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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서
- 아내의 말에 이어
- 허리 펴고 멀리 보며 걸어 가지.
내 정말 그러하였나 보다.
세월에 움추러들어 나를 구부정히 말아두고
발끝만을 내려보고만 있었나 보다.
저 멀리에 뭐가 있는지 보다는
나를 근심하며 시간을 조심하며
세월과 함께 점점 작아졌나 보다.
- 날이 많이 길어졌어. 아직도 환해.
해 길어진 하지 무렵의 공원에서
내 그림자와 아내 그림자는 나란히
길게 길게 앞서서 나아간다.
곧 어둠으로 사라질 추억처럼
화려함이 사라진 단색의 인생처럼
저 끝이 저끝까지 같이 걸어갈 셈으로.
- 이 근처 오면 나무에서 좋은 냄새가 나.
꽃 향기인가. 향기를 품은 나무 냄새인가.
감춘 것도 아닌데 굳이 드러내지도 않고
그런그런 존재로 특별하지 않게
나무의 꽃들은 녹음에 묻혀 있다.
우리도 녹음에 우리를 묻어 두었다.
살아온 향기가 어떤 것일지를 궁금해하며.
- 같이 25년을 살았으니, 그만큼 더 살라나.
정말로 그러하다면 고마운 일이다.
올해의 절반쯤 지난 어느 저녁인데
이제 돌아가기로 한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이만큼 온 만큼만 돌아간다면
그것으로 고마울 것이다.
우리 남긴 자취는 그림자로 뒤에 남았다.
- 어깨 좀 펴고 주변도 보면서 걸어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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