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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앤 롤링의 하버드 대학 졸업식 연설

New-Mountain(새뫼) 2016. 9. 11.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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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ringe Benefits of Failure,

and the Importance of Imagination

 

실패의 부가적 이익과 상상력의 중요성

- 조앤 롤링의 하버드 대학 졸업식 연설 (200865) -

 


President Faust, members of the Harvard Corporation and the Board of Overseers, members of the faculty, proud parents, and, above all, graduates.

Faust 총장님, Harvard 법인과 감독위원회 위원 여러분, 교수단 여러분, 훌륭하신 학부모님들, 무엇보다 졸업생 여러분,


The first thing I would like to say is ‘thank you.’ Not only has Harvard given me an extraordinary honour, but the weeks of fear and nausea I have endured at the thought of giving this commencement address have made me lose weight. A win-win situation! Now all I have to do is take deep breaths, squint at the red banners and convince myself that I am at the world’s largest Gryffindor reunion.

먼저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Harvard는 저에게 특별한 영예를 주었을 뿐 아니라, 졸업식 연설을 한다는 생각에 견뎌야 했던 몇 주간의 걱정과 메스꺼움 덕분에 제 몸무게 또한 줄었습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지요. 이제 제가 할 일은 숨을 깊게 들이 마시고, 저 붉은 깃발을 곁눈질로 쳐다보면서 세상에서 제일 큰 Gryffindor 동창회에 와 있다고 나 자신을 확신시키는 일입니다.


Delivering a commencement address is a great responsibility; or so I thought until I cast my mind back to my own graduation. The commencement speaker that day was the distinguished British philosopher Baroness Mary Warnock. Reflecting on her speech has helped me enormously in writing this one, because it turns out that I can’t remember a single word she said. This liberating discovery enables me to proceed without any fear that I might inadvertently influence you to abandon promising careers in business, the law or politics for the giddy delights of becoming a gay wizard.

졸업식에서 연설을 한다는 것은 아주 큰일입니다. 아니 제 자신의 졸업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날의 졸업식 축사는 저명한 영국 철학자 Mary Warnock 남작부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연설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은 제가 이 글을 쓰는 데 매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분의 말씀 중 한 마디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저를 자유롭게 해 주는 그 발견 덕분에 저는 제가 부지중 여러분에게 영향을 끼쳐 경영, 법률, 정치와 같은 촉망되는 직업을 포기하고, 동성애자 마법사가 되게 하는 건 아닐까하는 두려움 없이 진행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You see? If all you remember in years to come is the ‘gay wizard’ joke, I’ve come out ahead of Baroness Mary Warnock. Achievable goals: the first step to self improvement.

눈치 채셨나요? 몇 년 후 여러분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동성애자 마법사농담뿐이라도 저는 Mary Warnock 남작부인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자아성취의 첫 단계인 성취가능한 목표이지요.


Actually, I have wracked my mind and heart for what I ought to say to you today. I have asked myself what I wish I had known at my own graduation, and what important lessons I have learned in the 21 years that have expired between that day and this.

사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무척 고민했습니다. 내가 졸업할 때 무엇을 알았으면 좋았을까, 그 날 이후 21년이 지난 지금 나는 어떤 중요한 교훈을 얻었을까, 하고 나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I have come up with two answers. on this wonderful day when we are gathered together to celebrate your academic success, I have decided to talk to you about the benefits of failure. And as you stand on the threshold of what is sometimes called ‘real life’, I want to extol the crucial importance of imagination.

저는 두 가지 답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의 학문적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이날 저는 실패의 이점에 대해서 말하기로 생각했습니다. 또 저는 여러분이 때로 현실적 삶이라 불리는 곳으로 들어가는 문지방에 서 있기 때문에 저는 상상력의 커다란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고 싶습니다.


These may seem quixotic or paradoxical choices, but please bear with me.

엉뚱하고 모순된 주제를 선택한 것 같지만, 끝까지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Looking back at the 21-year-old that I was at graduation, is a slightly uncomfortable experience for the 42-year-old that she has become. Half my lifetime ago, I was striking an uneasy balance between the ambition I had for myself, and what those closest to me expected of me.

졸업식 당시 스물 한 살이었던 저에 대해 돌이켜 생각하는 것은 지금 마흔 둘이 된 지금의 나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21년 전 저는 제 자신의 야망과 나와 가장 가까운 이들에 내게 기대하는 것의 사이에서 억지로 균형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I was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I wanted to do, ever, was to write novels. However, my parents, both of whom came from impoverished backgrounds and neither of whom had been to college, took the view that my overactive imagination was an amusing personal quirk that would never pay a mortgage, or secure a pension. I know that the irony strikes with the force of a cartoon anvil, now.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오로지 소설을 쓰는 것뿐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 대학을 못 다닌 저의 두 부모님은 저의 지나친 상상력을 재미있는 개인적 취향일 뿐 융자금을 갚을 수도, 연금을 낼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모순은 만화 속에 등장하는 쇠모루의 힘만큼 강한 것입니다.


So they hoped that I would take a vocational degree; I wanted to study English Literature. A compromise was reached that in retrospect satisfied nobody, and I went up to study Modern Languages. Hardly had my parents’ car rounded the corner at the end of the road than I ditched German and scuttled off down the Classics corridor.

따라서 부모님은 제가 직업에 도움이 되는 학위를 따기 원하셨지만, 저는 영문학을 공부하기 원했습니다. 절충안을 찾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것은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했고, 저는 현대 언어를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차가 길 모퉁이를 돌자마자 저는 독일어를 포기하고 고전학부의 복도를 따라 달려갔습니다.


I cannot remember telling my parents that I was studying Classics; they might well have found out for the first time on graduation day. Of all the subjects on this planet, I think they would have been hard put to name one less useful than Greek mythology when it came to securing the keys to an executive bathroom.

부모님께 고전을 공부한다고 말씀 드린 기억은 없습니다. 아마 제 졸업식 날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되셨을 겁니다. 그분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학과목 가운데 중역실의 화려한 화장실을 여는 열쇠를 얻는 데 그리스 신화보다 무용한 것의 이름을 대기 힘드셨을 것입니다.


I would like to make it clear, in parenthesis, that I do not blame my parents 

for their point of view. There is an expiry date on blaming your parents for steering you in the wrong direction; the moment you are old enough to take the wheel, responsibility lies with you. What is more, I cannot criticise my parents for hoping that I would never experience poverty. They had been poor themselves, and I have since been poor, and I quite agree with them that it is not an ennobling experience. Poverty entails fear, and stress, and sometimes depression; it means a thousand petty humiliations and hardships. Climbing out of poverty by your own efforts, that is indeed something on which to pride yourself, but poverty itself is romanticised only by fools.

저는 그렇게 생각하셨던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을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했다고 부모님을 비난하는 데는 만기가 있습니다. 자기 인생의 운전대를 잡을 나이가 된 순간, 모든 책임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부모님 당신께서도 가난하셨고, 저 또한 그 이후 가난했기 때문에, 가난이 고상한 경험은 아니라는 사실에 부모님과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가난은 공포, 스트레스, 때로는 우울증을 동반합니다. 그것은 많은 소소한 굴욕과 고난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가난을 헤쳐나오는 것은 자랑스러워 할 일이지만, 가난 그 자체를 낭만으로 여기는 것은 바보들 뿐입니다.


What I feared most for myself at your age was not poverty, but failure.

여러분 나이에 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가난이 아니라 실패였습니다.


At your age, in spite of a distinct lack of motivation at university, where I had spent far too long in the coffee bar writing stories, and far too little time at lectures, I had a knack for passing examinations, and that, for years, had been the measure of success in my life and that of my peers.

카페에서 소설을 쓰면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강의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던 대학 시절, 저는 여러분의 나이었고, 분명한 동기도 없었음에도 시험을 통과하는 요령을 알았으며, 그것은 여러해 동안 제 삶에 있어서, 그리고 제 친구들의 삶에 있어서 성공의 척도였습니다.


I am not dull enough to suppose that because you are young, gifted and well-educated, you have never known hardship or heartbreak. Talent and intelligence never yet inoculated anyone against the caprice of the Fates, and I do not for a moment suppose that everyone here has enjoyed an existence of unruffled privilege and contentment.

여러분이 젊고 재능 있으며 좋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역경이나 상심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제가 아둔하지는 않습니다. 재능과 지식이 있다고 운명의 여신의 변덕에 대항할 예방주사를 맞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저는 여기 있는 모두가 아무 문제 없이 특권과 만족을 누리며 살았다고 한 순간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However, the fact that you are graduating from Harvard suggests that you are not very well-acquainted with failure. You might be driven by a fear of failure quite as much as a desire for success. Indeed, your conception of failure might not be too far from the average person’s idea of success, so high have you already flown.

그러나 여러분이 Harvard를 졸업한다는 사실에서 저는 여러분이 실패에 별로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공에 욕망 못지않게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쫓길 수 있습니다. 진정 실패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평균적인 사람의 성공에 대한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여러분은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Ultimately, we all have to decide for ourselves what constitutes failure, but the world is quite eager to give you a set of criteria if you let it. So I think it fair to say that by any conventional measure, a mere seven years after my graduation day, I had failed on an epic scale. An exceptionally short-lived marriage had imploded, and I was jobless, a lone parent, and as poor as it is possible to be in modern Britain, without being homeless. The fears that my parents had had for me, and that I had had for myself, had both come to pass, and by every usual standard, I was the biggest failure I knew.

결국 우리 모두 실패가 무엇인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지만,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세상이 주고자 열망하는 성공의 기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관습적인 기준으로 보더라도 저는 학교를 졸업한 지 단 7년 만에 엄청난 실패를 경험했다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극히 짧았던 결혼은 파탄이 났고, 직업도 없이 아이를 키웠으며, 노숙자가 아니라는 것만 빼년 현대 영국 사회에서 가장 가난했습니다. 제 부모님이 제게 대해 가졌던, 또 제가 자신에 대한 가졌던 두려움은 현실이 되었고, 모두 통상적인 기준에 맞춰볼 때 저는 제가 아는 그 어떤 사람보다 최악의 실패자였습니다.


Now, I am not going to stand here and tell you that failure is fun. That period of my life was a dark one, and I had no idea that there was going to be what the press has since represented as a kind of fairy tale resolution. I had no idea then how far the tunnel extended, and for a long time, any light at the end of it was a hope rather than a reality.

저는 이 자리에서 서서 실패가 유쾌한 경험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제 삶의 그 시기는 암울했고, 언론이 동화 같은 인생 역전이라고 표현해온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터널의 끝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고, 오랜 동안 터널 끝의 빛은 현실이기 보다 희망사항일 뿐이었습니다.


So why do I talk about the benefits of failure? Simply because failure meant a stripping away of the inessential. I stopped pretending to myself that I was anything other than what I was, and began to direct all my energy into finishing the only work that mattered to me. Had I really succeeded at anything else, I might never have found the determination to succeed in the one arena I believed I truly belonged. I was set free, because my greatest fear had been realised, and I was still alive, and I still had a daughter whom I adored, and I had an old typewriter and a big idea. And so rock bottom became the solid foundation on which I rebuilt my life.

그런데 왜 실패의 유익에 대해 말하려 할까요? 실패는 불필요한 것들의 제거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 자신이 아닌 그 무엇인 것처럼 행동하기를 멈추었고, 제게 중요한 그 일을 끝마치는 데 저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다른 일에서 진정 성공했었다면, 제가 진정 있어야 한다고 믿는 경기장에서 성공하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일어났기에 저는 자유로워졌습니다. 저는 아직 살아있었고, 사랑하는 딸이 있었으며, 낡은 타자기와 멋진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밑바닥의 바위덩이가 제 인생을 다시 건축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You might never fail on the scale I did, but some failure in life is inevitable. It is impossible to live without failing at something, unless you live so cautiously that you might as well not have lived at all in which case, you fail by default.

여러분은 저처럼 큰 실패를 겪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인생에 있어 실패란 불가피한 것입니다. 무언가 실패함이 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너무 몸을 사려서 인생 아닌 인생을 사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도 그 자체로 실패겠지요.


Failure gave me an inner security that I had never attained by passing examinations. Failure taught me things about myself that I could have learned no other way. I discovered that I had a strong will, and more discipline than I had suspected; I also found out that I had friends whose value was truly above the price of rubies.

실패를 통해 저는 시험을 통과하는 것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었던 내적인 안정을 찾았습니다. 실패를 통해서 다른 방식으로는 전혀 배울 수 없었던 저 자신에 대해 배웠습니다. 저는 제게 강한 의지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투철한 자제력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루비보다 진정 가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습니다.


The knowledge that you have emerged wiser and stronger from setbacks means that you are, ever after, secure in your ability to survive. You will never truly know yourself, or the strength of your relationships, until both have been tested by adversity. Such knowledge is a true gift, for all that is painfully won, and it has been worth more than any qualification I ever earned.

역경을 겪음으로써 자신이 더 현명해지고 강해졌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그것이 지나간 후에도 살아남을 능력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려움을 통해 검증 받지 못하면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인간관계가 가진 힘을 진정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한 지식이야 말로 고통스럽게 얻은 것이기에 진정한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가 얻은 어떤 자격보다 더욱 가치가 있습니다.


So given a Time Turner, I would tell my 21-year-old self that personal happiness lies in knowing that life is not a check-list of acquisition or achievement. Your qualifications, your CV, are not your life, though you will meet many people of my age and older who confuse the two. Life is difficult, and complicated, and beyond anyone’s total control, and the humility to know that will enable you to survive its vicissitudes.

시간을 돌리는 장치를 장치를 얻는다면, 저는 스물 한 살 나이의 저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행복이란, 인생이 무엇을 소유하고, 달성했는지에 달려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데 있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의 자격증, 이력서는 여러분의 인생이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은 그 둘을 혼동하는 제 연배나 연배 이상의 사람을 만나겠지만 말입니다. 인생은 어렵고 복잡합니다. 우리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겸손하게 알게 되면 그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Now you might think that I chose my second theme, the importance of imagination, because of the part it played in rebuilding my life, but that is not wholly so. Though I personally will defend the value of bedtime stories to my last gasp, I have learned to value imagination in a much broader sense. Imagination is not only the uniquely human capacity to envision that which is not, and therefore the fount of all invention and innovation. In its arguably most transformative and revelatory capacity, it is the power that enables us to empathise with humans whose experiences we have never shared.

제가 두 번째 주제인 상상력의 중요성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여러분은 그것이 제 삶을 다시 시작하는 데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잠들기 전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의 가치를 살아있는 한 끝까지 주장할 것이지만, 저는 훨씬 더 큰 의미에서 상상력의 가치를 알았습니다. 상상력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그릴 수 있는 인간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능력으로서 발명과 혁신의 원천입니다. 그러나 그 가장 변혁적이고 계시적인 능력 속에는 우리가 나누지 못한 경험을 가진 사람과 공감할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One of the greatest formative experiences of my life preceded Harry Potter, though it informed much of what I subsequently wrote in those books. This revelation came in the form of one of my earliest day jobs. Though I was sloping off to write stories during my lunch hours, I paid the rent in my early 20s by working at the African research department at Amnesty International’s headquarters in London.

제 삶을 형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경험 가운데 하나는 제가 해리 포터를 쓰기 이전의 일이며, 그것은 이후 제가 해리 포터를 쓸 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경험은 제가 초기에 가졌던 일 중 하나에서 얻었습니다. 점심 시간 동안 소설을 쓰기 위해 잠시 빠져나와는 있었지만, 저는 런던에 있는 국제사면위원회 본부의 아프리카연구팀에서 일을 하면서 제가 사는 집의 임대료를 지불했습니다.


There in my little office I read hastily scribbled letters smuggled out of totalitarian regimes by men and women who were risking imprisonment to inform the outside world of what was happening to them. I saw photographs of those who had disappeared without trace, sent to Amnesty by their desperate families and friends. I read the testimony of torture victims and saw pictures of their injuries. I opened handwritten, eye-witness accounts of summary trials and executions, of kidnappings and rapes.

저는 제 작은 사무실에서 전제정권을 피해 몰래 밀반출된 휘갈겨쓴 편지들을 읽었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바깥 세상에 알리기 위해 투옥을 감수한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편지였습니다. 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사진을 보았는데, 그 가족과 친구들이 절박하게 사면위원회에 보낸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끔찍한 고문을 당한 사람들의 증언도 읽었고 상처를 찍은 사진도 보았습니다. 저는 즉결심판과 처형, 납치와 성폭력의 증언이 담긴 수기로 쓰인 편지를 열어 보았습니다.


Many of my co-workers were ex-political prisoners, people who had been displaced from their homes, or fled into exile, because they had the temerity to speak against their governments. Visitors to our offices included those who had come to give information, or to try and find out what had happened to those they had left behind.

저의 많은 동료들이 과거 정치범이었고, 그들은 정부에 반대하는 말을 할 용기를 가졌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나 추방을 당했습니다. 우리 사무실을 찾아온 사람들 중에는 정보를 제공하러 온 사람들도 있었고, 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 위해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I shall never forget the African torture victim, a young man no older than I was at the time, who had become mentally ill after all he had endured in his homeland. He trembled uncontrollably as he spoke into a video camera about the brutality inflicted upon him. He was a foot taller than I was, and seemed as fragile as a child. I was given the job of escorting him back to the Underground Station afterwards, and this man whose life had been shattered by cruelty took my hand with exquisite courtesy, and wished me future happiness.

그 가운데 고문의 희생자인 한 아프리카 인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당시 제 나이 또래였지만, 고국에서 겪은 그 모든 일로 정신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가해진 야만적 행위에 대해 비디오 카메라 앞에서 녹화하는 동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그는 나보다 30센티미터나 더 컸지만 어린 아이처럼 약해 보였습니다. 저는 나중에 그를 지하철 역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잔인함에 의해 삶이 산산조각난 그는 깍듯이 예절을 지키며 제 손을 잡고 행복을 빌어주었습니다.


And as long as I live I shall remember walking along an empty corridor and suddenly hearing, from behind a closed door, a scream of pain and horror such as I have never heard since. The door opened, and the researcher poked out her head and told me to run and make a hot drink for the young man sitting with her. She had just had to give him the news that in retaliation for his own outspokenness against his country’s regime, his mother had been seized and executed.

한번은 텅 빈 사무실 복도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닫힌 어느 사무실에서 고통과 두려움에 찬 비명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저는 그렇게 고통스러운 비명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소리는 아마 제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그 비명소리가 흘러나온 사무실 문이 열리고 연구직 여직원이 머리를 문 밖으로 내밀더니 따뜻한 음료를 갖다 달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른 그 청년에게 막 비보를 전했던 겁니다. 그 청년이 고국의 정권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을 한 데 대한 보복으로 정권이 그의 어머니를 처형한 것입니다.


Every day of my working week in my early 20s I was reminded how incredibly fortunate I was, to live in a country with a democratically elected government, where legal representation and a public trial were the rights of everyone.

20대 초반에 그 일을 하면서 저는 하루도 빠짐없이 제가 얼마나 행운아인지 절실히 느꼈습니다. 민주주의적 절차에 따라 선출된 정부가 나라를 통치하고, 국민 누구나 법적 대리인을 선정하고 공개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큰 행운입니다.


Every day, I saw more evidence about the evils humankind will inflict on their fellow humans, to gain or maintain power. I began to have nightmares, literal nightmares, about some of the things I saw, heard, and read.

매일매일 저는 권력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극악무도한 폭력을 가하고 있는지 더욱 많은 증거를 보았습니다. 제가 보고 듣고 읽은 이런 끔직한 내용들 때문에 저는 말 그대로 악몽을 꾸기도 했습니다.


And yet I also learned more about human goodness at Amnesty International than I had ever known before.

그러나 동시에 저는 국제사면위원회에서 일하는 동안, 인간의 선한 면에 대해서 이전보다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Amnesty mobilises thousands of people who have never been tortured or imprisoned for their beliefs to act on behalf of those who have. The power of human empathy, leading to collective action, saves lives, and frees prisoners. Ordinary people, whose personal well-being and security are assured, join together in huge numbers to save people they do not know, and will never meet. My small participation in that process was one of the most humbling and inspiring experiences of my life.

국제사면위원회에서 일하는 수천 명의 직원들은 그들 자신은 신념 때문에 고문을 당하거나 투옥된 경험이 없지만 그런 고통을 겪은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적인 공감을 바탕으로 함께 힘을 모아 위기에 처한 생명을 구하고 속박당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되찾아주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편안하고 안정된 삶이 보장된 보통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고 평생 만날 일도 없을 사람들을 구하려고 애씁니다. 그러한 일에 조금이나마 제가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제가 한 그 어떤 경험보다도 저 자신을 겸허하게 만들고 고무시켜주었습니다.


Unlike any other creature on this planet, humans can learn and understand, without having experienced. They can think themselves into other people’s places. Of course, this is a power, like my brand of fictional magic, that is morally neutral. one might use such an ability to manipulate, or control, just as much as to understand or sympathise.

지구상의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경험하지 않고도 배우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할 능력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 소설 속의 마법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중립입니다.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조정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그러한 능력을 쓸 수도 있습니다.


And many prefer not to exercise their imaginations at all. They choose to remain comfortably within the bounds of their own experience, never troubling to wonder how it would feel to have been born other than they are. They can refuse to hear screams or to peer inside cages; they can close their minds and hearts to any suffering that does not touch them personally; they can refuse to know.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상상력을 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범위 내에 편안하게 머물기를 선택하며,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어땠을지 굳이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비명을 들으려고도 감옥 속을 들여다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 어떤 고통에도 마음을 닫습니다.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I might be tempted to envy people who can live that way, except that I do not think they have any fewer nightmares than I do. Choosing to live in narrow spaces leads to a form of mental agoraphobia, and that brings its own terrors. I think the wilfully unimaginative see more monsters. They are often more afraid.

그렇게 사는 이들이 부럽다는 유혹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저보다 악몽에 덜 시달리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좁은 공간에 살기를 선택하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광장공포증을 유발하고, 그것은 공포를 유발합니다. 상상하기를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사람은 더 많은 괴물을 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때로 더 두려움을 느낍니다.


What is more, those who choose not to empathise enable real monsters. For without ever committing an act of outright evil ourselves, we collude with it, through our own apathy.

나아가 타인과의 공감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진짜 괴물들을 만들어냅니다. 악한 행위를 직접 수행하지는 않지만 공감을 거부함으로써 우리는 악과 공모합니다.


One of the many things I learned at the end of that Classics corridor down which I ventured at the age of 18, in search of something I could not then define, was this, written by the Greek author Plutarch: What we achieve inwardly will change outer reality.

딱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무언가를 찾아 열여덟 살 때 과감히 발을 들여 놓았던 고전학의 복도 끝에서 내가 배운 한 가지는 그리스의 작가 플루타르스쿠스에 의해 쓰여진 이것입니다. “우리가 내적으로 성취한 것이 외적인 현실을 바꿀 것이다.”


That is an astonishing statement and yet proven a thousand times every day of our lives. It expresses, in part, our inescapable connection with the outside world, the fact that we touch other people’s lives simply by existing.

이 놀라운 구절은 우리의 일상에서 수업이 증명됩니다. 부분적으로 이것은 우리가 바깥 세계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우리는 존재하다는 사실만으로 다른 이들의 삶에 영향을 끼칩니다.


But how much more are you, Harvard graduates of 2008, likely to touch other people’s lives? Your intelligence, your capacity for hard work, the education you have earned and received, give you unique status, and unique responsibilities. Even your nationality sets you apart. The great majority of you belong to the world’s only remaining superpower. The way you vote, the way you live, the way you protest, the pressure you bring to bear on your government, has an impact way beyond your borders. That is your privilege, and your burden.

하물며 2008Harvard를 졸업하는 여러분들은 얼마나 더 큰 영향을 끼치겠습니까? 지성, 꾸준한 노력, 이미 받은 교육을 통해 여러분은 남다른 지위와 책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국적조차도 여러분을 구별짓습니다. 여러분의 대부분은 남아 있는 유일한 초강대국 국민입니다. 여러분이 투표하는 방식, 여러분이 저항하는 방식, 정부에 가하는 압력과 같은 것들은 국경을 뛰어넘어 영향을 끼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특권이며, 부담입니다.


If you choose to use your status and influence to raise your voice on behalf of those who have no voice; if you choose to identify not only with the powerful, but with the powerless; if you retain the ability to imagine yourself into the lives of those who do not have your advantages, then it will not only be your proud families who celebrate your existence, but thousands and millions of people whose reality you have helped change. We do not need magic to change the world, we carry all the power we need inside ourselves already: we have the power to imagine better.

발언권이 없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여러분의 발언권을 높이기 위해 지위와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힘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기로 한다면,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자랑스런 가족뿐 아니라, 여러분이 삶을 바꾸어 놓을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의 존재를 기릴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마법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더 좋은 세상을 상상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I am nearly finished. I have one last hope for you, which is something that I already had at 21. The friends with whom I sat on graduation day have been my friends for life. They are my children’s godparents, the people to whom I’ve been able to turn in times of trouble, people who have been kind enough not to sue me when I took their names for Death Eaters. At our graduation we were bound by enormous affection, by our shared experience of a time that could never come again, and, of course, by the knowledge that we held certain photographic evidence that would be exceptionally valuable if any of us ran for Prime Minister.

이제 거의 끝났습니다. 여러분에게 마지막 하나의 바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스물 한 살 때 가졌던 것입니다. 졸업식날 나와 함께 했던 친구들은 평생의 친구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제 아이들의 대모와 대부였으며, 제가 어려울 때 의지할 사람이었고, 제 소설 속 악역들로 그 이름을 사용해도 저를 고소하지 않을 정도로 착했습니다. 큰 애정이 있었고, 다시 오지 않을 함께 했던 시간이 있었으며, 누군가 수상에 출마했을 때 써먹을 엄청난 가치를 지닌 사진을 함께 찍었다고 생각했기에 우리는 똘똘 뭉쳤습니다.


So today, I wish you nothing better than similar friendships. And tomorrow, I hope that even if you remember not a single word of mine, you remember those of Seneca, another of those old Romans I met when I fled down the Classics corridor, in retreat from career ladders, in search of ancient wisdom: As is a tale, so is life: not how long it is, but how good it is, is what matters.

그래서 저는 오늘 저희와 같은 우정을 여러분이 나누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일, 오늘 제가 한 말을 한 마디도 기억 못 할지라도 Seneca의 이 말만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대의 지혜를 찾아, 입신양명의 사다리에서 내려와 고전학의 복도를 달릴 때 만났던 또 다른 로마인입니다. “이야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삶에서도 그러하다. 중요한 것은 길이가 아니라 얼마나 훌륭하냐이다.”


I wish you all very good lives. Thank you very much.

여러분 모두 훌륭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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