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운전(黃雲傳)
파리 동양어학교소장 59장본
황운전 권지일
화설(話說) 대송(大宋) 문종(文宗) 황제 화평(和平) 연간(年間)에 남경 응천부 양주(揚州) 땅에 일위(一位) 명공(名公)이 있으되, 성(姓)은 황(黃)이요, 명(明)은 한이니, 한(漢) 승상(丞相) 황패(黃覇)의 손(孫)이요, 처사(處士) 황일창의 아들이요, 친우(親友) 설영은 당신(唐臣) 설인귀(薛仁貴)의 후예(後裔)라.
서로 교계(交契) 심후(深厚)하더니, 양인(兩人)이 삼십구 세의 이르러 청운(靑雲)에 득의(得意)하여 황한은 이부상서(吏部尙書)의 이르고, 설영은 태학사(太學士)에 이르렀더라.
일일(一日)은 황상서(黃尙書) 부인 왕씨(王氏), 설학사(薛學士) 부인 조씨(曺氏)와 더불어 망월루에 올라 월색(月色)을 구경하며 담소하더니, 조(曺)부인이 문득 추연(惆然) 탄(嘆)하며 이르기를,
“두 집 내외(內外) 정의(情誼) 형제 같은 바로써, 이제 나이 사순(四旬)에 한낱 자녀를 두지 못하였으매, 구천(九泉) 타일(他日)에 조상을 어찌 뵈오리오. 첩(妾)은 생각하건대 부인과 더불어 하늘께 정성을 드려볼까 하나이다.”
왕씨 또한 낙루(落淚)하며 이르기를,
“빌어 자식을 낳을진대 무자(無子)할 이 뉘 있으리오마는, 대저(大抵) 시험하여 보사이다.”
하고 드디어 함께 칠일(七日) 재계(齋戒)하고 태항산에 들어가 삼일 기도하고 돌아왔더니, 이날 밤에 왕씨 일몽(一夢)을 얻은즉, 학발(鶴髮) 노인이 청의(靑衣) 동자(童子)를 데리고 왕씨에게 이르되,
“천상(天上) 하괴성(河魁星)이 상제(上帝)께 득죄(得罪)하여 인간(人間)에 내치시기로, 특별히 부인께 지시하노라.”
하고 동자를 밀치더니, 동자가 변하여 황룡(黃龍)이 되어 우레 같은 소리를 지르고 달려들거늘, 왕씨 놀라 깨어, 즉시 조씨를 청(請)하여 몽사(夢事)를 베푸니 조씨 이르기를,
“첩이 또한 꿈을 얻은즉 일위 노인이 계화(桂花) 일지(一枝)를 주며 이르기를, ‘이 꽃은 봉래산 계화이니 황하수(黃河水)에 심으면 지엽(枝葉)이 번성하리라.’ 하기로 가장 의혹(疑惑)하더니, 부인 몽사가 또한 기이(奇異)하도다.”
하며 서로 기뻐하는지라. 과연 그달부터 각각 태기(胎氣) 있어 십 삭(朔)이 차매, 왕씨는 남자를 낳고 조씨는 여아(女兒)를 낳으매, 양가(兩家)가 기뻐하여 황상서의 아자(兒子)의 명은 운(雲)이요, 자를 우룡이라 하고, 설학사의 여아의 명은 월중단(月中丹)이오 자를 봉래선이라 하니라.
차설 이때 좌승상(左丞相) 진권이 본디 간악(奸惡)한 무리로 국권(國權)을 천롱(賤弄)하여 황상 성덕을 옹폐(壅蔽)하거늘, 황상서가 강개(慷慨)한 뜻을 걷잡지 못하여 진권의 죄상을 여러 번 상소(上疏)하였더니, 이로 말미암아 진권이 황상서를 절치(切齒)하는지라.
마침 이때 북방(北方)이 겸년(歉年)을 당하여 도적이 봉기(蜂起)하매, 북관장(北關將) 왕실이 도적 수천을 잡아 가두고 이 뜻으로 천정(天廷)에 주(奏)하니, 천자가 황상서로 하여금 안찰사(按察使)를 내리시고 북관(北關)으로 보내시니,
상서가 하직(下直)하고 북관에 나아가 적괴(敵魁)를 처참(處斬)하고 창고를 열어 곡식을 흩어 적당(敵黨)을 진휼(賑恤)하고 경계(鏡戒)한 후 돌아올새, 진권이 천자께 황상서를 참소(讒訴)하기를,
“도적 이천(二千)이 국가(國家) 대환(大患)이거늘, 이제 황한이 법으로 다스리지 아니하고 도리어 국곡(國穀)을 흩어 주오니, 그 죄 마땅히 처참하여 후인(後人)을 징계(懲誡)하여지이다.”
하거늘, 상(上)이 진권의 상소(上疏)를 옳이 여겨, 황상서를 장사(長沙)에 원찬(遠竄)하시니, 상서가 불의(不意)의 일을 만나 적소(謫所)로 향할새, 설학사를 청하여 이르기를,
“나는 이제 만 리 밖에 적거(謫居)하매 돌아올 기약이 없는지라. 다만 아자(兒子)의 신세 가련(可憐)할지니, 바라건대 형(兄)은 고의(古意)를 생각하여 아자를 저버리지 말라.”
하고 백옥잠(白玉簪)을 내어 주며 이르기를,
“이는 우리 집 세전지보(世傳之寶)이니 이것으로 신(信)을 삼으라.”
하거늘 학사가 상서의 말에 감동하여 옥잠(玉簪)을 받아 소매의 넣고, 황옥(黃玉) 장도(粧刀)를 끌러 황운의 고름에 매며 이르기를,
“만일 시세(時勢) 변혁(變革)하거든 이로써 신을 삼으라.”
하는지라. 상서가 즉시 부인과 아자를 이별하고 발행(發行)하니라.
이때 왕씨 이 지경(地境)을 당하여 침식(寢食)을 전폐(全廢)하고 주야 통읍(慟泣)하여, 인(因)하여 성병(成病)하매 스스로 일어나지 못할 줄 알고, 조씨를 청하여 이르기를,
“우리 가운(家運)이 불행하여 상서가 만 리 밖에 적거하시고, 첩이 또한 세상이 오래지 아니할지라. 바라건대 부인은 운(雲) 아(兒)를 거두어 주시면, 죽은 혼(魂)이라도 한(恨)이 없을까 하나이다.”
조씨 이르기를,
“부인의 자식은 곧 첩의 자식이라. 어찌 거두지 아니하리오.”
하며 수작(酬酌)할 즈음에 왕씨 이미 별세(別世)하매, 조씨 상구(喪柩)를 차려 황씨(黃氏) 선산(先山)에 안장(安葬)하고 황운을 거두어 사랑하며 학업을 권장하니,
황운은 본디 천생(天生) 기재(奇才)라. 십 세 전에 모를 것이 없으매 학사가 가장 기특히 여기고, 십삼 세 여아의 용모(容貌) 기질(氣質)이 비상(非常)할 뿐 아니라 문여필(文輿筆)이 유여(有餘)함을 더욱 애중(愛重)하여, 바야흐로 육례(六禮)를 이루어 봉황(鳳凰)의 쌍유(雙遊)함을 보려 하더니,
이 적에 낙양 신성 땅에 한 사람이 있으되, 성명은 양철이라. 일찍 벼슬이 어사(御使) 태우(大夫)에 이르고, 다만 독자(獨子) 두어 숙녀(淑女)를 가릴 새, 설소저(薛小姐)의 성화(聲華)를 듣고 매파(媒婆)를 보내어 구혼(求婚)하니, 설학사가 황상서 집과 뇌약(牢約)함을 이르니, 양철이 다시 매파를 보내어 달래여 이르기를,
“황한이 중죄를 입어 만 리에 적거하여 돌아올 기약(期約)이 없거늘, 어찌 한갓 언약(言約)을 믿으리오. 바라건대 높은 뜻을 돌이켜 진진지경(津津之景)을 이룸이 어떠하뇨?”
하니, 설학사가 대노(大怒)하여 매파를 꾸짖어 보내었더니, 매파가 이대로 고(告)하니, 양철이 분한(憤恨)하여 즉시 황성에 가 진권을 보고 이르기를,
“설영이 본디 황한의 동당(同黨)으로 승상의 허물을 지어 가만히 음해(陰害)하려 한다.”
하니 진권이 대노하여, 거짓 학사를 승품(陞品)하여 공부상서(工部尙書)로 부르니, 학사가 진권의 소위(所爲)를 짐작하고 더욱 통해(痛駭)하여 종시(終是) 출사(出仕)치 아니하거늘, 진권이 더욱 분노하여 천자께 참소하여,
“설영 황한의 심복(心腹)으로 성상(聖上)을 원망(怨望)함이라.”
아뢰니, 상이 좇으사 설영을 북해(北海)에 안치(安置)하라 하시니, 학사가 불의지변(不意之變)을 당하여 적소로 향할새, 황운을 잡고 유체(流涕)하며 이르기를,
“노부(老父)가 황형(黃兄)의 부탁을 받아 너를 거두어 기출(己出) 같이 알았더니, 이제 내 또한 소인의 참소로 만 리 해도(海島)에 적거하는지라. 다만 네 재조(才調)가 범인(凡人)과 다르매, 부디 나의 뜻을 생각하여 여아를 버리지 말면, 비록 내 죽어도 여한(餘恨)이 없으리로다.”
하니, 황운이 낙루(落淚)하며 이르기를,
“소자(小子)의 명도(命途)가 갈수록 기박(奇薄)하여, 또 이제 대인(大人)을 원별(遠別)하오니, 이는 하늘이 소자를 망하게 하심이거니와, 천기(天氣)도 자연 순환(循環)이 있사올 것이니, 대인은 과려(過慮) 마옵소서.”
하거늘 학사가 더욱 기특히 여겨 금병선(金屛扇) 둘을 내어 황운과 월중단을 주어 이르기를,
“이로써 후일 신물(信物)을 삼으라.”
하고 즉일(卽日) 발행하니라.
조씨 이날부터 식음을 전폐하여, 병세 침중(沈重)하여 수삭(數朔) 만에 세상을 버리니, 소저의 망극함을 이로 측량(測量)치 못할지라. 황운이 상례(喪禮)를 갖추어 설씨(薛氏) 선산에 안장한 후, 황운이 생각하되,
‘비록 두 집 언약이 있으나 아직 성례치 못하였으매, 한 집의 처(處)하기 불가(不可)하다.’
하고 인하여 집으로 돌아가고, 소저는 영궤(靈几)를 뫼서 애통(哀痛)하므로 세월을 보내더니, 이때 양철이 설소저의 혼자 있음을 듣고, 다시 구혼하려 할새 설소저의 이종사촌 조침이 뇌물을 받고 불의(不義)를 혹행(或行)한다 함을 탐지(探知)한 후, 조침을 청하여 후대(厚待)하고 설가(薛家)의 일을 의논하니 조침 이르기를,
“황운이 장성하였으매 설매(薛妹) 일정 듣지 아니하리니 어찌 하리오.”
양철이 익히 생각하다가 천금을 내어 조침을 주며,
“아직 돌아가 있으라.”
하니 조침이 받아 가지고 돌아 가니라. 차시(此時) 양철이 황운을 해(害)하고자 하여 건장한 노복(奴僕) 삼십여 명을 조발(調發)하여 화약(火藥)과 염초(鹽硝)를 배에 실리고 약속을 정하여 양주로 보내니라.
차설 황운이 부친 소식을 몰라 강두(江頭)에 나와 날이 마치도록 배회(徘徊)하더니, 문득 배 한 척이 와 매거늘, 황운이 살펴본즉 배 안에 사람이 무수하고 무었을 많이 실었는지라. 가장 의아(疑訝)하여 노자(奴子)로 하여금 탐지하니,
“진승상 집 노복이 신성 땅에 갔다가 황성으로 가노라.”
하거늘, 황운이 이 말을 듣고 심히 통분하여 탄식만 하고, 집의 돌아와 서책(書冊)을 보다가 잠깐 조는데, 백수(白首) 노인이 이르되,
“네 명(命)이 경각(頃刻)의 있거늘, 어찌 잠을 곤히 자느뇨? 사명산 도인(道人)이 너와 더불어 연분(緣分)이 있으매, 바삐 찾아 가라.”
하고 문득 간 데 없는지라. 놀라 깨어 가장 괴이 여겨 장검(長劍)을 짚고 후원(後園)에 들어가 배회(徘徊) 고면(顧眄)하더니,
홀연 화광(火光)이 문전(門前)의 비추거늘, 황운이 대경하여 급히 담을 넘어 동산의 올라 바라본즉, 무수한 도적이 사면을 둘러싸고 불을 지르며, 혹 노복이 불을 헤치고 나가는 자가 있으면 그놈들이 잡아 불에 들이치니, 황운이 분기를 참지 못하여 장검을 두르고 내달아, 도적 이십여 명을 죽이고 노속(奴屬)을 구하더니 남은 도적은 다 달아나거늘,
황운이 집에 내려와 본즉 화염을 좇아 아니 탄 것이 없고 가속 삼십여 명이 죽었고, 동리(洞里) 사람이 겁(怯)하여 다 도망하였는지라.
황운이 하늘을 우러러 일장(一場) 통곡한 후 헤오되,
‘이는 일정(一定) 진권의 소위(所爲)니 이곳에 있다가는 여화(餘禍)를 면치 못할 것이매, 장차 사명산을 찾아 가려니와, 종적(蹤迹)이 없이 가면 설소저가 나의 존몰(存沒)을 몰라 반드시 몸을 보전(保全)치 못하리니, 사생(死生)을 알게 하고 가리라.’
하여 절구(絶句) 십여 수(首)를 지어, 설학사 집 후원에 들이치고,
이날 사경(四更)에 떠나 사명산으로 향할새, 수 월(月) 만에 한 곳에 다다르니 한 사람이 사자(獅子)를 타고 산중(山中)으로 들어가거늘, 황운이 노인을 따라 수 리를 들어가더니, 만장(萬丈) 빙애(벼랑) 아래 이르러는 그 노인이 채를 들어 사자를 친 즉, 사자가 두어 번 뛰놀며 빙애 위에 올라가는지라.
황운이 능히 오르지 못하여 빙애 아래서 방황하더니, 문득 본즉 빙애 사이에 큰 길이 있거늘 황운이 길을 좇아 들어가며 살펴본즉 수십 장 층애(層崖) 위에 백수 노인이 앉아 청의(靑衣) 동자(童子)로 옥(玉)저를 불리거늘, 황운이 계하(階下)의 나아가 재배(再拜)하니, 노인이 문득 동자를 명(命)하여 산령(山靈)을 부르라 하더니 산상(山上)에서 좇아 큰 범이 내려와 노인 앞에 굴복(屈伏)하는지라.
노인이 꾸짖기를,
“네 이미 이 산을 지킬진대, 진토(塵土) 미생(微生)으로 하여금 이같이 출입하게 함이 옳을 소냐?”
하니 그 범이 듣기를 다하매, 노심(怒心) 등등(騰騰)하여 주홍(朱紅) 같은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거늘,, 황운이 급히 몸을 날려 빙애 위에 올라 앉아 꾸짖기를,
“아무리 속인(俗人)이라 하고 어찌 명산(名山)에 출입하지 못하리오. 내 비록 용렬(庸劣)하나 너 같은 짐승을 곤충(昆蟲)으로 아노라.”
하고 몸을 날려 내려가며 손을 들어 범의 머리를 치니, 범이 휘파람을 길게 하고 간 데 없는지라.
그제야 황운이 도사의 술법(術法)인 줄 알고, 다시 노인 앞에 나아가 이르되,
“소자는 가긍(可矜)한 사람으로 사명산 도인을 찾아 가다가 길을 그릇 들었사오니, 바라건대 존군(尊君)은 아득한 인생을 인도(引導)하소서.”
노인 이르기를,
“무슨 일로 사명산을 찾아 가느뇨?
황운이 이르기를,
“사명산 도인을 찾아 제자가 되어 술법을 배우고저 하나이다.”
노인 이르기를,
“그대 재조를 본즉 그만하여도 세상의 용납(容納)할 것이요, 이제 시절이 태평(太平)하거늘 술법을 배워 무엇 하려느뇨?”
황운이 이르기를,
“헌원씨(軒轅氏)도 치우(蚩尤) 의 난(亂)을 만나고, 주문왕(周文王)도 훈육(薰育)의 침노(侵擄)를 당하여 계시니, 비록 태평시절이라도 위태함을 잊지 아니함이 옳으니이다.”
노인 웃으며 이르기를,
“그러할진대 나를 따라 오라.”
하거늘, 그제야 황운이 사명산 도인인 줄 알고, 노인을 따라 한 곳에 이르러는 팔문(八門) 둔갑(遁甲)과 진법(陳法) 검술(劍術)을 배우니라.
이때 설소저가 북천(北天)을 바라보고 주야 슬퍼하더니, 일일은 노복이 들어와 고하되,
“황상서 집이 홀연 화적(火賊)을 만나 남은 바가 없다.”
하거늘, 소저가 대경(大驚)하여 그 사생(死生)을 알고자 할 즈음에, 마침 시비 운향이 후원에 쫓아 나와 한낱 봉서(封書)를 드리거늘, 소저가 떼어본즉 이는 황공자(黃公子)의 필적(筆跡)이라. 소저가 보기를 다하매 황공자가 피화(避禍)함을 기뻐 하며 탄식하기를,
“이 반드시 진권의 흉계(凶計)니 오래지 아니하여 내게 화(禍) 미칠 것이매 삼가 피하리라.”
하고 이 후로 일습(一襲) 남복(男服)을 개착(改着)하고 세월을 보내더라.
차시(此時) 양철이 조침을 청하여 황운의 일을 이르고, 설소저의 마음을 탐지하여 보라 하니, 조침이 허락하고 설소저에게 가보고 아무리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유인(誘引)하나 철석(鐵石) 같은 소저의 마음을 어찌 변개(變改)하리오. 조침이 무료(無聊)히 돌아가 양철을 보고, 그 소유(所由)를 전하니 양철 이르기를,
“만일 그러하면 장차 어찌 하리오?”
조침 이르기를,
“내 생각하건대 팔월 팔일에 종매(從妹) 일정(一定) 그 모친 묘소의 치제(致祭)할지니, 그 때를 타 여차여차 하면 가히 성사(成事)하리라.”
하거늘, 양철이 대희(大喜)하여 약속을 정하니라.
오래지 아니하여 팔월 팔일을 당하매, 설소저가 제전(祭典)을 갖추어 묘소에 나아가 치제하고, 북천을 창망(悵望)하여 슬퍼할새, 문득 바라본즉 건너 수풀 속에 무수한 사람이 지저귀며 자기를 엿보거늘, 소저가 크게 놀라 유모 계선을 불러 이르기를,
“저 가운데 필연 불측(不測)한 흉계 있는가 하나니, 유모는 가히 나를 대신하여 교자(轎子)를 타고 먼저 가라.”
하고, 유모의 의복을 바꾸어 입고 시비(侍婢) 총중(叢中)에 들어 뒤를 따르더니, 문득 한 떼 강도가 내달아 교자를 겁칙하여 몰아가는지라. 소저가 시비를 가리켜 웨기를,
“너희 어떤 강도이기에, 감히 우리 소저를 핍박(逼迫)하여 가느뇨?”
하며 거짓 급히 따르는 체하다가 돌아 오니라.
이때 양철이 종족(宗族)을 모으고 잔치를 배설(排設)하여 소저를 맞을 새, 기구(器具) 범절(凡節)이 비할 대 없는지라. 양달이 설소저 교자를 맞아 당상(堂上)에 이르매, 양철이 명하여 가묘(家廟)에 배알(拜謁)하게 하니, 일시에 교자 바를 들고 본즉 한낱 노고(老姑)가 들었거늘, 모든 부인이 일변(一邊) 무료(無聊)하며 일변 웃음 참지 못하고 흩어지는지라.
양철 부자가 불승(不勝) 분기(憤氣)하여 계선을 끌어내어 쳐 죽이고, 조침을 불러 이 일을 이르며 대책(大責)하기를,
“네 아무쪼록 계교(計巧)를 베풀어, 그 여자로 하여금 내 집에 들어오게 하여야, 네 머리 없는 귀신을 면하리라.”
하니, 조침이 사죄하고 돌아와 탐지한즉, 소저는 이미 부지거처(不知居處)이거늘 조침이 어쩔 수 없어 집에 돌아가 처자(妻子)와 더불어 의논하다가, 문득 한 계교를 생각하여 이르기를,
“일이 이미 그릇 되었으니, 내 도리어 양철을 속이고 내 몸을 보전할 만 같지 못하다.”
하고 즉시 양철을 보고 이르기를,
“설소저가 그 때 핍박함을 놀라 침문(寢門) 밖에 나지 아니하고, 동리 사람의 간사함이라 하여 대책(大責)하므로 동리 사람들이 설소저를 원망하매, 만일 천금을 흩어 인심을 취합(聚合)하여 내응(內應)을 삼으면 가히 성사하리라.”
하니 양철이 점직히 허락하고 천금을 내어 주며 당부하거늘, 조침이 암희(暗喜)하며 돌아가 이날 밤에 남주(南州)로 달아 나니라.
이때 설소저가 집에 돌아와 생각하되,
‘양철의 포학(暴虐)과 조침의 간휼(奸譎)함으로 이 지경의 이르렀으매, 오래지 아니하여 불측한 욕(辱)이 또 미칠지니, 내 일찍 북해로 나아가 부친(父親) 존망(存亡)을 알리라.’
하고 인하여 시비 오륙 인과 더불어 남복을 개착하고 약간 경보(輕寶)를 지니고, 이 날 삼경(三更)에 발행(發行)하여 두어 달 만에 태항산 하(下)에 이르러는, 옛날 모친이 기도하던 정성을 생각하고 자연 감동함에 잠깐 졸더니,
문득 산상(山上)에서 일위(一位) 장사(壯士)가 내려와 소저에게 가기를 청하거늘, 소저가 장사를 따라 한 곳에 이르니, 일위 노인이 대매(大罵)하기를,
“네 일개(一個) 여자로서 감히 음양(陰陽)을 변체(變體)하매 하늘이 그 죄를 나로 하여금 중히 다스리라 하시니, 너는 감수하라.”
하고, 사자(使者)를 명하여 소저를 결박하여 엎지르고 철여의(鐵如意)를 들어 무수히 치고, 책 한 권을 소저 품에 넣어 이르기를,
“네 만일 깊은 한이 있거든 이 책으로 위로하라.”
하고 천(千) 장(丈) 바위 아래 내리치거늘, 소저 놀라 깨어나니 정신이 쇄락(灑落)하매, 산상(山上)을 우러러 배사(拜謝)하고 품속을 만져본즉 책 한 권이 있는지라. 내어 살펴본즉 이는 천서(天書) 옥갑경(玉甲經)이니 천지조화를 감추었으며, 마음이 공중의 솟을 듯하여, 전일 유순(柔順)한 마음이 일호(一毫)도 없는지라.
크게 기뻐하며 몸을 한 번 날려 시험하니 수십 장 층암(層巖)을 솟구어 뜨니, 소저가 바야흐로 신령(神靈)이 감동하여 만인(萬人)을 대적(對敵)하는 천서(天書)를 주신 줄 알고, 수십 간(間) 초옥(草屋)을 이루고 그곳에 은거하여 주야로 손오(孫吳) 병서(兵書)를 읽으며 칼쓰기와 말 달리기를 위업(爲業)하더라.
화설 진권이 본디 찬역(簒逆)할 뜻이 있으나 황한과 설영이 기탄(忌憚)하여 마음먹지 못하더니, 이에 이르러는 작위(爵位) 일품(一品)의 거하였고, 그 아우 진형과 진걸의 모략(謀略)과 용맹(勇猛)을 믿어,
화평 이십년 춘삼월에 기병(起兵)하여 동관(東關) 성중(城中)에 웅거(雄據)하여 자칭(自稱) 동관왕(東關王)이라 하고, 진걸로 하여금 동관 이십여 주군(州郡)을 총독(總督)하고, 진형으로 하여금 서호 십육 주군을 총독하고, 양철로 군병(軍兵)을 안찰(按察)하고 양달로 선척(船隻)을 준비하여. 동관 양자강(揚子江)에 둔주(屯駐)하였으니, 그 형세 태산 같으매 소관(小官) 열읍(列邑)이 혹 도망하며 혹 항복하며 혹 싸워 죽는 자가 무수한지라.
천자가 들으시고 대경(大驚)하사 문무(文武)를 모아 의논할새, 태사관(太師官關) 위천이 주(奏)하기를,
“신이 이십 년 전에 천문(天文)을 보온즉, 천상 하괴성(河魁星)이 남방의 떨어지고 목직성(木直星)의 광채 월궁(月宮)의 쏘였사오니, 일정 남방에 영웅이 있어 때를 기다리는가 보오매, 복망(伏望) 폐하는 천하에 하초(下詔)하사 초야(草野)에 묻힌 영웅을 초모(招募)하여 재조를 택용(擇用)하사, 도적을 토멸(討滅)함이 좋을까 하나이다.”
하거늘 상이 그 말을 옳이 여기사 즉시 조서(詔書)를 간절히 하사, 천하에 반포(頒布)하고 승상 이엄을 명하여 십삼생(十三省) 영웅을 맞으라 하니라.
각설 황운이 사명산 도인에게 술법을 배워 진선진미(盡善盡美)하더니, 일일은 황운이 천문을 살핀즉, 삼태성(三台星)이 신지(神志)를 떠나 자미성(紫微星)을 침노(侵擄)하는지라. 황운이 탄식하기를,
“이 반드시 진권이 반(叛)함이니, 장차 어찌 하리오.”
하더니 문득 도사가 불러 이르기를,
“네 천문을 본즉 어떠하더뇨?”
황운 이르기를,
“삼태성 하나가 자미성을 침노하오니, 일정 진권이 반한가 하나이다.”
도사가 이르기를,
“이때 정히 네 득의(得意)할 기회니 바삐 나가 공을 세우라.”
하고, 협실(夾室)에 들어가 한 자루 칼을 주며 이르기를,
“십오 년 전에 내 검수산에 들어가 산군(山君)과 더불어 풍경을 구경할새, 바위 위에 청룡 둘이 서리었다가 입을 벌리고 달려들기로, 가졌던 청려장(靑藜杖)으로 용(龍)의 대골(大骨)을 친즉 용은 간 데 없고 칼 둘이 놓였으되, 하나는 참사검(斬蛇劍)이요 하나는 참룡검(斬龍劍)이라 새겼거늘, 참사검은 검수 산군이 가져가고 이 칼을 내가 가져 왔더니, 이제 볼진대 네게 속한 기물(奇物)이라.”
하니, 황운이 칼을 받고 이르기를,
“선생의 은혜 갈수록 망극하옵거니와 몸에 날개 없는지라. 장차 어찌 하리잇고?”
도사가 이르기를,
“비록 만 리 밖이라도 자연 염려할 바가 없으리니 물러가 편히 쉬고 명일(明日)에 발행(發行)하라.”
하거늘 황운이 사배하고 물러나와 자연 번뇌(煩惱)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의 일어나 도사께 나아가 절하며 이르기를,
“소자가 슬하(膝下)에 의탁(依託)하옵다가, 이제 떠나오매 창연(愴然)함을 측량치 못하리로소이다.”
도사 이르기를,
“좋이 가려니와 이후 시세(時勢) 만일 변혁(變革)하거든, 다시 들어오라.”
하며 길을 재촉하는지라.
황운이 함루(含淚) 하직(下直)하고 주야(晝夜) 배도(倍道)하여, 황성에 득달(得達)하여 이름을 황금대(黃金臺)에 붙이니, 승상 이엄이 불러 이르기를,
“그대는 무슨 재주가 있느뇨?”
황운 이르기를,
“생(生)이 비록 재주가 부족하나, 이때를 당하여 언연(偃然)이 앉아 보지 못할 터이기로, 불원천리(不遠千里)하옵고 나아 와 국가 근심을 나눌까 하나이다.”
이엄 이르기를,
“연즉(然則) 성상(聖上)이 찾으실 날이 있으리니, 아직 막하(幕下)에서 쉬라.”
하더라.
차설(且說) 선시(先時)의 설소저가 태항산에 있어 무예를 숭상(崇尙)하며 이름을 연이라 하더니, 일일은 일몽(一夢)을 얻은즉 산신이 이르되,
“이 산중에 용이 둘이 있어 시시(時時)로 작난하여(장난하여) 산곡(山谷)이 요란하매, 그대 만일 그 용을 잡아 천자께 드리면 대공을 이루리라.”
하거늘 소저가 깨어나 괴이 여겨, 익일(翌日)에 산중에 깊이 들어간즉 바위 위에 한 낱 칼이 있으되, 서기(瑞氣) 천상(天上)의 어리었고 주홍으로 쓰였으되 교룡검(蛟龍劍)이라 하였거늘, 소저가 대희하여 그 칼을 가지고 동구(洞口)로 내려올새, 한 짐승이 있으되 상모(相貌)가 영악(獰惡)하여 문득 소저를 보고 소리를 벽력(霹靂) 같이 지르며 올라오니, 용도 아니요 범도 아니로되 빛이 푸르고 눈이 불 같아 모양이 말과 같은지라. 소저가 나아가 그 짐승의 갈기를 잡고 꾸짖어 이르기를,
“네 만일 비룡마(飛龍馬)인들 어찌 태항산 은사(隱士) 설연을 모르느냐.”
하니 그 짐승이 머리를 들어 이윽히 보다가 굽을 허위며 반기는 듯한 모양이거늘, 소저가 대희하여 목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노복이 마침 산 밖에 나갔다가 천자의 조서 반포한 사연을 벗겨왔는지라.
소저가 보고 탄복하며 이르기를,
“이 산신령이 현몽(現夢)함이 나로 하여금 난세(亂世)를 알게 함이로다. 내 이제 두 가지 보물을 얻었으매, 일정 풍진(風塵)을 소탕(掃蕩)하리라.”
하고 비자(婢子) 운향 등과 노자(奴子) 경복으로 하여금 집을 지키오고, 즉시 발행하여 황성의 나아가 이름을 황금대에 붙이니, 이엄이 불러 예로써 대접하고 병서를 의논하여 웅재대략(雄才大略)이 있음을 알고 대희하여 수유(受由) 불이(不二)하더라.
화설 차시는 추칠월이라. 천자가 황극전(皇極殿)의 전좌(殿座)하시고 천하 영웅을 모아 재조를 시험할새, 대원수(大元帥) 인수(印綬)와 상장군(上將軍) 절월(節鉞)을 단 아래 세우고, 그 앞에 대완국(大宛國) 천리 한혈마(汗血馬)와 오십 근 투구와 백여 근 갑옷과 구십 근 장창(長槍)과 팔십 근 대검(大劍)을 세우고 상이 하교하기를,
“저 말을 타며 갑주를 갖추며 장창 대검을 들고 능히 치빙(馳騁)하는 자가 있으면 대원수를 봉(封)하리라.”
하시니,
이윽고 한 소년이 황신기(黃神旗) 아래로 좇아 내달아, 갑주를 갖추고 대검을 들고 말에 올라 치빙하다가, 문득 몸을 날려 팔십 보 밖에 뛰어 내렸다가 다시 말에 올라앉으며 칼을 둘러 사면으로 왕래(往來) 충돌(衝突)하니, 이른바 나는 새라도 따르지 못할지라.
상이 대희하사, 그 소년을 부르사 살펴본즉 용모와 기골이 짐짓 일대(一代) 호걸이라. 그 성명을 무르신대 그 소년이 답하기를,
“소신(小臣)은 남방 사람 황운이로소이다.”
하거늘 상이 그 나이를 물으신 후, 기특히 여기사 어주(御酒)를 내리어 표창할 즈음에,
문득 한 소년이 소리를 지르며 반공(半空)으로 솟아 내달아 갑주를 갖추고, 좌수(左手)에 구십 근 장창과 우수(右手)에 팔십 근 대검을 들고, 대완마를 일백 오십 보 밖에 세우고 두 번에 뛰어 올라 창검을 둘러 춤추어, 동에 가 번듯 서에 가 있고, 남에 가 번듯 북에 가 있어 사람의 눈을 현황(眩慌)하게 하는지라.
상이 멀리 바라보신즉, 그 소년이 신장은 칠 척(尺)이요 얼굴은 관옥(冠玉) 같고 팔자청산(八字靑山)에 천지조화를 감추었는 듯하거늘, 상이 대희하사 즉시 명초(命招)하여 성명과 연기(年紀)를 물으신대, 그 소년이 부복 주하기를,
“소신은 남방 사람이라. 설연이요 나이는 이십이로소이다.”
하니, 상이 양인(兩人)을 명하사 탑하(榻下)에 세우고 다시 장재(將材)를 시험하시되, 다시 설연, 황운을 대두(對頭)할 자가 없는지라. 상이 황(黃), 설(薛) 양인(兩人)을 가까이 인견(引見)하사 칭찬하시며 그 부명(父名)을 물으신대, 황운은 주하되, 전상서 황한의 아들이라 하고, 설연은 주하되, 전학사 설영의 아들이라 하거늘, 상이 탄식하여 이르기를,
“짐이 불명(不明)하여 진권의 참소를 신칙(申飭)하고 너희 아비를 절역(絶域)에 내쳤더니, 금일 너희 양인(兩人)을 대하매 도리어 부끄럽도다. 그러하나 이제 국가가 위란(危亂)을 당하여 급함이 조석(朝夕)에 있으매, 너희 진심(塵心) 갈력(竭力)하여 종사(宗社)를 보전케 하라.”
하시고 설영으로 대원수를 삼고 황운으로 부원수를 삼으시니, 태후(台侯) 엄관이 출반주(出班奏)하며 이르기를,
“황운과 설연이 비록 재주가 유여(有餘)하나 일개(一介) 서생(書生)이라. 막중(莫重) 군무(軍務)를 맡김이 불가하오니, 조신(朝臣) 중에 택용(擇用)하옵시고 황설(黃薛) 양인(兩人)으로 좌우 선봉(先鋒)을 삼으시면 제장(諸將)이 열복(悅服)할까 하나이다.
상이 대노하사 엄관을 삭탈관직(削奪官職)하시고 하교하기를,
“석(昔)의 한신(韓信)도 대장이 되어 한나라 사백년 기업(基業)을 이루었거늘, 이제 풍진을 당하여 어찌 관위(官位) 유무(有無)를 헤아리리오. 다시 저희(沮戲)하는 재 있으면 참하리라.”
하시고,
즉일(卽日) 좌승상 이엄을 명하여 단(壇)에 올라 하늘께 제(祭)한 후, 상이 친히 수레를 밀어 단에 올리고 각기 군물(軍物)을 사급(賜給)하시니, 양(兩) 원수(元帥)가 고두(叩頭) 배사(拜謝)하고 물러나와, 설연이 팔십만 정병(精兵)과 천여 원(員) 맹장(猛將)을 총독(總督)하여 연융청(鍊戎廳)에 이르러 진세(陣勢)를 분배(分配)할새,
제일대에 부원수(副元帥) 황운으로 중앙에 결진(結陣)하고, 제이대의 대장군(大將軍) 우시춘으로 좌청룡(左靑龍)을 응(應)하고, 제삼대의 부장(副將) 서하규로 우백호(右白虎)를 응하고, 제사대의 거기장군(車騎將軍) 홍윤으로 남주작(南朱雀)을 응하고, 제오대의 표기장군(驃騎將軍) 강수천으로 북현무(北玄武)를 응하고, 제육대의 좌사마(左司馬) 엄숭패로 원문장(轅門將)을 삼아 간방(艮方)을 응하고, 제칠대의 우사마(右司馬) 마맹달로 생문장(生門將)을 삼아 손방(巽方)을 응하고, 제팔대의 우초사(右哨司) 맹학신으로 후군장(後軍將)을 삼아 건방(乾方)을 응하고, 제 구대의 중랑장(中郎將) 장달로 사문장(司門將)을 삼아 곤방(坤方)을 응하여 각각 군사를 거느려 결진(結陣)하고 일일 연습하더니,
이때 상이 설연의 용군(用軍)함을 탐지(探知)하고자 하사 시중(侍中) 태부(太傅) 엄맹을 보내시매, 엄맹이 봉명(奉命)하고 진전(陣前)의 나아가 문을 열라 하니 군사가 답하기를,
“진중(陣中)은 문(聞) 장군령(將軍令)이오 불문(不聞) 천자조(天子詔)라.”
하거늘, 엄맹이 대노하여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문을 헤치고 들어가는지라. 원문장 엄숭패 대경하여 원수께 보(報)하니, 원수가 분노하여 즉시 명하여 표미기(豹尾旗)를 들어 원문(轅門) 밖에 세우고 무사를 명하여 엄맹을 밀어 내어 기 아래 꿇리고 크게 꾸짖기를,
“네 황명(皇命)을 빙자(憑藉)하여 군법을 경(輕)히 여기니, 죽음을 마땅히 면(免)치 못하리라.”
하고 방포일성(放砲一聲)에 엄맹을 베어 군중에 호령 후, 이 사연을 천자께 표(表)를 올려 청죄(請罪)하니, 상이 표를 보시고 대경하사 어찌할 줄 모르시더니,
문득 엄맹의 종족(宗族) 등이 궐하(闕下)에 나아와 상언(上言)하기를,
“이제 설연이 황명을 표시(表示)하여 엄맹을 무단(無斷)히 참(斬)하오니, 이는 엄맹의 아우 엄관이 저의 대장 소임(所任)이 불가함을 주달(奏達)한 연고(緣故)로, 저의 사혐(私嫌)을 삼아 이렇듯 하오미니, 복망 폐하는 살피소서.”
하고 또 엄맹의 동당(同黨)이 일시에 주하되,
“설연이 행군(行軍) 전에 감히 폐하의 사신을 살육(殺戮)하오니, 이는 길조(吉兆)가 아니라. 마땅히 대원수 인수를 거두시고, 죄를 밝히소서.”
하거늘, 상이 유예(猶豫) 미결(未決)하실 즈음에 이엄이 출반주(出班奏)하여 이르기를,
“석일(昔日) 한신이 은개(殷蓋)를 베이매, 고조(高祖)가 누수(淚水)를 드리워 포장(褒奬)하였으니, 폐하도 이를 효칙(效則)하소서.”
하니, 상이 깨달아 사신을 보내어 찬양하사 이르기를,
“곤(棍) 이외는 장군이 임의 처치(處置)하라.”
하시니 원수가 황칙(皇勅)을 받들어 북향(北向) 사배(四拜)한 후, 원수가 택일(擇日) 행군(行軍)할새, 상이 백료(百僚)를 거느려 연웅청 백사장(白沙場)에 이르시되, 진중(陣中)이 움직이지 아니 하는지라. 이엄이 주하기를,
“폐하는 한(漢) 문제(文帝) 세류영(細柳營)에 동가(動駕)하든 법례(法禮)를 생각하소서.”
하니, 상이 옳이 여기사 즉시 정령(正令)하시니 이윽고 방포(放砲) 삼성(三聲)에 진문을 크게 열고 엄숭패 나아와 천자를 맞아 드리며 이르기를,
“군중에는 단기(單騎)로 드시나이다.”
하거늘 상이 제신(諸臣)을 물리치시고 말혁을 친히 잡아 중군(中軍) 장대(將臺)의 이르시니, 원수가 장대에 내려 천자께 읍(揖)하여 이르기를,
“갑옷 입은 장수는 절하지 못하나이다.”
하니, 상이 팔을 들어 답읍(答揖)하시고 군용(軍容)을 두루 살피신 후 원수에게 이르기를,
“이제 경등 양인(兩人)을 두었으매 족히 진권을 근심치 아니하리로다.”
하시고 환궁(還宮)하시니라.
차설 설원수가 즉일 행군할새, 쌍룡(雙龍) 자금(紫金) 투구에 황금 용인갑(龍鱗甲)을 입고 우수(右手)에 교룡검을 들고 천리 비룡마를 타고, 대군을 휘동(麾動)하여 여러 날 행하여 동관성 밖 십 리에 결진(結陣)하였는지라.
이때 진권이 진걸로 대장을 삼고 은통으로 후군장을 삼아, 장차 황성으로 향하고자 할새 진걸 이르기를,
“소장이 거야(去夜) 천문을 보온즉 명성(明星)이 황성에 비추었으니, 일정 송제(宋帝) 기병(起兵)하여 나아오는 것이매, 저들 오기를 기다려 침이 가할까 하나이다.”
하더니 문득 소졸(小卒)이 보(報)하되, 송군(宋軍)이 성 밖에 이르렀다 하거늘, 진걸이 즉시 정병 삼만을 거느려 성 밖에 나가 대진하고, 감군장(監軍將) 진홍을 명하여 나가 접전할 새, 송진(宋陣) 중에서 육극이 정창(挺槍) 출마(出馬)하여 교전 십여 합에 진홍에게 죽은 바가 되니,
또 송진 중에서 일원 소장(小將)이 내달아 진홍과 싸워 수합에 한 창(槍)으로 진홍을 베어들고 본진으로 돌아오거늘, 원수가 좌우(左右)에게 물으니 좌우가 이르기를, 우시춘의 부하 조명건이라 하니, 원수가 불러 그 족파(族派)를 물은즉, 송 명장 조빈(曹彬) 의 증손(曾孫)이니 자기와 이성(異姓) 육촌 남매간이라. 심중의 탄복하고 추천(推薦)하여 중랑장(中郎將)으로 삼으니라.
이때 진걸이 진홍의 죽음을 보고 대노하여 좌우를 돌아보아 이르기를,
“뉘 능히 진홍의 원수를 갚을꼬.”
하니, 언미필(言未畢)에 마군장(馬軍將) 은통이 응성(應聲) 출마(出馬)하여 크게 웨기를,
“송장 조명건은 빨리 나와 나의 칼을 받으라.”
하거늘 조명건이 말에 올라 나는 듯이 내달아 맞아 싸워 십여 합의 이르러는, 은통이 스스로 대적하지 못할 줄 알고 한 손으로 창을 들어 막으며 한 손으로 유성퇴(遊星槌)를 들어 치거늘, 조명건이 분노하여 철퇴(鐵槌)를 대하며 한 살로 은통의 말을 맞혀 엎어뜨리니 은통이 말에서 떨어지는지라. 조명건이 급히 달려 들어 은통의 머리를 베어 말에 달고 본진의 돌아와 기의 달고 북을 울려 싸움을 돋우니,
진걸이 불승(不勝) 대노하여 친히 싸우고저 하더니, 문득 일원(一員) 대장이 출마(出馬) 대호(大呼)하기를,
“장군은 잠깐 머무소서. 닭을 죽이매 어찌 소 죽이는 칼을 쓰리오.”
하니 이는 은통의 형 은총이라. 진걸이 대희하여 친히 북을 울려 위엄을 돋우거늘, 조명건이 창을 들고 내닫는지라. 원수가 급히 말려 이르기를,
“고어(古語)에 하루 성공이 세 번이 없다 하느니, 장군이 이미 양장(兩將)을 처(處)하고 또 적장의 검술이 은통의 유(類)가 아니매 장군은 아직 쉬라.”
하니 이미 엄숭패의 아장 육철이 내달아 싸우다가, 마침내 적장에 베인 바가 되니 원수가 대노하여 우시춘을 명하여 은총을 대적하라 하니, 우시춘이 응성 출마하여 은총을 맞아 교전(交戰)할새, 이십여 합에 승부를 결(結)치 못하고 날이 이미 늦었는지라.
진걸이 문득 간사한 꾀를 내어 기를 둘러 수미(首尾)를 바꾸어 일자(一字)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금고(金鼓)를 울리니, 은총이 본진(本陣)이 변함을 보고 거짓 패하여 달아나거늘, 우시춘이 급히 따르더니 원수가 쟁(錚)을 울려 우시춘을 부르니 우시춘이 은총을 버리고 돌아오는지라.
원수가 이르기를,
“진걸이 가만히 진을 변하고 은총이 양패하여 장군을 유인하니, 여(汝)는 간계(奸計)에 든 고로 군을 거두었노라.”
하더라.
진걸이 꾀를 이루지 못하고 송진 파할 계교를 의논하더니, 문득 진권의 글월이 왔는데,
“설연의 용병(用兵)이 귀신같고, 조명건의 무예 정(正)하다 하니, 진실로 경적(輕敵)하지 못할지라. 현제(賢弟)는 모름지기 진을 진득이 성(城)에 의뢰(依賴)해 굳이 지키면, 적장이 오래 상자(牀笫)하여 군심(軍心)이 풀어지리니, 그 때를 타 계교(計巧)를 쓰면 어찌 설연을 파(破)하치 못하리오.”
하였거늘, 진걸이 옳이 여겨 즉시 군을 거두어 동관 성중의 들어가는지라.
원수가 그 꾀를 짐작하고 연하여 싸움을 돋우되, 도시(都是) 나지 아니하니, 원수가 한 계교를 생각하고 황운과 우시춘을 명하여,
“철기 삼천을 거느려 성하(城下)에 진치고, 만일 진걸이 나와 대진(對陣)하거든 여차여차 하라.”
하고 격서(檄書)를 만들어 성중에 쏘아 분(憤)을 돋우니, 진권이 격서를 보고 불승 대노하여 좌우를 돌아보아 이르기를,
“뉘 능히 설연을 잡아 이 욕을 씻으리오.”
하니 은총이 내달아 대호(大呼)하기를,
“소장이 나아가 우시춘을 베어 아우 원수를 갚고 버금 주군의 근심을 덜니이다.”
하고 바로 우시춘을 취하니 우시춘이 대매(大罵)하기를,
“너 같은 황구소아(黃口小兒)가 어찌 나를 대적하리오. 빨리 돌아 가 진걸을 내어 보내라.”
하고 크게 웃고 본진으로 돌아가거늘, 은총이 날이 마치도록 싸움을 돋우매 우시춘이 종시(終是) 나지 아니하고, 다만 진걸을 보내라 하거늘, 진걸이 분기를 참지 못하여 말에 올라 내달아 우시춘을 크게 부르니, 우시춘이 그제야 정창 출마하여 진걸을 맞아 수십 합을 싸우다가 우시춘이 창을 끌고 달아나는지라.
진걸이 의심하여 따르지 아니 하거늘 우시춘이 다시 말을 돌이켜 싸울새 거짓 몸을 날려 말에서 떨어져 창을 끌고 걸어 달아나니, 진걸이 은총과 더불어 급히 따라 거의 잡게 되었으매 벌써 송진(宋陣)을 지나쳤는지라.
문득 송진에서 요성(搖聲)이 대진(大振)하며, 일원 대장이 내달아 대호(大呼)하기를,
“범을 잡으려 하다가 문득 토끼를 잡도다.”
하고 칼을 날려 은총을 베어 내리치니 이는 황운이라.
진걸이 대경하여 급히 달아나 본진으로 돌아올 즈음에 황운이 벌써 삼천 철기를 몰아 진문(陣門)에 다다라 충살(衝殺)하는지라.
진걸이 오천 병을 다 죽이고 필마(匹馬)로 달아나니, 진권이 성상(城上)에서 양진(兩陣) 승패를 보다가 진걸의 급함을 보고 문을 열어 들이니라. 이때 원수가 진을 옮겨 동관성 밖에 둔병(屯兵)하고 은총의 머리를 기에 달고 승전고(勝戰鼓)를 울려 싸움을 돋우되, 진권이 겁하여 나지 아니 하는지라.
원수가 높은 산에 올라 동관 성중을 살펴보고 한 계교를 생각하고 본진으로 돌아와 제장을 분발(奮發)할새, 우시춘과 서하규와 홍윤과 강수천 등 제장을 불러 각기 군사를 주며 약속을 정하여 보내고, 또 황운을 불러 이르기를,
“그대는 궁노수(弓弩手) 이천을 거느려 진권의 군사 복색(服色)을 준비한 후, 각각 화전(火箭) 다 소사(掃射)하고 등대(等待)하였다가 부르는 때를 기다려 거행하라.”
하니 황운이 고하기를,
“동관 성중에 매복(埋伏)하여 어찌하고자 하느뇨?”
원수가 정색(情色)하며 이르기를,
“그대 부원수 인수(印綬)를 차고 이렇듯 무식하뇨? 싸움이 이미 지중(至重)하매 사기(事機)를 보아 감당함이 옳거늘, 먼저 비계(祕計)를 누설(漏泄)하고자 하니 어찌 한심치 아니하리오.”
하니, 황운이 무류(無謬)히 물러나니라. 이날 오후에 대풍이 일어나거늘 진걸이 진권에게 이르기를,
“오늘이 임자(壬子) 천화일(天火日)이라. 대풍이 일어나매 불길한 징조(徵兆)요, 또 소장이 거야(去夜) 천문을 본즉, 화성(火星)이 성중에 비추었으니, 이는 일정 화재(火災)를 삼갈지라. 각영(各營)에 전령(傳令)하여 불을 신칙(申飭)하소서.”
하더니 날이 점점 저물매, 풍세(風勢) 더욱 급하거늘, 원수가 가만히 황운에게 전령으로 이르기를,
“빨리 성하에 나아가 일시에 화전을 쏘아 불이 일어나거든, 성을 넘어 들어가 불을 구하는 체하고, 진권을 찾아 사로잡으라.”
하니 황운이 청령(聽令)하고 물러간 후, 원수가 두어 장수를 머물러 채(寨)를 지키오고 높은 대 올라 동정을 살피더라. 이때 황운이 궁노수를 몰아 성하에 이르러 일시에 화전을 놓으니, 살이 내려지는 곳마다 불이 일어나며 급한 바람이 화세(火勢)를 돋우매, 경각(頃刻) 사이의 성중이 다 불빛이라.
조명건이 성문을 깨치고 물밀듯 들어가 충살(衝殺)하니, 진권이 대경하여 삼군을 지휘하여 불을 구할 즈음의 황운이 성을 넘어 들어가 진권을 찾을새, 진권의 부장 진곽이 앞에 당하거늘, 황운이 한 칼로 진곽을 베며 불을 무릅쓰고 깨쳐 들어가니, 함성이 천지진동하는지라.
진권이 아장(亞將) 진택을 꾸짖기를,
“불을 구하는 군사를 뉘 감히 살해하느냐? 빨리 알아 오라.”
하더니 벌써 황운이 진택을 베고 달려들거늘, 진권이 그제야 송진 장수인 줄 알고 급히 진걸을 찾아 데리고 동문으로 내닫더니, 문득 화광 중에서 장달이 대호(大呼)하기를,
“적장은 닫지 말라.”
하며 달려들거늘, 진권이 어찌할 줄 모르더니 진성 양관이 내달아 장달을 막다가 양관은 죽고 진성은 진권을 데리고 닫는지라. 전변(戰變)에 한 장수가 대호(大呼)하기를,
“역적은 어디로 가느뇨?”
하며 시위 소리를 응하여 진권의 말이 거꾸러지니, 조명건과 황운과 장달과 육합등이 일시에 뒤를 짓쳐 오매, 진권이 정(正)히 위급할 즈음에 문득 진걸이 달려들어, 제 말을 진권을 태워 달아나며 성중을 둘러본즉, 사면(四面)이 다 화광이요 살벌성(殺伐聲)이 벽력(霹靂) 같으매, 향할 곳을 모르더니 군사가 보(報)하되 남문이 비었다 하는지라.
진권이 진걸과 진성과 수천여 기를 거느리고 남문으로 향할새, 문득 방포일성(放砲一聲)에 맹학신과 육합이 내닫거늘 진걸이 죽도록 막으며 일면(一面)을 헤치고 구하여 달아나더니, 동악산에서 횃불이 일어나며 일성 포향에 강수천과 마맹달이 내닫고, 또 황운과 장달 등이 뒤를 따르니 진권이 망조(亡兆)하여 앙천(仰天) 탄식하기를,
“내 이 곳에서 죽을 줄 어찌 알리오.”
정히 자결(自決)하고자 할 즈음에, 진봉 진성 등이 평생 힘을 다하여 좌우로 막으며 한 모를 헤치고 나와 죽기를 면하나, 감히 하동(河東)으로 가지 못하고 웅주(熊州)로 향할 새 전군(前軍)이 보(報)하되,
“앞에 부교(浮橋)가 있으니 어찌 하리잇고?”
진권 이르기를,
“만일 복병이 있으면 항오(行伍)를 미처 차리지 못하리니, 마군(馬軍)을 물로 건너가고 보군(步軍)은 다리로 건너라.”
하더니 문득 일성 포향에 홍윤이 정병 이천을 몰아 내다르니, 물에 떨어져 죽은 자가 무수하고 진걸이 진권을 옆에 끼고 말을 채쳐 달아 나니라.
이때 진권이 겨우 벗어나 한 곳에 다다라 잠깐 쉬어, 진성 진양으로 하여금 빨리 길을 찾아 인도하라 하고, 스스로 진걸과 패잔병을 수습(收拾)하여 뒤에 행할새, 수리를 못가서 달이 동향(東向)에 오르며 전군이 보(報)하되,
“앞에 시초(柴草)가 뫼같이 쌓여 골 어귀를 막았다.”
하거늘, 진권이 정히 주저하더니 홀연 일성 포향에 서하규가 삼천병을 몰아 짓쳐 나오며, 한 칼로 진양을 베고 바로 진권을 취하니 진걸이 화염을 무릅쓰고 싸울 사이에, 진권이 일면을 헤치고 달아나매 진걸이 또한 서하규를 버리고 진권을 따라 가거늘, 서하규 구태여 따르지 아니하고 뒤를 엄살(掩殺)하며 기계(機械) 마필(馬匹)을 얻어 돌아 오니라.
이때 진권이 달아나며 추병(追兵)이 없음을 보고 그제야 정신을 진정하여 묻기를,
“여기에서 웅주성이 얼마나 하뇨?”
진정이 이르기를,
“예서 오십 리 되거니와, 이제 군사가 피곤하여 걷지 못하매 잠깐 쉬어 가사이다.”
진권 이르기를,
“송병(宋兵)이 추살(追殺)하면 우리 이곳에서 다 죽으리니, 빨리 감이 옳다.”
하고, 죽기로써 행하여 한 곳에 다다라서는 진권이 묻기를,
“이곳은 어디뇨?”
진성이 이르기를,
“이곳은 협곡(峽谷)이니 군마(軍馬)가 주려 행치 못하매, 그윽한 곳에 들어가 해갈(解渴)이나 하고 감이 좋을까 하나이다.”
하니, 진권이 또한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여, 말에서 내려 밥을 지으며 창검에 상한 군사를 치료할 즈음에 함성이 진동하며 맹학신이 내달으니, 진권의 군사는 목을 늘이어 칼을 받고 진걸과 진성이 앞을 막아 싸우다가 진성은 죽고 진걸은 낙담하여 달아나거늘, 맹학신이 한 소리를 지르고 말을 달려 창으로 진권의 말을 찔러 거꾸러뜨리니 진권이 땅에 떨어지거늘,
진걸이 급히 달려들어 진권을 옆에 끼고 난군(亂軍) 중에 섞여 도망하여 웅주성의 들어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니, 양철 부자가 패한 연유를 듣고 일변 군사를 조발하며 전선을 준비하여 웅주성 하(下)에 대고 진형에게 사자를 보내어 구완병을 청하니라.
오시(午時)에 원수가 대군을 휘동하여 동관 성중에 들어가 군사를 호궤(犒饋)하며 백성을 진무(鎭撫)한 후, 이 연유로 주문(奏文)하고, 조명건으로 오만 병을 주어 동관을 지키오고, 스스로 장졸을 거느려 웅주성 하에 나아가 하채(下寨)하고, 군사로 하여금 날마다 진권을 불러 싸움을 돋우되, 진권이 종시(終是) 나지 아니하거늘, 제장이 원수께 고하기를,
“진권이 세궁(勢窮) 역진(力盡)하매 나지 아니 하오니, 이때를 타 성중을 겁측하여 진권을 잡음이 좋을까 하나이다.”
원수가 이르기를,
“내 차간(此間) 천문을 살펴본즉, 진권의 죽을 날이 멀지 아니 하였으매, 아직 파할 모책(謀策)이나 정할 것이요, 너무 승세(乘勢)치 말라.”
하더라.
차시 진형이 수륙군(水陸軍) 십만을 총독(總督)하여 일일 연습하며 진권의 소식을 기다리더니, 문득 진권의 패한 사연을 듣고 마음이 격분하여 한 계교를 생각하고, 즉시 회보(回報)하기를,
‘송장(宋將) 설연이 대군을 몰아 수천 리 밖에 왔으매, 일정(一定) 황성에는 병마(兵馬)가 없으리니, 이때를 타 황성으로 올라가 송제(宋帝)를 항복받고 다시 내려와 설연을 잡고자 하오니, 형장(兄將)은 아직 기를 뉘여 군병의 다소(多少)를 알게 마소서.’
하였더라.
차설 이때 진형이 서호 칠십 주군(州郡)을 다 휘동하여 주야로 황성을 향할새, 백학령(白鶴領)을 넘어 위수(渭水)를 건너서 청관(廳官)에 다다르니, 관 지킨 장수가 성문을 막고 방비(防備)하다가 능히 저당(抵當)치 못하여 성을 버리고 달아나며,
이 연유로 급히 장(狀)문(文)하니, 천자가 대경하사 일변 병마를 조련하며 유성군(留城軍) 이만으로 먼저 막으라 하시니, 호위대장(護衛大將) 유혐이 황명을 받아 군사를 거느려 도성 삼십 리 밖에 나아가, 연파강(煙波江) 변(邊)에 배수진(背水陣)을 쳤더니,
진형이 군을 몰아 주야로 행하여 연파강의 다다라서는, 전군(前軍)이 송군(宋軍)의 결진함을 보(報)하거늘, 진형이 호령(號令)하기를,
“이는 다만 궁성 호위하였던 군사라. 어찌 이만 쥐 무리를 보고 겁하느뇨. 전군은 급히 물리치라.”
하니, 선봉(先鋒)이 청령(聽令)하고 금고(金鼓)를 울리며 고함하여 짓쳐 들어가니 호위군(護衛軍) 이만이 당치 못하여 일시의 함몰(陷沒)하매, 유혐이 홀로 도망하다가 진형의 부장 엄한의 살을 맞아 죽은지라.
이때 천자가 홀로 궁에 계서 침식을 이루지 못하시고, 다만 유혐의 소식을 기다리더니 수문장(守門將)이 보하되, 진형이 유혐을 소멸(消滅)하고 벌써 성하(城下)에 다다랐다 하거늘, 상이 대경실색(大驚失色)하사 종실(宗室)과 제신을 모아 의논하실 즈음에, 문득 장안 대로에 화광이 충천하며 곡성(哭聲)이 진동한지라.
상이 망조(亡兆)하여 창황(?怳) 중에 궁문(宮門)장(將)이 보하되, 진형이 벌써 성문을 깨치고 들어와 궐문에 다다랐다 하거늘, 상이 더욱 망극하사 급히 황후와 세자, 아우 연왕(燕王)을 데리시고 궐내를 떠나 남문을 향하여 달아나시더니, 진형의 선봉장 진봉이 천자가 나가심을 보고 달려들어 연왕을 잡아가는지라. 상이 연왕이 잡혀감을 보시고 망극하신 중 어찌할 수 없어 좌우를 돌아보신즉, 시신(侍臣) 십여 명이 겨우 좇아 왔거늘 데리시고 급히 형주로 향하시니라.
진형이 종묘(宗廟)에 불을 놓으며 궐내로 들어가니, 천도(天道)가 어찌 무심하리오. 홀연 급한 비 붓듯이 내려 불을 소멸(消滅)하매, 진형이 내념(內念)에 황송하여 다시 불을 놓지 못하고, 인하여 진봉으로 하여금 황성을 지키오고 엄한으로 하여금 삼천 병을 주어 동각에 매복하여 동관으로 가는 길을 끊어, 설연의 진중(陣中)에 통하지 못하게 하고, 스스로 장졸을 거느려 천자를 쫓아가다.
재설(再說) 형주(荊州)는 천자의 둘째 아우 형왕(荊王)이 도읍(都邑)한 곳이라. 천자가 원수의 진(陳)으로 가시지 못하고 바로 형주로 가시니, 형왕이 대경하여 전후 사연을 듣고 분기 등등하여 마음을 정치 못할 즈음에, 수문장이 보하되, 진형이 성하에 진 치고 연왕을 겁박하여 진전(陣前)에 꿇리고 무수히 질욕(叱辱)한다 하거늘, 형왕이 더욱 분노하여 내달아 달아 싸우고자 하는지라.
천자가 만류(挽留)하며 이르기를,
“진형의 형세 태산 같아 싸워 무익(無益)하매, 모름지기 성문을 굳게 닫고 설연에게 격서를 보내어 원병(援兵)을 청함만 같지 못하도다.”
하니 형왕이 청명(聽命)하고 즉시 격서를 만들어 장사(壯士)로 하여금 동관으로 보내었더니, 그 장사가 주야로 행하여 동각에 이르러, 엄한에게 죽은 바가 되매 뉘라서 격서를 전하리오.
이때 진형이 천자를 질욕하며 이르기를,
“네 만일 항(降)하지 아니하면 성문을 깨치고 들어가, 한 칼로 너에 삼형제를 베리라.”
하거늘, 형왕이 분기 대발(大發)하여 형주군을 휘동하여 나가 싸우다가, 마침내 진형에게 사로잡힌 바가 되니라.
차시 설원수가 웅주에 결진(結陣)하고 진권을 잡을 모계를 생각하더니, 일야(一夜)는 한 꿈을 얻은즉 태항산 신령이 이르되,
“천자가 급함이 조석에 있거늘 어찌 태연히 잠을 자느뇨?”
하는지라. 원수가 놀라 깨어나 등촉(燈燭)을 밝히고 몽사(夢事)를 생각할 즈음에, 황운이 불구(不具) 군례(軍禮)하고 급히 들어가 원수께 고하기를,
“소장이 금야(今夜) 천문을 보온즉, 천자의 주성(主星)이 중앙을 떠나 다른 곳에 의지(依持)하였고, 객성(客星)이 침노하니, 일정 진형이 황성을 탈취(奪取)하고 천자를 침노하는가 싶으매 사세(事勢) 위급한지라. 장군을 군사를 거느려 이곳에 굳이 유진(留陣)하여, 진권을 웅주성에 떠나지 못하게 하면 내 필마(匹馬)로 올라가 황성 소식을 탐지하고자 하나이다.”
원수가 이르기를,
“나도 아까 몽사가 여차여차 하기로 장군을 청하여 의논하고자 하던 바이러니, 장군의 소견이 또한 이러하매 바삐 행하라.”
하거늘 황운이 응낙하고 황망히 말에 오르며 말에게 경계(儆戒)하며 이르기를,
“국가 흥망이 명일(明日) 진시(辰時)에 달렸다 하니, 네 비록 짐승이나 임금을 알 것이매, 네 빨리 행하여 임금의 위태함을 구하고, 나의 충성을 나타나게 하라.”
하고 채를 들어 한번 치니 자류마(紫騮馬)가 귀를 기울여 듣다가 한 소리를 지르고 네 굽을 허위여 수천 리 강산을 순식간에 지나더라.
차시 진형이 형왕과 연왕을 진중에 가두고 천자를 질욕하되, 천자가 분기를 참고 다만 설연과 황운의 거취를 기다릴새, 이 밤에 진형이 성문을 깨치고 바로 궁중을 깨쳐 들어오는지라. 상이 황망이 황후를 거느리지 못하시고 남문으로 쫓겨 나가실 새 다만 십여 원(員) 신하가 좇았더라.
진형이 벌써 궁중에 돌입하여 황후와 형 왕비를 사로잡아 진탁으로 하여금 형주 옥(獄)에 가두어 지키라 하고 스스로 철기 삼천을 거느려 천자를 쫓아 가니라.
이때 천자가 밤새도록 행하사 호타하(滹沱河)에 다다라서는, 그 곳 백성이 피란(避亂)하고 또한 선척(船隻)이 없는지라. 상이 앙천(仰天) 탄식하며 이르기를,
“석(昔)에 광무(光武)는 이곳에 와 맥반(麥飯)을 먹었더니, 오늘날 짐은 이곳에서 마치리로다.”
하실 즈음에 진형이 철기를 몰아 풍우(風雨)같이 달려오며 대호(大呼)하기를,
“송제(宋帝)는 빨리 항복하라.”
하거늘 상이 황망이 물에 빠지고자 하시니, 시신(侍臣)이 천자를 보호하여 가운데 모시고 각각 칼을 빼어 막자하니, 진형이 창을 들어 사오 인을 베고 천자의 말을 찔러 거꾸러치매 상이 땅에 떨어지는지라. 진형이 창으로 천자를 견주어 대매(大罵)하기를,
“잔명(殘命)을 아끼려든 빨리 항서(降書)를 써 올리라.”
하니 상이 이 지경을 당하매 천지 아득하여 크게 한 소리를 지르시고 기절하시니 이날 천자에 성명(姓名)이 장차 망하게 되었도다.
황운전 권지이
차설 황운이 밤새도록 가 형주성에 이른즉 성상(城上)에 진형의 기치(旗幟) 꽂히고 문이 굳게 닫았거늘, 황운이 망조(亡兆)하여 어찌할 줄 모르더니, 문득 멀리 바라본즉 불이 비치는지라. 급히 찾아 가니 사오 인이 울다가 달아나거늘 황운이 달래며 이르기를,
“나는 적병이 아니매 의심치 말고 천자 계신 곳을 가리키라.”
하니 그 사람 그제야 정신을 진정하여 천자의 전후사를 이르는지라.
황운이 즉시 말을 채쳐 남문을 향하여 다다를새 날이 이미 밝았거늘, 멀리 바라본즉 삼천 철기 둘러서고 살기등등(殺氣騰騰)한지라. 황운이 크게 웨기를,
“역적 진형은 성상을 해치지 말라.”
하며 말을 한번 뛰어 진 앞에 다다르니 적병이 물결 흩어지듯 사산(沙山) 붕궤(崩潰)하고, 진형이 또한 대경하여 황망히 천자를 버리고 황운을 맞아 싸워다가 당치 못할 줄 알고 창을 끌고 달아나는지라.
황운이 천자의 혼절(昏絶)하심을 보고 말에 내려 복지 통곡하며 이르기를,
“폐하가 이렇듯 곤액(困厄)하심이 다 신의 죄오니, 바라건대 아직 성체(聖體)를 진중(珍重)하소서.”
상이 망극 중 황운을 보시고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사 이르기를,
“이는 다 국운(國運)이 불행함이거니와, 진형이 황후와 연왕 형제를 다 형주옥에 가두었다 하니, 경은 바삐 도모(圖謀)하라.”
하시니, 황운이 청명(聽命)하고, 인하여 천자를 모서 형주로 돌아올새, 황운이 군사가 바야흐로 형주성 하(下)에 이르렀거늘, 황운이 합세하여 고각을 울리며 성으로 들어가니, 진탁이 능히 대적하지 못하여 달아나는지라.
황운이 말을 놓아 칼을 날려 진탁을 베고 천자를 모셔 보위(寶位)에 올리고, 흩어진 궁첩(宮妾)을 모아 난가(鑾駕)를 준비하여 옥에 가 황후와 형 왕비를 맞아 궁중으로 돌아 오니라.
차설 황운이 탑전에 하직하고 군사를 거느려 황성 아래 이르러 백성을 효유(曉諭)하는 글을 만들어 가만히 성중에 들이치니, 성중 백성이 글을 얻어 서로 돌려보고, 이날 밤에 가만히 장중(帳中)에 들어가 진봉을 결박한 후 성문을 크게 열고 나와 원수께 바치거늘, 황운이 대희하여 진봉을 베어 장안(長安) 대도(大道)에 순시(巡視)한 후 천자를 모서 환궁하시고, 사문(四門)에 방(榜) 붙여 이산(離散)한 백성을 부르고 탑하에 주하기를,
“설연이 진권으로 상지(相持)하매 사졸(士卒)이 자못 피곤한지라. 신이 다시 나아가 설연와 더불어 진권 삼형제를 잡아 바칠까 하나이다.”
상이 이르기를,
“이제 성중 인심이 미정(未定)하고, 또 진형의 거처(去處)를 모르니 가히 떠나지 못할 것이매, 짐이 마땅히 설연에게 조서를 나내 것이니, 경은 아직 황성을 지키어라.”
하시니, 황운이 청명이퇴(聽命而退)하니라.
시시(時時)에 진형이 호타하에서 황운을 만나 병마를 다 잃고, 겨우 목숨을 도망하여 여간(如干) 군사를 거두어 데리고 진권을 찾아 가다가, 중로(中路)에서 한 계교(計巧)를 생각하고 촌중(村中)에 들어가 백성을 노략하여 천자 시신(侍臣)에 복색(服色)을 차리고 비밀한 교서(敎書)를 만들며, 비수(匕首)를 품에 품고 설연의 진중으로 향하니라.
이때 원수가 웅주성 하에 결진하고 황운의 소식을 기다리더니, 일일은 군사가 보하되,
“천자의 시신이 조서(詔書)를 가지고 원수께 뵈옴을 청한다.”
하거늘 원수가 마음에 가장 의혹하여 엄숭패를 불러 이르기를,
“진문 밖에 천자 시신이 왔다 하니, 먼저 동정을 살펴 만일 수상하거든 몸을 수험(搜驗)하고 종자(從者)를 우선 결박하여 아뢰라.”
하니, 엄숭패 청령하고 진문에 나아가, 진형에 종자를 수험하여 결박하고 문목(問目)할 즈음에, 진형이 이 거조(擧措)를 보고 도망하여 웅주성을 넘어 가는지라.
엄숭패 이 뜻으로 원수께 고하니, 원수가 그 종자를 잡아들여 엄문(嚴問)한즉, 불하일장(不下一杖)에 개개(箇箇) 승복(承服)하되, 진형이 호타하에서 천자를 곤욕(困辱)하다가 황운을 만나 패하던 사연과, 중로에서 꾀를 내어 원수를 해하려 하던 설화(說話)를 직초(直招)하니, 원수가 그제야 황운에 소식을 대강 듣고 종자를 방송(放送)한 후 각처에 하령(下令)하여 사졸(士卒)과 병기(兵器)를 수습하더라.
차시 진형이 웅주성에 들어 진권을 보고 황운에게 패한 연유를 일러 이르기를,
“설연이 나의 진위(眞僞)를 알았으매 일정 성중을 엄살(掩殺)할지니, 복망(伏望) 형(兄)장(將)은 설연 파할 계교를 준비하고, 소장은 오늘밤에 설연에 진에 들어가 설연을 베어 오리이다.”
진권 이르기를,
“설연이 비록 연소(年少)하나 지용(智勇)이 겸비(兼備)하니, 현제(賢弟)는 경적(輕敵)하지 말라.”
하니 진형이 이날 밤 삼경에 신검(神劍)을 춤추어 송진으로 가니라. 이날 원수가 각 채(寨)에 신칙(申飭)한 후 서안(書案)을 지어 졸더니, 문득 태항산 신령이 이르되,
“위태함이 시각(時刻)에 있으니 급히 몸을 피하라.”
하거늘 원수가 놀라 깨어나 둔갑(遁甲)하여 동정을 살필새, 음풍(陰風)이 소소(蕭蕭)하며 한 사람이 공중에서 들어와 비수를 춤추어 장대(將臺)를 살피다가, 인적이 없음을 보고 도로 나가는지라.
원수가 몸을 나타내어 대매(大罵)하기를,
“어떤 놈이기에 깊은 밤에 칼을 가지고 왔더냐?”
하니 진형이 그 소리를 듣고 칼을 춤추어 달려들거늘, 원수가 장창을 들고 맞아 싸워, 황금 독 둘이 되어 광채 찬란하매 일군(一軍)이 놀라 서로 구경할 뿐이라. 이윽고 금 독 하나가 떨어지더니, 원수가 진중에 내려서며 제장을 불러 도적의 시신을 치우라 하거늘, 모두 살펴본즉 이는 진형의 시신이라.
모두 놀라 시신을 치우고 원수께 치하(致賀)하더라. 날이 새매 원수가 군사로 하여금 진형에 머리를 기에 높이 달고 진권을 불러 이르기를,
“네 동생 진형에 머리를 찾아 가라.”
하는지라. 이때 진권이 송군이 웨는 소리를 듣고 대경실색하여 성문을 굳게 닫고 나지 아니하더라.
원수가 진형을 죽이고 승승하여 웅주 파하기를 의논하더니, 문득 군사가 보하되, 황사(黃使)가 왔다 하거늘, 원수가 황사를 청하여 조서를 받아본즉, 진형에게 곤욕을 만나던 사연과 황운이 아직 성을 지키어 보내지 못하는 설화이라.
원수가 조서를 읽어 장졸 등을 다 알게 한 후 진형을 죽인 연유를 주달(奏達)하고, 진권을 잡을 계교를 생각할새, 천서(天書) 옥갑경(玉甲經)을 보다가 문득 일계(一計)를 생각하고 군중에 전령(傳令)하여 이르기를,
“팔십만 병이 각각 부대(負袋) 하나씩 대령(待令)하되, 오월 이십이일 술시(戌時)에 웅주를 파하리라.”
하니 제 장졸이 그 곡절을 모르고 다만 청령하고 물러나니라.
이때는 오월 이십이일이라. 진걸이 진권에게 이르기를,
“금일은 을사(乙巳)일이니 만일 기묘(己卯)시에 큰 비 시작하면, 술시(戌時)까지 올 것이매, 성중 수도(水道)를 신칙(申飭)하라.”
하더니 과연 묘시 말(末)에 대우(大雨)가 시작하는지라.
이날 인시(寅時)에 원수가 일시 제군(諸軍)을 재촉하여 조반을 먹이고, 각각 부대에 모래를 담아 대령하였더니, 술시(戌時) 되매 연하여 대우가 내려 평야에 다 창일(漲溢)하였는지라. 성중 대천(大川)물이 미처 나오지 못하여서, 원수가 영(令)을 내리매 팔십만 병이 일시에 모래 넣은 부대로써 수도를 곳곳에서 막으니, 물이 흐르지 못하여 성을 넘는지라.
진권이 대경하여 성두에 올라 물을 피하나, 어두운 밤을 당하매 두서(頭緖)를 차리지 못하여 다만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더니, 문득 전선장(戰船將) 양달이 진권에 위급함을 보고 전선(戰船) 십여 척을 성하(城下)에 대거늘, 진권이 진걸과 더불어 겨우 장사 오십여 원을 데리고 동을 바라고 달아나니라.
이때 원수가 진권에 달아남을 보고 군사를 분부하여 막은 물을 트고, 성중에 들어 성상에 청도기(淸道旗)를 세워 백성을 안무(按撫)하고, 인하여 정병 십만을 총독하여 급히 진권을 쫓아가니라.
진권이 동오(東吳)에 다다라 청홍성에 웅거하였더니, 문득 군사가 보하되, 설연이 이미 성하에 결진하였다 하거늘, 진권이 어찌할 줄 모르는지라. 원수가 진권이 청홍성에 듦을 보고 동오 지도를 들어본 후,
“중장(重將)을 각각 분발하여 십면(十面)에 매복하여 여차여차 하라.”
하고 스스로 대군을 거느려 오주에 유진(留陣)하고 싸움을 돋우되, 진권이 마침내 나지 아니하더니 이십여 일만에 양초(糧草)가 핍절(乏絶)하여 군마(軍馬)와 백성이 다 죽게 되었는지라.
이에 진권이 배수(背水) 일전(一戰)을 생각하고, 즉일(卽日)에 진걸로 선봉을 삼고 양철로 후군장을 삼아 잔병(殘兵) 오만을 거느리고 성문을 열고 나와 싸움을 청하거늘, 원수가 하령(下令)하기를,
“병법(兵法)에 궁구(窮寇)를 막추(莫追)라 하니 도적에 길을 열어 주고 뒤를 쫓음이 가하리라.”
하니 제장이 청령하고 군사를 거두어 길을 열어 주니, 진권이 의심하여 싸우지 아니하고 급히 오주로 달아나는지라. 원수가 그제야 각 진에 호령하여 기고(旗鼓)를 세워 엄살하니, 진권이 황망 분주할 즈음에 서하규와 우시춘 등이 일시에 살출(殺出)하여 진걸과 진권과 양철에 부자 등을 다 생금(生擒)하였거늘, 원수가 진걸을 효수(梟首)하고 진권 등을 함거(檻車)에 넣어 경사로 보내고 원수는 미(尾)를 좇아 회군(回軍)하니라.
차설 천자가 원수의 첩서(捷書)를 보시고 대희하사 만조를 거느리시고 십 리에 나와 원수를 맞아 위로하시고, 함께 환궁하신 후,
“진권 등을 우차(牛車)로 찢어 순시(巡視)하라.”
하시고 대사천하(大赦天下)하시며, 북궐 아래 돈의궁을 황운에게 사급(賜給)하시고 남훈전 아래 화순궁을 설연에게 사급하신 후 하교하기를,
“소년 남자가 어찌 독처(獨處)하리오.”
하시고 동리화로 설연의 첩(妾)을 정하고, 설중매로 황운의 첩을 정하시니라.
익일에 태평연을 베푸신 후, 공신(功臣)을 봉작(封爵)하실새, 설연으로 숭록후(崇祿侯) 겸 우승상(右丞相)을 삼고 황운으로 충렬후(忠烈侯) 겸 좌승상(左丞相)을 삼고, 기여(其餘) 제장을 봉작하시며 황설(黃薛) 양인(兩人)에 기색을 살피신즉, 수색(愁色)이 만면(滿面)하였거늘,
상이 문득 깨달으사 즉시 사자를 장사와 북해에 보낼새, 황한으로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삼고, 설영으로 우복야(右僕射)를 삼아 바삐 환조(還朝)하라 하시다.
황설 양인(兩人)이 천은을 사례하고 각각 본부로 돌아와, 황운이 조용히 헤아리되,
‘설학사는 본디 아들이 없는 줄 정녕히 알거늘, 이제 설연에 일이 가장 괴이하나 저에게 물어 쓸 데 없으매, 다만 설학사를 기다려 알리라.’
하더라.
차설 일일은 천자가 연왕 등을 모아 동락(同樂)하실새, 문득 하교하기를,
“두 원수가 풍진(風塵)에 골몰(汨沒)하여 미쳐 실가(室家)를 정(定)하지 못하였으매, 종실과 제신은 숙녀를 가리어 중매(仲媒)됨이 어떠하뇨?”
형왕과 연왕이 아뢰되,
“신등(臣等)의 잔명(殘命)을 보전하옴이 두 원수에 공이오매, 그 은혜 백골난망이라. 신등이 미거(未擧)하온 여식이 있사옵기, 두 원수로 각기 부마(駙馬)를 삼아 그 공을 갚을까 하나이다.”
상이 이르기를,
“경등의 말이 가장 아름답도다.”
하시고 형왕의 여아(女兒) 학희공주로 설연에 부인을 당하고, 연왕의 여아 심원공주로 황운에 부인을 당하니라.
이렇듯 혼사를 의논하매, 황운은 이왕 다른 곳에 정혼함을 아뢰고, 설연은 부명(父名)이 없음을 아뢰니, 상이 옳이 여기사,
“아직 조서(詔書)를 거두라.”
하시니라.
차시 설연이 혼사 의논을 듣고 마지못하여 전후사(前後事)를 갖추어 표(表)를 지어 천자께 올려 청죄(請罪)하니, 천자가 보시기를 다 못하여 대경 대찬 이르기를,
“일개 여자가 어찌 이렇듯 웅장한 일을 행하였는고.”
하시고 제신이 또한 칭양(稱揚) 아니할 이 없는지라. 이후로부터 설연이 남복(男服)을 폐(廢)하고 심규(深閨)에 처하여 다만 북해 소식을 고대하더라.
차설 이때 황상서와 설학사가 적소(謫所)에서 비회(悲懷)로 세월을 허비(虛費)하더니, 의외 사관이 내려와 조서를 전하거늘, 황상서는 비로소 아자(兒子)가 성공한 후 은사(恩赦)가 내림을 알고 즉시 사관을 따라 올라오고, 설학사는 천은(天恩)을 감축(感祝)하며 일변 헤아리되,
‘내 본디 아들이 없거늘, 설연이 대원수란 말이 심히 아혹(訝惑)하도다.’
하고 경사로 올라올새, 기북에 이르러는 가동(家童)이 내려와 서간을 올리매 받아보고, 여아에 일인 줄 짐작하나 오히려 반신반의(半信半疑) 하여 올라오더니, 설소저가 십 리에 나와 맞으매 부녀(父女) 서로 만나 일희일비함을 이로 측량치 못할러라.
황상서가 여러 날 만에 위수에 이르매, 황운이 대후(待候)하였다가 부친을 보고 서로 손을 잡아 실성(失性) 체읍(涕泣)하며 전후사를 문답(問答)한 후, 황성에 이르러 설학사와 일시(一時)에 입궐 숙사(肅謝)하니, 상이 전일을 후회하사 이르기를,
“이제 경등의 자녀 충성에 힘입어 종사(宗社)를 안보하매, 그 공로를 갚을 바를 알지 못하노라.”
하시며 황한으로 위왕(魏王)을 봉하고 설영으로 한왕(韓王)을 봉하시니, 양인(兩人)이 굳이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물러나와, 불구(不久)하여 황설 양가(兩家)에서 혼사를 상의하여 택일(擇日) 행례(行禮)하니라.
각설 형왕이 설연이 여자에 몸으로 황운에 배필됨을 보고 한탄하더니, 초국 병부상서 엄릉의 아들 엄평이 형악산에 들어가 십년 검술을 배워 육정육갑(六丁六甲)을 부린단 말을 듣고, 크게 사랑하여 부마로 정한 후 천자께 주달하니 상이 윤허하시고, 황운을 돌아보사 이르기를,
“이제 연왕이 부마를 정하지 못하였으매 경은 합당한 사람을 천거하라.”
하시니 황운이 부복(俯伏) 칭사(稱謝)하다가 주하되,
“안한공 조명건의 충효가 겸전(兼全)하오매 이 밖에 마땅한 자가 없나이다.”
하거늘 상이 대희하사 즉시 조명건으로 연왕의 부마를 삼으니라.
각설 문종황제 즉위하신지 이십삼 년 이르되, 일찍 태자(太子)가 없더니 일일은 상이 비몽사몽(非夢似夢) 간에 하늘에서 채운(彩雲)이 황룡(黃龍)을 둘러 궐문 밖에 떨어지거늘, 미(尾)를 좇아 일개 청의 동자가 내려와 그 용을 업어 궐내에 들이치고 스스로 심원공주 궁으로 들어가고, 그 뒤에 달이 떨어져 변하여 금 두껍이 되어 설연의 궁으로 들어가는지라.
상이 꿈을 깨어 가장 신기히 여기시더니, 그달부터 황후가 태기(胎氣) 있어 태자를 탄생하시니, 상이 대열하사 이름을 응룡이라 하시다.
이때 황운은 여아를 생(生)하여 이름을 화순매라 하고, 조명건은 남아를 생하여 이름을 미영이라 하니 태자와 더불어 동년 월일시라. 상이 들으시고 황조(黃曺) 양인(兩人)을 명초(命招)하사 전일 몽사를 설파(說破)하사 이르기를,
“몽사가 여차하니 경등 자녀와 태자는 하늘이 유의하여 내신 바이니 경등은 또한 범연(泛然)이 알지 말고 내두(來頭)를 보아 진심(盡心)하라.”
하시니, 황조 양인(兩人)이 청명(聽命) 사은(謝恩)하고 물러나니라.
차시 위왕과 한왕이 연기(年紀) 높아 한왕은 먼저 훙(薨)하고 삼 삭 만에 위왕이 또 훙하니, 승상 부부가 애훼(哀毁) 과례(過禮)하여 예로써 선산에 안장하고 시묘(侍墓)하더니 이미 결복(闋服)하매, 상이 그 성효(誠孝)를 아름다이 여기사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시고 대승상으로 복직(復職) 내리시니라.
익설(益說) 이때는 화평 이십칠 년이라. 상이 우연히 환후(患候)가 계서 백약(百藥)이 무효(無效)하매 상이 스스로 일어나지 못할 줄 아시고, 만조(滿朝)를 모으사 하교하기를,
“짐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으되, 다만 태자의 나이 사 세라 섭정(攝政)이 없으면 천하를 총찰(總察)할 길이 없으매 황운으로 섭정을 삼나니, 경등은 지실(知悉)하라.”
하시고 황운을 부르사 이르기를,
“짐이 경의 충심을 알기로 태자를 부탁하노니, 경은 주공(周公)을 효칙(效則)하여 보호(保護)하라.”
하시니, 황운이 면관(免冠) 돈수(敦壽)하며 이르기를,
“형왕과 연왕이 있거늘, 신이 어찌 섭정지임(攝政之任)을 감당하리잇고?”
상이 이르기를,
“짐이 이미 결단하였으매 경은 다시 빈달(賓達)치 말라.”
하시고 인하여 유교(遺敎)를 봉(封)하여 황후를 주시며 이르기를,
“태자가 장성하거든 주라.”
하시고 이윽고 붕(崩)하시니 춘추 오십육 세라. 예월(禮月)을 당하여 숙릉에 안장한 후, 만조(滿朝)가 황운을 미루어 섭정왕(攝政王)을 삼거늘, 황운이 마지못하여 태자를 품에 안고 정사(政事)를 다스릴새, 연호를 태화라 하고 대사천하(大赦天下)하고, 황후의 형 유조로 파촉왕(巴蜀王)을 삼으니라.
차설 형왕이 황운의 섭정함을 혐의(嫌疑)하여 본국에 돌아와 부마 엄평과 더불어 모역(謀逆)할새, 매양 황설 두 사람을 꺼려 근심하거늘, 엄평이 이르기를,
“신에 술법(術法)으로 황설 두 사람 같은 유(類)는 족히 근심할 바가 없사오매, 신이 마땅히 주선(周旋)하리이다.”
하거늘 왕이 대희하여 황금 만 냥을 주니라.
차설 엄평이 가만히 남만(南蠻)에 들어가 황금으로 뇌물 쓰며 만왕(蠻王)을 달래어 이르기를,
“너희 기병(起兵)하여 대국(大國) 남방(南方)을 침노하면, 형왕께 조공하는 방물(方物)을 십년 제감(除減)할 것이요, 남방 십여 성을 베어주리라.”
하니, 만왕이 대희하여 허락하고 서로 약속을 정한 후, 엄평이 북호(北胡)에 들어가 선우(單于)를 달래어 이르기를,
“너희 기병하여 북방을 침노하면 북방 십오 읍을 베어주리라.”
하니 선우가 또한 허락하고, 즉시 철기(鐵騎) 십만을 거느려 북관을 침노하고, 남만을 남방을 침범하매 남북 변보(變報)가 낙역(絡繹)한지라.
섭정왕이 가장 근심하더니, 이때 엄평이 형왕을 권하여 황태후께 표를 올려 이르기를,
“남만 북호가 강성하매, 만일 황운의 부부가 아니면 능히 대적할 자가 없나이다.”
하였거늘 황후가 형왕의 간계(奸計)를 모르시고, 섭정왕의 부부를 명하여 출정(出征)하라 하시니, 섭정왕이 어찌할 수 없어 즉일(卽日) 출사(出師)하되, 승상은 우시춘 등을 거느려 남방으로 향하고, 숭록후는 홍윤 등을 거느려 북방으로 향할새, 승상이 숭록후와 더불어 작별하니, 숭록후가 함루(含淚)하며 이르기를,
“마지못하여 출사하거니와 다만 첩(妾)이 잉태(孕胎) 삼 삭(朔)이매 내두사(來頭事)가 망연(茫然)하도소이다.”
하니, 승상이 추연(惆然)불이(不二)하여 이르기를,
“사세(事勢) 포자(炮煮)함이 사정이 아무리 절박하나, 국가(國家) 대사(大事)를 급히 여겨 즉시 실행케 하라.”
하고 승상이 대군을 휘동하여 나아갈 새, 형초(荊楚)에 이르러 엄평을 의심하여 격서를 형왕께 보내어, 엄평으로 선봉 삼음을 청하니, 형왕이 대경하여 엄평과 의논하니 엄평이 이르기를,
“이는 황운이 신을 의심하고 전장으로 데러가려 함이라. 만일 신(臣) 곧 없으면 대사를 도모치 못하리니, 다만 전하는 백관을 거느려 지경(地境)에 나가 황운을 연접(延接)한 후, 신이 병중(病中)함으로 일컫고, ‘군사 오륙 만을 조발하여 주마.’ 하시면, 황운이 방심(放心)하고 가리이다.”
하니 형왕이 그 말을 좇아 경상(境上)에 나가 황운을 보고 엄평의 계교(計巧)대로 칭탁(稱託)하거늘, 승상이 저의 관접(款接)함을 보고 신지무의(信之無疑)하여 남방으로 향하니라.
이때 엄평이 간계로써 승상 부부를 남북으로 보내고, 철기 오만을 거느려 스스로 선봉이 되고 형왕은 후군이 되어, 바로 황성 남문에 이르러 문을 깨치고 고조(鼓譟) 납함(吶喊)하여 물밀듯 들어가니, 성중 백성이 미처 부모처자를 거두지 못하고 동서 분궤(粉潰)할새, 그 중 유종이라 하는 사람은 본디 협객(俠客)이라.
홀연 불의지변(不意之變)을 당하매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단신(單身) 척검(擲劍)으로 엄평 진중에 돌입하여, 형왕의 시신(侍臣) 오륙 인을 죽이고 칼을 들고 크게 꾸짖으며 형왕에게 달려들새, 시신이 굳게 막으매 칼이 미처 형왕에게 및지 못하여 형왕의 말이 찔리어 엎어지며 형왕이 땅에 떨어지거늘, 엄평이 한 살로 쏘아 유종을 죽이고 형왕을 붙들어 다른 말에 태워 궐내로 헤쳐 들어가,
황후와 태자를 잡아 안치(安置)하고, 옥새를 거두어 황제 위(位)에 직(職)할새, 연왕이 울며 간(諫)하니 형왕이 대노하여 연왕을 한림원에 귀향(歸鄕)보내고, 황운의 가속(家屬)을 잡아 대리옥(大理獄)에 가두고, 연호를 고쳐 중흥 원년이라 하다.
각설 승상이 행군하여 남관에 이르러 적세를 탐지한 후, 먼저 격서를 호진에 보내어 꾸짖고 군사를 몰아 짓쳐 들어가니, 만왕이 본디 승상에 지용을 아는지라. 대패하여 본국으로 달아나거늘, 승상이 전선(戰船)을 준비하여 쫓아가려 하더니 문득 사자(使者)가 이르러 황태후의 밀교(密敎)를 전하는지라.
승상이 놀라 떼어 본즉,
‘황성에 대변이 났으매 바삐 올라와 구하라.“
하였거늘, 승상이 엄평의 흉계인 줄 짐작하고, 우시춘을 불러 만왕을 잡으라 당부한 후, 약간 정예(精銳)한 군사를 거느려 주야(晝夜) 배도(倍道)하여 경사(京師)로 향하여 오더니,
또 문득 황태후 조서(詔書)와 사약(死藥)을 드리거늘, 승상이 대경하여 조서를 급히 떼어 본즉,
‘숭록후 설연이 북호에게 투항(投降)하였다 하니, 승상은 그 가부(家夫)라. 그저 두지 못하여 한 그릇 약을 보내나니, 빨리 먹고 죽으라.’
하였거늘, 승상이 남필(覽畢)에 앙천(仰天)에 탄식하며 이르기를,
“숭록후의 충정(忠貞)한 마음으로 어찌 흉노에게 투항하리오. 실로 괴이하도다.” 하며, 정히 의심할새, 홀연 청조(靑鳥)가 날아와 중군(中軍) 대기(大旗)를 세 번 치거늘, 승상이 헤아리되,
‘주(周) 문왕(文王)이 유리옥(羑里獄)에 갇혔을 때, 청조가 첨각(尖角)을 세 번 치매 문왕이 점복(占卜)하여 그 아들 백읍고(伯邑考)가 달기(妲己)에 해를 입은 줄 알아 계시니, 일정 무슨 간사함이 있도다.’
하고 사자를 꾸짖기를,
“너의 간사함을 알고 묻나니 일호(一毫)도 은휘(隱諱)치 말아 죽기를 면하라.”
하니, 사자가 황겁(惶怯)하여 형왕의 전후(前後) 소위(所爲)를 낱낱이 직초(直招)하거늘, 승상이 불승(不勝) 분노하여 바로 황성에 올라가 형왕을 잡아 죽이고자 하다가 문득 사명산 선생이 이르던 말을 생각하고, 사자를 방송한 후, 즉시 달려 사명산으로 가니라.
재설(再說) 숭록후가 대군을 거느려 북관에 이르러, 관하에 결진(結陣)하고 군사로 하여금 웨기를,
“네 일방 오랑캐로서 천시(天時)를 모르고 무단히 천조(天朝)를 배반하기로, 내 황명을 받아 왔으매 빨리 나와 칼을 받으라.”
하니, 선우가 대노하여 창을 들고 말을 몰아 내닫거늘, 숭록후가 홍윤으로 하여금 대적하라 하고, 철기를 몰아 에워싸며 활을 당기어 한 번 쏘매, 선우의 말이 맞아 거꾸러지며 선우가 땅에 떨어지는지라. 엄숭패 달려들어 선우를 생금(生擒)하여 들이거늘, 숭록후가 선우를 진전(陣前)에 꿇리고 대매(大罵)하기를,
“네 아무리 무지한 오랑캐인들 내 이름을 듣지 못하였느냐?”
선우가 이르기를,
“내 이제 잡힘은 장군의 간계에 속은 바이오. 나의 재조 없음이 아니라.”
하니 숭록후가 이르기를,
“네 말 같을진대, 너를 놓을 것이매 다시 싸워 또 잡히면, 그 때는 항복할 소냐?”
하니, 선우가 허락하는지라. 숭록후가 즉시 놓아 보내었더니, 선우가 다시 진전에 나와 싸우기를 재촉하거늘 숭록후가 맞아 교전할새, 좌수(左手)로 칼을 둘러 선우 의 창을 막으며 우수(右手)로 철퇴를 들어 선우의 투구를 치니, 선우가 놀라 피할 즈음에 숭록후가 창으로 선우의 말 다리를 찔러 엎지르니, 선우가 땅에 떨어지는지라.
선우가 이같이 패하기를 아홉 번에 이르매, 선우가 비로소 신기함을 탄복하고 항서(降書)를 올려 청죄(請罪)하며 엄평의 유인(誘引)하던 사연을 일컫거늘, 숭록후가 항서를 받은 후 선우를 경계하여 방송하니라.
숭록후가 선우의 말로 좇아 형왕과 엄평의 흉계를 알고 본심(本心)이 충격(衝擊)하여 급히 회군(回軍)하고자 하더니, 문득 황태후 조서가 내려왔거늘, 숭록후가 조서를 받아 본즉,
‘황운이 남만에게 투항하였으매 가부(家夫)의 연좌(連坐)로 국법을 폐(廢)치 못하나니 빨리 올라와 죄를 받으라.’
하였거늘, 숭록후가 대경하여 이르기를,
“승상의 충절로 어찌 이적(夷狄)에게 굴슬(屈膝)하였으리오. 이 반드시 역적이 우리 부부를 죽이려 함이니, 내 바로 형주로 회군하여 엄평을 잡아 승상의 옥석(玉石)을 가리리라.”
하고 형주로 향하더니, 태항산 하에 이르러 객관(客館)에 들어 쉴새, 비몽사몽(非夢似夢) 간에 태항산 신령이 이르되,
“승상은 벌써 번복(飜覆)한 기미를 알고 몸을 피하였으매, 그대도 피화(避禍)하여 바로 북해로 가라.”
하거늘 놀라 깨어 헤아리되,
‘황성에 변이 났으매 승상이 일정 몸을 피함이로다.’
가만히 관역(館驛)에 나오니 사자(使者)와 군졸이 다 잠이 깊이 들어는지라.
태항산을 바라고 배사(拜謝)한 후, 말을 돌리어 북해에 들어가 설학사의 조카라 일컫고 산천 구경차로 이곳에 이르렀노라 하니, 모든 백성이 반겨 관접(款接)하여 이르기를,
“소민(小民) 등이 설학사의 은혜를 감격하여 모당(慕堂)을 짓고 사시(四時) 제향(祭香)하나이다.”
하며 그곳을 가리키거늘, 숭록후가 그곳에 이르러 보니 과연 정결하매, 인하여 그곳에 머물새, 백성이 의식(衣食) 공궤(供饋)를 정성으로 하니, 숭록후가 비록 일신(一身)이 안한(安閑)하나, 다만 황성 소식과 승상 존망(存亡)을 알지 못하고, 또 자기 종적(蹤迹)이 탄로(綻露)할까 하여 근심이 첩첩(疊疊)하더라.
차설 형왕의 중흥 원년(元年)은 태자의 태화 사년이라. 승상과 숭록후를 잡으러 갔던 사자가 돌아와 황운과 설연에 도망한 소유(所由)를 고하니, 엄평이 대노하여 사자를 다 베고 형왕에게 이르기를,
“이제 황운 설연이 기미를 알고 다 도망하였으매, 반드시 황후와 태자를 위하여 작변(作變)하리니, 황후 모자를 굳이 지키고 황운의 집을 적몰(籍沒)하고 그 가속(家屬)을 다 정속(定屬)하라.”
하니, 형왕이 즉시 엄평의 아우 엄신으로 하여금 황후 모자를 깊이 가둔 후 사면(四面)에 천극(栫棘)하고 갑병(甲兵)으로 수직(守直)하게 하며, 황운의 집을 파가(破家) 저택(瀦宅)하고, 설연에 여아 화순매는 동관에 정속하고, 설중매는 익주에 정속하고, 동리화는 형주에 정속하니라.
이때 형왕이 택일하여 종묘에 제사하고, 중흥 공신을 봉작(封爵)한 후 태평연을 배설하여 즐길새, 간의태우 왕인이 이르기를,
“황운과 설연을 잡지 못하였으매, 미천(微賤)한 소견에는 이 태평연은 곧 불편연(不便宴)인가 하나이다.”
하니, 형왕이 대노하여 무사를 꾸짖어 왕언을 내어 베라 하니, 엄평이 이르기를,
“왕언의 말이 비록 과도하나 죽일 죄는 아니오니, 폐하는 살피소서.”
하거늘 형왕이 노(怒)를 그치고 왕언을 원찬(遠竄)하고 전조(前朝) 대신을 벼슬로 부르니 각각 시세(時勢)를 탄식하여 산중에 은거(隱居)한 자가 오백여 인이러라.
차설 우시춘이 승상 지휘로 전선(戰船)을 준비하여 남해를 건너가려 하더니, 이때 엄평이 형왕에게 고하고 대장군 손근을 남만(南蠻)에 보내어 우시춘을 물리치고, 군을 가로막아 회군하게 하고, 또 사자를 보내어 우시춘을 병부상서(兵部尙書)로 부르니 우시춘이 황성 소식을 모르는지라.
다만 황태후에 명으로 알고 주야로 달려 경사에 이른즉, 시절이 이미 변혁(變革)하였으매 망극(罔極)함을 이기지 못하여 병부상서 교지(敎旨)를 도로 드리고, 황운에 집터에 가 방성대곡하니, 형왕이 듣고 대노하여 죽이고자 하거늘, 엄평 이르기를,
“우시춘은 대대(代代) 충신에 자손이라. 만일 죽이시면 인심을 능히 정(正)치 못하리니 도리어 벼슬을 돋우어 종시(終是) 사양하거든, 해도(海島)에 내침만 같지 못할까 하나이다.”
하니, 형왕이 좇아 우시춘으로 우승상을 삼으니, 우시춘이 마침내 사양하고 종묘에 나아가 통곡하거늘, 형왕이 더욱 노하여 북해에 원찬하니, 연왕의 부마 조명건이 또한 강개(慷慨)한 뜻이 있어 가속을 거느려 태항산으로 들어갈새, 글을 지어 동문에 붙였으되,
‘세상이 주(周)나라가 되었으되, 나 혼자 은(殷)나라 사람이요, 수양산 일월이 심산(深山)에 비치었도다. 춘풍 어느 곳의 미궐(薇蕨)이 좋았는고. 서산을 향하여 주려죽은 혼을 위로하리로다.’
이적에 홍윤과 서하규가 북관에서 좇아 경사에 이르러 탐지한즉, 황운과 설연이 도망하고 조명건이 태항산으로 들어갔으매, 두 사람이 또한 조복(朝服)을 벗어 원제(元帝) 종묘(宗廟)에 걸고 태항산으로 들어가고, 진권에 난에 출전하였던 공신은 다 태항산으로 들어갔는지라.
형왕이 듣고 대노하여 조명건을 잡아 죽이고자 하거늘, 엄평이 간(諫)하기를,
“조명건을 벼슬을 돋우어 부르시고, 연왕의 죄를 사하시면 거의 인심이 진정할까 하나이다.”
하니 형왕이 좇아 연왕의 귀향을 풀어 제왕(齊王)에 봉하니, 연왕이 종시 받지 아니하고 한림원을 떠나지 아니하니, 백성이 동요(童謠)를 지었으되,
‘태산에 지는 해가 형산에 돋았으니, 더울까 추울까 시절이 어찌될꼬. 언제나 누런 구름에서 비오면 옛 시절을 다시 볼까.’
하였더라.
차설 황운이 필마로 도망하여 사명산에 들어가 도사기 뵈오니, 도사가 반겨 이르기를,
“인간 영욕(榮辱)이 어떠하며 흉중(胸中) 소회(所懷)를 신설(伸雪)하였느냐?”
승상 이르기를,
“부모에 정원(情怨)을 씻고 벼슬이 대승상에 처하였사오나, 불행하여 국가가 번복(飜覆)하였기로, 석일(昔日) 선생의 교훈을 생각하고 왔사오니, 원컨대 밝히 가르치소서.”
도사가 이르기를,
“태자에 천운(天運)이 미처 당(當)하지 못하였기로, 이런 변란이 있거니와 이제 너희 부부를 잡지 못하였으므로 후환(後患)을 염려하여 태자를 죽이려 하나니, 너는 모름지기 오자서(伍子胥)에 일을 효칙(效則)하여 바삐 도모하라.”
승상 이르기를,
“설연의 간 곳을 모르오매 누구와 대사(大事)를 의논하리잇고.”
도사가 이르기를,
“자연 만날 것이니, 다만 정성을 극진히 하라.”
하고 변신(變身)하는 술법(術法)을 가르치거늘, 승상이 인하여 하직하고 산에 내려 몸을 변하여 백수(白首) 노옹(老翁)이 되어 말을 채쳐 동관에 이르러, 전후 사연을 탐지한 후 객점(客店)을 찾아올새, 한 곳을 바라보니 일위 소년이 송단(松壇)에 홀로 앉아 자지곡(紫芝曲)을 노래하니 그 소리 가장 청아(淸雅)한지라.
승상이 나아가 읍(揖)하고, 그 곁에 앉으니, 그 소년이 변색(變色)하고 이르기를,
“내 그대와 더불어 소매(素昧) 평생이거늘,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승상 이르기를,
“노신(老臣)이 비록 존공(尊公)을 알지 못하나, 귀한 노래를 사모하여 이르렀거늘 어찌 이다지 거절하느뇨?”
그 소년 이르기를,
“그대 행색을 보하건대 석일 신원평(新垣平)도 갔고 예양(豫讓)도 갔고 녹림호객(綠林豪客)도 같으니 가장 수상하도다.”
승상이 더욱 괴이 여겨 그 곡절을 물으니 소년 이르기를,
“그대 본디 소년으로 노인이 되어 세상을 속이니, 어찌 신원평의 요술이 아니며, 선제(先帝) 유교(遺敎)를 생각하여 민심을 탐지하며 걸식(乞食)하기를 위주(僞主)하니 어찌 예양에 충심이 아니며, 가시성(城)에 들어가 태자를 도적고저 하니 어찌 녹림호객의 무리 아니뇨?”
승상이 청필(聽畢)에 대경하여, 그제야 신인(神人)인줄 알고 절하여 이르기를,
“진애(塵埃)의 무딘 눈이 비록 선군(仙君)을 몰라 보온 죄 있사오나, 아득하온길을 가르치심을 바라나이다.”
그 소년이 미소(微笑)하며 이르기를,
“그대 충성을 하늘이 감동하시려니와 만일 심원공주의 도움이 아니면 대사를 도모치 못할 것이요, 혹 흉적(凶賊)을 만나거든 나를 찾아 검수산으로 오라.”
하고 손을 들어 원산(遠山)을 가리키며 백우선(白羽扇)을 공중에 채쳐 학을 만들어 타고 가거늘, 승상이 그제야 검수산 선군(仙君)인 줄 알고, 공중을 향하여 사례하고 주점(酒店)으로 돌아와 생각하되,
‘도사에 말이 그렇듯 하매 내 태항산에 들어가 신령께 기도하여 인도하심을 바라리라.’
하고 인하여 태항산에 들어가다가, 마침 조명건을 만나매 크게 기뻐하며 서로 전후사를 문답한 후, 승상이 도사에 말을 낱낱이 전하니 공주가 탄식하며 이르기를,
“이는 다 승상의 충성이 하늘에 사무친 바이라. 내 아들 미영은 태자와 더불어 동년(同年)생 뿐 아니라, 선제(先帝) 몽사(夢事)가 또한 기이하던 바이니, 일로 보건데 미영은 태자를 위하여 하늘이 내신 바이라. 내 어찌 천의(天意)를 거스리리오. 내 한 계교가 있으매, 승상은 잠깐 머물라.”
하고 즉시 시녀(侍女)와 하속(下屬)을 갖추어 일승(一乘) 교자(轎子)에 미영을 데리고 동관에 들어가 성문을 열라 하니, 엄신이 이르기를,
“천자 조서 없이 출입을 임의(任意)로 못하나이다.”
하거늘 공주가 발연(勃然) 대노(大怒) 이르기를,
“내 역로(歷路)에 숙모(叔母) 낭랑(娘娘)을 뵈옵고 가려 하거늘, 네 조그마한 말단(末端)이 감히 나를 막자 하니, 이제 천자께 주달(奏達)하여 너희 죄를 밝히리라.”
하니 엄신이 황겁하여 이르기를,
“공주 명교(命敎)가 여차하시니, 다만 공주만 들어가소서.”
하고 문을 여느니라. 이에 공주가 네다섯 시녀로 교자를 메워 옥방(玉房) 앞에 이르러 미영을 안고 들어가니, 황후가 공주를 보고 방성대곡(放聲大哭) 하시거늘, 공주가 지극 위로하며 가만히 황후 귀에 대어 승상에 사연을 고하니, 황후가 탄식하여 이르기를,
“승상과 조부마의 충성이 지극하나, 어찌 차마 그대에 아자(兒子)를 사지(死地)에 넣으리오.”
공주가 이르기를,
“엄신이 밖에 있어 재촉하매 정곡(情曲)을 다 펴지 못하나이다.”
하고 시녀를 명하여 찬물을 드려 황후께 권하고, 미영을 술을 먹여 취한 후에 황후 곁에 누이고 태자를 바꿀새, 황후가 선제(先帝)의 유교(遺敎)를 금낭(錦囊)에 넣어 태자 몸에 채우며, 옷을 벗겨 미영을 입히고, 미영의 옷을 태자에 입혀 공주를 주며 통곡하니, 공주가 위로하여 이르기를,
“숙모 낭랑은 길시(吉時)를 만나면 다시 태자를 보시려니와, 질녀(姪女)는 아자(兒子)를 사지(死地)에 넣고 가오매 천지 아득하도소이다.”
하고 하직한 후 태자를 나상(羅裳)으로 감추어 교자(轎子)에 올려 나왔더니, 엄신이 들어가 살펴보니 태자가 황후 곁에 누워 자매 의심치 아니하니라.
이날 황천이 무심치 아니하여 남으로 채운(彩雲)이 해를 가리었으매, 엄평이 보고 괴이 여겨 형왕께 고하니, 왕이 황국전에 올라 사면을 살펴보니, 다른 구름은 없고 다만 화염 같은 채운이 일광을 가리었거늘 대사를 명하여 문의하니, 대사가 이윽히 보다가 주하기를,
“나라가 다시 회복할 징조이라.”
이때 공주가 돌아와 태자를 승상께 전하니, 승상이 태자를 보고 공주께 배사(拜謝)하며 이르기를,
“공주의 정성이 지극하심은 선제 신령이 감동하시려니와, 다만 태자에 천운(天運)이 및지 못하였으매 이제 서촉(西蜀)에 들어가 유조와 더불어 보호하여 십오 세 차거든 기병(起兵)하고자 하되, 오직 설연에 간 곳을 아지 못하니 일을 도모하기 어려울까 하나이다.”
하더니 차시 엄숭패 등이 다 모였는지라. 엄숭패 가로되,
“소장에게 천리마(千里馬)가 있으니, 마땅히 주유천하(周遊天下) 하여 숭록후의 거처를 탐지하리이다.”
하니 승상이 기뻐하여 이르기를,
“내 파촉(巴蜀)에 들어간 후 잔도(棧道)를 불 질러 중국 왕래를 끊으리니, 이 지도를 보아 진창고도(陳倉故道)로 좇아 왕래하라.”
하고 서촉 지도를 주어 서로 약속을 정한 후, 승상이 태자를 품고 주야로 행하여 파촉에 들어가 유조를 보고 전후 사연을 이르며, 잔도를 불 질러 중국 왕래를 끊으니라.
재설 엄평이 형왕에게 이르기를,
“이제 태자를 그저 두어서는 황운 등이 반드시 태자를 빙자(憑藉)하여 기병하리니 바삐 태자를 없이할 만 같지 못할까 하나이다.”
형왕 이르기를,
“경이 말이 옳으나 황자를 십오 세 전에 죽이면 후세(後世) 시비(是非)를 면치 못할까 하노라.”
엄평 이르기를, “폐하가 후세 시비를 저어하실진대, 후회함이 있어도 미치지 못하리이다.”
하니, 형왕이 옳이 여겨 엄평으로 하여금 동관에 나아가 태자를 사약(死藥)하고 황후를 방송(放送)하라 하니, 엄평이 명을 받아 동관에 가 태자를 사약하고 신체(身體)를 가져 온즉, 이 태자가 아니거늘 대경하여 엄신을 힐문(詰問)하니 엄신 이르기를,
“소관(小官)이 일찍 태자에 얼굴을 알지 못하옵거니와, 전일 심원공주가 여차여차하여 잠깐 다녀간 후 즉시 들어 보온즉 황후 곁에 태자가 누었으매 어찌 간사함이 있는 줄 알았으리잇고.”
엄평이 대노하여 탑전에 고하고자 하나, 엄신이 죽기를 면치 못할지라. 마지못하여 태자를 사약한 줄로 주하고, 황후를 방송하여 매 삭(朔)에 양식을 이여 연명(延命)하게 하니, 황후가 녹봉(祿俸)을 사양하고 동관 성중에 들어가 통곡 방황하는지라.
백성이 그 정상(情狀)을 차마 보지 못하여 수간 초옥(草屋)을 지어 처소(處所)를 삼고, 의식을 공급하매 황태후가 승상에 충성을 사모하여 화순매를 거두어 기르니라.
이때 우시춘이 북해에 들어가 두루 탐지하여 숭록후 있는 곳을 찾아 들어가 반기고, 황성 소식을 전하니, 설연이 또한 도망한 사연을 이르며 이르기를,
“승상의 사생을 모르고, 내 또한 회잉(懷孕)한 몸이라. 장차 어찌할 줄 몰라 근심하노라.”
우시춘 이르기를,
“북해 태수 왕전은 소장과 더불어 척(戚)에 있으매 그곳에 머물러 종적을 감추시게 하리이다.”
하고 즉시 왕전을 찾아보고 황성 소식과 설연의 사연을 전하니, 왕전이 듣고 가련(可憐)히 여겨 가만히 숭록후를 청하여, 그 부인과 한 데 머물게 하였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숭록후가 해복(解腹)하매 일개(一個) 기린(麒麟)이라.
그 부인께 청하여 유모를 정하여 유아를 맡기고 남복을 개착(改着)하여 우시춘의 적소(謫所)에 왕래하며 승상의 소식을 탐청(探聽)하더라.
차설 승상에 첩 설중매 익주 관비 되어 죽고자 하되, 승상의 혈육을 품어 구 삭이 되었으매 차마 결(結)치 못하더니, 익주 자사(刺史) 손시아는 엄평의 동당(同黨)이라. 설중매에 자색(姿色)을 보고 친합(親合)고자 하거늘, 설중매 듣지 아니하매 손시아가 대노하여 설중매를 가두고 주야로 위협하는지라.
설중매 한 계교를 생각하고 한 장 정원(情願)을 바치되,
‘첩의 죄를 용서하시면 해만(解娩)한 후 명을 좇으리라.’
하였거늘 자사가 대희하여 방송하고 식음(食飮)을 공궤(供饋)하더라.
차설 일일은 한 이고(尼姑)가 들어와 시주를 하라 하거늘, 설중매 이르기를,
“장차 죽을 몸이 시주하여 무슨 효험(效驗) 있으리오.”
하며 문답할 즈음에 문득 한 계교를 생각하고, 이고에게 이르기를,
“존사는 어디 있으며 어느 때 가려하느뇨?”
이고가 이르기를,
“소승은 천축산 영은암에 있더니, 불전(佛殿)에 쓰는 기명(記名)을 얻어 이에 쓰고 이제 가려하나이다.”
설중매 대희하여 이고를 후대(厚待)하고 심중(心中) 소회(所懷)를 다 설화(說話)하니, 이고가 청필(聽畢)에 자비지심(慈悲之心)을 금치 못하여 쾌히 허락하고 이날 밤으로 떠날새, 순풍(順風)을 만나 천축산에 다다라 암자에 오르매 가장 심수(深邃)하고 정결(淨潔)한지라. 머문 지 수일 후에 문득 일개 옥동(玉童)을 생(生)하니 모든 이고가 의논하기를,
“만일 종적이 누설(漏泄)하면 우리에게 해 미치리니, 유아(乳兒)를 다른 곳에 맡기고 부인은 삭발(削髮)하여 사람에 의혹을 끊음이 옳을까 하나이다.”
설중매 이르기를,
“내 몸 살기를 위하여 강보의 자식을 남을 어찌 주리오.”
노승 이르기를,
“이 산 동구 밖에 황처사(黃處士)라 하는 사람이 있어, 사십 후에 한 딸을 낳아 즉시 죽으매 허망(虛妄)한 사람이 되었으니, 그 부인께 부탁하면 낭자 일신이 편하리이다.”
하거늘, 설중매 또한 그 동성(同姓)임을 반겨 허락하니, 노승이 즉시 황처사 부인을 보고 설중매에 사연을 전하니, 그 부인이 듣고 대희하여 즉시 산에 올라와 설중매를 보고 예필(禮畢)에 유아를 간청하거늘, 낭자가 생아(生兒)를 주어 부탁하고 인하여 삭발하니라.
이때 엄숭패 천리마를 몰아 주유천하하다가, 우시춘을 보아 승상 소식을 전하고자 하여 북해에 들어가 우시춘을 보고 전후사연을 이르니, 우시춘이 기뻐하며 즉시 숭록후를 청하여 나오거늘, 엄숭패 대희하여 승상의 사연을 다하니, 숭록후가 듣고 앙천(仰天) 탄(嘆)하며 이르기를,
“심원공주 승상의 충성은 하늘이 마땅히 감응(感應)하시려니와, 어린 자식을 정속(定屬)하였다 하니, 어찌 어린 아이 몸을 보전하리오.”
하며 글을 닦아 주거늘, 엄숭패 즉일 발행하여 형초(荊楚) 지경(地境)에 다다라 객점(客店)을 찾아 쉴 새
이때 엄평이 그 아비를 보라 왔다가 동리화의 자색을 흠모하여, 그 종족 엄필에 부탁하여 황성으로 영거(領去)할새 동리화가 어쩔 수 없어 올라오다가, 객점에 들어 불승(不勝) 격분(激奮)하여 슬피 울더니, 엄숭패 울음소리를 듣고 놀라 주인에게 물으니, 주인이 동리화의 사단을 고하는지라. 엄숭패 대경하여 엄필을 보고 이르기를,
“그대는 어떤 사람이기에 황승상의 총첩(寵妾)을 데려다가 흉적 엄평을 주려 하느냐?”
하니, 엄필이 대노 크게 꾸짖으며 하인을 분부하여 결박하라 하거늘, 엄숭패 대노하여 한 주먹으로 엄필 아울러 십여 명을 짓쳐 물리치고, 동리화를 거두어 말에 실어 파촉으로 들어가 서간(書簡)과 동리화를 드리니, 승상이 동리화를 보고 비감(悲感)하며 숭록후 서간을 떼어보니,
‘일장(一場) 풍파(風波)에 남북(南北)으로 나뉘어 사생(死生) 존망(存亡)을 모르더니, 이제 엄장군을 만나 대강 듣사온즉 기쁘기 측량없는지라. 바라건대 승상은 첩을 괘념(掛念)치 마시고 대사를 도모하소서. 첩은 다행히 득남(得男)하였사오나 내두(來頭) 거취(去就)를 몰라 근심이로소이다.’
승상이 남필(覽畢)에 유체(流涕)하며 아자(兒子)의 이름을 희라 하고, 숭록후에게 회서(回書)를 닦으며 조명건 등에게 글을 부쳤으되,
‘십오 세 되기를 기다려 거사(巨事)하기를 기약하라.’
하니 엄숭패 하직하고 북해에 들어가 숭록후에게 답서를 전하고, 또 태항산에 들어가 각각 서간을 전하니라.
세월이 여류(如流)하여 형왕이 즉위한 지 팔 년이라. 엄평이 승상부부를 잡지 못하여 근심하더니, 일일은 형왕에게 이르기를,
“이 사이 파촉왕이 잔도를 불 지르고 조공을 폐하오니, 그 뜻이 적지 아니하고 요사이 천문을 보온즉 장성(張星)이 서북에 비추오니, 이는 대국에 이롭지 아니한 징조이라. 바삐 서촉지경을 방비하고 파촉 소식을 탐청(探聽)하소서.”
하고 삼진관장(三秦關將)에게 하령(下令)하니라.
이러구러 태자에 춘추가 십오 세에 이르매 승상이 유조와 더불어 정(定)히 기병하려 할새, 엄숭패의 회보를 기다리더니
이때 엄숭패 약속을 정하고 파촉으로 향할새, 삼진(三秦) 지경에 이르러는 삼진 관장 엄순의 부장 손객이 내달아 이르기를,
“네 하인(何人)이기에 이 땅에 출입하느냐?”
엄숭패 이르기를,
“나는 본디 남경 상고(商賈)로서 파촉 사람과 언약이 있어 찾으러 가노라.”
손객 이르기를,
“그러한즉 공문(公文)이 있느냐?”
엄숭패 이르기를,
“급히 오기로 미처 공문을 얻지 못하였노라.”
손객 이르기를,
“이는 간사한 사람이라.”
하고 군사를 호령하여 잡아매라 하거늘, 엄숭패 대노하여 품속에서 철편(鐵鞭)을 내어 손객을 쳐 엎지르니 군사가 다 흩어지는지라. 엄숭패 급히 말을 채쳐 파촉에 돌아와 승상께 소유(所由)를 고하니,
승상이 대희하여 즉시 글을 닦아 숭록후는 기병하여 북방으로 쳐들어오라 하고, 조명건은 각처에 방을 붙여 백성을 안무(按撫)하고 장사를 초모(招募)하여 응변(應變)하라 하니, 엄숭패 즉일 발행하니라.
각설 승상이 태자를 세워 남송(南宋) 황제라 하고 연호(年號)를 건흥(建興)이라 하여, 승상이 스스로 대원수가 되고 유조로 후군장을 삼아 십만 병을 조발하여 파촉(巴蜀) 도원수(都元帥) 육우로 선봉을 삼아 나아올새, 삼관에 이르러는 엄준이 그 세를 두려워 굳이 지키고 나지 아니하는지라. 승상이 육우를 명하여 관문을 깨치고 짓쳐 들어가니, 엄준이 황망히 필마로 달아나거늘 승상이 삼군(三軍)을 호궤(犒饋)하고 방(旁)붙여 백성을 안무하니라.
이때 엄숭패 숭록후에게 약속을 전하니, 숭록후가 밀서(密書)를 보고 우시춘에게 이르기를,
“이곳 병마(兵馬)가 적으매 가히 북흉노를 달래어 일지군(一枝軍)을 청하리라.”
하고 일 척 전선(戰船)을 타고 북으로 향할새, 이때 황희 나이 십일세라. 기골이 장대할 뿐 아니요, 또한 모친 검술을 배워 만인적(萬人敵)할 재주가 있는지라. 이날 따라가기를 청하거늘, 숭록후가 마지못하여 데리고 북국에 들어가 선우를 보아 소유(所由)를 이르고 구완병을 청하니, 선우가 전일 숭록후에 구종구금(九縱九擒)한 은혜를 생각하고, 즉시 정병 십만을 조발하여 주거늘, 숭록후가 스스로 중군이 되고 우시춘으로 선봉을 삼고 호장(胡將) 용골통으로 후군장을 삼아 북관을 쳐 들어올새, 북관장 손자관이 저당(抵當)치 못하여 달아나고 북방 열읍(列邑)이 망풍귀순(望風歸順)하더라.
각설 형왕이 서북이 진동함을 듣고 대경하여 문무(文武)를 모아 의논할새, 엄평 이르기를,
“이제 황운과 설연에 형세 태산 같으매, 그 봉예(鋒銳)를 당할 자가 없는지라. 신이 마땅히 출전하리니, 폐하는 북방을 굳이 지키소서.”
하고 손자오를 명하여 군사 이십만을 주어 북관에 나아가 설연을 막으라 하며, 엄평이 스스로 대원수가 되어 삼십만 병을 조발하여 파촉을 향하니라.
황운전 권지삼
차설 손자오가 군사를 몰아 북관에 이르러 성밖에 진치고 대호(大呼)하기를,
“반적(叛賊) 설연은 들으라. 태자가 무도(無道)하기로 동관에서 죽은 지 오래거늘, 너희 부부가 없는 태자를 빙자하여 변방을 요동케 함은 어찌된 일이뇨?”
하고, 싸움을 돋우오니 숭록후가 대매(大罵)하며 이르기를,
“너희 대대(代代) 국록지신(國祿之臣)으로 흉적 엄평과 형왕을 도와 대역(大逆)을 행하매, 천하가 다 여등(汝等)의 고기를 씹고자 하거늘, 네 감히 입을 열어 큰 말을 하느냐?”
하니, 손자오가 대노하여 부장 엄탐으로 나가 싸우라 하거늘, 우시춘이 크게 꾸짖어 이르기를,
“내 어찌 소아(小兒)와 더불어 교봉(交鋒)하리오. 너는 돌아가고 손자오를 보내라.”
하고 마침내 요동(搖動)치 아니하니 손자오가 대노하여 정창(挺槍) 출마(出馬)하여 우시춘을 맞아 오십여 합을 싸우더니, 문득 숭록후가 징을 쳐 군을 거두는지라. 우시춘이 손자오를 버리고 돌아오거늘, 숭록후가 이르기를,
“내 한 계교로써 손자오의 형제를 잡을 것이매, 구태여 장군으로 하여금 수고를 말고자 함이라.”
하고 이날 밤 삼경에 우시춘을 명하여 이르기를,
“장군은 오백 군을 거느려 북각(北閣) 동문밖에 험한 곳에 나아가 섶을 쌓아 불을 놓고, 거짓 고조(鼓譟) 납함(吶喊)하면 적병이 일정 구하러 가리니, 장군은 지레 남문 밖에 매복(埋伏)하였다가 잡되, 나의 화포(火砲)를 들어 응병(應兵)하라.”
하고 숭록후가 일지군(一枝軍)을 거느려 북각 성하에 가만히 매복하여 때를 기다릴새, 손자오가 이날 우시춘이 저의 무예가 두려워 군을 거두었다 하여 오경(五更)에 군사를 밥 먹여 가만히 문을 열고, 북(北)진(陣) 앞에 이르니 인적이 없으매 급히 회군(回軍)할 즈음에, 방포(放砲) 소리 나며 양()노군(兩弩軍)이 살출(殺出)하니, 위수 대장은 설연이라.
손자오가 대경하여 미처 손을 놀리지 못하여 숭록후가 한 칼로 손자오를 베어들고 군을 몰아 북각성으로 향할새, 우시춘이 포성을 듣고 군사를 명하여 일시에 불을 지르며 스스로 남문 밖에 매복하였더니, 손자관이 산성에 불 일어남을 보고 급히 남문을 열고 나올새, 문득 우시춘이 내달아 십여 합을 싸워 한 칼로 손자관을 베니 날이 이미 밝았는지라.
숭록후가 성내에 들어가 백성을 진무(鎭撫)하고 북해 태수 왕전으로 산성 양초(糧草)를 수운(輸運)하며 항졸(降卒)로 전대를 삼아 유주 연주 등처(等處)를 진발(進發)하니라.
각설 조명건이 승상에 밀서를 보고 방문(榜文)을 만들어 엄숭패와 서하규와 홍윤등을 주어 각처에 붙였으니, 하였스되,
‘심원공주의 아자 미영으로써 가시성에 들어가 태자를 바꾸어, 이제 십오 세 되매 남송(南宋) 황제를 삼고 황운과 설연이 기병하여 중원을 회복하려 하나니, 지기(志氣)있는 자는 태자를 위하여 일시에 접응(接應)하라.’
하였더라.
이때 조명건이 장달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내 양주 자사(刺史)를 보고 이해로 달래어 ‘병마를 빌리라.’ 하여 만일 순종치 아니하거든 내 그대에게 눈짓을 주리니, 그대는 철퇴를 품었다가 하수(下手)하라.”
하고 함께 양주관에 들어가니 자사 조열이 맞아 예필 좌정(坐定)에 조명건이 황운이 태자 구호(救護)한 사연을 일러 이르기를,
“그대도 합력(合力)하여 역당(逆黨)을 소멸하고, 이름을 죽백(竹帛)에 들임이 어떠하뇨?”
조열이 변색하여 이르기를,
“내 이제 천자 특교(特敎)로 일방(一方)을 지키매, 그 임자를 위함은 한가지니 내 마땅히 이 뜻으로 천자께 주달하리라.”
하거늘 조명건이 대노하여 장달에게 눈을 주니, 장달이 즉시 품속에서 철퇴를 내어 조열을 쳐 엎지르니 부중이 요란한지라.
조명건이 큰 기에 ‘연왕부마 조명건이라’ 써 성상에 꽂고 웨기를,
“내 이제 황운을 접응하여 태자를 모셔 중원을 회복하려 하나니, 너에 만일 황운과 설연을 착히 여기거든 귀순하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나를 항거하라.”
하니 백성이 이 말을 듣고 다 기뻐하여 병마(兵馬)를 등대(等待)하거늘, 조명건이 장달로 선봉을 삼아 주야배도(晝夜倍道)하여 황성 남문에 다다라 문을 깨치고 들어가니 황성은 본디 비었는지라.
형왕이 문무를 모아 대적하라 하고, 미처 궁첩(宮妾)을 거느리지 못하고 서문으로 도망하여 엄평을 찾아가더라.
조명건이 기치(旗幟)를 세워 백성을 안무한 후, 형왕비와 엄평의 가속을 다 잡아 황옥(皇獄)에 가두고 우양(牛羊)을 잡아 삼군을 호궤(犒饋)하더니, 이때 엄숭패 등이 돌아오고 또 숭록후가 북관에서 좇아 황성에 다다르니, 조명건이 대희하여 성문을 크게 열고 영접하여 서로 칭사(稱辭)할새, 제장이 형왕비(荊王妃)와 엄평의 처자를 죽이기를 청하거늘, 숭록후가 이르기를,
“비록 그 지아비 대역을 범하였으나 사사로이 죽이지 못할 것이매, 마땅히 신황(新皇)에 처분을 기다리라.”
하고 아직 방송(放送)하여 사궁(四宮)에 처(處)하게 하였더니, 엄평의 처와 형왕비 부끄러워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숭록후가 가련히 여겨 예로써 장사하게 하고, 엄숭패를 명하여 태항산에 들어가 심원공주를 맞아오라 하고, 조명건을 명하여 동관에 나아가 황후를 모셔 오라 하며, 숭록후가 친히 한림원에 가 연왕을 맞아 와 황성을 지키오고, 서하규와 홍윤 등으로 하여금 사십만 군을 주어 형왕을 따라 잡으라 하다.
이때 황운 삼진을 파하고 엄준을 따라 파릉(巴陵)에 이르러는, 엄준이 겁하여 나지 아니하고 파산 태수 엄술에게 글을 보내어 급히 엄평에게 완병을 청하라 하였거늘, 엄술이 즉시 엄평에게 통하며 일변 장졸을 초모(招募)할새,
전일 협객(俠客) 유종이 죽은 후 그 형 유완이 도망하여 파산 성중에 숨었더니, 승상 기병함을 듣고 아우의 원수를 갚고자 하여 수문군이 되었다가, 이 밤에 엄술을 베어 가지고 오백 군을 거느려 성밖에 나와 승상께 드리니, 승상이 대희하여 유완으로 마병장(馬兵將)을 삼아 군무(軍務)를 총찰(總察)하게 하고, 엄술의 머리를 기에 달아 호령하니, 엄준이 보고 불승(不勝) 분노하여 삼만 병을 이끌어 성밖에 나와 싸움을 청하거늘, 승상이 삼군을 몰아 짓치니 파릉병이 대패하여 흩어지고, 엄준이 미처 성에 들지 못하고 수백 기를 거느려 서호로 달아나거늘, 승상이 인하여 서호로 향하니라.
차설 엄평이 영군(領軍)하여 서호에 다다르니 엄준이 들어와 삼진과 파릉이 패함을 고하니, 엄평이 웃으며 이르기를,
“황운이 비록 용맹하나 나의 신병(神兵)을 당하지 못하리니, 너는 모름지기 성을 지키어라.”
하더니 문득 보하되 촉병이 벌써 이르렀다 하거늘, 엄평이 성에 올라 바라본즉 대군이 산야(山野)에 덮였는데, 오운(五雲)이 둘렀으며 서기(瑞氣) 공중에 닿았는지라. 엄평이 묻기를,
“저 진중에 어떤 사람이 있느뇨?”
엄준 이르기를,
“전진에는 황운이 있고 후진에는 파촉왕 유조가 태자와 더불어 있다 하더이다.”
엄평이 심중에 앙앙(怏怏)하여 대군을 몰아 결진하고, 문기하(門旗下)에 서서 웨기를,
“태자는 이미 동관서 사약하여 그림자도 없거늘, 네 거짓 태자를 빙자하고 중원을 침노하니 그 죄 어디 미쳤느뇨?”
승상이 대매(大罵)하기를,
“역적 엄평은 들으라. 형왕을 부촉(咐囑)하여 대위(大位)를 찬탈(簒奪)하니 그 죄 하나이요, 황후와 태자를 가시성에 가두니 그 죄 둘이요, 조서를 위조하여 나를 사약하려 하니 그 죄 셋이요, 태자를 없이 하고자 하니 그 죄 넷이요, 미영이 죽을 때 태자가 아님을 알고 짐짓 속여 속이려하니 그 죄 다섯이요, 연왕의 간함을 듣지 아니하고 한림원에 수금(囚擒)하니 그 죄 여섯이요, 유종이 네 살을 맞아 죽은 것과 또 그 주검을 온전케 아니하니 그 죄 일곱이요, 나의 효자비는 선제(先帝) 포상하시심이거늘 훼파(毁破)하니 그 죄 여덟이요, 나의 집을 무단(無斷)히 적몰(籍沒)하고 가속(家屬)을 정속(定屬)하니 그 죄 아홉이요, 나의 총첩은 선제 사급(賜給)하신 바이거늘 체면(體面)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핍박하니 그 죄 열이라. 이 열 가지 죄는 천지간(天地間)에 용납(容納)하지 못할 것이거늘, 갈수록 하늘을 속이고자 하여 이같이 항거하니 어찌 우습지 아니하리오.”
하니, 엄평이 대노하여 군사를 몰아 싸움을 돋우거늘, 승상이 육우를 명하여 대적하라 하니, 육위 정창 출마하여 교봉(交鋒) 십여 합에 육우에 창법(槍法)이 산란(散亂)함을 승상이 보고 실수함이 있을까 하여 참룡검(斬龍劍)을 두르며 내다르니, 엄평이 육우를 버리고 승상을 맞아 싸워 백여 합에 이르러는, 승상이 한 손으로 엄평의 창을 막으며 한손으로 철퇴를 빼어 엄평의 머리를 치니, 엄평이 몸을 기울여 피하고 활을 당기어 쏘는지라.
승상이 살을 잡아 꺾고 거짓 패하여 본진으로 돌아오되, 엄평이 의심하여 따르지 아니하거늘 승상이 제장으로 의논할새, 문득 보(報)하되 적장 엄상이 항복한다 하니, 승상이 불려 들어온 뜻을 물으니, 엄상 이르기를,
“소장이 이제 승상에 신무(神武) 영재(英才)하심을 보고, 엄평에 권하여 일찍 항복하라 한즉, 엄평이 소장을 죽이려 하매 엄준이 간하여 죽기를 면하고, 등을 오십을 쳐 형옥에 가두기로 소장이 가만히 옥졸을 회뢰(賄賂)하고 도망하여, 승상에 은덕을 입을까 바라고 이에 왔나이다.”
승상 이르기를,
“네 역적을 배반하고 왕사(王師)를 맞으니, 그 충의를 탄복하거니와 이제 무슨 계교 써서 서호를 파하리오?”
엄상 이르기를,
“승상이 친히 대군을 총령하여 서호 성하에 이르신즉, 소장이 마땅히 성을 넘어 들어가 문을 열지니, 그때를 타 들어가면 서호성을 파하고 엄평 엄준을 잡으리이다.”
하거늘 승상이 대희하여 주식(酒食)을 주어 후대(厚待)하고, 육우를 불러 귀에 대고 여차여차 하라 하고, 유조를 불러 귀에 대고 여차여차 하라 하고, 대소(大小) 장사를 진발(進發)하여 밤을 기다려 풍우같이 서호 성하에 이르니, 엄상이 가만히 성을 넘어 들어가 과연 문을 여는지라.
승상이 급히 군을 몰아 들어갈새, 미처 문을 들지 못하여 문득 일성 포향에 양노군이 살출(殺出)하니, 좌에는 엄준이요 우에는 엄평이라.
승상이 급히 서호성 좌편으로 달아나며 웨기를,
“내 오늘날 엄평의 꾀에 빠지도다.”
하고 문득 땅에 거꾸러지거늘, 엄평이 소리를 지르고 창을 들어 찌르니 촉병이 일시에 흩어지며 소리 질러 이르기를,
“오늘날 승상이 이곳에 와 마칠 줄 알리오.”
하는지라. 엄평이 엄준을 돌아보아 이르기를,
“이제 황운을 잡았으매 태자와 유조를 맞아 잡으리라.”
하고 대대(大隊) 인마(人馬)를 몰아 촉영(蜀營)에 돌입하매, 한 사람도 보지 못하고, 좌우로 좇아 유조와 육위 짓쳐 오고, 뒤에 황운이 따르며 크게 불러 이르기를,
“네 감히 간사한 꾀로 엄상으로 하여금 사항(詐降)하여 사람을 유인하여 죽이고자 하나, 내 이미 알고 변신법을 행하여 이에 이르니, 이제 네 어디로 가고자 하느냐?”
엄평이 대경하여 죽기로 싸워 능히 벗어나지 못하매, 급히 십이신법(十二神法)을 내리어 몸을 공중에 띄어 올라 서호에 돌아와 문을 굳이 닫고 나지 아니하더니,
이때 형왕이 약간 문무(文武)를 거느려 이르렀거늘, 엄평이 대경하여 맞아 드리매 형왕이 전후사연을 이르며 통곡하는지라. 엄평이 또한 분기를 이기지 못하나 어찌할 수 없어 정히 근심할새, 탐마(探馬)가 보하되, 설연이 손자오를 죽이고 황성으로 쫓아 이에 이르렀다 하거늘,
엄평이 성에 올라 살펴보고 형왕에게 이르기를,
“만일 황운과 설연이 합력하면, 그 세(世)를 저당(抵當)하기 어려우매 금야에 먼저 설연을 파(破)하리이다.”
하고 영리한 군사를 불러 계교를 가르쳐 송진(宋陣) 허실(虛實)을 탐지하여 오라 하니, 군사가 영(令)을 듣고 상고(商賈)에 미투리를 하고 찬물을 지고 송진 근처로 다니며 소식을 듣볼새, 이때 숭록후가 서후 남문 밖에 결진하고 삼군을 호궤하더니,
문득 소졸(小卒)이 보(報)하되,
“서호 백성이 찬물을 지고 진밖에 왕래하매 가장 수상하더이다.”
하거늘 숭록후가 장달을 불러 이르기를,
“그대는 적은 군사에 복색을 입고 진밖에 나아가 그 놈을 보고 온 뜻을 물은 후 여차여차 하라.”
하니, 장달이 즉시 대장 복색을 벗고 진전에 나아가 한 떼 군사를 모아 술을 먹다가 그 놈을 불러 이르기를,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진전(陣前)에 임의로 출입하느뇨?”
기인(其人) 이르기를,
“나는 서호 백성이러니, 어물(魚物)을 지고 성중에 들어가 팔며, 겸하여 동생이 성중 군사가 되었기로 소식을 알고 돌아가는 길이라.”
하거늘 장달이 은근히 기인(其人)을 청하여 주육(酒肉)으로 후대하며 이르기를,
“네 가진 것을 다 살 것이매, 성안에 가 술을 사옴이 어떠하뇨?”
기인 이르기를,
“군중이 다 취하였거늘 또 어찌 술을 구하느뇨?”
모든 군사가 장달에게 이르기를,
“우리 진취(盡醉)하였으매 술을 다시 구하지 맒이 좋을까 하노라.”
장달 이르기를,
“숭록후가 각 진(陣)에 분부하되, 적병이 저의 성중에 들었으매, 오늘밤은 각 진 군사가 편히 쉬라 하였나니, 어찌 오늘 같은 날에 감히 취하지 아니하리오.”
하니 기인이 듣고 가만히 기뻐하여 술사오기를 청하는지라. 장달이 즉시 은자(銀子)를 주어 보내니, 기인이 돌아가 엄평에게 그대로 고하니, 엄평이 대희하여 이르기를,
“성사(成事)한 후 너를 중상(重賞)하리라.”
하고 술을 많이 주어 보내었더니, 장달이 술을 받고 이 뜻으로 숭록후에게 아뢰니, 숭록후가 즉시 전령하여 사면에 군사를 매복하고, 본진에 기치(旗幟)를 버려 꽂고 명등(明燈)을 달아 거짓 진세(陣勢)를 베풀어 적병을 기다리더라.
이날 엄평이 엄준과 더불어 뫼에 올라 살펴본즉, 처처(處處)에 명등을 달았으나, 사면이 고요하매 일정 취하여 잠든 줄 알고, 군사를 점고(點考)하여 문을 열고 바로 송진을 깨쳐 들어가니 진중이 다 비었는지라. 엄평이 대경하여 급히 회군할새, 문득 방포일성(放砲一聲)에 사면에 불이 일어나며, 복병이 일시에 내다르니 함성이 천지진동하는지라.
엄평이 해심(垓心) 중에 들어 서하규와 더불어 교봉할새, 홍윤이 들어와 엄준을 베고 깨치거늘, 엄평이 양장을 대적하지 못하여 서호를 바라고 달아나더니, 우시춘이 길을 막으며 서하규와 홍윤이 뒤에서 엄살하는지라. 엄평이 기운을 다하여 서하규의 말을 찔러 엎지르고 일면(一面)을 헤쳐 닫더니,
문득 설연이 길을 막고 충살하거늘, 엄평이 맞아 싸우다가 말을 돌이켜 닫고저 할새, 설연의 칼이 이는 곳에 엄평의 말 뒷다리를 베어 땅에 엎지르니, 엄평이 급히 걸어 도망할새 설연이 군사를 몰아 성하에 이르렀더니, 엄평이 한소리를 지르고 몸을 날려 성상(城上)에 뛰어 올라가매 능히 잡지 못하고 물러 결진(結陣)한 후,
글월을 닦아 승상에게 보내니, 승상이 대희하여 즉시 숭록후를 청(請)하니, 숭록후가 제장으로 하여금 본진을 지키오고 오백 기를 거느려 승상 진중(陣中)에 이르러 태자께 복지 사배하며 일장(一場) 체읍(涕泣)하거늘, 태자가 또한 함루(含淚)하며 이르기를,
“심원공주와 승상부부에 충성이 아니런들 어찌 오늘날이 있으리오. 그러나 다만 미영의 원사(怨死)함이 지극(至極) 참절(慘絶)하리로다.”
하시며 승상 부부가 만나 아자(兒子)를 보고, 승상이 일희일비 이르기를,
“풍파에 나뉘어 낳은 자식이 이같이 장성하였으매, 나에 늙음을 가히 알리로다.”
하며 서로 전후 사연을 일러 슬퍼하더라.
차설 태자가 승상 부부를 위하여 낙봉연(樂逢宴)을 배설(排設)하고 술을 내와 서로 위로할새, 숭록후가 이르기를,
“첩이 본진을 비우고 이렇듯 잔치에 즐기니, 만일 변사(變詐)를 보내어 엄평을 유인하여 저의 성지(城址)를 떠나게 하면, 그 가운데 반드시 계교가 있을 것이로되, 마땅히 보냄직한 사람이 없을까 하나이다.”
하더니 문득 황희 앞에 나와 고하기를,
“소자가 원컨대 한 번 나아가 엄평을 유인하리이다.”
하거늘, 승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조그마한 아이가 무슨 모책(謀策)으로 호혈(虎穴)에 들어가 엄평을 유인하려느냐? 너는 망령(妄靈)된 말을 내지 말라.”
하니, 숭록후가 이르기를,
“아이 나이 비록 어리나 무예와 지혜 비범하매 마땅히 보내리라.”
하고 계교를 가르쳐 보낼새, 황희 고하기를,
“소자가 엄평을 달래어 성상(城上)에 홍기(紅旗)를 세우거든 모친이 진을 범하시고, 백기(白旗)를 세우거든, 부친이 진을 범하소서.”
하고 가만히 선동(仙童) 복색을 갖추고 일 필(匹) 청여(靑輿)를 몰아 서호로 향하니, 이때 황희 나이 십이 세니 용모와 풍채 선동과 흡사하더라.
각설 엄평이 두 번 패하여 장졸을 무수히 죽이고, 다시 계교가 없어 정히 우민(憂悶)함을 마지아니하더니, 문득 군사가 보하되,
“성밖에 일위 선동이 와 스스로 이르되, 형산에 있노라 하고 뵈옴을 청하나이다.”
하거늘 엄평이 가장 괴이 여기며 청하라 하니, 황희 표연히 들어와 길이 읍(揖)하는지라. 엄평이 걸어 앉아 묻기를,
“네 무슨 연고로 당돌히 군중에 들어오느냐?”
황희 웃으며 이르기를,
“내 형악 산동도사의 제자이러니, 선생 명을 받자와 승상께 뵈오러 왔나이다.”
엄평이 문득 대노 이르기를,
“도사 나와 더불어 이별한 지 십 년이로되, 일찍 너를 보지 못하였나니, 네 일정 황운에 꾀로 우리 진중 허실을 알고자 함이라.”
하고 무사를 호령하여 원문 밖에 내어 베라 하거늘, 황희 문득 앙천(仰天) 대소(大笑)하니, 엄평이 더욱 성내어 이르기를,
“네 어찌 웃느뇨?”
황희 이르기를,
“내 일찍 들은즉 승상이 지혜 족(足)하고 꾀 많다 하더니, 이제 보건대 필부(匹夫)의 용(勇)과 여자의 소견(所見)이매 그런고로 웃노라.”
엄평 이르기를,
“어찌 이름이뇨?”
황희 이르기를,
“내 선생 명으로 승상을 구하러 왔거늘, 선생의 안부도 묻지 아니하고, 나를 의심하여 먼저 죽이고자 하니, 이는 족히 취할 것이 없고 천하 영웅으로서 같은 문인(門人)을 알지 못하니, 어찌 강적을 파하고 천하를 정(定)하리오. 내 한번 죽기는 아끼지 아니하되, 선생의 지교(指敎)가 가석(可惜)이로다,”
하니, 엄평이 바야흐로 황희에 손을 잡아 자리에 올려 이르기를,
“그대는 허물치 말라. 난세(亂世)를 당하여 그대 행색을 시험하여 진위(眞僞)를 탐지함이거니와, 그대 성명은 무엇이며 선생의 지교가 어떠 하시더뇨?”
황희 이르기를,
“소생에 성명은 위황이요, 오 세부터 선생을 따라 수도하더니, 이 사이 선생이 산에 올라 망기(望氣)하시고 이르기를, ‘이제 엄승상이 서호 성중에서 촉병과 더불어 상지(相持)하여 가장 근심하나니, 너는 빨리 내려가 승상을 도아 세상에 이름을 전하라.’ 하시매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왔더니, 비록 모책이 있으나 쓰지 아니하시리니 다만 돌아기기를 청하나이다.”
엄평 이르기를,
“그대 나이 몇이나 하뇨?”
황희 이르기를,
“세상을 안 지 겨우 십이 세로 소이다.”
엄평 이르기를,
“대저 그대 무슨 계교로 황운과 설연을 파하리오.”
황희 이르기를,
“병가(兵家) 승패는 오직 지혜(智慧) 유무에 있나니, 이러므로 전단(全端)은 밤에 소를 놓아 제국 칠십여 성을 회복하고, 손빈(孫臏)은 일만(一萬) 솥으로써 위국(魏國) 오만 철기(鐵騎)를 파하였는지라. 이제 황운 설연이 비록 지용(智勇)이 유족(有足)하나 내 한번 적진을 살피면, 어찌 그 중에 모책이 없으리오.”
엄평이 대희하여 이르기를,
“오늘날 그대에 의논을 들으매, 운무(雲霧)를 헤친 듯하매, 현제(賢弟)는 모름지기 나의 불민(不敏)함을 허물치 말고, 좋은 모책으로 인도하여 부귀를 함께 하라.”
하고 인하여 형왕께 뵈고 시중(侍中) 대부(大夫)를 삼으니, 황희 이르기를,
“선생 명으로 산에서 내려왔으나, 어찌 벼슬에 뜻이 있으리오. 다만 군무를 의논할 따름이라.”
하거늘 엄평이 더욱 믿어 함께 적루(敵樓) 상(上)에 올라 송진(宋陣)을 바라본즉, 문득 황운이 수십 기를 데리고 성하 송정(松亭)에 좌정하고 술을 서로 권하여 무수히 먹고, 각각 땅에 거꾸러져 자거늘, 황희 엄평에게 이르기를,
“황운이 지모(智謀)가 다 족하다 하더니, 이제 보건대 한번 이김을 얻고 저렇듯 태만하니 어찌 우습지 아니하리오. 내 들은즉 승상의 사법(射法)이 기특하다 하매 이때를 타 한번 시험하여 보라.”
하니 엄평이 좇아 활을 당기어 한번 쏘아 황운에 가슴을 맞추니, 모든 군사가 놀라 일어나 황황(遑遑) 분주(奔走)하다가, 황운을 말에 실어 돌아가거늘, 엄평이 대희하더니 문득 세작(細作)이 보(報)하되, 황운이 살을 맞아 명이 위급하매 설연이 이르러 구호한다 하거늘, 황희 이르기를,
“이제 좋은 기회를 잃지 말라.”
하니, 엄평이 이르기를,
“먼저 설연의 진을 치리라.”
하니, 황희 암희(暗喜)하여 가만히 성상(城上)에 홍기(紅旗)를 꽂아 대진(對陣)에 알게 하였더니,
차시(此時) 승상이 초인(楚人)을 만들어 자기 복색을 입혀 계교를 베풀어 돌아오고, 황황한 모양을 반포하다가, 문득 성상에 홍기 세움을 보고 가만히 숭록후에게 사연辭緣을 통하여 군사를 풀어 각처에 매복하다.
이날 엄평이 황희로 하여금 성중을 지키오고, 각처의 군을 몰아 설연에 대(大)채(寨)에 이르러 짓쳐 들어갈새, 좌우에 삼렬(森列)한 것이 다 초인(楚人)이요, 한 사람도 없는지라. 급히 군을 물리더니 문득 일성포향에 함성이 일어나며, 우시춘이 내닫거늘 엄평이 놀라 정히 맞아 싸울새, 또 설연이 들어와 엄평의 부장 둘을 베어 내리치거늘, 엄평이 대경하여 죽기로 싸워 일면을 헤쳐 달아나는지라.
이때 황희 이미 서북문을 열어 육우를 맞아 드릴새, 형왕이 대경하여 시신(侍臣)을 거느려 서문을 열고 엄평을 찾아 가더니, 장달이 내달아 유성퇴(遊星槌)로 형왕의 말을 쳐 엎지르니 형왕이 말에서 떨어지는지라. 시신 오륙 인이 장달을 막으며 형왕을 붙들어 다른 말을 태우며 크게 웨기를,
“천자의 위급함이 시각에 있거늘, 엄승상은 어디 가고 구(求)하지 아니하느뇨?”
하니 엄평이 듣고 대경하여 설연을 버리고, 마상에서 몸을 날려 들어와 형왕을 옆에 끼고 쌓인 대를 뛰어넘어 달아날새, 성호강에 이르러는 화광이 충천하며 무수한 철기 강두(江頭)를 덮어오거늘, 엄평이 창황(?怳) 망조(亡兆)할 즈음에 부장 수십여 인이 죽기를 벗어나 이르렀으매, 엄평이 명하여 적병을 대적하라 하고, 급히 강변에 다다라 상고(商賈)의 배를 앗아 형왕을 싣고 건너 형주로 도망하니라.
이때 황운이 엄평을 잃고 군사를 수습하더니, 숭록후가 대군을 몰아 엄평을 찾아 오다가 황운을 만나 엄평의 도망한 줄 알고 서호성으로 돌아올새, 황희 성문을 열고 나와 맞아 드리거늘 승상이 태자를 뫼서 삼군을 호궤(犒饋)할새, 제장이 황희에 공을 표(表)하기를 주(奏)하오니, 태자가 좇아 황희로 시중태부를 삼으니라.
차설 숭록후가 삼만 군을 거느려 선봉이 되고, 유조와 황희는 삼만 군을 거느려 태자를 뫼서 행하니라. 이때 엄평이 허다 군마를 죽이고 겨우 형왕을 구하여 형주성으로 들어가니, 자사 엄승이 군졸을 거느려 맞아 형주로 향할새, 엄릉이 이 소식을 듣고 대경하여 성 밖에 나와 형왕을 맞아 궁중에 들이고, 각도병마를 부르며 양초(糧草)를 수운(輸運)할새,
바야흐로 형왕이 왕비와 학희공주가 자결한 사연을 듣고 방성대곡할 즈음에, 문득 보하되, 황운 등이 성하에 이르렀다 하거늘, 엄릉이 성문을 굳게 닫고 각도 구병(救兵)을 기다릴새, 오직 익주 자사 손시아가 오만 군을 거느려 이르렀더라.
차시 승상이 싸움을 돋우되 엄평이 종시(終是) 나지 아니함을 보고 문득 한 계교를 생각한 후, 왕전과 육우를 명하여 나아가 싸움을 청하라 하고, 가만히 숭록후와 더불어 군사의 복색을 입고 성하에 나아가, 굴을 파고 삼백 궁노수(弓弩手)를 매복한 후, 본채(本寨)에 하령(下令)하여 거짓 주육(酒肉)을 무수히 보내는 모양을 뵈거늘,
이때 엄평이 성에 올라 살핀즉 황운과 설연이 대기(隊旗)를 중영(中營)에 꽂고 각진 장졸이 일시에 모여 절하고 물러나매, 군사가 각각 주육(酒肉)을 난만(爛漫)히 가져 앞앞에 들이며, 일변 육우의 진으로 어지러이 왕래하여 즐기는지라.
엄평이 정히 의혹하더니 홀연 왕전이 갑옷을 벗고 대취하여 진전에 나와 무수히 질욕(叱辱)하며, 한 사람은 내달아 꾸짖어 이르기를,
“나는 유종의 형 유완이거니와, 너는 내 아우의 원수(怨讎)이니 내 마땅히 네 아비를 베고 네 간을 내어 먹으리라.”
하며 혹 엎어지고 혹 자빠지거늘, 엄평이 대노하여 엄담과 더불어 철기 오백을 거느리고 내달아 육우 등을 맞아 싸워 삼 합이 못되어 육우 등이 패하여 달아나는지라.
엄평이 의심하여 따르지 아니할 즈음에, 유완이 또 말을 놓아 달려들거늘, 엄평이 대노하여 맞아 싸워 수 합이 못되어 유완이 몸을 흔들어 말에 내려져 창을 버리고 달아나는지라. 엄평이 급히 따라 육우에 진앞에 다다라서는, 문득 포성이 대진(大振)하며 삼백 궁노수가 일어나니, 엄평의 말이 맞아 거꾸러지며 엄평이 땅에 떨어지거늘, 숭록후가 내달아 활을 당기어 엄평의 좌편(左便) 팔을 맞추니, 엄담이 급히 말에 내려 구할 새 황운이 달려들어 한칼로 엄담을 베고 숭록후는 창으로 엄평에 가슴을 찌르니, 엄 평이 한손으로 창끝을 잡고 몸을 한번 솟구어 삼십 보를 뛰어 달아 나니라.
이때 조명건이 엄숭패와 더불어 삼만 군을 거느려 황성에서 좇아 내려와 태자께 뵈오니, 태자가 반기사 이르기를,
“만일 그대의 충성과 공주의 은덕이 아니런들 어찌 금일이 있을 줄 기약하였으리오마는, 다만 미영에 원사함을 생각하매 짐이 홀로 살아 무엇하리오.”
조명건이 이르기를,
“미영의 죽음이 또한 천의(天意)시니 다시 일러 무익(無益)하도소이다.”
하더라.
각설 형악산에 은행나무 있으되, 천년을 묵었는지라. 당초 엄평이 술법을 배우러 다니매 그 나무 밑에 단(壇)을 묻고 그 나무에 은수자(隱修者)라 새겼더니, 그 나무가 이름을 얻은 후로 변화하여 인형(人形)이 되되, 사목(四目) 육비(六鼻)요, 장(丈)은 십오 척이요, 일신이 황금빛 같아 가장 흉악한지라.
이에 형주에 이르러 형왕을 보고자 하니, 형왕이 불러들여 볼새, 그 형용을 가장 경괴(驚怪)하여 이르기를,
“그대는 어디 있으며 성명은 무엇이뇨?”
은수자가 이르기를,
“성명은 수자이요, 거주는 형악산이로소이다.”
형왕 이르기를,
“그러하면 어찌하여 나를 보고자 하느냐?”
은수자 이르기를,
“대왕이 황운의 난을 만나 위태하시다 하기로, 한번 나아와 황운을 잡아 성공하는 날, 다만 형악산을 베어 사시(四時) 향화(香火)를 받고자 함이로소이다.”
왕이 이르기를,
“그대의 원(願)대로 하려니와, 대저 무슨 계교로써 황운을 잡을꼬?”
은수자가 이르기를,
“전장 승패는 병가상사(兵家常事)이오니, 대왕은 물려(勿慮)하소서.”
하고 말에 올라 진전에 나와 웨기를,
“황운 필부는 바삐 나와 내 칼을 받으라.”
하니 그 소리 우레 같은지라. 승상이 바라본즉 한 장수(將帥)가 단기로 언연(偃然)이 섰으되, 사목 육비로 장창대검을 들었으매, 그 형용이 가장 흉악 기괴한지라. 승상이 익히 보다가 이르기를, 요사
“내 작일(昨日) 천문을 본즉 요성(妖星)이 살기(殺氣)를 띠어 중천(中天)을 범하였기로 괴이 여겼더니, 과연 저런 요적(妖賊)이 있도다.”
하고 각지 병마를 모아 팔문금쇄진(八門金鎖陣)을 치고, 우시춘을 명하여 대적하라 허니, 우시춘이 응성 출마하여 대호(大呼)하며 이르기를,
“적장은 성명을 통(通)하라.”
하니 은수자 부답(不答)하고 말을 달려 바로 우시춘을 취하거늘, 우시춘이 정히 창을 들어 맞을새, 은수자 창으로 우시춘에 말을 찔러 엎지르니 우시춘이 몸을 솟구쳐 달아나는지라. 은수자 한번 다리를 들어 땅을 구르니 땅이 기울며 우시춘이 걸음마다 엎어지며 능히 닫지 못하는지라.
승상이 좌우를 재촉하여 우시춘을 구하고, 인하여 사면으로 에워싸니 은수자 대노하여 두 다리를 들어 놓아 땅을 구르며, 네 눈을 꿈적이매 땅이 뒤 눕고 하늘이 혼흑(昏黑)한지라. 황운이 대경하여 급히 군을 물리더니, 문득 은수자 크게 소리를 지르며 털을 빼어 씹어 한번 뿜은즉, 무수한 은수자 각각 창검을 들고 사면으로 내닫는지라.
송진(宋陣) 장졸이 지척(咫尺)을 분변치 못하고, 서로 짓밟아 반일(半日)이 되도록 벗어나지 못하는지라. 황운이 세 불리함을 보고, 급히 풍백(風伯)과 뇌신(雷神)을 부르니, 대풍과 급한 비 내리거늘 은수자 불의에 풍우를 만나매 급히 물러나는지라.
황운 등이 겨우 정신을 차려 태자를 모셔 남군으로 들어가 크게 근심하다가, 문득 깨달아 제장을 불러 이르기를,
“은수자란 도적이 능히 천지를 번복(飜覆)하는 술법이 있으매, 비록 태공병법(太公兵法)과 패왕용력(霸王勇力)이라도 가히 경적(輕敵)하지 못할지니, 내 이제 도인(道人)을 찾아 요적의 근본을 탐지하여 올 것이매, 아직 공등(公等)은 요동(搖動)치 말라.”
하고 즉시 단기(單騎)로 주야배도하여 검수산에 다다르니, 문득 청의 동자가 백운(白雲)간(間)으로 조차 내려와 읍(揖)하여 이르기를,
“아지 못 게라. 이 황승상이 아니시니잇가?”
승상이 놀라 답례하며 이르기를,
“선동(仙童)이 어찌 속객(俗客)을 아느뇨?”
동자 이르기를,
“선생이 이르시되, 오늘 황승상이 올 것이매 나가 맞으라 하시기로 아나이다.”
승상 이르기를,
“선생은 뉘시며 어느 곳에 계시뇨?”
동자 이르기를,
“존공(尊公)은 다만 소동(小童)을 따르소서.”
하고 길을 인도하거늘, 승상이 말을 절벽에 매고 동자를 따라 수십 리를 들어가니, 송정(松亭) 아래 일위 노옹이 갈건(葛巾) 포의(布衣)로 손에 백우선(白羽扇)을 쥐고 한가히 앉았다가 승상을 보고 웃어 이르기를,
“그대 동관에서 볼 제는 백수노인이러니, 이제 어찌 소년이 되었느뇨?”
하거늘, 승상이 그제야 검수산군인줄 알고 나아가 기간 존후(尊候)를 묻자오니, 선군(仙君) 이르기를,
“나는 무양(無恙)하거니와 그대는 풍진(風塵)고락(苦樂)이 어떠하뇨?”
승상 이르기를,
“소생의 충성이 부족하여, 마침내 종사(宗社)를 회복(回復)하지 못하고, 도리어 은수자란 도적을 만나 저당(抵當)치 못하여 이에 이르렀나니, 선생은 그 흉적의 근본을 아시나잇가?”
도사 이르기를,
“그 도적에 근본은 여차여차하거니와, 그대의 지용으로 어찌 그만한 도적을 제어(制御)치 못하였느뇨?”
하며 보검 하나를 내어 주며 이르기를,
“내 일찍 사명산 도인과 더불어 이 산에서 보검 둘을 얻으매, 참룡검(斬龍劍)은 사명산 도인이 가져가고 참사검(斬蛇劍)은 내게 있어 쓸 데 없더니, 반드시 하늘이 은수자를 제어코자 하여 내신 바이니, 다만 이 칼을 감추고 진상(陣上)에서 저를 불러 나오거든, 칼을 들어 비추며 웨기를, ‘은수자야, 너를 벨 칼이 이에 있노라.’ 하면 그놈이 칼을 보면 감히 요술을 행치 못하리니, 그 때 가히 벨 것이요, 또 엄평이 죽기에 이른즉 문득 변신하여 달아날 것이니, 이 칼을 공중에 치치면 엄평이 또한 요술을 행치 못하리니 바삐 나가라.”
하거늘, 승상이 재삼 사례하고 동구에 나와 말을 찾아 타고 남군에 이르러 태자께 이 사연을 고하고, 익일(翌日)에 삼만 군을 거느리고 형주에 다다라 멀리 결진하고 설연과 우시춘으로 하여금 싸움을 돋우니,
은수자 대노하여 성문을 열고 짓쳐 나오고 형왕과 엄평이 또한 군마를 거느려 은수자에 위엄을 돕는지라. 이에 설연이 참사검을 감추고 은수자를 불러 여차여차 이르니, 과연 은수자 그 소리를 듣고 아무 변화도 못하고, 한 곳에 박힌듯이 섰거늘, 설연이 칼을 들어 은수자의 머리를 베니, 형왕 등이 놀라 급히 달아나는지라.
설연이 따르지 아니하고, 군사로 하여금 은수자의 주검을 살펴보라 하니, 사람은 아니요, 은행나무 있어 혹마다 핏물이 가득 들었고 가지와 잎이 풍우에 뭉쳐졌더라.
차시 황운이 대진을 옮겨 형주성을 두르고, 밤을 타 불로 치기를 의논할새, 설연 이르기를,
“불로 치면 쉬우나 어찌 엄평 잡기를 위하여 무죄한 백성을 태워 죽게 하리오. 다만 엄평을 유인하는 계교를 행하여지라.”
하니 황운이 옳이 여겨 군사로 하여금 성하에 이르러 날마다 질욕하되, 엄평이 종시 나지 아니하고, 문득 한 계교를 생각한 후 형왕을 권하여 성상(城上)에 올라 화친을 청하여 이르기를,
“나로 말미암아 무죄한 백성을 많이 죽이니, 천도가 무심치 아닐 줄 알거니와 그러나 나는 태자에 숙부이라. 내 비록 불의를 행하였으나 태자가 오히려 죽지 아니하였거늘, 이제 나를 이같이 핍박하니, 이는 아들이 아비를 죽이려 함이니 후세 시비(是非)를 면치 못할지라. 차라리 피차 싸움을 그치고 천하를 반분(半分)하여 다스림이 어찌 즐겁지 아니하리오.”
하거늘 태자 청필(聽畢)에 차마 저버리지 못하여 동관 팔십 주를 주고자 하니, 황운 등이 주하기를,
“폐하가 비록 대의를 생각하시나, 형왕은 본디 불인(不仁)한지라. 이제 세궁(勢窮) 역진(力盡)하매 엄평의 간계(奸計)로 이렇듯 하옴이니, 신등이 선제(先帝) 유교(遺敎)를 받들어 목숨이 끊어지기 전은 성교(聖敎)를 봉승(奉承)치 못하리이다.”
하고 즉시 격서(檄書)를 만들어 형왕께 보내어 꾸짖었으되,
“무도(無道)한 형왕은 선제(先帝) 삼 년이 지나지 못하여, 나를 속이고 대위(大位)를 찬탈(簒奪)하매 태자를 해하려 하였으니 유부유자(猶父猶子)의 뜻이 어디 있느뇨. 천지간 극악 대죄를 가지고 오히려 살기를 바라니, 어찌 우습지 아니하리오. 빨리 엄평 부자의 머리를 베어 나아 와 청죄(請罪)하면 일명(一命)을 혹 사(赦)하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성이 파하는 날 신수이처(身首異處) 하리라.”
하였거늘, 형왕이 남필(覽畢)에 크게 경겁(驚怯)하여 도리어 엄평을 원수(怨讐)하는지라. 엄평이 불승(不勝) 분기하여 이르기를,
“신이 일찍 그릇함이 없으되, 도시(都是) 천수(天壽)로 이렇듯 곤박(困迫)함이거늘, 이제 도리어 신을 원망하시니 어찌 원억(冤抑)하지 아니하리잇고. 오늘 밤에 마땅히 황운의 머리를 베어 오리이다.”
하고 손시아를 불러 이르기를,
“그대는 밤을 기다려 비수(匕首)를 가지고 설연의 진중에 들어가 죽이라.”
하니라.
이날 황운이 원문(轅門)에 나와 거닐다가 문득 건상(乾象)을 살펴보고 대경하여 설연을 청하여 이르기를,
“금야에 반드시 적장의 간사(奸詐)함이 있을 것이니 바삐 방비하라.”
하니, 설연이 또한 놀라 본영으로 돌아 가니라. 밤이 깊으매 황운이 갑주를 갖추고, 둔갑(遁甲) 천서(天書)를 앞에 놓고 고요히 앉았더니, 문득 일진(一陣) 음풍(陰風)이 일어나며 한 장수가 손에 삼척검을 들고 장중(帳中)에 들어와 사면을 살피다가 도로 나가거늘, 황운이 바야흐로 장검을 들고 대매(大罵)하기를,
“네 비록 변신하였으나, 내 이미 너를 아나니 바삐 목을 늘이어 내 칼을 받으라.”
하거늘, 그제야 엄평이 황운이 둔갑하는 줄 알고, 비수를 춤추어 달려드는지라. 황운이 맞아 어울려 싸울새, 사람은 뵈지 아니하고 다만 두 줄 무지개 반공(半空)에 솟아오르더니, 엄평이 이왕 팔이 상하였으매 능히 대적치 못할 줄 알고, 인하여 달아나니라.
이때 설연이 장중에 고요히 앉았더니, 삼경 때에 음풍이 일어나며 한 장수가 장검(長劍)을 들고 들어오는지라. 설연이 대노하여 용인검(龍鱗劍)을 들어 치니, 손시아 비수로 막으며 달려들거늘, 설연이 한 손으로 칼을 잡아 손시아의 비수를 막으며, 한손 으로 철퇴를 들어 치니 손시아가 몸을 피하다가 오른 팔이 맞아 비수를 버리고 달아나는지라. 설연이 크게 소리를 지르고 몸을 날려 따라 한 번 치매, 용인검 이는 곳에 손시아의 머리 떨어지거늘, 설연이 군사를 호령하여 그 머리를 기에 달고 승상께 연유를 보(報)하니라.
이때 엄평이 패하여 성중에 돌아와 손시아에 소식을 기다리더니, 날이 밝으매 문득 보하되, 송진에서 승전고를 울리며 사람에 머리를 달았다 하거늘, 엄평이 그제야 손시아가 죽은 줄 알고 분기 대발하더니, 또 보하되, 송(宋)병(兵)이 성지(城地)를 에워싼다 하는지라. 형왕 등이 놀라 어찌 할 줄 몰라 다만 천시(天時)만 기다리더라.
이적에 승상이 한 장 글을 닦아 살에 매여 성중에 쏘아 백성들이 보게 하였으되,
‘이제 대병을 몰아 성문을 깨치고자 하되, 다만 아끼는 바는 백성이라. 너희 만일 선제(先帝)를 생각하거든 엄평의 머리를 베어 왕사(王師)를 맞으라.’
하였더라. 백성들이 서로 전하여 보고 승상 덕의(德義)를 감복하여 어찌할 줄 모르더니 이렇듯 수월(數月) 상치(相値)하매 성중에 양초(糧草)와 계견(鷄犬)이 핍진(乏盡)하여 다 죽기에 이르렀는지라.
백성이 모여 서로 의논하고, 일시에 들어가 엄평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이제 성중에 양초가 핍절하매 죽기는 일반이니, 성중 남녀노소 없이 나가 한 번 싸워 사생을 결단함이 가(可)하다.”
하거늘, 엄평이 어쩔 수 없어 들어가 이 사연으로 형왕께 고하여 이르기를,
“만일 한번 싸우지 아니하면 성중에서 변(變)이 날지라. 이제 신이 나아가 싸워 신이 만일 패하거든, 폐하는 급히 서문으로 도망하여 익주로 가소서.”
하고 스스로 기를 둘러 병마와 백성을 거느려 동문밖에 결진하고, 싸움을 돋우거늘, 황운이 스스로 참사검을 두르며 말을 놓아 엄살하니, 엄평의 군사와 백성이 본디 싸울 뜻이 없으매 일시에 사산분궤(四散奔潰)하는지라.
엄평이 대노하여 십여 원 장사를 거느려 평생 힘을 다하여 황운을 맞아 싸워 백여 합에 이르되 불분(不分)승부(勝負)러니, 또 황운이 제장을 거느려 시살(廝殺)할새, 설연이 한 소리를 지르고 용인검을 들어 엄평의 말을 찔러 엎지르니, 엄평이 문득 대갈(大喝) 일성(一聲)에 몸을 변하여 공중에 솟구쳐 달아나거늘,
황운이 즉시 참사검을 공중에 치치며 신장(神將)을 부르니, 문득 황건역사(黃巾力士)가 사면에서 엄평을 두르매 엄평이 도로 내려서며 창으로 황운을 찌르거늘, 황운이 참사검을 들어 막으며 설연이 철퇴로 엄평의 팔를 치니, 엄평이 창을 던지고 몸을 솟구치다가 점직히 도로 내려서거늘, 황운이 말을 놓아 달려들어 참사검으로 둘러치니 한 줄 무지개 일어나며 엄평에 머리 떨어지는지라.
이때 형왕이 엄평의 패함을 보고 수십여 기를 데리고 서문으로 도망하다가, 엄숭패에게 잡핀 바가 되고 엄릉은 성하(城下)에 떨어져 죽은지라. 황운이 엄릉 부자의 머리를 기에 달아라 호령하고, 형왕의 옥새를 앗아 태자께 올린 후, 삼군을 휘동(麾動)하여 형주성에 들어가 백성을 안무(按舞)하고 형왕을 형악산에 가두어 송백(松柏)과 벗을 삼게 하였더니, 형왕이 스스로 주려 죽으매, 천자가 들으시고 삼일 조회(朝會)를 폐하시니, 승상이 천자에 뜻을 받아 형왕을 왕례(王禮)로 이릉에 안장(安葬)하니라.
차설 승상이 천자를 모셔 황성에 이르러 보위(寶位)에 올리고, 진하(進賀)를 마치매 천자가 내전으로 들어가 황후와 심원공주를 모셔 서로 이왕(已往)사(事)를 일러 통곡하니, 그 정경이 가위 일희일비(一喜一悲)러라.
익일에 천자가 대연을 배설하여 만조(滿朝)와 더불어 즐길새, 문득 중관(中官)이 승상에게 이르기를,
“이제 천자가 보위에 오르시매 중전을 비우지 못할지라. 승상은 빨리 간택함을 의논하라.”
하더니 황태후가 이 말을 들으시고 문득 깨달아 하교하기를,
“선제 승하(昇遐)하실 때 내 유교(遺敎)를 받았다가 동관에서 태자를 이별할 때, 그 유교를 태자에게 전하였더니, 이제 그 유교를 보면 자연 알리라.”
하시니, 천자가 즉시 유교를 내어 중관과 더불어 떼어 본즉,
‘황운의 충성과 설연의 공덕이 하늘에 사무치시니, 한갓 신자(臣子)의 예로 대접하지 말고, 황운의 딸은 태자와 동년 월일시에 낳으매, 이는 하늘이 유의(有意)하신 배필(配匹)이니, 중전을 봉하여 종묘(宗廟)를 받들게 하라.’
하였더라. 이에 황태후가 하교하기를,
“승상에 여아는 나의 품 가운데서 자라났으니 정히 모녀간(母女間) 같고, 선제 유교를 저버리지 못할 것이매, 빨리 택일하여 올리라.”
하시니, 황운이 다시 간(諫)하지 못하고, 마침내 그 딸 화순매로 중전을 삼으니라.
이때 승상이 사자를 파촉에 보내어 동리화를 데려오고, 또 십삼생에 반포(頒布)하여 설중매를 광구(廣求)하더니, 설중매 이 소식을 듣고 승니(僧尼)를 데리고 황성에 이르렀거늘, 승상과 숭록후가 서로 반기며 전후사연을 들은 후, 비복을 보내어 황처사 부부와 그 아자를 데려오게 하니라.
이때는 건흥 삼년이라. 천자가 대사천하(大赦天下)하시고 태평연(太平宴)을 배설하여 문무백관(文武百官)으로 동락(同樂)할새 하교하기를,
“짐의 금일(今日)이 있음은 공등의 공덕이거니와, 다만 미영에 원사(怨死)함이 지극 참절(慘絶)한지라. 경등은 짐에 뜻을 받아 미영의 형용(形容)을 주작(做作)하여 연석(宴席)에 참예(參預)하게 하라.”
하시고 황후를 봉하여 황태후를 삼고, 중전 황씨로 황후를 봉하고, 황운으로 초왕(楚王)을 봉하고, 설연과 동리화 등을 각기 직첩을 주시고, 기여(其餘) 제인(諸人)을 각각 왕작(王爵)을 봉하시고, 미영을 노왕(魯王)에 봉하여 사당(祠堂)을 노국(魯國)에 봉안(奉安)하여 사시 제향(祭香)을 받게 하고, 각처 장졸을 각별 중상하신 후 초왕께 하교하기를,
“짐이 유약(柔弱)하고 황후가 미령(靡寧)하매 경은 아직 황성에 머물러 짐에 과실를 살피며, 황희를 가르쳐 국사에 연숙(鍊熟)한 후 본국으로 돌아가라.”
하시고 보정궁에 초왕이 머물게 하고, 내정궁에 초왕비와 심원공주의 처소를 정하여 황후를 모셔 오년간 머물게 하시다.
이러구러 세월이 여류하여 사해 평정하고 천하가 안락하매, 상이 대사천하하시고 잔치를 배설할 새, 초왕비와 심원공주 등 모든 공신 부인은 내전(內殿)에 입시(入侍)하고 초왕과 조명건 등 모든 공신은 외전(外殿)에 입시하여 연일 환락(歡樂)한 후, 초왕 부부가 탑하에 하직을 아뢰니, 상이 연연(戀戀)함을 이기지 못하사 이르기를,
“이제 경등이 멀리 떠나매 그 창연(愴然)함이 좌우수(左右手)를 잃음과 같으니, 매년 일차(一次)씩 조현(朝見)하라.”
하시고 황기(설중매에 아들이라)로서 대승상 대장군을 봉하사, 국가를 다스리게 하시니, 대저 동에는 초왕(楚王) 황운이 있고, 서에는 위왕(魏王) 조명건이 있고, 남에는 남왕(南王) 황희 있고, 북에는 조왕(趙王) 우시춘이 있고, 동남에 한(韓)왕(王) 엄숭패 있고, 서남에 오왕(吳王) 서하규 있고, 서북에 장사왕(長沙王) 장달이 있고, 동북에 동관왕 홍윤이 있어 팔방(八方)을 진정하여 저마다 충의(忠義)를 힘쓰고 인덕(仁德)을 베풀어, 백성이 낙업(樂業)하고 사이(四夷) 빈복(賓服)하매, 가히 요순지치(堯舜之治)를 기약할지라.
일로조차 송조(宋朝)에 다시 병혁지란(兵革之亂)이 없어 성자(聖子)신손(臣孫)이 계계승승(繼繼承承)하여 천만년을 기약하니, 이에 초왕 황운과 숭록후 설연에 아름다운 사적(事績)을 민멸(泯滅)하기 가석(可惜)하기로 대강 기록하여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효칙(效則)하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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