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텍스트/소설과 산문

신영복의 '더불어 숲'에서

New-Mountain(새뫼) 2016. 9. 28.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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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신영복의 '더불어 숲' 중에서


문화는 사람에게서 결실되는 농장물입니다

근대이후의 산업화의 과 정은 한마디로 탈신화(脫神話)와 물신화(物神化)의 과정이었습니다. 인간의 내부에 있는 '자연'(自然)을 파괴하는 과정이었으며 동시에 외부의 자연을 허물고 그 자리에 '과자로 된 산'을 쌓아 온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앞으로 예상되는 영상문화와 가상문화(cyber culture)에 이르면 문화란 과연 무엇이며 우리의 삶과 사람에게 무엇이 될 것인가를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단죄없는 용서와 책임없는 사죄는 은폐의 합의입니다

청산한다는 것은 책임지는 것입니다. 단죄없는 용서와 책임없는 사죄는 '은폐(隱蔽) 의 합의(合議)'입니다. 책임짐으로써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청산입니다. 반드시 베를린이 아니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곳이 세계의 어느 곳이든 기적과 번영 의 가장 가까운 자리로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옮겨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유슈비츠는 단 지 2차대전의 참상을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찬미하고 있는 모든 '번영의 피라 미드'에 바쳐진 잔혹한 희생의 흔적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과정(過程)보다는 결과(結果), 내면(內面)보다는 외형(外形)의 화려함이 우리의 시선을 독점하고 있는 전도(顚倒)된 가치가 얼마나 끔찍한 희생을 동반하는가를 반성케 하는 제단(祭壇)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와 심()이 합하여 지()가 됩니다

상품으로 둘러싸인 세상은 마치 황금으로 둘러싸인 미다스왕의 정원과 같습니다. 황금의 정 원에 서 있는 미다스왕의 모습은 소외(疏外)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의사소통(意思疏通)의 수 단(手段)인 언어를 상품으로 만들고 유통수단인 화폐를 상품으로 만들어 온 현대자본주의가 앞으로 어떤 뜻()을 지향해 갈 것인지 생각하면 망연해질 뿐입니다. 상품이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항상 다른 것을 얻기 위한 수단입니다. 우리가 뜻을 바쳐야 할 곳은 수단이 아니라 아름다운 대상이어야 합니다. 당신은 자기의 영혼을 바칠 수 있는 대상을 갖지 못한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추락이 이상(理想)의 예정된 운명입니다.

그러나 이상은 대지(大地)에 추락하여야 합니다.

소수의 그룹이나 개인에게 전유(專有)된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모든 민중들에 의해서 그 이상이 공유(共有)되었던 혁명은 비록 실패로 끝난 것이라 하더라도 본질에 있어서 승리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실패는 그대로 역사가 되고, 역사의 반성이 되어 이윽고 역사의 다음 장에서 새로운 모 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혁명의 성패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정신의 세례를 받 았는가에 의해서 판가름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바로 이점에 있어서 23백만의 전프랑스인들이 함께 일어선 프랑스혁명은 실패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근현대사에 점철되어 있는 좌절을 기억하는 방법도 이와 다르지 않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동물은 정신병에 걸리는 법이 없습니다.

도시는 한마디로 '반자연 공간'(反自然 空間)입니다. 자연을 거부하며 자연과 끊임없이 싸우 는 공간입니다. 내가 방문한 여러 도시들에서 받은 인상이 그랬습니다. 도시가 문화공간이 며 역사공간임에는 틀림없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연으로부터의 거리를 문화의 높이로 계산하 고 있는 것이 도시의 본질이었습니다. 그러나 돈 없는 도시의 모습은 돈 없는 사람의 모습 보다 훨씬 더 초라하였습니다. 단 하루라도 닦고, 쓸고, 때우고, 칠하지 않으면 금새 회색의 공간으로 남루하게 변해버리는 것이 도시였습니다.


()은 절반을 뜻하면서 동시에 동반(同伴)을 뜻합니다.

피아노는 우리에게 반음(半音)의 의미를 가르칩니다. ()은 절반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반 ()을 의미합니다. 동반(同伴)을 의미합니다. 모든 관계의 비결은 바로 이 반()과 반()의 여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반(折半)의 환희'는 절반의 비탄과 같은 것이며, '절반의 희망'은 절반의 절망과 같은 것이며, '절반의 승리'는 절반의 패배와 다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절반의 경계(境界)에서 스스로를 절제(節制)할 수만 있다면 설령 그것이 희망과 절망, 승리과 패배라는 대적(對敵)의 언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동반의 자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문명은 대체가 불가능한 거대한 숲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논리적 접근보다 더욱 중요한 역사적 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 니다. 문명은 그것이 아무리 조야한 것이라도 부단히 계승됨으로써 인류의 귀중한 지혜가 되어왔다는 역사의 교훈이 그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떤 문명을 다른 문명으로 대체(代替) 하는 것 역시 본질에 있어서는 파괴라고 해야 합니다. 대체는 단절이며 단절은 파괴와 동일 합니다. 더구나 문명은 데체가 불가능한 숲입니다. 한 그루 나무도옮겨심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거대한 숲이야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우리는 나아가면서 길을 만듭니다

어떤 특수한 전형(典型)을 만들어내는 노력보다는 저마다의 역사와 현실을 이루고 있는 가장 보편적 정서와 가장 현실적인 삶의 틀에서부터 출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상 적 실천과 그 일상적 실천을 부단히 축적해간다면 전형은 사후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가장 친숙한 생산, 소비, 학습, 문화의 틀에서부 터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일상적인 삶의 틀을 주어진 조건으로 인정하고 그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대상을 좀 더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어나가는 평범하면서도 꾸준한 노력에 서 시작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는 뼈를 가볍게 합니다

하늘에 높이 솟아오르려는 새는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많은 것을 버려야 합니다. 심지어 제몸 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뼈 속을 비워야(骨空)합니다. 그 위에 다시 비상을 위한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클래식의 세계가 별을 바라보게 하고 스스로의 오만을 준열하게 꾸짖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 없지만 스스로를 작게 가지려는 겸손함이야말로 어떠한 시대에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인간적 품성이라고 믿습니다.


새로운 양식(樣式), 새로운 철학의 탄생은 

언제나 멀고 불편한 땅에서 그 모태를 

발견해 온 것이 인류사의 역정(歷程)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어느 개인의 인생이든, 또는 자본의 순환이 든 동반의 제1조건은 착목(着目)하는 곳이 멀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표 가 멀수록 동반의 도정(道程)은 그만큼 길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긴 동반의 도 정에서 혹시라도 가난을 인류의 공적(公敵)으로 통감하는 애정에 합의할 수 있다면,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함께'의 의미를 '달성'(達成)의 의미로 읽을 수 있다면 더욱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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