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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의 '시인정신론'

New-Mountain(새뫼) 2016. 10. 11.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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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인 정 신 론

신동엽
 

1

  한 사람의 인체에 백여명의 의사가 엉겨 붙어 제가끔 전문적인 한 가지씩만 분해해 가지고 달아나 버렸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손톱 ․ 발톱미장 전문연구의가 새로 나왔다 해도 결코 놀랄 세상은 이미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씨부렁거리며 현대사의 피부면을 겉으로 더듬어 갔다. 그것은 마치 벌집처럼 구멍난 포대자루를 한 사람 한 사람의 눈물겨운 노력과 그들의 몸으로 안간힘 스며 덮어 가려는 늙은 역사의 발자취와도 비슷한 것이었다. 열부족으로 위축되어 가는 피부를 피부약으로 고칠 순 없다. 흡사 발사된 산탄과 같이 공중으로 흩뿌려진 현대의 문명파편 어느 곳을 뒤따라 가 봐도 그곳엔 침 줄 자리는 없었다.
  나는 지금 현대를 진단하려 한다. 

  피와 정력과 인생으로 투쟁하고 계발하고 독을 마시어 간 아테네 철인의 이야기는 현대에 와서 한갓 우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었을 뿐이며, 도시마다에 우뚝 솟은 사변철학의 크고 작은 상아탑에서는 두개골만이 남아 있는 정신기술자들의 반인정적인 창백한 정력에 의하여 말라 비틀어진 사유의 形骸(형해)와 피 없는 허구로서의 언어적 체계 건축작업만이 직업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법조문, 대헌장, 정치원리, 王蜂學(왕봉학) 등등의 제품소에서는 노련한 맹목기술자들에의해 수천년래 반복되어 온, 실은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는 왕도원리가 오색 칠색으로 장식 개증되어 각 지방 수혜국으로부터 모여오는 교활하고 호전적인 두목 상인들에게 넘겨지고 있다. 그들 일단의 정치전문 기술자들에게 인민이나 인생이란 이름의 구제현황이 무슨 소용으로 실감될 리가 있겠는가.
  교황곡의 맴도는 신비탑은 허공 속에 다만 솟아 있을 뿐이다. 아무도 그것을 통째로 혈관 속에 흡수하여 자양분으로 소화시키려는 사람은 없다. 전문적으로 화장되고 광적으로 기교화된 현대예술의 단단한 기구성과 조직성 속에서 사람들은 여남은 개의 음계부호를 뜯어 내어 오는 것으로 終生(종생) 만족하고 살아간다.
  유럽의 고층건물 어느 화실 속에는 20여억 인구 중 단 두 사람의 준이해자를 얻어 ○○파 속으로 들어가 버린 회화예술가가 있었다고 우리는 듣는다.
  성서는 문법 연구가들의 문법 연구대상이 되고 있을 뿐이며 성가는 성악가가 전임하고, 설교는 목사가, 예배는 신자가 각각 전임한다.
  원자핵 연구소의 천만길 솟은 밀실 속에서는 가정도 세계도 자기 인생의 귀로마저도 말살당한 맹목기능자들의 발광적인 활약에 의하여 또 하나의 더 무서운 맹목 기능자, 눈도 코도, 귀도 없는 방사능의 집단을 분출시키고 있다.
  문학이라고 불리는 단자가 직업명사화한 것은 이미 옛날의 일이며 그것은 다시 더 영업적인 아들에 의하여 분주히 분가되어 나가고 있다. 이발사, 구두수선공, 영문타자수 등 한 줄에 꿰 매달린 직업명패 가운데서 사업가 소설업가 평론가 등 동류품적 명패를 발견할 수 있는 것도 결코 난처한 일이 아닌 현대가 되어 버렸다. 신문은 다시 또 심리작문, 행동전문, 애욕전문, 계율전문 등 영업적 전문점포로 분가를 거듭해 나가고.
오늘날 철학, 예술, 과학, 경제학, 정치, 종교, 문학 등은 인생에의 구심력을 상실한 채 제각기 천 만개의 맹목기능자로 화하여 사발팔방 목적 없는 허공 속을 흩어져 달아나고 있다.

  우리는 어려운 시대, 어떻게 말하면 우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의 대지 위에는 우리가 나오기 전 이미 한 그루의 고목이 서 있었다. 썩은 고목의 둘러리엔 행복한 甲蟲(갑충)들의 행렬이 늘어붙어 오랜날부터 이어받아 온 관습적인 언어들을 赤靑(적청)으로 물들여 가며 기계적으로 뽑아 늘여 놓고 있었다. 순조롭고 합리적인 공동작업을 이룩하기 위하여 반맹목의 만인은 그 그늘로 기어 올라갔다.
  우리들의 시대는 들떠 있다. 그 무엇인가 미래에 가리워진 운명적인 힘에 끌려 인류의 거품집은 성급히 들끊어 오르고 있다.
  황하기를 벗어나 중세, 근대, 현대에 걸친 인류의 노력은 이상한 괴물같은 거대한 축대 위에 선업을 이어 받아가며 거의 맹목적 관습적 동작으로 돌을 쌓아 올리는 일로 집중되어 오고 있다. 우리 시대의 문명은―과학적 발전, 정치이론의 진보, 언어수사학의 개화 등은 모두 이 축대 위에서 피어났다. 이 축대는 그 체계 밑에서 일하고 있는 만인의 눈에 한편 구석에 서 있는 한 그루 고목으로서가 아니라 세계 자체, 말하자면 절대적 全一者(전일자), 바로 그것으로 인식되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唯物(유물)과 唯理(유리), 자연주의와 낭만주의, 실존과 이상 등 동일한 고목 위에 피어난 이들 버섯은 불행히도 자기들 스스로가 세계적 조화를 이루는 데 불가결한 절대적 성립자, 다시 말해서 뿌리를 달리하고 있는 자립적 나무들이라고 착가되어 왔던 것이다.
  실은 광막한 대지 한 구석에 피어난 고목 속에서 시험되고 있는 잡다한 벌레들의 코러스에 지나지 않았던 이들의 난입이…….  
  이미 쌓여져 가고 있는 축대 위에 돌멩이 하나 보태 주고 간다는 것, 그리고 이미 이루어진 고목 위에 따라 올라가 많은 동료들과 함께 귀뚜라미의 노래에 협주해 본다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순리로운 일일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새로운 우리 이야기를 새로운 대지 위에 뿌리박고 새로운 우리의 생각을, 새로운 우리의 사상을, 새로운 우리의 수목을 가꿔가려 할 때 세상에 즐비한 잡담들의 삼림은, 그리고 생경한 낯선 토양은 우리의 작업을 기계적으로 방해할 것이다. 황량한 대지 위에 우리의 터전을 마련하고 우리의 우리스런 정신을 영위하기 위해선 모든 이미 이루어진 왕궁, 성주, 문명탑 등의 소아 붓는 습속적인 화살밭을 벗어나 우리의 어제까지의 의상, 선입견, 인습을 훌훌히 벗어 던진 새빨간 알몸으로 돌아와 있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2
  잔잔한 해변을 原數性世界(원수성세계)라, 부르자 하면, 파도가 일어 공중에 솟구치는 물방울의 세계는 次數性世界(차수성세계)가 된다 하고, 다시 물결이 숨자 제자리로 쏟아져 돌아오는 물방울의 운명은 歸數性世界(귀수성 세계)이고.
  땅에 누워있는 씨앗의 마음은 원수성세계이다. 무성한 가지 끝마다 열린 잎의 세계는 차수성세계이고 열매 여물어 당에 쏟아져 돌아오는 씨앗의 마음은 귀수성세계이다.
봄, 여름, 가을이 있고 유년 장년 노년이 있듯이 인종에게도 태허 다음 봄의 세계가 있었을 것이고, 여름의 무성이 있었을 것이고 가을의 귀의가 있을 것이다. 시도와 기교를 모르던 우리들의 원수성세계가 있었고 좌충우돌, 아래로 위로 날뛰면서 번식번성하여 극성부리던 차수세계가 있었을 것이고, 바람 잠자는 석양의 老情歸數世界(노정귀수세계)가 있을 것이다.
  우리 현대인의 교양으로 회고할 수 있는 한, 유사 이후의 문명역사 전체가 다름 아닌 인종계의 여름철 즉 차수성세계 속의 연륜에 속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은 하늬바람을 눈 앞에 둔 변절기가 아니면 이미 가랑잎 물들기 시작한 이른 가을 철, 우리들의 발언은 천 만길 대지에로 쏟아져 돌아가기 위한 미미한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두치 앞의 모이만을 보고 일평생 쪼아 다니는 닭의 정신을 가리켜 小圓(소원)이라 한다. 눈과 모이와의 두치 간격을 직경으로 하여 한바퀴 돌려 圓(원)이 즉 그 닭의 정신의 크기이다.
  문명에 관습되어 온 소위 현대식 지성인이라고 불리워지는 소시민들의 정신적 둥근 원은 고층건물과 고층건물 사이의 거리를, 숙소와 직장과 오락장과의 사이를 또는 서명과 인격과 개념과 개념과의 정신적 거리를 직경으로 하여 돌려 그린 원의 크기와 동등하다.
가령 불전저술가가 던지고 간 정신직경의 넓이는 그 어느 현상학적 체계가들이 던지고 간 그것보다 훨씬 멀고 멀었다.
  한 마디 이야기도 없이 한평생 길게 누워 졸다가 죽어 돌아간 사람이 있었다면, 나뭇잎에 고여 오른 이슬알이나 풍우에 밀려다니는 말 없는 모래알과 함께 그들의 정신적 환원의 크기란 부재이면서 最大在(최대재)인 宇宙環(우주환)의 기점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무엇인가 이야기하려 의욕하는 우리들의 처지와 지혜란 어중뜨기이다. 우리는 차수성세계 속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규범지어진 속에서나마 최대재의 원을 지향하여 신명을 다스려 가고 있는 게 우리 인간수도의 서글픈 역사가 아니었던가.


3
  인류의 봄철, 인종의 씨가 갓 뿌려져 움만이 트였을 세월, 기어다니는 짐승들에겐 산과 들과 열매만이 유일한 의지요 고향이었으며, 어머니 유방에 매어달릴 갓난 아기와 같이 그들과 대지와의 음양적 밀착관계 외엔 어느 무엇의 개재도 그 사이에 용납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곳은 에덴의 동산, 곧 나의 언어로 원수성세계이어서 그곳에 차수성세계 건축같은 것을 기획하려는 기운을 아직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유구한 세월이 흘렀을 것이다. 그러나 물성은, 태양과 봄바람과 지열은 언제까지나 그 씨앗으로 하여 씨앗으로만 덮여 있게 가만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떡잎을 만들어 낸 것이다. 대지 위에 나뭇가지를 세우고 그 위에 올라 앉아 재주부리는 재미를 익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이들 인간들은 대지에 소속된 생명일 것을 그만 두고 대지와 그들과의 사이에 새로 생긴 떡잎 위에, 즉 인위적 건축 위에 作巢(작소) 되어진 차수성적 생명이 되었다.
  하여 인간은 교활하고 극성스런 어중띤 존재자로서 하늘과 땅 사이에 등록이 되었다.
오늘 인구의 수효보다도 많은 문명계층의 실내마다 범람하고 있는 불안, 공포, 전제, 부도덕, 파멸, 이런 말거리들은 과연 조급한 신경을 가진 소원군들이 단정하고 있듯이 불과 몇 십년적 현대의 시대적 특징에 그치는 현상일 것인가. 
  과연 인간의 감정이란 하루 이틀 바람볕에 용이하게 개조 변질될 수 있는 특질의 것인가. 우리를 분한케 하고 우리 운명을 불행 속으로 몰아 넣으려는 인류공동의 적, 우리가 싸워 무찔러야 할 공동의 적은 과연 현대의 구름낀 그늘, 수다하게 출연한 지엽적 현상들 가운데 그 전신이 실존하고 있는 것일까. 
  천만에다. 우리 문명된 시대의 도시 하늘을 짓누르고 있는 불안, 부조리, 광기성 등은 다름아닌 나무 끝 최첨단에 기어오른 뜨물들의 숙명적 심정인 것이다. 
우리들의 불안은 바로 이탈자의 불안 그것이다. 차수적 세계성의 오천년현란, 환언하면 인류의 장구한 여름철이 성과한 정신적 무성, 그 가운데서 우리는 필 대로 펴 우거진 오뉴월의 둥구나무를 보듯 오만가지로 발휘되고 요구되고 천하에 폭로된 바 인간의 지상적 운명과 능력과 그것의 한계를 관망할 수가 있다.

  잠시, 인간의 천태만상한 성과와 역사를 한 몸에 시현하고 있는 거대한 둥구나무, 인류수를 그려 보자.
  가지와 가지, 소단과 소단, 잎과 잎, 교착과 거리, 낙조쪽으로 뻗어나간 황하계의 간지, 그것들의 횡적 간격, 사찰 ․ 교회들의 뻗은 가지, 왕궁의 역사, 봉건영주의 말라붙은 이파리들, 사변철학의 가지, 첨단에 자리한 몇 사람들의 고치집, 바로 밑에 미처 분가를 못한 채 늘어붙어 용성이룬 신유리철학의 발아시도들, 위세당당히 기어 올라간 연구실 물리학의 정점, 그것에 자리한 전자분열학의 아직 생존해 있는 티눈, 휘어져 올라간 자연과학, 거기서 또 다시 갈라지고 갈라져서 삭정이 이룬 인체맹장전문의의 계보, 손톱 미용학의 소, 정치학 문학 총살법연구학.

  이 숱한 가지들마다 나뭇잎마다 열린 가녀린 새 집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문화를 계속하고 생장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20세기경의 허공중에 현란한 잔치를 베풀고 있는 수만 지엽간의 어느 첨단에도 우리의 소굴은 정좌되어 있었단 말인가.

  문명인의 고향은 대지가 아니다. 그들의 출생은 허공 속에서 시종했다. 전복 등에 소라가 붙고, 소라 등엔 더 작은 조개가 붙어, 모르는 동안 행복하게 살아가듯, 그들의 호적은 7천년 축적된 조형 문화적 부피와 인간상호관계의 허구스런 언어계층 위에 기록되어 오고 있다.
  우리 인류문명의 오늘이 있은 것은 오직 분업문화의 성과이다. 그러나 그뿐 그것은 다만 이 다음에 있을 방대한 종합과 발췌를 위해서만 유용할 뿐이다. 
  분업문화를 이룩한 기구 가운데 인은 없었던 것이다. 분업문화에 참여한 선단적 기술자들은 이 다음에 올 종합인을 위해서 눈물겹게 희생되어져 가는 수족적 실험체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전경인의 개념은 오늘 문명인들의 혐오와 멸시의 대상이 되고 있다. 편인들의 맹목기능자적 집단발효에 의하여서만 자재로이 개미집은 이루어지고 개미집은 부서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흡사 거품무리와 같은 것이다. 하여 그들이 집단 작업으로 받들어 이룩한 축조물이란 다름 아닌 차수세계적이요, 강집적인 현상 건축인바 그 하나가 언어문화요 또 하나가 조형문화이다.
  출발에 있어선 한갓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부대물로서 인간관계의 이기에 지나지 않았던 이들 조형성 ․ 언어성은 마침내 그의 내부 발전을 거듭함에 이르러 방대한 연대관계 위에 총과 조직을 형성하여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라 오늘 인간의 대지를 덮었다. 
흔히 국가, 정의, 원수, 진리 등 절대자적 이름 아래 강요되는 조형적 내지 언어적 건축은 그 스스로가 5천년 길들여 온 완고한 관습적 조직과 생명과 마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현대인구 거의 전부가 이 일에 종사하면서 이곳으로부터 빵을 얻어먹고 생의 근거를 배급받으며 다시 이것을 모셔 받들어 살찌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대지에 발 벗고 늘어붙어 자급자족하는 준전경인적 개체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인구가 조직되고 맹종되고 전통화된 차수성적 공중기구 속에서 생의 정신적 및 물질적 근거를 급여받고 있다.
  시야 가득히 즐비하게 솟은 이러한 조직과 체계와 산봉우리들은 제각기 특유한 생리와 특유한 수단방법으로써  자체 생명의 이익을 확충시켜 가면서, 허약한 공분모 위에 뿌리박아 마치 부식작용하는 곰팡이의 집단처럼 번식해 가고 있다.
  하여 분자가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한정된 어머니 즉 일정한 대지로부터 양식을 빨아들이는 그들 공중기구는 기근을 모면할 수 없을 것이며 영양실조에 빠지게 될 것이며 종국에 가서는 생존경쟁의 광기성에 휘몰려 맹목적인 상살로써 불경기를 타개하려고 발악하고 발광하고 좌충우돌하기에 이를 것이다. 
  무수한 기생탑의 층계 아래 장과 절과 구의 마디마디 들어붙어 꿈틀거리는 부분품으로서 물리적 기능을 행위하고 있는 형형색색의 이들 맹목기능자는 항상 동업자들끼리의 경쟁에서 도태될 위태성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안전한 영업입지를 닦기 위하여 왼눈 곰배팔이를 다시 더 사상하고 바늘끝만한 시점에다 전 역령을 집중하여 특수 특종한 기능을 뽑아 늘이는 일에로 기형적 분지를 거듭하고 있다. 
  현대의 예술, 종교, 정치, 문학, 철학 등의 분업스런 이상 경향은 다만 이러한 역사적 필연 현상으로서만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상품화해가고 있다. 이러한 광기성은 시공의 경과와 함께 배가 득세하여 세계를 대대적으로 변혁시킬 것이다.
  세계는 맹목기능자의 천지로 변하고 말아다. 눈도 코도 귀도 없이 이들 맹목기능자는 인정과 주인과 자신을 때려눕혔고 핸들 없는 자동차같이 앞뒤로 쏘아 다니며 부수고 살라 먹고 눈깔 땡깜을 하고 있다. 하다 지치면 뚱딴지같이 의미없는 물건을 만들어도 보고 울고불고 하고 있는 것이다. 기생탑과 국가학과 지구는 스스로 길러 내놓은 이들 병신자식들의 비칠거리는 발길에 채이고 받치고 파괴되면서 있다.
  현대문명에 비관론적 해석을 부여한 몇몇 동서 지성들의 이야기는 나의 이러한 주장에 유력한 증언의 하나가 되어 줄 것이다.
  오늘날 인구는 맹목기능자들의 모임인 누상회의에서 계수기에 의해 집단으로 거래처분되고 있다. 백만명짜리, 천만명짜리가 한꺼번에 한 다발로 묶이어 조변석개 이리저리로 흥정된다. 
  정치전문 맹목기능자들은 그 흙 묻은 발로 우리 백성들의 머리 위를 밟고 돌아니니면서 귀익은 호령, 졸음 오는 연설들을 하고 있다. 사실 부끄럽게도 우리는 이제까지 그들에게 우리 신상에 관련된 모든 처분권을 완전히 위임하고 살아가는 우리도 똑같은 맹목기능자였다. 
  비행기에 탑승한 일개 유원인이 던진 성냥갑만한 화약에 의하여 순식간에 50만의 시민이 죽으면서도 거기 항거하여 단 한 마디 입 벌릴 장사는 없었던 시대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인류 분업문화의 빛나는 성과로서 하늘 높이 찬양됐던 것이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 거대한 공장기구는 죽은 백성의 형제와 그들의 지능과 손과 발과 가정과 표정과를 시장에서 가상하여 흡수 흡연하였으며 이러한 가운데 수천, 수만의 목숨과 일생이 늘어붙어 말라빠진 문명탑의 어둠침침한 왕궁의 바닥에선 발췌 주조된 귀동왕자 50만단위의 권력자를 모셔내 오게 됐던 것이다.

  문명인은 대지를 이탈하였다. 그들은 고향을 버리고 차수성세계속의 문명수나뭇가지 위에 기어올라 궁극에 가서는 아무도 아닌 그들 스스로의 육혼들에게 향하여 어제도 오늘도 끌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실은 공중풍선은 날이 갈수록 기세를 올려 하늘 높이 달아날 것이다. 마침내 인간은 아마도 지구를 벗어날 것이며 지구의 파괴를 기억할 것이며 인조 두뇌를 만들어 자동시작을 희롱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나는 생각한다. 모든 생물의 물질적 능력엔 동물로서의 한계가 숙명지워져 있을 것이라고. 아무리 서구적인 무서운 노력으로 하늘 끝에 이르기 위해 벽돌을 쌓아 올려 본다 하더라도 그 하늘 끝은 나타나 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활동은 흡사 끓는 찌개 남비 속에 일어나고 있는 분자들의 운동현상과 비슷한 것일 것이다.
  물이 끓으면 물방울들은 증기화하여 공중 높이 날아 갈 것이다. 마지막에 가서 냄비속은 텅텅 비어 버릴 게 아닌가. 그러면 찌개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러나 냄비 속을 벗어난 수분은 이미 찌개는 아니다. 찌개의 역사는 냄비 속에서 종말을 고한 것이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모든 나무의 열매는 토실히 여물어 스스로 땅에 쏟아져 돌아올 것이다. 그들 인류수도 그 이상 지엽을 뻗칠 수 없을 곳까지 이르러 열매와 열매를 두루 뭉쳐 가지고 말없이 땅에 쏟아져 돌아올 것이다.
  그 차수성세계 속의 문명수 위에서 귀수성세계의 대지에로 쏟아져 돌아가야 할 씨앗이란 그러면 어떠한 것이어야 할 것인가.

  ○○가, ××가라 함은 연구실과 기구와 문명과 점포에 각각 흩어져 모체계의 부분품으로서 자기의 생존 근거와 자기의 가능성을 못 박고 있는 눈 먼 기능자를 의미한다.
  주산가는 사무용 탁상에 앉아서 자기 앞으로 돌아오는 계산표만 하루 종일 검산해 내는 눈 먼 기능자이다. 그에게 은행기구나 국가기구나 세계인식이란 애당초 시점 밖의 이야기다. 
  즉 그는 소원적 부분품에 지나지 못한다.

  사실 전경인적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전경인적으로 체계를 인식하려는 전경인이란 우리 세기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들은 백만인을 주워 모야야 한 사람의 전경인적으로 세계를 표현하며 전경인적 실천생활을 대지와 태양 아래서 버젓이 영위하는 전경인, 밭 갈고 길쌈하고 아들 딸 낳고, 육체의 중량에 합당한 량의 발언, 세계의 철인적 ․ 시인적 ․ 종합적 인식, 온건한 대지에의 향수적 귀의, 이러한 실천생활의 통일을 조화적으로 이루었던 완전한 의미에서의 전경인이 있었다면 그는 바로 귀수성세계 속의 인간, 아울러 원수성 세계 속의 체험과 겹쳐지는 인간이었으리라.

  코스모스는 가을에 피는 꽃이다. 긴긴 여름 동안 허공 속으로 푸르게 성장하기만 한다. 그러나 이따금 그 세계 속에서 예외를 발견한다. 세상이 모두 푸르기만한 무성한 여름날 한 송이의 꽃이 빠알갛게 피었다 쏟아져 간 여름날의 코스모스를 보고 초록 동산의 동료 나무들은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윽고 가을이 와 하늬바람이 불면 자기들도 자기 후손들을 시켜 언젠가 여름날 호올로 피었다 쏟아져 간 그 코스모스와 똑같이 발화해야 할 것이다.

  인류의 여름철 지구 이곳저곳에선 이들 코스모스꽃이 불완전하게나마 몇 송이 피어났다. 그들은 세상을 알았고 인생을 알았고 그렇기에 자기 위치에서 가을로 돌아갔다. 불경 ?술인. 천언의 오발언인, 성서 저술인, 이들은 무더운 여름날 호올로 피었다 쏟아져 돌아간 철이른 꽃들이었다. 그들은 직업가도 전문가도 기술자도 맹목기능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차수세계 문명수 나뭇가지 위에 붙어 산 뜨물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대지 위에서 자기대로의 목숨과 정신과 운명을 생활하다 돌아간 의젓한 전경인적인 육혼의 체득자, 시의 ․ 철의 인들이었다. 세계정신의 원초적이며 종말적인 인식 위에 개안했던 그들은 그 정신을 우주와 세계와 인생에서 발산하고 돌아간 위대한 대지의 철인이요, 시인들이었다. 성서나 오천언은 과거가 남겨 놓은 인류 유산 중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전경인 정신이 투영되어 있는 거대한 시편들이다. 2천년 문명사에 기록되어 온 수없이 많은 군소 사상가들, 군소 시인들은 이 불경이나 성서의 거대한 둥구나무 밑에 피어난 자질구레한 잡초들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었던가.
  오늘 우리 현대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대지에 뿌리박은 대원적 정신은 없다. 정치가가 있고 이발사가 있고 작자가 있어도 대지 위에 뿌리박은 전경인적인 시인과 철인은 없다. 현대에 있어서 시란 언어라고 하는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어 낸 공예품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의 시인정신이며 시인혼이 문제되지 아니하고, 그 시업가의 글자 다루는 공상의 기술만 문제된다. 핵분열 연구가가 헐리웃 광대에게 입힐 기구망신스런 옷을 꾸며내듯, 또는 발광한 빠리의 화가가 자기도 모를 색채로 화면을 난칠해 놓듯, 사업가들은 언어를 화구 재료로 하여 무의미하고 불투명한 공예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차수성세계의 톱니 쓸린 광풍 속에서 시인스런 소성을 가진 정신인들은 자기의 거점을 대지에 뿌리박기 전 주위세계의 현란한 분위기에 넋을 잃고 말았다. 정신분석학, 경제이윤론, 인구론, 응용미학 등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와 각분과 과학의 빛나는 성과를 다퉈 뽐내며 영화 ․ 녹음기 ․ 텔레비가 등장하여 인생의 위악적 욕구를 보다 많이 충족시켜 주게 됨에 이르러 그들 시인스런 사람들은 사회의 한편 구석 연구실이나 찻집 속으로 도사려 들어가 단자미학이나 어구나열법에 하염없는 신경을 쏟고 있었다. 치차와 동력이 세계를 압도하여 시인의 주위에까지 밀려들어갔을 때 시인은 모든 털구멍을 닫아 아랫목에서 단어를 뜯고 있었다.
  그들은, 정치는 정치가에게, 문명비평은 비평가에게, 사상은 철학교수에게, 대중과의 회화는 산문 전문가에게 내어 맡기고 자기들은 언어세공만을 전업으로 맡고 있다.
고답파의 대변자는 말한다. 시인의 임무는 언어의 순화에 있을 뿐이다. 미의 세계는 열등한 지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세계라고. 발레리는 기하학을 전업하고 있었다. 다다는 로마문자 26개를 나열해 놓고 세기적 권태에 하품치고 있는 관중들을 불렀다.
  입체파는 건축을 도면 위에 시도했다. 모더니즘은 교수들로 조직된 신사단, 신묵시파는 댄스홀 옆 골목에다 간판을 내걸고 빈약한 개업 파티를 열었다.
  이러한 운동은 물론 구라파를 중심하여 일어났다. 그러나 이틀도 못가서 눈치 빠른 각국의 문화 도매상인들은 구색들을 갖춰 가지고 바다를 건너갔다. 소위 후진국이라고 불리워지는 반 식민지적 수도 마다에선 최신식 수입품 선전광고가 푸짐히 나 불고. 무슨 파, 무슨 주의자 등 근대적인 명칭으로 불리 우는 모든 지식분자들을 한 묶음하면 <밀려난 특종계급>이 된다. 그들의 문화는 특수층의 주형적 정신현상인 것이다. 그들이 역사상에 놀은 역할은 눈꼽에 불과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약한 병자의 노래가 아니면 대학 연구실 속에서의 언어연금술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독존적 귀족문화만이 우리 시대의 시인 전부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은 문학전문가들끼리의 특수문화가 되어 버렸다. 백성과 그들과의 아무런 연분도 없어졌다. 그들은 그들대로 만백성의 살림 마을인 대지를 이탈하여 마치 무리떼 지은 하루살이의 덩어리처럼 하늘 높이 달아나고 있다.

  시란 바로 생명의 발현인 것이다. 시란 우리 인식의 전부이며 세계 인식의 통일적 표현이며 생명의 침투며 생명의 파괴며 생명의 조직인 것이다. 하여 그것은 항시 보다 광범위한  정신의 집단과 호혜적 통로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하나의 시가 논의될 때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이야기해 놓은 그 시인의 인간정신도와 시인혼이 문제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철학, 과학, 종교, 예술, 정치, 농사 등 현대에 와서 극분업화된 이러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인식을 전체적으로 한 몸에 구현한 하나의 생명이 있어, 그의 생명으로 털어 놓는 정신어린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가히 우리시대 최고의 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란 인간의 원초적, 귀수성적 바로 그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시는 궁극에 가서 종교가 될 것이라고. 철학, 종교, 시는 궁극에 가서 하나가 되어 있을 것이다. 과학적 발견-자연과학의 성과, 인문과학의 성과, 우주탐험의 실천 등은 시인에게 다만 풍성한 지양으로 섭취될 것이다.
  하여 내일의 시인은 제왕을 실직케 할 것이며, 제주를 실업케 할 것이며 스스로 천기를 예보할 것이다. 그는 태허를 인식하고 대지를 인생을 인식할 뿐이며, 문명수 가지나무 위에 난만히 피어난 차수 세계성 공중건축같은 것은 그 시인의 발밑에 다만 기름진 토비로서 썩혀질 뿐일 것이다. 차수성세계가 건축해 놓은 기성관념을 철저히 파괴하는 정신혁명을 수행해 놓지 않고서는 그의 이야기와 그의 정신이 대지 위에 깊숙이 기록될 순 없을 것이다. 지상에 얽혀 있는 모든 국경선은 그의 주위에서 걷혀져 나갈 것이다. 그는 인간의 모든 원초적 가능성과 귀수적 가능성을 한 몸에 지닌 전경인임으로 해서 고도에 외로이 흘러 떨어져 살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문명기구 속의 부속품들처럼 곤경에 빠지진 않을 것이다. 
  하여 시인은 선지자여야 하며 우주지인이어야 하며 인류발언의 선창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름철의 장구한 세월을 살아온 우리 인류, 차수성세계 문명수 가지나무 위에 피어난 난만한 백화를 충분히 거름으로 썩히울 수 있는 우리 가을철의 지성은 우리대로의 인생인식과 사회인식과 우주인식과 우리들의 정신과 우리들의 이야기를 우리스런 몸짓으로 창조해 내야 할 것이다. 산간과 들녘과 도시와 중세와 고대와 문명과 연구실 속에 흩어져 저대로의 실험을 체득했던 뭇 기능, 정치, 과학, 철학, 예술, 전쟁 등, 이 인류의 손과 발들이었던 분과들을 우리들은 우리의 정신 속으로 불러들여 하나의 전경인적인 귀수적인 지성으로서 합일시켜야 한다. 

  거두어들일 사람이 따로 있을 것을 기다려, 거두어들여 하나의 열매로 뭉쳐 놓을 사람이 따로 있을 것을 기다려 인류는 5천년간 99억의 인종들을 구사하고 시험하여 산간과 들녘에 백화만초로 피어 있게 흩어 놓았던 것이다.
  백화만곡의 흐드러지게 쏟아져 썩는 자리에서 유구하고 찬란한 내일의 꽃은 피어날 것이다.
  전경인의 출현을 세기는 다만 대기하고 있다.
  암흑, 절망, 심연을 외치고 있는 현대의 인류는 전경인정신의 체득에 의해서만 비로소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인류수 나뭇가지 위에 피어난 뭇 나뭇잎들을 한 씨알로 모아 가지고 우리들은 땅으로 쏟아져 돌아가야 할 이른 가을철의 선지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대지 위에 다시 전경인의 모습은 돌아와 있을 것이고 인류정신의 창문을 우주밖으로 열어 두는 서사시는 인종의 가을철에 의하여 결실되어 남겨질 것이며 그 정신은 몇 만년 다음 겨울의 대지 위에 이리저리 몰려 다니는 바람과 같이 우주지의 정신, 이의 정신, 물성의 정신으로서 살아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곧 귀수성세계 속의 씨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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