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비판
가. 현실인식
- 2016 중앙대 모의
[문제 3] 제시문 (사)에 나타난 윤 직원 영감의 현실 인식이 형성된 과정을 기술하고, 이러한 인식의 문제점을 제시문 (가)에 근거하여 비판하시오. [20점, 400~420자]
(가) 인간의 감각적 경험은 지적 경험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순수한 감각적 경험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책 한 권 읽지 못한 문맹자라 해도 그 경험적 영역이 순수하게 남아 있지 않고, 사회의 지배적 통념이 경험을 규정하게 된다. 감각적 경험이 지적 경험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은, 그 감각적 경험이 가지는 한계를 지적 경험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중국 여행을 하면서 만리장성을 구경했다고 하자. 그는 말로만 듣던 만리장성의 위용을 눈으로 확인했으며, 그것을 보면서 중국인들 특유의 큰 스케일과 중국 문명의 위대함에 새삼 놀랐다. 그런 그가 나중에 어떤 역사책을 통해 만리장성이 수많은 힘없는 백성들을 죽여 가며 만들어진 슬픈 역사의 산물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며, 지적 경험으로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 역사 인식은 감각적으로만 받아들였던 만리장성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그는 이제 만리장성을 문명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야만의 산물에 가깝다고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감각적 경험은 사회, 역사적인 의미 속에서 새롭게 규정된다. 사회,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면 과거의 경험은 다르게 인식되는 것이다.
(사) 윤직원 영감(그때 당시는 두꺼비같이 생겼대서 윤두꺼비로 불리어지던 윤두섭) 그는 어려서부터 취리에 눈이 밝았고, 약관에는 벌써 그의 선친을 도와 가며 그 큰 살림을 곧잘 휘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1903년 계묘년부터는 고스란히 물려받은 삼천 석 거리를 가지고, 이래 삼십여 년 동안 착실히 가산을 늘려 왔습니다.
하기야 그 양대(兩代)가, 그 어둔 시절에 그처럼 치산을 하느라고[시절이 어두우니까 체계변이며 장리변의 이문이 숫지고, 또 공문서(空文書:공토지)가 수두룩해서 가산 늘리기가 좋았던 한편으로 말입니다.] 욕심 사나운 수령한테 걸려들어 명색 없이 잡혀 갇혀서는, 형장을 맞아 가며 토색질을 당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요, 화적의 총부리 앞에 목숨을 내걸고 서서 재물을 약탈당하기도 부지기수요, 그러다가 말대가리 윤용규는 마침내 한 패의 화적의 손에 비명의 죽음까지 한 것인즉슨, 일변 생각하면 피로 낙관을 친 치산이지, 녹록한 재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윤직원 영감은 그때 일을 생각하면 시방도 가슴이 뭉클하고, 그의 선친이 무참히 죽어 넘어진 시체하며, 곡식이 들이쌓인 노적과 곳간이 불에 활활 타던 광경이 눈앞에 선연히 밟히곤 합니다.
윤두꺼비는 피에 물들어 참혹히 죽어 넘어진 부친의 시체를 안고 땅을 치면서,
“이놈의 세상이 어느 날에 망하려느냐!”
고 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울음을 진정하고는, 불끈 일어서 이를 부드득 갈면서,
“오냐,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
고 부르짖었습니다. 이 또한 웅장한 절규이었습니다. 아울러, 위대한 선언이었고요.
윤직원 영감이 젊은 윤두꺼비 적에 겪던 경난의 한 토막이 대개 그러했습니다.
그러니, 그러한 고난과 풍파 속에서 모아 마침내는 피까지 적신 재물이니, 그런 일을 생각해서라도 오늘날 윤직원 영감이 단 한 푼을 쓰재도 벌벌 떠는 것도 일변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돈을 모으는 데 무얼 어떻게 해서 모았다는 거야 윤직원 영감으로는 상관할 바 아닙니다. 사실 착취라는 문자를 가져다가 붙이려고 하면, 윤직원 영감은 거 웬 소리냐고 훌훌 뛸 겝니다.
다아 참, 내가 부지런하고 또 시운이 뻗쳐서 부자가 되었지, 작인이며 체계돈 쓴 사람이며 장릿벼 얻어다 먹은 사람이며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서 말입니다.
바스티유 함락과는 항렬이 스스로 다르기는 하지만, 아무튼 윤직원 영감은 그처럼 육친의 피로써 물들인 재산더미 위에 올라앉아 옛날 그다지도 수난 많던 시절과는 딴판이요 도무지 태평한 이 시절을 생각하면 안심되고 만족한 웃음이 절로 솟아날 때가 많습니다.
“참 장헌 노릇이여!...... 아 이 사람아 글씨, 시방 세상으 누가 무엇이 그리 답답히여서 그 노릇을 허구 있겄넝가......? 자아 보소. 관리허며 순사를 우리 죄선으루 많이 내보내서, 그 숭악헌 부랑당놈들을 말끔 소탕시켜 주구, 그래서 양민덜이 그 덕에 편히 살지를 않넝가? 그러구 또, 이번에 그런 전쟁을 히여서 그 못된 놈의 사회주의를 막어내 주니, 원 그렇게 고맙구 그렇게 장헐 디가 어디 있담 말잉가...... 어 참, 끔찍이두 고맙구 장헌 노릇이네!...... 게 여보소, 이번 쌈에 일본은 갈디읎이 이기기넌 이기렷대잉?”
“그야 여부 없죠! 일본이 이기구말구요!”
“그럴 것이네 워니니, 일본이 부국갱병허기루 천하제일이라넌디...... 어 참, 속이 다 후련허다.”
(중략)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오죽이나......”
윤직원 영감은 팔을 부르걷은 주먹으로 방바닥을 땅 치면서 성난 황소가 영각을 하듯 고함을 지릅니다.
“화적패가 있너냐아? 부랑당 같은 수령(守令)들이 있더냐?...... 재산이 있대야 도적놈의 것이요, 목숨은 파리 목숨 같던 말세넌 다 지내가고오......, 자 부아라, 거리거리 순사요, 골골마다 공명헌 정사,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남은 수십만 명 동병을 히여서, 우리 조선놈 보호히여 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으응?...... 제 것 지니고 앉아서 편안허게 살 태평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구 허는 것이여, 태평천하!......”
나. 동양과 서양
- 2016 이화여대 모의
[문제 1] : 제시문 [가]의 관점에서, 제시문 [나]에 나타난 매카트니 사절단 및 중국 측의 입장과 제시문 [다]에 나타난 서구인의 입장을 각각 비판하시오. [30점]
[가]
허자가 질문했다. “공자가 『춘추』를 지으면서 중국을 안으로 삼고, 중국 사방의 오랑캐족인 동이·서융·남만·북적을 밖으로 하였습니다. 무릇 중국과 오랑캐의 구별이 이와 같이 엄격한데, 지금 선생은 오랑캐의 운수가 성한 것을 사람이 부른 것이고 하늘의 때가 가져온 필연이라고 하니 옳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실옹이 대답했다. “하늘은 낳고 땅은 길러주니, 무릇 혈기가 있는 것은 다 같은 사람이다. 여럿 중에 뛰어나 한 나라를 맡아 다스리는 자는 모두 임금이며, 문을 여러 겹 만들고 성 바깥에 못을 깊이 파서 강토를 조심하여 지키는 것은 다 같은 국가이다. 은나라 때 머리에 쓰던 관인 장보(章甫)나, 주나라의 갓인 위모(委帽)나, 오랑캐가 몸에 그림을 그리는 문신(文身)이나, 남만에서 이마에 그림을 그리는 조제(雕題)라는 풍속이나 모두 다 같이 자기들의 풍속인 것이다. 하늘에서 본다면 어찌 안과 밖의 구별이 있겠느냐? 그러니 각각 자기 나라 사람끼리 서로 사랑하고, 자기 임금을 높이며, 자기 나라를 지키고, 자기 풍속을 좋게 여기는 것은 중국이나 오랑캐나 마찬가지다.”
[나] 매카트니 사절단은 그 세세한 목적을 하나도 성취하지 못했다. 양측의 인식이 너무나도 큰 간극을 보였기 때문이다. 매카트니는 산업화의 혜택을 과시하려는 의도를 지녔지만, 청나라 황제는 그의 선물을 그저 조공쯤으로만 여겼다. 영국의 특사는 중국이 기술 문명의 진보에서 속절없이 뒤쳐져 있음을 관리들이 깨닫고, 그런 후진성을 면하기 위해 영국과 특별한 관계를 추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막상 중국은 그들을 천자의 특별한 은덕을 바라는 거만하고 무지한 야만족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첫 번째 불협화음은 매카트니 일행이 베이징 북동부의 하계 수도인 열하를 향하고 있을 때 드러났다. 그들은 중국 범선에다 풍성한 선물이며 맛있는 음식들을 가득 싣고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고 있었는데, 깃발에는 ‘중국 황제에게 바칠 조공을 운반하는 영국 대사’라고 적혀 있었다. 베이징에 당도할 즈음 사절단을 책임진 상급 관리에 의해 시작된 협상은 양측의 인식 차이를 한층 더 날카롭게 부각시켰다. 문제가 된 것은 매카트니가 황제에게 ‘고두(叩頭)’를 할 것인가, 아니면 본인의 주장대로 한쪽 무릎을 굽히는 영국식 관례에 따라 인사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중국 측은 “나라마다 의복의 관습이 다르지 않겠는가”라는 식으로 우회적인 토론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황제께서 대중 앞에 납실 때마다 모든 사람이 해야 하는 무릎 꿇기와 엎드리기를 훨씬 더 수월하게 해주기 때문에 결국 중국식 의복이 더 우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 영국 사절단도 존엄하신 황제 폐하를 알현하기 전에 무릎 죔쇠라든지 양말대님 따위를 훨훨 벗어던지는 편이 한층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해 매카트니는 이렇게 맞받아쳤다. “제가 고국의 군주에게 드리는 것과 똑같은 경의의 표현을 황제 폐하께 드린다면, 폐하께서도 더욱 흡족해하실 것 같습니다.”
[다] 서구인들은 세계 지도에서 5, 6개 대륙들을 구분하였다. 아프리카, 아시아, 북미와 남미, 그리고 유럽이다. 가끔 순진하게도 유럽이 다른 대륙들에 비해 얼마나 작은지 언급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정치적 논의, 통계적 분류, 혹은 역사적 비교에서 이러한 구분들은 그것이 마치 자연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되풀이 되어 나타난다. 유럽의 ‘세계 지도집’들을 보면 유럽 각 국가들의 지도가 자세하게 실려 있고, 세계의 나머지 부분들은 끝 부분의 몇 쪽에 몰려 있다. 게다가 세계 전체를 보여줄 목적으로 선택되는 지도조차도 인류를 바라보는 이런 시각을 강화하는 데 적절한 것이다. 메르카토르 세계 지도에는 유럽이 상단부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위대한 문화권들보다 훨씬 크게 보인다. 이 주요 문화권들은 대개 북위 40도 이남에 위치하고 유럽의 거의 대부분은 그보다 북쪽에 위치하는데, 메르카토르 투영법은 북위 40도부터 사물의 크기를 크게 과장하기 시작한다.
크기의 비례에 대한 감각을 제대로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하는 세계 지도에서마저 유럽에는 많은 지명을 쓸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한 반면, 훨씬 더 작은 축척으로 그려진 인도나 중국 같은 많은 인구가 사는 중심지에는 몇몇 주요한 지명만 표시된다. 비록 면적과 모양을 훨씬 덜 왜곡시키며 면적을 동일한 비례로 보여주는 투영법들이 개발된 지 오래되었지만 서구인들이 자신에게 그토록 기분 좋은 투영법만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쉬운 일이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항해에만 종사한다는 듯이 메르카토르 지도는 각도가 정확하게 맞으며 이것이 항해자들에게 편리하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해 설명한다. 그리고 지도집이나 벽걸이 지도, 참고서, 신문에서 세계 전체가 어떻게 보이는지 보려고 할 때 서구인들의 선입견은 권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충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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