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설(啞器說), 파아기설(破啞器說) - 벙어리 저금통 이야기
안정복(安鼎福: 1712∼1791)
1. 아기설(啞器說)
정사년(1737) 가을에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시장에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위는 둥글고 아래는 평평하며 속은 텅 비었는데, 이마에는 일자(一字)모양으로 가늘게 구멍이 뚫려 있었다.
丁巳秋。余赴試入京。市上有器。上圓下平。中空而頂穿細穴。如一字形。前所未見也。
내가 종복을 돌아보며,
“이게 무슨 물건인가?”
하니, 그는
“벙어리입니다.”
하였다. 내가 그 말을 알 수가 없어서 또 묻기를,
“이게 무슨 물건이냐?”
하니, 또 다시
“벙어리입니다.”
하였다. 나는 그가 농하는 줄 알고 화가 나서
“내가 이 물건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벙어리라고만 대답을 하니, 도대체 무슨 소리냐?”
하고 꾸짖으니, 그는,
“소인이 감히 농한 것이 아닙니다. 이 물건의 이름이 벙어리이기 때문에 벙어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하였다.
余顧僕夫曰。是何器也。
曰啞也。
余未解其語。又問曰。
是何器也。
復曰啞也。
余怒其言之戱也。詰之曰。
余問是器。而答曰啞何也。
僕夫對曰。小人非敢戱也。是器之名啞。故對以啞也。
내가 이상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이 물건은 입이 있으나 말을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름을 ‘벙어리’라고 붙였습니다. 민가의 어린 계집아이들이 이것을 사다가 동전이 생기면 그 속에 넣는데, 가득차면 이것을 부수어 동전을 꺼냅니다. 아마 동전을 헤프게 쓰지 않으려 하기 때문일 겁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余怪而問其故。對曰。
是器也有口而不能言。故人命之曰啞。閭家小女兒。貿是而得錢則投其中。滿而後撲而取之。盖不欲其妄費也。
나는,
“아, 무릇 입을 가지고도 말을 못하는 것이 어찌 이 물건뿐이겠는가. 병, 동이, 단지, 항아리도 어찌 입이 없겠는가마는 이런 그릇들이 말을 못한다 하여 ‘벙어리’라고 부른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그러니 이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余曰。
噫嘻。凡有口而不能言者。奚獨是器也。甁罌甕缸。獨無口乎。未聞甁罌甕缸之以不言而名以啞也。是必有以也。
곁에 있던 여관 주인이 이 말을 듣고는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자네는 모르는가? 이는 사람이 붙인 이름이 아니고 조물주의 희극일세. 조물주는, 사람에게 말소리와 웃는 얼굴은 보이지 않더라도 아이들의 입을 통해 동요를 전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물건을 꾸며 각종 그릇들을 만들기도 하니, 이것은 모두가 사람들로 하여금 듣고 모아서 깨닫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 물건이 나온 지 10년이 못 되었는데, 그것이 가진 뜻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람이 벙어리 같음을 비웃는 것이며, 또 하나는 사람이 벙어리 같아야함을 경계한 것이다. 무엇을 비웃는다는 것인가. 말을 해야 마땅한데도 말하지 않는 사람을 비웃는 것이니, 벙어리와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무엇을 경계한다는 것인가. 말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도 말을 해서 화를 자초하는 사람을 경계하는 것이니, 이때는 벙어리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순(舜) 임금이 무슨 허물이 있었기에 고요(皐陶)와 익직(益稷)이 말하기를 마지않았으며, 무왕(武王)이 무슨 허물이 있었기에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말하기를 마지않았겠는가. 한(漢) 나라의 문제(文帝)와 당(唐) 나라의 태종(太宗)은 모두 몸소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나, 가의(賈誼)는 탄식하기를 마지않아 통곡을 했으며, 위징(魏徵)은 십사소(十思疏)에서 멈추지 않고 십점소(十漸疏)를 올렸다.
대개 신하의 마음가짐은, 우리 임금을 이미 성군이라고 여기지 않고 혹시라도 잘못이 있을까 염려하여 온 힘을 다해 곧은 말 하는 것을 꺼리지 않아서, 임금에게 허물이 있으면 곧장 간쟁하고 다스림에 잘못이 있으면 논하기를 마지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임금은 성군이 될 수가 있고 신하는 그 직분을 저버리지 않게 된다. 지금 성상께서는 요 임금처럼 어질고 순 임금처럼 공순하며 문왕처럼 공경스럽고 무왕처럼 의로워서, 말할 만한 허물이 없으나, 그러나 신하의 의리로는 어찌 이 정도를 만족히 여겨 여기에서 그쳐서야 되겠는가.
비록 어질더라도 그 어진 것을 무궁하도록 하고 비록 공순하더라도 그 공순함을 무궁하도록 하며 그 공경과 의로움도 모두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임금을 위하는 지성스럽고 갸륵한 뜻이다.
그런데,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은 이미 성군이 되었고 우리나라는 이미 잘 다스려졌다.’고 하여 한 달이 되어도 한 사람도 임금의 덕에 대해 논하는 자가 없고 한 해가 되어도 한 사람도 나라의 정치에 대해 논하는 자가 없으니, 이것이 어찌 벙어리와 다르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비웃는다’는 것이다.
말이란 우호를 맺기도 하고 싸움을 일으키기도 한다. 자제들과 말할 적에는 효를 이야기하고 신하들과 말할 적에는 충을 이야기해야 한다. 만약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서 국정의 장점과 단점을 논하거나 그 책임을 가지지 않으면서 조정의 잘잘못을 맡기며, 심한 자는 공론을 저버리고 자기 당파를 위해 죽거나, 눈을 부릅뜨고 논란을 하다가 끝내는 임금을 배반하는 죄과에 빠지면서, 자신이 세화(世禍)에 죽는 것을 깨닫지 못하니, 이것을 이른바 ‘경계한다’는 것이다.
이제 만일 그 ‘비웃음’을 알아서 반성한다면 장차 조정의 명신이 될 것이며, 그 ‘경계함’을 알아서 본받는다면 반드시 처세에 능통한 자가 될 것이다.
자네는 이런 것을 알겠는가?”
傍有逆旅主人聞而笑曰。
子不知耶。是非人所命也。乃造物之戱劇也。夫造物之於人。雖不以聲音笑貌視。而或播於兒童之口而爲謠。或形諸什物之間而爲器。莫非欲人聞見而覺之也。
是器之出未十年。其義有二。一以譏人之如啞。一以戒人之當啞。譏者何。譏人之當言而不言。無異啞者矣。戒者何。戒人之不當言而言。只足以取禍。是當如啞者矣。
虞舜何嘗有過。而皐益言之不已。武王何嘗有過。而周召言之不已。漢之文帝。唐之太宗。皆身致太平。而賈誼大息之不已而痛哭。魏徵十思之不已而十漸。
盖人臣之心。不以吾君之已聖。而恐有遺失。明目張膽。直言不諱。過在于君。則爭君不暇。害在于政。則論政不已。
是以君不失爲聖。而臣不負其職矣。今聖上堯仁舜恭。文敬武義。未嘗有過之可言。而然而爲臣之義。豈欲以此爲足而止於是耶。
雖仁而欲其仁之無窮。雖恭而欲其恭之無窮。其敬其義。莫不如是。是其爲君至誠惻怛之意。
而在廷之臣皆曰。我君已聖矣。我國已治矣。浹月而不聞一人論君德。浹歲而不聞一人論國政。是何異於啞者乎。是則所謂譏也。
惟口出好興戎。與人子言。依於孝。與人臣言。依於忠。若無其位而論國政之長短。非其責而言朝廷之得失。甚者背公死黨。瞋目語難。末乃歸于反君之科。而不自覺殞身世禍。是則所謂戒也。
今若知其譏而反之。則將爲朝廷之名臣。知其戒而法之。則當爲處世之通人。子知是耶。
나는 그 이야기를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물었으나, 주인은 입을 가리키며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의도를 알아차리고 물러나와 이것을 기록하여 스스로 명심하고, 그리고 집권자에게 올리고자 한다.
余奇其說。問其名。主人指其口而不言。余解其意。退而記之以自警。且欲以獻于當路者。
2. 파아기설(破啞器說)
무릇 입이 있으면 울고 입이 있으면 말을 하는 것은 천하의 바른 이치이다. 입이 있어도 울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면 정상을 벗어난 요물이다. 이 물건이 나오고부터 조정에서는 해야 할 말도 하지 않고 이 물건이 나오고부터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경계하니, 이는 온 천하를 벙어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요망한 물건이다. 성세에 있을 바가 아니다. 드디어 부수어 버린다.
凡有口則鳴。有口則言。天下之正理也。有口而不鳴不言。則反常而妖矣。自是器之出。而朝廷之上。可言而不言。自是器之出。而人皆以言相戒。是擧天下而啞之也。物之妖也。非聖世所宜有也。遂撞而破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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