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 시골서 漢學만 공부하다가 3․1운동 직후「신학문」을 뜻하고 서울로 올라와 중학 1년간에 數學에 몰두했고, 다음 日東에 건너가 대학에선 어찌 어찌한 기연으로 서구문학에 심취, 豫科에선 불문학, 본과는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재학 중에 보오들레에르․키이츠에 흥미가 있었고, 한편 에머슨․지이드 등을 좋아했다. 대학 졸업 후 약관에 평양 S전문에 교수로 갔다. 그 뒤 10년간 쥐꼬리만한 영․미문학의 지식으로 칼라일․세익스피어․엘리어트 등을 講하는 한편, 문단에선 시와 평론과 수필과 번역을 그적거려 약간의 文名을 날렸다. 가르치고 글쓰는 여가엔 거리에 나가 길가에서 노인들․지겟군들과 함께 장기두기로 일과를 삼았었다. 참으로 태평閒日月의 消遣이었다. 국학에 대한 관심이야 어렸을 적부터 없지는 않았었지만, 한글 공부 등을「취미」정도로 했을 뿐, 그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지 못했었다. 더구나 어려서부터 야망은 오로지「不朽의 文 章」에 있었으매, 시인․비평가․사상인이 될지언정「학자」가 되리란 생각은 별로 없었다.
나로 하여금 국문학 고전연구에 기연을 지어준 것은 일제중엽 문필에의 저들의 극단의 强壓에 의한 부득이한 학문적 전향이었으나, 직접적 동기는 日人 조선어학자 소창(진평)씨의 「향가 및 이두의 연구」(1929)란 저서를 대함에서였다. 우연히 학교 도서관에 온「경성제국대학 紀要 제1 권」이란 부제가 붙은 그 책을 빌어 처음엔 호기심으로, 차차 경이와 감탄의 눈으로 하룻밤 사이에 그것을 통독하고 나서 나는 참으로 글자 그대로 경탄했고, 한편 비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첫째, 우리 문학의 가장 오랜 유산, 더구나 우리문화 내지 사상의 현존 最古源流가되는 이 귀중한「향가」의 해독을 近千年來 아무도 우리의 손으로 시험치 못하고 외인의 손을 빌었다는 그 민족적 부끄러움, 둘째, 나는 이 사실을 통하여 한 민족이「다만 총․칼에 의해서만 망함이 아님」을 문득 느끼는 동시에 우리의 문화가 언어와 학문에 있어서까지 완전히 저들에게 빼앗겨 있다는 사실을 통절히 깨달아, 내가 혁명가가 못되어 총․칼을 들고 저들에게 대들지는 못하나마 어려서부터 학문과 문자에는 약간의「天分」이 있어 맘속 깊이「願」도「熱」도 있는 터이니 그것을 무기로 하여 그 빼앗긴 문화유산을 학문적으로나마 결사적으로 戰取․奪還해야 하겠다는, 내딴에 사뭇 비장한 발원과 결의를 했다.
소창씨의 저서를 읽은 다음날 나는 우선 장기판을 패어서 불때고, 영․미문학서는 잠깐 궤 속에 집어넣어 두고, 상경하여 한글 古文獻 藏書家 여러분 故 一簑(方鍾鉉)․六堂, 一石(이희승)․가람(이병기) 諸氏를 歷訪하여 그 귀중한 문헌들을 한두 달 동안의 기한으로 빌었다. 그 국보급의 장서들을 아낌없이 빌려주던 諸家의 厚意를 나는 잊을 수 없다. 한 가지 삽화-내가 그 책들을 빌어 큰 보따리짐을 만들어 등에 지고 아침에 낑낑 걸어 역으로 나가는 길에 鄭爲堂(인보)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는 내가 짐꾼이 되었음에 깜짝 놀라,
「아, 无涯! 그 등에 진 것이 무엇이오?」
「책이오.」
「책이라니? 무슨 책이기에 짐꾼에게 지우지 않고 몸소 지고 가시오?」
「예, 가만히 두고 기다려보십시오. 몇 달 뒤에 우리 문화사상 깜짝 놀랄 일이 생겨나리다!」
내려가서 우선 한달 동안은 문헌 蒐集에 골몰하고, 다음은 글자대로 불철주야로 심혈을 傾注, 머리를 싸매고 여러 문헌을 섭렵․연구한 결과 약 반년만에 우선 소창씨의 역독의 태반이 誤謬임과 그것을 論破할 학적 준비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악전․고투 무리한 심한 공부는 드디어 건강을 상하여 대번에 극심한 肺炎에 걸려 발열이 며칠 동안 40도 넘어 아주 인사불성, 사람들이 모두 죽는 줄 알았었다. 아내가 흐느끼고 찾아온 학생들이 모두 우는데, 내가 혼미한 중 문득 후다닥 일어나 부르짖었다-
「하늘이 이 나라 문학을 망치지 않으려는 한, 某는 죽지 않는다!」
이만한 血願이요 자부심이었다. 천행으로 병은 나았고, 나는 곧 나의「所見」을 써서「청구학 총」제19호에 그것을 발표했다(「향가의 해독 특히「원왕생가」에 就하여」1937년 1월.「국학연구논고」에 譯收).「청구학총」이란 日人학자, 주로 사학자들의 전문지였는데, 그들이 내 글을 권두에 실었다. 소창씨의 향가해독의 황당함을 일일이 학적으로 논증․변박한 것인데, 글도 少壯․氣銳를 다한 명문이었다. 그 一文이 금방 한․일 학계를 驚倒시켰고, 더구나 낭패한 것은 저쪽 학계였다. 소창씨의 그 著가 그의 학위 논문이요,「경성제대」제1논문집이요, 게다가 일본 학술원상과 또 소위「天皇」상까지 받은「大著」인데, 그것이 한낱 小壯「鮮人」私學 교수에게 여지없이「반휴지」가 되니, 저들의 낭패는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당시 城大 총장 某가 日紙에「이제 조선人도 공부를 시작했다」는 논제로 저희 학자들을 경고했고, 史학자 稻葉某가 나를 평양까지 委訪하고, 동경제대「史學잡지」에는 日人 조선어학자 金澤씨가 나의 소론에 全幅적으로 찬성, 소창씨의 답변을 요구하는 등의 소동이었다. 소창씨가 부득이「史學잡지」(제44호)에 답변문을 썼는데, 자기의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솔직히 시인했으나, 아직도 조선인 연소학도에게 전적으로 굴 복․투항하기는 자존심이 不許했던지, 다음과 같은 군소리들을 그 문중에 붙였다 -「駑馬가 늙었지마는, 뜻은 아직도 쇠하지 않았다. 10년 뒤에 다시 양씨와 대하는 날이 있을 것이다.」「무릇 남의 역독 중의 많은 잘된 것은 시렁 위에 올려놓아 두고 그릇된 부분만 골라서 지적․비탄함으로써 마치 대부분이 틀린 것처럼 거론함이 과연 학자의 옳은 태도일까?」
「분격」한 그의 답변 중 우선 前說을보고 내가 그 日人式「毒」한 도전에 도리어 용기를 얻어 불가불 이「일」을 위하여 계속 10년, 아니 필생의 힘을 기울여 끝내 그와 대결하리라는 결심을 다시 굳게 했고, 後說에 대하여는 간단히 金聖嘆의「西廂記」續篇 評文 중 다음의 一節을 그에게 사신으로 적어 보냈다. 그가 그 글의 뜻을 알았는지 의문이다 -
<옛날에 어떤 사람이 한 글을 지었는데, 마침 들으니 이즘에 某甲이 또한 그 글을 짓는다 하는지라, 자기의 초고를 감히 발표하지 못하고 某甲을 찾아가 그 글을 읽어보고 자기도 모르게 혀를 빼어 칭찬하더니, 돌아와 마침내 제 글의 초고를 불살라 후세에 전하지 않았다 한다. 아아, 이 어찌 엄청난 大人이 아니랴. 내가 늘 斲山에게 말하되,「아깝다, 그 글이 傳치 않았도다. 그 글이 반드시 某甲의 글과 마찬가지로 妙絶」했으리로다. 斲山이 묻되,「어찌 그러할 줄을 아느뇨?」가로되,「그야말로「甘苦․疾徐」중의 사람이니, 그의 다투는 바가 다만「한字․半字 사이에 있」는 것이다(渠所爭 只在一字半字之間 世)」>.(번역)
그 뒤 평양 S專의 職을 辭하고 서울로 올라와 빈궁과 문헌의 결핍과 싸우면서 다시 拮据 數年, 드디어「조선古歌연구」를 일제말기(1942)에 완성․간행했다. 중간의 노력과 고심은 이루 말할 나위도 없다. 사뇌가 全首를 四壁에, 심지어 뒷간에도 붙여두고 자나깨나, 앉으나 누우나, 그 풀이에 온 정신과 힘을 기울였다. 어떤 것은 밥먹다가 문득 깨쳐 일어나 한바탕 춤을 추어 집사람에게 미친양 오해된 적도 있고, 어떤 것은 用便 중 홀연히 터득하여 뒤도 못다 본채 크게 소리치며 얼른 적으려고 서실로 뛰어든 적도 있고, 또 어떤 것은 전차나 도보 중에, 심지어 어떤 것은 자다가 꿈 속에서 깨쳐 소스라쳐 놀라 깨어 황급히 紙筆을 찾아 잊기 전에 그 대강을 얼른 메모해두고 잔 적이 있으니, 가위 옛사람의「馬上․枕上․厠上」에「食卓上」을 더한「四上」이라 할 만했다. 눈만 감으면 보이는 것은 모조리 사뇌가 全文 - 그 片言․集字들의 삼삼한 나열이요, 논증의 재료가 되는 호한한 내외관계 문헌들의 인용될만한 語句들이었다.
연구 도중의 잊혀지지 않는 몇 가지 일이 회상된다. 첫째는 책 빌러 다니던 고심, 둘째는 가난과 유혹과 싸우던 기억. 이러한「기쁜 괴로움」들 외에 다음과 같은 작은 일도 회상된다. 카아드 한 장 없이 되는 대로 공책에다 古語彙들과 출처들을 그적거려 두었었는데, 막상 원고를 定草할 때에 원전과 대비해보니, 그것이 없다. 예컨대「迷」의 古語「이」이란 말은「두시언해」권17 제9葉과「월인석보」권8에만 보이는데,「두언 17:9」라 공책에 연필로 적었던 것이 희미하게 지워져서 판독할 길이 없다. 그 한 말을 다시 찾아내려면, 호한한「두언」4권 전부를 모조리 다시 내려읽을 수밖에 없다. 어서 출판은 해야 하겠고(당시 우리의 語․文이 전적으로 금지되려는 기미가 있어 내 책 출판은 그야말로 焦眉의 急을 요했다),그래 부득이 가족 전부 - 아내와 두 딸을 억지로「동원」하여 나를 합한 네 사람이 6책씩 나누어 가지고 일일이 첫장부터 훑어 내려갔다. 그러나 6책씩을 다 마쳤는데도 例의「이」은 나타나지 않는다. 실수는 필경 차녀에게 있는 듯했다. 아내와 장녀는 내「일」에 그래도 다소 동정적인 열심한「근무」이나, 어린 딸은 아무런 흥미와 세심의 주의가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담당분 권13~18을 내가 재조사한 결과 제17권에서 드디어「이」은,「迷」가 아니라, 찾아지고야 말았다. 그 중간의 고심, 그 끝내의 기쁨! 책이 된 뒤에 그것을 나의 무보수「助手」들이었던 나의 가족들 - 특히 강제로 징용되어 흥미없는, 성가신, 학자 아버지의「뜻 모를 일」에 고역하다가 욕만 먹고 울던 어린 딸에게「바치」지 않은 나의 학자적「체면」이 지금에도 恨이다.
원고는 되었으나, 일제말기라, 출판해 줄 책사가 또 없었다. 萬여 장의 원고를 보따리에 싸가지고 이 서점, 저 서점으로 돌아다니며 간행을 애걸했으나, 모두 나의 꾀죄한 주제와 보따리를 보고 나를「돌았다」고 보는 표정으로 물리쳤다. 보따리를 들로 어느 서점 아닌 주점에 들어가 大醉․통곡하는 중에 史학자 某씨를 만나 또 한바탕 歔欷한 것을 기억한다. 자필로 몇 10부를 등사하여 동호간에 나누어 후세에 남길까 하는 처량한 결론이었으나, 다행히 博文書館 故 盧군의 厚意로 간행케 되었다. 그러나 또 내 교정이 어떻게 까다롭고 改竄이 어떻게 심했던지, 조판을 뜯어고치기가 무릇 몇 10面 수백行, 인쇄소에선 아주 골머리를 앓고 몇 번이나 일이 중단되었다. 간신히 일을 강행하여 드디어 千餘面의 큰 책을 完刊했음은 지금에 생각해도 다행한 일이다. 교了가 되자 나는 또 그「序」에 고심했다. 저간의 온갖 腐心과 胸中에 깊이 축적된 비분․感慨한 생각을 어떻게 표현할까? 때는 일제의 포학 最期라, 맘대로 쓸 자유는 애초에 없었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며칠을 苦吟한 끝에 겨우 一文을 草했다. 나로서는 실로 感懷깊은, 고심의「名文」이었다. 그 序끝에「庚辰小春」이란 年․月이 적혀 있다. 물론 그 완성된 때(1940년 12월)를 기념키 위함이나, 하필「庚辰」임은 그 당시 敵治연호를 굳이 피하려한 고심이요,「小春」은 음력「10월」의 뜻 외에 내딴에는 당시 이로써 우리 민족문화의「작은 봄」이 온 것, 곧 저 셸리의 시「西風賦」의 끝줄
오오, 바람이여, 겨울이 오면,
봄인들 어이 까마득하리?
의 뜻을 겸한 것이었다.
지금도 나는 이 著의 초간본을 대할 때마다 悲喜가 交集하는 동시에, 가끔 표지를 쓰다듬으며 序와 범례와 引書目을 읽어보며 세밀한 證釋을 다시 검토해 보다가 종종 회심의 미소를 짓곤 한다. 책이 처음 나온 날 첫 책을 論敵 소창씨에게 부처「증정」했고, 제2․3책을 爲堂과 六堂에게 보냈고, 다음 한 책씩은 아내와 두 딸에게 주었다. 六堂은 내 책을 몹시 높이 평가하여 뒤에「해방 전과 뒤에 간행된 저서로 후세에 전할 것은 오직 梁某의「古歌연구」가 있을 뿐」이라고 某 史학자에게 述懷하더라 傳聞했고, 爲堂은 그의 생애의 作중에도 가장 苦心․得意의 역작「사뇌가證釋 題詞」長詩 5수를 내게 써주었다. 지금도 나는 각 대학에서 古歌의 강의를 시작할 때마다 그「題詞」를 먼저 읊고 풀이한다.
「詞腦歌 證釋」題詞 五首 <爲堂 鄭寅普>---생략
이 책의 公刊은 내딴에는 실로 快心事였고, 생애의 悲願의 一半이 그로써 이뤄진 셈이었다. 이로써 우리 고전문학의 最古源流가 우선 그 텍스트만이라도 밝혀졌음은 민족적으로도 다행한 일이다. 더구나 내가 이 著에서 주력한 것은 사뇌가 본문, 곧 이두문의 해석 외에 그 證釋의 과정을 통하여 古語․古文法(특히 조사의 분석적 연구) 또 차자로 쓰여진 古史 語彙, 곧 國名․地名․人名․官名 기타를 모조리 해명한 일이었다. 이 몇 가지 점에 있어 나는 이 책이 근세 未曾有의 「鉅著」임을 믿었고, 우리 민족과 문학이 있는 한 길이 후세에 전할 문자라고 자긍하고 확신했음과 같은 저자 자신의「題語」를 붓으로 썼다.
「詞腦歌 箋注」題語
秦延公設堯典, 但說粤稽古凡三萬言, 前輩以鄴下賣驢之諺譏之○見日知錄, 某之此著, 亦幾近之矣. 第所說關於先民, 立言不爲一時, 不忍自棄, 聊公同好. 若夫條貫乎叢襍, 得魚而忘筌, 則又有竢乎後來之君子云.
(秦延公이「堯典」을 풀이할새 다만「粤若稽古」를 해설함에 무릇 三萬言이라, 前輩가「鄴下 사람의 나귀 파」는 속담으로 빈정댔으니(「日知錄」에 보임), 某의 이 著가 또한 그와 비슷하다. 그러나 풀이한 바가 선민에 관하였고 말을 세움이 한때를 위한 것이 아니어서 차마 스스로 버리기 어려워 애오라지 同好간에 공표함이니, 이에 제법 덤불로 뒤섞인 것을 가지로 꿰고 고기를 얻은 뒤에 통발을 잊음은 또 뒤에 오는 분들에게 기다림이 있다 하노라.)
일제말기에 이어 그 속편인 고려가요의 주석을 써서 지상에 연재했고, 해방후「麗謠箋注」(1947)란 제호로 정리․간행했다. 그러나 이 두 著는 모두 다만 텍스트의 古語學的 訓詁․주석에 그쳤을 뿐, 그보다 더 요망되는, 古歌謠를 통한 문화사적 고찰과 그 사상적․이데올로기적 해명에는 손이 미치지 못했다.「여요전주 序」의 끝절 -
<따라서 이 原․續 양편에 있어서의 저자의 학적 노력 - 그 의도와 성과는 순수한 어학적․고증학적 태도를 벗어나지 않았고, 또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이상의 것, 다시 말하면, 재료의 음미나 평설 - 그 비판적인 견해․주장 같은 것은, 서설 기타에 비록 약간言을 붙였으나, 단순한 재료의 소개에 그쳤을 뿐, 總히 이후에 補足․완성될 제3권에 미룰 수밖에 없다.>
이래 또 十有五 星霜, 나로서는 이 학적「약속」에 의해서도 단연 괄목할만한 학문적 진전이 있어 端的으로 문제의 그「제3권」을 내놓아야 할 터인데, 復稿만 아스름한 채로 조그만 持病을 핑계로 하여 牛步遲遲, 지금껏 새 획기적인 著作을 이어 내놓지 못함이 자못 부끄러운 일이다. 한편 또 나의 숨김없는 느낌을 한 가지 피력하자면, 그후 신진의 多士들이 斯學의 다른 여러 분야에서는 상당히 많은 勞作을 보여주나, 이 방면의 蘊奧 - 곧 나의 해독과 證釋에 대하여는 아직 半句․集字도 수정해주는, 참으로 快心․點頭되는 새로운 按說이 나타나지 않음이 유감이다. 비록 약간의 부분적 언급이 혹 없음이 아니나, 대부분은 나의 舊見에 색다른「칠」을 하여 꾸민「친 설」이거나, 그렇지 않으면「산밑에 지나가는 빗소리」일 뿐, 가장 翹望되는「새 事實의 발견」이 좀처럼 눈에 뜨이지 않음이 섭섭하다.
끝으로 나의 조그만 學的 路程에서 얻은 몇 가지 感懷를 붙여두자. 무릇 학문의 길에 있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본다 -「願」과「재주」와「끈기」. 그 중에 첫째「願」은 그야말로 多生의 宿因이요 세째「끈기」는 애초부터 天質이니 무가내하지만,「재주」는 오히려 修練에도 유관한 일이매, 나는 저「莊子」의 名篇「庖丁解牛」의 章을 미상불 三復하는 所以이다.
<始臣之解牛, 所見無非牛者, 三年之後, 未嘗見全牛也>
내가 맨처음 古歌를 풀 떄에 눈에 보이는 것이 모조리 古歌 아닌 것이 없었고, 三년 뒤에는 일체의 借字(古歌․地名․人名 등)가 모두 한번 보매 쪽쪽이 갈려짐을 체험했다. 이것은 진정 나의 전공으로서 내가 實感한, 좀 지나친 自負이나, 내딴엔 속임없는「告白」이요,「자랑」이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그때만 못한 형편이니,「19년 뒤에도 칼날이 새로 숫돌에서 나온 것 같다」는 庖丁의 말에 부끄럽기 그지없다. 역시「끈기」가 쇠해가는 탓일까, 혹은「시대」가 흐르고「철」이 달라졌음에 의하여 나의「願」과 생각이 구태여 그때만큼 비장하고 오롯하지 못한 때문인가. 그러나 아직「三分人事七分天」으로 諦念될 만큼 老頹하진 않았으니, 다시 한번 奮迅을 기약할밖에.
梁柱東의 <增訂 古歌硏究>에서
'다시 읽는 텍스트 > 옮겨온 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봉준 공초 (0) | 2016.10.12 |
---|---|
김구의 '삼천만동포에 읍고함" (0) | 2016.09.11 |
무장 동학도 포고문 (0) | 2015.06.29 |
물마시기 혹은 술붓기 - '열하일기' 중에서 (0) | 2014.04.29 |