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중앙선으로 서울 가는 길에 추노지향(鄒魯之鄕)이라 일컫는 안동엘 들러 퇴계 선생의 도산서원을 하루 찾아가 본 일이 있다. 버스로 오십리, 예안이라 하는 조그마한 산읍의 장터에서, 다시 십오리 가량 걸어야 하였는데, 도중 도산면이라는 패목(牌木)이 서 있는 등성이 하나를 넘으니 여태까지의 메마르고 평범한 산야의 풍경과는 딴판인 유수(幽邃)한 지역이 안전(眼前)에 이루어졌다. 사방으로 산이 다가선 골짝이기는 하나 때마침 신록철이라 꾀꼬리 울음소리가 굴려나는 연연한 류색(柳色)과 검은 솔빛이 어울려 자욱 우거진 사이로 마을이 있고, 청류(淸流)가 굽이 흐르고, 그 청류를 또 얼마를 가니 오목한 골 사이에 서원의 조찰한 모습이 숨은 듯이 앉아 있어 그 일대의 한수(閑邃)한 정취야말로 산수가 그대로 선생의 유훈을 받들어 지키고 있는 것만 같아 성스럽고도 멀리 시대를 잊은 듯하였다.
나는 이 길을 오고가며 그 당시 거유의 성해(聲咳)를 경모하여 경상도 안동 땅에서도 두메인 낙동강 사류의 이 골짜구니를 멀다 않고 전국에서 찾아드는 선비들의 발길이 낙역(絡繹)하였을 그 날을 생각하고 감개 깊은 바 있었건만, 정작 이곳이 바로 「꽃」과 「광야」를 남긴 우리 육사의 고장이요, 이 서원에서 불과 칠, 팔 마장 상거(相距)한 원촌(遠村)이라는 마을이 그가 태생한 곳이라는 것을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알았던들, 아무리 노정이 바빴더라도 그곳까지 발길을 늘려 이날의 감회가 더욱 컸으련만 자못 애석한 것이었다. 실상인즉 오늘 내게는 국보적인 퇴계 선생보다 육사가 아쉽고 직접 피부에 가차운 것이다. 그것은 시간적인 관계에서보담도 공간적으로 그 험탁(險濁)한 같은 위치를 겪어 맛본 소치임에 틀림 없으리라.
어느 때 어디선가 육사는 교양과 취미로서 시를 썼다고 내가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도 육사의 값을 폄하하는 것은 못된다. 참으로 육사가 그의 짧은 생애에 생명으로써 정열하고 관심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문학이 아니요, 그보다 더욱 절실한 그 무엇에 있었을 것이다. 만약에 그가 문학에다 본령을 두었더라면 그의 빛나는 천품이 어찌 불과 작시(作詩) 수십 편에 그쳤겠는가.
옛날 학자들은 그들의 청절뇌락(淸節磊落)한 품위와 높은 윤리로서 학문의 조예와 아울러 훌륭한 시인이기도 하고 뛰어한 경세가(經世家)이기도 하였듯이, 육사도 일견 가늘고 적고 얌전한 샌님이면서도 매섭고 꼿꼿함을 지열(地熱)같이 내장하고 있었음과, 또한 교양과 취미로서 문학에도 친했음은 역시 이조(李朝) 거유(巨儒)의 십사대손으로서의 높은 지체와 뼈의 피할 수 없는 소치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육사는 시인으로서 남고 말았다. 물론 인간 육사는 무도(無道)에의 반항자로서 생애를 무고(無辜)히 마쳤건마는 마침내 시인으로 남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육사는 이것을 누명(陋名)으로 지하에서 노여워할런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참으로 그가 생명의 깊이로써 관여하고 불망(不忘)하던 것은 그까짓 시 나부랭이가 아니었었을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마침내 그는 그가 시인이었음의 증거를 스스로 남기고 간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 「광야」 일절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 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 「꽃」 일절
시인이란 불가침한 생명 그것이요, 무(無)에서의 창조요, 어떠한 불모에도 개화를 짓고야 마는 존엄 그것이 아니었던가. 그리하여 그는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광야」 일절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 「꽃」 일절
옛 이스라엘 선지자가 하늘나라를 이르르기를 광야에서 외치듯 그 자신 훨훨 불타는 겁화(劫火)처럼 불멸한 생명의 확신과 재기를 우리 앞에 소리 높이 예언하고 증거하여 줄 것이다. 사실 필경은 육사의 목숨까지도 빼앗아간 일제―우리 민족 전체를 말살하고야 말려고 들던 일제의 그 불구대천의 폭태(暴戻)를 다시금 회상할 때 육사의 마지막 절창(絶唱)인 「꽃」과 「광야」는 그대로 그날 우리 삼천만 겨레 전체의 자신에 대한 피나는 맹서요 간의 결의였던 것이다. 참으로 좋은 시인은 보배로운지고! 어찌 시인이 곤충같이 작품을 다산(多産)하여야만 되는가. 다못 한 편을 남긴다 할지라도 그것이 만인의 호흡에 한 가지로 작흥(作興)할 수 있다면, 시인으로서의 영광과 직책을 다하였다고 할 수 있지 않는가. 육사여! 명목(瞑目)하시라. 당신이 값 치지 않던 당신의 시로서 얻은 약속과 신념으로써 당신이 오매(寤寐) 진환(瞋患)하던 바 폭학(暴虐)이 죽고 마침내 옳음이 백일(白日)에 빛나게 되었으니 어찌 족하지 않으신가.
1955년 9월 일
청마(靑馬) 지(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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