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와 자작소설/시; 14년 이후

문서 세단기 옆에서

New-Mountain(새뫼) 2013. 2. 1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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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갈으며


잔뜩 서류 뭉치를 쌓아놓고 한장 한장 

세단기 속에 밀어 넣는다. 갈아 없애기 위해서이다.

색은 바래지 않았어도 이미 묵은 종이들이다.

얼마간의 돈이 들고 나고 한 기록들이거나

누구의 성적이 오르거나 내리거나 한 흔적들이거나

지루한 회의 끝 붉게 적어두었던 단상이나 낙서 같은 것들.

그리고 어떤 날을 꼬박꼬박 또 어떤 날은 

듬성듬성 그렇게 한 해를 기록했던 수첩 역시 

가늘고 짧은 종이 조각의 뭉치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먼지만을 남기고 아예 없었던 모습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한장 두장 넣다보면 결국 남은 것은 없을 것이다.

마지막 한 장 마저 밀어넣으면, 한 해가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이렇게 버려질 갈려질 

수많은 종이 조각을 만들어내기 위해

나의 지난 한 해는 겉으로는 치열해 보였지 

정작은 남길 것 없는 시간을 향해 줄달음쳐 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옛 시간들이 부끄러원

모두다 세단기 안 톱니바퀴 안으로 밀어 넣는 것이라고.

그렇게 모두 훌훌 지난 일을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친 기계음. 너무 많이 넣었다 보다. 

종이 뭉치가 내려가다 멈추었다. 아직도 잊혀져야 할 일들이 남아 있는데,

종이는 반 남아 들어가다 다시 거꾸로 튀어 나온다.

무엇이었을까. 지난 어느 여름의 지극히도 사적인 흔적이 거기 있다.

내일은 바닷가에 가 있을 거다. 하지만 가려했던 바닷가는 이미 

기계 속에서 갈려진 후이다. 그 때 그 바닷가에 가기는 했었는가

하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우리 기억의 한쪽을 남기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은 버려야만 하는 너무나도 당연한 논리, 아니

쓸모 있는 것이 버려지는 자리에 헛된 것이 생겨나는 논리 

그렇기에 종이는 갈아버렸지만, 정작 갈 것은 갈지 못했다는 

아쉬움만 남았다. 풀풀 남은 먼지 사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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