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텍스트/소설과 산문

유종호의 수필 '고향'

New-Mountain(새뫼) 2023. 6. 19.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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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유종호

 

 

  옛적의 유대민족 사이에서는 성년이 된 자식을 짝을 지워 집에서 쫓아내는 풍습이 있었다. 협착한 고향과 아버지의 터전을 벗어나 독립하여 타관에 가서 삶의 새 가능성을 열어보라는 관습의 명령이었다. 이렇게 자식을 떠나보냄으로써 좁은 터전에서 대가족이 아웅다웅하는 볼품없는 정경을 예방할 수 있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낙원 상실 얘기의 원천을 바로 이러한 유대민족의 옛 풍습에서 찾는 학자들도 있다. 에덴동산은 그러니까 사람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의 이름이었다.

  이러한 인류학적 해석이 얼마만한 학문적 동의를 얻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들이 구상하는 이상적인 낙원이나 유토피아가 어린 시절의 세계 상봉이나 행복 체험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바닷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 구상하는 낙원은 대개 바다를 끼고 있거나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있다. 내륙지방에서 자란 사람은 산을 뒤로 하고 앞쪽으로 너른 들판과 강을 끼고 있는 낙원을 구상한다. 무릉도원(武陵桃園) 얘기를 전하는 도연명(陶淵明)이 복사꽃 지천으로 피는 마음의 복숭아나무집 아들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보는 것은 결코 부질없는 공상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달새도 믿지 않고 꽃나무도 없는 삭막한 아파트 단지에서 자란 어린이가 뒷날 구상한 낙원을 상상해 보다는 것은 섬뜩한 일이다. 자연이 없는 인공(人工) 낙원은 편리할는지는 몰라도 아무래도 마음의 고향은 되지 못할 것 같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사실은 내 자신이 시골 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낙원에서 만발하는 봄꽃은 살구꽃이다. 우리가 구차했던 시절, 고향의 4월을 그나마도 살만하게 했던 것은 여기저기 뭉게구름처럼 뎅그랗게 피어 있던 그 살구꽃이었다. 그리고 그 살구나무 아래 섰을 때 온통 머리를 취하게 했던 꿀벌소리였다. 살구꽃이 없는 낙원은 내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낙원처럼 벌써 ‘낙원’이 아니리라.

  내 낙원의 길가에는 푸른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것은 플라타너스도 아니고 은행나무도 아니다. 현사시나무는 더더구나 아니다. 그것은 바람에 나부끼는 키 큰 미루나무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재목으로 쓸모없다 치더라도 그것은 상관이 없다. 누가 뭐라건 내 낙원의 가로수는 단연코 미루나무이다. 집을 나서서 무작정 표표히 길을 떠나고 싶었던 일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그때 남북으로 뻗어 있는 신작로에서 어서 오라고 이파리를 흔든 것이 미루나무였다. 미루나무는 나그네의 훌훌함과 설움을 아는 고향의 바람잡이였다. 고향마을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내 낙원에는 또 하루갈이 수수밭이 있다. 그리고 그 밭둑에는 강낭콩이 심어져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감자밭이 보인다. 어떤 동요 시인이 노래한 감자꽃이 피어 있는 정든 감자밭이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이 동요가 주는 감동을 도회에서 자란 사람들은 깨닫지 못할 것이다. 지주 꽃 핀 것을 펴보면 으례히 자주 감자였다는 사실이 주는 놀라움을 체험하지 못해 본 사람은 이 소박한 동요가 안겨주는 경이(驚異)의 재경험을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동요는 또 모든 자연현상의 세밀한 관찰을 권고하는 놀라움에의 초대이기도 하다.

  수확의 즐거움은 누구나 얘기해서 별 뜻 없는 말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감자 캐기는 수확화의 즐거움을 알려주는 모범사례일 것이다. 호미로 감자알을 캐는 것은 일이 아니라 차라리 이었다. 더는 나오지 않으려니 하고 호미질을 하다 보면 감자알은 또 나오게 마련이다. 이제는 정말 더 안 나오려니 하고 짐짓 호미질을 했을 때 신(神)의 마지막 선물처럼 홀연히 드러나는 감자알의 극복, 그 후 우리는 삶 속에서 그러한 가외의 행운을 영 받아보지 못하고 말았다. 어디엔가 우리들의 낙원이 있다면 그곳에서 일하기가 감자캐기처럼 놀이가 되어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한 뜻에서 감자는 우리들의 낙원의 양식이다.

  나의 낙원에는 말할 것도 없이 새소리가 흔하다. 종달새라고 하기보다 노고지리라고 적는 것이 더 어울리는 저 초봄새의 지저귐이 떠오른다.

 

  보리 이삭 돋아나면

  종달새 간다지

  떠나는 그 날에도

  보리 피리 불어 주마.

 

보리밭 가에서 이런 노래를 불렀던 시절이 다시 올 리는 없다. 다시 돌려준다 하더라도 우리 편에서 받아들일지는 의문이다. 험난한 세월이 안겨준 쓴잔의 뒷맛이 아직도 혀끝에 남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초봄의 노고지리와 초여름의 뻐꾸기, 그들 없이 나의 낙원은 완결되지 못한다. 그리고 또 있다. 소리보다도 모양으로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장식했던 여름철의 황새와 가을날의 기러기 떼, 이들이 낙원을 떠난 지는 참으로 오래되었다.

  나의 낙원에는 또 강이 흐르고 모래톱이 있다. 모래톱에서 만리성(萬里城)을 쌓은 적이 있다.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쌓으며 헐며 긴 만리성을 쌓았다. 또 강가에서 팔매질을 하였다. 멀리가는 것이 미래의 행복의 지표(指標)인 양 던지고 또 던지곤 하였다. 회수할 길 없는 팔매돌과 무너진 지 오래인 성벽을 나의 낙원은 지금껏 간수하고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나의 낙원은 너무나 초라하고 너무나 가난하다. 냉장고가 없고 자동차가 없고 아스팔트가 없다. 있는 것은 푸른 하늘과 청명한 나날과 맑은 공기와 구차한 이웃들뿐이다. 노고지리 뜨는 보리밭과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몸이 기울어진 미루나무와 나룻배가 떠 있는 강물이 있을 뿐이다. 낙원의 구상은 아무래도 고향과 어린 시절의 재구성임을 면치 못하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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