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녹은 자리에
긴 겨울 꽤나 곤두박질쳤던 기온과, 자주 그리고 많이 내렸던 눈이 함께 이뤄낸 길거리 눈무더기들이 비로소 녹고 있다. 아예 봄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도심의 한 풍경을 당당하게 지배하고 있던 놈들이다. 하지만 시간은 시간이라.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저들도 도로위에 약간의 흔적을 남겨둔 채로 자신들의 자리를 내어주며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늦은 밤 거리를 나서 일부러 녹아가는 눈무더기 위로 발자국을 찍어 보았다. 질퍽거리는 곳만 골라 발을 디뎌보는 유아기적인 행위일 수도 있으나, 그것보다는 정말 나를 힘들게 하였던 지난 겨울에 대한 내가 할 수 있는 초보적인 보복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발자국 하나 찍으며 이놈 그래 봄은 오지 않느냐, 결국 너는 사라질 수밖에는 없지 않느냐 하고 속좁은 정복감에 사로잡히는 것인데,
그런데 발 밑에서 밟혀지는 감각이 예전과는 사뭇 다름을 느낀다. 뽀드득하는 소리도 나지 않을 뿐더러,푹신한 느낌도 아니다. 흰 색이야 아예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무엇일까. 사라지기 전에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려는 마지막 흔적을 그렇게 낯설은 느낌으로 남겨두려는 것일까. 그래서 다른 느낌인 것인가. 머리가 굽혀진다. 정체를 찾기 위함이다.
그래서 확인하는 발 밑에는,
반이나마 눈이 녹은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담배 꽁초 무더기와, 귤 껍질과, 아직도 대통령 선거 전임을 보여주는 신문들과, 깨진 보도블럭과, 그리고 어디에서 묻혀왔을지 모를 흙들과... 그냥 쓰레기들이다.
눈이 내리면서 눈 속에 오롯하게 갇혀졌을 듯한 문명의 모든 찌끼들이 급강하한 기온 덕에 부패라는 것을 모른 채 냉동되었다가, 다시 하나 둘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도 빗자루와 넉가래 덕분에 한 데 모였다가 녹아내리는 탓에 흔히 보게 되는 쓰레기들보다도 더 많이 말이다.
흔히 텔레비전에서는 이렇게 눈이 녹으며 봄이 올 때에는, 눈이 녹은 자리에서 파릇하게 싹을 드러내는 보리를 보여준다. 새 계절의 경이와 생명력의 강인함을 확인시키며, 지금은 춥고 어렵지만, 희망의 시간이 머지 않았으므로 견뎌보라는 다분히 공익적인 메시지이다. 하지만 너무나도 상투적인 표현처럼 이상과 현실은 다른 것이다. 그 다름을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뜻하지 않았던 겨울은 깨끗하지 않은 봄이 오게 되어 끝이 난다. 눈이 더 녹으면, 얼마나 지저분한 더러움이 드러나게 될 것인가. 그렇게 봄은 우리가 추위 때문에 잊고 살았던 세상의 이곳저곳의 더러움을 새롭게 확인하게 되는 계절일지도 모른다. 기대했지만, 그 자리를 실망으로 채우게 되는 계절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겨우내 쌓여있던 눈무더기가 녹아내리는 지금이 좋은 것은 숨길 수 없다. 드러나는 쓰레기야 누군가가 깨끗하게 쓸어주겠지. 새잎나고 봄꽃피면 감추어지겠지. 아니 오는 여름 꽤 많이 내려질 빗줄기에 다 쓸려 내려가겠지. 그러니까 전부 드러나지 않은 더러움은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문제는 지금의 추위일 뿐이다. 사람들은 그런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왔다.
이제 다시 귀가한다. 추위를 막던 패딩을 벗고, 발바닥에 묻혀온 쓰레기를 털으며, 추위도 없고 쓰레기도 없는 곳으로 내 몸을 밀어넣은 것이다. 다만 헛웃음으로 생각해보는 것이 하나 있다. 이 공간에 등장한 나는 처음부터 없었다가 새롭게 생겨난 존재가 아닐진대, 감추어졌다가 드러나는 것인데..... 그러면 나는 보리새싹일까 담배꽁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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