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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의 한문소설 '엄처사전' 전문, 원문과 주해

New-Mountain(새뫼) 2020. 12. 7.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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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許筠)의  엄처사전(嚴處士傳)

 

주해  신 영 산

 

 

嚴處士名忠貞, 江陵人也. 父早卒, 家甚貧, 躬薪水自給.

養其母極孝, 晨夕不離側. 母稍恙則不解帶寢, 手調膳以進.

母嗜山雀, 結網膠竿, 必獲以供之.

엄처사명충정 강릉인야 부조졸 가심빈 궁신수자급

양기모극효 신석불리측 모초양칙불해대침 수조선이진

모기산작 결망교간 필획이공지

 

엄처사(嚴處士)는 이름이 충정(忠貞)으로 강릉(江陵) 사람이었다.

부친이 일찍 돌아가셨는데, 집안이 무척 가난하여, 몸소 땔감과 먹을 것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모친을 봉양하는 데 지극한 효성을 다하여, 새벽이나 저녁에도 곁을 떠나지도 않았다. 모친이 조금만 편찮으시면 마음 편하게 잠자리에 들지도 않았으며, 손수 음식을 만들어 드시게 하였다.

모친이 산작(山雀) 고기를 즐기시자, 그물을 짜고 간짓대에 갖풀을 붙여서라도, 기필코 잡아다가 공양하였다.

 

其母勸令學取第, 益孜孜着力於問學.

爲詩賦甚古, 屢擢鄕解, 得司馬以榮之.

於書無所不通, 而尤遂於易中庸. 理致超詣, 所著文墨, 與河洛相契.

기모권령학취제 익자자착력어문학

위시부심고 누탁향해 득사마이영지

어서무소불통 이우수어역중용 이치초예 소저문묵 여하낙상계

 

처사의 모친이 글을 배워 과거를 보도록 권하자, 더욱 열심히 글을 배우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시부(詩賦)가 깊고 두터워서, 여러 번 향시(鄕試)에 뽑혔고,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모친을 영화롭게 하기도 했다.

책이라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더욱 ≪주역(周易)≫과 ≪중용(中庸)≫에 깊이 파고들었다. 글을 깨우치는 이치가 높고도 멀어, 저술한 글들이 하도낙서(河圖洛書)와 서로 부합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母病殆, 以身禱於天.

不獲祜, 水漿不御數旬, 杖而起. 三年廬啜粥.

制訖 朋友勸應擧.

모병태 이신도어천

불획호 수장불어수순 장이기 삼년려철죽

제흘 붕우권응거

 

모친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자신의 몸으로 대신 모친을 살려 주기를 하늘에 기도하였다. 하지만, 회복하지 못하자, 여러 날 동안 물도 마시지 않아, 지팡이를 짚어야 일어날 정도였다. 삼 년간 여묘(廬墓)를 살면서도 죽만 마셨다.

상(喪)을 모두 마치자, 벗들이 과거에 응하기를 권했다.

 

處士泣曰 : “吾爲老母也. 今奚赴爲, 身榮而母不享. 吾不忍是.”

悲咽不止, 人莫敢更言.

晩年, 移居羽溪縣. 擇山水幽絶處, 構茆舍 若將終身焉. 窮乏不自聊, 晏如也.

처사읍왈 오위노모야 금해부위 신영이모불향 오불인시

비연부지 인막감경언

만년 이거우계현 택산수유절처 구묘사 약장종신언 궁핍부자료 안여야

 

처사(處士)는 울면서 이르기를,

“나는 노모를 위하여 과거를 보려 하였노라. 왜 지금 과거를 보아, 내 몸만 영화롭게 하고 모친은 누릴 수 없게 하겠는가? 나는 차마 그럴 수 없노라.”

하면서, 울음을 그치지 않으니, 벗들이 감히 다시는 말하지 못하였다.

늘그막에는 우계현(羽溪縣)으로 이사와 살았다. 산수가 그윽하고 수려한 곳을 택하여, 띠집을 짓고, 장차 일생을 마치려 하였다. 궁핍하여 제 몸을 의탁하지 못했으나 마음만은 편안하였다.

 

爲人和粹夷曠, 不與人忤, 恒居肫肫如也.

及至鄕評臧否辭受取與之間, 截然不可犯.

一切以義裁之, 鄕人皆受而敬之.

訓誨後進, 必以忠孝爲先. 以其紛誶名利. 則泊然不一出諸口.

위인화수이광 불여인오 항거순순여야

급지향평장부사수취여지간 절연불가범

일체이의재지 향인개수이경지

훈회후진 필이충효위선 이기분수명리 칙박연불일출제구

 

처사는 사람됨이 화평하고 순수하며 너그럽고 도량이 넓어, 남들에게 거스르지 않았으며, 평상시에는 공손하고 지성스러웠다.

하지만 마을에서 착함과 그릇됨, 사양할 것과 받을 것, 취할 것과 주어야 할 것들을 평함에 있어서, 맺고 끊음이 확실하여, 가히 잘못이 없었다. 모든 것을 의로움 만으로 재단하였기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처사를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제자들을 가르치고 이끌 때에도, 반드시 충과 효를 첫째로 하였다. 화려한 명예나 이익은 꾸짖어, 한마디 말을 내지 못하게 하였다.

 

讀史 至成敗治亂君子小人之辨, 必慷慨論折, 亹亹可聽.

於武穆,文山之死, 則輒掩卷流涕.

爲文簡切有致, 而詩亦壯麗. 所傳誦者百餘篇, 皆合作家, 處士不屑爲也.

朝廷聞而嘉之, 再授齋郞, 終不赴焉.

독사지성패치란군자소인지변 필강개론절 미미가청

어무목 문산지사 칙첩엄권유체

위문간절유치 이시역장려 소전송자백여편 개합작가 처사불설위야

조정문이가지 재수재랑 종불부언

 

사서(史書)를 읽으면서, 성패(成敗)와 치란(治亂),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구별함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강개하여 명확히 판단하였고, 막힘이 없었기에 가히 들을 만하였다. 무목(武穆)이나 문산(文山)이 죽어가는 대목에 있어서는, 문득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문장은 간결하고 절실하며 운치가 있었고, 시도 역시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어냈다. 그렇게 전해지고 외워지던 것들이 백여 편이었는데, 모두 규범에 맞았으나, 처사 자신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도 처사의 명망을 듣고 가상히 여겨, 두 번이나 재랑(齋郞)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年七十八, 將終之日.

招所嘗往還者數人, 學者十餘人, 設酒肴以飮之.

因言身後當葬先隴. 而托其幼孫.

以所玩圖書, 散給門人, 端坐穆然而逝.

閭巷爭來哭之, 士夫識與不識, 皆相弔于家. 遺文散失, 不克集也.

연칠십팔, 장종지일

초소상왕환자수인 학자십여인 설주효이음지

인언신후당장선롱 이탁기유손

이소완도서 산급문인 단좌목연이서

여항쟁래곡지 사불식여불식 개상조우가 유문산실 불극집야

 

향년(享年) 칠십팔 세에 이르러, 장차 생을 마치려던 무렵이었다. 오래전부터 출입하던 몇 사람과 학자 십여 명을 초대하여, 술과 안주를 차려 대접하였다. 이어 자기가 죽은 다음의 일을 말했는데, 반드시 선산(先山)에다 장사지내 줄 것과, 어린 손자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끼던 책들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단정히 앉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고, 평소에 알지 못하던 선비들까지도 모두 와서 조상(弔喪)해 주었다. 남긴 글들은 흩어지고 잃어버려, 모으지를 못했다.

 

外史氏曰.

處士孝於家廉於鄕, 固當得位.

而以母死不賓于王, 卒窮以終, 其才不少售, 惜哉.

巖穴間有士如此, 名湮沒而不傳者, 非獨處士, 悲夫.

외사씨왈

처사효어가렴어향 고당득위

이이모사불빈우왕 졸궁이종 기재불소수 석재

암혈간유사여차 명인몰이부전자 비독처사 비부

 

외사씨(外史氏)는 논한다.

처사(處士)는 가정에서 효도를 다 했고, 고을에서 절도 있는 행실을 하였으니, 응당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유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끝까지 가난하게 살다가 세상을 마쳐, 그 훌륭한 재능이 조금도 쓰이질 못했으니, 애석할 따름이다.

암혈(巖穴)에서 이와 같은 선비들이, 이름이 흔적 없이 사라져 전해지지 않는 이가, 처사 한 사람만이 아니기에, 더욱 슬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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