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또는 함께/보고읽은 뒤에

뮈리엘 바르베리의 '고슴도치의 우아함'

New-Mountain(새뫼) 2018. 10. 12.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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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는 자신의 지식을 이용해 수익을 올리려 애쓰고, 학력을 레몬처럼 쥐어자 지위를 높이려 애쓰고, 엘리트라는 위상을 확보하려 애쓰고, 이어 평생 그런 희망들을 애써 품어봤자 결국 헛된 것임을 어리둘절 깨닫는다. 사람들은 별을 보러 간다고 믿지만 결국 어항 속 빨간 금붕어 신세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인생이 부조리하다고 처음부터 애들한테 가르쳐 주면 진짜 간단한데 왜 그러지 않는지 이상할 뿐이다. 물론 그게 어린 시절의 좋은 순간들을 앗아가긴 하지만, 어른이 되었을 때 시간을 벌게 해주지 않는가. 그렇다고 트라우마를, 그러니까 어항 트라우마를 피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통찰력 있는 사람은 성공을 씁쓸한 것이라고 보며, 별 볼 일 없는 사람은 항상 성공을 희망하는 것 같다.


인간은 기원 이래 많이 진보하지는 않았다. 인간은 항상 자기가 우연히 이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며, 친절한 신들이 자시 운명을 보살펴 준다고 믿는다.


이미 말할 줄 아는 청소년들에게 문법이 말하고 쓰기를 잘하는 데 쓰인다고 말한다면, 그건 꼭 오줌을 잘 싸고똥을 잘 싸기 위해 수세기에 걸친 화장실의 역사를 읽어야 한다는 소리와 같다. 정말 무의미한 얘기다. -----나는 문법이란 아름다움에 다가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말하고 읽고 쓸 때 아름다운 문장을 읽거나 내가 직접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게 되면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는 적어도 아름다운 표현이나 멋진 문체를 알아볼 수는 있다. 하지만 문법을 알고 나면 아름다운 언어의 또다른 차원에 도달한다. 문법을 안다는 것은 언어의 껍질을 벗기는 것, 언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는 것, 그러니까 어떤 의미로는 완전히 벗은 언어를 보는 것이다. 그때 놀라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지식인들이 범하는 오류가 있다. 지성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머릿속에 오로지 한 가지 생각밖에 없다. 지식 많은 거, 그거 참 바보같은 것이다. 지성이 하나의 목표가 되는 순간 이상한 기능을 한다. 지성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그것이 생산해내는 창의성, 간결성에서가 아니라, 그 표현의 난해함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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