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총람(산문)/남원고사

(경판)남원고사 - VI. 이별 설움 (4/4)

New-Mountain(새뫼) 2020. 6. 24. 20:27
728x90

라. 춘하추동 사시절에 임 그리워 어이 살리

 

속절없이 떠날 적에 이전에는 뜨게 걷던 말조차 오늘은 어이 그리 재게 가노. 봄철 경치 좋은 들판에 우는 새는 간장을 부수는 듯, 긴 둑에 푸른 버들 무정히도 푸르렀다.

“형체와 그림자조차 묘연하니, 애고 답답 가슴이야. 보려 해도 볼 수 없음이요,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생각이 나는구나. 보고지고 보고지고. 나의 춘향 보고지고. 어린 얼굴 모습 옥을 깨뜨리듯 고운 소리 잠깐 들어 보고지고.

유리잔에 술 부어 들고 잡수시오 잡수시오 권하던 양 지금 만나 보고지고. 천 리 먼 길 머나먼 데 너를 잊고 어이 가리. 속절없는 춘향 전혀 없다.

이놈, 마부야. 말이나 천천히 몰아가자 꽁무니네 티눈 박히겠다. 저 앉았던 묏봉이나 보고 가자꾸나.”

마부놈 대답하되,

“소인도 한 번 차모 귀덕이를 얻어 신정이 한창 미흡한데, 이방 아전이 장을 두고 소인의 차례 아닌 길을 보내오니, 손을 잡고 떠나올 제 무지한 간장도 봄눈 녹듯 마음이 산란하여 서울 육백오십 리를 한참에 들입다 놓고 내일 반나절 내려 가오려 급한 마음 살 같사와 말을 바삐 모나이다.

그러하오나 도련님이 하 민망하여 하시니 천천히 뫼시리이다. 다만 길 가기 심심하고 도련님 마음도 하 산란하여 하시니 위로 겸하여 그 놀던 이야기나 하며 가사이다. 우리 귀덕이도 묘하외다.”

이도령 대답하되.

“그 이름 더럽다. 인물은 어떠하게 묘하더냐?”

마부놈 대답하되,

“머리 앞은 숙붙어 두 눈썹이 닿아 있고, 두 눈은 왕방울만하고, 코는 바람벽에 말라붙은 빈대 같고, 입은 두 귀밑까지 돌아오고, 가슴은 두리기둥 같아서 젖통이란 말은 아주 없사오니, 요런 묘한 계집이 또 어디에 있사오리까?”

이도령 웃고 이른 말이,

“그것도 사람이란 말이냐? 너는 무엇을 취하나니 흉하고 끔찍하다.”

마부가 왈,

“도련님이 계집의 묘한 이치를 모르시는 말씀이올시다. 머리 앞 숙붙기는 겨울에 돈 아니 들인 붙박이 휘양 요긴하옵고, 계집의 눈 큰 것은 서방이 꾸짖어도 겁을 내어 공손하고, 코 없기는 입 닿을 제 거칠 것이 없사오니 더 요긴하옵고, 입 큰 것은 바쁜 때에 급히 맞출 제 아무 데를 대어도 영락없사오니 요긴하옵고, 젖통이 없는 것은 여름날의 짧은 밤에 곤한 잠 자다가도 보로통한 것이 만져지면 자연 마음이 동하여 버무리나 떠이고 한가음이나 뜨오니 젖통이 없사오면 온밤을 성히 자고 나오면 녹용 한 그릇 먹은 셈이오니. 요런 계집은 곧 보배외다. 도련님 수청은 어떠하옵더니까?”

“어허 이놈. 들어 보아라. 우리 춘향이야, 어여쁘더니라. 인물이 탁월하여 장부 심장을 놀래고 여러 가지 자태를 구비하며 재주와 덕을 완전히 갖추고 자질이 매우 뛰어나더라. 애고 애고, 설운지고. 저하고 나하고 둘이 만나 춘하추동 사시 없이 주야장천 즐겨 놀 제 재미있는 속 내용이야 누구에게 다할쏘냐? 애고 애고 설운지고. 동군이 아주 잘 쓰는 글씨로 춘향조차 그려냈는가? 항아를 내치셨는가? 직녀가 내려왔는가? 너는 어인 아이기에 강산 정기를 혼자 타서 나의 간장 썩히나니, 혼이라도 너를 찼고 꿈이라도 너를 찾으리라. 살뜰히 그릴 적에 꿈에나 만나보자. 애고 답답 설움이야.”

이렇듯 탄식하며 경성으로 올라가니라.

이때 춘향이는 이도령 떠나갈 제, 가는 데를 보려 하고, 천 리를 다 바라보려고, 다시 누각을 한층 더 오르더니, 천 리로다, 천 리로다. 임 가신 데 천 리로다. 기가 막혀 울음 울 제 길이 차차 멀어가니 형용이 점점 적어 뵌다.

서너 살 먹은 아이 강아지 타고 가는 것만 하더니 사월 팔일에 동자등만 하여 뵈고, 산굽이를 돌아가니 아물아물 아주 없다. 애고 이를 어찌할꼬. 기운이 다하도록 종일 울고 집으로 돌아와서 방안을 살펴보니 의지할 데 없어 처지 아득하구나.

애고 애고, 이것이 웬일인고. 하늘 끝을 보니 외로운 기러기 짝 잃은 것이 한스럽고, 대들보 위로 눈을 돌리니 두 마리 제비가 한집에 사는 게 부럽구나. 가을날 긴긴밤에 창밖의 달빛은 희미한데 임을 그려 어찌 살리. 가련하다, 나의 신세. 한 토막의 간과 창자가 봄눈에 녹듯, 애고 이를 어이할꼬?

노비 신분에서 놓여나 천민에서 벗어나고, 네 계절 손님을 사절하고 문을 닫고 들어 앉고, 의복 단장 전폐하고, 식음을 물리치고, 허튼 머리 때 묻은 옷에 탈진하여 맥을 놓고 누웠으니, 인간 즐거움이 덧없도다. 가련히도 되었구나. 애고 애고, 설운지고. 이 설움을 어찌할꼬?

춘하추동 사시절에 임을 그리워 어이 살리. 나래 돋친 학이 되어 훨훨 날아가서 보고지고. 고갯마루에 구름 되어 높이 떠서 보고지고. 넓은 바다에 달이 되어 비추어나 보고지고.

울던 눈물 받아내면 배도 타고 가련마는 첩첩이 쌓인 그리움을 그려낸들 한 붓으로 다 그리랴? 긴 가을밤이 길도 길사. 천 리 상사 더욱 섧다. 상사하던 도련님을 꿈에 만나 보건마는 잠 곳 깨면 허사로다. 아홉 구비 간장에 서린 온갖 시름을 담을 데가 전혀 없네.

인생 백 년이 얼마기에 각자 동서 그리는가. 빈방에 미인 외로운 그리움은 나를 두고 이름이라. 애고 답답 설움이야. 이를 어이 하잔 말인고? 뜰 안의 꽃은 화려하고, 진달래는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자규야, 울지 마라. 울거든 너나 울지 잠든 나를 깨워 내어 가뜩한 임 이별에 여린 간장 다 썩어나니, 이별이 비록 어려우나 이별 후가 더 어렵도다. 동짓밤 긴긴밤과 하짓날 긴긴날에 때마다 그리움이로다. 약수삼천리 못 건넌다 일렀으나, 임 계신 데 약수로다. 애고 애고, 설운지고.

 

이 몸이 생겨날 제 임을 조차 생겨나니

삼생의 연분이며 하늘 마칠 일이로다.

나 하나 소년이요, 임 하나 날 괴실 제

이 마음 이 사랑은 견줄 데 전혀 없다.

평생에 원하오되 함께 살자 하였더니

그동안 어이하여 각자 동서 그리는가.

엊그제 임을 뫼셔 광한전에 올랐더니

그동안 무슨 일로 하계에 내려왔나.

올 적에 빗은 머리 흩어진 지 오래도다.

연지분도 있건마는 누굴 위해 곱게 할꼬.

마음에 맺힌 시름 첩첩이 쌓였어라.

짓느나니 한숨이요, 흘리나니 눈물이라.

인생이 유한한데 수심이 그지없다.

무정한 세월은 물 흐르듯 지나간다.

시간은 때를 알아 가는듯 돌아오니

듣거니 보거니 느낄 일도 하도 할사.

 

동풍이 건듯 불어 적설을 헤치는 듯

옥창에 심은 매화 두세 가지 피었구나.

가뜩이나 차가운데 암향은 무슨 일고.

황혼의 명월조차 침변의 조요하니

기뻐한 듯 반기는 듯 그리는 임 마주 본 듯

이 매화 한 가지로 임 계신 데 보내고저

님이 너를 보면 무엇이라 하실런고.

 

꽃 지자 새잎 나자 녹음이 어린 적에

나위는 적막하고 수막이 비었어라.

부용장 걷어두고 공작병 둘렀으니

가뜩에 시름 한 데 해는 어이 길고 긴가.

원앙금침 떼쳐 내어 삼색실 풀어내어

금척에 견주어서 임의 옷을 지어내니

수품도 좋거니와 제도도 갖출시고.

황함에 담아두고 임 계신 데 바라보니

산인가 구름인가 멀기도 험하기도 험할시고.

 

옥루에 혼자 앉아 수정렴 거든 날에

동령에 달 돋고 북극에 별이 뵈니

임 본 듯 반가우매 눈물이 절로 난다.

청광을 쥐어 내어 봉황루에 걸어두고

팔황에 다 비추니 심산궁곡 비추고저.

 

건곤은 폐색하고 백일이 한빛인데

사람은 물론이고 날새도 그쳤도다.

소상 남방도 추움이 이렇거든

옥루 고처야 일러 무엇하리.

양춘을 붙여 내어 임 계신 데 보내고저.

모첨의 비춘 해를 옥루에 올리고저.

홍상을 걷어 치고 취수를 반만 걷어

일모 창산원의 헴가림도 하도 할사.

 

짧은 해 겨우 지고 긴 밤을 곧추 앉아

청등을 곁에 놓고 어느덧 잠을 드니

꿈에나 임을 보려 턱 받고 기대시니

원앙금도 차도 찰사 이 밤이 언제 샐꼬.

하루도 열두 시요, 한 달도 삼십 일에

하루나 잊어 있어 시름을 풀자 하니

마음의 맺힌 시름 골수에 박혔으니

편작이 열이 오나 이내 병 어이하리.

어와 이 내 병이여 이 임의 탓이로다.

차라리 죽어가서 범나비나 되오리라.

꽃 지자 새잎 나자 녹음이 어린 적에

꽃마다 다니다가 임의 옷에 앉으리라.

 

님은 날인 줄 모르셔도

나는 임을 좇아 다니리라

이렇듯이 시름으로 무정 세월 보내더라.

 

갑자년 유월 이십오일 쓰기를 마치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