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또는 함께/보고읽은 뒤에

밀란쿤데라의 '농담'

New-Mountain(새뫼) 2019. 4. 26.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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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운명이 나의 운명과 닮았다는 것을 말해 주고자 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 둘은 서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로 비껴갈 수밖에 없었겠지마느 우리의 삶은 둘 다 유린의 역사라는 점에서,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나 부부와 같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루치에가 육체적인 사랑을 유린당하고 그녀의 존재에 대해서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박탈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인생 또한 원래 의지하고자 했던 가치들을 빼앗겨버렸다. 그것은 그 기원을 돌아가서 보자면 아무 죄도 없는 결백한 것들이었다. 그렇다. 결백한 가치들이었다. 비록 루치에의 삶에서는 유린당한 것이라 해도 육체적 사랑은 죄가 없었다. 내 고장의 노래들, 침발롬이 있는 악단 그리고 내가 증오했던 초상화의 주인공 푸칙, 그 사람 또한 나에 대하여 아무런 죄가 없는 것처럼. 그리고 나에게 협박처럼 들리던 동무란 말도 <너>라든가 미래 그리고 그밖의 수많은 다른 말들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죄가 없는 것처럼. 잘못은 다른 데 있었다. 그 죄는 너무도 큰 것이어서 그 그림자가 죄없이 결백한 사물들(그리고 말들)을 사방으로 온통 뒤덮었고 또 유린했던 것이다. 루치에와 나, 우리는 유린된 세계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이 세계를 불쌍히 여길 수 없었던 까닭으로 우리는 거기에 등을 돌렷고, 그리하여 이 세계의 불행고 우리 자신의 불행을 다같이 약화시키고 말았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러나 정말 제대로 사랑하지는 못한 루치에, 네가 여러 해가 지난 뒤 나에게 와서 말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런 것인가? 유린된 세계에 대한 연민을 청원하러 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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