둥글게, 물에 물 타니 술에 술 타니 같이 뒤숭뒤숭이 하니 어찌한 말인고? 허 답답한 사람이로고.”

하며, 춘향 불러 이른 말이,

“네가 춘향이라 하느냐? 봄 춘 자 향기 향 자 이름이 우선 묘하구나. 네 나이 몇 살이니?”

춘향이 동문서답 딴전으로 대답하되,

“내일 몇을 캐야 원두를 심는 사람의 집으로 대령하올지오?”

“어허 이낭청. 요 산들어진 맛 보게. 그 말 더욱 좋으이.”

다시 분부하되,

“네 본디 창가 천인이요, 본읍 기생으로서 내 도임시에 방자하게 현신도 아니하고, 거드름을 피우며 거만하게 집에 있어 불러야 온단 말이냐? 내가 이곳의 목민관으로 내려왔더니, 너를 보니 꽤 견딜 만하기로 금일부터 수청으로 작정하는 것이니, 바삐 나가 머리 빗고 낯을 씻고 다음번 수청 차례로 대령하라.”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