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시; 98년 즈음

교단에서

New-Mountain(새뫼) 2013. 2. 19.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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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정년이니 월급 삭감이니

옥식각신 하는 이들 옆에서 나는

태연하게도 너무나 태연하게도

철 지난 잡지를 뒤적인다.

새로움도 없고, 산뜻함도 없이

그저 묵은 냄새로 지난 세월을 따지는

그런 의미 없는 글자 속에서

그저 과거로 헤엄쳐 나가는 것이다.

쪼그리고 앉아 교과서를 펴거나

혹은 모두 잠든 학생들 앞에서

목청껏 광야를 목놓아 부르거나

알싸한 춘향이 몽룡이 첫날밤을 되새기거나

망각하지 않고 끝내 기억해 낸

국어교사라는 직업 그 신분증의

최후의 표정.

그 태연한 표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기야 월급 봉투에 찍힌 숫자 몇 개에서

계산기 두드리는 아내의 얕은 한숨에서

뭔가 대단한 존재를 찾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

그러나 그 어리석음을 위해

부지런히 아침 지어 먹고

부지런히 버스에 올라

부지런한 걸음으로 이 높은 고개 마루

학교까지 나아가는 것.

그리고 뒤척이는 낡은 잡지.

아침부터 부지런함을 떨었지만

결국 갈 곳은 예가 전부인 셈이다.

잠깐 고개 들어 옆자리를 기웃거려 보면

교감 자리 쉬지 않고 들락날락 오가는

비슷비슷한 이들이나

열심히 새 책만 바라보는 이들도

보일 듯 하지만

또 멀리 창 밖으로 눈길을 돌리면

먼 서해바다 점점 뱃노래를

그 위 푸르고 퍼런 피안처첨

유혹하는 몇 개 섬들을 바라볼 듯도 하지만

나는 내가 아니고,

여기가 내가 서 있는-혹은 있을 곳도 아니며

지금이 현재이지도 않은

그럴 때

잠자코 묵은 글자 사이에서 침전할 뿐이다.

그 글자들 사이에서

페스탈로찌도 아니고 죤 듀이도 아닌

소월도 아니고 청록파도 아닌

투사는 더더욱 아니고 손바닥 비비는 것은

더욱 아니

그런 일상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

교단이라는 다소 거창한

그러나 부끄럽지 않는 직업이라는

조금은 소박하고 건방지기도 한

그런 소시민으로 늙어가는 거다.

늙어가다 애 대학 보내고 시집보내고

또 늙어가다 훌훌 털고 일어날 때까지

한쪽 구석에 앉아

보일 듯,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없는, 없어도 별로 티가 나지 않는

그런 모습으로

또 묵은 글자 사이에 몇 줄 줄을 치고

그것으로 존재의 의미를 단 채

오늘과 내일을 비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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