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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 박문수전' 전문 현대어풀이

New-Mountain(새뫼) 2018. 4. 14.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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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 박문수전 (御史 朴文秀傳)

 

제일회 박문수 어사가 구천동 인민을 신도로 다스린 일

 

화설(話說) 조선 영종시대에 박문수 어사는 유명한 남도(南道) 어사이라. 재학(才學)과 덕망이 조야(朝野)에 충만하더니,

이때에 호서적(湖西賊) 이인좌와 영남 정희량 등이 군사를 일으키어 난을 지을 새, 상여(喪輿)에 병기(兵器)를 실고 청주에 들어와 병사(兵使) 이봉상과 영장(營將) 남연평을 죽이고 안성 청룡산 상()에 진()을 치거늘, 봉조하 최규서가 변()을 고하매 영묘조(英廟朝)가 대경(大驚)하사 오명항과 박문수를 명하여 난적(亂賊)을 토멸(討滅)한 후 오히려 민우(民憂)를 부찰(俯察)하사 특별이 박문수를 명하여 팔도 암행어사(暗行御史)로 제수(除授)하니 박문수 고두사은(叩頭)(謝恩)하고 수의어사(繡衣御史)로 팔도에 암행할 새,

폐의파립(敝衣破笠)에 죽장망혜(竹杖芒鞋)로 행운유수(行雲流水)를 따라 한강이남 경기 충청 경상도로 시작하여 수령방백(守令方伯)의 행정득실(行政得失)과 각동(各洞) 각리(各里)의 인민 정도(情到)를 일일이 수색한 후에 전라도로 들어갈 새, 일변(一邊) 덕유산 속으로 들어가니, 덕유산이라 하는 산은 남방(南方)의 유명한 장산(壯山)이라. 동학(洞壑)이 심수(深邃)하고 봉만(峯巒)이 중첩(重疊)하여 주야사시(晝夜)(四時)에 운무(雲霧)가 부절(不節)하고 시랑(豺狼)이 배회하니 거민(居民) 이외에는 비조(飛鳥)라도 임의로 출입을 못하는 곳이라.

박어사가 반겨 곡경(曲徑)으로 점점 들어가니 어언간(於焉間) 일락서산(日落西山)하여 황혼이 장근(將近)한데 심산궁곡(深山)(窮谷)에 길이 없어지고 참천(參天)한 수목 속에 짐승의 소리만 들리는지라.

무인공산(無人空山)에 종일 방황하던 박어사가 기갈(飢渴)이 자심(滋甚)하여 낙엽 위에 엎드렸더니, 전면에 등잔불이 은은히 보이거늘 박어사 일경일희(一驚一喜)하여 등불을 찾아가니 천만 의외에 인가가 즐비(櫛比)한 엄연(儼然)한 촌장(村場)이라.

이때 야심하여 집집이 문을 닫고 만뢰(萬籟)가 구적(俱寂)한데 한 골목을 당도하니 창밖으로 등불이 비추이며 방 안으로서 사람의 소리가 괴이하게 들리거늘, 어사 대경하여 한 옆으로 비켜서서 창틈으로 엿보니 늙은 사람 하나가 단도(短刀)를 빼어들고 누운 사람의 배 위에 올라앉아서 칼로 찌르려 하며,

이놈 죽어라, 이놈 죽어라, 죽어라.”

소리를 연()하여 하는데 누운 사람은 다만

죽겠습니다.”

하는 말뿐이라.

어사가 정신을 진정하여 기침을 크게 하고 창문을 두드리며 주인을 부르니 방안이 괴괴(怪怪)하며 이윽고 주인이 나와 영접하는지라.

어사가 주인을 따라 방 안에 들어서니 누웠던 사람은 없어지고 단도를 가지고 행흉(行凶)하려 하던 늙은 사람뿐이라.

어사가 좌정 후에 자기의 성명(姓名) 거주(居住)를 통하며 길을 잃고 들어온 시말(始末)을 이르니 늙은 사람이 만면수색(滿面愁色)으로 대답하되,

자기의 명은 유이요 이름은 안거라.”

하며, 장탄(長歎) 수성(愁聲)에 안으로 들어가더니 반과(飯果)를 가지고 나오거늘, 박어사가 치사(致辭)하며 밥상을 받은 후에 주인의 내력을 자세히 물으니, 유안거가 즐기어 대답하지 아니하더니, 박어사의 간곡(懇曲)히 반문(反問)함을 보고, 자기의 전후시말을 차례로 말하되,

본적은 경성이러니 그 아내 최씨와 더불어 삼 세 된 아들 득주 하나를 데리고 덕유산 하()로 낙향한 지 십이여 년에 득주의 나이 장성하매, 무주 김정언의 질녀(姪女)와 더불어 성취(成娶)시켰으나 가계(家計)는 좌식산공(坐食山空)이라 점점 영성(零星)하여 한고(寒苦)가 침노(侵擄)하더니, 마침 이 동리 구화선이라 하는 사람의 소개로 이곳으로 반이(搬移)하여 오늘날까지 학구(學究)로 종사한 지 십유여년(十有餘年)이라. 이곳은 사방 육십 리 무인지경이니 토인(土人)의 개척한 지가 어느 시대인지 미상(未詳)하나 다만 구가(具家)와 천가(千家) 두 성이 서로 전하여 거주함으로 이 동리 이름을 구천동(具千洞)이라 칭하는지라. 구천동 백여 호에 내 집 하나가 섞이어 사나 양성(兩姓)의 학채(學債) 수입으로 처음 들어올 때에 비하면 생활 정도가 풍족하다.”

이르더라. 박어사가 다시 묻되,

내 주인의 집 오늘 저녁 일을 묻고자 하노니 일야지정(一夜)()()이 만리성(萬里城)이라. 주인은 모름지기 은휘(隱諱)치 마소서. 아까 창 밖에서 내가 들으매, 주인이 소년을 대하여 행흉코저 함은 어찌한 연고이뇨?”

하니, 유안거가 놀라며 말이 없더니 양구(良久)에 이르되,

공이 이미 알고 묻는지라. 내 어찌 말하지 아니하리오. 그 소년은 곧 나의 아들 득주이니, 이웃에 천운서라 하는 자가 있어 저의 재종(再從) 질녀(姪女)를 취하여 며느리를 삼으니 그 아들의 이름은 천동수라. 천운서의 집이 본래 유막불수(帷薄不修)로 동수의 처가 부정한 행실이 있은 지 오래인지라.

이웃이 모두 아는 바이러니, 불의에 내 자식 득주와 이번에 통간(通姦)이 있다 하여 천운서의 부자가 서로 꾀하기를, ‘저의 집 부녀가 실행(失行)하였음은 일문(一門)의 수치인지라. 그 혐의를 보복코자 할진대, 유가의 집 부녀를 탈취함이 가하다.’ 하고 내 집에 통기(通奇)하되, 내 아내 최씨는 천운서가 탈취하고 나의 자식 득주의 아내는 천동수가 탈취하되, 혼례의 정당한 예식을 좇아 동일(同日)에 성례할 것이라 하며 혼수와 잔치를 연일 작만(作滿)하는지라.

혼례일은 곧 명일이라 하니 오늘밤을 지나면 천가의 부자가 내 집에 들어와서 신부를 내어놓으라고 할 것이니, 강약(強弱)이 부동(不同)으로 저의 하자는 것을 아니 좇지 못하리니, 그 욕을 앉아서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 칼로 나의 자식을 죽이고 나의 자부(子婦)를 죽이고 나의 아내를 죽인 후 나도 마저 이 밤 내로 죽어서 저의 강포함을 피하고자 하오니 공은 이곳에서 잠시도 머무르지 못할지라. 이 길로 멀리 인간처로 떠나서 급한 화를 면할지니라.

하니, 박어사는 또 묻되,

명일 혼례하는 시간이 언제 있다 하더뇨?”

하니, 유안거 대답하되,

신시(辛時) 초라 하나이다.”

하니, 박어사 다시 묻되,

이곳에서 가장 그 중 가까운 관부(官府) 상거(相距) 얼마나 되느뇨?”

하니, 유안거 대답하되,

본군 관부가 서남으로 칠십 리라 하나이다.”

하니, 박어사 흔연히 유안거의 손을 잡고 이르되,

주인은 염려 말고 있으면 내 이 길로 나갈지라. 명일 신시 이내로 좋은 소식을 통할 터이니 부디 안심하소서.”

하니, 유안거가 다시 이르되,

공의 말은 믿지 못할지라. 부질없이 남의 집으로 하여금 수욕(羞辱)을 당하게 할까 겁()하노라.”

하나, 박어사가 재삼 근간(懃懇)히 권유 후에 즉시 구천동을 떠나서 남방면으로 향하여 갈 새, 침침칠야(沈沈漆夜)에 수로(水路)를 무릅쓰고 봉학(峰壑)을 넘어 칠십 리 무주읍에 당도하니, 날이 이미 밝은지라.

그 고을에 노문(路門) 출두(出頭)를 할 터이나, 창황분주(?怳)(奔走) 중에 어찌 체면을 차리리오.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삼문(三門) 앞에 대어 들어 마패를 친히 잡고 암행어사 출두를 불렀더라.

벽력(霹靂)같은 마패소리가 무주읍을 진동하니, 육방(六房)이 뒤집히고 사린(四隣)이 소요(騷擾)하여 본읍 군수는 잠결에 일어나서 혼불부체(魂不附體) 도망할 제, 역졸이 모여들며 공방을 호령하니, 본읍 관속이 차례로 현신(現身)하여 어사를 영접하여 객사로 모시거늘, 박어사가 일변 좌정하여 본관을 청하여 보니, 본관의 성명은 임해진이라.

이 때 군수가 혼비백산 들어오니 박어사는 본관을 대하여 초두(初頭)에 묻는 말이 본 고을에 재인(才人) 광대의 수효를 물으니, 본관은 혼겁(魂怯) 결에 육방을 지휘하여 우열(優劣)을 불문하고 부하(府下)의 모든 광대를 개개(箇箇)이 대령하니, 수효가 심히 많은지라.

어사가 호령하여 땅 재주 잘하는 광대로 선택하여 삼문을 뛰어넘는 자로 시험하니 모든 수효에서 반이 더한지라.

어사가 분부하여 그 중에서 효용(效用)한 자로 네 명을 골라 놓은 후에, 지필(紙筆)을 친히 잡고 군복 다섯 벌을 견본으로 그림 그리어 본관을 내어 주며 이르되,

화본(畫本)에 의지하여 군복을 짓되, 오색을 각각 나누어 시각 내로 들여오라.”

하여, 본관이 황망하여 받아보니, 복색이 심히 흉참(凶慘)한지라. 관하를 지령하여 오색 군복을 즉시 바치거늘, 어사가 본부(本府)의 경동(驚動)됨을 안위(安慰)한 후에 네 명 광대로 하여금 군복을 영거(領去)하고 덕유산 중으로 향하니 해가 이미 높았더라.

이때에 유안거는 어젯밤 과객의 말을 반신반의하나, 권구(眷口)에 대하여 그 밤에 차마 하수(下手)치 못하고 날이 점점 밝아오매, 천운서의 집에서 혼구를 준비하여 자기 집 대청을 수리하고 교배(交拜)청을 벌리는지라. 유안거가 이 거동을 보고 진작 죽지 못한 것을 한할 뿐이러니, 오정(午正)이 기울매 천가의 집 부녀가 떼를 지어 들어오며, 내정(內庭)으로 돌입하여 늙은 최씨 부인과 그 며느리 김씨 부인을 붙잡아 앉히고 지분(脂粉)으로 다스리는지라.

유씨 일문이 황황망조(遑遑罔措)하여 어찌할 줄 모르더니, 정한 시간이 임박하매, 천가의 노소가 천운서의 부자를 옹위하고 들어올 새, 두 사람의 복색이 일반으로 머리에 사모를 쓰고 허리에 각대를 띠었으며 발에 수혜자(水鞋子)를 신고 차례로 앞뒤에 서서 마당을 밟아 들어오니, 구천동 백여 호가 일시에 모여들며 다투어 구경하며 서로 이르되,

이와 같은 혼례는 우리 인간에 처음 있는 일이라.”

하고, 탄식해 마지아니하더라.

신랑 두 사람이 교배청에 이르러, 천운서 좌편에 서고 천동수는 우편에 서서 목안(木雁)을 차례로 들이며 신부가 나오기를 연하여 재촉하더니, 홀연히 마당 한 가운데서 구경하던 사람이 물결같이 갈라지며 일위 신장(神將)이 황포황갑(黃袍黃甲)에 황모부월(黃帽斧鉞)을 비끼어 들고 귀신(鬼神) 등사(螣蛇) 황기(黃旗)를 높이 들어 엄연히 걸어 들어오는지라.

보는 자가 모두 황겁하여 한 옆으로 비켜서며 감히 눈을 들어 바라보지도 못하더니, 그 신장 언연(偃然)히 교배청으로 들어가 중앙에 좌정하더니, 손에 가진 황모부월로 교배상을 벽력같이 한번 치며 동방 청제대장군(東方 靑帝大將軍)’을 크게 하고 크게 부르니, 그 소리가 일변 떨어지며, 공중에서 청령(聽令)하는 소리가 산곡(山谷)이 진동하며, 일위의 신장이 마당 가운데로 떨어지니, 청건 청의(靑巾靑衣)에 청룡기(靑龍旗)를 높이 들고 각항저방 심미기(角亢低房 心尾箕)를 응하여 좌청룡 동방에 비껴 서는지라.

중앙 신장이 다시 부월로 상을 치며 서방 백제대장군(西方 白帝神將符)’을 부르니 여전히 공중에서 청령하는 소리가 일어나며 일위 신장이 마당으로 떨어지니, 백호기(白虎旗)를 높이 들고 규루위묘 필자삼(奎婁胃昴 畢瓷參)을 응하여 우백호(右白虎) 서방으로 완연히 서는지라.

중앙신장이 다시 황모부월을 높이 들어 교배상을 치며 남방 적제대장군(南方 赤帝大將軍)’을 부르니, 청령 소리 다시 공중에서 일어나며 일위신장이 떨어지는데 적건 적의(赤巾赤衣)에 주작기(朱雀旗)를 높이 들고 정귀류성 장익진(井鬼柳星 張翼軫)을 응하며 남주작(南朱雀) 남방으로 서는지라.

중앙 신장이 다시 북방 흑제대장군(北方黑帝大將軍)’을 부르니, 여전히 흑건흑의(黑巾黑衣)한 일위 신장이 현무기(玄武旗)를 높이 들고 두우여허 위실벽(斗牛女虛 危室壁)을 응하여 북()현무(玄武) 북방으로 서는지라.

사방 신장들이 방위를 정한 후에 중앙 신장이 소리를 높이 하여 이르되,

나는 중앙 황제대장군(黃帝大將軍)으로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이곳에 이른지라. 상제 명하시되, 무주 구천동 오늘 신시초에 괴악(怪惡)한 무리 두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잡아 바치라 하시기로 내 제위(諸位) 신장을 불렀느니, 사방(四方) 신장은 합력하여 이 중에 사모관대(紗帽冠帶)한 두 사람을 잡아갈지어다.”

하거늘, 사방신장이 일제히 청령하며, 교배상 앞에 허재비같이 서 있는 천운서와 천동수 두 사람을 문밖으로 잡아내어 풍우(風雨)같이 몰아 가니라. 이 날 유안거의 집에 모여 있던 남녀노소가 신장의 위엄을 보고 다 각기 도망하여 제 집 방안으로 들어가서 숨어 있으매, 미처 도망하지 못한 자는 혼이 빠져 천지를 분별치 못하더라.

이 때 천운서 부자를 잡아간 신장은 곧 박문수 박어사이니, 본읍에서 데리고 온 광대 네 명에게 군복을 입히어 가지고 유안거의 집을 사방으로 뛰어 넘어 들어가서 천운서의 부자를 압령(押領)하여 나오다가, 구천동 삼십 리 박에 나와서 광대를 호령하여 천운서의 부자를 때려 죽이여 깊은 산골에 파묻은 후 광대를 각기 후히 상 주어 돌려보내고,

박어사는 그 길로 나서서 전라도를 다 본 후에 서북 사도를 차례로 암행하고 경성으로 돌아와 옥계(玉階) 하에 배복(拜伏)하니, 성상이 기뻐하사, 박문수의 직품(職品)을 높이어 정이품(正二品)을 하사하시고 내직(內職)으로 선용(善用)할 새, 삼 년이 지나가니, 남방이 병화 이후에 민정(民情)이 오히려 요요(搖搖)한지라.

다시 박문수를 명하사 삼남(三南) 수의어사(繡衣御史)로 파송(派送)하시니, 박어사는 봉명(奉命)하고 영남 삼도를 시찰할 새, 전라도 덕유산 하에 이르렀더라.

박어사가 연전에 구천동 들어갔던 일을 문득 기억하니 어언간 십 년이 되었도다. 유안거의 하회(下回) 어찌 됨을 알고자 하여 유리걸객(流離乞客) 모양으로 다시 구천동에 이르니 이왕에 보지 못하던 와가(瓦家) 한 채가 반공(半空)에 솟아 있는지라.

박어사가 의아하여 와가로 찾아 들어가니, 십 년 면목(面目)이 의희(依稀)하나 주인의 성명이 곧 유안거이거늘, 박어사가 호올로 심중에 반기어하나 유안거가 어찌 박어사를 알리오. 밤이 늦은 후에 박어사는 유안거를 대하여 저의 집 조과지도(調過之道)를 물으니, 유안거가 대답하되,

그가 대답한 내용은 이러하더라.

내 이곳에 들어온 지 십칠 년이라. 들어온 이후 오늘까지 이 동리 청년을 가르쳤으나, 처음올 때에는 급공(級功)이 넉넉지 못하더니, 십년 전에 이곳 토인 구천 양성이 재물을 합자하여 이 집을 지어 나를 주며, 그 후로부터 거민 백여 호가 매년 추획(秋獲) 중으로 내 집에 진공(進貢)하는 것이 불소(不少)한지라. 그 수입에서 연년이 잉여를 저축하여 토지를 매수한 것이 수백 석에 지나나, 오히려 거민이 진공은 해마다 증가되니 가계가, 자연히 풍족하여지더이다.”

하니, 박어사가 다시 묻되,

어찌하여 십년 이래로 거민이 군()의 집을 위하여 진공하더뇨?”

하니,

내 일찍이 신도(神道)라는 것을 믿지 아니 하였더니, 나뿐 아니라 이곳 토민도 무비(無非) 목도(目睹)한 일이 있는지라. 십 년 전에 내 집과 이곳 천가의 집 사이에 불미한 관계가 있어서 내 집이 곤욕을 당하고 집이 장차 망하게 되었더니, 마침 하늘에서 옥황상제께옵서 오방 신장을 내려보내사 내 집과 흔단(釁端)이 있던 천가 두 사람을 잡아 올려 가신 후로, 오늘날까지 시체도 내려오지 아니 하는지라. 그 일을 본토민들이 대경하여 서로 경계하되, 저 집을 곧 하늘이 아는 집이니 감히 존경치 아니치 못하리라 하며, 서로 다투어 발기(發起)하여 내 집을 위하여 동중(洞中)에 갑제(甲第)를 지어 주며 연년이 진공을 감히 해태(懈怠)히 아니 하니, 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무슨 덕이 있어서 하늘의 이와 같은 은혜를 받는고? 도리어 두려운 마음으로 이곳 토민의 자제들을 정성껏 가르치매, 지금 이곳 신진(新進) 청년은 십 년 전 이곳 사람에 비하면 막비(莫非) 문명(文明)한 이름이라.”

하고 이르더라.

박어사가 듣고 다만 상제(上帝)의 은혜를 감사하며 다시는 말이 없이 그 이튿날 일찍이 구천동을 떠나오더라.

박어사는 남방을 진무(鎭撫)한지 만 이개 년에 수의사또(繡衣使道)를 하직하고 내직(內職)으로 다시 올라가니 그 후로부터 사방이 태평하여 인민이 안도하니 조정에 일이 없더라.

영묘조가 한가한 때에 노련한 제신들을 모아,

각기 평생의 경력을 말하라.”

하고 하교하니, 박문수가 덕유산에 들어가 구천동을 다스린 일과 유안거의 전후시말을 주달(奏達)하니, 영묘조가 하순(下詢)하되,

그 후에 유안거를 다시 만났을 때에 어찌하여 상제의 은혜를 말하고 경의 일은 말하지 아니 하였느뇨?”

하니,

신이 그 때에 신의 일을 말하면 신이 구천 동구를 나서지 못하고 죽는 것은 고사하고 유가의 일문이 망하면 그 다음 구천동 인민이 다시 화액지망(禍厄之亡)이 될지라. 만일 오늘 이 자리가 아니면 평생에 어찌 개구(開口)하오리까?”

하니, 성상 이하로 제신이 모두 박문수의 도량을 칭찬 불이(不二)하더라.

 

 

제이회 남궁로 군수가 시비로 딸을 삼아 시집보낸 일

 

 

화설(話說) 삼한(三韓) 시대 변한국(弁韓)()에 진주부 창원 군수 석진()()은 본래 금주 사람으로 나이 사십이 넘어 상처(喪妻)하매, 그 죽은 부인의 소생은 팔 세 된 딸 하나뿐이라. 딸의 이름은 계향(桂香)이니, 부인 생전에 부리던 시비 춘매(春梅)로 양랑()()을 정하니 춘매의 나이가 계향 소저보다 다섯 해가 더한지라. 일동()() 일정()()에 잠시 서로 떠나지 못하더라.

이때 석진 군수가 치적(治績)이 공평함으로 공정(公政)에 일이 없더니, 하루는 내아(內衙)에 들어가 그 딸 계향을 무릎 위에 앉히고 글도 가르치며 혹 춘매와 작란(作亂)도 시키더니 계향이 뜰 앞으로 내려가서 공을 칠 새, 춘매가 받아서 한 번 차매 공이 굴러 뜰 압 깊은 굴로 들어가는지라.

춘매 그 굴속에 팔을 디밀어 공을 꺼내려 한 즉 굴이 깊어서 능히 꺼내지 못하거늘, 군수가 곁에서 보다가 계향에게 이르되,

네가 저 공으로 하여금 스스로 굴 밖으로 나오게 할 도리 있느냐?”

하니, 계향이 한참 생각하다가 춘매로 하여금 한 통 물을 길어다가 그 굴에 부으니 공이 물 위에 뜨는지라. 다시 한 통 물을 더 부으니 공이 물에 떠서 땅 위로 떠내려가거늘, 군수가 그 딸의 영민(英敏) 지혜함을 보고 십분 기뻐하더라.

그 후로 석 군수가 창원현에서 불의지변(不意之變)을 만나니 환곡(還穀) 쌓은 창고에 불이 일어나서 하루 낮밤 사이에 천여 석 환미(還米)가 타서 없어진지라. 그 사유를 정부에 보()하매, 변한(弁韓) 왕이 대노하여 즉시 석진을 삭탈관직(削奪官職)하고 환곡 손해로 일천 오백 량을 배상(賠償) 받으니, 석진은 본래 청백한 관원으로 평일에 저축한 바가 없으니, 어찌 다수한 배상을 감당하리오.

가산(家産)을 탕진(蕩盡) 발매(發賣)하여도 태반 부족이라. 석진 군수는 이 일로 인하여 심화병(心火病)으로 십여 일에 세상을 이별하니라.

대저 변한 기록에 관원의 범포(犯逋)된 징금(證金)은 그 사람의 재산을 몰입(沒入)하여 부족되는 것은 가속(家屬)으로 하여금 관비(官婢)나 사비(私婢)를 물론하고 노복(奴僕)으로 공매(公賣)하여 징금을 충수(充數)하는 법이라

이때 석진의 가속은 다만 계향과 춘매 두 사람뿐이나, 공정(公定)이 몰입되어 장차 공매할 새 마침 그 지방 내에 진도()()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일찍 창원현 백성으로 중죄에 관련이 되어 삼개 년을 미결수로 옥에 갇히어 있더니 석진 군수가 도임하여 진도의 죄를 다스릴 새, 진도의 옥이 원통함을 사실(査實)하고 상부에 보하여 진도를 방석(放釋)하였더라.

진도가 옥을 나온 이후로 석진 군수의 하해 같은 은덕은 갚고자 하여 주야로 심두(心頭)에 잊지 못하더니, 이때 석진 군수가 불의지변을 만나서 그 가속을 공매한다는 말을 듣고 공매장에 들어가서 계향과 춘매 두 사람의 몸값을 아끼지 아니하고 사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돌아와 자기 부인 노파를 돌아보며 이르되,

내 평생에 잊지 못하던 석진 군수의 덕을 오늘에야 만분의 일이나 갚겠노라.”

하고, 먼저 계향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 소저는 곧 석 군수 노야(老爺)의 따님이니 석노야가 이 고을에서 불우지변을 만나신 후로 징금의 부족으로 석소저를 몰입하여 공매하기로 내 속신(贖身)하여 왔으며, 또 저 춘매는 석소저의 시비이니 그 댁 식구라 하여 역시 몰입되었기로 함께 속신하였으니, 그대는 모름지기 석노야의 은혜를 생각하여 춘매로 더불어 소저를 존중이 기르되, 만약 장성하기 전에 그 댁 친족이 찾으시면 다행이거니와 그렇지 못하면 장성한 후에 어진 배필을 구하여 상당한 문호(門戶)에 보내면 석노야께서 혼령이라도 기뻐하시리다.”

노파 연민히 소저를 맞아 상좌에 앉히며 이왕 석노야의 은혜를 치사(致謝)하거늘, 계향 소저는 본래 영리한 사람이라.

자기도 또한 진도의 은혜 입음을 생각하고 앞에 나가 절하며 이르되,

천한 몸을 거두어 문하에 두실진대 수양녀로 정하여 두심을 바라나이다.”

하니, 진도가 황망히 소저의 절하는 것을 금지하여 이르되,

소인은 곧 선노야의 자민(子民)이요, 소인의 목숨은 선노야의 주신 바이라. 어찌 감히 노야의 따님을 수양녀라 하리오.”

하니,

소저가 짐짓 이리하시면 노부의 바라는 마음을 끊고자 하심이니 소저는 깊이 생각하소서.”

하더라. 계향 소저가 재삼 칭사하다가 부득이 진도의 지휘(指揮)를 좇으니, 이후로 진도의 집 상하가 일반으로 계향 소저를 가리켜 석소저라 부르며, 석소저는 진도의 부처(夫妻)를 대하여 진공(陳公)이라 진파()()라 이르나,

오히려 이 집 진파의 마음에는 항상 충분치 못한 기색이 있으니, 그 충분치 못한 진파의 마음은 자기 평생에 자녀 간 일점혈육이 없어 남의 자녀 둔 것을 매양 부러워하던 차에, 뜻밖에 계향을 데려오매 수양녀로 정하여 목전(目前)에 부모 소리를 들을까 바란 것이 진도의 고집함을 인하여 도리어 주객의 예를 분명히 차리매 마음에 십분 불쾌해 지내더라.

그러나 진도는 소시(少時)로부터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 매양 밖에 있는 날이 많으므로 진파의 기색을 살피지 못하고 한갓 밖에 있을 때에도 의복과 음()과 식료품을 부치되, 석소저의 소용(所用)은 특별히 좋은 것으로 택품(擇品)하여 보내며, 집에 돌아오면 반드시 석소저의 안부를 먼저 물으니, 진파의 가슴 속에는 불평한 마음이 점점 깊어가나 다만 진도의 주선(周旋)하는 가운데서 어찌할 수 없는지라.

진도를 대하는 때면 외면에 화평한 기색을 띠었으나 진도만 집에 없는 날이면 석소저에게 대한 대우가 현저히 감등(減等)되는 터이라.

한번은 진도가 멀리 떠나 주년(週年)을 집에 들어오지 못할 새, 진파가 이때를 이용하여 항상 심두에 맺히어 있던 감정이 필경은 밖으로 발표가 되어 꽃이 피고 열매가 맺게 되니, 그 발표되는 회포는 분완(憤惋)이라 하는 것과 시기라 하는 것 두 가지 마음이 합하여 된 것이라.

첫째에 분완한 마음은 계향이 당초에 몸을 팔린 바에는 어디를 가던 지 남의 집 노비를 면치 못할 터이나, 다행히 내 집으로 속량하여 들어오매, 노비라 하여도 가()하거늘 일층 제 몸을 높이어 나의 수양녀로 정하면 늙은 때에 비로소 부모의 칭호나 들을까 하였더니, 천만부당한 이왕신분의 존비(尊卑)차서(次序)를 베풀매, 도리어 내 몸을 굽히어 저를 섬기게 됨이요,

그 다음 시기하는 마음이 또 있으니, 장부가 집에 들어오던지 밖에서 편지 부칠 때이던지 반드시 계향의 안부를 먼저 물을 뿐이라. 의복 음식과 거처 범절을 나보다 항상 낫게 주선하는 데서 원인이 된 것이라. 이와 같은 진파의 미움을 여러 겹으로 받는 석소저의 가련한 신세는 일구월심(日久月深)으로 한이 점점 깊어가는 도다.

인정은 고금이 일반이라. 사나이라도 집과 몸이 터무니없이 망한 이상에 외로운 종적(蹤跡)을 남의 집에 의탁하고 있으면 자연히 주인에 대하여 눈치라 하는 것은 없지 못할지라. 하물며 계향은 십여 세 된 여아로 제 몸을 팔리는 마당에 다행히 진도의 주선을 힘입어 진도의 집에 한번 들어오매 오늘날까지 바깥주인의 관후한 대우를 받으나, 내 집에서 선노야 생전에 귀염 받을 때에 비하면 한 겹 눈치라 하는 것이 아주 없다 이르지 못하리로다.

더구나 불평한 회포를 띤 진파의 앞에서 지리한 세월을 다섯 해를 보내니 그 동안 원운수우()()(讐雨)에 쌓이어 있는 심사가 장차 어떠하리오.

처음에는 진파의 마음속에 어리는 눈치요, 그 다음에는 얼굴에 나타나는 기색이러니 그 기색이 밖으로 점점 발표되는 동시에는 진파의 혀끝으로 버무려 살 쏘듯이 나오는 도다.

처음 몇 번은 시비 춘매를 대하여 말끝마다,

너는 세도집 종년이니까 그리하냐? 오냐, 너는 우리집 상전 석소저 아씨 시비로구나.”

이러한 말도 귀속에 여러 번 들어오매 도리어 예사로 지내더니, 나중에는 진파의 독한 말이 직접으로나 몸에 미치기를 시작하여 어느 때에는,

여보 작은아씨 이리 좀 건너오오.”

하는 말도 남의 귀에 이상스레 들리며 심지어 악독한 말로 내뿜을 때면, 이 계집아이 저 계집아이 하여 가며,

너는 남의 집 종으로 팔려 다니던 계집이라.”

하고, 일찍 불행한 때 일을 들어서 말끝마다 폭백(暴白)을 주니, 석소저는 자기 신세를 자탄하고 왕왕이 남모르는 눈물을 흘린 때가 많았더라.

그 이듬 해 정월에 진도가 비로소 집에 들어와 일변 석소저의 안부를 물으며, 진파 이하 집안사람의 기간 정황을 살피어 볼새 사오십 년 풍상에 단련한 진도의 눈치로 집안일이 어찌 되는 것을 모르리오.

일변 석소저를 불쌍히 여기고, 일변으로 진파를 악한 계집으로 생각하나, 풀을 치매 뱀을 놀래일까 두려워하여 비밀히 진파를 대하여 사리에 당연한 말로 개유(開諭)하니, 진파가 장부(丈夫)의 말을 두려워하여 외면으로 석소저를 처음과 같이 대우하나 어찌 진가의 형적(形跡)이 들어나지 아니하리오.

이때 진도가 석소저가 나이 어언간(於焉間) 십오 세 됨을 반기어 하니 급히 어진 배필을 구하여 성혼하고자 함이라.

첫째는 석소저의 백 년을 부탁하게 함이요, 또는 자기의 처음 먹었던 뜻을 시종(始終)이 여일(如一)하게 성취하랴 함이요, 그 다음은 제 집안에 풍파가 자연이 휴식되리라 하여, 혼처를 심성구지(心誠求之) 하나 가합한 곳이 없어서 반 년 동안을 미루어 나오는 중,

한갓 진파의 마음이 처음과 같이 화평함을 기뻐하던 차에 가을바람이 높으매 상업에 종사하는 몸이 되어 다시 집을 떠나 외방으로 향할 새, 진파를 대하여 석소저의 보호하여 줄 일을 신신당부하고 즉일(卽日)에 기정(起程)하니라.

진파가 진도의 멀리 떠남을 보고 그 동안 가슴 속에 잠복하여 있던 화염(火焰)이 천만 장이나 다시 일어나나, 백령백미(百伶百俐)한 석소저에게 직접으로 대하여서는 별로 허점(虛點)을 들어 말할 것이 없으므로, 애매한 춘매에게 대하여 매일 잘잘못을 불문하고 함부로 꾸짖는 말이 무소부지(無所不至)하더니, 공교(工巧)히 하로 아침은 춘매가 세숫물을 일찍 떠놓음으로 진파가 세수할 시간에 미쳐서 물이 이미 식은지라.

진파가 발연대로(勃然大怒)하여 춘매를 불러 세우고 한나절을 난타(亂打)하거늘, 석소저가 춘매의 매 맞는 정상(情狀)을 보매 살을 깎아내는 듯하여 진파 압에 나가서 공손한 말로 만류하더니, 진파가 노기 더욱 등등하여 춘매와 소저를 물리치고 즉시 제 집사람을 호령하여 이르되,

저 방자한 석가 여자가 내 집에 들어와 스스로 교만하거니와 원인은 내 집에 팔리어 온 계집아이라. 어찌 저를 높이리오. 이다음부터는 석소저라 이르지 말고 계향이라 부르라,”

하며, 다시 소저를 향하여 꾸짖되,

너 계향은 내일부터 부엌에 들어가서 내 집 종으로 드난하라. 만약 거행을 잘못하면 춘매와 같이 매 맞으리라.”

하며, 종일 꾸짖기를 마지 아니 하더니, 진도에게로 전인하여 보낸 사람이 이날 도착하여 봉물(封物) 한 짐과 편지 두 장을 전하니, 한 장 편지는 석소저 전()이오 한 장은 진파전이라.

진파 편지에 하였으되,

보내는 봉물은 곧 석소저의 혼수이니, 석소저 거처하는 방으로 받아 들여 잘 간수하며 남은 말은 내가 십여 일 후에 들어가겠기로 적지 않노라.”

하였거늘, 진파 보기를 다 하매 타는 불에 섶을 더한 이과 같이 마음 가운데에서 불길이 다시 크게 일어나는지라.

계향에게로 온 봉물을 제 방으로 끌어 들이고, 다시 계향의 방으로 쫓아 들어가더니 계향의 상자를 낱낱이 열어 놓고 이왕(已往)부터 진도에게로 보낸 봉물을 일일이 꺼내어 제 방으로 돌려오며 석소저와 춘매를 가리켜 이르되,

너의 두 식구 내 집에 들어와 오륙 년을 금의옥식(錦衣玉食)에 의탁한 것도 과만(過滿)하거든 이와 같은 능라금수(綾羅錦繡)를 너를 위하여 내어주리오.”

인하여, 방 안에 놓인 금침까지 걷어 가는지라.

이날 석소저는 다만 눈물을 흘릴 뿐이러라.

진파가 이날 밤에 다시 생각하니,

진도의 돌아올 날이 멀지 아니하니, 만일 진도가 돌아 와서 계향의 일을 알면 결코 나를 용서치 아니하리라 진도 들어오기 전에 저의 두 사람 형적을 없이하리라.’

하고 계교를 생각하여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더니, 이튿날 이웃에 사는 장()()라 하는 노구(老嫗)를 급히 청하여 오니, 이 장파는 지금 나이 사십여 세라. 십여 년 전부터 인물 매매하는 방간(坊間)으로 이 지방 내에서 유명한 장파이러라.

진파가 장파를 대하여 계향 춘매 오륙 년 동안을 제 집에서 신세 끼치는 말을 설명하며 이르되,

저를 당초에 속량하여 온 몸값이나 받으면 하루바삐 내 문명()()을 내보내려 하나니, 어느 곳이던지 원매처()()()를 급히 구할 도리 있느뇨?”

하니, 장파 그 말 듣고 대희하여 이르되,

일이 묘하도다. 지금 이 고을 사또께서 무남독녀로 기른 따님을 진해 부윤 자제와 결혼하여 혼구(婚具)가 이미 다 준비되었으나, 그 신부 모시고 갈 시비 없는지라. 내 그 시비 구하는 부탁을 맡은 지 여러 날이로되 합당한 자격이 없어 아직 구하지 못하였으니, 만일 계향으로 하여금 즐기어 팔고자 할진대, 본관사또께서 필경 중가(重價)를 아끼지 아니하리라. 당초에 속량하여 온 몸값에서 몇 배를 더 받아줄 터이니 진파는 나의 소청을 듣고자 하느뇨.”

진파가 이르되,

과연 장파의 주선이 여의(餘意)하면 무슨 어려움이 있으리오.”

하니, 장파가 양구(良久)에 이르되,

나의 생질(甥姪) 되는 아이가 있어 나이 지금 이십이 넘었으나 아직 장가를 들지 못한지라. 춘매로 하여금 이 아이에게 허락할 소냐?”

하니, 진파가 낙종(樂從)하여 이르되,

먼저 계향을 조처하면 춘매의 일은 곧 시행하겠노라.”

하니, 장파 웃음을 띠우고 흔연히 일어나 가더라.

본래 이 고을 군수의 성명은 남궁로(南宮)()이니, 지금 진해 부윤(府尹) 고달()()과 동문수학한 의() 있더니, 서로 환로(宦路)에 나선 이후로 백리 밖에 다스릴 새, 피차에 다스리는 관할이 지경에 접한지라.

고달 부윤은 아들을 두었으니 맏이는 고만년이요, 다음은 고억년이라나.

그 서로 두 살 틀림으로 항려지년(伉儷)()()이 가까우매, 위선 장자 만년을 위하여 매파를 남궁 군수 집에 보내어 통혼하니, 남궁 군수는 슬하에 십칠 세 된 딸 하나뿐이라.

이름은 서경이니 재모가 겸전(兼全)하여 장중보옥(掌中寶玉) 같이 기르던 터에, 고달 부윤의 통혼함을 보고 드디어 그 딸 서경으로 하여금 고만년과 백년가약을 정하니, 길기()()가 정히 시월 중순이라.

다만 서경의 곁에 보낼 시비 없으므로 장파를 불러서 부탁하되,

연기(年紀)가 소저와 상적(相敵)하고 성정(性情)이 영민(英敏)한 시비를 구하여 오면 몸값은 아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니 불과 수일에 장파가 들어와 진도의 집에 있는 계향을 천거하되, 몸값은 일백오십 냥이라 하거늘 남궁 군수가 즉시 몸값을 내어 주니라.

이때 장파가 계향의 몸값을 받아 진파에게 전하고 장차 계향 보낼 행구(行具)를 준비할 새, 교자를 문 밖에 머무르고 장파가 계향의 방에 들어가서 계향을 나가자 독촉하니, 계향이 어찌 된 일을 알지 못하여 다만 춘매와 두 식구 서로 붙잡고 흡흡히 우는지라.

장파 곁에서 보다가 계향에게 이르되,

너는 울음을 그치고 교자에 오르라. 이 길로 내아에 들어가 사또 슬하에서 작은아씨를 잘 섬기면 네 몸에는 평생에 부귀를 누림이니라.”

하니, 석소저 울음을 그치고 놀라 묻되,

장파는 어찌 이르는 말이뇨?”

하니, 장파 이르되,

지금 이 고을 사또께서 그 따님을 위하여 시비를 구하기로, 주인 진파가 너를 허락하고 이미 너의 몸값까지 찾았으니 아니 가지 못하리라.”

계향이 하릴없어 춘매를 이별하고 교자에 오르니, 춘매 하늘을 부르짖어 통곡하더라.

석소저의 교자가 이미 본현 내아에 이르니, 남궁 군수의 온 집안이 계향의 아름다운 자색을 보고 대경 괴이 여기더라.

남궁 군수가 대희하여 계향의 이름을 묻고 이르되,

이름이 심히 아름답다.”

하여, 이름을 고치지 아니하고 인하여 계향으로 부르더라.

이날 장파가 내아에서 나와 진파의 집에 들어가 춘매를 데려다가 저의 생질 정갑룡과 불일(不日) 성례(成禮)하니 춘매는 정갑룡과 부처(夫妻)가 되었더라.

슬프다. 계향은 한번 서경 소저의 시비로 들어간 후로 앞에 당한 직책을 여공불급(如恐不及)히 지나가나, 자기의 이왕 신분을 생각하면 어찌 감격한 심사 없으리오. 하루는 뜰 앞에서 먼지를 쓸어 나가더니 홀연히 비를 멈치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섰는지라.

이때 마침 남궁 군수가 내아에 들어와 있다가 영창(映窓) 틈으로 계향의 우는 양을 보고 괴이히 여기어 계향을 불러 우는 사유를 물으니, 계향이 더욱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며 즐기어 말하지 아니하거늘 남궁 군수가 재삼 질문하니, 계향이 꿇어 앉아 이르되,

소비가 어렸을 때에 춘매라 하는 시비와 더불어 저 뜰 앞에서 공을 치다가 공을 굴려 뜰 앞 구멍 속으로 들어가매, 소비의 노야가 소비에게 이르되, ‘네 어찌하면 저 공이 스스로 땅 위에 올라오게 할고.’ 소비가 춘매로 하여금 물 두 통을 길어다 부으니, 그 공이 물에 떠서 나오는지라. 노야 심히 소비의 총명함을 기뻐하더니 지금 뜰을 쓸다 보온 즉 그때에 보던 구멍은 의구(依舊)히 있으나, 기간(其間) 소비의 집일은 영성(零星)하여 지금 소비의 가련한 신세를 생각하고 자연 눈물 나옴을 깨닫지 못하였사오니 바라옵건대 용서하시옵소서.”

남궁 군수가 계향의 말을 들으매 십분 의아하여 다시 묻되,

네가 어찌하여 어렸을 때에 저 뜰 앞에서 놀았으며, 너의 아비는 누구인고. 내력을 자세히 말하여라.”

계향이 척연(惕然)히 대답하되,

소비의 부친은 육 년 전에 이 고을 군수로 있던 석진 군수이온데 불행히 환곡의 실화한 손해를 배상하다가 인하여 병들어 죽고, 징금의 부족으로 소비는 공정(公庭)에 몰입되었더니, 다행히 진도의 속량함을 힘입었다가 진파가 용납지 못함으로 소저의 시비로 몸이 팔리었나이다.”

남궁 군수가 계향의 시말을 들으매 계향은 곧 고인(故人)의 딸이요, 오동관의 자식이라. 일찍 고인 석진은 청백한 관원으로 아는 고로, 평일에 사람을 대하면 매양 석진의 치적을 들어 말하던 터이러니, 그 딸을 비로소 대하매 마음에 고인을 맞는 듯하여 부인을 돌아보며 이르되,

이 아이는 고인의 딸이라. 내 듣고 보지 못하였으면 모르려니와 하늘이 저를 불쌍히 여기사 내 집으로 보내셨으니 내 집에서 붙잡아 주지 아니하면 천의를 모름이라. 고인 석진은 황천지하(黃泉之下)에서 나를 어찌 생각하리오.”

하고, 즉시 여아 서경을 불러서 연치(年齒)를 차리어 형매()()의 의를 맺게 하니 부인이 다시 계향의 등을 어루만지며 이르되,

진즉 알지 못함으로 너로 하여금 시비의 하대를 받게 하였으니, 어찌 불안치 아니하랴. 차후로는 너의 형매 간에 좋은 의를 지키게 하라.”

하고, 부탁하며 집안사람에게 발표하여 계향을 높이여 석소저라 부르게 한 후, 다만 여아 서경의 시비 없음을 걱정하니, 남궁 군수가 스스로 이르되,

내 좋은 도리 있다.”

하며 즉시 편지를 써서 고달 부윤 집으로 보내더라.

이때에 고 부윤 집에서는 장자 만년의 혼사를 정한 후로 길기가 점점 가까우매, 집안 내외가 분주히 지나더니 규수 집으로부터 편지 이르거늘, 고달 부윤이 받아보니 하였으되,

산만(散漫)하며 아들을 장가들이고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부모의 기쁜 마음이나, 내 몸을 놓고 남을 붙잡는 것은 높은 선비의 고명(高名)한 뜻이라. ()은 근일(近日)에 딸자식을 위하여 시비를 구하였으니 이름은 계향이라. 계향의 위인이 용모단정하고 거지(擧止) 안상(安詳)하여 마음에 항상 기이히 여기었더니, 그 아이의 시말을 알아본 즉 곧 폐군(廢郡) 양등 전임(前任) 석진의 딸이라.

일찍 석진은 청렴한 관원이러니 불행이 환미를 태우므로 관직을 빼앗기고 몸이 망한 후에 오히려 징금의 부족으로 그 가속을 공매할새 이 아이도 역시 몰입되어 한미(寒微)한 집으로 팔리어 갔다가 이번에 내 집으로 들어오니, 동관(同官)의 자식은 곧 나의 자식이라. 이 아이로 어찌 내 딸의 시비를 정하리오.

인하여 내 자식과 형매의 의를 맺게 하니 이 아이도 또한 비녀 찌를 나이 당한지라. 내 딸로 하여금 이 아이 먼저 시집보내는 것은 동관 사이에 부끄러운 일이기로 먼저 석가 여자를 위하여 동상(東床)에 사람을 구한 후에 내 딸의 혼사를 마치고자 하노니 바라건대 영랑(令郞)의 길기를 퇴정(退定)하여 후일을 기다리게 하소서. 남궁로는 재배(再拜)하노라.”

고달 부윤이 보기를 다하고 재삼 생각하더니 문득 이르되,

남궁의 처사함은 과연 장자(長者)의 일이로다. 내 어찌 저 일에 대하여 남궁로로 하여금 좋은 일을 저 혼자 하게 하리오.”

하며, 곧 답장을 남궁 군수 집으로 부치니 하였으되,

경복자(敬復者)는 난봉(鸞鳳)의 짝은 비록 아름다운 인연이라 하나, 후토(后土)에 슬퍼하는 것은 대개 뜻이 서로 같음이라. 형은 동관의 딸로써 내 딸로 삼을새 복()은 어찌 내 마음으로써 형의 마음을 본받지 못하리오. 편지에 사의(事意)를 재삼 번복하매 고인의 생각이 간절하도다. 석가 여자는 곧 청렴한 동관의 혈맥이라. 문벌이 상당하니 원컨대 석가 여자로 하여금 복의 자부(子婦)를 허락하시여 이왕 정한 길기에 예를 마치게 하고, 형의 영애(令愛)는 다시 높은 문호를 가리어 탄복지재(坦腹之材)를 구하시면 거의 양편지도(兩便)()()가 될까 하노이다. 이전에 거백옥(蘧伯玉)이 호올로 군자 되기를 부끄러워 하였으니, 지금 형의 높은 의를 나누어 복에게 부치기를 바라노라. 고달은 배복(拜伏)하노라.”

남궁 군수가 답장을 보매 고달 부윤의 의거(義擧)를 십분 짐작하고, 내아에 들어가 부인을 향하여 고부윤의 편지 사의를 의논하더니 부인이 이르되,

어찌 내 딸이 이미 정한 연분을 바꾸리오. 다만 계향의 혼사를 정한 후에 곧 서경의 혼인을 의구(依舊)히 지나는 것이 가하다.”

하고 일변 고달 부윤집 내아로 보내는 편지로 쓰니, 남궁 군수의 부인과 고달 부윤의 부인은 서로 친가의 척분(戚分)이 있을 뿐이외라. 어렸을 때에 격린()()하여 생장함으로 평일에도 서한 왕복이 빈빈(頻頻)하던 터이라.

이날 혼사에 대한 편지를 고달 부윤 내아로 부치니 하였으되,

간단히 적사오며 의탁(依託)이 없는 규수에게 장가드는 것은 비록 높은 의라 하겠으나, 이미 정한 연분을 고치는 것은 대의를 어기는 거시라. 소녀가 영랑으로 더불어 아직 금슬의 낙()을 이루지 아니하였으나 일찍 월로(月老)의 노를 맺어서 길기가 머지 아니한지라. 지금에 홀연히 영랑의 집으로 하여금 일찍 정한 연분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취하는 것은 예법에 틀림이요, 소녀의 집으로 하여금 정한 사위를 놓고 새로 사위를 구하면 남의 시비를 면치 못할지라. 바라건대 존문에서는 세 번 생각하시야 반드시 이왕 정한 언약을 좇게 하소서. 창원 내아 석성은 근백(謹白)하노이다.”

고달 부윤의 부인이 이 편지를 보고 부윤에게 의논하니, 부윤이 그 사의를 듣더니 부끄러운 빛을 띠우고 이르되,

내 창졸에 생각지 못함으로 실례함이 적지 아니하도다. 내 다시 생각하니 남궁로의 집 혼사에 묘한 도리 있도다.”

하고, 부인을 권하여 남궁 군수 집 답장을 닦아 보내니 하였으되,

딸로써 딸을 바꾸게 함은 내 집에서 의를 중히 여김으로, 이왕 연분을 끊고 다른 연분 취함을 즐기어 아니함은 존문에서 예법을 지킴이라. 천구(賤軀)에 둘째 아이 있어 나이 바야흐로 십칠 세 된지라. 바라건대 영애는 복의 장남 고만년으로 정한 연분을 이루게 하고, 석가 여자는 복의 차남 고억년에게 허락하시면, 아름다운 신랑과 아름다운 신부가 쌍으로 인연을 이루어 일동일정에 백년을 같이하게 하옵소서. 혼구도 별로 준비할 것 없고 길기도 같은 날이 아름답다 하오니, 모름지기 천성을 비추어 굽히어 좇으시고 다른 날을 다시 택하지 마옵소서. 진해 내아 김성은 경복(敬服)하나이다.”

남궁 군수가 이때에 부인과 같이 앉아 고 부윤집 회답을 기다리더니, 급기(急機) 사의를 보매 희출망외(喜出望外)하여 이르되,

고달의 집 의기는 천고에 뛰어나리로다.”

하였더라.

드디어 혼수를 나누어 의복과 패물을 한 가지로 차등이 없이 장만하여 놓고 길기를 기다리어 고 부윤 집 신랑을 쌍으로 맞아 들이여 일문 내에서 교례(敎禮)하고 우례(于禮)하여 보낼새, 길에서 보는 사람마다 남궁 군수와 고달 부윤의 두 집 의기(意氣)를 칭송치 아니 하는 이 없더라.

이날 남궁 군수 부처는 섭섭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더니, 그 밤 새벽에 꿈을 꾸니 사모품대(紗帽)(品帶)한 일위 관원이 언연(偃然) 앞에 와 이르되,

나는 이 고을 양등 전 군수 석진이라. 불행히 이 고을에서 죽은 후에 상제(上帝)께옵서 나의 청렴함을 불쌍히 여기사 불러 올리시어 나로 하여금 천계(天界)에 모시게 하시더니, 공이 높은 의를 늘어 혈혈무의(孑孑)(無依)한 나의 딸을 건지어 주옵기 그 사유를 상제 전에 주달하였더니, 상제께옵서 특별이 공의 음덕을 생각하사, 공의 아들 하나를 지시하시야 공의 문호를 빛나게 하셨나이다.”

하며 초연히 가더라.

그 후로 과연 남궁 군수 부인이 사십 이후에 비로소 아들 하나를 낳으니 이름을 천석이라 하니라.

천석이 점점 자라나서 저의 부모 생전에 마한(馬韓)으로 들어가 벼슬이 경상(卿相)에 이르고, 고달 부윤의 두 아들도 본국에서 동방(同榜) 급제하여 부귀가 한때에 혁혁(赫赫)하였더라.

차설 진도가 집에 돌아오매 석소저와 춘매 없는지라. 진파에게 질문한 즉 진파가 이르되,

두 아이 야반(夜半)에 같이 도망하였다.”

하거늘, 진도가 마침내 곧이듣지 아니하더니, 그 후에 본 군수 집에서 진해 부윤 집으로 성혼함을 듣고 대경하여 춘매의 거취를 사득(査得)하고 춘매를 속신(贖身)하여 석소저에게로 보내고자 하니, 이때 춘매가 정갑룡과 부처의 은애(恩愛)가 이미 깊어 서로 떠나지 못하는지라.

진도가 고달 부윤 집에 찾아가서 진파의 죄를 대신하여 사과하고 춘매의 시말을 고하니, 고달 부윤이 즉시 춘매와 정갑룡을 불러들여 집사람을 삼고 진도를 후히 상 주니 진도가 받지 아니하고, 진파의 불량함을 깊이 한하여 진파를 다시 돌아보지 아니하고 다른 곳으로 가서 젊은 계집을 얻어 동거하다가 아들 형제를 낳으니 이것이 모두 적선(積善)한 결과이니라.

 

 

제삼회 배도 진국공이 평생에 인정승천할 일


화설(話說) 지나(支那) 한문제()(文帝) 때에 세도로 한참 유명하던 등통이라 하는 신하 있으니, 문제 나가면 반드시 등통으로 뒤를 따르게 하며 들어오매, 등통으로 함께 거처하니 은총이 이로 비할 데 없더라.

이때에 관상 잘 보는 허부라 하는 사람이 등통의 상()을 보고 가로되,

한때 부귀는 극족()()하나 다만 종리문()()()이라 하는 주름살이 입으로 들어갔으니 필경은 굶어죽기를 면치 못하리라.”

하거늘, 한문제 그 말 듣고 대노하여 이르되,

등통의 부귀는 내게 달리었거늘 누가 등통으로 하여금 곤궁하게 하리오.”

하고, 드디어 서촉(西蜀) 동광(銅鑛)을 등통에게 내어주어 수시로 돈을 지어 쓰게 하니 등통의 부()함이 나라를 대적할러라.

한번은 문제가 우연히 부럼이 생겨서 고름이 터져 나올 새, 등통이 입을 대고 빨아내니 문제가 상쾌함을 신기히 여기던 차 마침 황태자가 들어오거늘, 문제가 부럼을 빨라 하교하니 황태자가 바야흐로 생선회를 먹으므로 감히 옥체에 가까이 못하겠다 하고 나가는지라.

문제가 탄식하되,

지정(至情)은 부자간 만한 이 없다 하였더니, 자식은 아비의 부럼을 빨지 못하되 등통이 능히 나의 부럼을 빨아주니 등통의 지애(至愛)는 부자간보다 낫다.”

하였으니, 등통의 은총은 가히 짐작하리로다.

황태자 그 말 듣고 가히 등통을 미워하더니 그 후에 문제가 붕어하시고, 황태자가 즉위하니 곳 한경제(漢景帝).

인하여 등통의 죄를 다스릴새 국화(國貨) 위조범으로 몰아서 등통의 재산을 국고에 몰입하고, 등통은 빈 방에 유치(留置)하여 음식을 끊으니, 등통이 과연 굶어 죽으매, 또한 경제 때에 출장입상(出將入相)하여 기세가 한 세상을 흔들던 주아부(周亞夫)도 종리문이 입으로 들어간지라.

경제가 아부의 위엄이 넘어 굉장함을 꺼리어 황실범(皇室犯)으로 죄를 얽어서 옥에 가두니, 아부는 분한을 이기지 못하여 먹지 아니하고 죽으니, 이 두 사람은 부귀가 흔천동지(焮天動地)하였으나 얼굴에 나타는 흠절(欠節)로 인하여 상가(喪家)에 술법(術法) 가운데서 죽었도다.

그러나 또 상서(相書)에 그렇지 아니한 구절이 있으니, 저 사람의 얼굴을 상()보는 것이 저 사람의 마음을 상보는 이만 못하다 하니 이는 어찌 이름이뇨.

가령 상등(上等) 부귀에 상을 타고는 사람이라도 남에게 적악(積惡)을 하면 자기의 복을 감하는 수도 있고, 지극히 흉악한 상을 타고는 사람이라도 심지(心志)가 단정하고 남에게 적선(積善)을 많이 하면 전화위복(轉禍爲福)되는 수도 있으니, 이것은 가위 인정승천(人定勝天) 이요, 상밤이 마치지 못함은 아니니라.

이전 사람의 경력으로 증거를 들어 말할진대, 지나 당나라 시대에 배도(裵度)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역시 종리문이 입으로 들어간지라

어려서부터 집이 가난하여 사방으로 표박(漂迫)하여 다니다가, 향산사라 하는 절에 들어가더니 우연히 그 절 우물곁에서 삼조()() 보대(寶帶) 하나를 주운지라.

배도 생각하되,

이 주운 물건을 내가 이용하면 남의 이익을 덜어서 내게 보탬이니, 어찌 차마 그러한 일을 행하리오.’

드디어 그 곁에 앉아서 물건 잃은 사람 오기를 기다리더니, 거미구(去未久)에 젊은 부인 하나가 울며 와서 말하되,

첩의 늙은 아비가 불행이 옥에 갇히어 있는데, 첩의 집에서 세전(世傳)하는 삼조보대를 옥리(獄吏)에게 바치면 아비의 죄를 속()하여 준다 하옵기로, 그 물건을 가지고 절로 지나가다가 부처님 앞에 축원할 차로 우물에 와서 세수하다가 보대를 빠뜨렸사오니, 누구든지 주운 이 있거든 내어 주시면 늙은 아비를 구하여 내겠노라.”

하는지라.

배도가 흔연히 보대를 내어주니 그 부인이 치사하고 가더라.

그 후는 관상하는 사람이 배도를 보고 놀라 이르되,

()이 상모(相貌)가 변개(變改)되었는지라. 지금은 아사(餓死)()()이 아닌즉 무슨 은덕을 끼친 일이 있느뇨?”

하니, 배도가

아무 일도 없노라.”

대답하니, 상사(相士)가 재삼 질문하는지라.

배도가 향산사에서 삼조 보대를 주인에게 내어 준 일을 말하니 상사가 이르되,

이 일은 곧 남에게 큰 적선이라. 후일에 부귀를 가히 양전(兩全)하리라.”

하더니, 과연 배도가 그 후에 당나라 정승이 되고 팔십 장수를 하였으니, 배도의 평생에 음덕을 끼친 일이 비단 이 일뿐 아니더라.

당나라 헌종(憲宗) 원화(元和) 십삼 년에 배도가 군사를 거느리고 회서(淮西) 폭도(暴徒) 오원제를 쳐서 파하니, 이후로부터 배도의 위엄이 세계의 진동하여 각처의 폭도가 침식(侵蝕)이 되는지라.

헌제가 배도로 하여금 내각 수상을 삼고 그 공을 높이어 진국공(晋國)()을 작()주니라.

배진공(裵晋公)이 내각(內閣) 의자를 점령한 이후로, 당나라가 대치(大治)하여 사방에 일이 없으니, 헌제가 매양 교일(驕溢)하여 정치에 방해된 일을 많이 행하거늘, 배도가 여러 번 상소하되 헌제 듣지 아니하고, 간신 황보박이 배도를 모함하여 혁명당의 영수(領袖)라 지칭하니, 헌제가 도리어 배도를 점점 의심하는지라.

배도가 이후로 입을 봉하고 조정 일을 말 아니 하기로 결정하매, 자연히 울울(鬱鬱) 불락(不樂)하여 자기 사저(私邸)에서 기악(妓樂)으로 매일 소견(消遣)하니, 사방에 부륜수가 배진공을 위로하여 가무와 인물이 당대에 절등(絶等)한 계집이면 서로 값을 아끼기지 아니하고 다투어 구하여 배진공 문하에 바칠 새, 이때에 진주부(晋州府) 만천현(萬泉縣)에 살던 소아(小娥)라 하는 계집아이도 배진공 문하에 올라와 있으니, 배진공은 미처 그 계집아이의 시말을 알지 못하더라.

본래 소아의 성은 황가인데 만천현 황진사의 딸로서 일찍 본 고을 당벽(唐璧)이라 하는 사람과 혼인을 매탁(媒託)하였으나, 그때에 소아의 나이 너무 어리므로 성례치 못하였더니, 그 후로 신랑 될 당벽이 우연히 초사(初仕)로부터 외임(外任)으로 다닐 새, 처음에는 괄주 용종 현위(縣尉), 재임(再任)에 다시 월주 회계승(會稽丞)으로 전근되니 어언간 황소아의 혼사는 점점 늦어 가더라.

그 동안 소아는 자연히 장성하여 색태(色態)가 커갈수록 기묘하도다. 항상 웃는 얼굴은 조안화(朝顔花)가 이슬을 머금어 있고 버들가지에 물오르듯 하는 몸은 형산백옥(荊山白玉)을 깎아 세운 듯한데 겸하여 음률(音律)이 정통하매 황소아의 이름이 일방면()(方面)에 높았더라.

이때에 진주 자사(刺史)가 당대에 일등 가는 미색을 구하니, 진주 자사도 역시 배진공 문하에 바치고자 함이러라.

그 지방 내에서 소아의 색태가 초등(超等)함을 듣고 만천 현령(縣令)에게 촉탁(囑託)하여 소아를 구하라 하니, 만천 현령이 회보(回報)하되,

소아의 자색(姿色)과 가무(歌舞)는 당대에 독보(獨步)이나, 다만 당시 태학사의 딸이라 구할 도리가 없다,”

하거늘, 자사가 만천 현령을 친히 보고 이르되,

세상사 돈이 있으면 귀신을 능히 부리는지라. 내 황금 삼십만으로써 소아의 몸값을 줄 터이니, 만천은 모름지기 수고를 아끼지 말고 이 아이를 구하여 보내라.”

하니, 만천이 상관의 촉탁을 항거하지 못하여 그 후로 소아를 구하기에 급급하나, 마침내 좋은 도리 없는지라. 저간 몇 번 사람을 황진사 집에 보내었다가 황진사의 격절(激切))한 거절을 번번이 당하였더라.

만천 현령이 한 번은 직접으로 황진사 집에 나가서 소아의 일을 의논하더니, 황진사가 그 딸로 일찍 당벽에게 허혼한 일을 갖아 깁히 맹세하매, 현령이 마침내 황진사의 고집함을 보고 근심하는 중, 진주 자사의 독촉이 날로 심하매 마음의 조급함을 이기지 못하여 필경은 절옥투향(竊玉偸香)하는 끝가는 수단을 쓰더라.

 

이날은 청명(晴明) 가절(佳節)이니 황진사집 일행이 삼십 리나 되는 선영에 성묘갈 새, 호올로 소아를 머물러 집에 두었다는 말을 듣고 현령이 친히 건장한 관차(官差) 십여 인을 거느리고 황진사 집 내정에 돌입하여 소아를 붙잡아 교자(轎子)에 실어가니, 황진사 집 노소가 집에 돌아오니 소아 없는지라

일가가 황황망조하여 사방으로 사실(査實)하매, 만천 현령의 겁박함을 입어 지금 진주부에 있다 하거늘, 황진사 즉시 진주부에 들어가서 자사를 보고 전후실정을 고하며 소아를 내어 달라 하다가 필경은 자사의 촉로(蜀路)한 거절을 당하고 망연히 집으로 돌아오니, 만천 현령이 소아의 몸값 삼십만 금을 보내었더라.

차설(且說) 당벽이 희계승이 과만(瓜滿)되매 장차 어느 곳이던지 전근될지라. 이때를 타서 소아의 혼사를 성취(成娶)함이 적당하니 내 황가에 들어가서 친히 의논하리라 하고, 장인 황진사를 찾아가니 황진사가 창연히 눈물을 흘르며 이르되,

()이 한미(寒微)한 가문에 혼사를 매탁(媒託)하미 불행하도다.”

하며, 인하여 규수를 능히 보전치 못하고 진주 자사의 겁박을 당하여 규수로 하여금 배진공 집에 드려보낸 시말을 일장 설명하는지라.

당벽이 이 말을 들으매 분한 마음이 하늘을 찌를 듯하여 쾌쾌(快快)히 황가의 문을 떠나 경사(京師)로 올라가니 당벽의 마음에는 이 길로 올라가서 기어이 이왕 인연을 찾고자 함이러라.

만천현으로부터 경사에 가는 길은 수로(水路)로 통한지라.

당벽이 배에 올라 행한 지 삼 일 만에 더욱 기막힌 일을 당하니, 소아의 몸값 삼십만 금을 비로소 보았더라.

어찌하여 당벽이 그 돈을 지금에 비로소 보았던고.

황진사 집에서 당벽이 떠날 때에 십분 과격한 기색을 두려워하여 소아의 몸값을 직접으로 전하지 못하고, 당벽이 배에 오르기 전에 돈을 배에 실리고 뱃사람을 신칙(申飭)하여 떠난 지 수일 후에 당벽에게 통지하라 함이러라.

당벽이 그 돈을 보매 심화가 다시 만장이나 높아서 종인(從人)에게 이르되,

내 맹세코 황가 여자를 찾아 안내를 삼은 후에 저 돈은 본처(本處)로 도로 보낼 터이니, 저 돈을 온전히 보관하라.”

하고, 인하여 경사에 도착하여 배진공의 집 가까이 여관을 정하고 회계승 역임한 문부(文簿)를 내부(內府)에 올린 후 여관에 돌아와 날마다 배진공 집 소식을 탐문하나, 용이히 소개(紹介)를 얻지 못하니, 어찌하여 배진공 집 소식이 산같이 막히고 바다같이 깊었던고.

대저 당나라는 전제(專制) 정치이라. 황실로부터 인민에 이르기까지 계급을 따라 압제(壓制)로 구속된지라. 그러함으로 대신 지위에 있는 사람이면 사혐(私嫌)으로 인하여 감히 송사(訟事)하지 못하고, 사저에도 혼금(閽禁)이 지엄하여 외인이 임의로 출입을 못하는 연고이러라.

당벽은 다만 분완(憤惋)한 마음을 품고 신산(辛酸)한 세월을 여관에서 지내더니, 내부에서 당벽의 역임 이래로 결점이 없음을 보고 호주 참군(參軍)으로 서임(敍任)하니, 당벽이 이날 사령서를 받고 당일에 행리(行李)를 수습하여 배를 잡아타고 호주로 향할 새, 여러 날 만에 동진 어구에 이르러 배를 대이고 밤을 지내더니, 야반에 홀연 강도 십여 명이 벌떼같이 대들어 당벽의 일행을 결박하고 행리를 낱낱이 빼앗아가니, 이 강도는 당벽이 소아의 몸값 삼십만 금을 띠고 가는 것을 아는 자가 경사로부터 뒤를 쫓아옴이러라.

당벽의 일행이 이튿날 살펴보니 호주로 가는 문부가 한 개도 남아 있지 아니하거늘, 당벽이 할 일 없어 경사로 회정(回程)하여 내부에 그 사유를 보고하니, 내부에서 당벽의 도난의 증거가 충분치 못하다 하여 호주 녹사를 인하여 사면(辭免)시키는지라.

당벽이 어찌할 수 없어 이왕 유련(留連)하던 여관으로 돌아오니, 여비가 핍절(乏絶)되어 연일 두류(逗留)하며 자기의 신세 낙척(落拓)함을 한탄하고, 일변으로 소아의 일을 깊이 원망하여 주주야야에 눈물 마를 때가 없더니, 하루 저녁에는 밤이 깊은 후에 평복(平服)한 사람 하나가 들어와서 당벽을 대하여 성명과 본적을 물으며 힐문(詰問)하되,

무슨 직업이 있어 여관에 들어와 여러 날 두류하느뇨?”

당벽이 형사(刑事)인가 의심하여 대답이 혹 외착(外錯)될까 겁내므로, 자기의 유련하는 사유를 자세히 말하니 그 사람이 이르되,

공이 만일 지금에 낙척하여 본직을 회복코자 할진대, 어찌 배진공을 찾아서 호원(呼冤)하지 아니하느뇨? 배진공은 당대에 관후(寬厚)한 대신이라. 낙척한 사람을 구원하는 풍정(風情)이 적지 아니하거늘 공은 일찍 듣지 못하였느뇨?”

당벽이 산연(潸然)히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흔들어 이르되,

나 듣는 데는 배진공이라는 말을 내지 말지어다.”

그 사람이 놀라 이르되,

공이 배진공과 무슨 혐의(嫌疑) 있느뇨?”

하니, 당벽이 즐기어 대답하지 아니하니, 그 사람이 재삼 근간(懃懇)히 묻는지라.

당벽이 그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니 나이 반백지년(半百)()()이요, 언어(言語) 동정(動靜)이 위대한 장자(長者)이라.

이에 좋은 사람으로 짐작하고 전후 실정을 들어 말하되,

일찍이 만천현 황진사의 딸과 결혼하고 자기는 환로(宦路)에 분주하여 피차에 장성하기에 미치도록 성혼치 못하였더니, 당시 배진공이 여악(女樂)을 좋아할 새, 진주 자사가 배진공의 뜻을 아첨하기 위하여 지방 내의 일등 되는 미색을 구할 새, 만천현 황진사의 딸이 자색 있음을 듣고 만천 현령으로 하여금 그 여자를 겁칙하여 배진공 문하에 보내니, 지금 그 여자 배진공 집에 있는지라. 나로 하여금 천정한 연분을 끊게 함은 배진공이 직접으로 행한 일은 아니나, 사람을 죽이매 인()과 정()이 어찌 다르리오. 내 평생에 배진공을 깊이 원망하노라.”

하니, 그 사람이 듣기를 다하고 추연(惆然)히 이르되,

나는 곧 배진공과 친척의 의() 있음으로 매일 배진공의 집 내외를 출입하니, 내 공을 위하여 황성녀를 찾아낼지라. 황성녀의 이름은 무엇인고?”

하니, 당벽이 대답하되,

그 여자의 이름은 소아라 부르나이다.”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가며 다시 부탁하되,

내일 이때이면 필연 배진공 집으로부터 공에게 무슨 통지 있으리라.”

하더라.

당벽이 그 사람의 말을 믿지 아니하더니, 이튿날 다시 생각한즉,

만약 그 사람이 과연 배진공과 친척의 의 있으면 배진공으로 하여금 원망을 품은 나를 도리어 해할 염려 없지 아니하도다.’

하며, 날이 다하도록 굴러 근심하더니 밤이 든 후에 사오 명 공차(公差)가 여관에 이르러 만천현 당벽을 분분히 찾는지라.

당벽이 의심하여 대답하지 아니하니, 공차가 여관 주인을 불러 말하되,

당벽이라 하는 사람이 누구이뇨? 우리는 배진공댁 분부로 이 사람을 보러 왔노라.”

하며, 주인을 호령하니 주인이 겁내어 당벽을 가리키매, 공차가 당벽을 붙잡아서 배진공 문하로 풍우같이 몰아가는지라.

당벽이 황망히 공차를 따라서 배진공 사저에 이르러 뜰 앞에 서니, 청상(廳上)에서 배진공이 당벽을 불러 오르라 하거늘, 당벽이 황송함을 칭사(稱辭)하며 올라가니 배진공 좌우에 모신 사람이 명하여 앉으라 하거늘, 인하여 꿇어앉으니 배진공이 당벽을 보고 이르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눈을 들어 나를 보라.”

하는지라.

당벽이 배진공을 한번 보매 어젯밤 여관에서 한만(閑漫)히 수작하던 평복한 사람이라. 당벽이 망지소조(罔知所措)하여 머리를 숙이고 어젯밤에 언어의 촉범(觸犯)됨을 연하여 사죄하더라.

배진공이 어찌하여 어젯밤에 당벽을 여관에서 맛나 보았던고.

배진공은 당시에 일품 재상으로 있으매 우국애민하는 의무를 부담한지라. 주야에 마음과 몸을 게을리 못하여 밤이면 매양 평복으로 도성 내외를 순행(巡行)하며 민정을 살피더니 우연히 당벽의 여관에 들어가서 당벽의 시말을 듣고 사저로 들어와서 그 이튿날 소아를 불러보니 과연 절대가인이라.

친히 소아의 내력을 물은즉 당벽의 말과 일호차착(一毫差錯)이 없거늘, 배진공이 다시 묻되,

너로 하여금 전에 정한 낭재(郎材)에게 도로 보내어 주면 너의 마음이 어떠할꼬?”

하니, 소아 그 말을 듣더니 쌍루(雙淚) 종행(從行)하며 목이 메여 대답하되,

소첩의 옅은 목숨은 상공에게 달린지라. 보내고 아니 보내는 것이 상공 처분에 있사오니 어찌 소첩에게 물으시나이까?”

하니, 배진공이 소아의 경황을 보고 어제 당벽의 정상(情狀)을 생각하매, 마음에 스스로 측은함을 이기지 못하여 다시 소아에게 이르되,

너의 낭재를 오늘 맛나보게 하리라.”

하고 그날 밤에 당벽을 불러 들이니라.

당벽이 연하여 사죄함을 보고 배진공이 당벽에게 이르되,

내 지방 수령의 궤송(饋送)하는 물품을 일찍 막지 아니하였다가 군으로 하여금 거의 백년가약(百年)(佳約)을 어기게 되었으니, 이것이 모두 노부(老夫)의 허물이라. 내 군의 부부를 위하여 혼구를 담당하고 혼인을 주장(主掌)하고자 하노니, 오늘로 교례함을 사양하지 말라.”

하며, 인하여 자기 사저에 교배청을 배설(排設)하더니 거 미구에 안으로부터 사등롱(紗燈籠)이 쌍으로 나오며 시비 등이 신부의 복색(服色)한 미인 하나를 옹위하고 나오니, 이 미인이 곧 황진사의 딸 소아러라.

당벽이 맞아서 교배(交拜)한 후에 동방화촉에 서로 만나서 피차 그리우던 회포를 서로 말하니 그 깊고 얕은 정은 가히 짐작하리로다.

이튿날 배진공이 내부에 통지하여 당벽의 역임한 문부를 조사한즉 결점이 없는지라. 당벽으로 호주 참군을 환림하여 제삼일 만에 부임하게 할새, 당벽이 떠나기를 임하여 배진공 앞에 나가서 백배 치은하고 소아로 함께 길에 오르니 교자 뒤에 혼구가 수없이 따르는지라.

당벽이 어찌한 연고를 아지 못하더니 만천현은 곧 호주 가는 길가인 고로, 만천현에 도달하여 일행을 다리고 황진사의 집으로 들어가니 황진사의 부처 뜻밖에 잃었던 딸과 의절한 사위를 영광으로 다시 만나니 그 기쁜 마음이 장차 어떠하다 하리오.

당벽이 비로소 행리를 안돈(安頓)하고 뒤에 따르던 혼구를 상고(相考)하니 여러 바리(鉢里)가 모두 금은(金銀) 수단(繡緞)인데 이것은 배진공이 스스로 담당한 혼수러라.

당벽이 황진사의 부처와 함께 호주에 부임한 후에 배진공의 은혜를 깊이 감동하여 침향목(沈香木)으로 배진공의 일위 화상(畫像)을 만들어 놓고 수복(壽福)이 연면(連綿)하기를 평생에 축원하였다 하니, 당벽의 일도 배진공의 음덕(陰德)을 쌓은 일건사一件)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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