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총람(산문)/남원고사

(경판)남원고사 - I. 광한루 풍경 (1/4)

New-Mountain(새뫼) 2020. 6. 21.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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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광한루 풍경

 

가. 봄날에 붉은 꽃들 점점 붉어 오니

 

천하 명산 오악에서 형산이 높고 높다. 당나라 때 젊은 중이 경문이 능통하므로, 용궁에 명을 받들어 돌다리 위에서 늦은 봄바람에 팔선녀 희롱한 죄로, 인간으로 환생하여 문무를 갖추어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었다가 태사당으로 돌아들 제, 말과 행동이 품위 있고 정숙한 여인들과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게 아름다운 여인들이 좌우에 벌렸으니, 난양공주, 영양공주, 진채봉, 가춘운, 계섬월, 적경홍, 심요연, 백능파와 실컷 노닐다가 산사의 종소리에 자던 꿈 깨었구나. 아마도 세상의 명예와 이익과 슬픔과 근심과 즐거움과 기쁨이 이러한가 하노매라.

맑은 안개와 아침 구름이 남쪽 길 위에 펼쳤는데, 배꽃과 어여쁜 풀들이 가득한 곧은 길에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 들어가니, 산은 옥석처럼 층층이 솟아 있는데, 첩첩이 겹쳐진 골짜기와 수많은 봉우리들이 솟아 있고, 냇물이 구슬 가루처럼 점점이 날리는 듯한데, 한데 모여 흘러가는 물줄기가 길어 있다. 험한 바위가 겹겹으로 쌓인 벼랑 사이로 깨끗한 물이 흐르는데 저 골 꾀꼬리 종달새는 석양의 맑은 바람 속에 풀풀 날고, 고요한 골짜기 깊은 곳에는 귀촉도 불여귀라.

두견새 슬피 울고, 무심한 저 구름은 봉우리마다 걸렸는데, 백 길이나 되는 아지랑이는 다투어 나무를 둘러싸고 있어 나무마다 어리었고, 색색이 붉은 꽃은 골짜기마다 영롱하니, 한 무리의 예쁜 새들은 꽃과 함께 울고 있으니 가지가지 낭자하다. 푸른 계곡 다 지나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 무릉도원이 어디메뇨.

첩첩 겹쳐진 깊고 큰 골짜기와 수많은 바위가 저녁연기에 잠겨 있다는 무이산이 이러한가. 벽도화 천년 봄은 바람결에 푸르렀고 한가하다. 봄 산의 계수나무꽃은 점점이 붉었으니 방장, 봉래는 어디인가? 영주의 삼산이 여기로다. 삼백 척 밖에서 금계가 울자마자 떠오르는 붉은 해는 지척임이 분명하다.

오나라와 초나라는 동남쪽으로 갈라졌고, 하늘과 땅, 밤과 낮이 그 안에 떠 있으며, 강기슭에서 봄을 희롱하니, 수많은 꾀꼬리가 날아다니고, 누각 아래에서 바람이 이니, 흰 눈처럼 꽃잎이 한 길이나 쌓여 있다.

창오산의 저녁노을과 월나라의 봄 하늘 아래 짙은 안개가 가라앉아 있으니 그 경치도 더욱 좋다. 무산의 높은 열두 봉우리는 구름 밖에 솟아 있고, 동정호 칠백 리의 넓은 물은 하늘과 한 빛이라. 잔잔하고 드넓은 호수 위로 가는 배는 범려의 오호주요, 십 리나 되는 모래펄 위로 나는 새는 서왕모의 청조로다.

강 언덕을 배회하는 까마귀는 화려한 누각 밝은 바람 속에 한가로이 앉아 있고, 산에서 토해낸 듯한 나비를 쫓는 노란 꾀꼬리는 푸른 장막을 두른 듯한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날면서 오고 가니, 비스듬한 돌길을 따라 먼 산을 한가하게 오르는 것은 이적선의 흥취이며, 나뭇잎이 쓸쓸하게 떨어지자 시름에 잠겨 말을 타고 돌아감은 백낙천이 남긴 자취이라. 자미궁 동남쪽의 선녀는 나와 함께 놀았노라.

이런 경치 다 본 후에 어디메로 가잔 말인가. 산은 첩첩한 봉우리들이요, 물은 잔잔한 푸른 계곡이로다. 층층한 기암 층층 절벽에서 폭포의 푸른 물줄기가 떨어지고, 찾아본 제일 경치에 비낀 길에 푸른 솔은 울울하고, 벽도화 흐드러진 속에 잠든 나비 자취 소리에 펄펄 날고, 갈대꽃과 붉은 여뀌 적막한 데, 아이야, 무릉이 어디메니? 도원이 여기로다.

꽃 속에 춤추는 나비들은 분분히 내리는 눈과 같고, 버드나무 위 꾀꼬리는 그 빛깔이 금빛 조각 같구나. 동쪽 정원에 복숭아꽃 오얏꽃이 조각조각 날리니 봄은 어이 그리 쉽게 지나는가. 소와 양은 하산하여 외양간을 찾아가고, 잠 들려는 새들은 날갯죽지 끼고 무리 지어 숲으로 날아드는구나.

세 칸 초가집이 적막한 데, 한쪽 사립문을 닫아두고 배꽃이 달 밝은 밤에 흰빛일 때, 두견새 소리 속에 칠현금 비껴 안고 먼 곳에 있는 친구를 생각하니, 산은 길고 물은 머나먼데 안부가 끊어지고 말도 가로막혔으니 더욱 서럽구나.

오동잎 사이로 가을 달이 밝거나, 봄바람에 나비가 춤을 추는 긴긴날에 나무꾼의 노래와 농부의 피리 소리를 어부사로 화답하고, 한 조각 작은 배 흘려 저어 긴 강 위의 어부처럼 긴 낚싯대로 석양 아래 강 옆의 길로 오고 가니, 도성의 미친 세상 소식 산속의 늙은 어부인 나는 몰라라.

은빛의 큰 물고기 뛰노는데 밤의 강물과 하늘은 한 빛이라. 입 크고 비늘 가는 농어를 낚아내니 송강 농어 부러울쏘냐? 십 리 모래밭에 내려가니 갈매기가 날아갈 뿐이로다. 대지팡이와 짚신에 표주박 하나 들고 천리 강산 들어가니, 첩첩 겹쳐진 깊고 큰 골짜기와 많은 산봉우리의 구름 속에 초가집 사립문을 돌아들어 거문고 타기고 글 읽으며 소일하는 곳에, 술통에 술이 가득 차 있구나.

긴 노래와 짧은 피리 소리, 두세 곡에 한 잔, 한 잔, 또 한 잔이라. 집을 물러 나와 옥산에 든 후에 돌 위에 머리를 두고 차게 잠이 들었다가 학 울음소리에 깨어나니, 삼경인데 계수나무에 달이 걸려 있을 뿐이로다.

높은 벼슬에는 뜻이 없고, 좋은 술과 맛있는 안주에 흥이 난다. 소나무 언덕에서 채지조를 노래하고, 돌밭에 봄비 올 때 밭을 가니 요순시대 이 아니며, 갈천씨의 백성은 나뿐이라.

동쪽 언덕에서 시 한 수 읊조리고, 맑은 시내에서 시를 한 수 짓노라니 남쪽 밭에서는 곡식 맬 이 없고, 구름 낀 높은 산에서는 시비가 없다. 세상 영욕 다 버리고 속세 밖의 세상으로 오고 가니 이곳 산과 계곡이 적막한데, 노을 아래 물고기뿐이로다.

넓고 넓은 푸른 바다의 이내 흥을 보잘것없는 세상 사람들 뉘 알리. 천년, 만 년, 억만 년을 이렇게 이렇게 늙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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